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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담론 / 야오밍차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십이분(十二分)으로 본 철학적 고찰 -
[32호] 2007년 09월 12일 (수) 야오밍차이 이상민 옮김 sactuary@korea.ac.kr

1. 서 문

보다 명확하고 빠르게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의 윤곽을 잡기 위해서 서문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를 것이다.

1) 주 제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본 논문은 대승불교의 수행이라는 맥락에서 욕망의 문제에 주목할 것이며, 추론의 방식으로 윤리적 담론을 구성할 것이다. 또한 부제에서 언급된 《대반야바라밀다경》 〈십이분(十二分)[정계바라밀다분(淨戒波羅蜜多分)]〉을 본 논문의 주요 텍스트로 삼는다.

2) 연구배경
승가와 세속, 독신과 금욕, 여성과 남성, 육체와 정신, 절제와 방종, 채식주의와 육식주의 등은 일상적으로 자주 논의되는 문제들이다. 이들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커진다. 그러므로 각각의 종교 혹은 문화만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 또한 그와 관계된 연구를 진행시켜야할 책임이 있다.

불교적 전통의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한다면 시대, 지역, 민족, 종파, 경전, 풍습 등 여러 가지 접근방법에 따라 그 결과물 또한 달라질 것이다. 이 중 불교 경전에 기초하여 해당 문제를 연구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불교의 수행과 현실적, 혹은 이론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가가 이 논의의 주요 쟁점일 것이다.

분량이 한정되어 있고, 또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선 전거의 범위를 축소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본 논문은 대승불교의 수행과 관련된 하나의 경전에 집중할 것이다. 대승불교의 수행과 관련한 수많은 경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유마경(維摩經)》과 《화엄경(華嚴經)》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풍부한 가르침과 논의를 담고 있다. 이토록 다양한 경전이 있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결과는 예정되어 있다. 진지한 숙고 끝에 필자는 반야경의 십이분(十二分)을 본 논문의 주 텍스트로 삼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유는 반야경이 대승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경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과 관련된 본 논문의 주제를 고려하자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경전의 중요성 때문이다. 십이분(十二分)에서 대승의 가르침과 도덕의 완성[淨戒波羅蜜多, ??la-p?ramit?], 그리고 지혜의 완성[般若波羅蜜多]은 불교 수행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문제는 “보살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승화된다. 따라서 욕망이 어떻게 대승의 수행과 연관되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선 이 경전을 주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이유는 연구의 희소성 때문이다. 십이분(十二分)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하다. 대승불교를 주로 연구하는 불교학계가 이러한 사실을 유감으로 여기는 한, 학자는 해당 경전에 관한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대승의 수행적 관점에서 불교 전통이 어떻게 세속적인 문제들을 규정하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야경 십이분(十二分)을 선택하는 것이 기초성, 중요성,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3) 문헌자료
본 논문의 중심 문헌은 반야경 십이분(十二分) 정계바라밀다[??la-p?ramit?]이다.
반야경은 서기 660에서 663년에 현장(玄?)이 한역하였으며, 총 16개의 분(分)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일분(十一分)에서 십육분(十六分)은 보시(布施, 자비) · 정계(淨戒, 도덕성) · 안인(安忍, 인내) · 정진(精進, 노력) · 정려(靜慮, 명상) · 반야(般若, 지혜)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정계바라밀다(??la-p?ramit?)에 대한 열 두 번째 부분은 그 구조적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완성을 위한 수행이라는 점에서 다른 품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관련성에 의거하여, 반야경의 다른 부분들도 본 논문의 이론적인 토대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개략적으로나마 보조적 문헌으로 인용할 수 있다. 십이분(十二分)은 현장의 한역 경전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 인용문은 여기에 의거한다.

4) 연구방법
본 논문의 부제인 “《대반야바라밀다경》십이분(十二分)으로 본 철학적 고찰”이 기본적인 기준이다. 또한 이는 철학적 연구가 되기 위한 본 논문의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의 목적은 현실과 가치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이다.” 철학의 목적에 중심을 둔 비판적 사고는 철학적 접근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 접근은 목적의 달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또한 연구 과정을 체계화하고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여타의 효과적인 방법을 요구한다.

5) 추론구조
본 논문의 제목인 “감각적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담론”이 연구의 주제이며, 본 논문의 순서는 아래와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서언이다. 직접적으로 논제를 밝히고 연구에 배경이 되는 개념과 양상을 순서대로 제시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주제, 수행의 함의, 기본적인 관련성, 그리고 십이분(十二分)에서 최상의 차원으로 발전된 개념으로 상정된 보살의 계행(戒行)에 대해 개괄적으로 논의한다. 또한 이 장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는 그 이후부터 논의할 윤리적 담론에 대한 근거가 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주요 논제를 제시하고 문헌적 근거를 구성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십이분(十二分)의 세속적 문제들이 폭넓은 관점에서 다루도록 한다.

네 번째 부분은 십이분(十二分)에서 제시되는 윤리 원칙을 열거할 것이다. 또한 세속적 문제에 대한 윤리적 고찰과 여러 가지 평가, 특히 대승의 입장에서 본 욕망과 윤회에 초점을 맞추어서 추론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결론을 내리고 본 논문에서 도출된 주요 결과들을 요약한다.

2. 십이분(十二分)의 번역

감각적인 욕망은 인간의 특징이다. 만약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는 절대로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십이분(十二分)은 부처의 깨달음을 지향하고 지관(止觀, Samatha-Vipassana)의 수행을 강조하고 있기에 욕망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가 십이분(十二分)의 가르침을 따르기 결정했다면, 그는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대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 문제는 보다 심층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십이분(十二分)은 욕망에 관하여 정확히 규정된 윤리적인 가르침을 말하지 않기에, 본 논의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십이분(十二分)의 전체적인 내용을 모두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이분(十二分)의 번역은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연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 장의 목적은 논의의 적절한 배경을 구성하는 데에 있기에, 개략적인 번역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1) 십이분(十二分)의 주제
십이분(十二分)을 번역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해당 부분의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십이분(十二分) 서두에서,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를 얻기 위해 정진하는 보살들에게 정계바라밀다를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십이분(十二分)의 주제는 계행을 통한 도덕적인 완성[淨戒波羅蜜多]이며, 청자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이다.

2) 수행의 함의
정계바라밀다를 주제로 잡았으니, 다음은 우선 이에 관한 부분을 번역하는 작업이다. 번역을 위해서는 주제를 잘 전달하는 부분이 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수월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이분(十二分)의 다섯 구절을 논의의 근거로 삼는다.

A. 어떠한 법(dharmas)도 정계바라밀다에 이익이나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를 생각한다면 보살의 계율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정계바라밀다에 이익이나 손해가 된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낸다면 정계바라밀다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보살이 어떠한 법도 지을 것이 있지 않다고 볼 때에만 정계바라밀다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T. 220 (12), vol. 7, p. 1024b-c.)

B. 보살들이 계를 받아 지니고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할 때에만 정계바라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를 받아 지니고서도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 계행은 비록 계를 얻었다고는 하나 정계바라밀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다만 이승(二乘), 즉 성문(聲聞, ?r?vakas)과 독각(獨覺, pratyekabuddhas) 혹은 세간의 과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 1024c.)

C. 만일 어떤 보살들이 마음에 한계를 짓고 분별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계율을 일으키면, 이 보살이 일으킨 계율은 이승(二乘)의 무루(無漏)의 계율을 이기지 못하므로 정계바라밀다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살들이 마음에 한계가 없이 두루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큰 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하여 계율을 이끌어 일으키니, 보살의 계율이 이승(二乘)의 무루의 계율을 이기어 정계바라밀다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p. 1032c.)

D. 만자자(滿慈子)가 말하였다.
“보살들은 무상보리를 증득하려 하고, 중생 · 성문 · 독각은 그렇지 못하니, 이 때문에 보살의 계율과 저들의 계율에 차별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리자(舍利子)가 말하였다.
“그 까닭에 보살의 계율이 모든 중생 · 성문 · 독각의 계율보다 훌륭하나니, 이른바 보살의 계율은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는 데로 나아가므로 정계바라밀다라 하지만, 중생 · 성문 · 독각의 계율은 그렇지 못하니, 이것이 차별입니다.” (p. 1033a.)

E. 예를 들자면, 설산(雪山)은 큰 산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나 다른 산은 그렇지 못한 것과 같으니, 만일 그런 공덕을 갖추었다면 산왕(山王)이란 명칭을 얻지만 공덕을 갖추지 못했으면 산왕이란 이름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의 계율은 무상보리로 향하며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도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반면 중생 · 성문 · 독각들의 계율은 무상보리로 회향하지 않고,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려는 마음을 벗어났기 때문에 도덕의 완성이라 하지 못합니다. (p. 1033b.)

번역이 틀리지 않았다면, 해당 인용문의 주제가 본 논문의 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상기된 인용문이 다소 장황하기는 하나 주제를 잘 뒷받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다섯 인용문뿐만이 아니라 해당 분의 모든 부분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대승의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전의 함의는 수행의 근거가 되며, 그 수행은 또한 경전의 함의를 드러낸다. 이 다섯 인용문에서 정계바라밀다라고 불리는 수행의 함의를 아래의 여섯 가지 로 요약할 수 있다.

a.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계바라밀다란 보살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요구되어지는 덕목이다. 성문이나 독각과 같은 소승(小乘)의 입장에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들에게 정계바라밀다의 덕목이 요구되어지지 않았다. (D, E 인용문)

b. 보살의 계행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보살과 정계바라밀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기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계바라밀다는 수행에서 얻어지는 공덕에 의해서 명확해진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십이분(十二分)의 목적은 보살에게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계행의 완성으로 나아가도록 훈계하고, 그 원리와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다. (모든 인용문)

c. 보살이 정계바라밀다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라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헛된 관념[我相]이나 자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人相], 혹은 극단적인 견해[邊見]에 사로잡혀서는 안되며, 계행의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 불이성(不二性)을 깨닫기 위하여 부단히 정진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 계행이란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유정상(有情相)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보살은 계행에 어떠한 것[法]이 이익이나 손해가 된다는 분별이 없음을 알아채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자성, 공성, 불이성에 의해서 성립된 계행이 결국 정계바라밀다가 된다. 정리하면, 정계바라밀다는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 불이성(不二性)의 의미를 포함한다.(A 인용문)

d. 정계바라밀다를 수행하려면 보살은 계행을 궁극적인 경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회향해야 한다. 즉 보살은 계행이 지향하는 바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일체지의 지혜, 혹은 무상보리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향의 과정이 없다면 보살은 정계바라밀다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정계바라밀다가 가진 또 하나의 함의는 계율을 지키는 목적을 일체지의 지혜, 혹은 대승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B, D, E 인용문)

e. 보살은 계행을 완성하기 위해 중생을 분별하지 말고 모두 이롭게 하며 깨닫게 해야 한다. 만약 보살이 특정한 중생만을 이롭게 하고 이를 뒤로 미루거나 특정한 조건에서만 행한다면 계행은 기껏해야 계율을 지키는 것일 뿐 정계바라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계바라밀다가 가지는 하나의 함의는 중생을 제도함, 특히 모든 중생을 한량없이 제도한다는 것이다. (C 인용문)

f.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는 불교의 일반적인 지계(持戒)에서 더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은 ‘보살’이라는 이름이나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기된 정계바라밀다의 특징, 즉 무자성, 공성, 불이성, 계행의 회향, 또는 중생을 이롭게 함을 구체화 했다는 데에 있다. 보살이 아직 이러한 지위를 얻지 못했다면, 그들은 소승에서 말하는 성문이나 독각보다도 아래에 있다. (B, C, D, E 인용문)

상기된 다섯 개의 인용문과 여섯 개의 짧은 논의를 바탕으로 계행의 함의를 개략적으로 해석하였다. 보살이 수행과정에서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통해서 이것이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 불이성(不二性)임을 깨닫고, 계행을 일체지의 지혜 혹은 무상보리를 얻기 위한 행위로 회향시키며, 중생을 모두 이롭게 하고 깨닫게 한다면, 그들의 수행은 지혜, 지향점, 혹은 자비행이라는 견지에서 최상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보살의 계행을 온전히 지니는 것이 곧 정계바라밀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근본적인 문제의식.
불교 문헌 일반이 가지는 기본적 문제의식은 분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십이분(十二分)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불교 문헌이 그러하듯, 십이분(十二分) 또한 대화의 형식을 취하며, 붓다와 그의 제자들인 사리불(舍利佛), 부루나(富樓那), 아난(阿難)이 등장한다. 많은 화제들이 순차적으로 대화의 형식을 통해 논의되며, 그 주제들은 모두 고찰해 볼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 십이분(十二分)의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를 보다 간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서두에서, 부루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이때 만자자가 사리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보살의 지계를 알며, 어떻게 해야 보살의 범계(犯戒)를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이 보살이 행할 바이며, 무엇이 보살이 행하지 말아야 할 바입니까?” (p.1019b-c.)

부루나가 ‘어떻게’와 ‘무엇’이라는 형식으로 던지는 질문은 수행에 관련한 십이분(十二分)의 목적을 드러내는 좋은 예이다. 이 질문은 다시 네 가지의 물음으로 나누어진다.

ⅰ) 어떻게 해야 보살이 계율을 지킬 수 있는가?
ⅱ) 어떻게 해야 보살이 계율을 범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
ⅲ) 보살이 행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ⅳ) 보살이 행위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은 모두 보살의 계행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보살의 계행에 특징이 없다면 십이분(十二分)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살의 계행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인가? 일반적으로 “근본적”이라는 말은 “우등” 혹은 “열등”의 반대어로 쓰인다. 부루나의 질문에서, 전자의 두 질문은 보살이 계율을 지키거나 파하는 기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후자의 두 질문은 보살이 행위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문제이다. 내적인 기준이 없다면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행위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른다면,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 것인가? 사리자는 부루나의 질문에 즉각 대답한다. 논의를 빠르게 하기 위하여 한 문단만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그러자 사리자가 만자자에게 대답하였다.
“만일 보살들이 성문이나 독각과 같이 행위한다면, 이것이 보살이 행하지 않을 바이니, 곧 보살의 파계입니다.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행하면 이 보살들은 절대 정계바라밀다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p. 1019c.)

사리불의 대답은 “보살이 행위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계율을 지키는 것”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그는 전자의 두 질문에 대해서 설명함으로써 후자의 두 질문 또한 규정한다. 기본적으로 “보살이 행위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은 수행의 과정을 보조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보살이 행위하지 말아야 할 방향”에 주목한다면 성문과 독각으로 대표되는 소승적 깨달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문의 경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보살이 자신의 길에 안주하지 못하고 해탈하고자 하거나 성문과 독각의 수행을 따라간다면 그들은 자신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렇게 한번 길을 벗어나 버리게 되면 보살은 보살이 행해서는 안 되는 일, 즉 파계를 범했기에 이미 돌이킬 수가 없다.

“보살이 행위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보살의 계행”을 규정한다. 이에 관해서 우선 세 가지 이론적인 고찰이 추론될 수 있다. 하나는 “전문적인 윤리”이고, 다음으로 “올바른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바른 길의 적용”이다.

우선 전문적인 윤리는 특정 직업에서 요구하는 고유한 윤리적 입장을 의미하며, 이러한 견지에서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전문적인 윤리”에 초점을 맞추면 특정한 직업에서만 특정한 지평의 윤리가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살이 아닌 사람에게 “보살의 계행”이나 “수행”은 적합하지 않으며, 의사가 아닌 이에게 “의료윤리”는 필요치 않은 것과 같다. 따라서 “보살의 지계”나 “보살의 파계”에 대한 기준은 보살행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전문적 윤리”, 즉 “보살의 윤리”라는 범주는 오직 보살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이를 전문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되거나 지루해질 뿐이다.

다음으로, “올바른 길”은 가고 있는 길이 적합한지를 판명하는 것을 말한다. 보살의 관점에서, 수행이란 하나의 지점, 하나의 위치 하나의 사건, 하나의 장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보리를 깨닫기 위한 모든 과정에 연관되는 것이다. 모든 과정과 연관되어 있기에, 윤리적인 문제 또한 분명 한 점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수행 전반에 걸쳐져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모두 치밀하게 윤리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한번 보살행을 시작하였다면, “보살의 윤리”에 의해 시험될 준비를 해야 한다. “올바른 길”의 기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보살의 모든 행위를 평가하는 데 사용된다. 만약 보살이 보살행을 제대로 행하고 있다면 이러한 행위들을 “보살의 지계”로 판정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파계”를 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길”은 수행이 지향하는 지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기준은 하나가 아니다. 보살의 수행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으며,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보살행에서 기계적으로 소급되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길”은 단순히 “길”이라는 의미에서만 계행을 판단할 수 있다. 즉 올바른 길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십이분(十二分)은 수행의 요소에 집착하여 발생하는 특징, 계율을 지키고자 하는 집착에서 비롯되는 미묘한 번뇌, 음란한 생각, 그리고 주체적인 행위자라는 헛된 생각 등, 수행과정에 관련된 윤리적인 요소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살을 전문가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감정적인 집착, 혹은 주체라는 헛된 상념에 사로잡히는 죄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보살의 지위를 격하시키며 수행의 과정에 장애가 된다. 이것이 관념이나 감정에 의한 문제들을 지적하는 이유이다. 한번 보살행에 누를 끼치게 되면, 이는 분명 보살행을 닦는 이의 파계이다. 십이분(十二分)의 구체적인 윤리적 조목들에 관해서도 포괄적으로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겠으나, 이는 본 논문이 목적하는 바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길”의 기준이라는 범주에서만 보자면, “보살행의 윤리”로 해석할 수 있는 십이분(十二分)의 내용은 수행과정에서 감정과 관념이 끼치는 영향에 매우 주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보살의 계행 : 최상의 차원으로 진보한 개념
십이분(十二分)의 주요 논제는 계행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보살의 계행이다. 평생에 걸쳐서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일으킨 보살은 계행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수행해야 한다. 이에 따라 보살의 계행은 일반적인 경계를 넘어선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는 모든 계행이 여러 과정 중에 한 점과 같이 취급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보살의 계행이 승격된다는 것은 보살의 계행을 최상의 것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보살의 계행이 최상의 것이 된다면, 논점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계율을 지키는 것[계행]이 완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최상의 차원이 열리게 된다면, 보살이 계율을 지키는 목적 또한 일반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최상의 존재에 도달할 것이다. 보살이 부처의 경지로 점차 나아가는 것과 같이, 보살의 계행 또한 이러한 최상의 차원을 따라가면 정계바라밀다, 이른 바 부처의 계행을 증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보살의 계율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과 성문, 불각의 계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보살들의 계율은 여래의 계를 제한 다른 계율에 대하여 유루이건 무루이건 으뜸이며 훌륭하며 존귀하며 높으며 묘하며 미묘하며 위이며 위없음이 됩니다. (p. 1033b-c.)

3. 십이분(十二分)에서 도출되는 세속적 문제들

전거의 차이에 따라서 본 논문의 구조나 성격 또한 바뀔 것이다. 이 안에서 목적, 가치, 의미, 그리고 기능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되며, 또한 여러 윤리적인 측면으로 결론날 수 있다. 십이분(十二分)에서 드러나는 감각적 욕망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이 장에서는 문헌 전거를 구성하여 축으로 삼고, 다음으로 세속적 욕망의 문제에 대해 경전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조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의 목적은 십이분(十二分)에서 도출되는 세속적 욕망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논의의 축을 설정하고 문헌적 전거를 구성하는 것이다.

일견 욕망은 물질적인 것으로. 세속적 환경은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사물이나 사건은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의 행위에 수반되는 작용일 뿐이다. 생명활동의 과정은 전반전으로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 구성되는 삶의 윤회 위에서 부유한다. 이 순환의 고리를 분석한다면 십이분(十二分)이 주로 다루고 있는 논의의 축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윤회라는 축과 병행하여 서로 연관된 두 개의 축이 있다. 외부적인 축은 대승의 수행이며, 내부적인 축은 정계바라밀다이다. 반야경, 나아가 모든 불교의 경전이 세속적인 삶을 수행의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기술, 이른 바 삶의 기술을 제시한다. 이는 곧 끝없는 윤회에 기대어 최고의 목표를 향해 수행하는 삶을 말한다. 반야경의 목적은 일체지의 지혜, 혹은 무상보리로 중생을 이끄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따른 자에게는 대승의 수행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승의 수행이라는 하나의 주축 또한 다른 축들을 지지대로 삼는다. 반야경의 경우, 11분부터 16분까지 제시되는 축은 보시 · 지계 ·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이다.

이 중 십이분(十二分)에 다시 세 개의 축이 있다, 하나는 삶의 과정이고, 하나는 보살행이며,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불교 수행의 기반이 되는 정계바라밀다이다. 이들은 상호의존적이며 함께 증진한다. 예를 들어 정계바라밀다를 닦는다는 것은 계행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또한 정계바라밀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계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은 ‘붓다의 지위를 얻었다’라고 말해질 수 있다.

보살이 정계바라밀다를 증득한다면, 그는 여래, 아라한(阿羅漢),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 Samyaksambuddha]라고 불린다. (p. 1033c.)

정계바라밀다와 보살행은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부침까지 함께한다. 나아가, 정계바라밀다의 수행은 삶의 영속성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보살마하살들이 정계바라밀다에 머무르며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내가 닦은 정계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모든 유정들이 계율을 잘 닦고 계율을 훼손하거나 범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고 이와 같이 회향한 선근으로 온갖 유정이 모두 바른 생각을 얻게 되고, 바른 생각으로 모두가 기쁨을 얻게 하겠다.'…이 보살들이 자기의 선근을 돌이켜 유정들에게 보시한 뒤에 5백 큰 겁을 지나면서 대승의 행을 닦아야 이 세계를 벗어납니다. (p. 1040b-c.)

보살은 계를 지키고 수행을 하면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세상으로 회향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자면 계행과 보살행은 세속적인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는 세속에 대한 긍정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심지어 그 이유는 너무 그럴 듯해서 설령 보살이 그것을 기꺼워하지 않더라도 속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상기된 인용문으로 판단하면, 짧은 시간 안에 정계바라밀다와 대승의 깨달음에 완전히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셀 수 없는 세월과 윤회를 거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따라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상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그는 대승의 수행에 의지하여야 한다. 만약 그가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보시 · 지계 ·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를 따라서 수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를 상정하기 때문에 대승의 수행은 단편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波羅蜜多)”에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행하고 또 헤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수행의 구조는 이른 바 “육바라밀(六波羅蜜多)”로 불리는 여섯 가지 완성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수행은 단지 현생만이 아닌 깨달음의 길과 맞닿아 있는 하염없이 긴 윤회의 삶의 과정에도 기대어 있다.

그러나 기나긴 속세의 삶은 윤회 속에 버려져서는 안 된다. 결국 보살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윤회 속에서 수행하는 존재이다. 기나긴 윤회의 삶이란 생명 활동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속세의 삶 속에서 감각적인 문제에 관련된 다양한 결과물들과 윤회를 초래하는 여타의 요소들이 우리를 억누른다. 보살은 이러한 문제의 양상과 원인을 지각하고 인지하여야 하며, 나아가 이를 윤리적인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속적인 삶을 대승의 수행으로 회향하는 과정에서, 수행에 장애가 되고 윤회의 과정을 타락시키는 모든 행위들이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수행이란 필수적으로 기나긴 삶의 과정을 수반하는 계획이다. 수행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세속적 문제에 대한 윤리적인 고찰은 최소한 삶의 역할을 수행의 기반에서 골칫거리로 격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정계바라밀다를 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승의 수행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4. 욕망에 대한 십이분(十二分)의 윤리적 입장과 평가

문헌적 근거와 논의의 축, 그리고 세속적 삶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가 끝났다면, 다음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윤리적 고찰이다. 직접적으로 윤리적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하는 대신에 본 논문은 이 문제에 관련된 문헌적 근거들로 논의를 구성하고자 한다. 나아가 십이분(十二分)은 욕망에 관계된 일련의 윤리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기에 본 논문의 이러한 입장들에 초점을 맞춘다. 문헌을 면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에 관련된 윤리적 담론과 다양한 윤리적 평가들이 명확해 질 것이다. 따라서 이 장은 다시 아래와 같은 다섯 개의 세부 목록으로 나누어진다.

- 대승의 수행과 욕망에 관한 윤리적 입장
- 욕망에서 비롯되는 문제의 인정
- 대승의 수행에 의해 윤리적으로 조정되는 욕망의 문제
- 대승의 수행을 보조하는 역할로 변모하는 욕망
- 생사 윤회에서 나타나는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평가

1) 대승의 수행과 욕망에 관한 윤리적 입장
십이분(十二分)은 두 가지 명확한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모호함을 지양하고 매우 명확한 방식으로 윤리적 입장을 제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조적인 입장이 없이 윤리적 입장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 경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라고 명령하거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는 확고한 도덕적 원칙을 상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 경은 여러 근거들을 해설하고 이것을 이론을 구성하는 토대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사유 과정에서의 윤리적 이론들은 대승의 수행 방법과 지혜를 증진시키게 된다.

경전의 초반부에서는 정계바라밀다의 입장에서 보살의 지계와 파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욕망의 문제에 관한 명쾌한 윤리적 입장을 보여준다.

만약 보살이 재가 수행자가 되어 집에 거하면서 다섯 가지 욕락(欲樂)을 즐긴다면, 이를 보살의 파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비유하자면 왕자는 부왕(父王)의 분부를 받들어야 하고, 왕자의 배울 법을 배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왕자는 코끼리·말·수레를 타는 것부터…온갖 기술과 사업을 다 배워야 합니다. 왕자가 이런 것들을 부지런히 익히고 배워서 왕으로써 자격을 갖춘 후에는 비록 다섯가지 욕망의 갖가지 즐거움을 누리더라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들이 부단히 무상보리를 구하면 비록 집에 있으면서 다섯 가지 욕락과 갖가지 즐거움을 누리더라도 일체지의 지혜를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p. 1019c.)

상기된 인용문은 보살이 무상보리를 얻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수행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승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욕망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즐거움들은 긍정되고, 더 이상 계행을 범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읽을 수 있는 윤리적 담론은 이하의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로, 십이분(十二分)의 윤리 이론은 정합적이다. 이러한 윤리 이론은 극단적인 금욕수행이나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일반적인 원리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의 윤리이론은 욕망을 불신하거나 배척하지도, 맹신하거나 장려하지도 않는다.

둘째로, 십이분(十二分)의 윤리 이론은 전문적인 수행과의 관계를 주목한다. 욕망은 생리, 심리, 성, 권력, 언어, 혹은 문화적 양식 등 다방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십이분(十二分)은 분명 전문적인 수행을 가장 강조하고 있고, 그 수행 과정 안에서 욕망의 문제를 다루며, 욕망과 수행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셋째로, 십이분(十二分)은 전문적인 수행의 길을 여는 데에 강조하고 있다. 비록 십이분(十二分)이 수행과 욕망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그 윤리적 고찰이 소소한 수행의 이익이나 짧은 사건을 보여주는 데 그치치 않는다. 오히려 전문적인 수행이 어느 정도가 될 수 있는가를 강조한다.

서두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전문적인 수행의 길은 욕망, 특히 재가 수행자들이 경험한 욕망의 작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적 활동에 의한 경험들은 대승의 수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길에 방해되지 않고 계율을 범한 것도 아니다. 대승의 관점에서 본 수행과 욕망에 관한 명확한 윤리적 입장은 경전 내의 욕망과 연관된 이론에 의해서 지지받을 뿐 아니라 매 구절마다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다. 윤리적 입장을 보다 완전하게 설명하고 합리적인 이해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이하의 요약된 인용문을 제시한다.

ⅰ) 만일 보살들이 재가 수행자로써 집에 있으면서 온갖 다섯 욕락을 수용하더라도 성문이나 독각의 지위로 회향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 보살들은 보살의 계를 범했다 하지 않습니다. 만자자여, 왜 그러하겠습니까? 이 보살들의 깨달음을 구하는 의욕(意樂)이 물러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뛰어난 의욕입니까? 이른바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그것입니다. (p. 1022b.)

ⅱ) 만일 어떤 보살이 비록 재가수행자로써 집에 있더라도 삼귀(三歸)를 받고 불, 법, 승 삼보(三寶)를 깊이 믿어 무상보리로 회향하면 이 보살들은 비록 다섯 욕락을 골고루 수용하더라도 보살이 행하여야 하는 정계바라밀다에서 항상 멀어지지 않습니다. 또 진실하게 계행을 지킨다 하고, 보살의 계율에 편안히 머물렀다 할 수 있습니다. (p. 1020a.)
상기된 두 인용문은 모두 보살 수행의 윤리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보살행을 선택하지 않은 이에게 이 윤리 규범을 적용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인용문은 상승하기 위한 의지, 즉 수행도를 벗어남 없이 무상보리를 얻으려는 열정을 지지한다. 따라서 재가 수행자가 기나긴 삶의 윤회을 겪으면서 감각적 욕망에 얽히게 된다고 해도 그는 계율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나아가 두 번째 인용문은 수행자가 세속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고 안락함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가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을 성실히 행하되 포기하지 않는다면 파계라고 부를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2) 욕망으로 야기되는 문제에 대한 인식
비록 해당 문헌은 욕망에 관한 보살의 행위를 파계라고 말하지 않지만, 이것이 곧 욕망이라는 굴레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거나 무시, 혹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보통 사람이건 전문적인 수행자이던 간에, 욕망은 번뇌를 일으키고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에서 비롯되는 번뇌를 인정하고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그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이는 소승과 대승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요구되어지는 덕목이다. 십이분(十二分)도 예외는 아니다.

욕망에 의해서 야기되는 번뇌는 주로 마음의 동요나 혼탁함의 고통이다. 그리고 여기에 관련되는 번뇌는, 아상(我相)이나 유정상(有情相)과 같은 삶 속에서 형성된 개념에 대한 집착이다. 이러한 번뇌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번뇌에 지배당한다면, 그들은 파계를 범한 것이며 보살의 지위을 훼손한 것이 된다.

욕망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문제를 인정한 후에, 대승이건 소승이건 불교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이는 이러한 욕망을 제어하고 맞서는 것을 수행의 단계로 승화시켜야 한다. 대승불교의 경우, 전술한 육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보살의 수행을 위한 몇가지 다른 주제들을 첨부한다. 이들 중에서 근본적인 완성은 열가지 잘못된 행위[十不善業], 특히 탐욕[貪] · 증오[瞋], 미혹[恥]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보살이 보시, 지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바라밀을 닦아 점차 완전해 지니 … 살생을 벗어나고, 도둑질을 벗어나고, 사음(邪淫)을 벗어나고, 거짓말을 삼가고, 비방을 삼가고, 거친 말을 삼가고 헛된 말을 삼가고 탐욕을 없애고, 증오를 없애고, 잘못된 견해를 없애서 점차 완전해 집니다 … (p. 1041c-1042b.)

3) 대승의 수행에 의해 윤리적으로 조정되는 욕망의 문제
욕망에서 비롯되는 번뇌는 제어하고 억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보살은 또한 이러한 규제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대승의 수행에서, 보살은 이러한 경향성을 바꿀 기회를 가진다. 그리고 욕망의 층위가 변화하는 순간, 삶의 목적이 상승하게 되고, 이전의 삶보다 가치있고 안정되며 삶의 에너지도 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고한 대승의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그는 무상보리에 기반하여 행위할 수 있다. 무상보리로 회향하게 된다면, 기존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만일 보살들이 다섯 욕락에 상응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일으킨다 해도, 잠깐동안 무상보리에 상응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은 즉시 소멸합니다. (p. 1020a.)

이 인용문에서, 욕망에서 비롯된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들은 얼핏 보기에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거나 구체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열거할 필요는 없다. 보살행의 기초 단계에서는, 이른 바 “무상보리에 대한 생각”을 낳는 강한 원력을 세운다는 수승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 마음은 원력의 공덕에 의해 수승한 길을 걷게 되고, 곧 욕망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것이다. 만약 이러한 대승의 뛰어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윤리적 판단과 조정을 위한 사유의 방식이 다양화될 수 있다. 십이분(十二分)은 대승의 입장에서 욕망을 설명하였으며, 그것에 의해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 대승의 수행을 보조하는 역할로 변모하는 욕망
대승의 수행은 욕망에 관련된 문제는 이상의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의 관점에서, 욕망의 활동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욕망의 활동이 대승의 수행에 다소간의 이익을 주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탐구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선 연구의 범위를 넓히고 욕망과 종교적 수행의 다층적 관계를 하나 하나 고찰해야 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러한 논의에 관한 주요 근거이다.

보살들이 오욕(五欲)의 대상에 대하여 즐기는 마음을 일으키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무상보리를 얻는 데 크게 장애되지는 않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란 번뇌의 한 종류이니, 그 번뇌 때문에 보살들이 다음 생을 받게 됩니다. 보살들이 어떠한 때에 어떠한 길에서 어떠한 몸을 받으면 항상 보시 · 정계 ·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 바라밀다와 그 밖의 한량없고 끝없는 불법을 배워서 차츰 완전하게 합니다. 항상 보시 · 정계 ·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 바라밀다와 그 밖의 한량없고 끝없는 불법을 배워서 차츰 완전하게 하면 이 보살들은 점차 일체지의 지혜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저는 말하기를 '번뇌는 보살들에게 큰 은덕이 있다' 하노니, 이른바 일체지의 지혜에 수순하는 것이옵니다. 만일 보살들이 번뇌는 능히 일체지의 지혜를 일으키는 까닭에 보살들에게 큰 은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 보살들은 이미 온갖 일에서 방편 선교를 얻었다 하오리이다. 이런 보살들을 보살의 계율을 범함이 없고, 보살의 정계바라밀다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p. 1039b-c.)

지각은 대상과 만나 분별과 호불호를 만들어 낸다. 엄격하게 보다면 이러한 욕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욕망은 대승의 수행에 심각하게 방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욕망에서 비롯된 옳지 않은 마음이 곧 번뇌이기 때문이다. 번뇌에 의한 마음의 동요나 미혹은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게 하는 윤회 속에 머무르게 한다. 현생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내생의 태어남은 번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생사번뇌라고도 한다. 이러한 윤회 속에서 보살은 각각의 때에 태어나 자리를 잡고, 그가 태어난 장소의 삶의 모습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의 수행은 보살로 하여금 계속하여 수행하고 여러 불법을 닦아 무상보리를 얻는 것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유배와도 같은 윤회의 모습을 긍정한다.

이 이론에서 보면 대승의 수행을 닦는 이는 윤회를 계속할수록 수행의 기간 또한 길어진다. 그렇다면, 대승으로 회향하는 시간 또한 길어질 것이며, 그 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할수록 보살은 공덕을 쌓고, 공덕이 쌓일수록 무상보리에 가까워지게 된다. 소급하자면 보살이 대부분의 욕망을 낸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 심지어 “보살에게 한량없는 이익”일 수도 있다.

수행의 기초적인 단계에서는 욕망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취급되지만, 이제 이러한 욕망은 보살에게 이익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따르지 않는다면, 십이분(十二分)을 읽는 독자들은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목적은 독자들을 교조주의자들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출구를 열고 대승의 끊임없는 수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욕망을 반대하고 비난한다면, 그의 수행도 삶도 진전할 수 없다. 반대하고 비난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였기 때문이다.

욕망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면, 욕망이 보살에게 큰 이익이 된다는 주장은 마치 우리가 욕망에 빚을 지고 있는 양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애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가 극단적인 판단을 지양한다면, 그는 보다 유연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수행은 더 넓어지고 장엄해질 것이다.

진실로 십이분(十二分)은 욕망이 보살에게 큰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욕망에서 비롯되는 생사번뇌는 보살을 끊임없이 태어나게 하고, 수행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긍정되는 유일한 이유는 이러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보살이 이 기회를 붙잡지 못한다면, 이러한 잠재적인 이익은 아무 것도 아니다.

5) 생사윤회에서 나타나는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평가
욕망은 인간을 윤회하게 하지만, 윤회는 수행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수행과 관련한 아래의 두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첫째, 욕망에 대한 윤리적 평가의 근거는 무엇인가?

둘째, 대승의 관점에서 욕망과 깨달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서 단순히 윤회를 연장하는 측면의 욕망만을 강조한다면, 욕망을 비판하고 배척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이러한 삶의 과정을 끊임없는 수행과 연결한다면 욕망은 보살에게 무한한 이익이 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단편적인 명제에 국한되지 않고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십이분(十二分)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만약 정계바라밀다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대승의 윤리적 판단에 기대어야 한다.”

욕망은 모두 잘못된 것인가? 윤회는 가치를 지니는가? 이러한 윤리적 담론들은 욕망의 현상적 모습이나 윤회 속에서 대답을 얻기 힘들다. 몇몇 단편적인 담론에 빠질 가능성에 직면하여, 하나의 방법은 욕망과 윤회를 수행의 과정으로 변화시켜 대승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승을 향한 지향성에 의해서 적절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욕망과 윤회가 대승의 모습으로 변화한다면, 이를 대승에 기반한 윤리적인 판단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이분(十二分)은 욕망이 윤회를 만들고 윤회가 수행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비롯되는 생사번뇌가 큰 이익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보살행의 윤리라는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의 요지는 대승의 수행에 근거하고 있다. 아래의 두 인용문이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ⅰ) 보살들이 비록 무수한 생을 지나면서 계행을 닦아 완전하게 하여도 무상보리로 회향하지 않거나 끊임없이 유정들에게 큰 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이 보살들은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를 원만케 하지 못합니다. 또 보살들이 비록 무수한 생을 지나면서 계행을 닦아 완전하게 하여도 마음을 성문이나 독각으로 회향하면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를 원만케 하지 못합니다. (p. 1021c.)

ⅱ) 만일 어떤 보살들이 비록 무수한 생을 지나면서 부지런히 범행(梵行, brahma-c?rya)을 닦지만 이승(二乘)의 경지로 회향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청정한 계를 지니는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만자자여, 그는 정계바라밀다를 버리고서 성문이나 독각승의 계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살이 성문이나 독각의 계에 머무르면 보살이라 할 수 없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보살들은 정계바라밀다를 멀리하고, 일체지의 지혜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절대 위없는 정등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 1022b.)

위 두 인용문은 모두 보살이 무수한 생 동안 청정한 계행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대승의 길에서 벗어나거나 잘못된 길을 택한다면 그는 정계바라밀다에서 멀어지고, 정계바라밀다의 공덕을 쌓아나갈 수도 없으며, 완성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고, 일체지의 지혜에도 흥미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불교 수행자들을 “계율을 지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국 무상보리를 얻지 못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오직 대승의 전문적인 수행자인 보살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직업 윤리학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어떤 이가 무수히 많은 생 동안 수행한다 해도 대승으로 향하지 못한다면 그의 수행은 대승의 보살행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보살의 계행을 지녔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생사번뇌를 통하여 윤회한 수많은 삶들 또한 보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정할 수 없다. 보살의 수행에 하등의 이익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허비한 시간들과 윤회를 관통하는 수행은 생사의 고통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보살행을 닦는 데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보살의 윤리적 입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상기된 두 인용문에서, 대승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는 ‘무상보리로 회향하는 것’과 ‘끊임없이 유정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보살행으로 향함과 동시에 “정계바라밀다”를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상기된 두 인용문이 무수한 시간을 수행하는 데 할애하더라도 보살의 계행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대신, 다음의 두 인용문에서 보살의 계행을 얻는 것을 단호히 확신한다.

ⅰ) 보살들이 보시한 것마다 모두를 무상보리로 회향하여 끊임없이 유정들에게 큰 이익을 준다면 이것을 보살들이 계행을 지키는 것이라 합니다. 만일 보살들이 계행을 지킨 것마다 무상보리로 회향하여 끊임없이 유정들에게 큰 이익을 준다면 이것이 보살들이 계를 지니는 것입니다. (p. 1021c.)

ⅱ) 보살들이 일체지의 지혜를 증득하고자 하면 이 보살들은 보시, 나아가 반야바라밀다를 닦는데 한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때에 따라 오래도록 생사에 머물러서 보살행을 닦으면 그때에 닦은 보시, 나아가 반야바라밀다가 차츰차츰 이루어져서 일체지의 지혜를 증득할 만하게 됩니다. (p. 1022c.)
위 인용문은 “보살의 정계바라밀다”를 얻기 위해선 수행하는 데 쓰여진 무수한 생애와 더불어 대승을 향한 무상보리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대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는 무상보리로 회향하며, 끊임없이 유정들에게 큰 이익을 주고, 수무한 생애 동안 보살행을 닦는 것이다.

상기된 네 인용문으로 인해서 욕망과 욕망에서 비롯된 윤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욕망과 윤회는 긍정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는 우연히, 혹은 경우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승의 보살행이라는 명확한 기준에 의해서 평가된다. 어떤 이가 자신의 욕망과 생사윤회를 대승의 보살행으로 회향할 수 있다면 모든 행위과정은 보살의 윤리라는 입장에서 분명하게 인정된다. 그렇다면 욕망과 윤회는 보살의 수행 방편이 되므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욕망과 윤회가 대승의 보살행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보살의 자격이 없으며, 보살행의 윤리적 관점에서도 부정적이다.

5. 결 론

본 논문의 관심은 세속적 욕망의 문제였으며, 중심 문헌은 반야경 십이분(十二分)이었다. 이 경전은 대승의 입장에서 욕망에 대한 윤리적인 고찰과 가르침을 수행한다. 나아가 욕망을 변화시키고 출구를 열어주는 것은 대승의 보살행이다. 어떤 이가 생각을 전환하여 수행하고자 한다면 욕망은 대승의 수행을 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살의 수행에 이익이 된다.

반야경 십이분(十二分)의 주제는 보살의 주요 덕목인 계행을 지키는 데에 있다. 보살이 정계바라밀다를 수행하여 대승에의 길로 나아가면서, 무자성, 공성, 불이성에 대한 이해 혹은 명상으로 보충하고, 지계의 수행을 무상보리, 혹은 일체지의 지혜를 얻는 데로 회향하거나 모든 중생을 차별없이 이익되게 하고 제도한다면, 그들의 수행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키는 계행을 곧 정계바라밀다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경전에는 세 축이 있다. 하나는 삶의 과정이고, 하나는 보살행이며, 마지막 하나는 대승의 깨달음에 수반되는 정계바라밀다이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증진된다. 대승의 수행은 매우 장기적인 계획이기 때문에, 이 계획은 필수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대승에서,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윤리적인 고찰은 최소한 삶을 필요조건에서 부담으로 격하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철저한 윤리적 고찰은 정계바라밀다를 완성할 뿐 아니라 대승의 깨달음을 촉발한다.

대승의 수행은 매우 전문적인 것이어서, 그들만의 독특한 윤리적 구분이 있다. 즉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보살의 “지계”와 “파계”에 대한 판단, 그리고 보살이 정계바라밀다를 버렸는지 지키는지에 대한 판단 등을 고려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전문가로서의 보살”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보살의 계행”이다. “보살의 계행”이라는 관점에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대승의 길 위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변화의 기회도 주지 않고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한편, 욕망에 의해서 여러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들이 도출된다.

대승의 입장에서 욕망을 윤리적으로 평가하게 되면, 우선 극단적인 견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 극단은 욕망을 윤리적으로 완전히 불건전한 것으로 보거나 마치 병균처럼 보살의 수행에 완전히 위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고, 다른 극단은 욕망을 완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보거나 마치 영양분처럼 보살의 수행에 완전히 이익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두 견해는 대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관계에서 욕망을 따로 떼어내어 판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십이분(十二分)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고찰의 성격과 맞지 않다.

이와 같은 두 극단적인 견해에서 벗어난다면, 대승의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연관된 이하의 여섯 가지 윤리적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ⅰ) 십이분(十二分)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 이론은 보살이 무상보리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들이 재가 수행자로 남기를 원한다 해도, 그들이 수행의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떠한 감각적 쾌락도 용인되어질 수 있으며, 계율을 범하는 것도 아니다.

ⅱ) 욕망에서 비롯되는 번뇌와 집착과 같은 문제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여 계율을 범하고 무상보리를 향한 노력들을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보살은 자신을 제어하고 십불선업과 같은 욕망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어와 규제는 보살의 능력과 수행의 기초를 만든다.

ⅲ) 종종 욕망은 번뇌와 연관되기 때문에, 보살은 대승의 수행에서 발휘되는 뛰어난 힘을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상보리로 회향한다는 생각은 욕망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동시에, 이러한 힘은 욕망을 윤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ⅳ) 욕망에서 비롯되는 생사번뇌는 끊임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초래하기 때문에, 욕망은 수행의 기회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욕망은 보살의 기나긴 수행에 이익이 되기도 한다.

ⅴ) 어떤 이가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 끊임없이 수행하여 왔더라도 대승의 길에서 벗어났다면, 그의 수행은 보살의 행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살의 계행이라는 관점에서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윤회 속의 삶도, 생사번뇌와 같은 윤회의 주요 요소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보살의 수행에 이익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허비된 시간들과 윤회의 요소들은 생사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취급되어 보살의 수행으로 회향하는 데 실패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ⅵ) 그러나 어떤 이가 욕망과 윤회를 대승의 수행으로 회향한다면, 욕망과 윤회는 대승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보살의 수행에 이익을 주고, 이 모든 과정이 보살의 윤리적 관점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는다. 이러한 경우, 욕망 혹은 윤회는 보살의 수행에 기여하기 때문에 명백히 긍정적인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야오밍짜이(Yaoming Tsai) 
국립 대만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상민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과정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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