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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觀心) / 오세영
[40호] 2009년 09월 10일 (목)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당신도 그런 면이 있네.” 황당한 듯 아내가 내뱉는 소리. 피부과에서 얼굴의 검버섯 제거 시술을 받고 집에 막 들어서면서다. 나는 사실 그날 검버섯을 제거하기 위하여 병원에 갔던 것은 아니다. 손톱의 검은 반점이 신경 쓰여 한번 들려본 것인데 난데없이 얼굴에 상처를 입혀 돌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내의 잔소리. 수술 부위를 땀이나 물에 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햇빛도 절대 쏘여서는 안 된다는 것, 외출할 때는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는 것, 밖에서는 항상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 등…… 그러다가 결론적으로 의사를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하더니 이 같은 시술은 겨울철에 받아 마땅할 것인데 왜 하필 햇볕이 쨍쨍 쬐는 이 삼복 더위에 해야 했는지 자기가 없으면 꼭 냇가에 내 논 어린아이 같다고 타박이다.

사실 내 자신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시골 머슴같은 생김새로 세련된 도시 감각이란 손톱만큼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지금까지 용모에 별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던 내가……. 고백하건대 나는 결혼 이후 지금까지 내 스스로 옷 한 벌, 티셔츠나 넥타이 한 장을 사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면도 후의 스킨 로션만을 예외로 한다면― 얼굴에 화장품 아니 밀크로션 한번 발라 본 적이 없었던 한평생이었다. 그런 내가 느닷없이 얼굴 성형을 했으니 따지고 보면 내 자신 나를 잘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올 만도 하다. 하물며 타자인 아내의 경우랴.

그러고 보면 거의 40여 년을 한방에서 함께 살을 부비고 살아온 부부이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그 누구보다도 믿는 사이이지만, 눈짓이나 얼굴 표정을 넘어서 그가 남긴 방안의 체취, 그 빈 공간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가히 짐작하는 관계이지만 가끔 또는 돌발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측면들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일들이 한두 번 아니다. 잘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다고 믿고 있었으나 기실 우리는 그 진정한 내면을 서로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이다. 40년 가까이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생활해왔으면서도…… 한평생을 같이한 부부간이 그럴진대 그렇다면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안다고 한들 이 세상 그 무엇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 것인가. 참으로 인간의 한 세상은 모르는 것을 하나씩 깨우치면서 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제사 때 지방을 쓰면서 옛 현인께서도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 일컫지 않았던가.

요즘 나는 안성(경기도 안성) 교외에다 작은 오두막 하나를 짓기 위해 틈이 나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기도 하고, 집터 근처의 산속을 헤매기도 하고, 앞 저수지로 흐르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새삼 놀란다.

지금까지 골칫덩이로 생각해서 항상 제거하려고만 들었던 텃밭의 잡초들이 개개로 놓고 보면 얼마나 의미 있는 생명체들인지. 황혼에 덩그렇게 핀 달개비 꽃들은 또 얼마나 고귀한 기품을 드러내 보여주는지. 무성한 개망초들의 그 하얗고 가냘픈 꽃잎들이 얼마나 순결한 아름다움을 환기시켜주는지. 예전 같으면 징그러웠을, 풀숲을 헤치고 기어가는 그 꽃뱀조차도 사랑스럽고 예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젊은 시절의 나는 이 같은 진실을 보지 못했을까. 달개비보다는 장미에, 개망초보다는 모란에, 뱀보다는 공작이나 꾀꼬리에 더 현혹되어서 그랬을까. 내 영혼 이슬 되고, 내 육신 흙 되는 날 가까워져 이제 비로소 눈이 열린 탓일까. 

누구나 인간은 참답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삶이 참다운 것일까. 당연히 그것은 무엇이든 참다운 앎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이지 싶다. 나를 둘러싼 이 우주를, 우리를, 너를, 그리고  내 자신을……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나 인연이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우선 그 진정한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설령 ‘무(無)’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런데 그 무엇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영어로 ‘나는 안다’는  ‘I know’가 아니라 ‘I see’ 이다. 불어에서 지식 혹은 진리를 가리키는 ‘savoir’도 원래는 ‘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어 ‘진리(큃큑큈???큌)’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숨은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 한국말에서도 ‘눈에 밟히도록 꿰뚫어 보라’고 하지 않던가.

참답게 보아야 할 일이다. 그래서 참다운 혹은 참답게 살고자 하는 인간은 그 무엇보다 ‘나’와 세계를 확실하게 보아야 한다. 보고 참답게 찾아야 한다. 이 사바세계를 관자재(觀自在)하고 관세음(觀世音 Avalokite굴vara)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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