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지난 30년간 서구 학계에서는 합리성 우위 주의와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크리틱으로 과정철학, 해체주의, 탈중심주의 담론들이 등장했다.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시작했으나, 결국은 세계 문명을 보는 거시적 입장에서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 그 비판이 모아진다.

인류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환경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타자로 이해하고 그것을 정복하고 조종하며 이용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초기,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 신을 놓고 그 절대 전능의 신에게 복속하며 숭배하는 종속적 존재로 자신을 강등시켰으나 근대에 들어 신학이 아닌 과학과 철학의 발전을 통해 인간 존엄성과 가치, 그리고 이성의 우위를 선언하면서 이성주의에 바탕한 자아중심적 세계관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제 20세기에 들어와, 근대에 나타났던 인간의 존엄성 선언과 주장이 타자와 세계를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변질되어 이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새로운 담론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흔히 이런 타자 정복적 태도를 주관과 객관의 세계 간의 분리를 선언한 서양 철학과 사상에서 근원을 찾는다. 그런데 서구 근대 역사에서 목도되는 여러 가지 문명 폐혜의 근원으로 자아중심주의, 또는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찾는다면 이것은 한국의 상황에서도 유의미하다. 물신주의와 이념의 세속화의 척도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사회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심각한 상황이다.

권력과 경제의 논리는 하나의 당위로 여겨지고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지배 담론이 되어 버렸다. 동양의 삼대 사상이라고 하는 도가, 불교, 유교를 모두 다 경험하고 그것을 전통적 가치의 지주로 자랑해 왔으나, 이제 세속화, 물신주의, 타자에 대한 억압, 환경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가 어느 곳보다도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도가 사상에서 가르치는 자연과의 합일 정신이나 불교의 기본 정신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비 정신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는 가치 이념이 아니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동양에는 정신이 있고 서양에는 물질문명이 있다고 하던 동도서기의 구호를 지금도 주장하기에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 궁색하다. 오히려 한국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동양적 물질주의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최근 한국 사회는 급격히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고 있지만 타 문화에 대한 학습과 이해가 아직 부족하고 그들에 대한 억압적 지배적 태도는 불교의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 심각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문제의 많은 부분은, 자신과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배타적 태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연을 정복과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자아중심적 세계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고대 인도에서 탄생하여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여타 지역으로 전해져 각 지역 문화와 접변을 거친 다음 지금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 또 한 번 새로운 해석의 빛 속에 놓이게 되었다. 철학자들에 의한 불교와 서양 사상과의 비교철학적 이해는 서양 문명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종종 시도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불교와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서구적 불교 이해의 의미를 알아보고, 이제 서구 문명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그 과정을 그대로 거치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겠다.

2. 현대 서양 철학 사조와 불교와의 만남

서양 근대 철학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독립적 실체적 자아관은 인간존재에 대해 실체론적 해석을 제공하였다. 자신 속에 갇힌 자아라는 관념은 서구 근대 철학사에서 칸트, 흄, 하버마스 등에 의해 이미 비판을 받은 바이다. 이후 서구 사회 내에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입장이 인간의 자연 지배와 독점을 보편화하였다고 보고 서양 문명 일반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시작하였다.

이들 학자들과 지성인은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적 패러다임을 제공하려 노력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가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사상, 종교 전통에서 영향 받아 성립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자아중심주의는 자아를 독립적, 실체적, 그리고 사회적 환경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보는 데 반해, 새로이 등장하는 패러다임은 인간과 사회는 상호연관적이며 상호의존적이고 그리고 환경이라는 커다란 기체 속에서 근본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는 이익과 경쟁을 정당화하고 그러한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는 사회체제를 가능케 했다. 탐욕과 욕심으로 일어나는 무한 경쟁의 결과를 두고 자본주의에 대한 크리틱이 나타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제국에 불교가 소개면서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후 21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서구 철학자들은 동양 사상과의 접점 가능성을 찾고 있다. 화이트헤드 등의 서구 과정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일군의 학자들은 자아란 생각과 경험과 독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대해 반대하고, 인간은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우주에 대해 상호관련적 연관성의 매트릭스 속에 있다고 설파한다.

그들은 과정의 세계 속에서의 실천적 그리고 이론적, 선언어적 경험을 종합하면서 이러한 상대적 자아관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각각의 순간 속에서 우리 존재는 끝임없이 새로 다시 태어나는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존재를 이루는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자연적 관계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1)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후 1980년대 이후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사상적 관련에 대해 많은 관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관련성의 출발점은 하나의 가치나 시각을 당연시하고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 온 과거의 역사와 사고방식에 대해 도전하는 정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그동안 서구 사회가 추구해 왔던 서구식 이성주의에 바탕한 과학적 합리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여러 측면에서 검토하고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들은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과 자아중심적 관점으로 야기되는 문명의 훼손과 정복, 나아가 철저한 개인의 자유와 경쟁에서 가치와 선을 찾는 태도 등을 그 병폐의 예로 들었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간 삶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옹호하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체로 언어와 텍스트를 바라보는 눈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며, 따라서 이러한 해석으로 열리는 다양한 지평 융합을 중시한다. 하나의 가치나 시각을 당연시하여 보편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복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배격한다. 이들은 시장중심주의적 자유주의, 과학적 합리성, 서구의 계몽주의뿐만 아니라, 온갖 메시아적 구원론, 종말론, 혁명론, 거대담론 등을 거부한다. 한편 이들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미래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대안은 누구나 억압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평화롭게 꾸려갈 수 있는 분권화된 다원 사회이다.2)

놀란 제이컵슨 (Nolan Pliny Jacobson)은 과정적 사고방식(process thinking)의 관점에서 사상의 역사를 세단계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현 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세계 이해는 플라톤적인 형식에 대한 관심, 그리스적 사유방식의 실체적 존재중심적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고 본다. 그리스적 사유방식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헤라클리투스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짧은 혁명을 불러왔지만 곧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찰스 피어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등에 의해 이러한 과정적 사고방식에 대한 체계적 천착이 이루어졌다. 제이컵슨에 따르면, 불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선구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불교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사고방식을 제공한다. 불교는 허구적인 자아에 의한 생각이 만들어 내는 욕망과 집착에 의해 자아중심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목적한다. 욕망과 좌절이 빚어내는 긴장, 압박,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정신적 허구에서 구출하려는 것이 불교의 이념이다.3)

제이컵슨은 불교의 ‘과정’ 또는 ‘무아’적 사고방식을 분석하면서 그러한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효용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둔다. 불교가 내포하는 과정적 사고방식은 인간 고통의 근원의 중심을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란, 생각 없이 즉각적으로 드는 느낌과, 이성과 문화에 의해 추상적으로 구성(construct)된 관념 사이에서 나타나는 의식 깊숙한 스트레스와 갈등이라고 정의한다.4)

모든 것은 추상적이며 현재의 순간, 즉 충족된 현재 속에서 우리는 인생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때 사태들은 존재 속으로 들어오고 또한 사라짐으로써 과거의 일부분이 된다는 과정철학의 관점을 사용하여, 인간의 고통이란 이러한 각각의 지나가는 순간에 대해 집착하고 우리의 의지를 그곳에 두기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순간들은 그 자체의 조건 [연(緣)]과 원인 [인(因)]의 총체성을 가지며 그것에 의해 존재한다.

이러한 실질적이고 개별적인 순간들이 궁극적인 실재이며 이와 관련하여 모든 다른 것들, 즉 타인, 개념, 계획, 목적, 사물들은 고도의 추상이다. 자연을 이루는 사건들은 바로 이들 각각 순간들이다. 화이트헤드가 표현한 것처럼,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바로 전 순간과 그 전 순간 간의 사이에 놓인 각각의 순간이 바로 우리의 과거의 부분을 이룬다. 순간들은 사라졌지만 아직 여기 있고, 그 순간들이 바로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이며 우리의 현존재의 기반이라는 것이다.5)

제이컵슨은 자신의 과정철학적 불교 해석을 많은 부분 찰스 하트숀에게서 영향 받았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하트숀은 서구 사상이 가지는 난점을 설파하고 그러한 난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불교 전통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불교야말로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가장 위대한 대안이라고 했다.6)

제이컵슨의 과정철학적 불교 해석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고의 제거라는 실천적 목표에 대한 관심에 그 궁극적 목적이 놓여 있는 데 반해, 그보다 일찍 나온 스티브 오딘에 의한 화엄철학의 과정철학적 해석은 보다 형이상학적 존재 분석에 집중한다. 오딘은 화엄불교를 종합적이고 융합적인 패턴으로 특징짓고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저술, Process and Reality에 나오는 과정철학적 사유, 예를 들어, 모든 것이 모든 시간 속에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입장을 의상의 〈화엄법계도〉를 들어 설명했다.

오딘은 또한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화엄철학의 연기와 공과의 관계를 분석한다. 오딘은 프레드릭 스트렝의 Emptiness: A Study in Religious Meaning을 예를 들어, 스트렝의 용수의 중관 철학 해석은 해체주의적, 비존재화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오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뜻을 그 사용과 동일화함으로써, 절대적인 실체를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단어란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와 대응하는 이름이라고 하는 신념에서 벗어나게 한다.

스트렝에 따르면 용수는 언어체계 밖에 있는 어떤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단어란 사실 상호 간의 맥락적인 관련성을 가짐으로써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실질적인 구분일 뿐이며, 그 스스로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수는 또한 주체와 객체라든가 보는 자와 보는 것과 같은 모든 실질적인 차별이란 서로 간에 연관되어 있는 상호관련적인 개체일 뿐이며 따라서 독립적이라는 그 같은 개체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그 같은 상호관련적인 특징들이란 상호 간의 맥락적 관련을 통해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을 다른 말로 하여 공이라는 존재적 지위를 갖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스트렝에 따르면 공의 이론이란 지시체의 언어적 체계 속에서 의미의 상대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과 언어의 상호의존성을 밝힘으로써 용수는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자, 즉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즉, 법, 계, 온, 처, 자성 들의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개체 또는 일종의 일원론적 실체화된 원리, 즉 알라야식이라던가 브라만과 같은 것을 말한다)를 해체(deconstruct)하고 탈존재화(de-ontologize)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반에서 화엄의 상호적 연기 또는 상호의존성의 형이상학이 의미의 대칭성의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7) 오딘은 또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선불교 해석에도 적용하였다.8)

데리다의 ‘차이(diff켌rance)’의 개념을 들어 해체주의가 내재적 또는 표면적인 모든 측면에서 이성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존재 신학(ontotheology)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으로 설명되는 현상들 간의 상호연관성에 주목하여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입장과의 관련을 설명한다. 또한 서구의 실존주의, 현상학 그리고 정신분석학, 실용주의 사상 등을 불교와 비교하여, 자아중심주의와 자아에 대한 실체적 관념을 넘어서는 역동적이며 또한 전인적인 실재 인식을 꾀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의 대표적인 학자로 매그리올라를 들 수 있다.

매그리올라(Robert Magliola)는 그의 Derrida on the Mend,9) 그리고 On Deconstructing Life-Worlds: Buddhism, Christianity, Culture10)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갖는 불교적 함축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그는 Derrida on the Mend에서 데리다와 불교 간의 만남에 대해, 특히 《중론》과 용수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있다. 매그리올라의 불교,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 엮는 해석은 서구 철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존 키넌과 같은 불교학자들은 매그리올라의 불교 해석의 오류, 특히 유식불교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데리다에서 중관 사상을 거쳐 기독교적 담론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유식불교를 불교나 기독교의 교리적 담론을 위한 해석학적 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유식불교는 교학적 담론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탄생한 전통이지만, 결국 종교적인 맥락으로 발전하여 자신의 교리적 입장을 버리고 자각에 이르는 함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점이 기독교의 종교적 테마를 해석하는 데 더 효용이 있고 또한 데리다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라는 주장이고, 이에 대해 매그리올라는 다시 재반론을 하여 주목을 끌었다.11)

최근 한국의 김형효 교수는 서양 철학의 해체주의로 원효를 해석하였다.12) 서양 현대철학의 해체주의의 언어와 사유방식을 써서 원효를 철학적으로 읽어내고자 시도한다. 그는 동서양을 망라하여 두 가지 사유 패턴을 구분하고 있는데 동양의 불교, 노장 사상, 유학의 양명학은 해체적 사유를 대변하며, 서양의 인간중심주의와 신학 사상 그리고 동양의 주자학적 유학 사상이 뭉뚱그려 표현하는 구성적 사유의 두 가지 범주가 그것이라고 한다.

이 중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해체적 사유이며,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사상을 그 대표로 지목한다. 그는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문자학적 사유를 존재론적 사유라고 부르고, 이에 반해 기존의 형이상학은 소유론적 사유라고 명명한다. 이것을 또한 존재와 소유의 대결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존재론이라 부르던 것은 그의 철학적 명명에서는 일종의 소유론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해체주의는 소유론의 형이상학을 넘어서 존재론의 사유를 전개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읽으려는 태도를 가진다.

사실을 똑바로 읽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원초적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려는 그런 사상이 해체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방법론적 입장에 서서, 그는 노장 사상의 무위(無爲), 불교 사상의 무아(無我) 등의 ‘무(無)’의 개념에 대해 주목하여 무를 닮는 사유야말로 진정 인간중심적 소유론의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며 새롭게 보게 하는 존재론적 혁명을 가져오는 사상적 시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원효 사상에서 미래를 여는 존재론적 사유와 사실주의적 세상 보기가 만나기를 시도한다고 한다.

원효의 일심의 존재론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차별을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용어인 차이, 또는 차연(差延) 등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차연이란 배타적 이론이 아니라 상보적인 보충 대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관성을 띠는 그런 차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효 사상에서 나타나는 진과 속의 차이를 차이 속의 동거, 또는 동거 속의 차이와 같은 그런 복합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것을 상관적 차이라고 부르고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그러한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다.13)

3. 서구의 불교 수용의 문명사적 의의

인도 사상과 불교가 19세기 유럽에 알려진 이래 문헌학의 발달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적 관심과 더불어 불교에 대한 연구가 촉발된 이래 200년을 거치는 동안 서구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회에 확산되었다. 서구인들의 불교에 관한 관심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서구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보인 이 이국적 종교에 대한 관심이다.

두 번째는 불교의 사상과 문화 전통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전문으로 하는 불교학자들이 등장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관심이 심화된 것이다. 세 번째는 불교학의 발전에 따라 불교에 대한 광범한 이해가 퍼짐으로써 불교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또한 이것을 신행하는 집단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세 번째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스즈키와 앨런 와츠이다.

현대 문명의 병폐를 서양의 자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경고하고 이것에 대안으로 동양의 선불교(禪佛敎)의 가르침을 제시한 선구로서 앨런 와츠(Alan Watts, 1915~1973)를 들 수 있다. 그는 스무 종이 넘는 불교와 서양 문명에 관련한 저술로써, 특히 The Way of Zen Psychology 그리고 Psychotherapy East and West 등을 통해 1960년대 서양인들에게 불교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제도권 철학자는 아니었으나 문화적인 시각을 가지고, 대중적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해 서양 문명의 비판과 아울러 선불교의 정신을 그 대안으로서 소개하였다. 그의 저술은 그의 이전에 이미 미국의 새로운 세대들에 소개되어 널리 읽히고 있던 스즈키(D. T. Suzuki, 1870~1966)에 이어 미국에 불교가 전파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스즈키는 1960년대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그곳을 중심으로 선을 반이성주의의 상징으로서 소개하였다. 이것이 당시 기성 사유방식을 부정하고 체제에 반항하던 히피 세대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앨런 와츠와 스즈키의 서구 문명 비판은 이후 동양의 관점에서 보는 서구 문명 크리틱의 기본 틀로 사용되고 그의 선불교 해석은 서양의 현대 지식인들이 보는 불교관의 전형을 형성하여 이후 소위 미국 불교(American Buddhism)가 탄생하고 발전하는 데 사상적 기조를 제공하였다. 더구나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기성 제도권 종교(organized religion)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1970년대에 들어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게 된다.

서구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문명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촉발되었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정복적 태도, 자유경쟁과 시장의 논리 속에 함몰되어 가는 인간성, 물신주의 등에 대한 사회적 지성적 비판이 먼저 나타났고 그 해결책을 모색한 것이다. 비판적 사상과 사조들이 등장하면서 세계의 여러 종교 사상에 대하여 새로이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또한 일정 부분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서구권의 도전에서 기인하여 이슬람이나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의 문화에 대한 도의적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고, 탈식민지주의에 영향 받은 수발턴 스터디스 (Subaltern Studies)가 나타났다. 동양과 세계의 각종 사상과 종교 전통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의 태도와 세계관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불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불교는 서구 사회에서 대안적 사고방식으로 수용된 이래 점차 관심이 증폭되었다.

서구에서 일고 있는 불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대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불교를 전통 종교가 아닌 새로운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0년 역사에 불과한 미국 불교이지만 불교 교리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고 그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사회 현실에 적극적이면서 실질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교는 이제 서구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가 있다.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종교적 세력이 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신자라 하더라도 사회 일반에서 광범위하게 인지되고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불교란 더 이상 이국적이고 낯선 종교가 아니다.

신행인들뿐 아니라 사회 저변으로 스며들어가 불교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 코드, 새로운 체계의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점의 self-help, 영성 등을 다루는 도서 코너를 가보면 불교를 은유하고 그 가르침을 차용하는 책들이 무수히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웬만한 대학에는 한두 명의 불교 전공 교수가 있으며, 불교개론 강의가 개설되고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다.

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종교적, 윤리적 이유만은 아니다. 실천 수행으로서의 불교뿐만 아니라, 지식과 학문의 입장에서도 불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세계의 역사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속에 아시아의 사상, 역사, 문학, 언어가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현대적 함축도 아울러 배우고자 한다.

불교는 학술뿐만아니라 대중문화, 엔터테인먼트 속에도 깊이 들어 있다.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미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만화 시리즈였던 〈심슨스(The Simpsons)〉에서 장난꾸러기 바트 심슨이 엄숙한 얼굴로 “one hand clapping을 들었는가” 하고 읊조리면 그것이 바로 선불교의 공안(公案)14)인 줄 알아듣고 웃을 수 있는 정도로 미국인들은 불교의 문화와 이념에 익숙하다. 〈심슨스〉는 미국의 중산층 가족들이 주인공이 되어 미국 사회, 문화를 패러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의 지성인 중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절에 나가지는 않지만 자기가 부디스트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불교적’으로 살고 싶다고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스즈키가 누구인지 앨런 와츠가 쓴 책 한 권은 읽어 보았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삶은 무엇인가? 그들은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불교에서 무엇을 찾고 있으며, 불교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서구인들의 불교 이해는 불교를 전통 종교로서 지녀온 우리의 불교 이해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에게 불교는 유일신 전통의 세계 해석과는 다른 대안적 세계관을 가지며, 독특한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특유한 삶의 방식과 수행 방법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주요 불교 교리에 대한 해석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불교의 중심 교리 내지는 중심 메시지인가 하는 교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그들이 어떤 불교 교리와 중심 메시지를 ‘선택’하였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이 불교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가 앞으로 어떤 점에서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도 제공한다.

우선, 서구 지식인들은 문화적 사회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경험하고 앞으로 해 나갈 것인가를 끝없는 모색해왔으며 그런 맥락에서 경제, 정치, 사회학, 문학, 역사, 인류학, 그리고 인종, 계급의 문제, 젠더, sexuality의 문제 등에 대한 불교적 해석에 관심을 갖는다. 불교는 당시 서구 사회에 수입될 때 그들의 사회와 문화의 제 현상에 대해 그 해법을 제공하려 하였다. 불교는 종교적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는 문화적 태도도 함께 전체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불교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삶과 인생관을 바꿀 수 있는 실용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인 전쟁과 평화, 환경과 자연, 소수자와 여성 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등의 사회적 주제들에 대해 불교가 새로운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불교는 또한 가족과 가정에 주목하고 있다. 1960년대의 히피 제너레이션, 비트 컬처 세대들은 지금 모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가진 세대가 되었다. 이들은 가족, 육아, 아이들의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마음의 평화, 행복, 지구의 평화, 생태에 대한 관심 등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불교를 알려주고 싶어 한다. 주말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위한 간단한 명상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여름 캠프에 가족이 같이 참가해 서로 손을 잡고, “평화로운 개인이 평화로운 가족을 만들고 평화로운 사회 나아가서는 평화로운 우주를 만들 수 있다.”고 환호하기도 한다.

4. 불교의 현대 사회에 대한 윤리적 함축15)

그럼 환경과 자연, 인간의 삶 등의 측면에서 불교 사상이 제공할 수 있는 효용과 가치는 무엇인가? 불교의 연기설은 앞으로의 현대 문명에 점점 더 큰 함축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불교의 연기적 사고방식은 세계와 타자를 대상으로서 이해하고 지배하려던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둘째로, 붓다에 의해 설파된 연기의 이치는 개인의 행위와 결과에 관한 도덕적 성찰의 근간이 된다. 즉 개인이 경험하는 심리 현상의 생성의 과정에 대한 통찰, 인식을 주어 욕망의 제어를 가르친다.

셋째로, 심리적 집착의 결과로서의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내가 야기하는 고통에 대해 깊은 유대감을 생성함으로써 개인 윤리뿐 아니라 세계와 나, 나와 자연 간의 유연한 배려와 상생적 존경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 이것이 불교적 세계관의 기본적 틀이다. 특히 법계연기설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유기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데 좋은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은 과정철학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현대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우리는 바로 불교의 연기를 보고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중국에서 고도의 형이상학으로 발전한 형태인 법계연기 이론은 중중무진의 인다라망이라는 비유로 대표된다. 인다라망의 그물코와 그물코와의 만남에 걸려 있는 영롱한 구슬을 투과하는 빛은 빛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또 서로에게 비추면서 끝없이 이어져 나가는 네트워크, 이러한 네트워크는 세상의 서로 얽히고 얽힌 존재의 네트워크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중중무진의 세계는 네트워크로서의 세계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체험될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은 이 세계를 네트워크로 연결시키고 있다. 네트워크의 혁명은 불교의 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불교의 연기의 가르침이 네트워크로서의 세계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이 모두 각각의 중심이다. 각각이 독특한 개체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한번 빛이 지나가서 투과하는 순간 서로는 서로 속에 투영됨으로써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개체의 개별성, 탈중심성, 그러나 콜렉티브한 개체의 움직임으로서의 사회현상에 대해 많은 현대의 문명 비평가들이 이미 주목하고 있다. 대중 또는 공중 속에서 우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따로 또 같이 살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취하고 각각은 각각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대중의 삶의 방식, 현대의 탈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불교는 뛰어난 모델을 제공한다.

불교의 윤리관은 이러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불교의 윤리학은 관계의 존재양식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연기가 우리의 존재론이라면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우리의 윤리이다. 동체대비는 나와 남이 한 몸임을 말한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동체대비가 그것이다. 문수 사리가 유마힐에게 문병 와서 “이 병은 어떤 원인 때문에 생겼습니까. 얼마나 오래되었고 언제 낫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유마힐이 “저의 병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한 바로 그 대비이다. 중생 모두에 대한 사랑이다. 연기를 깨달은 자라야 동체대비를 느낄 수 있다. 네트워크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은 자라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남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와 한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광명운대’를 안다면 ‘공양시방무량불법승’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떼어낼 수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한 몸이다. 연기를 통해 한 몸이기 때문에 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존재, 다른 생명을 가진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존재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이 현대 불교인들의 가져야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조작된 환상의 세계이다.16) 즉 공으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유마거사는 자신의 병이 어리석음과 애착으로부터 생겼다고 했다. 이 애착은 하나의 환화(幻化) 조작에 대한 애착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환화 조작임을 깨닫고 중생의 몸과 마음이 또한 환화 조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 환상과 조작의 세계 안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유마힐은 환화와 같은 세계에 사는 중생은 어떤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삶과 죽음에 대한 불교적 시각과 해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살은 병이 난 보살을 어떻게 위문해야 하느냐는 문수사리의 질문에 대해, 유마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몸은 항상 변하는 것 무상(無常)이라고 말하지만 몸을 싫어하고 버려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에 고통이 있다고는 말하지만 열반을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에 자성이 없다고 [무아(無我)]는 말하지만 중생을 가르쳐서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몸이 공적하다고는 말하지만 마침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에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과거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병을 통해 남의 병을 가엾게 여깁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겪은 고통을 비추어, 모든 중생의 행복을 생각합니다. 복을 닦던 것을 기억해서 깨끗한 삶을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지 않고 항상 정진하며, 좋은 의사가 되어 중생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살의 병을 위문하여 보살을 즐겁게 해 줍니다.”라고 한다.17)

즉 환화로서의 세계, 공으로서의 세계를 말하지만 이 세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화로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몸의 병 아픈 것을 위로하는 것은 몸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집착이 없음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개발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돌보고 배려하지만 그렇다고 삶에 연연하거나 끄달리는 것은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보다 낫기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소유하려 하거나 결과를 정복하려 않는다. 자신의 명예를 존중하지만 일단 지나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불교는 이같이 무아의 인간관과 연기의 세계관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제시한다. 많은 서양 철학자들이 불교에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그 고통의 일어남과 스러짐을 꿰뚫어 보고 관찰함으로써 삶과 고통에 대해 그것을 능가하는 종교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 삶이란 그것의 본성이 없고 무상한 것이라 하여도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무상하고 공적한 것임을 알기에 삶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어 나와 남의 공생과 상생을 걱정할 수 있는 대승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과 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가진 자라야 동체대비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에 대한 불교의 관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상하고 공적한 것이므로 초연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버리기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모두 공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큰 자유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각 순간, 즉 현재와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철학에서 말하듯이, 이 순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와 같이 현재의 경험이, 미래와 과거 순간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 간에 가지는 연관성을 자각함으로써 더욱 충족적인 삶이 가능하다.

현재 서구의 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영역은 덕성 윤리(virtue ethics)의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환경 철학을 정립하는 시도가 있다.18) 1980년대에 이르러 서구사회에서 환경과 생태가 사회의 중요 관심이 됨에 따라 서구의 불교인들은 생태와 환경에 대한 해석과 대답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는 환경과 세계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교감과 일치를 강조하고, 인간과 세계와의 유기적 관련성을 설득한다. 특히 이 세계는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들어 나가는 공업의 소산이며 나와 남이 같이 만들어 가는 인연소생이라는 불교 이념에 대해 주목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불교는 2,600년전 기존 사유방식을 부정하고 도전하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본성론적 사고방식을 부정하였고 기성의 종교적 권위주의를 부정하면서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후 역사적으로 나타난 다양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신에 귀의하는 종교가 아닌 자력 종교로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다. 중심과 신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종교라기보다는 자신과 세계의 존재 형태에 대해 의문하고 기존의 사유방식에 도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방법론적 전제를 삼았다. 이 같은 사유 태도는 불교가 새로이 나타난 현대 사상 사조들과 나란히 대화할 수 있는 방법론적 개방성을 가능케 한다. 불교의 도전성은 주체적으로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서구인들은 불교 내부의 언어를 탈피하여 새로운 언어로 불교 인식을 시도하고 있다. 서양 현대의 철학자들이 서양의 새로운 철학 사조를 들어 불교를 해석하고 있다면 우리는 불교를 들어서 철학 사조를 새로이 해석하고 외연을 넓힐 수도 있다. 비교철학이라는 것은 더 이상 ‘비교’하는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동서양에서 촉발된 각종 철학적 문제를 놓고 어떤 답을 내어놓는가가 중요하다.

불교를 오랜 전통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불교의 역사가 가지는 무게가 크게 뛰는 데 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불교는 전통의 무게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 새로운 세계관을 불어넣는 역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19) 오래된 지혜로서의 불교가 가지는 보편적 이념의 가치가 현대 사회에 지니는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서구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불교는 이제 한국사회의 제 문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제시되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앞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현대 사회의 네트워크 적 속성은 연기의 세계관을 더욱 잘 밝히고 있다. 연기와 네트워크의 존재론에 기반한 동체대비의 자비 정신으로 불교적 윤리관의 기본을 삼아야 한다. 연기는 현대의 문화 현상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뿐 아니라 미래의 실천적 모델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유용한 세계관도 제공한다. 연기의 세계관에서 평화와 공생의 윤리가 나올 수 있다. 나를 둘러싼 다른 생명 개체들과 환경에 대해 자비를 실천하는 동체대비의 세계관은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 즉 안심(安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이 점에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가 유기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불교에 있다.

전통의 보전과 전통의 답습은 다른 것이다. 보전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고 자신의 주체적 해석이 필요하다. 어차피 시간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 전통은 이 순간에 각각 새로 되살릴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과정철학에서 말하듯이 현재와 과거, 미래와의 연관성을 총체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



조은수 /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과정 수료 후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받음. 미국 미시간대학교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대소장,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지역 세계기록문화유산위원회 출판소위원회 의장 역임.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불교 철학)로 재직 중.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통불교 담론을 통해본 한국불교사 인식〉 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John Jorgensen과 함께 《직지심경》을 영역하였음. 한국의 비구니에 대한 연구들을 모아 편집한 책을 Surpassing Gender: The Enduring Vitality of Korean Buddhist Nuns and Laywome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에서 곧 출간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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