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11회 - 2009년 7월 24일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전혜린이라는 이름. 1960년대나 70년대에 사춘기 혹은 젊음의 시절을 지났던 세대들에게 이 이름은 짙은 ‘허무’와 ‘낭만’ 그리고 ‘자살’ 등등의 말들과 함께 뇌리 속에 남아있다. 나 역시 그랬다.

당시 우리 사회를 휩쓸던 실존주의라는 분위기를 배경으로, 견딜 수 없는 삶의 허무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 여류 문인의 이야기는 고즈넉하고도 쓸쓸한 북유럽의 가을 분위기를 연상시키면서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심지어 동경의 대상으로까지 비쳐지기도 했다. 전혜린의 유작인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1966)는 책 제목에서부터 자살을 상업적 의도로 이용하려는 냄새가 물씬했지만, 한 동안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기억도 난다.

후일 나는 철학을 전공하면서 ‘실존’과 같은 말이 얼마나 오해를 받고 있고(오히려 실존주의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극한까지 추구하고 긍정하려는 사상이다), 철학과 문학 주변에서 오가는 죽음에 관한 피상적 이야기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책 본문에서 거론한 프랑스 문인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자유죽음론’ 역시 전혜린의 예처럼 잘못된 생각이 불러오는 치명적 결과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 불교 등 위대한 종교들의 가르침, 사회와 인간을 건강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여러 철학들을 공부하면서, 나는 장 아메리나 전혜린 류의 자기 연민과 감상(感傷)을 인간의 ‘자유’ 내지 ‘실존’ 운운하며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소아병적이고 미성숙한 인간들의 자기 합리화인지를 알게 되었다.

멀리 전혜린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는 자살은 자살자 수에서나 자살의 동기 면에서나 너무나 걱정스럽고도 절박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책을 내야겠다는 필요성도 당연히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내가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지난한 고통들은 우리에게 자살을 택하라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삶의 고통이란 우리의 영혼이 비루하고 유한한 육신의 삶을 넘어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하도록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얘기다.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개인적 좌절이나 사회구조의 모순 따위로 인해 자살한다는 말은 그저 핑계거리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삶을 건강하게 꾸려가고 있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장애인, 보통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영혼의 성숙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학문 분야를 생사학(Thanatology)이라고 한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이 오늘날 보통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쓸모가 많지 않다는 것을 오래 전에 느낀 바 있다. 생사학 분야로 연구의 방향을 돌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수년 간 우리 사회를 마치 광풍처럼 휩쓰는 자살 사태를 접하면서, 나는 생사학의 관점이야말로 자살을 예방하는 데 있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가장 적절한 방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한림대학교에서 개설한 2008년 1학기 철학과 전공과목에 제출된 리포트를 소개한다.

1년 반 전 교양으로 오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다. e-campus(한림대 온라인 강의시스템의 이름)에서는 전에 들었던 강의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2006년 2학기로 들어가 보았다. 입력창에는 내 이름을 쓰고 엔터를 누르면 나오는 나의 글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클릭해서 읽어보았다. 1년 6개월 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세상을 수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살아간다. 가장 잘못된 편견은 죽음에 관한 편견이다. 내 핸드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 물어보았다. “죽음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뭐야?” 대답은 뻔했다. 슬픔, 두려움, 무서움, 생각해본 적 없다 등등. 몇몇에게만 물어보았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우리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다, 죽으면 육체의 옷을 벗고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설득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자신도 그랬으니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는 하다. 20여 년 동안 자신의 몸과 머리에 박혀 있던 생각들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에게 나는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가 이 지구에 태어나서 울고 웃고 고생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저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자살예방교육의 효과와 중요성을 묻는다면 그 증거로 ‘나’를 들고 싶다. 나는 누구보다 자살충동을 심하게 느꼈고, 자살시도까지 한 적이 있다. 16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내 생각과 너무 달라 반발도 해보고 친구에게 짜증도 내보았지만, 결국 나는 많이 변했다. 한 학기 교육을 받은 이후, 교수님의 소개로 여러 방송국과 인터뷰도 했고, 지난 3월초에는 육군본부 군종장교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나의 이야기, 자살예방교육으로 변하게 된 과정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죽음을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자살을 예방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겼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자살에 대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음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생사학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현안인 자살예방에 결정적인 대책이 된다는 증거를 이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일간지 기자가 춘천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학교에서 자살이 일어나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담당 교사들을 만나 보았더니,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 한번도 교육받은 일이 없어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기자는 그 이야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살예방의 기본은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 아무 준비 없이 충동적으로 죽음에 뛰어드는 것이 왜 문제인지, 죽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깊이 있게 제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자살을 막아보겠다는 의도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바람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교육적 뒷받침을 하지 않는 한 자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교육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조금만 둘러보면, 거꾸로 왜 이토록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음 문제를 연구하는 생사학 전문가인 철학교수가 자살예방 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우리 사회는 그 동안 자살 현상을 대다수 ‘정상인’과는 무관한 소수 ‘비정상적’ 개인들의 일탈 행위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이 문제에 눈 감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이제는 자살 현상의 심각성을 사회 전체가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되었고, 자살 예방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자살이 ‘정상인’ ‘비정상인’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살충동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를 볼 때, 자살률 증가도 문제이지만 경제적․사회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 자살 충동자가 평범한 일반인에게도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살률 증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살충동자, 자살예비군의 양산에 있는 것이다.

자살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봉책이나 임기응변이 아닌 더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내가 누누이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살문제의 근본 대책은 ‘자살예방을 위한 웰다잉(Well-dying) 교육’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자살예방교육을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모두 아울러 실시하지 않는다면, 어떤 자살예방 캠페인을 벌여도 효과를 보기 힘들 것이다. 자살예방은 눈에 보이는 빙산의 얼음덩어리 즉 자살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얼음덩어리 아래 숨어 있는 빙산의 몸체 즉 죽음에 대한 오해와 우리 사회의 불행한 죽음 방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다.

자살 사례를 추적해 보면, 자살자들은 거의 대부분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자각이 전무하여 그 같은 불행에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자살자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탈출구가 마치 죽음에 있기라도 하듯 너무나 쉽게 자살을 감행한다. 자살자는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살한 이후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평소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도, 준비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살 예방과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죽음 문화의 형성을 위해 나는 2004년 12월부터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한림대에 ‘생사학연구소’(www.lifendeath.or.kr)를 설립, 죽음 현상에 대한 연구와 성숙한 죽음문화 보급을 위해 다양한 연구와 교육, 그리고 사회 활동을 벌여왔다. 자살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적절한 예방 활동이나 자살예방 전문가가 크게 부족한 점을 감안해 연구소에서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자살예방을 위한 웰다잉 교육’의 보급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의학과 심리상담 위주로 자살예방 활동이 실시되고 있지만,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부분적이고도 대증적인 처방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다. 자살예방 활동이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웰다잉 교육’을 통해 죽음과 자살을 바르게 이해시키고,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상담 활동이 진행된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례가 현재 군부대에서 실시되고 있는 웰다잉 교육이다. 군 장병들의 자살 또는 총기사고 사건은 우리가 뉴스에서 보듯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군에서는 지난 몇 년간 자살 가능성이 있는 관심병사의 식별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살한 병사의 50퍼센트 이상이 전혀 식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살 사건을 일으켜 해결이 여전히 어려운 상태였다. 젊은이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잘못된 죽음관이 군이라는 특수 환경 속에서 빚어내는 결과에 대해 군 당국 역시 뾰족한 대책이 없었던 셈이다.

나는 육군본부 자살예방 TF팀의 의뢰로 2008년 3월 3일과 4일 양일간 육본 군종실 관계자, 육군 제6군단 소속 군종장교 30여명을 대상으로 ‘자살예방을 위한 웰다잉 워크숍’을 시범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웰다잉 교육과 상담과정을 이수하고 군부대에서 자살예방 교육을 하고 있는 상담 전문가에 따르면, 군부대의 장병들에게 ‘자살예방을 위한 웰다잉 교육’을 먼저 실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실제 어려움에 처한 병사를 개별 상담했더니 성과가 훨씬 높았다고 한다. 기본 교육을 통해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없이 상담만 진행했을 경우, 병사의 개인적 사유와 죽음에 대한 이해 문제가 뒤섞여 효과적인 상담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내가 실시했던 시범 교육의 성과와 자살예방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육군본부 자살예방 TF팀은 ‘자살예방을 위한 웰다잉 교육’이 자살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이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도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우선 일차적으로 육군 제6군단 군단장 지시로 산하 5만여 병사들에게 2008년 상반기 중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나는 군부대뿐 아니라 학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자살 예방을 위한 웰다잉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1장 자살충동자 양산

고등학생 시절 친구가 교실에서 뛰어내리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홍군은 그 이후 10년간 악몽에 시달렸다.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홍군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홍군은 창과 진용이 사이에서 당황한 채로 서 있었고, 선생은 교실 앞문 쪽에 쓰러져 있었으며, 내 친구는 소리를 지르며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멈추게 해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았고,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친구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홍군은 달릴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1층으로 뛰어 내려가 땅바닥에 이상한 모습으로 떨어져있던 친구의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홍군 달려가 제대로 몸을 눕혀주었을 때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친구의 그때 얼굴. 참 기괴하게 어긋나 있었던 시신의 모습, 이런 모습들이 꿈을 꿀 때마다 계속 나타나 고등학교의 남은 기간 동안 그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잠깐 조는 와중에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곤 했었고, 정신과에서 처방 받은 수면제도 홍군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지는 않았다.

몇 년째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홍군은 무수히 자살 시도를 했다. 꿈에서는 홍군이 내리친 책상에 잘못 맞아 죽기도 했었고, 떨어지며 나무에 꿰인 채로 죽어있기도 했었고, 홍군과 함께 떨어져서 죽기도 했었고, 갑자기 교실이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었으며, 여하튼 수많은 방법으로 꿈에서 친구는 ‘반복적으로 어딘가에서 떨어져’ 죽어있었다. 그런 꿈은 언제나 친구가 홍군을 바라보며 ‘왜 나를 그때 막지 않았니.’ 라는 질문으로 끝이 났다. 계속되는 악몽에 시달리던 홍군은 결국 따라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고,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던 소주를 잔뜩 들이킨 뒤, 아파트의 옥상으로 올라가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친구의 자살 이후 홍군은 항상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다녔었고, 항상 검은색 옷만을 입었다. 대학을 다니며 일주일에도 서너 번은 꼭 꾸던 고등학교 때 일어났던 그 상황을 다시 겪는 악몽의 빈도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같은 꿈을 똑같이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자살자 수는 얼마나 될까?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6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자살자 수는 1만 688명으로, 하루 평균 2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5년에는 그 수가 더 많아 전체 1만 2,047명, 하루 33명꼴에 이른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로 계산하면 각각 23명(2006), 26.1명(2005)에 이르는 높은 수치다. 자살률이 충격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하던 외환위기 직후가 19.9명(1998)이었으니 현재의 자살률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할 수 있다.

자살 사망자수가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는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2002년에 이미 자살률(19.13명)은 교통사고 사망률(19.12명)을 앞질렀다. 게다가 자살은 수년째 20대와 30대의 사망원인 1위로 나타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한국의 자살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회원국 가운데 최고라는 사실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라면 먼저 북유럽, 일본 등 잘사는 선진국들을 꼽던 우리들의 상식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 지난 2003년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4명으로,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은 헝가리(22.6명), 일본(20.3명)을 제친 지 오래다. 한국은 이제 자살률 세계 최상위의 고위험도 국가가 되었다. 결코 자랑할 수 없는 1위인 셈이다.

게다가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6년 자살자 수는 전체 1만 2,968명, 하루 35.5명꼴로 통계청 수치보다 훨씬 높은 자살률을 보여주고 있다. 통계청과 경찰청 자료가 이렇게 다른 것은 조사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통계청은 유족이 제출한 사망신고서에 입각해 자살률을 계산하지만, 경찰청은 자살 현장에서 경찰이 직접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자살률을 산출한다. 사망신고서에 자살이라고 쓰기를 꺼려하는 유족들의 심정을 감안할 때, 통계청의 발표는 실제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고 오히려 경찰청의 자료가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 지난 10년간 자살자 통계수치 

년 도

통계청 자살자 수

경찰청 자살자 수

통계청 자살률

경찰청 자살률

1996년

5,856명

8,632명

13.9명

19.0명

1997년

6,022명

9,190명

14.1명

19.4명

1998년

8,569명

12,458명

19.9명

26.6명

1999년

7,075명

11,713명

16.1명

25.1명

2000년

6,460명

11,794명

14.6명

25.1명

2001년

6,933명

12,277명

15.5명

25.9명

2002년

8,631명

13,055명

19.1명

27.4명

2003년

10,932명

13,005명

24.0명

27.1명

2004년

11,749명

13,293명

25.2명

28.1명

2005년

12,044명

14,011명

26.1명

 

2006년

10,688명

12,968명

23.0명

 

통계청 자료로 보면,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자살이 증가했다가 1999년부터 몇 년 간 잠시 소강상태를 거쳐 2002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찰청 통계를 보면, 1997년 자살자 수는 9,190명이었다가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인 1998년에는 12,458명으로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고, 그 이후에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여 2005년에는 자살자 수가 14,011명으로 최고점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2006년에는 조금 줄어 12,968명으로 조사되었다.

통계청과 경찰청의 자료를 비교해보면, 2005년은 1,967명, 2006년은 2,280명이나 차이가 난다. 어떤 통계자료를 따르느냐에 따라 자살현황은 크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결국 국가공식통계인 통계청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자살예방 대책을 수립한다면 차질을 빚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통계청의 통계 부실 이전에 사망신고서에 정확하게 기재하기를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 자살과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의식 부족이 일차적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매년 자살자의 유서 등을 통해 자살 원인을 자세히 통계로 보고한다. 또 직업별, 배우자 유무별, 가족 형태별로 종합 분석한 뒤 책 한 권 분량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한다. 일본은 이렇듯 자살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사회적 대책을 수립하는 등 체계적으로 자살예방 대책에 힘쓴 결과 2003년 자살률이 20.3명으로 감소하였다. 정확한 통계와 실태 파악이 선행되어야만 제대로 된 예방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는 선례인 셈이다.

한편 우리나라 경찰청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법의학 전문가인 한길로 박사는 지적하고 있다. 변사체가 발견되면 현장에 법의학 전문가가 직접 조사를 실시해 자살, 타살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현장조사 활동을 하는 법의학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 200명이 필요한 실정인데, 실제로는 한길로 박사 한 사람에 불과하다. 한 박사는 지적하기를, 시체 감식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찰이 현장에서 미상(未詳), 불상(不詳)으로 표기한 변사체 가운데 약 15퍼센트 정도는 자살일 것이라고 한다. 명문대 의대 교수를 그만두고 ‘서울법의학연구소’를 설립한 한 박사는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경찰의 요청이 있을 경우, 직접 변사체 발견 현장에 나아가 현장조사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발언에는 무게가 실려 있다. 한길로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실제 자살자 수는 경찰청 통계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면, 언론은 단지 일회성 보도에 그치지 말아야 하며, 정부 당국 역시 구호성 정책 나열에 그치지 말고 무엇보다 먼저 정확한 자살자 통계자료부터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 적절한 예산 확보와 자살예방전문가 양성을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한다. 통계청과 경찰청의 자살자 통계 문제를 보완하는 노력에서부터 자살 예방의 첫걸음은 시작된다. 정확한 통계자료조차 없는 상태에서는 자살 예방의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살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자살 현상은 ‘자기 자신의 의지’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사회적 혐의가 짙은 느낌이다. 굳이 통계수치를 인용하지 않아도, 매일 저녁 뉴스에 거의 단골처럼 빠지지 않는 자살 소식만으로도 우리는 자살 문제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요 발등에 떨어진 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은 왜 자살하는 것일까? 지난 10년 간 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 우리 사회의 자살은 연령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서 무차별적으로,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초등학생까지 자살하는 마당이니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인한 중고생과 재수생의 자살이라든가, 인터넷 사이트의 공개적인 유혹,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한 자살, 실직과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그리고 외로운 독거노인의 자살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자살현상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지해 자살예방의 중요성을 대부분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자살 사망자 급증도 문제이지만, 여러 차례 실시한 자살충동에 대한 조사결과를 감안해 보았을 때 보다 우려되는 점은 경제적 사회적 상황의 악화로 인한 자살 충동자의 양산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살률 증가가 아니라 자살 충동자, 자살예비군의 양산이다.

1)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5년11월 1503명 대상으로 조사
38.3%가 자살권 주장
26.6%는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인 상황이 있다’
71.7%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자살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2) 서울 송파구 보건소 2005년 9월 구내 청소년 4150명 대상으로 조사
63.8%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

3) 전교조 보건위원회 전국의 초중고생 2353명 대상으로 조사(한길리서치연구소)
46.4%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

4) 청소년상담원 2005년 9월 청소년 3117명 조사
48.6% 자살충동

5)박명실 연구원이 2004년 10월 대학생 349명을 대상으로 조사
168명 48%가 자살 위험요인

6) 오진탁 교수의 자살예방교육과 웰다잉 체험교실 수강생 1256명을 대상으로 조사
자살충동? 51%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45%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 34% 

  자살충동?

  51%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45%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

  34%


7) 서강대 학생생활상담 연구소 2006년 말 620명 대상으로 조사
52.4% 자살충동 느낀 적 있다고 대답.

8) 춘해대 사회복지학과 서화정 교수 경남지역에 60세 이상의 노인 512명 조사
443명 86.5%인 '1번 이상 자살을 고려해 봤다'고 대답.

9) 고대의대 정신과팀 명동 거리에서 2005년 2월26일 세계보건기구의 단축형 우울증 자가 진단표를 이용해 20세 이상 성인남녀 1백 명을 대상으로 조사
56명 우울증 위험군, 12명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3명은 중증 우울증

10) 대한우울증 조울증 학회는 KBS 추적60분의 의뢰로 2004년 12월23일 백화점에서 120 명을 대상으로 우울증 선별검사
60% 우울증, 27% 중증 이상 우울증세, 13% 심각한 수준

11) 여의도 성모병원 2004년 10월 61세 이상 노인 1백 명 우울증 검사
80% 우울증

이와같은 통계결과는 다음같이 정리된다.

자살충동 : 청소년 63.8%(송파구 보건소) 46.4%(전교조 보건위원회) 48.6% (청소년상담원)
대학생 48% (박명실 연구원) 51% (오교수 강의 수강생) 52.4% (서강대 학생생활상담 연구소)
노인 86.5% (서화정 교수)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한다 : 38.5% (보건사회연구원), 34% (오교수 강의 수강생)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 45% (오교수 강의 수강생)
우울증 : 56% (고대의대 정신과팀) 60% (대한 우울증 조울증 학회) 80% (여의도 성모병원)


현재 자살률이 높은 것도 문제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자살이 해결책이 된다,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 죽으면 고통도 끝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아무도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만 죽어버리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자살을 도피의 수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고통이나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해결책이고, 자기 판단에 다라 자살할 수 있고,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은 끝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문제를 임시방편,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자살이 문제의 초점으로 부각되어 있지만, 자살현상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이해와 그 방식은 바다 밑에 가리워져 있는 얼음 덩어리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얼음만 깬다고 해서 결코 위험이 제거되지 않는다.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들리지만 죽음문화의 부재를 우려하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 사회에 죽음 오해가 심각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자살이 자주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자살현상만 문제삼고 죽음이해와 그 방식을 도외시한다면, 자살사망률의 증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살예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도 자살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수면 아래 숨어있는 죽음에 대한 오해와 편견, 불행한 죽음방식에 대한 심층적 반성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올바른 생사관이 정립되어 우리 사회에 성숙한 죽음문화가 정착된다면, 자살사망률은 자연히 감소될 것으로 본다. 죽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결코 자살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장 자살예방교육의 구체적 내용

“이제껏 자살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 단 한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솔직하게 밝힌다. 내가 자살을 생각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이제껏 자살 시도는 여섯 번 정도였는데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자살충동 이유는 대부분 성적문제 때문이었다. 책도 많이 읽어 글짓기대회의 상장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고 각종 대회의 상은 내 몫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4학년 수학경시대회에서 나는 상장을 타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을 뵐 면목도 없었다. 초등학교 주위를 맴돌다가 한번도 올라간 적이 없는 학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5층 건물의 초등학교 건물 옥상,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운동장, 신나게 뛰노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시 태어나면 엄마의 기대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그 때 고개를 들어 쳐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펼쳐져 있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시 밑을 내려다보았더니 갑자기 너무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다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던 하늘이 고마울 따름이다. 하늘을 보니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뚫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첫 번째 자살 시도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를 칠 때, 그리고 사법고시 시험 보는 날에 자살 충동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줄곧 1등만 해오던 절친한 친구가 자살한 일이 있다. 유서에는 짧은 메모 한 줄 뿐이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 당시엔 ‘너만 사는 게 힘드냐.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내가 더 힘들어.’ 이런 생각뿐이었다.

 법에 흥미를 느껴 법학부에 지원했고 고시를 준비하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듯했다. 부모님과 주위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은 다시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 강박관념, 소화불량, 불면증 등으로 한 달 만에 8킬로나 빠졌다. 시험 결과 역시 참담했다. 급기야 해결방법은 자살 하나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터널증후군처럼 한 평 반 좁다란 고시원 안에서 죽음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되었다. 2007년 2월, 다른 동네의 21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처럼 죽으면 모두 끝나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옥상 끝에 서서 몸에 힘을 풀고 툭 떨어질 생각에 눈을 감고 있는 순간, 갑자기 몸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오면서 자살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끼쳐서 눈을 뜨고 말았다. 너무 안타깝게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 때 ‘친구가 나를 말리고 있구나, 친구도 마음이 편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가 나를 살려 주었는데, 자살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시작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1학기 다시 학교에 복학하면서, 2003년에 수강신청 마감으로 듣지 못했던 오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첫 수업시간에 자살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확 바꾸기 위해 16주 강의 기간을 철저하게 하드 트레이닝으로 진행한다고 말씀하셔서 전공수업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집중했다. 한 학기 동안 단 하루도 웰다잉에 대해 친구와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주 하루는 사이버로 강의를 듣고, 하루는 강의 내용을 생각하고, 하루는 사이버 강의를 노트 필기하고, 하루는 노트 필기한 것을 정리해서 자유게시판에 올리고, 하루는 리포트 쓰기를 한 학기 동안 반복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교수님의 강의 방식이 의식변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2003년 교수님 수업을 들었더라면 2007년 2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교육을 받았으니 더 이상 자살을 쉽게 생각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나의 쓰라린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죽음과 자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중심으로 한 자살예방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실시해야 한다는 교수님 말씀에 공감이 갔다. 이제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지금 복지단체에 매달 얼마씩 기부하고 있고, 직접 찾아가서 봉사를 시작해야겠다. 한 학기 수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꺼내놓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 있어서 마음이 후련하다.

대나무 숲에서 큰 소리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대학에 입학한 이후 다행히 법학이 적성에 맞아 학교생활이 즐거웠는데,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겼다. 내가 한림대 학생이 아니었다면 교수님으로부터 자살예방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테니까. 16주라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기간 동안 내 생각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출석수업 시간인 매주 목요일 오후 3시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2007년 1학기 자살예방교육을 수강한 민양의 글)

자살사례 혹은 자살 충동자를 조사했을 때, 자살 이유는 다양한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음같이 3가지 부류로 나누어보고자 한다.

첫째 개인적 이유,
둘째 사회적 병리현상 혹은 사회 구조적 문제,
셋째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오해.

개인적 동기, 예를 들면 입시실패나 이성 관계, 혹은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민을 다른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통을 함께 나눌 수는 있어도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주기 어렵다. 두 번째 자살동기라고 볼 수 있는 입시위주 교육, 경제적 가치 일변도, 외모중시 풍조, 청년 실업자의 양산, 구조조정의 인해 40대와 50대의 해직 등 사회적 현상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줄 알지만,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사회문제이므로 가까운 시일 안에 시정되기 어렵고 언젠가 시정되리라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자살을 충동질하는 3가지 이유 중 개인적 동기와 사회적 문제 해결을 통한 자살예방은 실질적으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세 번째 이유 죽음과 자살에 대한 오해의 경우, 사람들은 살다가 어떤 어려움에 닥치면 마치 자살하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끝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살하면 자기 삶도 끝나고 고통 역시 종식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고, 더구나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더 큰 고통의 수렁에 빠져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가르쳐준다면 자살충동을 예방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학에서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의식변화 데이터를 축적한 바 있고, 일반인을 대상 교육을 통해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은 바 있다.

죽음준비교육과 관련해 한림대에 이미 3가지 교과목을 개발해 10여 년간 교육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미 개설된 죽음준비교육 관련과목 명칭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삶과 죽음(철학과 전공과목), 2) 노인을 위한 죽음준비교육(노년학 협동전공 과목), 3) 죽음의 철학적 접근(교양 과목). 이런 강좌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을 다루면서, 자살문제 역시 함께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자살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서 2005년 1학기부터 철학과 전공과목으로 자살예방교육 과목을 만들어 처음으로 개설해 우리 사회의 급증하는 자살현상, 자살해서는 안되는 이유 등 자살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자살예방교육 강좌를 처음 개설할 때 자살예방을 주제로 한 학기 동안 가르치면서 학기 초와 학기 말 2차에 걸쳐 똑같은 설문으로 조사함으로써 의식의 변화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직접 정밀하게 추적했다. 첫 번째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에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오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밝히면서, 학기 초와 학기 말 두 번의 의식조사 결과는 단지 연구만을 위해 상용할 것이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장하겠고, 또한 성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조사이므로, 성실하고 솔직하게 조사에 임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자살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학기 초와 학기 말에 똑같은 내용의 설문지를 돌려 취합해 분석하면서 학생들의 의식변화를 다음 4가지 설문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기로 했다.

1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가.
2 현실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3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는가.
4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가.


학기 초 첫 수업 시간에 죽음과 자살에 대한 의식조사를 시행하고,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한 다음, 학기말에 똑같은 의식조사를 시행해 죽음과 자살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조사한다. 온라인 사이버 수업과 오프라인 출석수업을 병행해 진행하는데, 온라인 수업(두 시간 강의 자료와 두 가지 동영상 자료)을 먼저 매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듣고 자기 의견을 의무적으로 자유게시판에 올리도록 하고, 매주 사이버 강의자료 접속시간은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로 제한되어있음에 주의할 것을 학생들에게 환기시킨다.

사이버로 제시되는 강의 자료와 동영상 자료를 보면서 노트필기하고, 자기 의견을 수요일까지 자유게시판에 올려야 사이버로 한 주 수업을 정상적으로 들은 것으로 자동 체크된다. 강의노트는 학기말 시험 시간에 제출해 검사한다. 목요일 출석수업 시간에는 온라인에서 가르쳤던 내용과 학생들이 사이버 강의실의 자유게시판에 올린 의견을 중심으로 토론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또한 과제물이 3가지 이상 되는 등 강의진행이 엄격하게 진행되는 점을 학기 초에 수강생들에게 강조한다.

사이버 수업이 교육효과가 떨어지는 면도 있을 수 있지만, 철저하게 강좌를 운영하고 동영상을 비롯한 시청각 자료를 개발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면, 출석수업 이상의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 있다. 자살예방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수업의 경우 말로만 진행해서는 교육효과를 거두기 어려우므로,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사이버 수업이 효과적일 수 있다. 자살예방교육 첫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단지 학점만 따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고 자살과 죽음에 대한 의식변화를 목표로 하라고 말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살과 죽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받는 기회임을 명심하고, 의식변화를 단기간 안에 거두기 위해 강좌 진행을 엄격하게 하니까, 이 점에 유의하고 수강하기 바란다고 말하면, 수강 신청 전쟁 끝에 겨우 수강 신청을 하게 된 대학생들이 대부분 순응한다. 한 학기 강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동영상 자료

1강 

사회병리현상 자살 1부

10가지 사회병리현상, 경제가치 편중, 스트레스와 우울증

자살공화국, 카드빚 자살,

우리 사회 우울증세 심각 등

2강 

사회병리현상

자살 2부

사이버폭력, 군경부대 욕설과 폭력, 성 개방 낙태 자살

인터넷 자살사이트, 최 일경과 곽이경의 자살, 영아유기 살해사건 등

3강

사회병리현상 자살 3부

죽음에 대한 무지, 성형수술 권하는 사회, 노인문제

게임중독 투신, 선풍기 아줌마,

노인자살 사례 등

4강 

자살해서는 안되는 이유 1부

삶에서 중요한 두 가지 시점,

급증하는 자살현상

우리 사회 최대폭력 낙태, 자살시도 뒤 후유증, 자살시도 뒤 새 삶 등

5강

자살해서는 안되는 이유 2부

자살해서는 안되는 6가지 이유, 자살하면 더 큰 고통

박정희 할머니의 아름다운 황혼,

자살예방센터의 활동 등

6강

자살해서는 안되는 이유 3부

죽음 방식의 중요성, 가족의 고통, 영혼의 성숙 문제

친구 자살로 고통당했던 홍군의 고통, 자살자 가족의 고통 등

7강

죽음, 끝이 아니다  1부

죽음 끝이 아닌 5가지 이유,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1부2부, 삶의 끝에서 길을 묻다 1부 등

8강

죽음, 끝이 아니다  2부

 

임사체험의 6가지 핵심내용

임사체험과 자살미수체험비교

 

임사체험자의 증언, 임사체험 토론,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 등

9강

죽음, 끝이 아니다  3부

성경과 불경 가르침, 데레사 수녀의 활동, 빙의 현상

데레사 수녀의 니르말 흐리다이,

시어머니 영혼이 빙의된 여인 등

 

10강

죽음, 끝이 아니다  4부

티베트의 바르도 가르침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답변, 티베트사자의 서 등

11강

장 아메리의 자살찬양론 비판

자살로 정체성을 확인한다?

죽음을 알면 자살하지 않는다

박정희 할머니의 삶과 사랑,

분신자살 기도했던 박현성씨 등

 

12강

동영상 통한

죽음 체험과

명상 1부

죽음체험의 6단계 과정,

어떻게 죽을 것인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분리

티베트 소남 체링의 죽음, 죽은 뒤 겪는 현상(티베트사자의 서) 등

13강

동영상 통한

죽음 체험과

명상 2부

다른 세상과 빛의 존재 만남,

죽음준비하지 않는다면,

죽음체험 통한 삶의 변화

죽은 뒤 터널 지나 빛을 향해 갔던 임사체험자, 죽음은 끝 아니라 과정(티베트사자의 서) 등

14강

자살예방교육 수강생 의식변화 1

학기 초와 학기 말 4가지 설문조사 결과를 비교해 의식변화를 검토

자살예방교육 받은 이양과 황양의 의식변화, 노인자살위험노출도 등

15강

자살예방교육 수강생 의식변화 2

웰다잉 교육 통해 자살과 죽음 의식 크게 변화

 

 우울증의 사례, 시도한 적 있는 김양과 심양의 변화 등


3장 일반인 치유사례

일반인을 대상으로 웰다잉 체험교실(10주 20시간)을 서울 강남에서 올해 6월20일부터 8월29일까지 운영한 바 있다. 첫 시간에 자살과 죽음에 대한 의식조사를 하고 10주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똑같은 조사를 실시했는데,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효과와 어떤 차이가 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대동소이한 조사결과가 나왔다. 

 

       저녁반

       오후반

     합 계

    접  수

       120명

       130명

     250명

이수(8회 이상 참석)

       69명

       92명

     161명 64%

개근(10회 전부 참석)

       29명

       55명

     84명  34%

설문1) 자살충동
첫 시간 의식조사 설문지 수거인원 215명: 108명(50%)가 자살충동
마지막 시간 의식조사 설문지 수거인원 110명: 자살충동 1명, 모르겠다 2명

설문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가
첫 시간 86명(40%) 그렇다
마지막 시간 그렇다 2명, 모르겠다 1명

설문3) 개인의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가
첫 시간 64명(36%)가 그렇다고 답변
마지막 시간 동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설문4)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첫 시간 89명((42%)가 그렇다고 답변
마지막 시간 모르겠다 1명

대학생을 대상으로 교육했을 때 , 학기 말 조사에서 여전히 자살충동을 느낀다거나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답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는 1명이 여전히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답했고 2명이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답했다. 대학생들의 경우 학기 말 조사에서는 4가지 설문 가운데 자살권 주장을 고수하는 학생은 있었고 다른 설문에서는 최소한 모르겠다는 답을 했다. 대학생과 일반인을 교육했을 때 차이나는 점이 있다.

대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과제로 제시한 3가지 레포트를 거의 대부분 제출하지만, 일반인의 경우 과제물을 제출하는 비율이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마지막 시간 의식조사 결과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서는 의식변화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자살과 죽음에 대한 의식이 짧은 기간 동안 획기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으로 강의를 듣기만 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는 서약서 제출을 통해 담당교수의 요구대로 결석 없이 강의에 임하고 과제물을 반드시 제출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에 한해 수강 접수를 할 계획이다.

치유사례 : 66세 주부 최씨 

 

첫 시간

마지막  시간

1 자살충동

자살 시도한 적 있다.

이젠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

2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난다

고통이 끝날 것 같다.

더 큰 고통이 있다.

3 자살권

그렇다

자살권 인정하지 않는다.

4 죽으면 다 끝난다

그렇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60대 여성 그는 자기 고뇌를 다 해결해 줄 것 같아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는 등 4가지 설문 모두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지만, 10주 교육을 통해 전부 바뀌었다. 죽음 이해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고 죽음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0주 웰다잉 체험 교실이 끝난 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잘 살다가 잘 죽기 위해 이 순간에도 밝은 미소 짓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자기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치유사례 : 49세 주부 서씨의 경우 

 

      첫 시간

       마지막 시간

1 자살충동

 예, 우울증

현실의 삶을 잘 살아 영적인 세계로 잘 이어졌으면 한다

2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난다

 지금 그 자리에 없다면

 문제가 사라진다

아니다

3 자살권

 있다

아니다

4 죽으면 다 끝난다

 예

아니다

그는 우울증이 있어 자기 삶에 회의적인 생각을 자주 하는 등 4가지 설문에 모두 문제있는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과제로 제시한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 알폰스 데켄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김영우의 <영혼의 최면치료>를 정독하는 등 진지하게 교육에 임해 10주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의견으로 전부 바뀐 그는 필자에게 다음 같은 글을 보내왔다.

"그동안 경원시했던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비교적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충만하게 살면서 성숙하게 인격을 완성하는 과정이 죽음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내게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교육기간 내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따사롭게 지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숨이 멈추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등 죽음은 제게 항상 의문부호였지만,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막연히 어떤 해답을 얻은 듯하다. 이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신을 얻었다. 세속적으로 잘 살기만 하는 삶 보다, 이젠 우리의 마음의 세계와 영적인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말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통해 죽음준비의 필요성,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혼의 세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 죽음의 질과 삶의 질이 한층 향상될 것이다.”

4장 간호사 치유사례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13명 50%

 

2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난다

          13명 50%

         1명 유보

3 자살권

          11명

         4명 유보

4 죽으면 다 끝난다

          12명

         2명 유보

간호사들은 죽음을 가장 가깝게 접하고 있지만 죽음과 자살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결과 일반인과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죽음에 대해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일이 없고, 심폐사와 뇌사를 중심으로 죽음정의를 배웠다. 하지만 심폐사와 뇌사는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일 뿐이지 죽음정의가 될 수 없다.

죽음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접하고 일반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간호사와 의사에게 적절한 죽음교육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끝이므로,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어느 간호사는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답하면서 죽으면 무미, 무취, 무감각, 무통해진다고 답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간호사들이 많았다. 의과대학에서 죽음정의를 심폐사 혹은 뇌사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으니까,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역시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죽음 이해와 개념규정의 방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타부 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개념정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것인지, 불행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리고 자살사망률이 왜 최근 들어 급증하는 것인지 문제를 추적해 보니까, 다른 여러 가지 원인도 작용하지만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오해, 육체 중심의 인간이해와 죽음정의가 오해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개념 정의하느냐 하는 죽음 정의 문제는 죽음 판정기준과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와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개념이 서로 혼동되고 있다. 죽음 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죽음 판정기준 제시와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는 기본적으로 의학적인 문제이다. 죽음정의 같은 철학적인 문제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그런 문제는 분명 아니지만, 영혼의 존재 문제라든가 사후세계 문제 등에 철학적, 종교적으로 폭넓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죽음을 이치에 맞게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고 죽음 정의 문제는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우므로, 실용적 차원에서 죽음판정 기준 제시라는 의학적 문제로 축소되었다.

심폐사든지 뇌사든지 이런 논의는 죽음 판정 기준과 관련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 정의 문제인 양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죽음정의 문제는 인간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단지 의료적인 문제, 법적인 차원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단지 뇌사, 심폐사같은 의학적 차원의 죽음판정 기준의 문제로 축소되니까, 사람들의 죽음 이해 역시 육체 중심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죽음(죽음정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적, 법적인 문제를 포함해 논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식의 논의에 앞서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혹은 영혼의 문제라는 보다 큰 차원에서 죽음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한다. 생사학을 창시한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도 인간존재는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인 4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참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고 의대생과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고, 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가족이 죽어가는 사람을 병실 한 구석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 역시 죽음이해와 정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인간의 죽음은 뇌사나 심폐사처럼 육체적 죽음판정 기준만으로 정의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육체 중심의 죽음판정 기준이 죽음정의를 대신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죽음문화가 성숙될 수 없고 자살처럼 불행한 죽음만 양산될 뿐이다. 사후의 삶에 대한 연구결과,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생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의한 것과 같은 그런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그는 이르렀다. 이제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적, 법적인 접근은 단지 죽음의 육체적 측면만, 즉 죽음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분만 다루는 격이다. 죽음을 폭넓게 또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죽음에만 국한시키기보다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우리의 삶과 죽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치유사례 : 강원대 병원 중환자실 근무하는 간호사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예

충동적인 자살은 광기의 분출

2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벗어날 수 없다

3 자살권

자살을 막을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지 않다

4 죽으면 다 끝난다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끝

끝 아니다

중환자실에서 일한지 8개월째인 그는 이전에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하면 큰 충격을 받아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지만, 죽음이란 하루 8시간 근무시간에 일어나는 일상사로 전락되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DOA(도착시 사망)이기를 바라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근무시간에 심폐소생술이라도 하게 되면 환자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을 받고 과제로 내준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간과해왔던 죽음의 의미, 의료인으로서 죽어가는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8개월 동안 중환자실에 근무한 장간호사는 말기환자와 가족이 이렇게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환자들은 혼수상태로 인공호흡기와 강심제에 몸을 맡기고 생명을 억지로 연명하고 있으니까 면회시간에 가족을 만나더라도 잘 가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눈물로 면회시간을 보내거나 의료진에게 불만을 털어놓는데 제한시간 30분을 허비하는 보호자도 있다. 재산상속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인공호흡기를 빼달라고 요구하는 보호자도 있다. 이와같이 중환자실에서 마주치는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리 선생님은 당신 가슴에 놓인 내 손을 힘없이 토닥였다. “우리......이렇게..... 작별인사를.....하자구...” 모리 선생님이 가만히 숨을 쉬자,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선생님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네를...사랑하네.” 선생님이 힘겹게 말했다. “저도 사랑해요.” “그건... 알지....그리고 또 알아....” “또 뭘 아시는데요?” “자네가....늘.....그랬다는 걸....”

이 대화는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미치 앨봄이 죽을 앞둔 스승 모리 교수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이야기로 장 간호사가 레포트에서 인용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느 누가 죽음을 앞두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표하면서, 죽음을 바르게 이해시키는 교육을 통해 이런 식으로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으면 한다고 했다.

5장 대학생 치유사례

한림대에서 실시하고 있는 자살예방교육 수강생은 지금까지 모두 980명이었는데, 학기 초와 학기말 설문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 충동

 51%

 

2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49%

모르겠다    1명

3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수 있는가

 38%

자살권 주장 5명

모르겠다    9명

4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28%

모르겠다    3명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거나 우울증을 앓았던 학생들이 자살예방교육을 받기 이전과 이후 의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다.

사례 : 우울증과 불면증에 걸린 김혜리양

첫 시간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스트레스와 불면증이 얼굴에 나타날 정도로 심각한 학생이 있었다. 국문과 이양은 얼굴에 어둠이 짙게 배어있어 20대 젊음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고민하는 학생이라는 느낌이었다. 한 학기 동안 이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레포트나 시험 답안지 글씨체에서도 문제가 느껴질 정도였다.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자살충동 느낀다. 유서를 쓰고 알약을 모았다. 시도는 안했다.

가족과의 불화로 자신감 상실.

언제나 행복할 수 없다.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생활하기 힘들다.

때로는 나보다 더 고통당하는 이지선양 비디오를 본 후 내 고통은 정말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2 해결책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 죽음은 당장의 어려움으로부터 해방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영혼의 존재, 혼란스러워졌다. 영혼을 믿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현실의 문제는 영혼을 가꾸는 문제로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자살권   

그렇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내 생명을 해칠 권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아직 조금 혼란스럽다.

4 죽으면 끝    

고통의 문제에 관해서는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하면 지금 보다 더 형편없는 조건에서 태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말고사 문제 : 만일 친구가 자살하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말할까.

이양의 답안지 : 친구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를 들어주고 그 고통을 극복해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친구가 겪고 있는 고통이 나에게도, 너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우리의 삶 자체가 고통을 겪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고통의 문제에 너무 부정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고통을 인정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줌으로써 고통은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일임을 알려주겠다. 친구가 자살한다면, 친구의 고통은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은 이후 남는 영혼에게로 고통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겠다. 영혼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우리의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우리가 현실에서 영혼의 존재를 느끼기 어려운 것은 영혼이 육체 속에 갖혀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자살하려하는 것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례분석 - 학기 초와 학기 말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상당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학기 초에 제출한 의견을 보면, 얼굴에 어둠이 짙게 내렸듯이 마음에도 역시 그늘이 있었다. 이양은 학기 초 답변에서 1 유서를 쓰고 알약까지 모았고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다. 2 자살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3 자살권도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 4 죽으면 고통도 끝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살 가능성이 상당히 있었다. 얼굴에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고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여러 번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학기 수업을 들은 뒤 변화된 답변을 검토하면 자살 충동의 가능성은 더 이상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자기 고통이 보잘 것 없다, 자살권이 없다, 자살하면 더 형편없는 조건에 태어날 것 같다”라는 식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이양은 네 가지 설문에서 변화를 보여 한 학기 수업을 통해 정말 많이 바뀌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고통의 문제는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런 어려움이 영혼의 성숙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이양이 이해하는 한 더 이상 자살충동을 느끼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 학기 강의가 끝나고 방학이 지나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몇 주 지나 이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연구실에서 만났더니 얼굴은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우울증과 불면증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 잊은 듯한 표정이었고 교수가 직접 전화를 걸어온 일이 이상하다는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사례 : 경영학과 이지현양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자 친구 문제로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응급실에서 8 시간 뒤에 깨어났다. 15층 옥상에서 떨어지거나 교통사고를 가장해 자살하고자 하는 등 자살계획도 여러 번 세웠다.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죽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더 이상 자살충동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살을 택한 본인에게는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게 해결된다.

자살하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안다면 자살을 통해 자신이 처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3 자살권

그렇다. 자살은 개인의 결정이므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 자살문제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

4 죽으면 다 끝나는가

개인적으로는 끝이다.

자살을 시도했던 자살미수자의 증언이나 다양한 자료를 접한 뒤 죽음이 끝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례분석 : 평소에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온 이양은 자살예방교육 수강을 통해 이젠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자살권 문제의 경우 개인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고자 할 때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 사람이라면 결코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면서, 자기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즈음 삶을 살아가는데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자살 충동 느끼는 사람이 상당히 많으므로, 죽음을 바르게 이해시키는 체계적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이 크게 바뀌었고 얼굴표정이나 전체 분위기가 명랑해졌다. 한 번 더 교육을 받아 자살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보다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양은 한 학기 수업이 끝난 뒤 다음의 편지를 보내왔다.

자살예방교육으로 저의 삶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경영학과 이지현)

기억에서 지워냈던 지난 일을 다시 회상하려니 마음이 저려옵니다. 삶의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는지 알려주고 싶어 펜을 들었다. 지난 10여 년간 자살을 입에 담고 살았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금 내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과정을 말하고자 합니다. 76년 교사 부부의 차녀로 태어난 저는 시골에서 자라다가 춘천으로 전학와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습니다. 보석상에서 일하던 중 오빠와 교제를 시작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속 사귀다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생각에 수면제를 먹으면서 내가 죽으면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은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어머니의 발견으로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하고 피를 걸러내는 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남자 친구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신우염으로 태아는 저체중에 뇌손상을 당해 24개월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기의 죽음을 당하면서, 저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남편에 대한 원망, 아기에게 아무 것도 못해준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다시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보낸 자식 때문에 죽음을 생각한다면 너를 보낸 다음 아버지 마음은 어떻겠니. 저 세상에서 아기가 마음 아파하지 않도록 눈물 흘리지 말고 더욱 열심히 살도록 하라” 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생각해 자살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2년 정도 재활치료를 받던 중, 남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다시금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냥 여기서 이렇게 저 자신이 사라졌으면, 죽음으로 모든 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면? 차를 고속으로 운전하다가 벼랑으로 떨어지면? 등등.
그러나 제게는 언제나 든든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이혼 후 며칠 뒤 부모님 속만 끓였다는 자책감에 잘 걷지도 못하는 걸음으로 늦은 밤에 혼자 맥주를 먹고 있었더니 아버지께서 저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말씀하셨다. “지난 시간의 아픔과 힘겨움을 잘 견뎌왔다. 결혼 실패를 거울로 삼아 앞으로 남들 보다 더욱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결정하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
대학의 경영학과에 진학해 자살예방교육을 수강하게 되었다. 16주 강의를 끝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학교 선배의 소개로 지금의 약혼자와 함께 교수님의 사이버 강의를 듣고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시간에 대해서도 하기도 했습니다. 삶의 시간의 소중함, 상대방의 소중함,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제가 살아온 날들이 남 보다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을 살면서 고통스럽다고 해서 제가 그랬듯이 자살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봅니다. 저의 삶은 자살예방교육과 죽음준비교육으로 크게 바뀌어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또한 자살충동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밝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죽음준비교육을 다양한 연령층에 실시해야 합니다.

사례 : 조양

질문 1. 이전에 혹시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또 자살시도도 한 적이 있습니까?
자살충동이나 자살시도한 일이 있다면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 시간) 아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은 한 적이 있지만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가족관계의 문제도 내 힘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한 상황에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시간) -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어렸을 적 가정불화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확,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최근, 나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해 죽겠다’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다. 또 주위 사람들에게 자살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주위 사람들의 자살까지 예방하는 사람이 되었다. 난 앞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죽어버릴까 라는 생각을 안할 것이다.

질문 2. 어려움에 봉착하면 마치 자살이 현실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듯이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자살하면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합니까?

(첫 시간) 벗어난다.
(마지막 시간) 벗어나지 않는다. 불구덩이에 빠져 고통받고 육신이라는 세 옷을 입어도 고통받을 것이다.

질문 3. 자살하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아무것도 없고 다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첫 시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마지막 시간) 끝이 아니다. 죽는 것은 육신뿐이다.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육신이라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므로 끝이 아니다.
질문 4. 자기 생명이니까,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는가?

(첫 시간) 동의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간) 안된다. 자살하면 주위사람도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질문 5. 자살예방교육을 수강 신청한 동기는?

(첫 시간) 처음에는 과목이름을 보고, ‘아! 한림대학교에 이런 과목이 개설되어 있구나’ 하고 놀라워 했다. 사실, 강의 계획서를 보고는 수강을 망설였으나 내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전공보다 더 깊은 무엇인가를 얻을 수도 있다는 확신을 받았고 그 확신을 믿고 싶고, 열심히 수강할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수강을 신청했다.

한림대, 좋은 강의 추천하기 에세이 쓰기 대회 수상작

한림대 2학년 조양

나는 지금까지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20년 동안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왔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대한 평가는 항상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내 인생에 대한 평가기준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스스로 정의 내렸던 내 가치관도 모두 바꾸어준 한 강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다가온 오 진탁 교수님의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강의이다. 철학과 전공인 이 과목을 수강하도록 결정한 것은 철학과 아무 관련이 없는, 또 철학과 관련된 학문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러시아학과 학생인 나에겐, 조금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과목이름 자체가 굉장히 무겁게 다가왔으며 ‘죽음’이라고 불리는 단어는 평소 대화의 소재로는 잘 올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시작된 나의 이 어려운 결정이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모두가 준비해야한다. 하지만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던 우리들은 자신이 죽을 때에, 혹 소중한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예정되지 않은 이별을 경험하곤 한다.

이별의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그저 슬퍼하기만 하며 잘못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벌어지곤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무지나 잘못된 이해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이것이 곧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 따라서 죽음을 바르게 이해시켜 삶을 보다 성숙된 방식으로 영위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이 ‘죽음’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돕는 과목이 바로 이 ‘인간의 삶과 죽음’이다.

이 강의는 철학과 전공과목으로 Online으로만 진행되는 강의이다. 온라인 강의라는 개념자체가 너무나 생소했던 나에게는, 너무 신기한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온라인 강의라는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이 강의를 수강하면서 단순히 학점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강의는 전공과목보다도 더 타이트하게 진행된다. 매주 네 가지 동영상자료와 두가지 강의 자료가 있는 인터넷강의를 수강한 후 느낀 점을 매주 한번씩 게시판에 올린다.

같이 수강하는 학우들의 글을 읽고 코멘트를 붙이는 등 토론도 활발하게 벌인다. 80명이 수강하는 이 강좌에는 자유게시판에 3천개가 넘는 글이 올라온다. 또한 동영상강의는 보면서 직접 손으로 필기해서 학기말에 제출하며. 죽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을 읽고 A4로 3장 정도 분량의 레포트를 총 4회 정도 제출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과제가 있고, 수강 신청에 성공하기도 힘들고, 다른 과목들보다 몇 배나 힘든 과목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한림대에서만 수강할 수 있는 특별한 강의”라는 것이다. 이 강의를 진행하시는 철학과 오 진탁 교수님은 국내유일의 생사학 전문가이시다. 사람들이 Well-being(웰 빙)을 외치며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고 몸에 좋은 잠자리를 찾을 때, 오 진탁 교수님은 Well-dying(웰 다잉)즉 어떻게 ‘잘 죽을까’를 외치며 영혼을 강하게 하고 죽음에 대해 이해시켜 자살을 예방하려 많은 노력을 해오셨다.

그러한 교수님의 노력 때문에 이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99.9%가 죽음에 대한 의식이 바뀌었으며 다시는 자살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은 육체라는 껍데기를 벗는 것이지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답한다. 이렇게 자살예방효과를 가지고 있는 오 진탁 교수님의 죽음이해교육은 곧 우리학교의 몇몇 학생뿐만 아니라 곧 육군부대 전체에 보급된다고 하니 그 효과는 입증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특별한 이 강의를 학교에서 직접들을 수 있으며, 학점까지 취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죽음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강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수업을 수강하면, 누구나 자살 예방도우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유명연예인 자살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여배우 최 진실의 자살, 안 재환의 자살이 그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떠나갔지만, 날 더 경악하게 했던 것은 그들을 따라하는 이른바 모방 자살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죽으면 끝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왜 자신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이 강의는 너무나도 자세하게, 우리를 설득시킨다.

우리나라는 OECD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치욕을 안고 있으며, 청소년 10명 가운데 6명 정도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러한 응답을 하는 사람들은 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 있으며 내 소중한 사람일수도 있다. 나 또한 자살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우리사회에서 금기된 단어로 인식된 죽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리며 소중한사람들이 절대로 그러한 선택을 할 생각을 하지 않도록 이야기해주곤 한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소중한 능력을 이 강의를 수강하며 얻게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단기간에 나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아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해 이해하고 공부하는 한 학기의 과정에서 20년간을 유지하고 있던 나의 가치관이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더불어 나의 자신감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높아졌다.

이것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의 눈을 자신감 있게 제대로 쳐다보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죽음에 대한 이해와 영혼의 존재의 확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삶을 좀 더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교육이 어디 또 있을 수 있을까?

나의 지난 20년 동안의 사고방식을, 한 학기 3~4개월 정도 되는 짧은 시간에 확 바꾸어놓았다. 자신의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인간의 삶과 죽음 강좌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존재를 이해하고 영혼의 성숙을 시키고 자기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한층 소중하게 여기게 만든다. 자신을 소중히 하게 여긴 수 있다면, 자연스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꿈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새로운 목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한번쯤 돌아보고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이다.

네 번째는 “지금의 시련과 나중에 다가올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의를 들으며,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한 이론이 있다. 바로 ‘초과회복의 메커니즘’이라는 이론이다. 이 초과회복의 메커니즘이란 사람의 몸에는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는데, 한계치에 이르는 훈련을 한 다음 일정 기간 휴식하면 체력 수준이 한동안 운동하기 전보다 높아진다고 하는 이론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라고 난 의아해했었지만 곧 그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초과회복이 바로 우리들의 심리, 즉 영혼에도 작용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경우, 이러한 초과회복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업그레이드는 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 좌절할 때 그것을 극복하면 다음에 닥쳐올 시련을 좀 더 쉽게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을, 영혼을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시련을 이겨내고, 다음에 만나는 어떤 곤란도 극복 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 이 강의에는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그런 ‘믿음’을 배울 수 있었다.

이와같은 이유로 나는 이 강의를 추천한다. 내가 밝힌 몇 가지 이유 보다도 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 강의를 직접 수강하면서 직접 느꼈으면 좋겠다. 이 강의는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강의이다. 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이 수업에 나의 아픈 이야기를 담아냈고, 교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기억해주시며 상처를 보듬어주셨으며, 난 처음으로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있었다. 이렇듯 나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이 강의를 추천하며 마지막으로 내가 알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좋은 강의를 듣고 자신의 삶을 더 이상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을 담아 이 글을 마친다.

6장 자살 시도자 치유과정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대학생이 학기 초와 학기 말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자살과 죽음에 대해 답한 내용, 한 학기 교육을 통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해갔는지 첫 번째 주부터 마지막 주에 이르기까지 15주 동안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을 자세히 제시하고자 한다. 자살 시도까지 했던 세 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치유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세 명은 주위에서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친구가 있으면 기꺼이 자살예방 도우미 역할도 하고 있다.

박양의 경우 

 

 학기초

1 자살충동

자살충동, 중학생 때 성적문제로 자살 시도한 적이 있다. 삶에 의욕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집에서 성적문제로 심하게 압력을 받아서 학창 시절 내내 괴로움을 당했다.

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렇다

3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

억지로 강요에 의해 삶을 살 필요는 없다.

4 죽으면 다 끝난다?

그렇다

다음은 박양이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수강하면서 매주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3주차> 강의를 듣고
몇 년 전에 제 후배가 자살을 했었습니다. 주위에서 그런 일이 처음이라 너무 충격이었고 친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었던 것에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 후배는 친구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늘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었다고 했는데 좀 더 신경써주고 고민을 들어줄 수 있었다면 그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살자의 경우 평소에 내색을 하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죽음에 관해 말하는 경우가 있고 또 늘 우울하고 살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라고 여기며 신경을 쓰지 않아 그대로 자살로 방치되는 게 큽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개인과 사회의 문제이며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저 역시 자살이나 자살자에 대해서 평소에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런 고통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제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배의 죽음 뒤에 부모님과 친척들, 친구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떠올려보면 분명 자살이라는 것은 그냥 넘어갈 일 뿐만 아니라 사전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막아야 하는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8주차> 강의를 듣고
죽음을 알면 자살할 수 없다는 강의를 듣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역시도 그랬고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는 세계가 인생이고 죽은 후는 그 뒤의 사후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현실의 고통에 대한 탈출구를 자살로 생각하고 자신이 처한 고통에만 너무 힘겨워 하며 그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더 큰 고통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강해지는 힘을 기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하는 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너무 힘들거나 할 때면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까'라는 말은 늘상 쉽게 내밭고는 하지만 결국 처음으로 되돌려 바라본다면 교수님의 말씀처럼 이 고통도 삶이 존재하는 양식이고 내가 그 삶의 고통을 견디고 그것을 인내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삶을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은 '고통은 삶이 존재하는 양식'이라는 진리를 자신의 견해에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삼고 이겨내려 한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9주차> 강의를 듣고
분명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는 것은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지나친 입시위주의 교육과 노인이나 다른 복지의 불균등 그리고 군대문제 등은 사람들의 객관적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과 더불어 개인주의 성향과 나약함이 어우러져 많은 자살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제대로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강의를 듣고 사람들은 고통은 삶에서 겪어야 되지 않을 너무 힘든 문제로 생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하지만 자살 후는 더 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때문에 자살로 모든 자신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덧없는 기대 대신 현실에서 그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쳐나갈 힘과 정신력을 기르는 것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10주차> 강의를 듣고
'죽음을 알면 자살할 수 없다'라는 강의를 듣고 생각한 건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꼭 죽을 때가 되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거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삶의 시련이나 병에 걸렸을 경우 죽음을 거부하며 안간힘을 쓰거나 자살을 기도하는 등의 안타깝고도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평소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사는 방식이라는 것과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일 것이다. 한번쯤이라도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그것에 대비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죽음을 자살로 함부로 끝을 맺거나 아니면 죽음을 전면 거부해서 더 괴로워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평소 삶에서 자신이 준비하고 대비해야 될 것들이며 죽음 이후의 삶이나 영혼에 대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과 같이 다루며 아끼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11주> 강의를 듣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말은 어떻게 들으면 참 생소하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바르게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으로 삶을 끝낸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 역시 이전에 교육을 받기 전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사례를 접하며 알게 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평소 죽음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을 인정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행복한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생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죽음을 대비하는 자세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살아 숨 쉬는 이 세상을 끝내기가 슬프겠지만 정말 그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훗날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은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제15주> 강의를 듣고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이 수업을 들은 이후에 의식이 변화되었고 나 역시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사후세계 같은 것은 있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나 역시 교수님께서 이번 학기 수업이 끝난 후에 학생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다는 말씀에 반신반의 했었다. 나 자신이 힘들어도 종교같은 것에 조금 비판적이고 유물론적인 성향이 컸던 나는 이번 수업을 통해 나의 고정관념과 사고방식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음을 시인한다.
이 수강생들의 의식변화에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점은 교육의 필요성이다. 가장 자살률이 높은 20, 30대의 젊은이들은 누가 교육을 한다고 나의 힘듦이 덜어지거나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만 이루어진다면 삶과 죽음, 그리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사전에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알지 못하고 죄를 저지르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있지만 자살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 즉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잘못된 개념을 올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학기 초와 학기 말 자살과 죽음에 대한 의식조사 결과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자살충동, 중학생 때 성적문제로 자살 시도한 적이 있다. 삶에 의욕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집에서 성적문제로 심하게 압력을 받아서 학창 시절 내내 괴로움을 당했다.

그냥 억지로 자살을 말리는 게 아니라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자살해서는 왜 안되는지 배웠으므로,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거나 충동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렇다

자살하면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삶의 과정에서 당하는 고통을 정화하면서 자기 영혼의 정화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므로, 살다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자살권

억지로 강요에 의해 삶을 살 필요는 없다.

자살은 자기생명을 파괴하는 행동이므로, 분명 잘못된 것이다.

4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

죽으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 사람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 이후 새로운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사례분석 : 중학교 때 성적문제로 삶에 의욕이 없는 등 우울증을 심하게 느낀 박양은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자살권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자살예방교육 첫 시간에 이번 학기가 끝난 후에 학생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다는 담당교수의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종교에 조금 비판적이고 유물론적인 성향이 컸던 박양 역시 이번 수업을 통해 고정관념과 사고방식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 한양은 자살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어리석은 행위로 단정적으로 말하면서 삶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듯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학과 김양의 치유과정 

 

 학기초

1 자살충동

자살충동을 많이 느꼈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일로 자살 시도했다.

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살한 만큼 너무나 힘드니까,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리라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3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

모르겠다. 내 목숨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되고, 자살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예방을 해야 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4 죽으면 다 끝난다?

그렇다. 가족과 친구에게는 아픔이겠지만, 죽으면 다 끝난다.

자살충동을 많이 느낀 적이 있는 김양은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니리라는 기대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김양은 사이버로 수강하면서 4주차 정도까지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신경질내면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수강을 권유한 친구에게 따지기도 했다. 강의내용이 자기생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양은 죽으면 끝이고 힘든 일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강의를 듣고 자유게시판에 김양이 올린 소감

1주차 강의
이 강의를 듣고 싶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접근을 시도할지 궁금해서였다. 첫 강의를 다 듣고 나서도 나의 생각은 아직 바뀌지 않은 거 같다. 나는 '자살' 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얼마나 힘이 들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죽을 자신이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말도 있지만, 사는 것이 가혹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살' 이 좋지 않다는 것, 사회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치고 파장이 크다는 것도 안다. 특히 요즘같이 유명인의 자살이 많은 경우는 더 할 것이다. 교수님께서 설명을 하실 때 영혼의 개념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정말 영혼이 있어서 죽었을 때 나의 영혼을 떠나는지.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인거 같다. 눈으로 본적이 없고, 경험한 적도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는 나는 잘 모르겠다. 자살해서는 안 되는 6가지 이유에서도 세속적인 이유로 자살하지만, 죽음과 세속적인 동기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 '죽음' 뒤에 '영혼'이 없고 죽음 뒤에 '고통'도 없다면 살기가 힘들어 그것에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해 그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자살이 무조건 좋지 않다, 나쁘다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살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 허용된다는 쪽에 가까운 듯하다. 강의를 들으면서 조금은 생각이 바뀌는 것도 있지만, 아직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은 거 같다.

4주차강의
대학생들의 자살충동률이 반 가까이나 된다는 말은 정말 예상외였다. 사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대학생들이 그렇게 많은 수치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중학교 때 한창 자살을 많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이 들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괴롭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날 보아주지 않는다 생각에 자살 시도를 해 본적이 있다. 혼미해 지는 정신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자살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했던 것이다. 그때 만약 죽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학교도 다니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행복하게 생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가정환경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도 조금만 관심을 가져 준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줄지 않을까?

8주차강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쓰는 말이 있다. 바로 "죽겠다" 라는 말이다. 배고파 죽겠다, 웃겨 죽겠다, 화나 죽겠다 등등. 이런 죽겠다 라는 말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인다. 이렇게 가볍게 죽겠다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무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얘기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한 번 씩은 했을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힘이 들 때면 '죽고 싶다, 죽으면 이 고통이 모두 사라지게 될텐데'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특히나, 그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장 빈번하게 한 때를 생각해 본다면 바로 중고등 학교 때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11주 강의를 듣고
죽음이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 옷을 바꿔 입는 것이라고 한다. 첫번째 동영상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 말이다. 모든 병원에서,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손을 떼고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호스피스. 호스피스 정토마을은, 어둡거나 슬픔만이 가득 찬 곳이 아니었다. 다들 두려움이나 걱정의 모습들이 아니라,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런 모습들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죽음' 에 대해서 강의를 듣고 많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막상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얼마나 태연할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삶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15주차 마지막 강의를 듣고
한 학기동안 들었던 강의가 마지막이 되었다.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지금 되돌아보니, 학기 초의 설문을 했던 것과 생각해 보니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처음의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 나도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이 변해갔다. 친구들이나 주위사람들과 죽음에 대해 말을 하게 되면 예전의 내 모습이 많이 보인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구나 이런 모습이었구나 하면서 많이 답답한 거 같다. 정말 우리 사회에는 체계적인 죽음에 대한 교육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교육이 없으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너무 부정적이고 죽겠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많이 하지만 죽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거 같다.

15주까지 강의를 들으면서 김양은 크게 배운 것은 죽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죽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학기 말 시험문제로 친구가 자살하겠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문제에 김양은 다음같이 답했다.

“나는 몇 주 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미수. 정말 바위로 머리를 몇 대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엄청난 배신감에 휩쌓였다. 친구는 여러 종류의 약을 구입해 한꺼번에 복용해 응급실에 실려 갔다.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살시도까지 감행할 줄은 몰랐다. 친구에게 화를 내기도 했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라는 말도 했다. 내가 자살예방교육을 수강하지 않았더라면 친구에게 할 말이 있었을까? ‘자살은 안돼‘ 이말 뿐이었을 것이다. 힘든 건 알겠지만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자신만 고통당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쓰다니, 죽음은 끝 이 아니라는 거, 자살하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는 거, 자살예방교육을 수강한 덕분에 친구를 설득할 수 있었다. 예전 첫 강의를 보고 썼던 글을 읽어보면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의 자살예방교육으로 내가 이렇게 많이 바뀔 줄 나 자신도 몰랐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더 많이 움직인 거 같다. ” 

 

          학기 초

        학기 말

1 자살충동

자살충동을 많이 느꼈다. 중학교 2학년때 집안일로 자살시도했다.

자살예방교육을 받으면 자살충동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살한 만큼 너무나 힘드니까,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리라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더 큰 고통이 기다릴 뿐이다.

3 개인의 판단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

모르겠다. 내 목숨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되고, 자살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예방을 해야 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자기 생명이므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살기 싫다는 사람을 굳이 살라고 억지로 말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4 죽으면 다 끝나는가?

그렇다. 가족과 친구에게는 아픔이겠지만, 죽으면 다 끝난다.

끝이 아닌 것 같다.

언론정부학부 S양의 경우

교육을 수강한 S양은 오랫동안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시도한 적도 있는 등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먼저 마지막 시간에 제출한 '자살과 죽음 의식조사' 를 살펴보자.

설문 1. 이전에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자살시도를 한 일이 있는가.
2년 전쯤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몇 가지 일들로 우울증을 겪고 있었는데 우울증에 대한 일을 부모님께 이야기 했다가 오히려 야단을 맞은 젓이 있다. 그때 춘천으로 돌아와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수업 중반까지만 해도 다시 자살을 시도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지만,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는 지금은 생겼다. 전과 같은 충동이 생겼을 때 수업을 통해 봤던 동영상이나 교수님의 말씀이 스쳐지나 갈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충동을 억제할 힘이 생겼다고 본다.

설문 2. 사람들은 어려움에 봉착하면 마치 자살이 현실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라도 하는 듯이 자살하는 사례가 있다. 자살한다고 해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현실에서의 어려움은 오직 현실에만 해결할 수 있다. 자살은 단지 회피하려는 것뿐이다.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은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

설문 3. 죽으면 모든게 끝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설문 4.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해도 되는가.
전에는 죽음과 자살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을 들은 후 내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됐다. 자살은 이기적인 판단이고 잘못된 판단이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상처를 남기는 건 안되는 일이다.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인터넷과 출석 수업을 병행하면서 진행했는데, S양은 처음 3일 수업을 결석했지만, 사이버 수업은 수강했다. 개강한지 며칠 지나 메일을 보내왔다. "급작스런 일이 있었기에 이제야 메일을 보냅니다. 저희 집은 삼척입니다. 방학이라 그곳에 있다 보니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결석사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못하는 점 이해를 부탁드립니다......앞으로는 절대 결석하는 일 없이 성실히 수업에 임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계절학기 수업을 시작하기 며칠 전에, 어머니에게 우울증에 거렸다고 말했더니 야단만 맞고 춘천에 와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겁이 나서 수면제를 뱉고 엉엉 울고 있는데, 우울증이 있었던 어머니도 S양의 거짓말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시간에 수업을 수강한 소감을 제출하라고 했더니 다음같은 글을 제출했다.

고민과 반성의 시간들을 지나며

나에게 지난 3년은 마치 인생의 블랙홀에 빠져있는 듯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부턴 모든 걸 포기하게 되었다. 지역언론사 기자가 되겠다는 꿈은 귀찮아졌고, 부모님과 친구들이 짐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앞으로 가고 있는데 나만 혼자 세상과 세상이 아닌 곳 중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 딱히 결정적인 이유를 꼽을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수차례 물을 때마다 그렇게 곤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교수님의 소개로 심리상담을 받을 땐 정말이지 숨이 막힐 정도의 부담감을 느꼈다. 원래 누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성격도 못되는 데다 상담 후 꼭 변화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처음엔 단지 조금 우울한 기분일 뿐이었다. 스스로 잘 준비해왔다는 미래에 대한 설계가 어긋난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토익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나는 실전에서 경험을 쌓으면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커졌고, 당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귀던 남자친구와 최악의 상황으로 헤어지게 됐다. 그땐 대화를 나눌 상대가 절실했다. 그나마 나의 모든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건 어머니라 여겨 “요즘 나 우울증에 빠진 것 같아”라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내가 어머니께 얘기를 털어놓으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앍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정신적 고통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어머니는 노발대발 하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미래이고 탈출구였다.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하루빨리 내가 취직을 해 아버지와 따로 사는 것이다. 가끔 안부전화를 할 때마다 죽지 못해 산다느니, 네가 곧 대학에 입학하는 동생을 챙겨주라느니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흐느끼신다. 그러니 나의 우울증 고백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던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너 대학시킬려고 얼마나 참고 살았는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네가 나보다 더 힘들다는 거야?”라며 소리를 질러 대는 어머니의 뜻하지 않은 반응에 나는 마음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집안의 장녀로서 느껴왔던 부담감이 10배 아니 100배로 불려진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늪으로 빠진 지름길이었다. 아침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눈을 뜨면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당연히 학교생활은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고 졸업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상황은 또 절망감에 빠지게 했고, 술로 얼룩진 일상은 계속되었다. 주위사람들과의 연락도 끊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자연히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졸업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대출을 받아 학기등록을 했다. 학교를 잘 다닐 수 있는 자신감은 조금도 없지만 왠지 학기등록을 안하고 있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지난 3년간의 내 생활은 거짓말과 알콜중독과 무기력한 모습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 지난 시간을 제대로 정리한 것도 처음이다. 그동안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되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기억을 하는 건 나를 자책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계절 학기를 등록한 것도 단지 불안함 때문이었다. 분명 학교를 다지니 않을 것을 뻔히 알지만 다시 등록한 것이다. 정규학기까지 합쳐 벌써 5번째 재등록이었다. 이번에도 돈만 버리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 학교를 제대로 다녔는지 기억도 안날정도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수업을 끝내는 감회가 남다르다. 비단 학교에 꼬박꼬박 나오게 됐다는 것만이 아니다.

수업을 정리하는 소감을 쓰면서 나는 슬프면서도 시원한 기분이다. 때마침 이 수업이 개강되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하셨다. 이유는 나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나는 엄청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머니께 은근히 우울증 얘기를 꺼냈다가 야단을 맞고 춘천으로 올라온 뒤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술을 마시면서 충동적으로 그동안 조금씩 사뒀던 수면제를 먹었다. 당시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도 순간 무서운 기분이 들어 모두 뱉고 토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런데 전화로 어머니의 자살시도 소식을 듣고 나니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교수님의 자살예방교육 수업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동생은 고3이었고, 아버지는 매일 출근하시는데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없었다. 우울증은 무엇보다 혼자두면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쉽게 춘천으로 올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어미니 상태가 나아져 수업에 참석하게 됐고, <마지막 선물>을 읽으면서 이 수업을 어떻게든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수업이 없는 날은 집에 다녀왔기 때문에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수업의 진행절차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특히 인터넷 수업의 게시판에는 거의 글을 올리지도 못했다. 대신 오프라인수업과 레포트로 읽어야 하는 책읽기에는 집중했다.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내가 직접 수업과 관련된 상황,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처해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오프라인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동하는 기차와 버스 안에서 보내면서 자살과 죽음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지난 대학생활의 위기를 다시 되돌아본 것도 그런 시간들 덕분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예전 일기장들을 꺼내보니 내용의 95%는 ‘죽고 싶다’는 말이었다. 충격적인 건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일기를 써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죽고 싶고 힘들 때마다 새 일기장에 그 기분을 적으면서 위안을 받아왔던 것이다.
죽음, 또 자살을 나는 언제나 개인의 문제로만 여겨왔다. 그런데 나로 인해 쇠약해진 어머니를 보며, 가족들과의 관계를 조금씩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며 변화를 느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죽은 후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머니의 자살기도 소식을 듣고 받았던 충격이 지금가지 내가 지녔던 죽음 이해, 삶의 인식을 바꾼 것은 틀림없다. 특히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민하게 만들고 질문을 던져준 교수님과 이 수업에 정말 감사한다.

웰빙과 웰다잉에 대한 공통점은 ‘행복’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과 행복하게 죽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같다. 내 삶과 죽음이 분명 내 주위사람들의 삶과 죽음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 둘을 함께 놓고 본다는 것 자체가 조금 아이러니했다. 웰빙이란 것이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위한 욕심이 만들어낸 열풍일텐데 이것이 행복하게 죽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웰빙에 대한 고민과 집착이 심할수록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였다. 실제로 웰다잉을 맞은 사람들의 사례는 마치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어떻게 죽음을 멋있는 자세로 혹은 온화한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결국 나의 숱한 의문점들은 웰다잉을 웰빙과 처음부터 별개로 여기고 고민했던 데서 온 오류들이다.

삶에 대한 준비가 철저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준비 역시 철저할 수밖에 없다. 진정 웰빙이란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것, 즉 육체를 넘어 영혼에 대한 관심이 이뤄낸 것이다. 웰빙을 할수록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죽음의 순간 많은 세속적인 것들과의 이별에 담담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아주 어릴 적부터 해왔다면 어땠을까? 웰다잉을 위한 많은 자료들은 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일인지도 모른다.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이렇게 생명에 대한 가벼운 인식은 삶, 죽음, 자신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웰빙과 웰다잉을 연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들과 자료를 읽으면서 삶과 죽음을 넘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원해왔던 행복이 혹시 잘못된 편견으로부터 생긴 기준은 아니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고 어떻게 사느냐는 얼만큼 고민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기말시험에 "자살 예방 교육을 받은 이후 죽음과 자살에 대한 의식변화" 문제에 S양은 다음같은 답을 적었다.

교육을 받았던 많은 수강생들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가 생기고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데 대해,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나 역시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치게 됐다. 처음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죽음 이후의 세계란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와 관련한 체험자들의 사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각을 넓혀 죽음의 문제를 삶을 통해 바라보면서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삶과 죽음에 관한 고민 중 영혼에 존재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최면치료를 통한 전생이나 빙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층 유연해 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살에 대한 변화이다. 이전에는 죽음을 혹은 자살을 개인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주위의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립됐다고 느끼던 마음에서 벗어나 이전의 나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마도 이 수업이 가장 크게 나를 변화시킨 건 삶을 살아가는 방식, 행복이라고 여기던 기준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7장 맺는말

지금까지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웰다잉과 자살예방교육을 받은 수강생 1256명이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 의식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조사 대상

   첫 시간

   마지막 시간

1 자살충동?

    51%

 자살충동 1명, 유보 2명

2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45%

 벗어난다 2명, 유보 3명

3 자기판단에 따라 자살한다?

    34%

 자살권   5명, 유보 14명

4 죽으면 다 끝난다?

    43%

 유보 6명

현재 자살사망률이 높은 것도 문제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자살이 해결책이 된다, 자살권이
있다, 죽으면 고통도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 이런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문제이다. 아무도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고통이나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해결책이고, 자살권이 자기에게 있고,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은 끝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문제를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살충동이 심각해지면, 사실 자살을 막기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렇게 상황이 전개되기 이전에 미리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체계적이고도 심층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면, 자살예방 교육 수강학생들이 쉽게 자기 생각을 바꾸었듯이 자살사망률은 현저하게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자살권, 자살이 해결책, 죽으면 고통도 끝이라는 생각을 바르게 잡아주는 생명존중교육, 죽음준비교육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한 학기 교육에 의해 어렵지 않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음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살에 대해 자의적으로 막연하게 상상하고 있다가,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왜 자살해서는 안되는지 체계적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생명존중교육, 자살예방교육, 죽음준비교육을 학교교육이나 평생교육 형태로 실시해 자살에 대한 의식이 변화되면 자살사망률은 자연히 떨어지게 된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