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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을 말하다 /지율스님
불교평론 포커스-〈조선일보〉 승소 판결에 부쳐*
[41호] 2009년 12월 01일 (화) 지율스님 천성산 내원사

   

지율스님

〈조선일보〉 승소 판결에 부쳐*


돌아보면 천성산 일을 하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때가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공약집까지 만들어 전국의 사찰에 배포했던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공사 강행을 지시했을 때, 공동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던 환경부 장관이 2박 3일의 환경영향 평가서를 법원에 기습 제출하고, 환경영향 평가를 재실시하겠다고 했던 법원이 그 결과를 바탕으로 돌연 재판을 종결한 후 재판 기록을 파기했다고 했을 때, 10여 개로 중복 지정된 법적 보존지역에 대하여 도룡뇽 한 마리 살지 않는 죽은 산이라고 증언하고, 함께 천성산을 오르며 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도 살아야겠다”며 돌아서 갔을 때, 공동조사의 결과가 그동안 주장과 다른 결과가 나오자 “대부분의 결과가 여기에 맞지 않으니 결과를 여기에 맞추어 주십시오.” 하고 강요하는 속기를 보았을 때…….

가진 사람은 가졌기에 원칙과 약속을 저버렸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지 못했기에 원칙과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그 모든 순간에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세계의 그물이 찢겨져 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의 선택은 제 몫이었고, 또한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3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다시 천성산 문제를 돌이켜 법정에 선 이유는 같은 수순을 밟으며 진행되고 있는 대형 국책사업의 논리 때문이었습니다. 분노를 매개로 정복지의 만행을 정당화하듯, 언론은 다시 ‘한 비구니, 도룡뇽 보호를 위한 수조 원의 혈세 낭비’라는 논리를 되살려 냈고, 정부는 ‘대한민국 발전의 걸림돌, 법치의 이완, 민주주의의 적폐’라는 논리를 되살려냈습니다.

그들은 천성산이라는 아이콘으로 환경문제와 사회문제, 그리고 종교인의 사회참여를 비하하고 불신의 골을 파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밖으로는 500배가 부풀려진 수조 원의 국고 손실을 이야기하고 안으로는 수십억의 보상을 제안하며 절집을 들락거리던 고속철도공단의 이사는 국토해양부 장관이 되어 있었고 속기록을 소각했다고 했던 판사는 헌법재판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누군가처럼 이 세상에 소풍을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성산 문제에서 그들이 몰수하여 간 것은 진실이었고 이반된 것은 인심이었으며 피폐하여진 것은 우리의 산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지마을에 몸을 의탁하고 이름을 숨기면 세상에서 잊혀지고 소용돌이를 벗어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를 염려하며 이제 그만 산으로 돌아가라는 도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00번 이상 기사화되어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사건을 법정에 세웠고 (판결 결과와 관계없이) 소송 과정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냈습니다. 저는 이 소송을 통해 진실은 언제가 밝혀진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500배나 부풀려진 공허한 수치가 가리고 있던 지점과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난 5달 동안 혼자 낙동강가를 하염없이 떠다녔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너져가고 있는 산하를 보며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식 앞에 울지 못하는 부모처럼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들이 지시하고 있는 그 혼란스러운 지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천성산이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저를 불러세웠다면 강은 그 장엄함과 비장함으로 저를 불러세우네요. 계절은 문득 스산합니다.
그동안 소송 진행 과정을 지켜봐주시고 염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비록 나홀로 소송으로 외롭게 법정에 섰지만 도롱뇽 소송의 대변인으로 남은 소임이기도 했습니다.

2009년 9월 2일

도롱뇽 소송 대변인 지율 합장

 

자연의 법과 인간의 법*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도롱뇽 소송의 판사님들에게 아이들이 보낸 엽서를 편집한 영상을 한 편 보았으면 한다. 나는 2년 전 이 영상을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편집하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어른들이 자연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게 아이들은 도롱뇽의 뱃속에 해와 달, 시내와 개울을 그려 넣었다. 자신과 도롱뇽과 자연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눈에 보이는 대로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하였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이 본받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우리가 점서로 알고 있는 《주역》과 《토정비결》은 자연의 순환을 기호화하고 원리화한 것이다. 우리 국기에 태극과 주역의 4쾌가 그려져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이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 까닭이다. 하늘의 원리를 이해하고 땅의 섭리에 순응하여 불처럼 어둠을 밝히고 물처럼 베풀며 만물과 함께 상생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태극기에는 담겨 있다.

외국에 나가 본 일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국토가 얼마나 비옥하며 아름다운 곳인지 알 것이다. 태평양을 옆구리에 끼고 어산물이 풍부한 깊고 푸른 동해가 있고 제주도와 다도해상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남해가, 대륙을 건너다보며 풍부한 생명력을 간직한 갯벌 지대인 서해가 있으며 북으로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굽어보며 백두산이 우뚝 솟아 있다.

다시 백두산을 영봉으로 백두대간이 허리를 곧추고 백두대간은 13개의 정맥과 11개의 강으로 나뉜다. 산줄기의 이름은 강의 이름을 따서 서로 연결되고 시내와 개울은 마을과 마을로 연결되며 강과 바다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도시와 도시, 항구와 항구로 연결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살아오면서 산의 기운을 소중히 하여 그 흐름을 끊지 않았고(쇠말뚝 하나 함부로 박지 않았으며) 뜨겁고 더러운 물을 강이나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30~40년 사이에 이 흐름은 깨어지고 자연에 대한 윤리는 사라져버렸다.

샘과 시내는 말라버렸고 강과 바다는 썩어가고 있고 산은 파헤쳐지고 물길은 끊어졌으며 국토는 동강 나고 이 흐름을 따라 이동하던 생명체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버렸다. 우리 부모님은 이 땅에서 곰과 호랑이를 직접 본 마지막 세대이며 나는 늑대와 여우를 본 마지막 세대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도롱뇽을 마지막으로 본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환경에 대한 법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그 법을 제정한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에서조차 그 환경보호를 개발의 걸림돌로 취급하고 있고, 새만금의 판결문에서 보듯 “자연 또한 소중한 가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이라고 자연의 가치를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로 수식하며 개발을 “균형감 있는 합리적·이성적 접근 방식”이라 빗대고, 환경보호를 “이상에 치우친 감성적인 접근”으로 매도하고 있다. 전원합의체로 간 새만금의 판결문은 적당한 수식어로 가미되어 있어 을숙도 판결문에서는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새만금 판결문은 개발 사업의 날개가 된 셈이었다.

〈새만금 판결문〉
환경이 헌법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 가치이기는 하지만 개발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헌법상의 가치라고 할 것이므로, 반대 의견과 같이 자연환경 보호의 가치가 언제나 개발에 따른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국가정책적인 필요에 따라 대규모의 공공사업이 시행되는 경우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개발과 환경보호 사이의 가치 충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절차와 지혜로운 판단이 요구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견지하여야 할 태도는 균형감 있는 합리적 이성적 접근 방식이지, 결코 이상에 치우친 감성적인 접근 방식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판결문에서 이야기 한 균형 있는 합리적 이성적 접근 방식이란 무엇일까. 새만금, 천성산, 을숙도의 판결문을 비교하여 보면 법원이 환경에 대하여 아무런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모든 법령과 기준을 무시하고 단 하나의 가치만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06년 법원은 세계 5대 갯벌을 매립하고, 국내 최대의 법적 보존지역의 훼손을 용인하며,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를 포함한 3곳의 습지― 생태계의 자궁이라 불리는 소중한 습지를 단 하나의 가치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도롱뇽 소송 판결 직후 ‘2조 날린 도롱뇽 소송’이라는 〈조선일보〉의 기사는 법원의 속내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냉소적인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서 “인간이 기계처럼 사용되기 위해서 긁어모으고 있는 이 비참을 생각하면 나는 영원히 운다 해도 다 울 수 없다.”고 한 키르케고르의 말이 생각났다.

사회의 발전과 진보의 기준을 경제와 군사력에 국한시키며 성공의 가치 척도가 부의 축척과 다른 사람의 위에 있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생각은 없다. 물질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채워 넣어도 채울 수 없는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이 욕망을 자제하고 다스리는 법을 가르친다. 사회가 부패하고 범죄와 질병이 늘어나는 이유는 빈궁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시대정신의 몰락과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수자의 영지적 능력의 부재, 그리고 균등 분배의 원칙이 깨어지고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며 사치와 음란함이 문화로 포장되며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경쟁의 대상이 될 때이다.

민란과 혁명과 전쟁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때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넘보는 것도 바로 이때다. 자신이 태어난 땅의 문화와 역사를 돌보지 않는 민족이 겪어야 하는 비운은 끝없는 외압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36년간의 긴 일제의 압정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미국의 문화·경제 식민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부강해지지만 국민은 가난하고 국방 예산과 군사력은 점점 늘어나지만 국민은 불안하며 법령은 자꾸 늘어나지만 부정과 부패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천성산 문제에 있어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70% 이상이 반대하자 정부에서 2조 손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증빙될 만한 한 장의 자료도 없이 만들어진 2조 5천억 원이라는 손실에 대하여 언론이 400번이나 앞다투어 보도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공약을 남발하며 경제라는 장막으로 눈을 가려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정치적 실상과 비슷하였다. 설령 미국의 외압이 아니더라도 경제식민지라고 하는 말은 이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과 일치한다.

나는 사람들이 2조 5천억 원 손실 운운하며 비난할 때마다 바다에 가라앉은 소금 맷돌의 전래동화를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고 있는 배와 함께 침몰하지 않으려면 경제(이익)라는 이름으로 구르고 있는 맷돌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탐욕을 부르는 재앙의 근원이 바다에 빠지고 난 뒤에도 맷돌은 바다 깊은 밑에서 멈춤이 없이 돌며 더 너른 세상에 소금을 보낸다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편견은 아이들의 교육과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번 여성학회의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어머님들의 관심사는 어제나 ‘우리 아이’였다. ‘우리 아이’라고 하는 것이 차별화된 ‘내 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 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와 옆집 아이, 서울 아이나 촌 아이, 우리나라의 아이와 멀리 아프리카의 아이, 아이는 모두 같은 아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 사회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과 미래의 아이들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을 ‘우리’라고 하는 우월주의 속에 가두어 둘 때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만나야 할 이웃과 세계에 대한 관계성을 잃어버리고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 속에 들어앉아 자기만의 세계에 탐닉하게 된다.

10억의 10억 승이라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어느 한 별이 태어나는 것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확률이 더 높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6개월이 되면 이가 나고 돌이 되면 걷기 시작하며 엄마 아빠를 부르고 두 살이 되면 혼자 밥을 먹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다. 그것은 교육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의 발달에 있어 내 아이와 이웃 아이의 차이는 참으로 근사하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글을 배우고 초등학교에 가서 지식과 원리와 사회생활을 위한 규범을 익히게 된다.

이러한 성장 과정은 아이들이 세상의 질서에 눈을 뜨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중요한 순간으로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럽게(저절로) 눈떠야 하는 이 시기에 어른들의 편견에 치우친 교육과 간섭이 시작된다. 최악의 사건은 성장의 속도에 우열의 성적표가 매겨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월주의는 아이들에게도 전염되어 아이들은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대하면서 주변 환경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인다. 흙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더러운 것’이라고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죽어가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아이들의 불성이며 영성이다. 우리의 잘못된 교육 방법으로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병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을 강가와 들판으로 나가게 하고 자연을 느끼고 호흡하게 해야 한다.

가장 큰 불행은 밤마다 수없이 많은 반짝이는 별이 나를 굽어보고 있지만 고개를 들어 보려 하지 않고 아침마다 어김없이 황금빛 태양이 문밖에 서성이지만 맞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나를 영원한 공간으로 분리하여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 사물에 현혹되어 욕망의 추구에 마음을 달리게 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 우리에겐 자신의 존재가 완전체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과 자신이 태어난 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조우하는 개오(開悟)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이 견고한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텅 빈 관계의 세계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누누이 밝히고 있다.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누군가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보다 더 긴밀하게 자연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며 이 관계의 줄은 팽팽하게 모든 생명과 무생물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관계의 줄을 잘 이해하였던 옛사람들은 하늘의 운행을 보고 천시를 정하고 땅을 보고 절기를 정하였으며 음양의 조화를 보고 예악과 법도를 만들고 도롱뇽이 알을 낳는 모습을 보고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였으며 새들의 울음소리로 길흉을 예견하였다.

원리를 이해 못 할 때 인간은 신을 찾았고 신은 대체로 하늘과 산상에 있었다. 자신의 민족과 함께 40년 동안 사막을 방황하던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를 받았고, 싯다르타는 왕좌를 버리고 설산에서 6년의 고행을 했다. 마호메트는 사막에서 무수한 별의 운행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의 민간에는 보름밤 목욕재계를 하고 산이나 호숫가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풍속이 있었다. 자연에서 멀어진 현대인에게는 미신이나 전설의 고향처럼 들리겠지만 자연을 모성적으로 받아들인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하여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정화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보름 밤 깊은 산속이나 호숫가에 가보면 낮에 형상으로 가려져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아름다움과 만나게 된다.

영감은 찰나적인 것이며 자연관의 관계를 깨달아 가는 데서 생겨난다. 불교 수행의 첫걸음은 올바로 보는(正見) 것에서 시작하지만 깨달음의 내용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도리이다. 불을 지피다가, 바람이 댓잎을 흔드는 소리에,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확연하게 깨닫고 개오하게 된다.

신란은 유형지에서 “이 목숨 잠시라고 생각하면 햇빛에 선 칼날의 진홍빛 번쩍임 견디기 어려워라”고 노래하였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의 유희 속에 본 칼날의 번뜩임과 같은 순간이다. 일생을 통해 단 한 번이라도 이 번쩍임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면, 삶과 죽음이 그리고 슬픔이 자연 그 자체의 빛과 함께 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새만금과 천성산과 을숙도의 판결 결과는 이 시대를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자연권 소송에서 법정에 선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이 사회이며 판결의 결과는 자연의 위기가 아니라 이 사회의 위기이며 자연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위기이다.

모든 노력을 경주한 후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법에 의지했던 것은 법이 자연적인 규칙이며 사회의 준칙으로 평등하고 이치에 맞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법이 약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 기준인 ‘숨겨진 현자의 돌’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이 정의한 것처럼 숨겨져 있는 현자의 돌이란 ‘자연의 법’이었고 인간의 법정에서는 ‘힘과 지배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카프카가 말한 상위계급의 비밀을 위하여 법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법관들이 상위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위의 법은 상위의 계급이 가지고 있으며, 부조리는 때때로 권력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규제와 금령이 많아질수록 민초들은 더욱 가난하여지고 법령이 정비될수록 도적이 더 늘어난다고 하는 옛말이 시세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이 소송을 통해 보았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최근 사법고시생들의 면접에 법보다 주먹이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질문의 요지는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있다. 이 질문 속에서 법원은 자신들의 심리를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진정성이 질문의 관점이었다면 그들은 법보다 주먹이라고 답한 사람들을 오답이라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법정에 서 본 경험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이 있기에 주먹이 운다.”고 답할 것이다.

어찌 된 연유인지 새만금, 천성산의 대법원의 판결이 끝나기가 무섭게 절망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운동의 총체적 실패’라고. 함께했던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위기와 총체적 실패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것은 우리의 전의이고 이 사회이다. 십분 양보하여 이 위기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우리가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은 변할 것이다. 이 위기는 선택의 위기이며 이 시대와 우리를 시험하는 위기이다. 위기가 기회를 낳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용기와 지혜, 믿음과 우정의 고리가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아픔을 통하여 자연으로 초대되었고 우리 마음속에 일어난 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자연의 부름에 대한 답이었다.

정답은 없었고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러나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난 작은 불꽃들을 보았다. 그것은 캄캄한 세상에 피어난 불꽃이며 불씨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그것이 새만금과 천성산 을숙도가 아픔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 이유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둠 속에 밝혀진 이 불꽃은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시점과 좌표를 새롭게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대로 자연 파괴를 계속한다면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은 우리 아이들과 미래의 아이들이 치를 질병이다. 에이즈, 광우병과 조류 독감, 아토피, 천식, 암, 기형…… 슬프게도 이 모든 병들은 우성인자로 자손에게 증여되고 머지않아 우리 후손들은 우리 시대가 만들어 놓은 이름 모를 질병들과 아픈 지구의 치료법을 개발해 내는 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재앙의 징조들은 무수히 많으며 이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할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제 새만금과 천성산, 을숙도의 아픔을 다시 바라본다. 그 아픔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이다……. 그 순간이 아픈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대안은 없다. 그 자체가 질문이고 답이었기 때문이다. ■

 

지율스님1992년 양산 통도사에서 청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8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수행을 시작한 후, 2000년부터 천성산의 '산감' 소임을 맡았다. 고속철 건설을 위해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 공사가 계획되자, 이를 반대하여 2003년 2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후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친 단식투쟁을 통해, 환경에 대한 관심을 세상에 일깨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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