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여산 우희종

우희종 교수
서울대 수의과대학 
I. 생명과 진화

1. 생명

 인간의 몸을 받는다는 것은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고 해서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바다에 떠오를 때에 구멍 난 나무판의 구멍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로 비유하면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흔히 쉽게 생각해서 몸이야말로 마음공부에 장애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겨우 150 여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인간만 해도 서로 다른 66억의 인구가 존재하며, 더 나아가 자신만의 생멸을 지니고 존재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체가 개체로서 지닌 각각의 고유성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은 필요하다.

그러한 몸이 지닌 개체고유성(개체, 개성, 아상)에 대한 이해 없이 지극히 개인적 체험의 바탕이 되는 마음공부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양의 합리적 이성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보편성을 추구해 왔다. 이를 위해 근대과학은 귀납적 방식을 취했고, 생명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이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식의 질문을 통해 보편적 관점을 찾으려고 서양 사회는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가 활발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다지 와 닿는 답이 없는 것은 그러한 질문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편성을 전제로 한 전형적인 거대담론(meta-discourse)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계성에 의존해서 구체적 실체가 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 및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뭇 생명체는 그러한 질문에 의해 적절한 해답이 도출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생명체를 설명하는 관점에서의 생명의 존엄성이란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내지 나와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존중해야한다는 식의 결론 밖에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거대담론 식의 질문들이란 생명 현상의 특징이나 이로부터의 생명의 소중함과 존중에 있어서 별로 도움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생명이나 나라고 하는 개념은 권력이나 성과 같이 거대담론으로써 부풀어져 우리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개념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그 구조와 일상성을 명확히 보여준 푸코의 접근 방식처럼 접근될 필요가 있다. 뭇 생명체나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성인 개체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해서는 그 어떤 보편적 접근도 성공할 수 없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와 비록 기존의 과학으로 각 개인의 몸과 마음의 고유성을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이에 대한 이해가 복잡계 과학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해졌다. 또한 복잡계 과학과 진화와 개체발생이라는 미시적 연구에 바탕을 둔 진화발생생물학(evo-devo; Evolutionary Developmetal Biology)의 발전으로 점차 명확해진 것은 각 개체의 고유성은 곧 집단 내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양성의 방식은 곧 고유성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생명체의 고유성과 다양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2. 진화론적 몸

 다윈에 의해 제시된 진화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서양사회에 일반적 개념이었던 생태계 내에서의 인간이라는 종의 우월성에 상처를 입힌 것 외에도 인문, 사회 및 종교적으로도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다윈의 진화론이 갖는 의미가 당시 서구가 지니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 시각에 최종적인 타격을 입혔고, 이와 더불어 당시 프랜시스 베이컨 등에 의하여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던 서구 과학의 귀납적 시각에 대한 재고였다.

당시 다윈의 진화는 일종의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나아가는 발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지만, 최소한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중심 개념은 적자생존 내지 자연선택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화발생생물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현대진화론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중심개념이기도 하다. 진화론이 지닌 관계론적이며 적응주의적 시각은 당시의 철학계, 과학계, 그리고 종교계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현대의 생태학적 시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흐름에서 진화의 기작(mechanism)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활발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입장으로서 유전자 결정론에 가까운 사회생물학과 단속평형설을 주장한 스티븐 굴드와 같은 학자가 있다. 하지만 진화론의 주요 개념이자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는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적 시각의 요체는 생물체와 주위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고, 동시에 이러한 상호작용은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 진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간에 따른 돌연변이, 선택, 존속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기 때문에 다윈이 밝힌 생명체의 진화는 관계이자 또한 과거로부터의 긴 시간의 누적이며, 시간의 전개에 따른 창발적(emergence) 적응을 말한다. 또한 여기서 진화에서 중요한 개념인 자연선택은 일종의 적응(adaptation)이지만, 이 적응은 생명체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상호 작용에 의한 상태, 그 자체이며 동시에 구성적(construction)인 측면이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3. 진화와 연기

 관계성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진화론적 시각과 불교의 연기적 관점은 매우 유사하고 두 시각 간의 본질적 차이는 없어 보인다. 진화의 과정이 우연(contingency)과 무작위(random)라는 점에서 불교적 인과와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우연과 무작위라는 특징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위한 바탕이 필요하다고 볼 때, 진화론에서의 우연과 무작위성은 뒤에 소개할 복잡계 과학에서 언급하는 초기 조건에 의한 예측불가능이라는 특징을 말하는 것이지 불교적 인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진화에서의 우연과 무작위라는 것 역시 결코 근거 없이 무(無)에서 인과의 흐름 없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위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이 역시 조건과 결과라는 인과율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두 관점에 있어서 본질적 차이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제시된 모든 과학적, 종교적 개념이 그렇듯이 동일한 개념이라도 해석에 따라 매우 미묘한 입장 차이가 생겨나고 그 결과 같은 개념이라도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의 중심으로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은 다윈이 속한 영국보다는 독일에서 환영되었고, 결국 우생학의 근거를 활용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불살생으로도 표현되듯이 생명 존중을 내세우는 불교는 전형적인 비폭력적 입장임을 고려할 때 동일한 관계론에 의거한 두 시각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유사한 과학적 관찰을 기반으로 전 지구적 생명인 가이아(Gaia)론을 주장한 린 마굴리스와 이기적 유전자의 투쟁으로 본 사회생물학자 간의 차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종교적 입장에서 열려있는 욕망과 지혜로 삶의 의미와 행복의 추구였다면, 진화론은 과학이론의 한 분야로서 제시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 체계에 귀속되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적 생물관이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근대과학에 의한 인간 중심의 종차별주의에 기여하게 된 바는 크다.

이처럼 진화론적 시각과 불교의 연기는 결국 우리에게 언제나 남겨져 있는 과제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그것은 과학이건 종교이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일상적 삶을 전제하지 않고 논의되고 해석될 때에는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우리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두 관점이 제시하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과학을 폭력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진화론적 시각과 불교적 관점은 너와 내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렇게 존재의 열린 관계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진화 기작

 최근 신다윈주의를 넘어서서 개체의 발생이라는 미시적 부분과 진화라는 큰 틀을 같이 다루는 ‘이보디보’에 의해 접근되고 있지만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진화가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며 이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진화는 일종의 질서 잡힌 상태로 전해오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정보(information)이다.

시간의 축적에 따라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게 되므로 진화는 더욱 더 복잡해지는 양상을 띄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진화하는 개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과 같이 더불어 유지되고 나타나는 정보이다. 따라서 환경과 몸은 같이 진화하며(공진화), 그렇기 때문에 몸은 특정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압력에 의해 밀려간다.

이는 마치 업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생명체가 업과 같은 진화의 압력에 따라 밀려간다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의 모양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우수성이나 우월성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다윈도 자신의 글에는 생명체의 구성을 묘사하는데서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음은 중요하다.

그런데 다윈 당시 진화라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최선의 상태로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었으나, 다윈이 사촌 격인 프랜시스 갤톤에 의해 최선과 진보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강조되어 후에 우생학적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대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진화 과정에는 목적성이나 의도성이 개입되지 못하며, 단지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진화를 통한 변화는 주위 환경에 대하여 스스로를 존속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주위에 적응하여 변화하기 때문에 진보한다. 발생한 변화를 통해 한 때는 불안정한 종과 개체이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안정화되어 일반적이 되고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생명체는 시간이라는 역사성 속에서 선택되어 변형되고 진화한다. 따라서 진화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장 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것뿐'이며, 이것은 가장 좋은 결과를 향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편, 20세기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사회생물학자들은 진화에 있어서 계통점진적인 유형을 선호하며, 인간 몸, 더 나아가 정신마저 유전자인 DNA에 모두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으로 리차드 도킨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 등의 사회생물학자들이 있다. 진화는 유전자의 진화에 불과하다는 그런 입장은 최근 들어 진화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적응이라는 면을 바탕으로 다양한 복잡계적 입장과 더불어 후성학(epigenetics)의 대두로 인해 학문적으로도 그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5. 육체성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몸이라는 체계는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매우 역동적인 물질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동시에 신경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현대 의학에 관점에서는 정신신경면역학(psychoneuroimmunology)라는 학문으로 접근되고 있다.

면역기능은 과거에 경험한 항원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다가 다양한 항원에 대해서 신속하면서도 특이적인 정확한 반응을 보인다. 이처럼 면역반응작용의 주요 특징은 특이성, 다양성,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면역체계는 구성요소인 면역세포와 생리활성물질, 이들이 상호 작용하는 해부학적 공간, 그리고 이들이 시간 속에서 맺는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시간속의 관계성이란 말은 면역 기능이 역사성을 지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면역에서의 인식 작용은 유전자 수준에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각 생명체가 몸으로 겪는 경험의 역사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한 세포의 성장, 이동, 유지, 유전자활성, 죽음이라는 과정은 태아나 성숙한 개체에서 모두 일어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태아기에서는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신호에 의해서 만들어지겠지만 성숙한 개체에서는 개체가 태어나 경험한 모든 외부 물질과의 상호 작용에 의한 기억을 담고 있는 역동적인 면역 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다시 말하면 태아 발생이 완성되면 면역계가 이 반응을 이어 받는다. 결국 몸이란 면역작용이 끊임없이 작용하여 유지, 보존되는 그 무엇이다. 여기서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몸을 유지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행되는 면역계의 인식과 반응은 외부로부터의 많은 이물질과의 반응도 의미하기에 특이적인 반응이라는 말이 지닌 일대일의 고유한 상호작용으로는 그토록 다양한 외부 물질을 모두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면역반응은 특이적 반응이라는 목적과 더불어 다양성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니기 위하여 매우 폭이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고, 이에 따른 패턴 인식을 하게 된다. 면역학적 유연성은 면역 인식에 있어서 대상의 다양성과 더불어 동일한 대상이라도 그 친화력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일부일처의 기본 틀을 지니고 있지만 바람둥이의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다양한 만남을 통해 결과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손을 만들게 되어서 어떤 상황이 되어도 그 상황에 대응할 적절한 인물이 있도록 준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반적 도덕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면역계의 이러한 유연성이야말로 면역학적인 몸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다는 점이며,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특이적 면역반응만이 있고 유연성이 없다면 몸은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면역계 역시 수많은 신화와 문학에서 다루는 인간사회의 속성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II. 육체와 마음

1. 역사와 창발로서의 몸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로 구성되는 생명계(biosphere)가 약 150여개의 원소와 혹은 단백질과 지방 및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얼마 안되는 공통된 자원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결국 몸을 규정하는 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단순한 물질들이 아니라 그렇게 섭취된 물질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현하게 하는 각 개체의 면역학적 인식 체계이자 면역 요소간의 관계성이다.

 따라서 몸을 유지, 보존하는 면역 현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실체도 없이 변화를 계속하는 가변적 모습을 보여준다. 내 몸이 '나'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몸은 매 순간에서의 현존(現存)만이 있으며 그 외의 몸은 모두 관념적인 허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매 순간적 현존으로서의 나 역시 관계일 뿐이다.

몸의 고유성을 만드는 면역계는 해부, 생리구조와는 달리 신경계와 마찬가지로 관계에 의거해서 유지, 변화되는 창발적인 생체 내 체계이다. 따라서 생명현상에 대해서는 관계론적이자 복잡계 구조인 면역계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복잡계 과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복잡계 과학은 많은 요소들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며, 이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자기조직화를 통하여 창발적 체계를 구성하고 진화 가능한 비선형 구조를 다룬다. 나비효과로 널리 알려진 에드워드 로렌츠 박사의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개념으로 시작된 복잡계 현상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만델브롯(Mandelbrot)에 의한 프랙탈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해 왔으며 무질서 속에서 패턴 발생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을 다루는 복잡계 과학을 이루는 이론적 구성으로는 프랙탈 및 카오스 이론과 네트워크 이론이 있다. 이러한 복잡계 과학이 다루는 것은 무질서와 질서 잡힌 두 체계의 극심한 변화의 가장자리이며, 복잡계 현상의 특징으로서는 상전이(phase transition), 임계상태, 척도 불변(scale free), 초기조건의 민감도, 되먹임(feedback), 그물망(network), 자기조직화 및 창발 현상으로 크게 정리할 수 있다.

 복잡계 과학의 생물학적 적용인 시스템생물학은 오믹스 생물학(Omics biology)으로써 표현되는 유전체학(genomics), 단백체학(priteomics)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구성 물질들이 단순한 선형적 반응 경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cross-talk) 그물망 구조를 지니고 있는 생물체계를 이해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스템생물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복잡계적 형태인 생명현상과 더불어 각각의 생명체가 주위 환경 속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는 생태계가 지닌 관계성이야말로 생명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론적 시각은 삶에 대한 총체적 관계나 이에 근거한 복잡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은 데 있다.

또한 '지속된 시간의 누적 속에 생겨나는 반복과 차이'야말로 뭇 생명체의 종간 다양성을 만드는 바탕이라면, 개인의 몸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면역 기능에 누적되어 반영된다. 누적된 관계의 집합으로서의 내 몸이라면, 내 몸이 내 몸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몸도 긴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내 몸은 유아기 때의 몸, 더 진행하면 내 몸의 전신으로서의 부모의 몸도 담고 있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이 시작된 우주의 기원까지 내 몸은 담고 있다.

인간의 몸은 시간의 누적을 담고 주위와의 관계성을 담아 변화해 왔고, 이를 진화라 부를 때 수억 년에 걸친 진화의 메타적인 개념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의 진화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미시적인 진화에 대한 고찰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이다.

2. 마음과 몸

서양의 기계론적 입장을 담고 있는 현대생물학에서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생명체라고 기계론적으로 정의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그런 몸에 간달바라는 식(識)이 결합되어야 불교적 생명체인 중생이 시작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면서 업(業)에 따라 간달바가 깃들고 정신인 명(名)과 육체인 색(色)이 결합된 명색이 나타남으로써 생명체가 시작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불교의 생명 개념은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복합체로 생명을 바라본다.

불이(不二)적 관점을 고려할 때에도 명과 색은 별도의 실체가 아니며 또한 명과 색은 둘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생기론처럼 식(識)으로서의 간달바가 어딘가에 실체로 존재하다가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따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인해 이루어진 관계를 통해 간달바가 창발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인 수정과 식의 임함은 서로 의존해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물질과 식이라는 두 개의 실체로써 분리되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몸과 마음의 발생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몸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하는 서양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미 출발부터 배제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생명과학의 입장과도 유사한 것으로써 비록 근대과학이 기계론적인 입장에서 몸과 정신이 분리된 생명현상을 다루어 왔지만 복잡계 과학과 시스템생물학으로 이야기되는 현대과학에서는 몸과 마음을 분리할 수 없다. 다만 근대 과학의 입장에서 마음 작용은 두뇌의 작용이며, 유전자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대표적인 유물론적 입장이 사회생물학일 뿐이다.

이미 1970년대에 윌슨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사회생물학적 방법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문사회과학은 생물학으로 설명될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의 몸과 마음은 유전자의 자기 증식을 위한 담지체로 작용할 뿐이고 인간 사회의 문화나 사회생활 역시 유전자에 의해 발현된 일종의 또 다른 표현형으로 주장한다.

사회생물학은 환원주의적 전통에서 보면 서양 근대 과학의 정점에 있다. 사회생물학자들에게 삶이나 문화는 물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주제들은 인지과학 내지는 신경과학으로 설명이 될 것이며, 두뇌 작용은 유전자의 발현 원리로 풀이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생명현상이나 사회현상,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문화는 물리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것을 주장한다.

한편, 인간의 몸이 단순한 유전자의 전달자라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신선했을지 모르나 생물학자에게는 그리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말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원핵세포(prokaryotic cells)의 연구를 통해 기나긴 진화의 모습을 포착하였다. 발표 초기에는 많은 비판에 부딪혔던 그녀의 연구는 진핵세포(eukryotic cell) 안의 에너지 생산 기지인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기원이 외부로부터 진핵세포 내로 들어간 생명체의 공생적 관계로부터 유래했음을 밝혔다. 이를 세포내 공생관계(endosymbiosis)라 부른다.

당시 이 개념을 보다 복잡한 생명체로 확대해 보면 진핵세포로 이루어진 포유동물인 인간도 세포 수준에서 벌어진 상호 작용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에도 수많은 장내 미생물과 피부 표면의 미생물들로 덮여있는 포유동물은 실체가 없이 단지 장내 미생물 등의 생명을 유지, 보전하기 위해 열심히 먹고 마시는 담지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마굴리스 교수가 현재의 사회생물학자가 주장하듯 이기적 유전자와 밈에 의한 자기확산의 개념을 유전자가 아닌 세포나 세균을 통해 충분히 전개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마굴리스 교수가 인간의 문화나 사회활동이란 이기적 미생물이 그들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과감성은 없었지만, 세포내 공생과 이를 통한 생존, 증식의 개념은 유전자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마굴리스 교수는 사회생물학자들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시간 속에서 정교한 공생 체계로 이루어진 세포를 통해 서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닌 서로 의지하며 진화하는 존재로써 생명체를 파악했다. 생명이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한 공동체라고 바라본 그녀는 이를 더 확대하여 다양한 뭇 생명체의 상의상존을 통해 펼쳐지고 발현되는 전 지구적 생명에 공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세포들은 수십억 년 생명 진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이들을 더 높은 층위의 생명활동으로 이끈 진화의 힘은 이기적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니고, 세포 내 기관들이 각자의 기능을 지니고 더욱 복잡한 환경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서로 공생하는 형태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비록 층위는 다르지만 인간 개체의 실체 없음을 지적할 수 있는 유사한 관찰로부터 이토록 상반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사회생물학자인 도킨스 교수가 스스로 주장하듯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라면서 주장했던 유전자의 역할이나 밈이라는 개념은 단지 그들만의 해석과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이라고 하는 현상과 작용은 신경계라고 하는 물질적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이루는 몸과 마음은 '나라는 개체 속에서 분리되어 있는 체계가 아니라 통합된 체계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면역계는 면역 시냅스, 신경계는 신경 시냅스라고 하는 정보 전달을 위한 구조를 바탕으로 서로 상의상존하면서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과 이를 기억함으로써 업이라고 하는 역사성 속에서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해 간다.

3. 이데올로기로서의 마음

종종 마음의 대한 강조는 근대 서양문화에서 보듯이 자칫 몸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의미하게 되며, 몸에 대한 문화의 영향도 강조하게 된다. 인류학에서의 인간에 대한 문화구성주의적 입장이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는 마치 사회생물학이 우생학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듯이 문화구성주의는 인간이 다른 생물종에 비하여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오고 또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더욱더 발전해 간다는 논리에 비탕을 두기 때문에 인간의 종우월주의를 정당화 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면에서 마음 수행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의 육체에 대한 우위를 말하면서 일종의 종우월주의를 지니고 있음이 보인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결코 따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불교인들은 일체유심조라는 주체적 삶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마음은 몸을 떠나 어디 따로 있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몸은 마음의 터전이고, 몸과 마음은 고정되어 머무르지 않고 서로 관계하며 계속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몸과 마음, 양 쪽 모두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현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수양을 강조하며 일체유심조의 왜곡된 이해는 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더불어 자신도 모르게 ‘마음주의’에 빠지게 한다. ‘마음주의’라는 것은 지금과 같은 과학 시대에 있어서 서양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착각하면서 과학을 일종의 종교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주의’처럼 불자 중에 마음이 또 하나의 고정된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림으로써 관념적으로 마음에 집착하는 경우를 말한다. 마음주의에 빠진 이들은 마음에 머무르며, 무조건 마음만을 강조하면서 몸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마음만으로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III. 실천으로서의 몸

1. 욕구와 욕망

진화론적 관점에서 긴 역사성을 지닌 몸이란 결코 가볍게 볼 대상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몸은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생명의 시원(始原)을 거쳐 인류의 탄생과 지금 이 자리로의 기나긴 여정을 거쳐 나타난 결과이다. 이는 생명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주위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현대천체물리학에서 본다 해도 약 140억년이라는 시간을 담고 있는 몸이다.

생명체의 진화란 욕망의 진화이기도 하며 동시에 의식의 진화이기에 이를 다시 말하면 끊임없는 업(業)의 소산이다. 업이라고 하는 기나긴 시간의 누적에서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무엇보다 소중하며 동시에 한 점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이대로 온전한 존재이다.

한편, 현대면역학과 최신신경과학으로부터 기술되는 몸은 오직 창발적으로 구성되어 지며 구체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혜를 가리는 탐진치라는 삼독심이 몸에 의한 욕망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만 자율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창발적으로 변화하는 몸과 과거의 기억이 매우 강력히 작용하며 개인의 의식적인 억압 기제가 작용하는 마음과 어느 쪽이 더욱 삼독심을 강화하는 것인지 깨어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몸은 욕구하지만 마음은 욕망한다. 라캉의 지적했듯이 욕망은 욕망함으로써 더욱 욕망하게 된다. 이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의 욕구를 생각해 보자. 몸이 욕구는 채워지면 만족을 안다. 그 어떠한 욕구라도 몸은 자신이 자율적인 범위 내에서 작동한다. 몸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욕구가 다시 반복해서 나타날지는 몰라도 그런 면에서 몸의 욕구는 지극히 소박하다.

반면, 같은 업의 영향 속에 있지만 마음은 몸과 같이 비교적 자율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 의식의 영향이나 억압의 영향을 더욱 받는다. 육근의 인위적 작용은 되먹임(feedback) 구조로 재생산되어 마음에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의 욕망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갈애(渴愛)의 만족을 모르고 치닫는 욕망은 몸이 아닌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라는 사념처 중에 있는 부정관(不淨觀)을 일반적으로는 몸의 더러운 것을 관하여 몸에 대한 애착을 끊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가르침의 요지는 매 순간만이 현존이며, 그러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알아차림을 통해 몸이라는 대상의 무상(無常)함을 통찰하는 데에 있다. 부정관을 통해 바라봐야 하는 몸은 많은 구성요소에 의한 창발적인 것이어서 그 관계의 과정 중에 발현되고 사라지는 실체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마음공부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여러 욕망을 마치 몸으로부터의 장애로 착각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통합된 구조이고 더욱이 마음의 욕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는 대부분 몸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몸과 마음은 서로 상의상존하고 있지만, 두 속성의 특성 상 몸이 아니라 마음이야말로 채워질 줄 모르는 욕망이 근원이며 수행의 근본적 장애는 마음으로부터 옴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몸만 다스리는 고행이나 마음의 욕망에만 중심을 두는 엄격한 금욕으로는 진정한 깨어있음(覺)을 얻지 못한다.

회광반조와 대오각성이라는 수행은 몸 없이 생각할 수 없으며, 이렇게 소중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몸의 욕구는 언제나 만족을 아는 소박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통해 한 소식한 뭇 선사들은 공통적으로 ‘소욕지족’의 삶을 말한다. 몸은 소욕지족으로 다스려 나아가는 것이며,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에 이는 곧 마음의 다스림으로 이어져야 한다. 수행방법이 간화선이건, 기도이건, 염불이건, 위빠사나건 그 형태가 어떠하건 계정혜의 삼학(三學)으로 나타나는 삶 그 자체는 소욕지족의 모습으로 마음과 몸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수행과 삶

개인이 지닌 마음은 몸에 의존해 있어서 몸과 상대적이기에 언젠가는 사라질 일종의 정신적 몸이다. 즉, 둘 다 창발적 존재로써 이름 하여 나를 이루는 육체적 몸이고, 정신적 몸이다. 이들이 인연 따라 흩어질 개체로서의 나를 잠시 만들고 있음에 불과하다.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여 나라는 한 개체가 흩어질 때 몸도 마음도 흩어지고 없어지는 실체 없음이다. 그런 면에서 수행을 함에 있어서 몸과 마음은 필요하지만 실체 없는 몸과 마음으로 한 수행 역시 실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개체의 몸과 마음을 통한 수행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통합을 통해 얻고 또한 몸과 마음을 통해 얻는 바가 없다.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서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 되고 그 하나 됨을 통해 그 하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돈오이다.

그러나 돈오의 바탕이 된 그 하나 됨이 실체 없는 창발적 현상인 것처럼 이때의 돈오 역시 완전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창발적 현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개체로서의 몸과 마음이라는 구성요소가 하나 되어야만 이루어지는 현상이지만 결코 과거의 개체로서의 몸과 마음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태어남(換骨奪胎)이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에 미치던 삼세의 업이 더 이상 업으로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 업은 개체화된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이미 그러한 구성 요소와는 질적 변화가 생겨난 돈오라는 깨어있음(覺)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깨어있음도 직접적인 업은 끊어졌다 하지만 역시 돈오를 가능하게 한 몸과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절 인연의 연장선상에서 있을 수 밖에 없다(不昧因果).

이렇게 본다면 마음공부란 인간의 몸을 받고 있을 때, 더 나아가 몸이 건강할 때 해야 한다. 불교인일수록 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더욱이 진정한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몸을 통해 발현되는 마음의 욕망이지 몸의 욕구가 아님을 잘 살펴야 한다. 일반적으로 채워지지 않고 갈망하는 마음의 속성 때문에 수행에 있어서 마음의 다스림이 강조되는 것이지 몸은 중요하지 않거나 몸의 욕구 때문에 수행이 더 방해를 받는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깨어서 바라본다면 몸의 욕구라는 탈을 쓴 마음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몸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이야말로 참된 수행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은 깨달음(悟)이라는 상전이를 통해 깨어있음(覺)으로 가야하지만 서로 둘이 아닌 통합된 몸과 마음이 있어야 그러한 깨달음이 가능한 임계 상태로 준비되어 간다. 이 때 통합된 몸과 마음이라는 것도 관계와 관계의 만남을 통한 또 다른 관계에 불과하기에 이때 나타나는 창발 현상으로서의 깨어있음도 또 다른 관계성이며, 몸과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되 결코 몸과 마음으로 다시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깨어있는 자는 비록 개체로서의 몸과 마음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개인의 몸과 마음에 머무르지 않는 또 다른 상태이며, 자연스럽게 너와 나라는 개인으로 한계 지워진 틀을 넘어 자타불이와 동체대비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러한 ‘나를 넘어선 나’로서의 깨어있음은 자신의 삶에서 지금 이 자리라는 매 순간 순간에 충실한 알아차림으로 나타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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