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창간 10년 기획 | 불교학 연구 최근 10년의 성과와 과제

1. 들어가는 말

불교학의 발전은 어느덧 출판의 편리함 등으로 성장해 왔다. 필자는 최근 학회지가 난립한다는 견해가 떠오르면서 불교학이 중대한 고비에 놓여 있다고 본다. 학회지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이러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떠한 문제보다 심각하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학회지들은 학자와 학회 관련자들의 승인과 요구에 따라 매회 많은 논문들이 제도권 안에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과연 이러한 불교학회지들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요즘 거론되는 의견처럼 불교 전문 학회의 과잉 생산으로 인한 불필요한 소모전일까?

중국은 연간 40만 종의 출판물을 생산해 내며, 일본은 20만 종, 우리나라는 4만 종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규모는 영세하더라도 몇십 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전문서적에 관련해서는 그 생명력이 장대할 정도이다. 국가 간의 경쟁을 가지고 출판물을 생산해 내는 일이 허망한 일로 치부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세계 속에서 인류 역사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방편으로서 출판문화는 앞으로도 물질적인 재산의 축적만큼이나 정신문화의 축적에 해당할 것이다. 불교가 문화적인 콘텐츠로 점점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도구로 인해서 세계는 우리나라 불교학에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국불교학의 미래를 위해서도 두터운 학문의 보고가 검색되고 인용되는 빈번한 기회를 제공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국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국내의 시점에서 마땅하게 따져보아야 할 영역도 있다. 예를 들어 국회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많은 기독교 잡지에 비해 불교학 관련 잡지는 미비하다. 매년 기독교 학회지의 창간과 지속적인 발간을 바라보면서 우리 불교학회지가 그들의 분량과 지속성에 뒤지지 않고 따라잡을 수 있을까?
불교전문 학회지가 완성되기까지 개인과 단체의 수고스러움이나 시간 낭비가 심각하다는 의견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불만과 동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와 긴 안목을 가지고 학자들 간의 이해와 합의를 도출해야 할 시점에 접어들었다.

필자는 이 모든 경우를 열려진 담론 안에서, 어떠한 압력이나 경쟁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대안으로 도출해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하길 불교계에 바란다. 또한 소장학자들이 새로운 잡지를 창간할 때마다 생명력 있는 기운이 그것에 가득하길 바란다. 좋은 잡지에서 전공 분야를 찾아가며 읽는 묘미, 그리고 논문 저자들이 가진 특성으로 해석해 내는 논문들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는다.

특히 이 글은 2000년 초부터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발간된 연구서나 논문집에 실린 논문 가운데 인도, 티베트불교, 초기불교 등에 관련 논문들의 흐름, 특성에 대해 조망하며 자유롭게 요약하였다. 필자는 인도, 티베트불교, 초기불교에 관련한 논문들을 모두 거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논문이 훌륭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다 섭렵해서 읽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재단한 흐름에 벗어나면 제외했고, 논쟁이 치열했던 논문들은 이미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반복해서 소개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울산대 김진 교수와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 등이 벌인 무아와 윤회 논쟁에 관련된 논문들이다. 무아와 윤회의 논쟁은 그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다수의 책과 논문들이 충분히 나왔다고 본다.

윤호진과 양형진의 글들은 그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기에 추천한다. 무아와 윤회 그리고 연기법이 한 범주 안에서 이해될 때, 서양에서 바라본 불교의 모호한 개념에 정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있다. 또 조준호, 임승택, 김재성 사이에서 벌어진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 관련 논쟁은 국내에서 유명했고 그 치열했던 논쟁 시간도 지루할 정도로 충분했다. 그래서 생략하기로 한다.

많은 주옥같은 논문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나, 어떤 것을 거론하고 어떤 것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은 컸다. 학자들이 한 편의 논문을 구상하고 자료를 찾고 명료하고 수려한 문체를 그 안에 담고 하는 작업 자체가 고통이기도 하지만 희열임을 알기에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에게 전적으로 맡겨준 불교평론 편집진의 뜻에 힘을 얻어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몇 편만을 깊이 있게 거론한다.

여기서 열거한 글들은 유명한 분들의 글이 아닐 수도 있고, 특별함이 있는 글들이 아닐 수도 있다. 인도, 티베트, 초기불교에 관련하여 필자의 흥미로움을 끄는 글들로 독자와 그 느낌을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2. 역사의 이해를 돕는 문헌적인 글들

이자랑, 박청환, 권오민의 글은 문헌학적인 배경을 튼튼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고대 역사의 논쟁거리, 그리고 문학적인 글에서 아련하게 궁금했던 용어를 극히 명백하게 한다. 어떻게 소소계를 규정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인연담이 불교 문헌에서 자리하는가? 경량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두가 막연한 추측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며 역사적 이해를 돕는 논문들이다.

이자랑의 〈소소계(小小戒)에 관한 논쟁〉1)은 현대 승단에서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율은 부처님만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라 여기며 율에 관한 어떤 변화도 거부한 채 기존의 율을 고수하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율이란 실생활에 관련된 규칙인데 현실에 맞지 않은 조목을 그대로 두고 지킬 것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논쟁이다. 논문의 흐름에 따르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게 작용한다.

이런 소소계 논쟁의 결과는 이후 율에 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존의 율을 고수하는 보수파는 대가섭의 불제불개변 원칙을 근거로 내세워 율은 부처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을 굳건하게 지키지만, 한편 다른 입장을 지닌 비구들은 부처님이 소소계의 폐지를 인정한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 기존의 율 중에는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율의 변화를 호소한다. 화합을 최상으로 여기는 승단이 큰 충돌을 불사하면서도 서로 양보할 수 없었을 만큼, 이 문제는 출가자들에게 중대하고 심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자랑은 불멸 후 100여 년경에 승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는 전승을 인정하면서 그 원인에 관한 불교문헌에서 전하는 바가 각기 달라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음을 시사한다.

소소계 논쟁의 핵심은 ‘율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다투었는가’이다. 이 부분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가섭은 불제불개변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그 후에도 많은 논쟁이 이어졌다. 현재로서 이 부분을 추측해 낼 수 있는 방법은, 현존하는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를 비교하고 그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의 증광을 원인으로 비구들이 충돌하고 승단 분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분명 어떤 형태로든 각 부파의 율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자랑은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를 중심으로 율 조문의 변화를 거론하면서 바라제목차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곧 각 부파가 지니고 있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상좌나 대중이라는 큰 분류로 율에 대한 성향을 구분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점차 이것은 각 부파의 개별적인 문제가 되었고, 각 부파가 놓인 상황이나 지역적인 특징 등의 영향을 받음으로 자체적으로 율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본다. 이자랑의 이 논문은 율에 대한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 가능한 생각들을 열어준다.

박청환(정덕)의 〈Avad켥na(阿波陀那)에 대한 고찰〉2)에서는 Avad켥na(阿波陀那)라는 정확한 정의 및 어원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일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Handurukande, Tatelman, Mellick, Rhys Davids, Gombrich, Lamotte, Strong, Nakamura 등이 밝힌 《아바다나》에 관련된 지식은 이 논문에서 상세하다. 박청환은 《아바다나》와 《자따까》 이야기들을 비교해서 문학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중심 이야기의 형식을 구분해 주었다. 《자따까》는 붓다의 과거생 즉 보살 때를 대체로 언급하는 반면, 《아바다나》에서는 붓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박청환은 《니다나(nid켥na: 因緣)》와 《아바다나》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여 현대 불교문헌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었다. 《니다나》는 이야기들, 특히나 계율을 위반한 승려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도덕적 비유담으로서 《니다나》는 《아바다나》와 유사한 성격을 공유한다.

《니다나》가 계율의 기원에 관한 것이고, ‘계율 위반을 예방’하는 도덕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이래로 새로운 《니다나》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끊임없이 생겼다. 《니다나》에서는 많은 고유명사, 사건들 그리고 배경 이야기들이 언급되며, 이것들은 종종 역사적 가치를 결여한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니다나》는 문학적 효과를 위해 인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바다나》를 포함한 불교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문학적 그리고 종교적 의미와 역사적 진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상황 설정은 부파를 초월해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후기에 들어서 《아바다나》가 다른 불교들과 결합되면서 구분이 없어지는데 이것은 《아바다나》의 확장을 의미한다. 특히 근본설일체유부가 ‘업(業)’의 관점에서 《아바다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일반 불자들의 사유와 감성에 부합하려는 노력이 《아바다나》로 대표되는 불교 내러티브들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박청환의 글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아바다나》의 변화 양상을 심도 있게 거론해서 우리에게 불교 문헌학 연구에 이해를 돕게 한다.

권오민의 〈경량부(經量部)와 비유자(譬喩者)의 의미와 관계〉3)는 《구사론(俱舍論)》에서 등장하는 ‘경량부’와 ‘비유자’에 대한 명칭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구사론》 전문가답게 두 명칭을 경전들을 근거로 하기도 하고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기도 하면서, 읽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구사론》에 넓은 시야까지 조망하게 한다.

권오민의 〈《구사론》에서의 경량부 1〉4)에서도 경량부라는 명칭이 가진 여러 학설을 설명하면서 가설이나 논거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를 제시하며 의견을 펼친다. 특히, 중현의 견해에 의하면 세친이 비록 경량부 사유에 기초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을지라도 경량부 소속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 등 여러 가지를 언급한다. 여러 학자와 경전을 통해 《구사론》에 언급된 19회의 경량부설 중 10가지를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정리한다. 《구사론》의 경량부는 일차적으로 《바사》의 비유자를 계승한 상좌 슈리라타를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 권오민의 논문은 《구사론》에 관심 있는 연구자라면 필독해야 한다.

3. 흥미로움 가득한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관련된 최근의 관심은 불교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야기는 이론보다 더 깊게 각인되고, 감칠맛 나게 쓰인 이야기들은 학자들의 감성과 만나서 그 가치를 높인다. 임근동 , 염중섭 그리고 박청환의 글은 텍스트의 선정도 뛰어나지만, 학자적인 접근과 저자들의 감성까지 결합되어 창조적이고 독점적인 작품들이다.

임근동의 〈개구리와 물새의 노래〉5)는 베다(Veda)와 《시경(詩經)》의 대비 연구를 위한 시론(試論)이다. 베다 가운데 자연물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진 작품인 개구리 찬가를 먼저 선정하고 이에 맞추어 《시경》 가운데 자연물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시기적으로 베다에 가장 가까운 작품인 관저가를 대비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였다.

임근동이 논문에 인용한 부분 중에는 ‘자연의 신비’라는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듯이 생동감 있게 기나긴 메마름 끝에 비를 맞이하는 개구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못엔 송아지 거느린 암소 소리에 어울리듯 개구리 소리 어울리네” “아비를 부르듯, 그리고 선생의 소리를 따르듯 말하네”를 인용하며 철저하게 직유를 통해 묘사된 문장을 소개한다. 이런 직유는 은유에 의해 대상의 본질에 주관적으로 접근하던 시인의 시선이 이 부분에 이르러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시선을 확보하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의 분위기에 젖어들어 가는 효과를 자아낸다.

임근동은 다른 인용문을 통해 직유의 사용으로 독자의 거부감을 덜어주기도 한다. 은유에 어울려 미물에 불과한 ‘개구리’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간인 ‘브라아흐마나’와의 탄탄한 일치감을 가져온다. 또 다른 인용문에서는 직유나 은유 없이 인용된 부분에서 직접 개구리에 대해 인간이 소망을 피력하게 된다.

《리그베다》의 또 다른 찬가에서는 ‘물’을 언급한다. 물은 모든 신들을 지닌 본바탕이다. 우주 순환에서 재창조의 동인력(動因力)으로 파악되는 제사의 의미는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리그베다》의 뿌루샤 찬가를 살피면 보이듯이 새로운 우주 창조를 위한 제사이다.

이 같은 창조의 순환을 야기하는 제사는 위에 인용된 개구리 찬가를 통해 보이듯이 일 년간 계행을 행하며, 더위에 땀을 흘리며 준비하고 때를 맞추어 밤을 지새우는 쏘마제를 올리는 것으로 완성된다. 작품에서는 더위에 시달리며 개구리가 장마가 올 때까지 땅속에서 인내하며 지내는 것이 이러한 창조적인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브라아흐마나의 계행에 비유된다. 임근동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고행인 따빠쓰(tapas)를 통한 제사의 준비와 일상의 삶이 새로운 창조의 순환을 가져올 계기를 마련한다고 한다.

임근동은 관저가를 인용하면서 ‘짝을 맞추어 노래하는 물새’와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바탕으로 ‘남녀상열의 정’과 ‘남녀상열의 정을 실현하는 법도’를 노래한 작품을 소개한다. 다른 사물을 말하여 읊을 말을 일으키는 ‘흥(興)’은 작품 속에서 일체의 은유나 직유가 없이 단순한 대구만을 통해 멀리 원경을 비추다 점차로 장면이 확대되어 사물의 윤곽이 보이고 마침내는 모든 사물이 뚜렷이 보이는 것처럼 나타난다.

4언(四言)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첫 연의 “짝을 맞추어 노래하는 물새”를 보고 “그윽하고 고요한 처녀를 짝하고 싶은 마음이” “아득하고 아득하여 이리 저리 뒤척이네”의 상태를 거쳐 마침내는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거문고와 비파의 은근한 소리로 그윽하고 착한 처녀를 은근하게 가까이하여” 드디어 “종과 북으로 그윽하고 착한 처녀를 격렬하게 즐겁게” 한다는 시의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인용된 시는 잘 짜인 대구와 절묘한 압운 그리고 오행에 따른 시어의 선택 등이 남녀상열이 난삽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절도 있게 이루어진다는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임근동의 글은 좋은 문학작품을 흥미로운 해설과 감상을 덧붙여서 재미있다. 임근동의 글들은 모두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염중섭(자현) 의 〈제바달다의 비범성 고찰〉6)은 제바달다와 관련된 율장과 불전의 기록에서 비판적인 면을 넘어 붓다와 견줄 만한 능력을 소개한다. 붓다가 제바달다에게 파승사와 관련된 불합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게 되는 것은 붓다의 신성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이해되기 어렵지만, 이 글은 종교 내적인 사건을 역사적인 사실적 판단으로 신중하게 처리하고 있다.

형태적인 특징으로 붓다가 겸비한 32상에 비해 제바달다가 2상이 부족하다는 기록을 소개하고, 인도 상법의 영향하에 파생된 위대한 인물이 갖춘 덕상(德相)에 주목하게 한다. 제바달다의 비범성이 붓다를 제외하고 최상급이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악의 본생담만을 갖춘 제바달다가 태생적인 비범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왕궁시절 붓다와의 경쟁 관계, 율장에 기록되어 있는 교단의 인식과 평가를 정리한 것은 기존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7)

박청환(정덕) 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의 승만(勝?, Mallik켥) 이야기를 통해 본 여성의 이미지 분석〉8)은 유러피안 신데렐라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와 《자따까》에서 보이는 말리까 이야기를 서로 비교 분석하면서 전개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말리까 이야기 속에서 여성에 대한 시선은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양면적이다.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는 깨달음의 과정에서도 정형화되며 그 사상이 지배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본설일체유부가 이 묘사의 주재자로 붓다를 내세움으로써 여성에 대한 시각을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리까와 쁘라세나짓 왕의 만남은 너무 로맨틱해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쁘라세나짓 왕은 마하남의 정원에서 우연히 말리까와 마주친다. 왕이 물을 요구하자, 말리까는 필요에 따른 다양한 방법으로 물을 준비한다. 이것은 왕을 감동시키고, 왕은 그녀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하게 잠을 잔다. 왜냐하면 그는 말리까가 몸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마하남에게 말리까를 요구했을 때, 마하남은 다른 석가족 여인을 추천하기도 한다. 말리까는 쁘라세나짓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을 결정하게 만드는 부인의 덕목을 완벽하게 이행했다.

쁘라세나짓의 어머니가 말리까의 출신 때문에 반대하는 상황은 인도 내러티브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이고 전형적인 인도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쁘라세나짓의 첫 번째 다른 아내 와르시까와 말리까의 화목한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와르시까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반면에 말리까는 촉각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한다. 이 세 인물 사이의 삼각관계는 이상적인 사회적 그리고 가족적 가치를 완벽하고 긍정적으로 나타내며 인도 종교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그들의 과거 업 이야기에 의해 강화된다. 동화의 세계에서 ‘착함, 겸손, 성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정결함과 높은 위치와 관련된다. 말리까와 와르시까는 이러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고, 그녀들은 높은 지위의 상징인 쁘라세나짓의 왕비가 된다.

박청환은 신데렐라 모델과 말리까의 이야기를 적용하고 분석한다. 첫 번째로 말리까의 결손에서 시작된다. 신데렐라의 결손이 그녀의 계모와 이복 자매들에 의해 야기된 반면에, 말리까의 결손은 그녀 아버지의 죽음과 마하남의 몸종으로 신분 강등에 의해 야기된다. 둘째로 사회적 계급과 관련시키려는 최종적인 목적을 명백하게 가지고 있다. 도입부에서 가장 높은 계층과 가장 낮은 계층은 엄격하게 분리된다.

쁘라세나짓 왕은 사회에서 최상의 계층을 대변하는 반면에, 꽃 따는 소녀인 말리까는 가장 낮은 계층을 대변한다. 이 서두의 상황은 인도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카스트는 완고했고 사회 계층 사의의 이동성 결여는 이 이야기의 서두 배경을 구성한다. 셋째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신데렐라는 요정이 나타나 그녀의 마술로 돕는다.

말리까는 현실적으로 선업의 축적을 통하여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가진다. 넷째로,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결혼을 통한 행복한 결말인 반면에 말리까 이야기는 그녀의 아들인 위로다까의 반역으로 그녀에게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말리까는 아들, 남편에게 버림받고 그들의 죽음 후에 그녀의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았다는 결말은 추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해피엔딩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이 이야기는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의도하듯이 행복과 불행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범아시아적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삶의 연속을 괴로움으로 보는 윤회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박창환의 이 논문은 말리까의 이야기,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승만 부인 이야기를 극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신데렐라와 비교 분석으로 인해 각인시킨다.

4. 어원에 심화되어 펼쳐진 논문

언어학적인 접근에서 분석한 논문이 점점 감소 추세인 것은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흥미 면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확고하고 안정된 진행에 의해 독점적으로 언어에 천착해서 생각하게 하는 논문은 다른 어떠한 논문을 인용하지 않고 통제당하지도 않는 특성을 지닌다. 학회지의 부족한 지면에도 불구하고 어원학적 접근에 일부를 할애하는 것은 각양각색의 전체 논문 중에 편집상의 특별한 배려가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로 전순환의 논문과 김진영의 논문을 소개한다.

전순환의 〈리그베다 신 이름들에 대한 어원적 고찰〉9)은 어원을 역사 비교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밝히고 있어 잘 정리된 여러 개의 사전을 보는 것과 같았다. 인도어, 인도 이란어, 인도 유럽어 기원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리그베다 신 이름들에 대한 어원적 고찰〉은 어원상으로 그 복잡함에서 탈피하려는 면을 보이지만, 같은 맥락 안에서 어원에 집중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다른 글 〈Sv켥h켥의 어원에 대하여〉10)도 Sv켥h켥 어원과 형태소, 그리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의미들을 열거하고 있다. 어원을 연구하는 글들이 독자들의 관심에 새로운 분위기 전환으로 자리매김된다. 어원 연구가 중요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해 볼 때, 깊이 있는 낱말의 의미를 모르는 채 반복되어 사용되는 상황은 학계 논문들에서 지향되어야 한다. 순환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의미 있는 어원에 집중하고 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김진영의 〈인도신화에 나타난 여신으로서의 시따(S콒t켥) 연구〉11)는 종전의 시따의 종속적 여성상의 연구에서 벗어나, 베다를 위시한 고전 텍스트 안에서 언급되는 시따의 근원을 모색함으로써 그 신화적인 배경과 구조의 성립을 말한다.

베다 신화에서 삶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물과 가축이라는 두 요소는 시따 안에 응축되며, 풍요성의 힘은 서사시에서 시따라는 인물 안의 여성적 용어들로 상징화된다. 시따는 창조물의 모신(母神)으로서 성장과 번영을 담당하는 생산력의 여신이다. 시따는 다양하게 칭송되고 불린다. 소마의 사랑을 얻는 인물, 인드라의 배우자, 아리야 여신의 여러 이름 중 하나 등, 공포와 자애를 겸비한 명칭과 특성들은 모두 시따에 관계된다.

또한 시따는 샥띠(굴akti)로서 기능하며 서사시를 이끄는 추진력을 가졌다. 남신 라마의 행동을 유발하며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힘인 샥띠로 작용하고 있다. 라마는 단순히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서 그녀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정화시켜 욕망의 현현체가 아닌 다르마의 현현체로서 정당하게 평가받게 만든 것이다.

시따에 의해 라마는 외부세계로 발을 디뎠으며, 시따는 라마가 자신의 신성을 되찾도록 보좌한다. 신비한 기원과 소멸을 가진 이 여신은 한 인간으로서 서사시 전반에 걸쳐 작용하여 남편 라마가 영웅, 성왕, 비슈누의 화신인 숨겨진 본성을 찾도록 지지대 역할을 하며 그 에너지가 된다.

배우자 라마의 위상과 자신의 위상이 함께 하강하고 상승하는 기능적 여신의 운명을 통해 시따는 인도인의 마음속에 이상적인 여인인 동시에 여신이 된다. 이 시따에 관련된 문헌을 어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상징적 의미를 나열함에 우리는 그 의미가 지니는 것 이상을 발견하게 된다. 고적의 텍스트에서 단순한 고유명사가 지닌 의미를 정성스럽게 분석하고 있는 논문은 낯설지 않은 친근한 느낌을 독자에게 갖게 한다.

5. 수행을 이해하게 하는 글들

이윤옥(원철)의 〈《유가사지론》의 성문지(聲聞地)에서의 전의(轉依) 개념〉12)은 용어의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학자들 간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윤옥의 글은 수행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수행 과정의 변화를 이해시킨다. 사실 수행자들의 수행에서 경험되는 과정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의 개념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추중(?重)과 경안(輕安)의 두 가지 용어가 필요하다고 유가행파는 전한다. ‘성문지’의 전의 개념은 초선 이전의 ‘추중의 소멸과 경안의 획득’에 적용되며, 이것은 제2 유가사처의 전의 개념이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이윤옥의 글은 단순히 ‘거칠고 무거움’, 그리고 ‘가볍고 편안함’이란 용어의 해석에서 깊이 있는 수행의 통로를 해부해 보는 느낌을 받았다. 전의가 본래부터 깨달음을 의미하지 않았지만, ‘성문지’ 이후에 유가행파의 많은 문헌에서 깨달음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예비적 맥락에서 초선 이전에 추중의 소멸과 경안의 획득에 적용되고 ‘보살지’에서는 초지 곧 견도에 적용된다. 전의 개념이 단계화하고 발전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심준보의 〈샤머니즘의 의식변형 기법들과 비교한 고전요가 삼매의 의의〉13)에서 특별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고전 요가의 초자연력을 발생시키는 기법들이다. 초자연력을 의미하는 요가수트라의 용어들, ‘요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힘’으로 싯디(siddhi)와 이 세계를 드러내는 ‘신의 현현력’ 같은 의미로 쓰인 비부후니(vibh궝ti)에 있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싯디에 대해 주목한다. 초자연력을 획득하는 싯디의 방법에는 생래적인 것,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 만트라를 이용하는 방법, 타파스를 이용하는 방법, 삼매를 이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심준보는 각각의 방법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생래적으로 초자연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으며, 고전요가에서 전생의 카르마로 인해 금생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초자연력을 획득할 수 있다. 신비 체험과 약초 사용을 통한 체험 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주장하는 약초를 통한 체험은 예술적 종교적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만트라를 통해서 엑스터시가 발현되고 수행자를 감정적 정신적인 열망 속에 있게 함으로써 수행자와 신을 연결하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타파스의 기법은 몸에 열을 발생시키는 기술이며 이런 열기가 신체와 정신에 혼수와 착란을 가져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며 이것은 모종의 신비 체험과 연관을 가질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러한 샤머니즘이나 고대의 주술적 전통에서의 의식변형 기법들은 그 효용이 단지 의식변형 상태에만 한정되며 영원한 행복, 즉 인도인의 이상인 고통 속에 윤회하는 현상계의 영원한 초극인 해탈이라는 이념은 오직 삼매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고전 요가의 삼매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계의 완전한 초극이라는 인도인들의 사유의 핵심을 상징하며 정치한 이론이며 기법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심준보의 논문에 의의가 있다 하겠다.

6. 현대 사회에 유용한 초기불교 정신

깨달음의 수행보다 높게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정신을 현대 사회에 유용하게 적용하고 확대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은 여러 대중의 요구를 실천하는 것이다. 서병진과 조준호의 글은 초기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현대 상황에 처하는 문제를 발전적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서병진(성운) 의 〈아쇼카(A굴oka) 왕의 정토관(淨土觀)〉14)에서 고대 아쇼카 왕의 다르마 정책이 복지사회 정토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 경전에서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이상적인 특질은 ‘물자가 풍부하여 국민 생활의 풍요, 높은 덕성을 마음에 새겨 실행하여 법을 준수, 전 세계 산하의 차이가 없고 교통이 편리해져 촌락이 가까움, 사람들의 마음이 화목하여 언어도 한 종류가 됨, 보석의 많은 생산’ 등을 열거하였다. 이 전륜성왕이 바라는 통일국가의 이상은 아쇼카 왕에게 생동하여 작용하였다고 본다.

 서병진은 아쇼카의 비문에 의미를 두었다. 다시 말해, 돌에 새긴 국왕의 법칙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제왕과 민중과의 접근에 도움이 되었을 것임을 강조하고 민중에게 직접 말을 건네기 위함이다. 아쇼카 왕이 말한 복지사회는 전제군주로서 백성에게 군림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봉사자의 헌신을 말한다. 초기불교 연구자들에게 아쇼카 왕의 이야기가 꾸준하게 거론되고 있음은 현대사회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조준호의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운동〉15)은 초기불교의 활기찬 사회 참여가 실천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 실천적 특징과 사회철학적 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논문이다. 조준호의 글은 초기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상호 역사적인 시간을 넘어 있는 우리에게 사회적 존재로서 가치를 부여해준다. 그는 장아함의 《소연경》이나 《세기경》에서 사람들이 다투고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회문제와 생로병사 같은 고통 문제의 원인으로 ‘사유재산’과 같은 사회구조가 생기게 되면서부터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전륜성왕수행경》에서는 ‘빈곤’ 때문에 서로 뺏고 싸우고 살상하고 그리고 탐욕이나 사음(邪淫), 거짓말이 있어 이로 인해 수명이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사유재산’과 ‘빈곤’이 온갖 종류의 사회문제를 일으켰다는 경전들의 인용은 놀랍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이나 사회주의, 정치철학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고, 초기 경전에서 확실하게 사회적 문제를 통찰하고 있음을 느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사회변혁은 자발적으로 서로 간에 공동체 내의 윤리 실천을 권장하고 확산시키려고 하는 노력에 따라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 또한 현대 사회문제의 해결 방안까지 경전이 답을 준 것이다.

조준호는 불교 흥기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관으로 바라문교, 사문, 일반 대중의 주술적 세계관을 정리하였다. 바라문교 세계관은 베다를 중심으로 한 갖가지 신학(神學) 이론과 제의를 발전시키는 영향력을 사회에 행사했다. 사문의 세계관은 불교 흥기에 영향을 주었으며 잦은 종교 철학적 대론이나 논쟁이 함께했다. 일반 대중의 주술적 세계관은 주술이나 주법에 의존하여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세계관들에 대한 비판에 따른 성찰이 불교를 교리적으로 확고하게 했다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또한 그는 개인의 차원을 떠나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맺는 적극적인 실천의 문제에 ‘포교’라는 용어를 통해 거론했다. 대중 포교는 현실참여이고 그대로 대사회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또 ‘대중교화 조직체’로서 불교 집단이 결성된다. 역사적으로 ‘수행공동체’ 또는 ‘전법이나 전도조직’으로서의 승가 성립은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용어가 ‘사회’라는 쓰임을 가진 불교적 표현이며, 불교 실현의 대상과 범위 그 성격까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대상으로 인간만을 한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범위에 있어 특별한 성격의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온갖 부류의 다양한 무리나 집단, 즉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을 포함한다.

모든 세계에 대한 대사회적 실천 활동의 목표는 모든 존재들의 ‘복지’와 ‘행복’, 그리고 의미 있는 삶으로서의 ‘이익’이며 초기 경전에서 붓다와 붓다의 제자들에 의해 같은 표현은 반복적으로 다양하게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 논문은 세속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세간을 등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불교가 흥기하면서부터 얼마나 대중교화라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7. 나오는 말

여기서 언급한 논문들은 저자가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하는 강력한 통제의 메커니즘이 돋보이고, 감정과 독특한 개성이 부여된 것들이다. 교과서의 성향이 있거나 저자의 해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배제했다. 그렇지만 훌륭한 논문을 놓친 것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를 웃음 짓게 하는 신간인 진효 스님의 《오백나한》16)과 원혜영의 《아름다운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17)를 소개하고 싶다. 그림책처럼 500명의 나한들 그림이 각 지면에 할애하고 나한 존자들이 가진 특성과 그 의미의 설명이 간략하다.

초기불교에 관련된 저서들은 아이들에게 동화 같은 이야기를 성인도 함께할 수 있는 특별한 영역을 제공한다. 학자들이 공들여 쓰고 발표한 논문들은 모든 연구자들에게 정확한 이해를 돕게 함은 물론이고 제한되고 규정된 영역을 넘어서 창조적인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개인적으로 여러 학회지와 저서들을 둘러보고 귀중한 글들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행복했다.

원혜영 / 1969년생, 대진대 철학과 학사,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 연세대 철학과 박사. 현재 대진대 철학과 초빙교수, 연세대인문학 연구원, 한국불교학회 편집간사. 논문으로 〈스뚜빠의 변화된 모습에서 보인 생명성〉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된 붓다의 축제적인 장례〉 〈붓다와 전륜성왕에게 행한 유해 방식은 닮았는가〉 〈초기 열반경에서 경과 율의 문제〉, 저서로 《아름다운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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