특집 | 불교와 민속의 만남

1. 무속신화, 그리고 무속과 불교

신화는 이야기의 원형이며, 문화·예술의 원형이다. 그 원형 속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신화 전승 집단의 원초적·근원적 사유와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인간의 삶 속에서 각종 문화전통으로 전승되고 있다. 한국에는 많은 신화들이 전한다. 아마도 한국만 한 신화의 나라, 신들의 나라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까지 그랬다.

21세기,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한국의 신화는 그다지 많은 편수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이런 신화가 있었어요?”라며 신기해한다. 무속신화를 접하면서 그렇게들 말한다. 우리는 정작 한국의 신화 하면 ‘단군신화’나 ‘주몽신화’를 떠올리며, 고대국가를 건설한 시조들의 이야기 정도만을 짐작할 따름이다. 무속제의(巫俗祭儀), 이른바 굿이 연행되는 현장 속에서 무당이 구연하는 무가(巫歌) 중, 신들의 내력을 담은 서사무가가 곧 무속신화(巫俗神話)이다. 한국의 신화체계(mythology)는 국가를 건설한 시조왕의 이야기인 건국신화(建國神話)와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인 신들의 내력담인 무속신화, 이 양 체제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건국신화는 몇 편 전승되지 않지만, 무속신화는 우리의 민간 종교 체제 속에서 꽤 많이 전승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는 실제 신화로서 기능을 오랫동안 수행하지는 못했다. 서양의 문화·예술의 전범으로 칭송받고 특권의 지위를 누려왔지만, 온전한 신화의 기능보다는 그 같은 문화적 자양분이나 원형으로서 특화되었을 뿐이다. 신화는 문학에서 말하는 허구적 이야기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신화는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론적 논리와 인식 틀을 제공하며, 인간들의 삶 속에서 신앙시되거나 혹은 신성시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전승 집단과 구성원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야기 문화의 원형으로 특화된 그리스, 로마 신화는 기독교가 서구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을 때 신화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는 없었다.

반면, 한국의 무속신화는 20세기 초반까지도 여전히 신화로서 온전한 기능을 수행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오세아니아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같이 오랜 기간 외래 종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명의 발전 속도가 특정 단계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고대국가 시기에 일찌감치 불교나 유교를 수용했고, 중세를 거치는 동안 유불(儒彿)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무속신화는 20세기까지 신화로서의 기능을 당당히 수행하면서 존재해 온 것이다. 지금 그 위세는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무속신앙의 영역 속에서는 신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무속신화는 크게 두 종교와 만났다. 하나는 삼국시대에 전파되어 고려시대까지 국교로 자리잡은 불교, 또 하나는 조선시대 강력한 통치 이념이자 세속적 윤리 규범으로 자리 잡은 유교이다. 무교(巫敎)는 불교나 유교와 같이 경전과 의례 등 종교적 장치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고등 종교와 힘든 경합을 해야 했다. 한국종교사의 흐름 속에서 의미와 파장을 남긴 종교문화를 역사적으로 배치하면, ‘무속―불교―유교―서학―동학―개신교’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1) 특정 시대 지배적인 종교사상과 종교문화가 있기 마련이지만 각 종교들은 혼합(syncertism)되기도 하고 혼합에 반대(anti-syncertism)하기도 하면서 관계망을 형성하고 존재했다.

유교와 무속의 관계는 편안하지 못했다. 아니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무속은 거의 박해 받는 수준에 이른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를 비롯해서 많은 왕들이 무당 주재 제의를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이를 금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기록을 보면 무속제의를 음사로 규정하고 백성을 현혹한다고 해서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쫓는 일이 빈번하다. 세종 때에는 특히 무속 의례나 무당에 대한 금기가 많았다.

세종 11년에 황렬(黃烈) 성수신(成守身)이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는데, 그때 요무(妖巫)들이 도중에 많이 모여서 사람들의 화복을 말하여 사녀(士女)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공이 경사(經史)를 열거하면서 소를 올려 모두 성 밖으로 쫓아냈다. ―〈大東韻府群玉〉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수차례 무당 추방령을 내렸다. 더 나아가 세종 26년에는 의정부에서 음사를 금하는 법령 8개 항목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세종뿐 아니라, 성종도 재위 기간 중 여러 번 무당들을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쫓았다. 중종, 숙종, 정종, 순종 등 조선시대 전 기간에 어명으로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쫓았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2)

유교와 무속의 관계와 반해 불교와 무속은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물론 불자들 중에는 무속에 대해 반대 논리를 펴는 자도 없지 않았다.3) 하지만 민중들의 현실 삶과 밀착된 무속은 민중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불교와 공유할 영역이 있었으며, 유교와 대척 관계에 놓인 공동 운명 탓에 서로 어울릴 수 있었다.

불교와 어울리고 불교를 수용한 무속은 제의 도구에서부터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흔적을 지금도 남기고 있다. 무속신앙 체계 속에서 숭배되는 무속신들의 내력을 다룬 무속신화에서도 이 같은 사정은 잘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대표적 무속신화들에 나타나는 불교적 양상과 그 특성을 살필 것이다. 무속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이야기이다. 무속신화 속 불교적 세계관과 가치가 민중들의 삶과 그들의 욕망과 어떻게 만나 변주되고 있는지를 신앙의 대상 신, 세계관, 민중들의 욕망의 세 차원에서 살펴볼 것이다.

2. 한국 대표 무속신화 〈제석본풀이〉와 제석신

전술했다시피 무속신화는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되지 않았다. 무당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하며, 문자로 기록된 경전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동일한 표제의 무속신화라 하더라도 전승 과정에서 구연자별, 지역별로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특정 지역에서만 전승되는 무속신화가 있는가 하면, 광포의 무속신화도 존재한다. 한국에 전승되는 무속신화 중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전승되는 두 편이 있다. 바로 〈제석본풀이〉(혹은 〈당금애기〉)4)와 〈바리공주〉이다. 〈바리공주〉는 제주도에서는 전승되지 않음에 반해 〈제석본풀이〉는 제주도를 포함하는, 명실상부 한국 전 지역에서 전승되는 무속신화라 할 수 있다.

이 무속신화는 재수굿이나 안택굿 등에서 필수적으로 연행되고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핵심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

① 스님이 서천서역국에서 당금애기를 만나다.
② 스님이 당금애기에게 시주하라고 하다.
③ 스님이 자루를 찢어 쌀을 흘리자 당금애기가 일일이 주워주다.
④ 스님이 당금애기에게 하룻밤 유할 것을 요구하여 같은 방에서 자다.
⑤ 스님이 거부하는 당금애기를 설득해서 동침하다.
⑥ 스님이 다음날 박씨를 주고 떠나다.
⑦ 당금애기가 임신하자 오라비들이 작두로 죽이려 하다가 어머니의 만류로 뒷동산 돌함 속에 가두어 굶겨 죽이기로 하다.
⑧ 당금애기가 산속에서 아들 삼태를 낳다.
⑨ 당금애기의 어머니가 딸과 손자들을 집에 데리고 오다.
⑩ 당금애기가 남편 없이 아들 셋을 키우다.
⑪ 아들들이 당금애기에게 자신들의 출생에 관해 묻다.
⑫ 당금애기와 아들들이 박씨 줄을 타고 스님을 찾아가다.
⑬ 스님이 아들들을 시험하여 혈육임을 확인하다.
⑭ 스님이 당금애기와 아들들에게 신직을 주다.

이 신화는 제석신과 삼신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이야기 속의 여자 주인공은 당금애기인데, 신격인 스님과 만나 임신하고, 지아비 없이 홀로 출산과 양육을 하는 대견한 여성이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과업을 완수한 당금애기는 아이를 점지하고 보호하는 삼신(할머니)이 된다. 제석은 당금애기의 남편인 스님을 가리키기도 하고, 스님과 당금애기 사이에 태어난 삼형제를 가리키기도 한다.6)

〈바리공주〉의 바리공주가 ‘죽음’의 신이며 이 신화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제석본풀이〉의 주인공들은 ‘삶’ 혹은 ‘출산’의 신이며 이 신화는 삶과 다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존재물들의 근원적 문제인 ‘생’과 ‘사’를 다룬 이 두 편의 신화가 한국의 대표적 광역 신화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속신화에서 그 근본을 풀고 있는 제석신은 어떠한 신격일까? 무속 관련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을유(乙酉)년에 난곡(蘭谷)이란 호를 가진 자가 지은 《무당내력(巫堂來歷)》이 있다. 유사한 내용의 두 책을 합본한 이 책의 저자나 저작 연대는 정확히 고구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대략 1825년 혹은 1885년을 저작 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무속제의의 제차(굿거리)가 소개되고 있다.

[작은 책] 1.악공 2.감응청배(感應請陪) 3.제석거리 4.별성거리 5.대거리 6.호구거리 7.조상거리 8.만신말명 9.축귀 10.창부거리 11.성조거리 12.구릉 13.뒷젼

[큰 책] 1.부정(不淨)거리(不精으로 되어있으나 오기로 추정됨) 2.제석거리 3.대거리 4.호구거리 5.별성거리 6.감응청배 7.조상거리 8.만신말명 9.구릉거리 10.성조거리 11.창부(唱婦)거리. 12.축귀(逐鬼) 13.뒷젼

작은 책과 큰 책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제차 역시 비슷한데, 가끔 순서가 달라지는 것은 각 거리를 그린 다음 이를 모아서 묶는 과정에서 생긴 오차로 본다.7)

굿의 진행 과정에서 신을 청할 때 일종의 서열이 높은 신 내지 큰 신들을 먼저 굿판으로 초대를 한다. 부정거리나 감응청배는 일종의 굿을 여는 모두 격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굿판이 벌어지는 장소를 정화하고, 성령 감응을 부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본격적으로 굿판이 벌어지는데, 이때 가장 먼저 행해지는 제차가 바로 제석거리이다.8)

무속에서 제석은 이렇듯 최고의 신격으로 숭배되는데, 그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무당내력》에 따르면 단군을 삼신제석이라고 하며, 자식을 점지하고 유아를 보호하는 신이다. 또한 곡물을 주관하는 생산신이기도 하다.9) 《조선무속고》에서는 제석신은 ‘불속(佛俗)’에서 유래한 것이라 못 박고, 그 원인이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찾고 있다.10)

원래 제석은 불교신인 ‘제석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석천은 도리천의 왕이고 도리천은 인도 수미산(須彌山)에 있다. 그는 사천왕(四天王)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하는 일을 한다.11) 원의미의 제석과 무속신화에서의 제석은 분명히 다르다. 다양한 신격이 존재하는 한국의 무속에서 생과 생산을 관장하는 절대신을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절대신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신직을 수행하는 신격의 절대화와 신성화는 아예 제석을 부처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강릉 지역에서 전승되는 〈당금애기〉12)에서는 ‘하늘의 석가시준님’이 ‘개비랑국 매화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석가시준님은 세상에 자손을 점지하고 명과 복을 주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다.

3. 무당 조상신 이야기 〈바리공주〉와 저승

〈오구풀이〉라고도 불리는 〈바리공주〉는 〈제석본풀이〉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신화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 무속신화는 천도굿(사령제: 死靈祭)에서 불리는 핵심 서사무가이다. 망자를 극락으로 천도시키는 천도굿은 오구굿이라고 하는데, 지방에 따라 다리굿(평안도), 시왕굿(황해도), 망묵굿(함경도), 새남굿(서울), 씻김굿(전라도), 시왕맞이굿(제주도)이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주인공 바리공주는 부모를 회생시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은 후 무조신(巫組神)으로 좌정되어 망자(亡者)의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바리공주〉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3)

① 어비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살다.
② 어비대왕이 복자(卜者)의 말을 어기고 날짜를 앞당겨 결혼하다.
③ 대왕 부부는 공주만 여섯을 낳고 왕자를 낳지 못하다.
④ 어비대왕이 일곱째로 태어난 바리공주를 황천강에 버리다.
⑤ 바리공주가 석가세존의 도움으로 비리공덕 할아비와 할미에게 거두어져 양육되다.
⑥ 대왕부부가 병에 걸려 죽게 되다.
⑦ 청의동자가 아기를 버린 죗값이라 말하고 약과 약수를 먹어야 낫는다고 예언하다.
⑧ 딸들이 생명수 구하기를 거부하자 한 신하가 바리공주를 찾아 나서다.
⑨ 바리공주가 소식을 듣고 궁궐로 돌아가 부모와 재회하다.
⑩ 바리공주가 약수를 찾아 지옥을 통과해서 여행하다.
⑪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령들을 위해 명복을 빌어주다.
⑫ 바리공주가 무장승을 만나 약수를 얻기 위해 나무 삼 년, 불 삼 년, 물 삼 년 해주다.
⑬ 바리공주가 무장승의 요구로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아주다.
⑭ 바리공주가 무장승과 함께 약을 얻어 궁궐로 돌아오다.
⑮ 바리공주가 부모를 회생시키다.
? 바리공주가 어비대왕으로부터 이승과 저승을 관장하는 신직(神職)을 부여받다.

〈바리공주〉는 메시지의 교훈성과 여행담과 통과의례 구조 등 감동과 흥미를 주는 요소가 많다. 이 신화는 국어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고, 동화,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게임 등 각종 콘텐츠로 재창작되어 현대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효’의 주제가 부각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시련 극복과 재생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가장 잘 형상화된 이야기라 하겠다.

〈바리공주〉는 천도굿의 한 거리인 말미거리에서 구연되는데, 말미는 바로 무당의 조상신의 다른 이름이다. 만신, 말명, 말미 등은 바로 바리공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리공주〉는 무당들의 노래이며, 동시에 한국의 모든 여인들의 노래이다. 이 신화에서는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삶의 모든 중요한 의례적 요소들이 모두 나온다. 하지만 이 신화에서 가장 유표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바리공주가 주어진 과업을 모두 완수하고 받게 된 신직은 망자의 혼을 위무하는 임무, 혹은 사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임무이다. 죽음을 관장하는 이 여신은 자신에게 신직을 준 아버지인 오구대왕과 여러모로 대립적인 의미 체계를 형성한다. 부왕은 하늘의 명을 거역하고 딸만 일곱 낳고 결국 죽을병에 걸린다. 반면 바리공주는 공덕을 닦고 효행을 실천하며 아들 일곱을 낳는다. 그리고 지옥을 넘어 죽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가 생명수를 구한다. 부왕은 죽음 앞에서 무능한 존재라면, 딸인 바리공주는 죽음을 초월한 존재인 것이다.14)

바리공주가 지옥을 통과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사령들을 보자, 그들 하나하나에게 명복을 빌어준다. 바리공주의 이 같은 행위는 불교의 신앙 관념과 세계관을 무속에서 흡수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죽음에 관한 관념, 혹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명부(冥府)신앙인 시왕신앙과 결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속의 천도굿에서 십대왕들은 망자의 운명을 정하기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무속의 사후 세계는 불교의 《시왕경(十王經)》에 나오는 십대왕전과 《은중경(恩重經)》에 나오는 지옥의 사상이 무속으로 그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15)

〈바리공주〉의 많은 내용은 기본적으로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승본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지만 출생, 구출, 신직 등에서 불교적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면 태자를 낳는다는 화주승의 꾐에 빠져 바리공주를 낳기도 하고, 바리공주의 태몽에서 부처님과 미륵보살님이 지시해서 바리공주를 낳기도 한다.16) 부왕(父王)이 바리공주를 버리자 그녀를 구원해 주는 인물로 석가세존이 등장한다. 앞의 문덕순 구연본에서는 부모를 회생시킨 바리공주와 그 자식들이 신이 되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리공주 일곱 아들은 저승에 십대왕이 되어 먹고 입게 점지한 후에 바리공주는 인도왕국 보살이 되어 절에 가면 수륙제 만발 공양 받으시고

일곱 아들이 십대왕이 된다는 것은 숫자상으로 명백한 오류이다. 그럼에도 아들 7형제를 십대왕으로 좌정시키는 것은 그만큼 불교적 사후관을 강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결국 무당들의 조상신의 이야기 〈바리공주〉는 불교의 사후관을 적극 수용하여, 망자의 극락왕생을 불력에 의존하려는 무속적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4. 태초의 이야기 〈창세가〉와 새로운 세계의 도래

무속신화들에서 다루는 주된 내용은 신이 아닌 존재 혹은 불완전한 존재가 고유한 임무를 맡고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는 신으로 좌정되는 것이다. 무당이 구연하는 무속신화 중에 이 같은 일반적 서사구조에서 벗어나지만 신화의 참모습을 잘 보여주는 신화가 있다. 세계의 창조와 세계의 기본 구성원들의 최초 탄생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창세(創世)신화가 그것이다. 이 창세신화는 창세신을 모시는 〈초감제〉와 같은 굿거리에서 구연된다.

창세신화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세계관에 관해서 살필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신화가 기본적으로 전승 집단의 사고 체계와 문화 전반에 대한 원형적 토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상기할 때, 특히 창세신화가 갖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신화는 국가의 시조나 종교적 숭배 대상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성신·인간과 동물들의 발생론을 보여주며, 이러한 발생론은 문화의 가장 심층에 자리 잡은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신화에서 다루는 창조 대상들의 발생론은 단순히 초기 자연관이나 생물관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화가 1차적으로 존재론적 발생을 주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문화적 응축물인 신화는 항상 존재론·인식론·가치론의 세 체계 속에서 존재하며 기능한다. 이같이 근원적 세계를 다루고 있는 창세신화를 통해서, 전승 집단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으며 문화적 저층에 깔린 원형적 사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17)

한국의 창세신화의 대표적인 것으로 〈창세가〉가 거론된다.18) 여기서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채록본이며, 핵심 신화소를 고루 갖춰서 전형성을 인정받는 김쌍돌이 구연본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9)

① 천지가 분리되고 미륵(彌勒)이 세상에 출현하다.
② 미륵이 일월 조정, 천체 조정을 수행하다.
③ 미륵이 큰 옷을 만들어 입다. 생화식을 하다.
④ 미륵이 풀메뚜기와 풀개구리에게 물과 불의 근본을 묻지만 실패하다.
⑤ 미륵이 생쥐에게 물과 불의 근본을 물어 답을 얻다.
⑥ 미륵이 천상에서 벌레를 얻어 남녀 인간 한 쌍을 창조하다.
⑦ 석가(釋迦)가 나타나 미륵과 인간세상을 놓고 경쟁을 벌이다.
⑧ 두 번의 내기에서 패한 석가가 마지막 내기에서 미륵의 꽃을 훔쳐 내기에서 승리하다.
⑨ 미륵이 패배하자 석가에게 저주를 퍼붓다 쫓겨나다.
⑩ 석가가 인간 무리 수천 명을 창조하다.
⑫ 석가가 자신의 무리에게 화식(火食)을 선보이다.
⑬ 석가의 무리 중에 화식을 거부한 두 중이 소나무와 바위로 변신하다.

이 신화는 ‘천지 창조’ ‘천체 조정’과 같은 태초의 세계 창조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최초의 인간 탄생, 지상세계의 근원인 물과 불의 근본,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음식문화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창세가〉는 신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카오스(chaos)의 세계에서 코스모스(cosmos)로 전화(轉化)하는 과정, 즉 무질서·균질 상태의 세계에서 질서·비균질적 상태의 세계로 전화 과정20)을 보여준다. 이 신화는 한국인들의 우주관·세계관과 세계 구성에 있어서 중요 가치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절대자 두 신이 인간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대립과 갈등이다. 미륵과 석가는 인간세상을 통치하는 주인답게 신성한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세 차지 경쟁에서 석가는 미륵에게 세 번의 내기에서 모두 패배하지만, 마지막에 속임수를 쓴 석가가 결국 인간세상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세상의 주인이 교체됨은 새로운 세계의 도래 혹은 새로운 문화권의 수립을 의미한다.

 그 예로 미륵이 주인인 시절에는 인간 남녀 한 쌍만이 있었고, 생식(生食)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반면 석가가 주인인 세상에는 인간 무리가 한꺼번에 생겨나고, 화식(火食) 문화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렇듯 인간세상의 통치자 교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지만, 그 시대는 전대에 비해서 비루하고 타락한 것이다. 석가에 의해 세상의 통치권을 상실한 미륵은 도래할 세상에는 “가문마다 기생 나고, 과부 나고, 무당 나고, 역적 나고, 백정 나고……”라는 저주의 예언을 한다.

〈창세가〉는 태초의 천지의 창조, 인간세계의 창조를 설명할 뿐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인간세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는 신화이다. 인간의 세계가 타락하고 인간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인간세상의 원주인인 미륵이 쫓겨나고 속임수를 쓴 부처가 세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현세에 대한 부정,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 신화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무속신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긍정적 세계와 부정적 세계의 대립 체계가 불교의 신인 ‘미륵’과 ‘석가’로 대변된다는 점이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미륵은 현재 천상 세계인 도솔천에 머무르면서 한편으로 천상의 중생을 상대로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을 쌓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장차 머나먼 미래에 그는 인간세상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에 걸친 설법을 베풀어서 마침내 억만 대중이 윤회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할 예정이다.21) 이 미래불, 즉 미륵에 대한 갈망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그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민간의 미륵신앙이 만연한 것은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고단하고 불행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줄곧, 미륵은 자연재해와 질병으로부터 민중들을 구출하는 자이며 풍요와 다산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다.22) 미륵신앙은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 불행한 현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길 바라는 욕망과 결합하여 〈창세가〉와 같은 신화를 산출하게 된 것이다.

5. 맺음말

신화가 오랜 기간 전승 집단에게 전승되고 보존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의 간극과 물리적 조건을 뛰어넘어 본질적인 것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흥미있는 이야깃거리로서가 아닌 사실 너머 존재하는 본질, 즉 전승집단의 진리와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의 응축물로 신화는 존재한다. 우리의 무속신화는 신앙의 대상인 신격의 유래를 이야기로 풀고 있다. 민중들의 삶과 밀착되어 존재하는 이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태초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연결된 삶과 죽음을 환기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북돋았다.

한국에서 무속신화가 이러한 신화적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고 오랜 기간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와의 혼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외래 종교의 유입으로 한국의 토종, 혹은 토속적 신앙이나 문화가 변질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속은 불교와의 어울림을 통해 갱신의 기회를 얻고, 무속과 불교 모두 상호 상승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불교가 전래되어 토착의 무속과 만나면서 종교의 중심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 외형상의 특징이나 장식을 흡수하여 토착화로 나아갔다. 토착문화인 무속은 종교의 중심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 외연적이고 피상적인 특징을 불교로부터 제공받아 자신을 고양시켜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23)

무속과 불교의 이 같은 어울림은 무속신화 속에서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다. 무속제의 속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생산신인 제석신의 이야기 〈제석본풀이〉에서는 불교의 신을 차용하여 무속 신격의 위상을 고양시켰다. 병든 자를 치유하고 망자를 천도하는, 무당들의 조상신 이야기 〈바리공주〉에서는 불교의 세계관을 도입해서 무속에서 주요 관념인 내세, 사후 세계, 사후 관념을 정립했다. 최초의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를 다룬 〈창세가〉에서는 부정하고 타락한 현실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길 바라는 열망을 미륵신앙과 결부시켜 구체화시키고 정당화시켰다. 이처럼 무속신화는 불교와의 교류와 변주를 통해 민간에 각인되고 신성한 이야기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



오세정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 현 한양대학교 학부대학 조교수. 저서로 《한국 신화의 생성과 소통 원리》 《신화, 제의, 문학-한국 문학의 제의적 기호작용》 《설화와 상상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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