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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 이도흠
- 불교와 서양의 대화를 통하여
[40호] 2009년 09월 10일 (목) 이도흠 한양대 교수

   
1. 머리말


인류는 지금 여러 면에서 머지않아 멸망에 이를 수도 있는 위기에 있다. 1초 동안 0.6헥타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 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1) 우리에게 의식주와 의약품, 생명에 대한 지혜, 많은 생각과 상상, 더불어 사는 기쁨을 주던 생물 가운데 40%에 가까운 생물 종이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지경에 놓였으며, 언제 인간의 차례가 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전 세계에는 다시 대공황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수천만 명이 파산하였고 수십억 명이 실업과 기아에 직면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하게 하였으며 결국 자신마저 파산하였다. 세계화는 실제로는 ‘빈곤의 세계화’를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지금 열 살 미만의 아이가 7초에 1명씩 기아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으며, 6분에 1명씩 비타민A의 부족, 혹은 썩은 물과 접촉함으로써 시력을 잃고 있다.2)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은 자원 확보와 헤게모니 유지,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제3세계를 과도하게 착취하고, 이것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전쟁과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상당수의 제3세계 국가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자본을 독점하기 위하여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고문과 학살 등 국가 테러리즘을 자행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부유한 사람이라도 도시화와 근대화로 공동체가 파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인간성과 연대를 상실하고 소외, 고독, 불안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주술의 정원에서 인류를 구원한 과학조차 도구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복제인간, 유전자조작 식물, 로봇 공학 등은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미래를 예지하고 있다.

이런 몇몇 예들은 인류 문명이 이제 종말로 치닫고 있음을, 지금 이 시점에서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없음을 말해주는 전조들이다. 이제 유턴을 해야 함은 자명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을 걷지 않으면, 다가올 22세기는 디스토피아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대안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서양과 불교의 대화는 가능한가?

양자의 대화 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동일성을 벗어나 서로 차이로 바라보는 것과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동양이 대안이다.”라는 여러 주장에서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과 오늘의 현실 맥락을 배제한’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의 전제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농업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다.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극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현재적) 의미는 없다. 오늘날의 복잡해진 사회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로 그칠 뿐이다.

아울러, “동양사상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은 동양사상의 위대성이나 ‘동일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란 관점에서 논의하여야 한다. ‘동일성’이 동일성 안에 모든 차이들을 포획해버리고 환원시켜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자기도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의 관점에서 동양사상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3)

지면 관계상,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모순 심화, 과학의 도구화 등 세 가지 주제로 압축하여 이에 대한 대안의 패러다임과 방안을 불교와 서양의 대화를 통해 모색한다.

2.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생태론과 연기론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2007년 연례보고서는 “지금 상태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없을 경우 3~4℃만 기온이 상승해도 2080년까지 18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해수면 상승 등으로 3억 3천만 명이 홍수를 피해 이주해야 하고, 2억 2천만 명에서 4억 명이 말라리아에 걸릴 것이라고 지적한다.4)

국제자연보존연맹(ICUN)은 2008년 10월 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전 세계 과학자 1,700명이 참가하여 조사한 44,838종의 대상 동식물 가운데 38%인 16,928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3,246종은 심각한 멸종 위기 상태에, 4,770종은 위험 상태, 8,912종은 멸종에 취약한 상태에 있다.5)

환경위기에 대해 환경론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바다를 오염시키는 예에서 알 수 있듯, 환경주의적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전 지구의 중심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정당화하고 인간이 도구를 이용하여 자연의 부분을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하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생태론자들은 기계론적 물질관과 이원론,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을 추구한다. 이들은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이용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다.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성과 다양성을 상실해 가는, 꾸준히 하향하는 유한한 체계의 장관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연에는 물리적 해체의 측면에 역행하는 어떤 상향의 기운이 있다.6)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 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유기체 철학에서 영속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상’이다. 형상은 변화하는 관계를 감수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에 객체성을 획득한다.7)

불교에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불살생의 생명관과 12연기론, 그리고 법계연기론이다. 불교는 모든 생명에 불성이 있다고 보고 불살생(不殺生)의 계를 추구한다. 물론 석가모니께서는 천안(天眼)으로만 보이는 미생물까지 불살생의 계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 하셨지만,8) 적지 않은 스님이 한 방울의 물을 마시더라도 그 안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도록 걸러 마신다.

식육 금지의 윤리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방생(放生)의 윤리로 확장된다.9)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듭하면서 윤회의 사슬 속에 있지만, 언제든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이와 같은 관점은 기존의 생태이론을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이라며 비판하고 제시된 ‘심층생태론(deep ecology)’과 유사하다.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이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의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10)

불살생의 생명관과 심층생태론은 모든 생명체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모두 존엄하다고 보는 점은 유사하다. 불교의 생명관에서 보면, 이 세계 자체가 연기하므로 모든 존재가 자성(自性)이 없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므로 결국 공(空)하며, 가유(假有)로서 모든 존재는 이를 깨닫기 전에는 윤회를 되풀이한다. 반면에 심층생태론은 생명을 서로 관계 속에 있지만 스스로 자성을 가진 실체로 본다.

불살생을 당위가 아닌 논리로서 설명하는 것이 12연기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수정란이 되고, 이 수정란에 전생의 업(業)에 따라 식(識)이 들면서 생명은 시작한다. 모든 생명은 연기의 존재로, 십이연기의 무명(無明)으로 인한 자신의 업에 따라 윤회를 되풀이한다. 12연기로 보면, 모든 생명체는 다르마(Dharma)에 대해 무지하므로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앞세워, 물질적인 것이나 비물질적인 그 모든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한 후, 거기서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을 느껴, 그중에서 즐거운 것을 갈망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니, 그것을 영원히 고정돼서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 업을 짓게 되어, 무상한 생로병사를 계속 되풀이하는 괴로움을 이어간다.

김종욱은 12연기를 생태학적으로 설명한다. 다르마라고 하는 생태계의 질서, 즉 이 세상이 상호의존성으로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생태학적 질서에 대해 무지하므로, 이용과 지배의 맹목적 삶의 의지를 앞세워 자연을 분별 인식하니, 자연은 내 밖에 있는 것이고 나와는 무관한 것이며 내가 이용해야만 할 그런 것이라고 인식한 다음, 거기서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을 느낀다.

그러고 나서 그 이로운 것을 갈망하고 그것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되니, 그 집착의 대상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며, 그리하여 생멸의 질서를 이런 식으로 왜곡시켜 간다.11) 모든 생명이 이런 과정을 겪어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생명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업설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진다.12) 12연기에 따르면, 심층생태론처럼 당위론적으로 생명의 존엄성과 평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존엄하면서도 차이를 갖는 것을 설명할 수 있고, 생명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은 업에 따라서 각각 다른 세계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불살생의 생명관과 12연기론이 생태론적 사유의 지평을 열지만, 서양의 이분법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의 패러다임은 법계연기론과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에서 찾을 수 있다.

대연기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하나가 아니요 연(緣)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인 것과 같이 열이라고 한 것은 자성이 열이 아니라 연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열이다. 모든 연생법(緣生法)은 어느 한 법도 일정한 상(相)으로서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13)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백억 년 가운데 찰나의 순간이라 할 한 평생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와 나와 그들의 업(業),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보살핌이 원인이 되어 나는 태어나고 길러졌다. 타인이 없었다면 나는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나와 관계를 맺는다. 가까이 주변의 사람, 내 얼굴에 비치는 햇살, 코를 드나드는 맑은 공기와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멀리 한 점으로 빛나는 별들과 그 사이로 떠다니는 우주 먼지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오늘 나라는 존재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데 관여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사람이 제3자로부터 실은 두 사람이 이복형제라는 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중지하고 포옹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각 존재자를 우리의 범주에 속하게 한다. 이때 우리는 각 존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원효는 연기론을 더욱 발전시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논리를 편다.14)

원효의 불이불이론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相生)의 사유체계이다. 홍수라는 모순이 있을 때, 서양의 이분법의 패러다임에서 가능한 대안은 댐을 쌓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세계를 인간과 자연으로 둘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어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을 타자화하여 이를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15)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서양의 이분법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실제로 최치원은 위천의 홍수를 막기 위하여 둑을 쌓은 것이 아니라 상림(上林)을 조성하였다.

씨가 자기를 소멸시켜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신을 썩혀 씨를 남기듯, 나무는 자신을 공한 것으로 여겨 물을 품어주고 물은 자신을 소멸시켜 나무의 양분이 되었다. 이로 위천은 1천여 년 이상 홍수를 막으면서도 늘 맑을 수 있었다.16) 가정이지만, 이런 패러다임으로 현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다면 상림처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존재를 과정과 생성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서로 깊은 관련을 맺는 하나의 시스템, 곧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과정철학과 유사하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지구상의 온 생명체를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심층생태론과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불일불이의 전제는 공이다. 공이 생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점이 이들 철학과 다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심층생태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교만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불교의 생명학과 생태론은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 공리공론에 그친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환경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일불이로 언제인가는 포용될 것이라며 제도의 개혁과 실천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추상적 관념으로 전락한다.

이 점에서 불교의 생명학과 생태론은 “생물주의는 ‘인간성’을 ‘자연법’으로 영원히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이 뒤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인간’도 ‘사회’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때때로 다양한 영성에 대한 경건한 호소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탐욕에서 등장한 무분별한 이기주의에 성인의 가면을 씌워놓고 있는 형상이다.”17)라는 사회생태론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가 극복되려면, 우선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 근대화를 낳은 ‘폭력적 서열제도’가 불일불이(不一不二)와 같은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이 패러다임에 맞게 사회체제, 국가체제, 세계체제가 개편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근본에서부터 해체되어야 하고, 이를 자연 및 타자와 공존공영이 가능한 체제로 전환하여야 한다.

개량적으로는 태양열과 같은 무공해 에너지에 대한 세계와 국가 차원의 지원 시스템, 환경오염을 낳지 않는 대체 상품 생산과 유통 시스템의 혁신, 마을 단위의 생태공동체 조성 등을 서둘러야 하며, 개인적으로도 생태론적 패러다임을 내면화하고 일상화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일상화해야 한다.

3.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위기: 마르크스와 화엄, 그리고 눈부처―주체성

신자유주식 세계화가 추진된 이후 세계 경제는 대공황에 직면하였고,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수십억 명이 실업과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캐나다 오타와대학 교수인 미셸 초스도프스키(Michel Chossudovsky)의 지적대로 세계화는 실제로는 ‘빈곤의 세계화’를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강제 집행자, IMF는 시장의 자유란 이름으로 전 세계를 외채 위기로 몰아놓고 가난한 나라의 부를 빼앗아 그렇지 않아도 배가 터질 지경인 국제금융자본을 더욱 살찌게 하였다.

신자유주의식 세계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서 1990년대 후반 20여 년 사이에 가난한 나라와 빈자는 더욱 가난해졌고 굶주려 죽는 어린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에 세계 극빈층 20%의 총소득은 그나마 세계 전체 총소득의 2.3%에 달하였으나 신자유식 세계화가 진행된 1996년에는 1.1%로 떨어졌다.

신자유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96년 당시 제3세계가 서방세계에 갚아야 하는 외채는 무려 2조 달러(2,400조 원)로 1970년에 비하여 32배 증가하였다. 그 결과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 아태 지역에 9억 5천만 명, 아프리카에 2억 2천만 명, 중남미에 1억 1천만 명,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실패한 옛 사회주의권 인구의 3분의 1인 1억 2천만 명 등 14억에 달하는 인류가 하루 4달러 이하의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18)

 남반구와 동아시아에서는 5억의 사람들이, 남미에서는 1억 6천만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해마다 4천만∼6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매해 1천 5백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19)

한국 사회만 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 비정규직은 860만 명에 이르렀고, 이들 가운데 한 달 월급이 100만 원 이하인 사람이 440만 명이다. 하위 10%와 상위 10% 계층의 교육비 격차는 4.3배에서 6.2배로 확대되었다.20)

삶의 조건만이 변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20여 년 만에 한국인에게 내면화하였다. 전에는 가난했어도 서로를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었으나, 신자유주의 이후 거의 모든 국민이 화폐증식의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의리와 공동체 정신은 거의 사라지고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 가장 급진적인 세력인 대학생들도 더 이상 인류의 평화나 민주화 같은 주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취업과 출세, 성적 쾌락 등 개인의 욕망을 향해 질주한다. 일반 시민들과 노동자들도 부동산과 증권, 불륜 등 물질적 욕구와 욕망에 관련된 것을 추구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실업이 늘자 극단적으로 빈곤한 자와 이주민, 이들을 동조하는 세력에 폭력을 가하는 극우, 혹은 민족주의적 선동에 바탕을 둔 테러 집단이나 정치인이 빠른 속도로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세를 키우고 있다. 가히 파시즘 전야다.

신자유주의가 파도라면 근원적인 모순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있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토대가 변화하자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농촌 공동체는 급속히 해체되었다. 공장은 농지를 점차로 삼켜버렸고 농민들을 하급 노동자로 전환시켰다. 도시화 또한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단행되었다.

 UNDESA(국제연합 경제 및 사회문제 분과)가 2008년 2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의 도시 인구는 2008년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촌 인구를 넘어섰으며 2025년엔 45억 8천만 명에 이를 것이다. 2050년에는 지금보다 31억 1천 만 명이 늘어 현재 인구와 맞먹는 64억 명이 도시에 살 것이다.21)

자본주의가 산업화와 도시화,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면서 공동체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기에, 사람들은 대지로부터, 그 대지에 터를 두고 살아가던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생산자들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이기에 인간은 물론 노동 자체가 상품화한다.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노동하는 대상으로부터, 함께 노동하는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왜, 어떤 목적으로 생산을 하는지 거의 모른 채 노동을 하고 자신의 생산물을 익명의 상품으로 내놓는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상품을 판매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이기에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모든 부문에서 교환가치를 더 우선시하면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개인의 의식은 물화한다. 생산과정에서는 포드시스템을 동원하고 연봉, 승진 따위로 적당한 보상을 하여 노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생산성을 높인다.

소비자들에겐 구조적 통찰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을 의지와 능력은 버리게 하고 오로지 상품광고와 유행에 의존하여 미친 듯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그럼에도 이 체제의 유지가 가능한 것은 최대의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화폐증식의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화한 노동자(capitalisted worker)가 되어 자본가와 같은 성향과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계급의식을 상실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소비를 하고자 열망한다. 경제성장이란 허상에 조작당하여 그것이 실제로는 엘리트에게만 이익을 주고 빈자를 더욱 가난하게 하고 그들이 사는 삶의 터전인 공동체와 자연을 황폐화함에도 이를 지지한다. 이 체제 속에서 욕망이란 이미 점유하고 있는 타자의 권력과 자본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이기에, 이 구조 속의 인간들은 나와 타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자연스런 생존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나 연대는 깃들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정글법칙대로 생존이 결정되고, 저 밑에서는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욕망이 꿈틀대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전락하였다. 이에 더해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시물라시옹과 이미지로 현실과 진리, 원본을 대체하고 있다. 이 속에서 대중은 진짜 대신 가짜, 원본 대신 복사본, 진리 대신 허상, 구체적 현실 대신 가상현실과 이미지로 범벅이 된 프레임을 진리인 양 수용하고 이에 이끌려 실천하고 있다.22)

2001년부터 필자는 신자유주의식 세계화는 결국 실패하고 미국이 지금 정점에 있지만 곧 쇠망할 것이라고, 걸프전이 발전하는 세계화에 발맞추어 미국에 성장과 번영을 주었다면,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쇠멸하는 세계화에 편승하여 미국의 쇠락을 이끌 것이라고23) 경고하였다.

지금 피해자인 제3세계는 물론 가해자인 미국조차 장기적인 경제침체기에 들어섰으며 미국민의 삶의 질은 이미 최강대국의 그것이 아니다. 제3세계의 연대와 각성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곳곳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최대 수혜자인 미국의 엘리트조차 이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혁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 가까이로는 토빈세를 활성화하여 투기자본에 족쇄를 채우고, 나아가 브레튼우즈 기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각국이 중앙은행을 스스로 감독해야 하며, 개도국의 외채를 전액 탕감해야 한다. 각국 정부에 대한 국제채권자들의 압박에 이의를 제기하고 금융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2006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해마다 85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기초적인 교육과 의료와 위생시스템을 보장받고 적절한 영양, 식수, 여성의 경우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8,500억 달러면 일시적인 구제가 아니라 기아와 위생, 교육을 반영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2008년에만 군비로 약 1조 4,640억 달러를 지출하고,24) 너무 먹어서 초래된 비만을 치유하는 데 매년 1,500억 달러 이상을 소비한다는 것은 진정 야만이다.25)

이제 전 세계가 지금의 반 이하로 군비를 줄이는 협정을 맺고, 적게 먹고 남는 식량을 가난하고 굶주리는 자와 나누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제3세계와 NGO,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UN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적 연대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구심점으로 화엄의 패러다임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상입(相入)이라는 것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체 세계가 한 티끌 속에 들어가고 한 티끌이 일체 세계에 들어간다. 삼세 제겁이 한 찰나에 들어가고 한 찰나가 삼세 제겁에 들어간다. 크고 작음, 느리고 빠름이 서로 들어간다. ……지극히 크다는 것은 이른바 밖이 없는 것이니, 밖이 있다면 지극히 크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다는 것 또한 그와 같아서 이른바 안이 없는 것이니 설사 안이 있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밖이 없는 큼은 이른바 크나큰 허공이며 안이 없는 작음은 이른바 미미한 티끌이다. 안이 없기 때문에 또한 밖도 없으니 밖과 안은 반드시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지극히 작은 것은 지극히 큰 것과 같다는 것이다. 태허는 밖이 없기 때문에 또한 안도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지극히 큰 것은 지극히 작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큰 것에는 작은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크고 작음이 같은 양임을 안다면 모든 크고 작음에 장애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곧 불가사의한 해탈이다.26)

위의 글은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을 설명한 것이며, 계(界)로 따지자면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경지로 일상의 차원에는 적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세계 체제에 응용한다. 한 사물의 지극히 작은 원자는 우주의 구조와 상동성을 갖는다. 때문에 원자의 구조와 소립자를 알면 알수록 우주의 비밀이 풀리고, 이 역도 성립한다. 우주는 원자에 담겨 있고, 원자는 우주를 품고 있다.

수억 광년 떨어진 곳의 초신성이 폭발하면 이것이 지구의 대기와 자기에, 생명들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듯, 우주의 변화가 원자에 영향을 미치고, 원자의 울림이 우주를 울린다. 우주의 변화는 내 몸과 200조 개의 세포에 미동을 주고, 한 세포의 변화는 내 몸을 바꾸고 나아가 우주를 떨게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소녀의 죽음은 인류 전체를 울게 하고, UN의 개혁은 콩고 밀림 속의 한 소년을 웃게 한다. 에티오피아에서 한 아이가 굶주려 죽어가는 순간,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 부호는 비만으로 병상을 전전한다. 영국의 식당에서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먹는 순간, 아마존에서는 수십 평에 달하는 삼림, 수천 리터의 물, 수십 킬로그램의 곡식이 사라진다.

문화와 역사와 경제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다.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과 프랑스의 시민 사이에 우열은 없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성경과 유사한 내용의 문구가 반이 넘고, 미국인과 이슬람인의 차이는 미국 중부와 서부의 사람 차이에 비하여 그리 큰 것이 아니다. 미국인에게 이슬람인다움이 있고 이슬람인에게 미국인다움이 있다. 다국적기업의 농간일 뿐, 빈민국이 불황이면 미국 경제도 타격을 받으며, 반대로 경제가 좋아지면 미국의 경제도 보탬이 된다.

지금 세계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중심의 정점에 선 체제에서 유럽, 중국, 러시아, 남미공동체가 다극을 형성하고 세계 모든 나라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체제로 변환하고 있다. 이제 한 나라는 전 세계와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가 거울이고 그림자가 되어 서로 비춘다. 부분이 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한 한 부분이듯 한 나라는 전 세계를 포괄한 한 나라이다.

한 사람은 전 세계의 인류와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가 거울이고 그림자가 되어 서로 비추는 것이다. 한 사람은 전 세계의 인류와 무한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사람이다. 지극히 큰 나라와 지극히 작은 나라는 같다. 미국의 부유한 시민과 아프리카 소국의 빈민은 같다. 이제 세계 체제를 약육강식의 체제에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똑같은 권리를 갖고서 상즉상입하는 화엄의 세계 체제로 전환하여야 한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달리 좀 더 혁신적인 방법을 요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선언》에서 적극적 자유는 사회적 개인들의 자기발전이므로 각 개인이 타자를 더 많이 향상시켜 줄수록 그들 각자의 발전의 여지는 더욱 커진다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27)라고 선언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개인은 사회 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s in social relation)이다.

개인이 자신과 타자와 관계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할 때 주체가 된다. 주체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뿐만 아니라 자기 앞의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면서 적극적 자유(to freedom)를 쟁취한다. 더 나아가 주체는 타자와 자신이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타자의 자유를 더 확대하려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를 구현한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이상 사회는 개인이 사회관계성과 주체성을 함께 인식하고서 정의, 곧 타자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사회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좀 더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려고 서로 갖은 실천을 다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모두가 모여 함께 할 일을 정하고 일하는 자들이 땅과 공장을 공유한다.

이곳에서 노동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아니다. 가치를 생산하고 자기 앞의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여 자신의 본성을 구현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방편이자,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변형하는 실천이다. 더 나아가 나의 노동을 통하여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이타적(利他的)인 동시에 대자적(對自的)이고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각자의 능력을 따름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름으로”라는 그가 제시한 원칙에 나타난 대로 사람들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존재 의의를 가지며 능력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분배한다. 타인을 자유롭게 하여 나는 더 자유롭게 되고 자유로워진 나로 인하여 타인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이 순간 자유는 나 아닌 타자를 더욱 자유롭게 하는 실천으로서 정의와 부합한다. 정의 또한 자유를 전적으로 발전시키는 조건이 된다. 자신의 자유로서 진정한 자기실현을 달성한 개인은 상호관계성으로서 정의가 실현되고 적극적인 자유를 구현하는 조건에 각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인정되는 공동체를 요청한다.28)

불교와 마르크시즘은 무신론적 입장, 세계를 변화 내지 무상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실천지향적 태도, 기존 질서에 비판적인 태도, 인간 해방 및 이상사회의 추구, 이타적이고 대자적 실천 지향, 기존 체제와 텍스트에 대한 해체적 입장 등에서 공통점을 보인다.29)

그럼에도 차이는 분명하다. 붓다에게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고,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이나 경제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을 물신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다. 그러기에 불교는 수행자에 의한 인정투쟁을 통해서 이상사회에 도달하려고 한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노동자의 계급투쟁에 의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30)

차이의 맥락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대안의 삶과 체제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눈부처―주체성이다. 눈부처 주체성은 원효의 변동어이론(辨同於異論)과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을 바탕으로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현대적 주체의 개념을 결합한 것이다.31) 이는 서양의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나 김상봉의 서로주체성과도 차이를 갖는 개념이다.

원효는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32)라고 말한다.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主)와 객(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엔 주체가 스며 있다.

눈부처 주체는 내가 스스로는 주체성을 갖지 못하고 타자를 통하여, 타자와 무수한 연관 속에서 가유(假有)로서 주체를 형성함을 인지한다. 역동적인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처럼, 눈부처 주체는 동일성의 사유를 뛰어넘어 차이 그 자체의 사유로서 자신 안의 타자, 타자 안의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보는 자로, 타자 속에서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타자를 부처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부처가 되려는 자다.

눈부처 주체는 씨가 죽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듯,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눈부처 주체는 타자를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한 정의를 실천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자다. 눈부처 주체는 사회관계 속에서 가유로서 자신의 주체를 형성하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저항하며 소외와 장애를 극복하는 적극적 실천을 행한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소극적 자유와 더불어 가능성을 실현하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려는 적극적 자유뿐만 아니라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나의 자유를 완성하려는 대자적 실천을 행한다. 그는 나와 깊은 관계 속에 있는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는 실천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한다. 이 순간 주체와 연기, 자유와 정의는 일치한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눈부처―주체성이며, 이런 순간의 희열이 바로 현세적 니르바나다.

현실은 모든 개인이 눈부처 주체로 거듭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 무명(無明)에 물든 우중(愚衆)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모두가 눈부처 주체가 된다 하더라도 깨달음이 곧 집착이듯, 부단한 자기 해체와 이를 제도화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언제든 눈부처 주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 때문에 사회 자체를 새로운 체제로 변혁해야 한다. 절충적인 제3의 길을 넘어선 대안은 화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여전제(閭田制), 렉토르스키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결합한 눈부처 공동체이다.

눈부처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눈부처 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의관을 확립하고 깨달음에 이른 자라도 언제든 탐진치에 물들고, 이기심과 욕망에 기울어질 수 있기에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공동체의 50%는 필요에 따른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하며, 나머지 25%는 개인의 능력별로 인센티브를 주어 개인의 창의력을 발현할 동기를 부여하며, 25%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더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 대자적 자유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물론 구성원 간 상호주체성을 높이기 위하여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여 자유토론으로 정한다. 외적으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 간 상호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려 한다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구분 없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자유롭게 할 때 내가 진정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세상의 삼라만상과 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 생산에서 소비 체제에 이르기까지 순환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환경파괴 없이 깊은 연대와 사랑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4. 과학의 도구화와 비인간화: 신과학과 대승기신론

주술의 정원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였던 과학은 이제 계몽의 빛을 잃고 있다. 고도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은 도구화하여 인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이자 메커니즘으로 전락하였다.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수용소에서 인간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할 때, 자본가들이 몰래카메라를 장치하고 전자감응센서를 달아가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생산성을 최고로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할 때, 국가가 대중을 조작하고 관리, 통제하는 기제로 이용할 때, 미국이 MD를 강행하여 다른 나라의 도전을 무력화시키고 안으로는 군산복합체를 살찌우고 밖으로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약소국을 마음대로 수탈하고 유린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을 때,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세주가 아니다. 이제 정치 기구와 밀접하게 결합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무의식마저 지배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

과학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최근에 깊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게놈프로젝트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지 47년 만에 인류는 30억 쌍의 유전자지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 생명의 비밀에 거의 근접하였으니, DNA칩을 이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예방하며,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암과 알츠하이머병 같은 난치병을 치료할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간이나 폐를 돼지나 원숭이에게 키워 다시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다.

인류는 고통과 불안으로 몰아넣은 질병을 거의 정복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복제인간을 합성할 수도 있고, 얼굴은 디카프리오, 몸은 마이클 조던, 머리는 아인슈타인식으로 맞춤아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기독교식으로 보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불교로 보면 업(業, karma)의 주재자가 되었다고 착각할 만한 일이다.

곳곳에서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악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봇 공학은 생산성을 증대하고 위험하거나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의 노동을 박탈하고 지배할 수 있다. 핵무기는 지금도 언제나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다. 유전자조작 식품은 수십 억 년간 유지돼 온 지구 사회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잘못 합성된 신종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사망시킬 수 있다.

 컴퓨터 공학은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감시하고 관리, 통제하는 시스템을 강화하며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갈 위기를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처럼 복제인간을 만들어 장기를 적출하고 폐자동차처럼 인간을 버리는 것이 상업화한다면, 세계 정복의 야망을 가진 과학자가 히틀러와 같은 인간을 무한 복제한다면, 그 끝은 인류사회의 종말일 것이다.

신과학운동론자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것이 파기해버렸던 서구와 비서구의 전통사상을 결합해 대안을 모색한다. 이들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 물리현상의 결정론적 인과율, 기본적인 고체의 물질 입자를 파기하고 새로운 세계관, 곧 역동적이며 유기적이고 전일적인 세계관으로 자연현상과 물리적인 현상을 보려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물질의 객관적인 모형은 그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에 영향을 받는다.

물체는 그 물체에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자기의 운동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는 뉴턴의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접하면 무너진다. 중력하에서는 빛이 휘어지고 시간이 뒤죽박죽이 되어 공간도 비틀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기에 물리나 우주 현상의 궁극적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과 객관적 물리 현상, 인간과 자연과 우주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엔트로피 이론은 발전 지상주의나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사막에 빌딩이 들어서고 길이 바둑판처럼 들어차면 우리는 이를 발전이나 질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빌딩에 난방을 하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나무를 캐고 석탄과 석유를 가져와 태워야 한다. 한 곳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면 외부에 그보다 더 큰 정도로 엔트로피를 증가해야 한다.

 엔트로피 이론을 통해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러므로 전 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국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는 종말로 치닫는 질주일 따름이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와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와 쓰레기가 생긴다는 것을 진리로 천명한다.

우리는 신과학운동과 엔트로피 이론으로부터 두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많을수록 무조건 더 좋은 것은 아니다.”와 “전체 시스템이 원활하게 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길이요 진정한 발전이다.”라는. 사슴을 보호하려고 천적인 퓨마를 죽였더니 사슴이 너무 늘어 외려 굶어 죽어버린 사례에서 보듯, 어느 한 부분의 효율만을 극대화하면 이것은 다른 부분의 파괴로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전체 시스템의 차원에서 적정한 규모의 수준으로 조절하여 재편성하여야 한다. 대형 댐을 건설하여 주변의 산과 숲, 공동체를 파괴하고 강물과 거기에 깃들여 사는 생물들을 죽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관료체제를 만들어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면서 생산한 전력의 평균 30%를 낭비하고 근처의 기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자의 방식일 것이다.

지역 공동체에서 지역 특성에 맞게 풍력이나 태양열을 이용하여  자급자족식으로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후자의 대안일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엄청난 쓰레기를 낳았던 것이 전자의 문명이라면, 소규모 공동체를 바탕으로 빗물은 냇물로 보내고 생활하수는 자연 정화하여 밭으로 돌리듯 모든 것을 순환체제의 속에 놓는 것이 후자의 문명일 터이다.

신과학운동은 세계를 유기적, 전일적으로 바라보고 이분법을 넘어서서 주관과 객관, 심(心)과 물(物)을 하나로 통합하고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고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이는 당위적이고 선언적일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는 부분까지 모호하게 신비화하고 은유화하여 사이비과학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과학이 야기한 역기능, 과학이 도구화한 현실 사회 자체의 모순을 분석하거나 비판하지도 않기에 이에 합당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물질과 자연의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일상의 영역에서는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과학기술이 야기한 비인간화와 도구화, 환경파괴를 극복할 과학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럼, 불교에 과학의 도구화와 신과학의 사이비성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입의분(立義分)〉에서 마명(馬鳴)은 일심(一心)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고 진여문에 체대(體大), 생멸문에 용대(用大)와 상대(相大)를 두어 일심이문삼대(一心二門 三大)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원효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의 실체를 체(體), 상(相), 용(用)으로 나누되 일심이 화쟁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용상(體用相) 각각이 아니라 삼자의 관계와 원리다.

만약 상주(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體)라 하고,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일심이 무명(無明)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뭄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33)

세계는 원래 하나이나 생멸문에서는 상(常)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궁극적인 것과 무상(無常)하여 이루어지고 찰나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가 진여(眞如)의 모습인 체(體)이며, 후자는 생멸인연(生滅因緣)하는 상(相)과 용(用)이다. 체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실체를 나타낸다. 따라서 체는 상과 달리 사물이 드러내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체로 깨달은 것이다. 반면에 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경험적이고 세속적이다.

경험되고 드러나 나고 멸하는 것을 세계의 상이라 한 것이다. 상은 체가 드러나 생멸인연하는 바다. 인간이 경험에 의하여 사물을 드러나는 그대로 보는 경지이다. 또 세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고 기능을 한다. 인간으로 보면 실천이, 진정한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자비와 덕을 베푸는 것이 용(用)이다. 따라서 용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다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고 기능을 한 것이며,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운동한 것이다.

원효는 세계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보이는 것을 다시 세계의 현상 그대로 보이는 것과 작용하여 드러내는 것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체용상의 원리는 서구 철학처럼 대립적이지 않다. 이것이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나, 모두 일심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해, “마음의 나고 사라짐은 무명(無明)에 의지하여 이루어지고, 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본질적 깨달음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두 개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므로 화합이 된다.”34)라고 말한다.

그럼 일심의 체용상을 과학기술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갈릴레이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물질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다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본질에 비하여 조금 더 실체에 이른 것뿐이지 물질의 진정한 실체에 접한 것은 아니다. 연구를 진행할수록 새로운 소립자가 계속 발견되어 원자의 구조 또한 달라지고 이에 따라 물리나 천체의 원리가 달라진다. 그러니 지구과학이 앞으로 수만 년 더 발달한다 하더라도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누구도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빛이 원래 하나이나 이를 명(明)과 암(暗)으로 가르고 다시 세분하여 빨, 주, 노, 초로 나누듯, 세계는 하나이나 그러면 인간이 이를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으니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주(主)와 객(客),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등 둘로 나누어 본다.

이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이용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용(用)이다.

아무리 궁극적인 진리에 다가갔다 하더라도 둘로 나눈 것―또는 이에 이름 붙인 언어기호―로는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서양 철학자처럼 사람들은 이성을 통하여 세계를 둘로 나누고 이를 진리로 착각하였다. 그러니 셋을 두어 둘의 허상을 해체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체(體)다.

그럼 이들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우주의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천체와 물질의 작용과 기능, 물질과 물질의 관계를 통하여 한 자락 엿볼 뿐이다. 이처럼 체(體)는 용(우리말로 ‘짓’)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용을 통해 드러난 체가 바로 현대 과학이 추구하였던 과학적 진리다.(이를 나는 ‘體2’, ‘몸’이라 명명한다.) 용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아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를 수도 없는 체가 바로 일심, 도(道), 틍이다(이를 나는 ‘體1’, ‘참’이라 명명한다.). 아직 근대과학으로 해명되지 않은 우주와 물질의 진리가 참이다.35)

몇몇 우주의 원리에 따라 지구와 은하가 만들어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을 갖는 것처럼, 용은 상(우리말로 ‘품’)을 만든다. 다른 구조의 상을 가진 천체나 원자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이처럼 상이 체를 담는다. 이처럼 체는 용을 통하여 드러나고 용은 상을 만들며 상은 체를 담으며 이 체는 또 다시 용을 낳는다. 체와 용과 상은 영겁순환에 놓인다.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지고 이문은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다시 일심의 체로 돌아가고 이는 다시 이문으로 갈린다.

이제까지 논증한 것처럼,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분법과 분별을 해체하고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면에서는 신과학과 통한다. 그러나 원효는 당위적으로 이항대립의 사유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의 회통을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면서도 일상을 영위하고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 부처와 중생, 깨달음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는 방편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여 일상의 장에서는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면서도 이로 해명되지 않는 참의 부분을 남겨두고 이에 다가가려 한다.36)

일심의 체용상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이 빚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석굴암의 예는 21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석굴암엔 가까운 동해로부터 습기와 염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불어오고 이는 석조물에 치명적이다. 이를 막기 위하여 일제는 석굴암을 해체하여 콘크리트로 지붕을 둘렀고, 한국 정부 또한 여러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금도 습기 제거기를 돌리고 있으나 그 진동으로 석굴사의 그 아름다운 불상들은 하나 둘 부스러지고 있다. 그러면 천여 년 동안  해풍이 강한 동해 해변에 있으면서도 석굴사는 어떻게 하여 전혀 부식되지 않았을까? 답은 지하샘이었다. 사람들은 석굴사를 하필 차디찬 샘물이 솟는 곳에 앉힌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동해에서 불어온 습기 많은 해풍은 석굴사에 들어왔다가 샘물로 냉각된 바닥의 돌을 지나면서 이슬을 맺고, 지상의 공기는 수분을 빼앗겨 건조해지고 이 공기는 천장의 틈을 통해 나간다. 이러니 본존불을 비롯한 모든 유물들은 자연스럽게 보존되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의 상태인 방안일 뿐 아니라 완벽한 순환의 체제이다.

이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다. 업과 연기의 원리를 알아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진정 새로운 과학의 길일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잣대로 억지로 질서화할 것이 아니라 짓을 통하여 그 연기된 무질서에 가까이 가려 해야 21세기의 과학은 실증적 사실을 넘어 진정한 실체에 다다를 것이며 인간과 전 우주가 하나로 공존하는 길을 열 것이다.

5. 깨달음과 시스템 개혁의 회통

상림(上林)을 조성하여 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위천의 물이 맑게 흐르도록 한 최치원은 부임한 그 해의 홍수는 어떻게 막았을까. 그는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상림이 일심(一心)이고 불교적 패러다임이고 탈현대라면, 둑은 이분법이고 서양의 패러다임이고 과학적 대안이자 현대이다. 화쟁은 이문(二門)을 통해 일심(一心)으로 감으로써 양자 또한 하나로 회통한다.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닌 동시에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일심이요,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 체를 들어 둘로 삼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한다. 이상이 그 대의이다.37)

깨닫지 못한 자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그러나 앞 장에서 이야기하였듯 세계는 하나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하나지만, 중생들의 일상에서 보면 이데아와 그림자, 주와 객 식으로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으니 하나에 머무르면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분별심을 떠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일상에서 깨달음의 세계, 더러운 세계에서 청정한 세계, 허위에서 참을 지향하고자 하면 진여 실체는 하나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중생을 향하여 나아가 중생과 더불어 실천하고 생각하며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면 세계를 둘로 말해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진여실체가 하나이지만 둘로 가르는 것은 용(用)이요, 둘이 허상임을 깨닫고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체(體)이다. 이처럼 원효는 일심이문의 회통을 통하여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아우르려 한다.38) 

여기 수억 원에 이르는 환경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비오는 날 폐수를 몰래 버리는 것이 자기 회사의 이익이라고 확신하는 자본가가 있다. 그가 폐수를 버리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는 그가 환경운동가의 강의나 스님의 설법을 듣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고 잘못을 깊게 참회하는 것이다. 다른 방안은 지혜에 이르는 것이다. 선악의 문제나 판단과 관계없이,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버린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이 식용하면 병에 걸림은 물론 기형아도 낳을 수 있음을 깨닫고 폐수 방류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혜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아(我)란 없으며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 모두 미봉책이자 지극히 비사회과학적인 대안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이 모여 이기적인 욕망을 더 충족할 수 있다는 보장을 믿고 개인의 욕망을 유보하고 이타적인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전제 조건이다. 이런 전제 조건에서 파생된 현대식 대안은 폐수를 방류하였을 경우 거의 회사가 망할 정도로 벌금을 부과하고 사업주를 장기간 구속하도록 법제화하고 대중이 그 회사의 상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능동적인, 곧 탈현대적인 대안은 불일불이의 패러다임 아래 엔트로피가 제로 상태인 순환 시스템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회사가 그 지역의 마을과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고 모든 폐수를 깨끗이 정화하여 이를 농업용수로 공급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국가와 사회는 세금감면, 그 회사 상품의 우선 구매 등의 방법으로 이에 대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 체제와 시스템과 제도를 혁신하는 것과 개인의 각성과 실천을 하나로 아우를 때 문명의 대전환은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올 것이다.

6. 맺음말

2005년 8월 말, 미국의 남부를 강타한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대참사는 다가올 미래의 전조이자 경고이다. 카트리나는 대륙에 가까이 올수록 에너지를 잃어 속도가 줄어드는 태풍의 상식을 깨고 지구 온난화로 더워진 바닷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 더욱 속도가 상승하여 1등급의 태풍으로 변하였고, 습지를 간척하고 운하를 건설한 바람에 완충 지대를 잃은 바닷물이 뉴올리언스 시 전역을 물에 잠기게 하였고, 결국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초토화한 도시는 아직도 복구 중이다.

카트리나보다 더 큰 슈모의 슈퍼태풍이 한반도에 불어온다면 이 땅은 어떻게 될까? 이제 ‘카트리나’는 보통명사로서, 탐욕적인 소수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으로 제도를 운용하고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나타날 것이다.

예전엔 폐수의 양과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 사이에 격차가 있어 폐수를 버리더라도 늘 강물이 맑게 유지된 것에서 보듯,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촌 사회는, 환경이든 경제든, 마음이든 그 빈틈이 사라졌다.39)

이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불일불이(不一不二)나 변동어이(辨同於異) 등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혁신하고, 이 패러다임에 따라 모든 사회 시스템과 제도를 엔트로피가 제로 상태인 순환의 시스템으로 개혁하고, 개인 또한 눈부처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이 다른 타자들, 나아가 모든 생명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그들을 더 자유롭게 하는 실천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하며, 이런 순간 희열을 느끼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평화적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되, 더 큰 아우름을 향하여 이를 방해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한다. ■

이도흠1958년 제천생. 현재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의 교수, 실상사 화엄학림의 외래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 편찬 연구위원.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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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1)  

2009-10-26 13:43:39
아주 좋은 토론 입니다.
이것이 21세기 불교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한국은 돈 에 눈이 어두운 승려 들이 너무 많아요.
불교대학의 교육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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