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창간 10년 기획 | 불교학 연구 최근 10년의 성과와 과제

1. 글을 시작하며

인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남의 논문을 분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논문을 분석하여 연구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또 그 의의를 정확히 평가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날 자신이 쓴 논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팽개치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논문을 썼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남의 논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몇 달 전에 필자는 지난 10년간 발표된 한국불교사 논문들을 정리하여 그 연구 경향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게 되었다. 평소 부족한 이해력과 필력으로 자책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주제임을 깨닫고 여러 차례 거절하였으나 이런저런 인연으로 부득이 글을 떠맡게 되었다.

한국불교사의 범위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로부터 현재까지 한국불교와 관련된 직간접적인 모든 역사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 연구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불교 그 자체의 사상적 변화상을 분석할 수도 있겠고, 사회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를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점이든 한국불교를 다루고 있는 모든 논문을 본 글에서 다 다룰 수는 없다.

따라서 지난 10년간 쟁점이 되었던 주제와 박사논문, 그리고 연구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논문을 중심으로 시대별로 구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사의 중요한 연구 성과임에도 본 글에서 다루지 못한 논문이 많이 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연구자의 이름에 존칭은 생략하였으며 직명은 글을 작성하는 현 시점에 기준을 두되 불분명한 사람은 출신학교를 기입하였다.

2. 삼국·통일신라시대

1) 고구려불교

삼국시대 불교사는 한국불교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연구되었던 분야다. 그러나 고구려불교는 그 자료의 빈약성과 분단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별로 연구되지 못한 미개척 분야였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이 시대에 대한 연구 논문이 여러 편 발표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 대표적인 연구자는 정선여(충남대 강사)이다.

그녀는 〈고구려 승려 의연의 활동과 사상〉(《한국고대사연구》, 2000)을 비롯하여 몇 편의 고구려불교사 소논문을 발표하고 이를 종합하여 〈고구려 불교사 연구〉(박사논문, 2005)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이 논문은 그간의 고구려 불교사의 연구를 총정리하면서 시기별로 나누어 고찰하였는데, 4~5세기 불교의 수용과 교학의 발전, 6세기 승관제의 성립과 지론종의 수용, 7세기 도교의 수용과 불교 억압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러한 종합적 고찰은 향후 고구려 불교사 연구에 밑거름이 될 것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연구 논문으로는 박윤선(숙명여대 강사)의 〈고구려의 불교 수용〉(《한국고대사연구》, 2004)이 주목된다. 고구려가 불교를 수용한 루트를 만주 집안 지역과 대동강 유역으로 나누어 그 두 지역의 불교를 분석하여 고구려 불교에 접근하였다. 집안 지역의 불교는 현세이익적 성격, 계율 중시, 반야경 유행으로 파악하였고, 대동강 유역은 정토신앙, 격의불교, 계율 중시, 반야경의 유행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부족한 자료를 지역적으로 나누어 고찰한 것으로 고구려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승랑에 대한 새로운 연구 논문이 김성철(동국대 교수)에 의해 발표되어 고구려 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는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보조사상》, 2007)와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고유사상〉(《불교학연구》, 2007)이라는 두 논문에서 승랑을 지나치게 격상하거나 격하하였던 그동안의 국내외 연구 경향을 비판하고 문헌에 의거한 객관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2) 백제불교
백제불교 연구 역시 2000년 이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경철(연세대 강사)의 〈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박사논문, 2006)과 길기태(국가기록원)의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 연구〉(박사논문, 2006)이다. 조경철은 백제불교의 수용 시기, 대통사의 건립, 법화신앙 등에 대해 시기별로 차례로 고찰하였다.

그 가운데 웅진에 있던 대통사를 양무제의 연호에서 비롯된 사찰로 보았던 기존의 견해를 비판하고 《법화경》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아들 대통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논증함으로써 백제불교의 신앙이 법화신앙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사택지적비의 주인공 사택씨의 법화신앙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는데, 7세기 초에 살았던 사택지적의 이름인 지적을 《법화경》에 등장하는 지적보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백제불교의 특색으로서 법화신앙을 주장함으로써 후술하는 바와 같이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그리고 길기태는 백제 사비시대의 신앙 유형을 분석하였다. 그는 불교신앙의 국가적 전개에서 석가불신앙과 미륵신앙과 천신신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사회적 확장에서 법화신앙과 약사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백제불교에 대한 최고의 논쟁은 2007년에 《대승사론현의기》의 찬술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 논쟁은 최연식(목포대 교수)의 〈백제 찬술문헌으로서의 《대승사론현의기》〉(《한국사연구》 제136집, 2007)로부터 비롯되었다. 최연식은 중국 찬술로 알려져 있던 《대승사론현의기》를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백제 찬술로 주장하였다.

그 주요 근거 중의 하나는 《대승사론현의기》에 등장하는 ‘보희연사기원운공(寶熹淵師祇洹雲公)’에서 보희가 2000년에 발견된 백제목간의 명문인 ‘보희사’의 보희를 의미하므로 백제인이라고 본 점이었다. 이에 대해 김성철(동국대 교수)이 반론을 제기하여 논쟁이 본격화되었는데, 그는 〈《대승사론현의기》는 백제에서 찬술되었나》(《한국사연구》 제137집, 2007)에서 《대승사론현의기》에 오자가 많다는 점을 들어 ‘보희연사(寶熹淵師)’를 ‘보량법사(寶亮法師)’의 잘못된 표기로 보았다.

그럴 경우 중국 남북조 시대의 중국승려인 보량(442~507)과 그의 제자 법운(467~529)으로 볼 수 있으며 《대승사론현의기》에 소개된 내용과 사상적으로도 유사하므로 중국 찬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최연식이 〈《대승사론현의기》 백제찬술 재론〉(《한국사연구》 제138집, 2007)에서 재반론을 펼쳤다. 이 논쟁은 2007년 불교사 연구자들의 화두가 되면서 백제불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 후 최연식은 2009년에 《(교감)대승사론현의기》를 책으로 출간하여 그 해제에서 백제 찬술을 거듭 주장하였다. 만약 《대승사론현의기》가 최연식의 주장대로 백제 찬술이라면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저술로서 백제 불교사상 연구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기대된다.

백제불교에 대한 역사적 사건이 2009년 1월에 발생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총 193자의 사리봉안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때의 발견은 언론에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전 국민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사리봉안기 속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벌어진 학자들 간의 논쟁에 인터넷을 중심으로 아마추어 역사가들까지 가세하며 흥미를 더하였다. 그 논쟁의 최대 쟁점은 미륵사 창건을 둘러싼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무왕의 여인 선화공주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에는 ‘아백제왕후좌평사택적덕여(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 즉 백제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믿어 왔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날조된 허구라거나 무왕의 부인은 여러 명으로 그 중의 한 명이 선화공주라는 이야기까지 많은 추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불교사적으로 주목되었던 것은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두고 벌어진 김상현(동국대 교수)과 조경철(연세대 강사)의 논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경철은 이미 선행 논문에서 미륵사는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조화를 이룬 사찰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 이번 사리봉안기에서 법화신앙자라고 여겨지는 사택씨가 왕후로서 등장한 점을 들어 〈백제 익산미륵사 창건의 신앙적 배경〉(《한국사상사학》, 2009)에서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비판해온 김상현은 사상사학회와 고려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법화신앙을 그 배경으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고 미륵사의 3원 가람은 미륵삼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였다. 향후 백제불교의 신앙적 특징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3) 신라불교
신라불교는 근대 불교사학이 성립된 이래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어 온 분야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도 점점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도 계속 이어져 2000년대에도 원효, 의상, 원측에 대한 박사논문이 발표되었다. 석길암(금강대 연구교수)은 〈원효의 보법화엄사상 연구〉(박사논문, 2003)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여 원효의 화엄사상을 조명하였다. 그는 원효의 사상이 《기신론》에 기초해 있으며 화엄관 역시 기신론 사상에 기반을 둔 ‘보법(普法)’ 화엄사상이라고 규정하고 그 특징을 논하였다. 그리고 원효의 화엄이 중국 화엄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하였다.

박서연(동국대 강사)은 〈《도신장》의 화엄사상 연구〉(박사논문, 2003)를 발표하였다. 《도신장》은 현존하지 않지만 《법계도기총수록》에 그 일부의 내용이 전하고 있으며 의상의 제자 도신이 스승의 설법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왔던 문헌이다. 그러나 박서연은 《도신장》의 내용 가운데에 의상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의 학설까지 소개되어 있으므로 도신을 찬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 사상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화엄경문답》을 《추동기》와 다른 문헌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화엄경문답》이 《추동기》와 같은 문헌이라고 주장해왔던 김상현(동국대 교수)은 박서연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화엄경문답》 재고〉(《동국사학》, 2006)를 통해 반박하였다. 아직 이에 대한 재반론이 나오지 않아 향후에 논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된다.

신라불교와 관련하여 2000년대에 발표된 주요 연구 주제는 승정, 점찰법회, 의적, 경흥 등이다. 승정(僧政)에 관해서는 남동신(서울대 교수)이 〈신라의 승정기구와 승정제도〉(《한국고대사논총》, 2000)를 발표하여 승정의 개념을 정립하고 신라 중대와 하대의 시기별 성격에 대해 논하였다. 그는 중대에는 속관(俗官)에 의한 일원적 승정이고, 하대에는 승관과 속관에 의한 이원적 승정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기반하여 신선혜(고려대 박사과정)는 〈신라 중고기 불교계의 동향과 승정〉(《한국사학보》, 2006)을 발표하여 진평왕대와 선덕·진덕왕대의 승정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점찰법회와 관련하여 박광연(이화여대 강사)과 박미선(연세대 강사)이 논문을 발표하였다. 먼저 박광연은 〈원광의 점찰법회 시행과 그 의미〉(《역사와 현실》, 2002)와 〈진표의 점찰법회와 밀교 수용〉(《한국사상사학》, 2006)을 발표하여 6세기 원광으로부터 시작된 점찰법회는 민중을 위한 최초의 대중법회였다고 그 의의를 부여하였고, 또 8세기 진표에 의한 점찰법회는 계율을 중시하고 염불삼매를 실천한 법회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표는 수행자들을 위해 밀교적 수행법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박미선은 〈신라 점찰법회 연구〉(2007)라는 박사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기왕의 연구를 계승하고 통일 후의 오대산 신앙에서 점찰법회의 참회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원광과 진표 사이의 연결 고리를 강조하였다.

의적은 7세기에 활약했던 학승으로서 그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주목되었는데 2000년대에는 그의 유식학과 법화신앙의 측면에서 고찰되었다. 김상현은 〈의적의 《법화집험기》에 대하여〉(《동국사학》, 2000)를 발표하여 의적의 법화신앙에 주목하였는데 《법화경집험기》는 여러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여 얻어진 영험담을 모은 것으로 신라 법화신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최연식은 〈의적의 사상경향과 해동법상종에서의 위상〉(《불교학연구》, 2003)에서 의적이 중국 법상종의 창시자인 현장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승의림장》을 의적의 저술로 보고 그 속에 나타난 사상을 분석하여 규기와 다른 사상적 경향을 가졌다고 하였다.

박광연은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편찬 배경과 특징〉(《역사와 현실》, 2007)과 〈신라 의적의 《법화경》 이해〉(《불교학연구》, 2008)를 발표하였다. 의적이 유학했던 중국 장안의 법화신앙과 의적이 주로 주석했던 금산사가 백제 지역이었음에 착안하여 백제의 법화신앙을 통해 의적이 《법화경집험기》를 편찬한 배경을 고찰하고, 의적의 《법화경론술기》를 분석하여 의적의 사상 경향 및 《법화경》 이해를 고찰하였다.

의적과 동시대에 살았던 경흥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김양순(한국학중앙연구원)이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 연구〉(박사논문, 2009)를 발표하였다. 그녀는 경흥의 저술로서 《무량수경》을 해석한 《무량수경연의술문찬》을 역주하고 분석하여 그 사상에 대해 논하였다.

그 결과 경흥은 중국 법상종의 사상적 토대에서 《무량수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법상종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경흥이 《무량수경》을 해석한 이유로서, 정토사상이 타력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고 자력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김양순의 박사 논문은 향후 경흥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3. 고려시대

고려불교의 최대 논쟁은 《진심직설》의 찬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진심직설》은 18세기 말 이충익이 청나라로부터 들여와 1799년에 송광사에서 간행한 이래 보조지눌의 저서로 알려져 왔던 책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남권희(경북대 교수)·최연식이 공동 논문에서 이를 부정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재고찰〉(《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2000)에서 서지적인 검토와 아울러 지눌의 다른 저술에 보이는 사상적 경향이 《진심직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진심직설》이 지눌의 저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방룡(충남대 교수)은 〈《진심직설》의 저서에 대한 고찰〉(《보조사상》, 2001)에서 처음에 명나라 지욱(1599~1655)이 《진심직설》의 저자를 지눌이라고 하였고 그 책을 조선에 가지고 온 이충익도 지눌의 저서라고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여러 선학들이 지눌의 저서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지눌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도 지눌의 돈오점수적 견해에 잘 부합되는 저서라고 하였다.

또 《진심직설》의 어구와 지눌의 다른 저술에 보이는 어구들을 대조하여 그 유사점을 통해 지눌의 저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최연식은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진단학보》, 2002)를 발표하여 금나라 정언 선사 묘비(1188)에 정언 선사의 저술 중 하나로 《진심직설》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과 《진심직설》이 정언 선사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들어 그 저자를 정언 선사라고 주장하였다. 이 논문 이후 더 이상 최연식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문은 발표되지 않고 있다.

보조지눌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져 김방룡은 〈보조지눌과 태고보우의 선교관〉(《철학연구》, 2006)과 〈지눌과 나옹의 간화선〉(한국불교학결집대회, 2008)에서 지눌과 태고보우, 지눌과 나옹혜근의 선사상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박영제(한국외국어대 강사)는 〈지눌의 선사상 연구―삼문체계를 중심으로〉(박사논문, 2007)를 발표하였다.

그는 지눌의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이 각각 독립적이며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융회적이며 상호 비판적이라고 하여 각각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삼문이 수행의 단계에 해당한다는 통설을 부정하였다. 최연식은 〈지눌 선사상의 사상사적 검토〉(《동방학지》, 2008)에서 지눌의 삼문은 12세기 후반의 조사선적 흐름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초기 선사상, 화엄교학, 간화선을 주체적으로 수용·융합한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임제종의 수입과 선문의 동향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논문이 발표되었다. 먼저 조명제(신라대 교수)는 〈고려 후기 간화선의 수용과 전개〉(박사논문, 2000)를 통해 수선사의 간화선이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고려 말 간화선과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지를 고찰하였다. 그는 수선사의 간화선은 상근기 수행법으로 인정되었지만 다른 수행체계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수행법이 아니었는데 원 간섭기에 임제종을 수입한 이후 고려 선종은 점차 간화선 절대주의로 흘러갔다고 주장하였다.

강호선(서울대 강사)은 〈충렬·충선왕대 임제종 수용과 고려불교의 변화〉(《한국사론》, 2001)에서 원 간섭기에 고려 왕실과 승려들이 중국 임제종 승려 몽산덕이와 중봉명본과 교류했던 기록을 검토하고 임제종이 고려에 확산되어 무자화두가 유행하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인가받는 당시의 상황을 고찰하였다.

황인규(동국대 교수)는 〈고려 후기 선종산문과 원나라 선풍〉(《중앙사론》, 2006)에서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이 원나라의 간화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산문 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산문 중심에서 문도 중심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김상영(중앙승가대 교수)은 〈고려시대 선문 연구〉(박사논문, 2007)를 통해 고려시대 선문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였다. 그는 9산 선문의 정착·발전을 살펴보고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와 후기의 선문의 발전 양상을 고찰하였다.

선종과 더불어 번성하였던 법상종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황인규는 〈여말선초 유가종승의 동향〉(《동국사학》, 2003)에서 충렬왕 대에 법상종 승려 혜영이 국존으로 책봉된 사례와 충숙왕 대에 참회부를 설치하여 법상종을 중심으로 불교 개혁을 주도했던 것을 들어 고려 후기 법상종 승려의 동향을 고찰하였다.

남동신은 〈고려 전기 금석문과 법상종〉(《불교연구》, 2009)에서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5개의 비와 3개의 묘지명을 분석하여 법상종의 동향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첫째 태현계와 진표계가 합쳐 고려 법상종을 형성했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인데 금석문에서는 진표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둘째 법상종 해동 6조에 등장하는 원효는 당시에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도 종조로 추앙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의천의 원효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 셋째 법상종 소의경전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금강명경》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고려대장경과 관련해서는 여러 권의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김윤곤(영남대 교수)의 《고려대장경의 새로운 이해》(불교시대사, 2002), 장애순(동국대 교수)·정승석(동국대 교수)·카이 히데유키(貝英幸, 일본 불교대학 교수)·마쓰나가 치카이(松永知海, 일본 불교대학 교수) 공저의 《고려대장경의 연구》(동국대출판부, 2006), 최연주(동의대 교수)의 《고려대장경 연구》(경인문화사, 2006), 최영호(동아대 교수)의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의 판각사업 연구―경전의 구성체제와 참여자의 출신성분》(경인문화사, 2008)이다.

김윤곤은 수십 년간의 연구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였고, 장애순 외 공저는 고려대장경의 일본 전래와 그 영향에 대해 일본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이다. 최연주의 책은 자신의 박사논문인 〈고려대장경의 조성과 각성인 연구〉(2004)를 수정 보완하여 출간한 것이고, 최영호 역시 자신의 박사논문인 〈강화경판 고려대장경 각성사업의 연구〉(1996)를 토대로 그 후 발표한 소논문을 첨가하여 간행한 것이다.

한편, 대장경판을 보관했던 강화도 선원사의 위치 비정을 두고 논란이 되었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원사의 위치를 강화도 선원면 지산리로 비정해왔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어 왔는데, 본격적으로 반론을 펼친 논문은 이종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조경철·김영태(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강화 선원사의 위치 비정〉(《한국선학》, 2001)이었다.

그들은 문헌 자료에 근거하여 선원사의 위치를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 주변이고 현재의 위치는 가궐(假闕) 터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펼치며 김병곤(동국대 강사)은 〈사적 제259호 강화 선원사와 신니동 가궐의 위치 비정〉(《불교학보》, 2008)에서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는 강화도 내에서 현재의 선원사지만큼 규모를 가진 사적지가 없다는 점, 발굴을 통해 다양한 불교 유물들이 발견된 점, 출토 유물들의 편년이 선원사 존속 시기와 일치된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채상식(부산대 교수)은 〈강화 선원사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한국민족문화》, 2009)에서 김병곤의 견해를 부정하고 고려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화산(花山)이라는 용어에 주목하여 현재의 선원사지는 궁궐 터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려불교 신앙과 관련해서 김창현(고려대 강사)은 〈고려말 불교의 경향과 문수신앙의 대두〉(《한국사상사학》, 2004)를 발표하였다. 그는 고려 문수신앙은 대몽항쟁기에 법화신앙과 밀교신앙을 연결하는 고리로, 외적을 물리치는 대중구제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가 원 간섭기에 일연, 민지, 지공 등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고려 말 신돈과 나옹에 의해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라정숙(숙명여대 강사)은 〈고려시대 지장신앙〉(《사학연구》, 2005)을 발표하였다.

신라시대 때의 지장신앙은 점찰법회와 더불어 유행하였던 것으로 미륵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는 점찰법회가 아미타정토를 희구하는 형태로 변모되면서 지장신앙도 아미타신앙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고려 후기에 제작된 불화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병삼(숙명여대 교수)은 〈고려 후기 체원의 관음신앙의 특성〉(《불교연구》, 2009)을 통해 관음신앙을 고찰하였다.

그는 고려 후기에 관음신앙이 두드러지는 현상을 14세기 전반에 활동한 체원을 통해 고찰하였는데, 체원의 저술인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와 《백화도량발원문략해》가 화엄 교단에서 구도적 관음신앙이 확립되고 일반인에게는 공덕적 신앙의 확산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려불교 경제와 관련하여 전영준(중앙대 연구교수)은 〈고려시대 공역승 연구〉(박사논문, 2005)를 발표하였다. 공역승은 사원의 건축, 조영, 보수 등을 담당했던 계층으로 종교 활동에 필요한 물적 기반의 조성이나 사원 수공업 등에 종사하였던 승도였다. 이들은 때로 국가의 토목공사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조선 초기에는 도성 건축에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이병희(한국교원대 교수)는 〈고려 후기 사원의 중수·중창과 경제문제〉(《문화사학》, 2007)에서 사원이 중수·중창 과정에서 경제력을 확대하였고 사원의 성격도 달라졌다고 하였다. 그는 여러 문헌 자료를 분석하여 고려 후기 사원의 중수·중창을 지원한 주된 계층은 권세가들의 부인이나 원나라에서 활약하던 인물이었으며, 승려들의 연화(緣化) 활동과 개인 재산의 활용, 군현민의 참여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은 이러한 중수·중창을 통해 사원경제 기반도 확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원의 종파가 바뀌거나 특정인의 원찰이 되었음을 밝혔다.

고려 사원과 관련해서는 윤기엽(서울대 연구교수)의 〈고려 후기 사원의 실상과 동향에 관한 연구〉(박사논문, 2004)가 있다. 그는 무인집권기의 사원 동향을 살펴본 후에 원 간섭기에 원 황실의 원당으로 기능했던 사원과 종파불교로서의 특성을 보이는 사원으로 구별하여 고찰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원 황실을 위해 기복 불사와 상례·제례 등을 거행한 사원으로서 현성사, 보제사, 신효사, 흥천사, 묘련사, 민천사 등을 살펴보았고, 후자의 경우는 천태종 사원으로서 묘련사를, 법상종 사원으로서 동화사와 법주사를, 선종 사원으로서 인각사와 회암사 등을 살펴보았다. 한기문(경북대 교수)은 〈고려시대 비보사의 성립과 운용〉(《한국중세사연구》, 2006)에서 비보사원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는 태조 이래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산천의 순역(順逆)을 참고하여 수도와 지방에 비보사원을 건립하였는데 조선 초에 10분의 1로 줄여 242사였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대략 2,420개의 비보사원이 있었다고 하였다. 비보사원은 국왕 기복, 연등회, 반승법회 등 정기 불교의례를 행하였고, 사원 행정은 승록사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 외에 고려불교와 관련한 박사논문으로 박윤진(고려대 연구교수)의 〈고려시대 왕사·국사 연구〉(박사논문, 2005)가 있다. 고려시대 왕사와 국사의 임명 사례와 활동, 자격과 대우, 그리고 그 제도의 운영과 목적에 대해 고찰한 논문으로 사서류, 경전류, 금석문 등 광범위한 자료를 활용하여 왕사와 국사의 용례를 분석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모호하게 인식되어 왔던 왕사와 국사에 대한 개념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왕사와 국사들을 하나의 논문 속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4. 조선시대

조선불교 연구는 그동안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연구된 분야였다. 그런데 2000년대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비약적인 연구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에 연구가 집중되었다. 먼저 조선 전기의 연구 성과를 소개한다.

조선 전기 불교를 다룬 박사논문으로는 심효섭(가천의과학대 겸임교수)의 〈조선전기 영산재 연구〉(박사논문, 2004)가 있다. 이 논문은 영산재의 시원을 1232년에 백련사에서 개최된 보현도량에서 찾고, 그 신앙적 양상은 법화삼매를 통해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 후기에 대두된 법화경의 공덕신앙은 조선 건국 후에도 전승되어 수륙재, 기신재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것이 영산재로 흡수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문화사적 의의를 서민 불교문화의 형성, 불교문화의 확대 전승, 한국 고유의 불교문화의 형성에서 찾았다.

다음으로 소논문을 살펴보자. 이기운(동국대 연구교수)은 〈조선시대 왕실의 비구니원 설치와 신행〉(《역사학보》, 2003)을 발표하였다. 그는 왕실 비구니원인 정업원, 자수원, 인수원, 안일원의 설립으로부터 폐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고찰하여 시대적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성종 때까지는 정업원이 중심이었다면 중종 이후 선조 때는 왕실 여인의 귀의처가 안일원, 인수원, 자수원 등으로 확대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억불정책에 따라 결국 연산군, 중종, 현종 대를 거치면서 철폐되었다고 하였다.

황인규는 〈조선전기 불교계의 삼화상고―신미와 두 제자 학열·학조〉(《한국불교학》, 2004)를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 전기 삼화상으로 불렸던 신미, 학열, 학조의 행적을 고찰하였는데, 삼화상이 모두 간경사업과 불경언해 등에 참여하였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면서 억불의 상황에서 불교의 흥성에 노력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박해당(서울산업대 강사)은 〈《현정론》과 《유석질의론》의 삼교론〉(《불교학연구》, 2005)을 발표하였다.

《현정론》과 《유석질의론》은 유불회통을 주장한 대표적인 저서로 오래전부터 연구되었던 주제다. 그런데 박해당은 두 책이 비슷한 사상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차이점도 보인다고 주장하고 그 책에 나타나 있는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론의 차이와 구체적인 항목의 차이를 분석하여 논증하였다. 이는 두 책이 함허기화의 저술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현정론》만이 기화의 저술이고 《유석질의론》은 작자 미상이라고 주장해온 자신의 논리를 보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윤기엽은 〈조선초 사원의 실태와 그 기능―사원시책에 의한 공인사원을 중심으로〉(《불교학보》, 2007)를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 초 사원의 수적 추이나 사원경제 등은 고찰되었지만 정부의 사원 시책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고 평가하면서 공인 사원의 선정 기준, 중앙 사원의 위상 등을 살펴보고 불교사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조선 초의 억불책은 고려 말 이래 시행되어온 불교계의 각종 폐단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정책의 연장선으로서, 조선 정부가 전국의 사원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며 전통성을 가진 사원은 오히려 보호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복사의 지정은 승려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일정 범위 내에서 전통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았다.

이어서 조선 후기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자. 조선 후기 불교사와 관련한 박사논문은 무려 여섯 편에 달한다. 이는 2000년 이전에 조선 후기 불교를 다룬 박사논문이 거의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놀랄 만한 연구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최초의 논문은 한상길(동국대 연구교수)의 〈조선 후기 사찰계 연구〉(박사논문, 2000)이다.

이 논문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결성된 201건에 이르는 다양한 사찰계의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사찰계의 성격을 신앙활동과 보사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사찰계의 운영과 시기별 양상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신앙계로서는 염불계·칠성계·지장계 등을, 보사계로서는 갑계·불량계·등촉계·문도계·청계·상포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두 번째는 박병선(영남대)의 〈조선 후기 원당 연구〉(박사논문, 2001)이다. 조선 후기 사원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원당을 분석한 논문이다. 조선 후기에 79사 103개의 원당이 설립되었고, 그 대부분의 주체는 왕실이라고 하였다.

원당의 설립 배경은 유교적인 효행이 불교의 기복불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고, 그 설립 과정은 내수사를 통한 사적 설립과 예조를 통한 공적 설립으로 나누었다. 원당의 기능별로 능침원당·축원원당·호국원당으로 나누었고, 설립 시기별로 제1기는 현종 대까지, 제2기는 정조 대까지, 제3기는 19세기 세도정치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세 번째는 오경후(동국대 강사)의 〈조선 후기 승전과 사지의 편찬 연구〉(박사논문, 2002)이다. 이 논문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불교사서를 분석하여 당대 불교 지식인들의 역사 인식을 고찰하고 그 불교사적 의의를 밝혔다. 사지는 17세기 후반 중관해안이 찬술한 《금산사》 《화엄사》 《대둔사사적》, 19세기 초반에 대둔사 승려들에 의해 편찬된 《대둔사지》가 주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승전은 《대동선교고》 《해동역사》의 〈석지》 《동사열전》이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사지나 승전이 가지고 있는 불교사서로서의 기능을 통해 당시인의 불교사 인식을 조명하여 그 의의를 고찰하였다.

네 번째는 유호선(국립중앙박물관)의 〈17C 후반~18C 전반 경화사족의 불교 수용과 그 시적 형상화―김창흡, 최창대, 이덕수, 이하곤, 조귀명을 중심으로〉이다. 17C말∼18C초 불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경화사족의 다섯 문인들의 불교시를 통해 그들의 불교사상을 고찰한 논문이다.

유호선은 그들의 불교시가 갖는 시대사적 의의에 대해, 민족의 사상을 면면히 이어온 불교사상을 통해 새로운 자아관 및 세계관을 모색하려 했던 시도로서 근대적 자아각성이 이루어지는 19C 문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다섯 번째는 남희숙(서울대)의 〈조선후기 불서간행 연구―진언집과 불교의식집을 중심으로〉(박사논문, 2004)이다. 조선불교를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은 쇠퇴해갔지만 대중적·서민적 기반은 오히려 확대되었던 시기라고 정의하고 조선 후기 불서 간행을 통해 불교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계기와 배경에 대해 검토한 논문이다. 다라니경과 진언집, 불교의식집, 《부모은중경》 《장수경》 등의 간행 주체와 내용을 분석하여 당시의 불교 대중화 경향을 고찰하였다.

여섯 번째는 김용태(동국대 연구교수)의 〈조선 후기 불교의 임제법통과 교학전통〉(박사논문, 2008)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청허계와 부휴계에 주목하여 양대 문파의 성립과 정체성을 고찰하고 17세기 이후 선교겸수의 분위기를 화엄학의 성행과 선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청허계는 편양파, 사명파, 소요파, 정관파로 나누어졌는데 그중에서 편양파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부휴계는 단일 계파를 유지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 계파는 이력 과정을 공유하였으며 화엄을 정점으로 한 교학과 간화선 수행 방식이 결합되어 선교겸수의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소논문을 살펴보자. 남동신은 〈조선후기 불교계 동향과 《상법멸의경》의 성립〉(《한국사연구》, 2001)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위경인 《상법멸의경》의 성립 배경과 의의를 고찰한 것으로, 경전의 내용을 분석하여 장기간에 걸친 이상기후로 사회적인 기근이 일어났던 당시의 상황이 그 속에 반영되어 나타나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경전이 1735년에 창녕 관룡사에서 간행된 것에 주목하여 경전의 편찬자로서 불교계에서 존경받던 설송연초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경전의 내용 중에 타락한 말세가 7년 재난으로 멸망하고 불교적 이상군주에 의해 이상사회가 재건된다는 관념은 미륵하생신앙을 계승한 것이고, 조선 말기에 등장하는 신흥종교의 선구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박재현(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은 〈조선 후기의 선 논쟁에 내포된 원형지향성〉(《불교학연구》, 2003)을 발표하여 19세기 선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박재현은 선 논쟁의 내용보다도 왜 그 당시에 그런 논쟁이 벌어졌는가에 주목하고 임제선의 위상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백파의 삼종선 논의는 법통이라는 다분히 유교적인 방식을 통해 일방적으로 선포되었던 임제선의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객관화해 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에 비해 초의는 냉정하리만큼 합리적으로 임제선을 바라보면서 백파의 임제선 지상주의를 비판하였다고 하였다.

오경후는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국사관논총》, 2005)을 발표하였다. 그는 승역이 불교계의 탄압과 수탈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재검토하고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여러 유형의 승역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결론 내리기를, 첫째 전란과 자연재해에 기인한 생산구조의 파괴와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승역이 부과되었고, 둘째 대동법의 시행이 승역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균역법의 시행으로 의승번전의 부담이 반감되기도 하였으며, 셋째 따라서 불교 탄압을 전제로 승역을 이해하는 것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종수(원각불교사상연구원)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심성 논쟁―운봉의 《심성론》을 중심으로〉(《보조사상》, 2008)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심성론》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 17세기 후반에 불교계에서 심성 논쟁이 있었음을 고찰하고 그 논쟁 양상을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논쟁이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그는 또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불교학연구》, 2008)을 발표하였다. 백암성총이 1681년 임자도에 표착한 중국 상선에서 불서를 습득하여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화엄소초》가 있었고 그로 인해 18세기 화엄학이 유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과 성총의 불서 간행이 이력 과정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찰하였다.

조명제는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역사와 경계》, 2008)을 발표하여 백암성총의 불서 간행에 주목하였다. 성총이 편찬한 불전들의 사상적 경향을 분석하여 조선 후기 불교의 사상적 경향이 단순히 서산휴정이 제시한 방향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불교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방향성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외에 조선불교를 다룬 박사논문으로 김수현(수원박물관)의 〈조선시대 관음도상과 신앙 연구〉(박사논문, 2005), 손신영의 〈19세기 불교건축의 연구 :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박사논문, 2006), 송은석의 〈17세기 조선왕조의 조각승과 불상〉(박사논문, 2007), 하미경의 〈백파와 초의의 선리논쟁 연구〉(2009) 등이 있다.

5. 근현대

근대불교 연구 역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김광식(동국대 연구교수)이 있다. 그는 1900년대에 이미 근대불교와 관련한 2권의 저서를 출판한 적이 있는데 2000년대에는 무려 3권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그것은 《근현대불교의 재조명》(민족사, 2000), 《한국 현대불교사 연구》(불교시대사, 2006),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도피안사, 2007)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구 논문을 집성한 것으로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18편, 《한국 현대불교사 연구》 15편,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17편이 포함되어 있다.

《근현대불교의 재조명》에 수록된 논문은 거의 2000년 이전의 것이지만 다른 2권은 대부분 2000년대에 발표된 논문들이다. 여기서는 지면 제한으로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지만 그의 연구 업적은 근현대불교를 총망라한 것으로 이 시대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연구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에 발표된 박사논문으로는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의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과 불교계의 대응〉(박사논문, 2002)이 있다. 총독부의 불교 정책에 대해 불교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한 논문이다. 총독부 불교 정책으로서 1911년의 사찰령, 3·1운동 이후의 회유책, 1930년대의 심전개발운동, 1940년대의 전시동원 정책 등을 분석하고 불교계의 대응 양상을 고찰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대부분의 총독부 정책에 호의적으로 동참하였지만 일부 승려들은 그에 반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거나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선학원을 통해 일본불교에 대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동민(중앙대 강사)은 〈‘사찰령’ 체제하 본산제도 연구〉(박사논문, 2006)를 발표하였다. 조선시대 이래의 불교 제도가 일제하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고찰한 논문이다. 불교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의승군과 도총섭 제도가 사라지면서 국가 체제로부터 멀어졌는데 일제가 1911년에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불교계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시작하였다.

총독부는 30본산 주지들을 중심으로 조선불교계를 재편하고자 하였고, 30본산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면서 30본산 주지회의소와 30본산 연합사무소 등을 만들어 운용하였다. 이러한 점에 대해 한동민은 일제의 사찰령은 기본적으로 조선불교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 아니라 조선 사찰의 재산을 관리하고 조선불교의 급격한 변화를 방지하면서 ‘현상유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외의 근대불교 연구 성과로서 불교결사와 불교혁신운동에 대한 논문들을 살펴보고, 아울러 구술사와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중점연구소의 근대불교 연구 성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결사와 관련해서는 경허성우의 수선결사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최병헌(서울대 명예교수)은 〈근대 선종의 부흥과 경허의 수선결사〉(《덕숭선학》, 2000)를, 고영섭(동국대 교수)은 〈경허 성우의 불사와 결사〉(《한국불교학》, 2008)를 발표하였다. 최병헌은 근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보이는 기록들을 토대로 당시 참선하는 수행 풍토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음을 밝히고 그런 상황에서 경허는 참선을 진작시키기 위해 결사를 단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학들에 의해 선학원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하였다. 고영섭은 경허의 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를 계승하면서도 미륵정토의 사상을 결합한 것으로 이는 선의 대중화와 일상화를 도모한 것이며 경허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불교혁신운동과 관련해서는 김경집(진각대 교수)의 〈일제하의 불교혁신운동 연구〉(《대각사상》, 2000), 한보광(동국대 교수)의 〈백용성선사의 불교정화운동〉(《대각사상》, 2004), 김순석의 〈한용운과 백용성의 근대 불교개혁론 비교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 2005) 등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경집은 일제시대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외세의 극복과 내재적 가치창출을 위해 제창되었는데 이러한 개혁의식은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권상노의 《조선불교개혁론》(1912),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1922)은 개항 이후 전개된 개혁의식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이러한 혁신론에 기반하여 조선불교청년회의 불교청년운동과 선학원의 교단쇄신운동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한보광은 백용성의 불교정화운동은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불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왜색화되어 가는 불교에 대항하여 비구불교를 주창하였다고 하였다.

백용성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경전의 한글 번역 등을 주도하며 대각교(大覺敎)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불교정화운동에 힘입어 해방 이후 대처를 몰아내고 오늘날의 조계종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김순석은 한용운과 백용성의 포교론과 승려의 결혼관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는데 특히 두 사람이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하였던 결혼관에 주목하였다.

한용운과 백용성의 개혁론은 당시 불교계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지만, 불교 내부의 자정운동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고, 또한 스스로도 처음에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 공권력을 빌리려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한용운은 3·1운동을 거치면서 극복하였고 백용성은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극복하였다고 보았다.

2000년대 연구 업적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구술사 분야가 있다.

선우도량 편집부에서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선우도량출판부, 2002)를 간행하였고, 김광식이 주도하여 《아! 청담》(화남, 2004), 《동산대종사와 불교정화운동》(영광도서, 2007),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 : 한국불교 25인의 증언록》(민족사, 2006) 등 3권을 간행하였다. 이 책들은 대부분 근대 고승대덕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원로 승려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경순(서강대)은 〈근현대 불교 구술사 성과의 현황과 과제〉(조계종출판사, 《불교정화운동의 재조명》, 2008)에서 고승대덕에 대한 구술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일반 승려들의 삶과 근대 불교현실에 대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중점연구소에서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동북아 삼국의 근대화와 불교문화의 변용 비교’라는 큰 주제 아래 한국팀, 중국팀, 일본팀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국팀은 ‘한국 근대민족불교의 부침과 자주화의 모색’, 중국팀은 ‘중국근대 동서문화의 충돌과 민족주의 불교의 발현’, 일본팀은 ‘일본 근대 군국주의 정책과 불교계의 수용’이라는 주제였다.

이 연구는 그동안 미시적으로만 진행되어 오던 근대불교 연구를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불교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거시적인 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연구 성과는 각각의 연구원들에 의해 여러 학술지에 60여 편의 소논문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25편의 논문은 다시 묶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동국대출판부, 2008),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동국대출판부, 2008)이 그것이다.

6. 글을 맺으며

삼국·통일신라·고려시대 불교 연구는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의 접근이 점차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문헌들을 꼼꼼히 파악한 연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만주 지역의 발해불교는 여전히 미개척 분야다. 조선시대 불교 연구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뒤처진 분야였지만 2000년대에 여러 편의 박사논문이 발표되었고, 번역되지 않은 채 한문 문헌으로만 남아 있던 전적들이 대거 번역되고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기존 연구가 부족하다고 탓할 수 없게 되었다. 근대불교 연구는, 그 자체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의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졌지만, 조선 후기와의 연관성 속에서 규명되어야 할 과제들과 중국·일본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부분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해당하는 만큼 향후 중국·일본 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많은 연구 과제들이 남아 있고, 새로운 문헌이 발견될 여지도 많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통설을 비판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도 각 분야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향후 연구자들은 선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되 철저하게 그 시대마다의 원전을 검토하면서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주마간산 격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불교 연구 성과를 훑어보았다. 그 많은 연구 성과를 이 짧은 지면에서 다 소개할 수 없는 한계도 있지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소개하지 못한 연구 성과들도 많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저서나 논문을 소개하면서 연구자들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문학이나 불교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런 점은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이종수 / 동국대 사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졸업, 동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조선후기 불교사 전공. 현재 동국대와 신흥대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원각불교사상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음. 〈조선후기 불교계의 심성 논쟁 ― 운봉의 《심성론》을 중심으로〉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후기 삼문수업의 성립과 전개〉 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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