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1. 들어가는 말

올 9월경 치러질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놓고 불교계가 벌써부터 분주하다. 총무원장에 출마를 할 후보들이 자천타천 거론되기 시작했고,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이달(5월)을 분기점으로 조계종은 급격하게 선거국면에 접어들 것이 분명하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어떻게 훌륭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계종은 총무원장 선거가 돈 선거로 전락한 후 훌륭한 자질과 실력을 갖췄더라도 돈이 없으면 원장이 될 수 없는 ‘몹쓸 구조’가 고착돼 버렸다. 총무원장 선거에 드는 비용이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백억 대를 상회한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이렇게 많은 비용이 드는 현행 총무원장 선거제도를 찬성하는 이는 물론 드물다. 본사 주지나 종회의원 등 종단 핵심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선거 망종론(選擧亡宗論)’, 즉 ‘이 종단(조계종)은 선거를 치르다 망하게 될 것’이라며 걱정한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종단 내에 견고하게 짜인 정치판이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점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종회의원조차 총무원장 선거를 통해 일정 부분 지분을 확보해야만 불교계에서 행세를 하며 살아갈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살기 위해 종회의원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 총무원장 선거의 한 축으로 끼어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이야기다.

아무튼 ‘통 큰 정치’ ‘계파를 아우르는 힘’ ‘대세론’ 등 세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용어들이 최근 들어 절집에서 빈번히 오간다. 선거일이 가까워 올수록 이런 용어들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저질 음해성 페이퍼도 오갈 것이고, 인터넷을 통한 상대 비방 행위도 극렬해질 것이다. 벌써부터 유력 후보로 부상한 한 스님과 그 주변 인물을 상대로 한 비방의 글이 교계 언론이나 주요 인터넷사이트에 오르고 있다.

총무원장 선거 등 각종 선거를 둘러싼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불거지면서 이른바 ‘정치 전문승’들도 적잖이 나타났다. 정치의 계절, 선거의 계절이 되면 이들의 눈동자는 빛나기 시작한다. 광채를 띤 형형한 눈빛, 미소를 흘리는 치켜 올라간 입 매무새, 쫑긋 세운 두 귀 등 그들의 모습에선 생사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이번 총무원장 선거에도 어김없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젊은 승려들은 전에 없이 무기력하고, 그 상당수는 거대한 종단정치판의 한구석으로 시나브로 편입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총무원장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훌륭한 자질을 가진 지도자의 선출은 난망해 보인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종책 제시는 뒷전으로 밀리게 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가장 적합한 분을 총무원장으로 모실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제도도, 정치도, 일도 사람이 만들고 실행하는 것이니 적합한 인물 선출은 선거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 글은 총무원장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아울러 역대 총무원장의 장점을 점검해 봄으로써 좋은 총무원장, 이상적인 총무원장상을 모색해 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총무원장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역대 총무원장들이 보여 준 장점과 미덕을 분석함으로써 새로이 탄생할 총무원장이 그 길을 걷도록 유도하는 데 본고의 취지가 있는 것이다.

2. 총무원장, 어떤 인물이어야 하나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아란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열 가지 법을 갖추면 따로이 논하여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힐 수 있느니라. 계를 잘 지키고, 들은 것이 많으며, 양편의 규칙을 잘 외우고, 그 이치를 널리 이해하며, 말이 분명하여 질문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어 듣는 이를 기쁘게 할 수 있고, 싸움을 잘 조정할 수 있으며, 편애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다.”1)

부처님이 어떤 단체나 집단의 대표자를 선출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을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이 경의 가르침은 오늘날 종단을 이끄는 총무원장 선출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총무원장이 부처님 당시처럼 단순히 수행자 집단의 대표자가 아니라 1천만이 넘는 거대한 불교도 집단의 대표자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또 국왕(지도자)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강조했다.

“다리와 같이 만인을 제도해야 하고, 저울처럼 친소(親疎)를 평등하게 해야 하며, 길과 같이 성현의 자취를 어기지 않아야 한다. 해와 같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춰 주어야 하고, 하늘처럼 일체를 덮어 주어야 하며, 땅처럼 만물을 길러야 하며, 물처럼 사방을 윤택하게 하고, 과거의 전륜성왕처럼 열 가지 선행(십선)으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2)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이 같은 지도자상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적용되어야 할까. 이는 곧 조계종 총무원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갖춘 인물이어야 적합할까라는 과제와 상통한다.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글의 제목을 ‘총무원장은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고 정한 것 자체가 어쩌면 생소한 시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다음으로 큰 조직이라는 조계종의 수장을 뽑는 일을 남의 일로 외면할 수도 없다. 불교의 미래가 달린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대통령’ 조계종 총무원장은 어떤 분이 좋을까. 그 몇 가지 현대적 기준을 6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시대적 변화를 읽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불자는 1천만을 넘는다. 불교계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 총무원장은 비록 일부 스님들이 선출하지만, 종단협의회 회장직을 당연직으로 맡게 된다는 점에서 불교계 전체의 대표로 인정된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역할과 활동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디지털 시대, 글로벌 시대가 열렸는데도 여전히 산중불교 시절의 마인드를 답습하는 총무원장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둘째, 사부대중에 대한 서비스 정신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국민에 대한 서비스 정신3)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불교계 대표인 조계종 총무원장(이하 총무원장)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총무원장의 리더십은 1천만 사부대중에 대한 서비스 정신에서 기초해야 한다. 나아가 불교라는 배를 잘 인도하는 유능한 경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일정한 수준의 정치력을 갖추어야 한다. 종단정치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금기시하거나 애써 감출 대상이 아니다. 엄연히 종단 안에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실상 종권 획득과 이해를 목적으로 한 정당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종단정치는 불가피한 것임을 인정하고 올바른 정치력을 갖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 이상 수행력이나 초월적 권위만으로 총무원장의 자질을 따지는 시대는 지났다.

넷째, 대중을 감복시킬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권한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도 크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나 진정한 권력은 법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하는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은 명령하거나 호령하는 대통령이다.

법률에 정한 권한보다는 그 권한 행사 방식이 더 중요한 덕목이라는 이야기다. 하물며 국민의 정신 분야를 책임지는 종교계의 수장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설득의 대상이 설득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설득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설득자는 언제든지 설득의 대상들에게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총무원장은 비록 행정의 수반이기는 하지만, 그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다섯째,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정의의 구현이 정치의 궁극적 목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政)은 정(正)이라고 했다. 정치가 추구하는 바가 매우 다양하겠지만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공자는 보았던 것이다. 또한 정치는 일종의 종합예술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정치가 다인다과(多因多果), 즉 수많은 원인이 존재하므로 수많은 결과가 올 수 있다는 특징을 말한다. 정치는 단순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치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바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지도자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를 하려고 나선 이상 이런 고통은 수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섯째, 가혹한 평가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총무원장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총무원장은 늘 언론의 평가, 전문가 그룹의 평가, 또 사부대중 전체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3개 평가 그룹을 언급하는 이유는 적어도 총무원장이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대상을 지목하자는 뜻이다. 자신을 평가하는 대상에 대한 개념이 막연할 경우 자칫 총무원장이 자기 환상에 빠져 객관적 판단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무원장이 되었다는 것은 불교사의 한 장을 주도적으로 책임졌다는 것이므로, 평가가 갖는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총무원장에 대한 평판이나 명성은 주관적인 변수이고, 그 신뢰도는 전문가 그룹과 일반 대중의 평가가 다를 수 있으므로 어느 한 부분만의 평가에 의존해서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총무원장이 자신을 지지하는 그룹이나 집행부의 울타리에 싸여 달콤한 평가에 길들 경우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속담처럼 실패한 총무원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총무원장은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언론이나 전문가 그룹, 대중의 평가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 평가에 대해 바른 분석을 통해 자신의 행정에 반영해야 한다.

3. 부처님이 제시한 지도자의 리더십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기준은 아무래도 부처님께서 제시한 지도자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에 가까운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 초기경전에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남겼다. 총무원장은 원칙적으로 출가승단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인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지침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지도자는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하여 여래를 욕하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고 해도, 여래는 그것 때문에 분개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이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여래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경한다 해도 여래는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며, 우쭐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이어 “그러므로 그대들도(제자) 만일 다른 사람들이 집요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고 해도, 그로 인하여 분개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을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경한다고 해도 그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며 우쭐대지 말아야 한다.”4)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또 동료들을 사랑, 존경, 화합으로 이끄는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 여기에 사랑과 존경심을 일으키고, 협조와 화합과 일치로 이끄는 기억하여야 할 여섯 가지가 있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행동으로 대한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말로 대한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한다. △청정한 삶의 계행을 지니는 그의 동료와 법답게 얻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탁발하여 얻은 것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을 기뻐한다. △청정한 삶의 동료들과 깨지지 않고 손상됨 없는, 현자가 찬탄하고 집중으로 이끄는 계행에 일치되어 머문다. △청정한 삶의 동료들과 거룩하고 해탈로 이끄는 견해, 이런 견해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을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 견해에 일치하여 머문다. 이것들은 기억하여야 할 여섯 가지 자질로서 사랑과 존경심을 일으키고 협조와 화합과 일치로 이끈다.”5)

4. 역대 조계종 총무원장들이 남긴 성과들

총무원장에는 어떤 분이 적합할까. 수행력이 높은 분? 행정 능력이 뛰어난 분? 불사를 잘하는 분? 성품이 원만해 두루 인맥이 넓은 분? 가장 적합한 총무원장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역대 총무원장의 면면과 공과(功過)를 따져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것도 드물 것이다.

역대 총무원장들의 공과를 정확하게 짚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분들도 있고, 또 이런 현실에서 공과, 특히 과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종교계라는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로 총무원장을 역임한 역대 원장 등 주요 원장들의 재임 중의 행적 중 본받아야 할 장점을 다룰 것이다. 이는 역대 원장이 보여 준 장점들만 잘 수용하더라도 성공한 총무원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스님들 가운데에서 정치력과 행정력을 고루 갖춘 지도자를 선출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님들은 기본적으로 수행자이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불교계는 세속적 정치력과 행정력의 기준에 최대한 가까운 분을 선출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행정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모르는 것은 배우고 알려고 노력하는 분을 총무원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절박한 입장에 서 있다.

조계종은 개창 이후 현 지관 총무원장까지 32대에 걸쳐 총무원장을 배출했다. 그러나 대부분 재임 기간이 지나치게 짧아서 그 활동을 평가할 대상은 제한적이다. 재임 기간이 짧았다는 것은 그만큼 종단이 안정이 되어 있지 못했다는 것이며, 승단 질서나 위계가 정착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일정한 기간에 걸쳐 총무원장직을 수행한 스님, 짧은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총무원장으로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스님 몇몇 분의 종무행정 성과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표1>대한불교조계종 역대 총무원장

 

법명

재임기간

출가

득도

제1대  석진  1962.04.11 ~ 62.12.30 확인불가 확인불가
제2대  법용  1962.12.30 ~ 66.04.12 1906년 박초월화상을 은사로 득도
제3대  경산  1966.04.12 ~ 67.08.09 1936년 해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4대  영암   1967.08.09 ~ 69.09.13   1924년  청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5대  월산   1969.09.13 ~ 70.07.22   1943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6대  순호   1970.07.22 ~ 71.07.30   1926년  영호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7대  순호  1971.07.30 ~ 71.11.25  1926년  영호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8대  석주   1971.11.25 ~ 73.01.25   1928년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9대  경산  1973.01.25 ~ 75.10.06  1936년  해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0대  서암   1975.10.06 ~ 75.12.05   1935년  화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1대  영암   1975.12.05 ~ 76.10.04   1924년  청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2대  영해  1976.10.06 ~ 76.12.03   1930년  법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3대  자운  1976.12.03 ~ 77.07.23   1928년  경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4대  혜정   1977.07.23 ~ 78.01.07  1953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5대  석주  1978.01.07 ~ 78.02.03  1928년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6대  월하   1978.02.03 ~ 80.04.26   1933년  경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7대  월주   1980.04.26 ~ 80.11.08  1954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탄성 1980.11.08 ~ 81.01.16   1945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8대  성수 1981.01.16 ~ 81.06.10   1944년  성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19대  초우  1981.06.10 ~ 82.01.07  1947년  동운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0대  법전  1982.01.07 ~ 82.04.06   1935년  설제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1대  진경   1982.04.06 ~ 83.09.03   1945년  일현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2대  서운  1983.09.08 ~ 84.01.23  1950년  정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3대  석주   1984.01.23 ~ 84.08.01   1928년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4대  녹원 1984.08.01 ~ 86.08.25   1941년  탄옹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5대  의현   1986.08.25 ~ 90.08.26  1952년  선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6대  의현   1990.08.26 ~ 94.04.18   1952년   선오스님을은사로 득도
 제27대  탄성   1994.04.18 ~ 94.11.25   1945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8대  월주  1994.11.25 ~ 98.11.20   1954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도법   1998.11.20 ~ 98.12.29   1967년  월주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29대  고산     1998.12.29 ~ 99.10.18   1948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원택  1999.10.18 ~ 99.11.23   1972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30대  정대   1999.11.23 ~ 03.01.15  1963년  영신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선용   2003.01.15 ~ 03.02.24   1962년  도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31대  법장  2003.02.24 ~ 05.09.11   1960년  원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현고   2005.09.11 ~ 05.10.31   1971년   구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제32대  지관   2005.10.31 ~ 현재   1947년  자운스님을 은사로 득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무원장을 지낸 분은 많지만 총무원장으로서 역량과 특징, 공과를 따져볼 만한 원장은 그리 많지 않다. 총무원장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한 스님은 녹원 스님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녹원 스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무행정의 얼개가 짜였고, 종단의 운영을 총무원장이 자신의 색깔대로 이끌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녹원 스님을 필두로 의현 스님, 월주 스님, 정대 스님, 법장 스님, 지관 스님을 평가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행정의 달인으로 일컬어졌던 경산 스님과 종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서서 종단을 안정시켰던 석주 스님의 행정도 포함했다.

1) 녹원 스님

앞서도 언급했지만, 총무원장으로서 행한 이런저런 역할을 평가할 수 있는 분은 녹원 스님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녹원 스님에 이르러 비로소 만 2년 동안 원장직을 수행했으니 실질적으로 종무행정 최고 책임자로서 첫 총무원장은 녹원 스님인 셈이다.

녹원 스님의 2년 임기 수행은 뒤이은 총무원장들이 임기를 마치는 기초가 되었다. 잦은 총무원장 교체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조계종으로서는 녹원 스님이 재임 기간을 이전에 비해 크게 늘린 자체가 성과에 해당한다. 녹원 스님의 2년 임기 수행 이후 조계종단에는 누가 총무원장이 되든 일단 원장이 되었으면 임기는 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이런 분위기는 종단의 종무행정의 안정을 가져왔고, 종단의 종무행정력을 크게 성장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녹원 스님은 또 조계사와 개운사파의 분규 사태, 10·27법난 등으로 인해 승려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을 때, 총무원장을 맡아 승려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승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편없었기에 녹원 스님은 승려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총무원장의 자리는 행정승의 수반이었지만 녹원 스님에게서는 수행자의 품위가 강하게 풍겼다.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이런 녹원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승려를 폄하하고 천시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어쩌면 이 점은 녹원 스님이 이룩한 어떤 업적에도 뒤지지 않는 않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녹원 스님은 해인사 승려대회를 거쳐 총무원장에 오른 후 관행이었던 문화부장관 예방을 보류했다. 당시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면 장관은 물론 정부의 공직자들을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승려의 위상에 대해 고민을 했던 녹원 스님은 장관을 찾지 않았다. 결국 녹원 스님은 장관의 집무실이 아닌 제3의 장소, 지금의 ‘한국의 집’에서 장관을 만나 상견례를 했다. 당시 이 모임을 중간에서 주선했던 한 공직자는 당시의 제3 장소 상견례는 조계종 총무원장에 대한 장관의 인식을 달라지게 하는 전환점이었다고 이 모임의 의미를 부여했다.

녹원 스님은 특히 임기 2년이 될 즈음, 총무원장 자리에 대한 일부 스님들의 도전이 시작될 때 원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종단을 분규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지 않기 위해 용퇴를 하는 결단을 내렸다. 사실 이 당시 녹원 스님이 원장 자리 사수를 결심했다면 종단은 심각한 분규를 겪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대의를 위해 작은 이해를 버릴 줄 아는 것이었고, 용퇴를 건의한 측근들의 의사를 흔쾌히 수용할 줄 아는 대인의 자세와 다르지 않았다.

2) 의현 스님

의현 스님은 참 부지런한 총무원장이었다. 그의 부지런함은 그를 잘 아는 이들조차 혀를 찰 정도였다. 어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의현 스님은 밤과 낮, 새벽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때와 장소,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이런 부지런함 덕분에 스님은 재임 기간 중 불교방송 개국, 중앙승가대 승격 같은 굵직한 불사를 이루어 냈다. 의현 스님은 또 원로 스님들을 자주 찾아 인사를 드렸는데, 그 대상은 유명한 분이나 큰 산중을 거느린 분만이 아니라 촌로처럼 소박하게 토굴 같은 곳에서 사는 스님들까지 망라됐다. 원로 스님들을 찾을 때면 큰 선물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선물을 챙겼다.

심지어 양말 한 켤레를 들고 노스님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리는 정이 있는 분이었다. 이런 의현 스님의 면모는 1994년 조계종 개혁이라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태에도, 당시 다수 원로 스님들이 의현 스님에 대한 지지(호감)를 굳건히 지키게 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의현 스님은 선방에 대한 대중공양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원장으로 유명하다. 대중공양의 대상은 봉암사나 해인사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산재한 작은 선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행정 책임자가 수행자를 존중하면서 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승가의 전통에도 걸맞은 것이었다. 또한 스스로를 내세우거나 행세를 하려는 모습도 의현 스님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늘 겸손했으며,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낮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의현 스님의 장점으로 또 분열이 아니라 가능한 인연들을 두루두루 끌어안고 가는 통합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의현 스님이 종단협의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조계종으로부터 홀대 또는 경시당하던 여타 군소 종단들과 조계종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전환점이 마련됐다.

당시 조계종 스님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조계종 이외의 종단 승려와 함께 어울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달랐다. 태고·천태·진각·관음종 등 주요 종단이나 군소 또는 신생 종단 원장 스님들에 대해 깍듯이 존중과 예의를 갖췄다.

이런 의현 스님의 노력은 곧 불교계에서 ‘범불교’ ‘범종단’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낳았다. 또 이런 분위기는 조계종을 중심으로 모든 종단들이 동참하여 불교방송과 불교텔레비전을 설립하고, 한강유등제, 부처님오신날 연합 봉축행사 등이 범불교 차원에서 한 단계 격상된 수준으로 치러지는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의현 스님이 조계종 이외의 불교종단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사례는 의외로 많다. 그 대표적 사례로 천태종이 오늘날 분당에 대규모 종교 부지를 확보해 오늘날 대광사를 건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의현 스님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의현 스님의 이런 행보는 타 종교에도 적용됐다. 의현 스님의 원장 취임과 함께 86아시안게임이나 88서울올림픽에서 개신교, 천주교 등 범종교계가 함께 종교관을 운영하고, 종교 간 원융을 기원하는 모임이 잦아졌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의현 스님이 있었다.

3선 시도라는 오판만 없었더라면 의현 스님은 조계종은 물론 불교계를 크게 발전시킨 지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3) 녹원 스님과 의현 스님의 공통된 장점

총무원장으로서 녹원 스님과 의현 스님의 공통점은 재임 중에 사찰 소유의 땅을 일절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두 원장은 절 땅을 파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외려 녹원 스님은 직지사 아래 전답을 많이 사들였고, 의현 스님도 동화사 주차장 땅 등을 많이 사들였다. 조계사가 인근 땅을 많이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의현 스님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 재산을 늘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녹원, 의현 두 총무원장은 정부의 수용 조치 등으로 땅을 부득이하게 매각할 때에도 반드시 그만큼의 땅을 사들이는 것(대토)을 의무화했다. 땅에 대한 철저한 면이 이 두 원장의 공통점이었는데, 아마도 이전 원장 대에 수많은 사찰 소유지가 매각된 데 따른 반성적 의미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원장의 뒤를 이은 총무원장들은 이 부분에서 솔직히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4) 월주 스님

월주 스님은 총무원장 재직 시에 대외적인 사회활동을 많이 했던 원장으로 꼽힌다. 각계각층의 여러 사람을 만날 때 월주 스님이 지킨 두드러진 원칙은 많은 준비를 했다는 점이다. 발언 하나하나가 철저히 준비를 한 것이었고 즉흥적인 발언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월주 스님은 역대 총무원장 중에 가장 말실수가 없었던 총무원장으로 기록된다. 이 점은 종무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큰 장점이고, 후임 원장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원칙이자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사회화’는 월주 스님이 재임 기간 동안 내세웠던 일종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월주 스님의 이런 행보는 불교가 산중불교의 이미지를 벗고 사회에 참여하는, 중생의 삶에 기여하는 종단의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월주 스님 이후 각 총무원장마다 자신의 임기 중 추진할 핵심 내용을 캐치프레이즈 형식으로 내세우는 전통이 생겨났다.

월주 스님은 또 언론 및 시민 사회단체들과 적절히 연대하거나 이들을 활용할 줄 알았으며, 지식층 및 사회 지도층과의 소통이 원활했던 원장이었다.

5) 정대 스님

정대 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능력에 상반된 평가를 받는 분이다. 그의 정치력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평가가 병존한다. 아무튼 정대 스님은 취임 초기 취약한 정치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색깔 있는 행보로 큰 불사를 잇달아 관철시키는 독특한 정치력을 보여 줬다.

오늘날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사나 중앙승가대학 이전 불사의 성공적 완수는 정대 스님이라는 걸출한 정치승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불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총무원장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수행했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한 번 담당 종무원을 믿으면 그가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옳다는 판단이 서면 지체없이 결단을 내리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총무원 문화부 산하 발굴단이 해체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문화의 세기, 한국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불교 조계종에 문화재 발굴단 하나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문화계 원로 지인의 조언을 그는 지체없이 수용했다. 그 결과 조계종은 지난 2월 군위 인각사에서 국보급 문화재 무더기 발굴이라는 역사적인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정대 스님은 일의 추진이 더뎌지거나 난관에 처했을 때는 직접 나서 일을 챙겼다. 그가 총무원장 신분으로 관련 장관을 찾아서 과천 정부청사를 방문한 것이나, 적절한 시점에 대통령(김대중)과의 돈독한 친분 관계를 활용한 것은 종단 내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일담이다.

정대 스님은 때로는 돌출적인 대외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 세간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거의 모두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곧 종단에 일정한 혜택이나 성과로 돌아오곤 했다.

정치력에 관한 한 정대 스님의 탁월한 수완은 종단 안은 물론이고, 종단 바깥에도 두루 통하는 수준이었다.

6) 법장 스님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 취임과 함께 가장 먼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세속의 정부로 치면 장관직에 해당하는 부장에 비구니를 발탁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속적 시각에서 보면 큰 이슈가 아닐 수 있으나 완고하고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고 종단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비구니 스님들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점을 간파한 법장 스님의 혜안이 이뤄낸 결단이었다. 비구니 스님의 사회부장 발탁은 법장 스님의 안목의 일단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법장 스님은 비구니 부장 발탁과 함께 부장단을 석·박사를 이수한 엘리트 스님들로 구성함으로써 이전 원장들과는 출발부터 다른 면모를 보여 줬다.

지병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십 명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접견했을 정도로 위법망구의 자세를 견지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한 것이나, 미국을 순방하며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미국 정부에 촉구한 것, 평양을 방문해 종교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연설을 한 것 등은 법장 스님의 활발발한 행보와 원력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법장 스님의 취임과 함께 불교는 종교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종단으로 급부상했다. 총무부장을 수행했던 현고 스님이 영결사를 통해 “스님의 원력으로 인해 종단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으며 불교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드디어 불교 중흥의 결실을 거두려는 찰나였다.”며 흐느낀 것은 단순히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의례적 찬사를 넘는 것이었다.

법장 스님은 역대 어느 원장보다도 발이 넓어 지지자가 많았다.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에 당선되자 이들은 총무원장을 지원하는 큰 세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저마다 각별한 인연을 내세워 총무원 청사를 방문하는 일이 많았다. 원장으로서 일정이 바빴지만, 스님은 새벽 산책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들을 만났다. 문턱이 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던, 가장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총무원장이었다.
복지, 환경 등 대사회적 활동, 대정부 활동, 종단 내 활동, 국제적 활동 등 법장 스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법장 스님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적에 든 후 자신의 시신을 기증함으로써 역대 총무원장 가운데 유일하게 다비식 없는 영결식을 치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7) 지관 스님

현직 총무원장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또 적절하지도 않다. 따라서 현직 원장으로서 이뤄낸 성과를 몇 가지 나열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총무원장에게 도전하거나 공격을 가하는 경우도 이전보다는 현저하게 줄었다. 종단 집행부가 큰 난관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종단이 임기 마지막 해까지 안정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재임 중 1998년도 종단 분규를 일으킨 주역을 사면한 것은 사실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화합조처로 평가된다. 다만 당시 사면된 일부가 최근 종권 지향적 움직임을 보이는 등 사면이 다소 성급했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또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의 종교 편향적 발언과 이에 따른 공직사회의 불교 홀대 분위기를 일소시키기 위해 지난해 대규모 범불교도대회를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개최해 불교의 단합된 의지를 천명하는 데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 역할을 한 것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8) 석주 스님

총무원장의 자질을 언급함에 있어 반드시 빼놓아서는 안 될 분이 있는데, 다름 아닌 석주 스님이다. 석주 스님은 종단이 어렵거나 힘겨운 처지에 놓였을 때, 즉 종단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마치 야구의 구원투수처럼 등장해 종단을 구한 어른이다.

석주 스님의 성정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자신의 색깔을 내세우기보다는 두루두루 원만하고, 소장과 노장을 다 아우르는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단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역할을 한 것은 갈등과 다툼의 양 당사자들도 석주 스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확고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석주 스님이야말로 공평무사, 공심위종(公心爲宗)의 전형적인 사표였다.

9) 경산 스님

경산 스님은 제3대, 제9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경산 스님을 기억하는 분들은 최고의 종무행정가였다는 데 일치된 평가를 내린다. 많은 사람들은 경산 스님이 없었다면 오늘날 동국대학교가 조계종 종립대학이 되지 못하고, 일반 대학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고 입을 모은다.

경산 스님은 부드러운 성정을 가진 자애롭고 미소를 잃지 않는 원장이었다. 그의 그런 덕화가 휘하에 광덕, 월주, 혜정 스님과 같은 쟁쟁한 스님들이 부장으로 포진한 배경이기도 했다. 포용력과 자비를 갖춘 경산 스님은 작은 약속도 소홀히 하지 않는 천생 수행자였다.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던 발군의 행정력을 갖춘 실력자였음에도 자신과 문손들을 위해 이렇다 할 사찰 하나 마련하지 않은 공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스님의 말년이 서울 정릉 산 중턱의 적조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였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다른 원장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표 2> 주요 조계종 총무원장의 주요 업적들

법명

재임 시 행적 중 본받을 만한 장점

녹원 스님

승가 위상 제고, 종단 안정 기여

의현 스님

화합 행보, 부지런함,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 등 대형불사 수행

월주 스님

 신중한 발언, 깨달음의 사회화 등 대사회 활동 강화

정대 스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원 등 탁월한 정치력, 감각 있는 발언

법장 스님

광폭 활동, 낮은 문턱, 비구니 중용 등 시대적 요청에 능동적 적응

지관 스님

종단 안정 기여, 뚝심 있는 행보, 멸빈자 사면 통한 화합 추구

 석주 스님

 공평무사, 종단 어려울 때마다 공심으로 종단 안정 기여

경산 스님

 동국대 소유권 확보 등 탁월한 행정 능력, 자애로운 리더십


5. 나가는 글

5. 나가는 글

지난 3월 3일 불교미래사회연구소(소장 법안 스님)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관한 출·재가자(리더) 인식조사’ 결과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이 조사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기존에 시행되었던 현행 총무원장 선출 제도에 대한 평가, 선출 제도 및 선거 시행에 따른 관리적 차원의 보완 사항, 총무원장 자격 요건 등에 관한 교계 출·재가 리더들의 인식을 알아보고 이를 조계종의 주요 의사결정시스템의 변화를 설계하는 데 참고 자료로 삼기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이 조사에서는 총무원장의 자격 및 역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조사 결과가 나왔다. 첫째는 ‘총무원장의 사회적 소통 능력’을 중요하게 보았다(86.3%)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정치권과의 교분은 긍정 응답(27.8%)보다 부정 응답(38.7%)이 높았고, 도덕성보다 종무행정 능력이 중요하다는 응답은 부정 응답이 51.6%로 긍정 응답 27.2%보다 높아 여전히 도덕성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결과를 보였다.6)

<표 3> 총무원장의 자격요건(불교미래사회연구소 설문)

항 목 

최소값

최대값

평 균

①총무원장은 도덕성보다 종무행정능력이 중요하다

1.00

5.00

2.6393

②총무원장은 정치권(력)과의 교분이 깊어야 한다

1.00

5.00

2.8086

③총무원장은 사회적 소통능력이 중요하다

1.00

5.00

4.2934

④총무원장은 사회흐름에 맞게 젊어져야 한다

1.00

5.00

3.1974

이 같은 결과는 총무원장을 완전한 종무행정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수행을 중시하는 종단의 대표자 자리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인식의 교차를 잘 보여 준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총무원장에 대한 기대는 앞으로 점점 정치력과 행정 능력 쪽에 더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오는 9월경 치러질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서 불교계는 과연 어떤 인물을 대표자로 선택할 것인가. 우려를 씻어내고, 불교의 미래를 이끌 지도자를 돈과 이해관계를 극복하고 능력과 리더십, 도덕성을 갖춘 인물로 옹립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 초, 한국불교의 미래를 가늠할 중차대한 선택의 순간이 우리 앞에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

이학종 / 경기도 양평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1988년 〈법보신문〉 창간과 함께 입사하여 편집데스크를 거쳐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8년 4월부터 불교 인터넷 언론인 〈미디어붓다〉를 창간, 대표기자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산승의 향기》 《가정법회》 《선을 찾아서》 《돌에 새긴 희망》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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