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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의 윤회 / 윤창화
[40호] 2009년 09월 10일 (목) 윤창화 민족사 대표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보면 대부분 극과 극의 대립만 존재할 뿐이다. 쌍용자동차의 노사 간 대립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난타전 끝에 무려 70여 일 만에 극적으로 타결을 보았다. 신문은 대문짝만 하게 머리기사로 뽑았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국회는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듯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극과 극,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양보와 이해, 대화의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확실히 국회의원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러니 민의의 대표로 선출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일단 총선에서 여당이 되었다 하면 과거 야당 시절의 정책은 내팽개치고 전형적인 여당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야당도 여당 시절의 옹호적인 입장에서 급변하여 걸핏하면 거리로 뛰쳐나가고 있다. 입장과 위치가 바뀌어도 여당은 여전히 여당의 기질대로 움직이고 야당은 야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매번 합리적인 사고와 지성적 사유,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늘 감성적이고 즉흥적 사고에 휘말려서 극한 대립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일까? 모두 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면서도 주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극과 극의 문화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오래전부터 극과 극의 논리가 한 시대를 주도해 왔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당파 싸움이 그 원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조 당파 싸움은 4대 사화(士禍)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번 싸움을 시작했다 하면 상대 일파를 거의 전멸시켜야 1회전이 끝난다. 그리고 2회전을 치루어서 다시는 소생할 수 없도록 씨를 말린다. 한 번에 보통 30~50명 정도의 선비들이 정쟁에 휘말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4대 사화(士禍)’ 외에도 크고 작은 정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쓸 만한 인재는 이 판국에서 다 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파 싸움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억지로 내린 것이다. 역사를 전공하는 어느 학자는 조선시대 당파 싸움을 평하여 ‘정당정치의 모델’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한 이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정치의 본령이 상대 일파를 전멸시키는 그런 정치라면 그것은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의 수법이지 지성인이 행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하의 대일항쟁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이 속에서도 극한의 논리는 계승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 투쟁은 극과 극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36년간의 고통은 어느새 내팽개치고 결국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남과 북은 극과 극의 산물이다.

그 후 현대정치사도 모두 극과 극의 대립이었다. 1960년대도 그렇고, 1970년대, 80년대도 그렇다. 특히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사 간의 갈등은 화염병으로 치달았다. 어떻게 하든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통한 화합보다는 극한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이즈음 정치권 즉 국회도 마찬가지이다. 걸핏하면 치고받고 일방적인 통행에 가두시위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와 같이 극과 극을 달리며 다혈질인 데 대하여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음식문화와 관련지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은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보다는 맵고 짠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로 인하여 성격이 그와 같이 바뀌어 갔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과 극, 다혈질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 자기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혹은 지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하며 자기 판단력이 없이 쉽게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끈한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이와도 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과거는 교육 수준과 문화적 혜택이 부족해서 합리적인 사고나 자기 판단력을 갖출 수가 없었고 또 이성적인 사유를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왜 합리적이며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왜 자기 판단력이 없이 남의 판단에 휩쓸리는가?

특히 대학은 주입식 교육과 밥벌이를 위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다. 인성을 개발하여 좀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관문이다.―사실 요즘 대학은 벌어먹고 살 방법이나 가르쳐 주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또 합리적인 사고를 갖게 하고 이성적 지성적 사유를 갖게 하며, 자기 판단력을 갖게 하는 그런 교육의 장이다.
우리도 이제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연륜이 되었다. 천박한 기분파 문화에서 벗어나서 좀 원숙하고 어른다운 행동과 생각을 해 볼 때가 되었다. 성숙하고 세련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가 되었다.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여유와 마음을 가질 때가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문화가 토론과 이해, 양보와 겸양의 미덕보다는 경쟁에 길들어 있는 습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후천적인 연습에 의하여 충분히 수정하고 개선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교육이 아닌가?

현재는 좀 미숙하지만 부단한 연습을 통하여 성숙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가 있다. 쉽게 감정에 휩쓸리거나 어린애처럼 투정만 부리지 말고, 이성적이고도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와 생각을 해 보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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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2)  
양파
2009-12-06 06:24:32
진짜 소경? 생명은 낳는것이지 지식으로 배우는것이 아니다.
[요한복음9장39절-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춘명(이종귀)
2009-11-19 16:35:20
진흙 구덩이에 빠진 코끼리 몸을 동서로 요동치다.
범부가 사는 세상에는 극과 극의 붕당이 없을 수 없다. 이를 이해와 타협 등으로 조화롭게 유도할 수 있는 지식층은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없는가? 글쎄이다. 어떤 출판사는 대승경전을 시리즈 형태로 제작할 것을 계획은 하고 있으나 돈이 안 되는 경전의 번역물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경전은 바르게 깨달아 갈 수 있는 경전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없다"라는 말은 돈의 극에 치우침이 아닌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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