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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현대철학의 동일성과 차이의 늪에서 벗어나기 / 박치완
- 희론(戱論)을 경계하고 참 진리를 참구하라!
[40호] 2009년 09월 10일 (목) 박치완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적절하지만 남들은 적절하지 않다’고도 하면서 드디어 황하(黃河)와 한수(漢水)를 이루었구나!”
―원효, 《십문화쟁론》

1. 들어가는 말

‘합리적 존재’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효율성의 노예다.1) 이를 맥루한은 ‘배열하고, 수량화하고, 명명하는 능력’이 탁월한 서양인의 특징으로 분석하면서, 좌뇌부가 발달한 서양인들의 문화가 21세기에 ‘동시성, 전체성, 종합성’에 있어 그 능력이 탁월한 동양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까지 예언하고 있다.2) 서양인들은 맥루한의 이와 같은 참언(讖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동양인이라면 십중팔구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하고 내심 바랄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맥루한의 이와 같은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이미 100여 년 전에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동도서기(東道西技)라는 논제를 중심으로 학자들 간에 열띤 논쟁이 전개된 바 있는 내용의 반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말로는 우리 스스로가 동양 문화의 핵이라고 수없이 강조해왔고, 또 현대에 와서는 서양인들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동양의 도(東道)이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의 생각과 몸에 익은, 익숙한 상태인지는 의문이다.3)

바로 여기에 늘 현안(懸案)이 있고 딜레마가 상존(常存)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우리의 삶의 양식과 생활 방식은 철저히 서양화, 세계화된 문화(culture occidentalis켌e et am켌ricanis켌e)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욕구와 취향, 생각과 사유까지도 ‘우리의 본질적인 것’과 괴리를 보인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는가 하면, 심하게는 무관심하기까지 하다는 데 있다.

이렇듯 우리 자신에게서도 이미 동도(東道)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서양인들이 인정하는 것이니 이제 와 불교며 도교의 사상을 동양 문화의 본질이라고 연회(宴會)를 벌이면서 널리 광고·선전해야 할까? 그것들이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이라며 서양인들의 목소리를 빌어 앵무새 역을 해야 할까?

불교를 통해 현대의 문명사적 위기를 진단해보려는 이번 《불교평론》의 기획 심포지엄에서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점이다. 요인즉 서양인들의 학문적 자기반성 과정에서 간취(看取)된 몇몇 개념들 중심의 ‘동양의 사상’이란 것이 과연 동양의 핵심적인 사상인지도 진지하게 캐물어보아야 겠지만, 그것마저도 동양인인 우리에게 이미 낯선 것으로 느껴진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저자가 한 논문에서 지피(知彼)와 지기(知己)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4) 지피지기(知彼知己)하지 못하면 그 어떤 주장도 자기도취적 유아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 땅에서의 제 학문이 사대주의의 족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결국은 해결책을 안이 아닌 밖에서 찾은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지피지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지난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해 애써 가꾸어 놓은 학문의 결과를 수입해 와 전파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논의가 불교도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동양 문화에서 학문의 미래를 엿보는 서양 학자들의 일시일견(一時一見)에 의존해 흡족한 웃음을 지을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내부적인 역량을 길러야 할 때이다.5) 안과 밖의 변증법적 교류·교차 없이 동양/서양, 불교/기독교라는 고질적 이분법은 타파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양 문화 간 소통을 가로막고 차별을 통해 유무형의 폭력을 양산하는 주범이 바로 위계를 위해 구분하는 이분법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문화들 간의 진정한 대화는 타 문화에 대한 일방적 폄하나 일방적 예찬과 같은 동일화(identification)가 제일의 적이고, 타 문화와 무관한 자기도취적(盜取的) 독백 또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아킬레스건이다.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들 간의 진정한 대화는 타 문화와 자문화를 등가(等價)로 놓았을 때 비로소 시발될 수 있는 것이다.6) 문화들 간의 대화는 이렇듯 둘이 각기 등가, 즉 형평을 이루면서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변증법적 대화가 진행될 때가 아니고는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논리(logique de l、identit켌)의 늪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7)

동일성의 논리는 주지하듯, 배제의 논리이며, 여기서 배제의 대상은 나(우리)와는 다른 것, 즉 차이, 타자 등이 될 것이다.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시키는”8) 것이 요구된다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동일성의 논리는 학문과 현실 영역 곳곳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양 철학사를 ‘중심 대체 시리즈’로 파악한 데리다의 지적처럼9),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아무 곳에도 없다는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10), 동일성이 늘 주인 역을 맡고 있는 한 결국 차이와 타자의 배제는 지구촌 곳곳에서, 삶의 현장과 문화 향유 및 사고 과정 속에서 계속 횡행활보할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대화(對話)라는 어의(語義)가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듯,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하겠다. 자문화에 대한 자화자찬이나 차이, 타자에 대한 일방적 폄하만으로는 우리 앞에 주어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주 봄은 언젠가 ‘완성되어야 할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단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우리가 본고에서 논구해보려는 주제도 이런 점에서는 언젠가 완성되어야 할 동양/서양, 불교/기독교 간 대화를 위한 예비 작업일 수 있다.

이런 전제로 우리의 작업은 i)차이와 타자성의 철학자로 분류될 수 있는, 차이와 타자성 개념을 현대 철학의 전면(前面)에 배치시키는 데 일조한 보드리야르, 데리다, 들뢰즈, 푸코, 레비나스 등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postmodernistes11))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개략해보고(제2장~제3장), ii)이를 용수(龍樹)의 중도(中道) 사상과 원효의 화쟁 사상 등을 통해 재고해보고자 하며(제4장), iii)동양/서양, 불교/기독교 간 상통(相通)을 위해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에 어떤 것이 있는지를 제안하면서(제5장) 본 연구를 마감할까 한다.12)

2. 기호, 차이와 타자성의 블랙코미디가 남긴

직업인으로서 학자에게 학문은 노동이지만, 일반 독자에게 학문은 관심이 있으면 볼거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그런데 어떤 학자가 만일 자신이 하는 일 자체를 무용지물, 기호를 통한 유희거리 정도이니 “큰 신경 쓸 것 없다”며 되레 독자를 향해 강변을 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의 태도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럴 것이면 차라리 입을 다물 일이지……”, 필자라면 분명 이렇게 응대했을 것이다. 무용지물을 애써 생산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더더욱 자신의 삶을 그런 일에 허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 기호를 통한 유희를 ‘새로운 학문의 지향’이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즐기며 유행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감히 직언컨대, 소위 프랑스의 탈현대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학문은 철저히 언어 게임, 기호의 유희일 뿐이며, 이들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사유 전통을 이끌어온 이성, 오성, 지성의 후원군이라 할 수 있는 동일성의 논리로 구성된 철학적 체계이며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있기에, 리오타르의 표현대로라면 ‘테러리스트’인 셈이며, 그러한 테러의 결과로 이들이 획득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동일성에 의해 배척된 차이(diff켌rence)이며 타자성(alt켌rit켌)이다.

스스로가 ‘탈현대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는 보드리야르가 이와 같은 노선에 선 대표적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소비의 사회》의 사회 결론에서 강조하고 있는 두 문장을 먼저 소개하고, 필자 나름의 의견을 부언해볼까 한다.13)

소비과정은 더 이상 노동의 과정도 지양의 과정도 아니며, 기호를 흡수하고 기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 소비를 특징짓는 것은 초월성의 종언이다.

개인으로서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 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와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을 직시하는 일도 없으며, 자기 자신의 상(像)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의 내부에 존재할 뿐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 ‘자본’과 ‘상품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는 ‘근원적인 소외의 시대’이다.14) 그에 따르자면 삶을 방향 짓는 이정표와 과녁을 잃어버린 이 시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반성의 거울이 없는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것은 오직 기호뿐이며, 인간 존재도 결국은 기호의 조작과 기호의 계산 속에 편입되어 기호의 일부가 되고 만다.

그에게 인간은 결국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강조한 바 있는 노동하고(travailler) 발화하며(parler) 삶을 꾸려가는(vivre) 존재가 아니라15) 무한정 소비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전시된 무수한 기호들을 교환, 기호들의 거래만이 존재일 뿐이다.16) 이렇듯 소비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차이화(diff켌renciation)와 초차이화(surdiff켌renciation)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교환가치로서 생산된다”17)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 스스로도 잘 지적하고 있듯, 이렇게 기호를 교환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타자가 된다”18)는 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은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존재로 전락하며, 영화 〈프라하의 학생〉에서 보듯, 급기야는 죽음이 그 유일한 목숨의 보환(報還) 수단이 된다. 그래서 그는 감히 단언한다: “죽음 이외에는 〔이러한〕 소외를 피할 방법이 없다.”19)

현대의 소비사회, “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20)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란 뜻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자면, 자본과 상품 그리고 교환가치가 지배적인 이 시대는 결국 휴머니즘의 종언을 의미하며 동시에 초월성의 종언, 다시 말해 모든 가치의 종언을 대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본고에서 우리가 말머리로 삼은 차이며 타자성이 과연 동일성의 대화 상대자나 적극적 의미의 대(對) 개념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차이나 타자성의 철학자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데리다나 들뢰즈 또는 푸코나 레비나스와는 다른 보드리야르의 괴설(怪說)이 위치한다. 한마디로 그의 극단적 괴설 속에서는 기호가 모든 것을 빨아들여 그 자취와 흔적을 지워버리는 블랙홀로 작용한다. 다음 문장을 보노라면 이 점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 모든 것이 기호의 질서에 둘러싸여 존재하고 있다.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켌) 사이에는 존재론적 분열이 아니라 논리적 관계가 있듯이, 인간 존재와 그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분신(인간 존재의 그림자, 혼, 이상) 사이에도 존재론적 분열이 아니라 기호의 논리적 계산과 기호체계로의 흡수 과정이 있을 뿐이다.21)

이렇듯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는 기호가 곧 블랙홀이며, 통칭 블랙홀의 표면이라고 하는 이와 같은 ‘사건의 지평(Event Horizon)’ 위에서는 모든 존재며 의미, 역사 등의 가치가 소멸되고 철저히 무화(n켌antiser)된다. 소멸되고 무화된 채 자유롭게 교환되지만, 문제는 기호가 정작 지시하며 의미하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기호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22), 기호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이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23) 그저 기호들 간의 자유로운 유희만이 성사되면 그만이란 뜻이다.24)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동일성도 차이며 타자성도, 인간도 신도, 동양도 서양도, 불교도 기독교도 모두 그가 말한 ‘기호’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며, 소위 ‘시뮬라크르’로 전추(顚墜)된다. 그가 다음과 같이 인간존재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전제하에서다.

동일한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서의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동일한 것의 타자성도 본래 의미에서의 소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25)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는 인간 주체 역시 기호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서 “시뮬라크르를 하는 것이고, 시뮬라크르들”26)일 뿐이다. 때문에 그는 주체도 타자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단언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렇듯 그의 사상적 키워드들(기호, 시뮬라크르)을 모두 전통의 구분과 경계, 가치와 의미를 해체시키고 무화시키면서 지탱시키고 있다. 그에게 전통의 ‘지시’의 대상이나 ‘구분’의 영토는 이제 무의미하며27), 기호, 시뮬라크르가 이것들을 완전히 대체한다고 그는 확신하는 것 같다.

그리고 기호와 시뮬라크르가 바로 자본과 상품, 소비와 교환가치에 바치는 ‘하얀 미사(messe blanche)’28)를 가능케 한다고 보드리야르는 신앙하고 있다. 그가 정보시대의 사도, 소비사회의 전도사로서 지나치게 앞서 추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21세기의 지적 지형도는 이와 같이 기의 없는 기표들로만 구성된 ‘기호의 제국’이다.29)

3. 반(反)논리, 동일성의 대(對)인 차이와 타자성?

기호와 시뮬라크르가 우리의 현실은 물론 사유의 천공까지 뒤덮고 있는 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호가 또는 그것의 파생실재가 역으로 인간을 포위하고 사회 전체를 무원칙의 세계로 만들어버린 한, 그 어떤 우리의 몸부림이나 저항도 난센스로 그칠 수밖에 없다.

기호와 시뮬라크르의 대사 보드리야르의 외침대로라면, 이제 더 이상 “타자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30), “차이가 사라져”31)버렸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기호와 시뮬라크르로 복제되어 떠돌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서 차이와 타자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도 무용한 작업으로 그칠 수 있다.

“타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사라져버렸다”는 보드리야르의 선언은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를 전한다. 하나는 전통의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를 동일성의 대체물로 내세우는 차이의 철학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의 눈에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은 동일성의 반논리에 갇혀 있는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연극은 반-연극으로, 예술의 증거는 반-예술로, 교육학의 증거는 반-교육학으로, 정신의학의 증거는 반-정신의학으로, 등.32)

보드리야르가 볼 때 그러나 이 반논리는 “옛날에 역사에 관한 담론은 자연의 담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힘을 취했고, 욕망의 담론은 권력의 담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힘을 취했던”33)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치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자신이 추방된 형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 용어로 변신”34)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에 대해 부정으로 말하는”35) 이들의 반논리는 결과적으로 동일성의 논리와 “동일한 유형의 요구 속에서 서로 용해되며” “기표들과 시나리오를 교환한다.”36) 그런 점에서 보드리야르는 이들의 반논리, 즉 차이며 타자성의 논리를 동일성의 논리와 공범 관계에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드리야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사실 차이를 상표로 내건 철학자들의 반논리, 이론적 무지향성, 비인식론적 태도에도 우리가 분명 재고해야 할 점들이 없지는 않다.37) 들뢰즈는 카오스와 시뮬라크르 개념을 통해 그리고 데리다는 차연(diff켌rance)과 비결정성 개념을 통해 자신들의 반논리를 정식화시켰다. 앞서 우리가 논한 보드리야르의 기호와 시뮬라크르가 동일성은 물론 차이와 타자성마저 무화시키는 것이라면, 들뢰즈와 데리다의 차이는 동일성의 대(對)로서 차이와 타자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떻든 간에 문제는 반(反)―논리, 즉 반근대적 논리, 비이성적 논리, 비논리(logique illogique)에 의탁한 차이의 철학자들의 주장(차이와 타자성)은 모순을 떠안은 논리, 용수(龍樹)의 중도관(中道觀)이나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의 논리와 달리 동일성의 논리와 유사한 폭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38) 동일성의 논리(A=A)나 진배없이 차이와 타자성의 논리인 ―A 역시 배타적이기는 마찬가지란 뜻이다. ‘~이 아닌 것’이 ‘~인 것’의 그대로 흉내를 내는 꼴이라고나 할까. 설상가상으로 ‘~이 아닌 것’이 전혀 ‘~인 것’ 이상의 것을 지향하지도 의도하지도 않는다는 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차이의 권리를 주장하려다 오히려 스스로 파 놓은 진퇴유곡의 막다른 골목에 빠진”39) 경우가 ―A의 논리의 핵심 개념들인 차이와 타자성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i)동일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마저도 간과하게 되며, ii) 나아가서는 동일성과 차이의 공통 지평을 개척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40)

“우리는 동일성이 어떤 것인지 다시 고민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며, 바디우가 자신의 선배들의 철학적 태도, 즉 이들의 반논리, 아니 극단적 논리의 무책임성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재고한 게 우연이 아니다.41) 그런가 하면 철학사가 트로티뇽도 일찍이 철학의 위기나 종말을 광고하는 당시의 소위 ‘신철학자들’을 겨냥해, “아무나 무엇이든 떠벌이는 기묘한 시대(une 켌poque curieuse o켢 n’importe qui peut dire n’importe quoi)”가 되었다고 염려하면서 “작금의 철학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사학적으로나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새로운 반성적 노력(un nouvel effort r켌flexif)이 필수적”42)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렇듯 소위 탈현대철학자들에 대한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의 비판과 반성이 촉구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우리로서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차이’ 또는 ‘타자성’이라는 개념, 이들의 성상파괴적인 모험에 대해 뇌동부화할 것은 없고 또 솔직히 이를 원론 차원에서 재론해야 하는 시점도 이미 지난 것 같다.43) 이제는 이들의 인식론적 고민 부재가 몰고 온 학문(철학)의 위기와 비상식적이며 도(度)에 벗어난(a-cat켌gorique, a-m켌thodique, nomadique) 단순 수사에 대해서 비신화화 작업(re-d켌construire)이 수반되어야 할 때라 생각되기 때문이다.44) 뤽 페리와 알랭 르노의 지적처럼 ‘이론적 내용을 쇄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오직 하나(또는 그 이상)의 ‘개념을 형태화’시키는 데만 집착한 것이 이들 사상이 유혹적임에도 불구하고 호소력이 약한 직접적 이유인 것이다.45)

동일성의 논리 차이의 논리
언어관 진리의 매개/수단 오직 기호/기표로 기능
사유의 목적 이상계의 모방을 통해 현실계 구원 旣진리의 해체와 카오스적
세계 구성
세계의 근원 일자(一者, 神) 多者/시뮬라크르로서 차이
논리관 A = A ―〔―A〕 = (A)

논의를 요약하는 의미에서 필자가 한 논문에서 작성했던 도표를 간략히 소개(156쪽)하면서 보충 설명을 해볼까 한다.46)

도표에서 재삼 확인할 수 있듯, 반논리인 차이의 논리는 기존의 모든 진리를 해체시켜 오직 기호와 기표들만이 난무하는 카오스적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으며, 배제의 대상은 동일성의 논리를 통해 구축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재삼 강조하지만 차이의 논리가 결국 동일성(유사성)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앞서 이들의 인식론적 고민의 부재를 문제로 삼았던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다.47) 구체적으로, 들뢰즈의 경우를 그의 대표 저작인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는 존재나 동일자에 존재론적으로 앞서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와 동일자의 위계를 그대로 반복한다. 아니 더 직접적으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차이로부터 발생하며, 차이는 들뢰즈에게 결국 “〔마치 전통의 실체에 관한 정의처럼〕 요소, 궁극적 단위”이기도 하다.48) 결국 들뢰즈의 소위 ‘차이론’에서는 차이가 모든 존재의 발생과 관계를 전유한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차이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거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재발견한다.49)

바로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존재론의 윤곽이며, “〔차이는〕배후에 있는 다른 차이들과 관계해야 한다. 이 배후의 다른 차이들에 의해서 차이는 결코 동일한 정체성 안에 빠지지 않으며 다만 분화의 길로 들어선다. 한 계열의 각 항은 이미 차이를 띠므로 다른 항들과 가변적인 관계에 놓여야 하고, 이로써 중심과 수렴이 없는 다른 계열들을 구성해야 한다. 계열 안에서조차 발산과 중심 이탈을 긍정해야 한다.”50)

굳이 재론할 것도 없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차이와 차이들의 관계로 회돌이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다른 차이들과 구성하는 분화, 발산의 계열을 통해 자기를 끝없이 전개·확대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의 자기 분화적 운동에 지향점도 수렴점도 없다는 데 있다. 때문에 그의 표현대로 “고정된 것이라곤 전혀 없는 연극”51), 다시 말해 메이에르의 지적처럼 ‘차이의 쇼’만이 상연될 뿐이다. “동일성은 없고 말 그대로 〔차이들의〕 카오스”52)만이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 안에서 회돌이하고 있는 셈이다.53) 그리고 “근거가 와해된 이 카오스는 그 자신의 고유한 반복, 자신의 재생산 외에는 다른 ‘법칙’을 갖지 않으며, 이 반복과 재생산은 발산하고 탈중심화하는 것의 전개 속에서 이루어진다.”54)

이렇듯 들뢰즈는 차이에 ‘헛디딘’ 발을 끝까지 고수하기 위해 본인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계속 전진해 들어가 마침내 카오스를 만나고, 그 카오스라는 ‘괴물’ 앞에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고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분열 증세까지 변명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순식간에 우리는 어떤 권리적 차원의 분열증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이 분열증은 사유의 지고한 역량을 말해주고 있으며, 모든 개념적 매개와 화해들에 반하여 차이 위에 존재를 직접적으로 개방하고 있다.”55)

정의상 ‘다른 것(차이)’은 분명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들뢰즈를 포함하여 데리다나 푸코 등 이들 프랑스 니체주의자들이 기존 사유의 범주 밖에 이 차이를 위치시키기 위해 상식 밖의 논리에 천착한데 있다. 이들이 과도하게 밀어붙이는 논리는 차이를 ‘동일성의 논리 밖에’ 위치시킬 뿐만 아니라, 아예 ‘논리 밖’으로 유도해간다. 그 결과 차이는, 좋게 이야기해 “끊임없이 변화 속에 있는 것이고 항상 같은 것일 수 없는”56) 변화, 운동, 생성과 짝하는 개념이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보자면 사유의 논리와 철학적 체계 자체를 거부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마치 ‘유령’과 같은 그런 존재로 둔갑한다.

요인즉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상식적인 차원의 지(知)의 논리, 인식과 이해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리오타르의 지적처럼 대체 그 쓰임새(사용가치)를 어떻게 추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57) “차이들에 대해 무심한 진리”를 바디우가 새로운 진리관으로 제시한 것이나 데콩브가 《동일자와 타자》의 결론을 “동일성을 보전하기 위해 차이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58)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4. 화쟁, 동일성과 차이를 위한 이도일향지문(二道一向之門)

“희론(戱論)은 공(空)에서 멸(滅)해진다”59)고 했던가! 데리다 스스로도 자신의 해체론의 중심 개념인 차연(diff켌rance, 틍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적으로 전략적인 문제이며 극히 모험적인 전략”, “맹목적인 전략”이라고 적고 있듯, 또 틍이가 “철학적·논리적 담론의 선상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60)고까지 고백하고 있듯, 우리가 이들 프랑스의 탈현대주의자들을 비판의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해 이들의 언어·기호 뭉치인 텍스트들을 더 뒤적거리면서 소환의 증거를 확보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 ‘그들의’ 언어·기호적 희론(戱論)과 유희에 대해 우리가 지적 호기심을 보이면서까지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학문적 전통과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도 인정하듯, “그들〔라다크인〕은 우리〔서양인〕처럼 분류하고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빠른 것과 느린 것, 이곳과 저곳이 현저하게 다른 성질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다크 사람들은 예컨대 정신과 육체, 이성과 직관을 근본적인 대립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61) 그에 따르면 결국 서양인들과 달리 동양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별 지식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무상함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그에 따른 집착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분과 분류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이며, 이는 삶의 현장에서는 물론 학문적 전통과 방법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62)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의 학문에 대한 집착, 즉 서양의 보편학 이념을 둘러싼 서양인들의 구성―해체 논쟁에 우리가 불똥을 맞아 중심이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맞추어 세상이 개혁·진화되었다면, 세상은 오늘날과 같은 불화와 갈등의 형국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오늘날처럼 인문학이 무용론의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우리의 논의에 견주어 볼 때 학문의 토양인 주어진 현실이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정우가 잘 지적하고 있듯, “어떤 세계가 도래하든 가장 근본적인 세계는 현실세계이다. (……) 현실세계와 끈을 놓친 채 다른 세계들〔초월세계, 미시세계, 가상세계 등〕에 함몰될 때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화하며, 거기에서 혼란과 어지러움, 소외와 왜곡이 배태된다. 현실(現實)이 모든 사유, 담론, 행위의 객관적 선험인 것이다.”63)

이런 이유 때문에 유명무의(唯名無義)한 이론, 현실을 전혀 담보하거나 고려하지 못한, 언어·기호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허구적 이론은 그것이 제아무리 한때 호기(好期)를 누린다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오래 붙들어 두지 못할 것이다. 변해야 하는 것, 아니 버려야 하는 것은 현실을 간과한 ‘이론(id켌ologie irr켌elle)’이지 자신이 삶을 영위하며 꿈꾸는 터인 현실이 아니다.

플라톤이 동굴 밖으로 나아가 이데아의 세계를 맛본 후 다시 동굴로 귀환해서 그리스인들을 가르치고 교육했듯, 우리도 원효(元曉)처럼 현실로 내려와 현실의 생동성과 요철들에 대해 진지하게 참구해야 한다.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고, 제일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열반 또한 얻을 수 없다.”64)고 했던가.

요인즉 세속제와 제일의제, 즉 이법(二法)의 가역적 의존관계를 동시에 깨닫지 못하면 이들 중 한 세계에 집착하여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우리가 ‘같은가’ ‘다른가’에만 유일한 관심을 보여 온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헤겔까지 계속된 동일성의 논리도 버려야 하지만 탈현대주의자들의 반논리로 극화된 차이 또한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굳이 용수의 이제설, 중도관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서양철학의 두 흐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동일성과 차이(타자성)는 현실세계에 기초해서 볼 때 적대적인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지적인 구성물이자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불교적 시각에서 보자면, 제법실상(諸法實相)이 모두 동일성과 차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동일성과 차이가 만일 자신의 주장만을 비포용적으로 A 또는 ―A로 절대화시킨다면, 진리의 수레는 주어진 구실을 못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가(佛家) 전반에서 훈회(訓誨)하고 있듯, 사유의 형식이나 체계 또는 언어(표현)에 집착하기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연기적 변화와 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적 상의성(相依性), 상함성(相含性), 의존성(依存性)이 갖는 현대적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동일성과 차이를 우리는 양자택일적 선택지로 볼 것이 아니라 ‘무쟁적’인 보족관계로 새롭게 살필 필요가 있다.65) 이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섭력(涉歷)하지 못한 채 오직 동일성의 논리하에서 부동의 존재와 자기 동일적 실체의 아성을 유지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서양철학이 20세기 중후반에 접어들어 ‘해체적 전환’66)이라는 내홍(內訌)과 내파(內波)를 겪게 된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미 예비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동일성에 대한 집착과 이로 인한 지적 폭력 그리고 동일성에 대해 저항이라는 분별망상(分別妄想)이 빚어낸 차이, 이 둘의 전적으로 언어·기호에만 의탁해 희론(戱論)으로 축성된 지식의 성(城)은, 비유비무(非有非無), 불일불이(不一不二), 불상부단(不常不斷)을 핵으로 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실상의 세계(le monde du r켌el)와는 아주 거리가 먼, 흑백논리적으로 작동되는 하나의 ‘개념화된 세계’에 그친다.67) 때문에,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저 유령 같은 도식들과 추상들의 나라”68)에 유폐된 결과 그들 스스로 부메랑을 맞은 것 아니겠는가!

탈현대주의자들의 등장에 우리가 ‘일말의’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뒤랑식으로 표현해, 근대성의 상징인 동일성(유사성)이 다른 방향성을 가진 흐름들, 즉 차이, 타자, 무질서, 불확실성, 광기 등의 개념과 서로 맞서는 현상이 생겨나면서 일종의 ‘사유의 분수기(分水期)’를 이끌어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69)

하지만 서로 다른 개념과 이론들이 싸움을 벌이고 경쟁하는 분수기 다음 단계로 합류기가 뒤따른다. 2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철학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거부 몸부림이 최근 잠잠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발악이 자리할 곳, 즉 그들의 철학적 외침을 담을 인식론적 그릇이 어떤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당연하고, 바디우의 지적대로 진리는 고정불변의 하나(la v켌rit켌)가 아니라 여럿(des v켌rit켌s)이라는 것의 인식으로 분수기는 서서히 막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러 진리들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사유의 공간(lieu de pens켌e)은 이제 예전처럼 일방적 통합(unification)이 아니라 공존(coexistence)이 새로운 지도 이념이 되어야 한다.70) 상호공존은 좁게는 대립자들의 병존(coincidentia oppositorum)을 의미하며, 진정한 사유의 공간이라면 서로 다른, 심지어는 상반된 주장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차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펼칠 수 있는, 여러 갈림길들이 하나로 수렴되는 열린 광장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유 공간을 우리는 감히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라고 감히 명명해볼 수는 없을까?! 불교에서 공은 다양한 진리들을 각기 고유한 진리이게 하는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공간이다. 바로 그곳에 속제(俗諦)와 진제(眞諦)가 동존(同存)하고, 그곳에 정(淨)과 염(染)이 섞여 있으며, 그곳에 쟁(諍)과 화(和)가 공생하고 있다. 세속제와 제일의제(二道)가 공히 이 공을 진리의 바탕으로 삼을 때(一向), 불교에서 지향하는 니르바나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이도일향지문(二道一向之門)이다.

열반의 실제(實際)와 세간의 실제, 그 둘 사이에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71)

때문에 삼사라(sams켥ra)에서 벗어나야 하듯, 우리는 ‘있다(켍tre)’나 ‘없다(ne pas 켍tre)’, 그리고 ‘같다(vrai, identique)’나 ‘다르다(faux, diff켌rent)’와 같은 양단적 분별심을 멸(滅)해야 한다. 분별, 경계에 애집(愛執)하는 한 세간계와 열반계의 간극은 영영 좁혀지지 않는 둘일 것이다. 반면 이 분별, 경계가 사라지면 세간계와 열반계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의 제시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일 긍정(구성)하고 부정(해체)하는 방식으로만 세계에 계속 집착한다면, 우리는 언어와 기호에 갇힌 희론의 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사회 속에서의 지식은 자본과 동일한 유통시장에서 회전되고 소비되는 수밖에 없다. 페시미스트 보드리야르가 “죽음 이외에는 소외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했던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 체계(a system of thought of mutual-living)”72)인 원효(元曉)의 화쟁의 정신에 따라73) 불교를 ‘살아 생동하는 지혜(活學)’로 십분 활용한다면 동일성과 차이, 동양과 서양, 현대와 탈현대는 얼마든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다. 아니, 실제 서로 교류하며 어울리고 있다. 진정으로 교류하고 어울리기 위해 원효는 유무(有無) 이변(二邊)을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는 곧 일체가 된다(一是一切: The one is the whole, and the whole is the one)고 설파했다.74)

이도흠의 정확한 분석대로, 이렇듯 화쟁의 논리에서 A와 ―A는 “서로를 비추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 본질이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합리성(communicational rationality)”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75), 이러한 변동어이(辨同於異) 명이어동(明異於同)의 역동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전반적으로 동일성과 차이라는 서양식의 제로섬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현대성의 위기(the crisis of western modernity)로부터 탈출” 모색을76) 동도(東道)에 의존한 주장들이 최근 들어 서양에서 성(盛)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록 라다 이베코비치는 탈현대철학자들의 동양 취미(orientalisme)에 대해 자정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77)

5. 결론을 대신하여

비교는 위계를 설정하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그 화살을 자신이 받을 수 있다. 자문화와 타 문화, 앎과 무지 간의 상호 보충이 비교의 알속이란 뜻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진행해온 논의에서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정보들로 넘쳐나는 이 시대, 사이드 채널(side channel)에 의해 옆 사무실, 이웃 나라에서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정보시대에 자신이 손에 쥔 텍스트만이, 자국의 문화적 전통만이 제일이라고 자만하는 것은 그래서 우몽(愚蒙)한 일이다.

동일한 기준에서 우리는 타 문화를 일시일견에 파악하고, 마치 소금 한 조각을 맛보고 바다를 다 섭렵했노라고 확신하는 것과 같은, 그런 우치(愚癡)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 타자, 타 문화와 겸허히,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통(相通)을 위한, 서로에게 득이 되는 대화론적 문화론의 의미를 확보할 때까지, 그전에는 타자, 타 문화를 섭렵했노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78)

문화 공간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할 정도로 보편적인 측면보다 특수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문화 비교·교류 과정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버티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한 대로. “문화들 간의 만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문화들 간의 차이 때문이다.”79) 그리고 그 차이들로 인해 문화의 특수성과 지역성이 보존된다. 현대와 같은 자본 위주의 획일적 문화―세계화를 경계하고 문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 다양성은 문화 제국주의적 시각을 일소하고 문화대화론을 견지할 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전자가 위정자를 위한 이데올로기요 픽션이라면, 후자는 다중의 방언이요, 다중이 대를 이어 보존·창조해가는 삼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인 불교와 탈현대철학과의 비교 작업도 이러한 기본전제를 벗어난다면 위험에 처하거나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다. 음양의 조화처럼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모색은 논리나 이론을 위한 논의이기에 앞서 인간을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또한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탈현대철학의 비교를 시도하면서 중심이 동양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서양 학자들의 낙관에 기댄다고 해서 우리가 직접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맥루한의 일시일견이 그렇듯 프랑크의 ‘다시 동양으로(ReOrient)’라는 주장 속에도 중심이 유럽에서 중국(아시아)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말할 뿐, 그 속에 문화대화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이다.80)

문화대화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든 문제는 결국 ‘중심주의(centrisme)’에서 야기된 것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소위 ‘중심주의자들’은,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중심의 해체가 아닌 중심의 대체를 후원할 것이다. 하지만 중심의 해체가 자기변화나 타자와의 대화를 위해 요청된 것이라면 중심은 당연히 해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체된 이후 재구성된 중심은 이미 동일성의 중심이 아니며, 차이들과 다양성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중심이어야 한다.

두루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기생함으로써 종을 보존해가는 희귀한 동물이다. 그러나 요컨대 생존은 기생만으로는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차제에 눈과 귀를 열고 ‘사유의 생존’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사유의 생존은 언어와 기호의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되지만, 탈현대주의자들의 태도에서도 보았듯, 과도하게 언어와 기호를 넘어서려고 해서도 곤란하다. 상품처럼 교환되기 위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대의 지식은 그래서 정신과 인격의 도야, 즉 자기수련을 통해81)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균형감각을 잃은, 언어와 기호로 곤포를 두른 희론(戱論)에 용수(龍樹)가 비판의 화살을 겨눈 것도 이 때문이리라. 희론은 일시적 소음일 뿐 진리의 길에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이끄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원효(元曉)가 정확히 지목한 것처럼 황하(黃河)와 한수(漢水)를 이룰 정도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인 소음이 새로운 것이라면, 사유의 역사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법음(法音)으로서 진리는 항상 이러한 소음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또한 있을까! ■


박치완 /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프랑스 부르곤뉴대학교(Univ. de Bourgogne)에서 베르그송의 방법론 연구로 박사 학위. 《불교평론》 편집위원 역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 학문과 학문 방법론》(2009, 공저), 《데카르트가 만난 왕자》(2007)와 《禪, 내 마음의 복전》(2005, 공저) 등의 저서와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서양인들에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2002), 〈정신분석학과 禪 그리고 소고기 매운탕〉(2003),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2003), 〈일상어와 시어, 시와 선시―선시론의 정립을 위한 일 모색〉(2004), 〈J. 데리다와 G. 들뢰즈의 差異와 龍樹의 中道〉 등 불교 관련 논문과 다수의 프랑스철학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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