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10회 - 2009년 7월 10일

1. 문제 제기.

성본스님
한국선문화연구원 원장
불교의 역사에서 참선수행과 염불수행은 불교의 실천수행으로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참선수행과 염불수행은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법사상이나 실천구조가 똑같아야 하는데, 경전에서 방편법문으로 표현하는 언어와 용어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불법의 사상과 수행구조체계의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접근해보면서 정토 사상과 실천방법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정토교, 혹은 정토 사상을 말하면 서방 극락세계, 극락정토, 아미타불, 淨土往生, 一心不亂의 念佛, 六字念佛, 염불수행 등의 독특한 불교 언어가 상기된다.

정토 사상의 오해는 서방 극락정토를 有相의 국토로, 아미타불은 존재하는 부처로, 정토왕생은 저 나라에 가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많은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정토교의 언어가 출현하게 된 것은 정토사상이 대승불교 경전에서 다양하게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정토교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의 근본정신과 실천사상의 토대위에 이루어진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토교나 정토사상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경전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불법에 의거한 정법의 안목으로 수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며, 중요한 문제점들을 먼저 제시해 본다.

* 아미타불과 서방극락 정토는 서방으로 십 만억 국토를 지난 먼 곳에 존재하는 淨土인가?
<관무량수경>의 去此不遠. 去佛不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열반경>의 立地成佛. 불교의 시간관과 공간의 의미. -- 十方 三世. 法界와 法界一相(眞如)
一念과 十劫. 󰡔무량수경>에 五劫思惟. 󰡔법화경>에 대통지승불의 十劫 坐道場.

* 阿彌陀佛은 어떤 부처인가?

* 臨命終時에 곧바로 안락국토에 卽得往生하고 아미타불을 친견한다는 의미는?
정토교는 死後의 종교, 來世의 안락을 추구하는 종교인가?

* 卽得往生의 의미는?. 見性成佛과 頓悟見性. 정토에 卽得往生함은 還得本心과 같은 의미.

* 一心不亂의 念佛. ( 一念不生 名爲佛 ) 念念相續. 如法行 .

* 念佛 수행이란?. 부처를 대상으로 생각(念)한다는 것인가? 자각하는 지혜작용인가?
<수능엄경>의 耳根圓通과 念佛. 反聞聞自性. <기신론>의 境界之性. 眞如三昧. 心一境性.
<육조단경>에서 眞如를 念하는 것이란?

2. 정토란 무엇인가?

대개 淨土라면 아미타불의 極樂淨土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승경전에는 󰡔유마경>의 佛國淨土, <법화경>의 靈山淨土, 그 밖에 彌勒淨土, 娑婆淨土, 唯心淨土 등 많은 淨土와 불국토를 설한다. 또한 제불보살은 모두 각자 자신이 중생교화를 펼치는 국토가 있음을 여러 경전에서는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중국불교의 역사상 淨土라는 말을 경전의 번역어에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구마라집인데,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경> 불국품에 장자 寶積이 ‘오직 원하옵건데 모든 보살의 淨土의 실천行을 설해 주옵소서’ 라고 간청함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적이여 마땅히 알라. 直心이 바로 보살의 淨土로서,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거짓을 행하지 않는 중생이 태어 난다. 深心이 바로 보살의 淨土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공덕을 갖춘 중생이 태어난다. 菩提心이 바로 보살의 淨土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대승의 중생이 태어난다.
( 寶積 當知,直心是菩薩淨土,菩薩成佛時,不諂衆生,來生其國.深心是菩薩淨土,菩薩成佛時,具足功德衆生,來生其國, 菩提心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大乘衆生,來生其國.) (<大正藏經> 14권 538쪽, 下)

<維摩經>에서는 이 일단에 이어서 보시 지계, 인욕 등 17종류 보살의 淨土를 밝히고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적이여! 만약 보살이 淨土를 체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 마음이 깨끗함에 따라 즉 佛土도 깨끗하다.
(是故 寶積 若菩薩,欲得淨土,當淨其心.隨其心淨,則佛土淨 ) ( <大正藏經> 14권 538쪽, 上 下)

支謙이 번역한 <유마경>에는 佛國淸淨之行 혹은 佛國淸淨 佛國淨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정토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뒤에 부분도 ‘보살의 마음(뜻)이 청정하기 때문에 불국이 청정한 것이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경>의 정토에 대한 일절은 담란(曇鸞)의 <淨土論註> 卷上 (<大正藏經>40권 829쪽. 上)을 비롯하여 돈황본<육조단경> 16단, <돈오요문> 그리고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 등에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정토사상의 핵심이 되고 있다.

또한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제6권, 수량품에도 淨土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항상 영축산 및 다른 곳에 머물러 있으려니, 중생이 劫이 다하여 큰 불에 타버리게 될 때라도 나의 此土는 安穩하여 天人에 충만하리라.----.(略)---. 나의 淨土는 헐리지 않으나, 그러나 중생은 불에 타서(燒盡) 근심 고통 가득함을 여기에서 다 보노라. ( <大正藏>9권 43쪽, 下)

三災에도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정토에 久遠實成의 釋迦佛이 머무르고 있다고 설하는 일단인데, 여기 <법화경>의 정토를 뒤에 석가의 靈山淨土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강조된 정토의 관념으로 널리 이용하고 있다.

이 부분의 원문인 梵文은 Ksetra로서 즉 國土라는 의미의 말 뿐이며, 淨에 상당한 말은 없다. 竺法護가 번역한 <正法華經> 如來現壽品에는 이 부분을 吾此佛土 라고 번역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淨土라는 번역어는 역시 구마라집의 독자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구마라집의 <법화경>제4권 오백제자수기품에 부루나가 부처님으로부터 當來 作佛의 受記를 받고 淨佛國土의 수행을하여 그 결과로 ‘부루나 비구는 공덕이 모두 원만히 성취되어 드디어 이 淨土를 얻게 되었다(富樓那比丘 功德悉成滿,當得斯淨土,賢聖衆甚多.).’ 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부루나존자가 보살행을 닦아 淨土를 성취한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에도 구마라집은 淨土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原語인 梵本에는 ksetravara (훌륭한 國土)이며, 이 말에도 역시 淸淨이란 의미는 없다. 竺法護의 <正法華經>에는 佛國土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淨土란 번역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淨土라는 번역어는 구마라집에 의해서 처음 사용된 말이며, 아마도 그가 불국토를 대칭한 말로서 창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極樂 淨土

淨土의 대표적인 말로 표현한 것이 極樂이다. 극락이란 말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아미타경>에 '그 나라에 중생들에게는 많은 고통이 없으며, 여러 가지의 즐거움(樂)만을 받는다. 그래서 극락이라고 이름 한다.(<대정장>12권 346쪽, 下. 348쪽, 下)' 라고 번역한 것이 최초 인데, 이 말의 원어(산쓰끄릿트)는 Sukhavati (즐거움(樂)이 있는 곳)이다. 이 말을 漢譯 경전에서는 安樂, 極樂, 安養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七佛通戒로 잘 알려진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라는 말도 똑 같이 寂滅 즉 열반의 경지가 生滅의 괴로움(苦)에서 해탈된 즐거움의 세계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淨土三部經에서는 그밖에 康僧鎧(강승개)의 번역으로 전하고 있는 <무량수경>에서는 Sukhavati 라는 말을 安樂과 安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이 경전에도 극락이란 말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 高麗本에 한 번 보이지만, 이것은 뒤에 改寫된 것이라고 한다.

畺良耶舍가 번역한 <관무량수경>은 그 이후에 번역된 것인데, Sukhavati 를 오직 極樂이란 말로만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구마라집의 <아미타경>의 번역어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한 것이다.

天親의 <淨土論>에 ‘世尊我一心, 歸命盡十方, 無碍光如來, 願生安養國.’(<大正藏經>26권 230쪽, 下) 이라고 발원하고 있는 것처럼, 극락을 安養國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淨土의 果報는 二種의 譏嫌의 허물(過)를 여읜다.’(<대정장>26권 232쪽, 上) 라고도 설하고 있다.

1) 서방정토는 가까이 있다.--- 자신의 청정한 마음(불심)이 정토이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은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실 적에 서방 극락에 대하여 설하시어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셨다. 경전에도 분명히 “ 西方이 여기서 멀지 않다.” 라고 설하고 있다. 멀다고 말한 것은 오직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가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단지 근기가 높고 지혜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혜능이 인용한 경전은 <관무량수경의 다음과 같은 일절이다.

이때에 세존은 위제희에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알겠는가? 아미타불은 여기서 멀리 있지 않다(去此不遠)는 사실을. 그대가 마땅히 繫念하여 분명히 저 국토를 관찰하도록 하라. 淨業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하여 널리 여러 가지 비유로서 설하며, 또한 미래세의 일체범부들이 淨業을 닦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三福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부모를 孝養하고, 스승을 奉事하며, 자비로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三歸을 受持하고, 많은 계율을 구족하고, 威儀를 잘 갖추는 것이다. 셋째는 보리심을 일으켜 因果를 깊이 믿으며,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수행자를 勸進하는 것이다. 이 三事를 淨業이라고 한다. (<大正藏>12권 341쪽, 下 )

사실 <아미타경>에서는 ‘여기로부터 서방으로 十萬億 佛土를 지난 곳에 한 세계가 있으니 극락이라고 한다. 그 국토에 부처님이 아미타불이며 지금 현재도 설법하고 있다.’ 라고 하며 그 국토에 중생은 많은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불은 지금 여기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去此不遠)’ 라고 설하며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三事의 淨業을 닦으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三事의 청정한 수행(淨業)이란 사실 삼보에 귀의하고 계율을 지키며, 대승경전에 의거하여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三業淸淨의 수행을 말한다고 하겠다.

<수능엄경>제5권에도 大勢至法王子가 52보살들과 함께 부처님께 말씀을 올리는 내용 중에 無量光여래가 念佛三昧를 가르친 인연을 설하는 가운데 ‘去佛不遠’ 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고 念佛하면 現前이나 當來에 결정코 부처를 친견할 것이다. 부처는 여기를 떠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去佛不遠). 방편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마음이 열림이 마치 향수를 바른 사람(染香人)의 몸에 향기가 배듯 하리니 이것이 香光 莊嚴이라고 한다. 나는 因地에서 念佛心으로 無生法忍을 체득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을 섭수하여 淨土에 돌아가게 합니다. 부처님이 圓通을 물으시니, 나의 생각에는 어느 것을 선택하지 말고 六根을 모두 섭수하여 淨念이 서로 계속하여 삼매를 얻는 것이 第一이 되겠습니다. (<大正藏>19권 128쪽, 上 中 )

이 일단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관무량수경>의 설법을 재편하여 염불 수행으로 무생법인을 체득하고,중생들이 본래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인 淨土에 되돌아가게 하는 법문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念佛三昧의 경지가 다름 아닌 無量光여래의 淨土인 것임을 설한 것이다.

또 <관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저 善友에게 말했다. ‘그대여 만약 부처를 念할 수가 없다면 마땅히 無量壽佛의 명호(명자)을 稱하도록 하라.’ 고. 이와 같이 지심으로 소리 내어 끊어지지 않게 하여 十念을 구족하여 '나무아미타불' 을 稱하도록 하라. 부처의 이름을 稱하기 때문에 念念 가운데 80억겁에 지은 生死의 죄를 없애고 命終時에 金蓮華가 마치 태양과 같이하여 그 사람 앞에 住하는 것을 보고 한 순간의 찰라(一念頃)에 곧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가 있으며, 연꽃 가운데 12大劫채우고 연꽃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
(<大正藏>12권 346 쪽, 上 )

사실 <관무량수경>에는 ‘一念頃 卽得往生’ 이라는 말이 자주 보이며, 또 ‘만약 念佛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곧 人中의 연꼿(분타리화)이다.(若念佛者 當知此人 卽是人中 分陀利華.)’ 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수능엄경>제5권에서는 ‘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이라고 주장하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뜻을 오로지하여 念佛수행하는 인연으로 원력에 따라서 他方의 불국토에 왕생하리라.(以專意 念佛因緣 隨願得生 他方國土).’ 라고 '나무아미타불' 六字 염불 수행으로 정토왕생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육조단경>에서 설하고 있는 선불교의 정토관은 <관무량수경>에서 설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서방 십만억 佛土를 지난 국락 국토의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번뇌 망념을 여읜 청정한 진여 자성의 불성을 깨닫는 頓悟見性의 경지가 다름아닌 타방국토에 왕생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十萬億 佛土 라는 표현은 중생의 사바세계와 부처의 극락세계와의 거리라고 할 수 있으며, 穢土와 淨土와의 다른 차이점을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이지 절대수치상의 거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상의 <法性偈>에서 ‘一念卽是無量劫’ 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불교의 경전에서 표현하고 있는 말이 有相의 공간과 시간 내지 수치상의 거리를 표현만 말이 아닌 것과 같다.

중생의 妄念世界를 穢土라고 하고 부처의 열반 寂靜의 세계를 極樂淨土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도 마찬 가지이며, 穢土와 淨土의 거리는 煩惱妄念과 妄執 그 자체의 길이(시간과 공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번뇌 망념과 탐착하는 妄執과 차별하는 분별심을 떠나 어디서 十萬億이라는 수치상의 거리를 찾아 볼 수가 있겠는가?

중생의 我相, 人相과 穢土와 淨土, 善惡 凡聖 등, 二見의 差別 分別心에 떨어지고, 청정한 眞如 自性을 자각하는 그 當處에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여기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설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이고, 근기가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이룬 지혜있는 사람을 위해서 가까이 있다고 설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근기가 낮은 사람은 미혹한 중생으로, 근기가 높은 사람은 깨달아 지혜를 구족한 부처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육조단경>의 여러 곳에서 ‘미혹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 라고 설하고 있는 말은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며,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도 하나라고 不二法門을 설하고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우리들이 몸과 마음으로 지금 여기서 정토의 세계를 구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토는 서방으로 십 만억 국토를 지나서 찾아가는 有相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我相과 人相이 없어지고 身口意 三業이 청정해진 그 모습이 다름 아닌 정토의 세계에 왕생한 것이라고 단적으로 설하고 있다.

즉 十善을 닦고 번뇌 망념의 邪心과 三毒이 없어진 그대로의 자기가 그대로 眼耳鼻舌身意의 六門이 청정한 法身이 되어 대광명을 발하게 된다고 설한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알고 있는 <열반경>의 諸行無常偈로서 불교의 정신에서 접근해보자.

諸行無常 인연따라 형성된 일체의 모든 존재(법)는 무상한 것,
是生滅法 이것은 번뇌 망념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生滅法이기 때문이다.
生滅滅已 生滅이 완전히 없어지면,
寂滅爲樂 열반적정의 세계는 즐거움의 충만한 곳.

이 게송은 앞에서 인용한 <楞伽經>의 ‘마음에 번뇌 妄心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번뇌 妄心이 없어지면 여러가지 법이 없어진다.(心生種種生,心滅種種滅)’ 이라는 일절과 같이 마음에 일어난 번뇌 망심이 없어진 경지가 열반 적정(寂滅)의 즐거운 깨달음의 세계라고 설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心生’ 은 불법을 알지 못하는 無知와 無明에 반연되어 번뇌 망심이 일어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하며, 그 망념이 소멸(滅)하여 마음의 움직임(妄心)이 멈춘 것을 心滅이라고 한다. 다만 心滅이라고 해도 대승법의 중생심이 滅하여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 妄心의 움직임이 없어진 것을 滅이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그 滅의 참된 의미는 마음의 근원인 청정한 본래심으로 되돌아 가는 것(心源還淨)을 말한다.

따라서 열반 寂靜의 즐거움도 일체의 번뇌 망심이 없어진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며,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의 세계란 자성이 청정한 근원적인 본래의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면 불토가 청정하다.’ 라고 하였고, 또 ‘直心이 바로 보살의 정토’ 라고도 설하고 있는 것이다. 直心은 자성이 청정한 근원적인 본래심을 말하며, 번뇌의 망심이 없어진 그 본래의 청정심(眞如自性)을 말한다.

2) 阿彌陀佛이란?.

돈황본<육조단경>에서 身口意 三業이 淸淨한 경지가 바로 자기가 淨土의 아미타불 法身이 된 것이며,자기의 眼耳鼻舌身意의 六門(身心)에서 그대로 아미타불 법신의 대광명이 발하게 된다고 설한 것은 懶翁和尙이 모든 念佛人에게 내린 법문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변하고 있다.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은 어디에 있는가?
着得心頭切莫忘 마음속에서 아미타불을 잊지 않도록 하라.
念到念窮無念處 妄念이 없어진 無念處의 경지에서,
六門常放紫金光 六根의 문으로 紫金色의 光明이 비추게 되리라.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淨土는 自性淸淨의 경지를 깨닫는 것이며, 自性의 아미타불을 깨닫는 것을 정토에 왕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토라는 어떤 공간적인 세계가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여의고 청정한 본래의 自性으로 되돌아간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수행이란 어원(bhavana)이 의미하듯이 본래 진여자성을 자각하여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還元性의 수행구조이다. 십우도에서 소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騎牛歸家나, <화엄경>에서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말처럼, 내향성의 종교이다. 사막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공간이동의 외향성의 종교와는 구조와 사상이 다르다.

<관무량수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阿彌陀佛 去此不遠’ 이라는 말은 자성의 彌陀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阿彌陀佛은 Amitayus (무한의 生命을 구족함) 와 Amitabha (무한의 光明을 구족함)는 <화엄경>의 비로자나 법신불, <법화경>에서 주장하는 久遠實性의 法身佛과 법신불의 지혜작용인 光明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법신, 보신, 화신의 三身佛은 一佛의 지혜작용을 기능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인데, 특히 법신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진여자성의 지혜작용이며 시절인연과 함께 실행하는 생명활동을 말한다.
아미타불을 반드시 정토경전에서만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 壽命品에 '불자여 마치 이 사바세계 석가모니 佛刹의 一劫은 安樂世界 아미타 佛刹에서는 一日 一夜이고, 안락세계의 一劫이 聖服幢 세계 金剛 佛刹에서는 一日一夜가 된다.(<대정장>9권 589쪽 下)' 라고 설한다.

<화엄경>63권 입법계품의 해탈장자편에도 ‘이와같이 내가 시방으로 열 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여래를 친견하지만, 그 분들이 여기에 오시지도 않고, 내가 거기에 가지도 않는다. 내가 안락세계의 아미타여래를 친견하고자 하면 마음대로 친견 할 수가 있다(我若欲見安樂世界 阿彌陀如來 隨意卽見.)(<대정장>10권 339쪽, 下)’ 라고 설하며 그 밖의 여러 세계의 여래를 친견 할 수 있다고 하며, 이렇게 친견한 부처들은 다 내 마음의 지혜작용에서 이루어진 사실임을 안다 라고 하고 있다.

<법화경> 화성유품에 '서방에 두 부처님이 있으니, 一名 아미타요, 二名 度一切世間苦惱’(<대정장>9권 25쪽 下)' 라고 하고, 약왕보살본사품에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그 설한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이 다 미친 뒤에는 다시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만약 여래께서 멸도한 후 500년에 이르러 어떤 女人이 이 경전의 법문을 듣고 경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한다면, 그 생사 망념의 중생심이 소멸 할 때(於此命終)에 곧 安樂世界의 阿彌陀佛을 대보살들이 둘러싸인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 보배 자리(寶座) 위에 태어나리라.
(<대정장>9권 54쪽 下)

<入楞伽經>제9권에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습기와 법신과 화신불과, 또한 화신불로 짓는 것은 이 모두 아미타불의 국토로부터 나온 것이네. 應化의 설법하신 바와, 報佛의 설법함은 수다라에서 능히 말했나니, 그대는 응당 비밀인 뜻임을 알라.
( 習氣法化佛, 及作於化佛, 是皆一切從 阿彌陀國出, 應化所說法, 及報佛說法, 修多羅廣說, 汝應知密意.)
(<大正藏>16권 568쪽, 下 )

<대승기신론> 수행신심분에 ‘마치 수다라에 설한 것처럼, 만약 사람이 오로지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念하며, 닦은 수행과 善根을 회향하고 그 세계에 태어 날것을 願하면 곧바로 왕생(卽得往生)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기에 결코 물러섬이 없다.’
(當知如來有 勝方便,攝護信心.謂以專意念佛因緣.隨願得生他方佛土,常見於佛.永離惡道. 如修多羅說,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 阿彌陀佛. 所修善根廻向, 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대정장>32권 583 쪽 上)

40권본 <화엄경>제40권 入不可思議解脫境界 普賢行品에도 보현의 行願을 하는 사람이 목숨이 끝날 때 모든 감각기관은 다 흩어지고 무너지며, 모든 친족이 모두 떠나버리고, 모든 위세는 모두 사라져 없어지고, 높은 지위나 궁전의 안팎에 있는 모든 코끼리와 말의 수레, 진귀한 보물 등은 다시 따라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 원대한 원왕(願王)만은 서로 떨어지지 않아 어느 때나 그의 앞길을 이끌어 한 찰나 가운데 곧 극락세계에 왕생한다.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도달한 즉 곧 阿彌陀佛과 문수사리보살과 보현보살, 관자재보살, 미륵보살 등 친견하게 되는데, 여러 보살들은 단정하고 위엄 있으며 공덕을 갖춘 모습으로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 사람은 스스로 연꽃 가운데 태어남을 보게 되고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된다고 설한다.

즉 보현보살은 선재동자에게 아미타불을 칭송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권하면서 구경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긴요한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가르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도 西方에 왕생하여 이미 소원을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하면서 또 다음과 같이 거듭 강조하고 있다.

원컨대 번뇌 망념의 생사심이 소멸할 때에 일체의 모든 생사윤회의 업장이 없어지고, 아미타불을 면전에서 친견하며, 곧바로 안락세계에 왕생하기 바랍니다. 내 이미 저 나라에 왕생 하였으니, 지금 눈앞에서 이 大願을 성취하고 , 일체 남김없이 모두 원만히 하여, 일체 중생세계를 이롭고 즐겁게 하렵니다. 저 부처의 會衆은 모두 청정 하시니, 내가 그 때 수승한 연꽃위에 태어나 무량광여래를 친견하면, 지금 눈앞에서 깨달음의 수기를 나에게 주시리. 저 부처의 수기를 받고는 무수히 많은 백구지의 화신을 나투고, 지혜의 힘 광대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하며, 일체 중생세계를 널리 이익되게 하기를. --(略)-- 나는 이러한 보현의 수승한 수행으로 가없이 좋은 복을 모두 회향하오니, 두루 원하옵건데 고해에 빠진 모든 중생들이 어서 빨리 無量光의 佛刹에 왕생하기를 바랍니다.
(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我旣往生彼國已, 現前成就此大願, 一切圓滿盡無餘, 利樂一切衆生界. 彼佛衆會咸淸淨, 我時於勝蓮花生, 親覩如來無量光, 現前授我菩提記. 蒙彼如來授記已, 化身無數百俱胝, 智力廣大遍十方, 菩提一切衆生界.--(略)-- 我此普賢殊勝行, 無邊勝福皆回向, 普願沈溺諸衆生, 速往無量光佛刹.) (<大正藏>10권 848쪽, 上 )

이 일단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미타불을 면전에서 친견하고 安樂刹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願.
2) 안락국토에 왕생하여 모든 소원을 이룬 뒤에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願.
3) 연꽃 위에 태어나 無量光佛을 친견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授記 받기를 바라는 願.
4) 수기를 받고 난 뒤 많은 化身으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誓願이다.

보현보살이 자신의 수행을 고백하며 ‘원하옵건데 내가 번뇌 망념의 生死心이 소멸할 때에 일체의 모든 생사윤회의 장애가 모두 없어지고, 면전에서 저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며, 곧바로 안락국토에 왕생하기를 바랍니다(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라고 아미타불 報身의 경계를 설하면서 경전을 끝맺음 하고 있다.

40권본 <화엄경>도 구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보현보살이 아미타불의 경지를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름아닌 극락정토에 왕생한 사실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정토경전의 입장에서 본다면, <大無量壽經>에 ‘皆遵普賢大士之德, 具諸菩薩無量行願’(<대정장>12권 265쪽 下) 라고 설하고, 또 ‘諸根智慧廣普寂定, 深入菩薩法藏, 得佛華嚴三昧, 宣暢演說, 一切經典.(<대정장> 12권 266쪽 中)’ 이라고도 설한다. <화엄경>은 석존의 아미타 佛刹에 출현하는 보현이 還相한 大士(화신)임을 표시한 것이며, 스스로 彌陀의 果德을 만족하는 것은 동시에 정토왕생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즉 보현보살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으로 普賢行願이 원만히 성취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아미타불은 <화엄경>에서 주장하는 노사나불과 똑같은 입장의 法身佛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은 똑같은 一體로서 法身佛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또한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모든 모양(相)은 허망한 것, 만약 모든 모양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친견하리라' 고 한 말이나 '만약에 부처의 모습(色)으로 여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邪道)을 추구하는 것이니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 는 如來도 각자의 법신을 말한다. <유마경> 제자품에도 ‘如來身은 法身’ 이라고 설한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自性의 彌陀는 自性의 法身佛인 여래를 체득(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선종의 일관된 주장이다.

나옹화상도 다음과 같이 自性彌陀를 읊고 있다.

自性彌陀何處在, 자성의 아미타불 어디에 있는가?
時時念念不須忘, 언제나 一念으로 念하여 잊지 말지니,
驀然一日如忘憶. 갑자기 어느 날 기억까지 잊으면,
物物頭頭不覆藏. 일체의 모든 곳에 아미타불 출현하리.

임제의 유명한 설법인 ‘隨處作主 立處皆眞’ 의 경지를 생각나게 하는 게송이다. 아미타불을 念하는 마음이 자신이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며, 염불하는 자신과 염불의 대상인 아미타불까지도 완전히 잊어버린 無心의 경지가 될 때에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곳에 그대로 아미타불이 현전하게 된다는 노래이다.

나옹선사의 게송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아미타불은 바로 자기의 法身인 것이다. 부대사도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하는가?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그 목소리가 부처인 것이다(欲知佛何在 只這語聲是)' 라고 설하고 있다. 부처는 진여(여래)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이기 때문에 항상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생활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사는 시절인연의 현장에서 실행하는 생명활동이라고 하겠다.

3) 臨命終時와 卽得往生.

<아미타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사리불이여, 적은 선근 인연의 공덕으로는 저 극락국토에 태어 날 수가 없다. 사리불이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의 설법을 듣고 그 명호를 잘 수지하여 혹은 一日, 혹은 二日, 혹은 三日, 혹은 四日, 혹은 五日, 혹은 六日, 혹은 七日 一心으로 흩어짐이 없이 하면, 그 사람은 생사윤회하는 중생심의 목숨이 끊어 질 때 아미타불과 많은 성자가 그의 앞에 현전하게 되리라. 이 사람은 생사윤회하는 중생심의 목숨이 끝날 때에 마음이 전도됨이 없이 곧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왕생 할 수가 있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러한 이익 됨을 보고 이렇게 설한다. 만약 중생이 있어 이러한 설법의 가르침을 듣고자 한다면 마땅히 저 국토에 왕생 할 것을 발원해야 한다.
( 舍利弗,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 得生彼國. 舍利弗, 若有 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其人 臨命終時, 阿彌陀佛與諸聖衆,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顚倒, 卽得往生, 阿彌陀佛 極樂國土. 舍利弗, 我見是利故說此言, 若有衆生, 聞是說者, 應當發願 生彼國土.)
(<대정장> 12권 347쪽, 中 )

<무량수경>상권 19번째 臨終現前願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때 시방의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至心으로 나의 나라에 태어 날 것을 발원하며, 그들이 생사윤회의 목숨이 끊어질 때, 내가 많은 대중들과 같이 그의 現前에 마중 할 수 없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設我得佛, 十方衆生, 發菩提心, 修諸功德, 至心發願, 欲生我國, 臨壽命時, 假令不與大衆圍繞 現其人前, 不取正覺.) (<대정장>12권 268쪽, 上)

<무량수경>하권에도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 가운데 상배(上輩)라고 하는 것은 집을 버리고 욕심을 포기하여 사문이 되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오로지 無量壽佛인 阿彌陀佛만을 念하여 모든 공덕을 쌓아서 저 나라(안락국)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중생은 번뇌 망념의 생명이 끝날 때(臨壽終時)에 무량수불과 많은 대중이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 즉시 저 부처를 따라서 그 나라에 왕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七寶의 蓮華 가운데 자연히 化生하여 불퇴전의 지위에 머물며, 지혜는 용맹스럽고 신통은 자재 롭다. 그래서 아난이여, 만약 중생이 今世에 무량수불을 친견하고자 하면 응당히 위가 없는 보리심을 일으켜 공덕을 수행하여 저 국토에 태어 날 것을 발원해야 한다.
(<대정장>12권 272쪽, 中)

<관무량수경>과 정토경전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설법을 많이 전하고 있는데,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만약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그 설한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중생심의) 목숨이 다 미친 뒤에는 다시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만약 여래께서 멸도한 후 500년에 이르러 어떤 女人이 이 경전의 법문을 듣고 경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한다면, 그 (중생심의) 목숨이 마친 뒤(於此命終)에 곧 安樂世界의 阿彌陀佛을 대보살들이 둘러싸인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 보배 자리(寶座) 위에 태어나리라.
(<대정장>9권 54쪽 下)

臨命終時라는 말을 인간의 육체적인 목숨이 끝날 때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는 불교사상과 불법대의의 차원에서 해석을 달리 한다. 만약 육체적인 목숨이라고 한다면 정토교의 대승불교는 불교의 사상과 정신과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되고 만다.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비불교가 되며, 현세의 종교가 아닌 來世의 종교가 되고 만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출세간적인 종교인 불교를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여 시간적인 추이와 공간적인 정토를 추구하는 목적지향의 차별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는 세속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게 된다.

즉 육체는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아트만)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불멸의 우빠니사드와 같은 주장이 되고, 불교의 無我說과 我空 法空을 강조하는 불법의 대의는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말 것이다.

불국정토에 往生한다는 말도 이와 똑같은 시각에서 이해하고 해석되어야 할 문제이다.

40권본 <화엄경>에 보현보살이 ‘원하옵건데 내가 번뇌 망념의 生死心이 소멸할 때에 일체의 모든 생사윤회의 장애가 모두 없어지고, 면전에서 저 아미타 부처을 친견하며, 곧바로 안락국토에 왕생하기를 바랍니다(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대정장> 10권 848쪽 上) 라고 읊고 있는 일단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 설한 命終時는 육체적인 목숨이 끝날 때를 말한 것이 아니라 번뇌 망념으로 생사윤회하는 중생심, 중생의 생멸심이 소멸한 때(時)를 말한 것이다. <화엄경>에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주장과 같이, 초발심이 곧 정각이라는 不二법문의 입장처럼, 중생의 生死心이 소멸 할 때(時), 본래의 불심을 回復하게 되며, 동시에 일체의 번뇌 망념으로 생사윤회하는 業障이 소멸하고 불심의 지혜작용이 실행되며, 동시에 법신불의 지혜작용인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되며, 동시에 곧바로 중생심의 생사윤회를 벗어나 안락국인 정토(佛心)에 왕생한다고 하고 있다.

<유마경>에서 ‘ 直心淨土, 直心道場’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정토나 청정수월도량을 有相의 존재하는 공간으로 간주한다면 대승불교의 공사상, 반야사상과 위배되고 불법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외도의 가르침이 되고 만다.

아미타불은 法身佛의 지혜작용이며, 정토는 청정한 진여 자성의 佛心(直心)을 말한다.

정토에 왕생한다는 의미도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원력으로 본래의 진여 자성인 불심으로 되돌아가는 回心을 말한다. 불교 수행(bhavana)의 구조체계는 본래(근원)의 眞如로 되돌아가는 還元性이며 內向性의 종교이기 때문에 선에서 주장하는 자각적인 頓悟見性으로 歸家安穩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念佛往生을 강조하는 정토교는 一念의 念佛이 곧바로 즉시에 淨土往生이 되기 때문이다. 一心不亂의 염불은 곧 진여 법신불의 지혜작용이며, 아미타불을 親見하는 일과 함께 동시에 극락정토에 往生하는 것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년에 이르러 어떤 女人이 이 경전(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그 설한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이 다 미친 뒤에는 다시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만약 여래께서 멸도한 후 500년에 이르러 어떤 女人이 이 경전의 법문을 듣고 경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한다면, 그 목숨이 마친 뒤(於此命終)에 곧 安樂世界의 阿彌陀佛을 대보살들이 둘러싸인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 보배 자리(寶座) 위에 태어나리라.
(若如來滅後 後五百歲中, 若有女人, 聞是經典, 如說修行, 於此命終, 卽往安樂世界, 阿彌陀佛, 大菩薩衆, 圍繞住所, 生蓮華中, 寶座之上.) (<대정장>9권 54쪽 下)

<법화경>에도 번뇌 망념의 목숨이 끊어질 때 안락세계의 연꽃 보좌위에 곧바로 왕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정토 왕생을 주장하는 경전이 아닌데, 왜 이러한 주장이 있을까? <법화경>이 편집되고 유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효과적인 방법을 궁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금강경>과 같이 <법화경>도 경전을 書寫 受持, 讀誦하고 一四句偈의 법문을 남에게 설한 그 공덕이 지대하다는 주장처럼, 功德經으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안락국토에 왕생한다는 주장은 정토경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불교계에 정토왕생의 사상(신앙)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왜 女人에게만 한정하여 이런 주장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여인은 梵天王, 帝釋, 魔王, 轉輪聖王, 佛身 등이 될 수 없다는 五障身이기에 성불 할 수 없다고 설하면서 變成男子로 성불을 주장하는 <법화경>의 입장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극락정토에는 여인이 없다고 설한 점과 <무량수경> 제35願과 世親의 <무량수경론> 등을 보면 명백하다. <법화경>에서 오직 女人에 대하여 특히 안락정토에 왕생 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安樂國에는 여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變成男子로 하여 안락국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여인으로서는 절실하고 간절한 願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법화경> 수지 공덕에 의한 정토 왕생으로 여성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증 자료가 경전에 ‘만약 여인이 있어 이 약왕보살본사품의 설법을 듣고 능히 受持한다면 이 女身의 인연을 모두 마친 후에 다시 여자의 몸을 받지 않으리라.’ 라고 설하고 있다. 즉 변성남자의 의미로 女人成佛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안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주장이다.

4) 정토왕생의 의미.

<무량수경>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했다. ‘ 만약중생이 저 나라(안락국)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모두 다 정정취(正定聚)에 머물게 된다. 왜냐하면 저 나라에는 사정취(邪定聚)나 부정취(不定聚)는 없기 때문이다. 시방의 항하사 제불 여래가 모두 함께 무량수불의 위신력과 공덕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신다. 여러 중생들이 그 명호를 듣고 신심으로 환희하며 一念과 至心으로 회향하면 저 나라에 태어 날 것을 원하면 곧바로 왕생하여 불퇴전의 지위에 머문다. 다만 五逆罪를 범한 자와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한다.

(佛告 阿難, 其有衆生, 生彼國者, 皆悉住於 正定之聚. 所以者何 彼佛國中 無諸邪聚 及不定聚. 十方恒沙 諸佛如來 皆共讚歎 無量壽佛 威神功德, 不可思議. 諸有衆生, 聞其名號 信心歡喜 乃至一念, 至心回向, 願生彼國 卽得往生, 住不退轉, 有除五逆, 誹謗正法.) (<대정장>12권 272쪽 中 )

부처님이 아난에게 설한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정토에 왕생하는 자의 자격은 성불이 결정된 사람인 正定聚만이 가능하고 邪定聚나 不定聚는 불가능하다는 점, 둘째는 시방 항하사와 같이 많은 제불여래가 무량수불의 위신력과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고 있으며, 세 번째는 일체의 모든 중생이 그 명호를 들으면 신심과 환희로 원력을 세우면 저 정토에 곧바로 왕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무량수경>제11원인 必至滅度願에 ‘모든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물러서지 않은 경지에 주하게 하며, 반드시 열반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원(設我得佛 國中人天 不住定聚 必至滅度者 不取正覺)이 완성한 것을 설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제17원 諸佛稱名願에 시방제불로 하여금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찬하게 하고자 하는 원이 완성된 것을 설하며, 세 번째는 제18원 至心信樂願에 시방의 중생이 마음에서 믿고 기쁘게 열 번정도 염불을 칭하도록 하는 원의 완성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本願을 실현 한 것을 기록하고 있기에 이 일단을 ‘本願 成就의 글(文)’ 이라고 한다.

正定聚는 不退轉과 같은 지위(十地)와 같은 의미인데, 어떤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정진하여 향상일로의 길에서 구법의 정신과 깨달음의 지혜작용이 상실하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不定聚는 원력을 세우고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수행생활을 하면 향상 될 수 있지만 신심이 부족하고 게으름에 떨어져 본원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邪定聚는 번뇌 망념에 떨어진 중생으로 자아의 마음을 의존하여 여러 가지 선근 공덕을 쌓고 구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정토에는 부정취와 사정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정토교의 念佛門에서 설한 가장 기본적인 정토사상이다. 정토교에서 주장하는 往生이란 말은 불법의 근본정신과 사상에서 볼 때,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見性成佛이라는 말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往生과 成佛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불법의 대의에서 볼 때 결국 같은 것이지만, 불법 수행을 自力門과 他力門으로 나누고 있는데, 선수행과 같이 自力門은 成佛이라고 하고, 정토교와 같은 他力門 에서는 往生이라고 설한 것이다.

왜 정토교에서는 往生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 대승의 불법은 똑같이 불법을 깨달아 成佛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부처란 최상의 正法을 깨달아 正覺을 이룬 者로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여 중생구제의 보살행으로 실현하는 자를 말한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최상의 正法과 正覺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체의 모든 법(존재)은 空하며 無自性이다. 정각을 이룬다고 함은 불이법문을 깨달아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을 말한다.

<유마경>에서 入不二法門을 강조하고 있는데, 不二의 경지를 깨닫고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을 入涅槃이라고 하면 成佛하는 것이다.

즉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의 대상인 二元에의 집착을 초월하여 不二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차별심과 분별심이 작용하는 二元적인 思考에 빠져 있는 한 중생은 생사윤회의 고통은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成佛을 滅度라고도 하는데, 滅은 상대적인 차별심과 고정관념에 집착하는 중생의 생사심을 소멸하는 空의 실천이며, 度는 生死妄念의 苦海를 건넌다는 의미이다. 즉 不二의 경지인 열반을 체득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서는 ‘不退의 地位를 얻는다’ 고 설하고, ‘無生法忍을 얻었다’ 고 하며, 또 ‘正定聚에 들었다’ 고도 주장한다. 不退란 성불 할 수 있는 地位(十地)를 확정하여 다시는 물러섬(退轉)이 없는 것을 말하며, 無生法忍이란 不生不滅의 法性을 忍知(認知)하여 결정적으로 安住하는 것이고, 正定聚란 올바른 成佛이 決定된 자들을 지칭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 설하는 成佛이나 入不二法門, 入涅槃, 滅度, 往生이라는 말은 모두 똑같이 불심을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법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언어라고 하겠다. 불법을 깨달아 체득한 경지를 표현한 悟, 覺, 證도 解脫, 見性, 見佛, 念佛이라는 다른 말로도 표현하는 것처럼 모두 정각을 이루어 成佛한 것을 말한다.

<유마경> 향적불품에도 ‘사바세계의 보살이 어느 정도 수행을 완성하면 行에 하자가 없이 淨土에 태어 날 수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유마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사바세계에서 보살이 여덟 가지 일을 완성하게 되면 行에 하자(瘡疣)가 없이 淨土에 태어(生)날 수가 있습니다. 그 것은 중생에게 혜택을 주지만 그 보답을 바라지 않고(饒益衆生不望報), 모든 중생을 대신하여 모든 고뇌를 받아서 지은 수행의 공덕을 낱낱이 남에게 베풀며, 중생과 마음을 같이하고, 겸허하여 장애가 없이하며, 많은 보살들을 부처님을 대하듯 하고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새로운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도 의심하지 않으며, (소승의 가르침을 봉행하는) 성문들과 다투지 않으며, 남의 공양 받는 것을 시기하지 않고 자신이 얻은 이익을 뽐내지도 않으면, 자기의 마음을 억제하여 항상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남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으며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온갖 공덕을 구합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입니다. (<대정장>14권 553쪽, 上)

<유마경>에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실천덕목을 설하고 있는 것인데, 태어난다는 生과 往生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 정각을 이루는 것,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토문에서 往生이란 말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往生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청정한 국토(安樂國, 極樂淨土)에 가서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정토는 極樂, 安養國(土), 혹은 無量光明土, 蓮華藏世界라고도 말한다. 중생의 사바세계는 穢土로서 번뇌 망념에 오염되어 혼탁한 세계이기에 무명과 번뇌 망념의 구름에 뒤덮혀서 부처의 지혜광명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白蓮華와 같이 희고 깨끗하고 청정한 정토에 가서 그 곳에 다시 태어나 光明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즉 此土成佛이 아니라 彼土往生을 주장하는 것이다. 범부의 몸으로는 이 사바세계에 머무는 한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往生이 없이는 참된 구제는 없다. 이러한 사고에서 주장한 것이 정토교의 가르침이며, ‘오염되어 더러운 국토를 벗어나 깨끗한 정토을 기쁘게 흠구한다(厭離穢土, 欣求淨土)’ 라는 정토교의 사상이다.

더러운 국토를 벗어나 깨끗한 정토를 구한다는 것은 정법수행의 기본인 淨業인 것이다.

사바세계에서 성불하는 此土成佛은 聖道의 길에 살면서 얻은 선택 받은 자들의 가르침이다. 범부의 성불은 정토에 왕생 없이는 이루어 질 수가 없다. 그래서 彼土往生이라고 한다.

원래 정토교의 성립은 <아미타경>에 중생의 세계를 五濁惡世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의 세계인 穢土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穢土觀이야 말로 淨土觀을 항상 불러일으키고 각성시켜주는 그 契機인 것이다. <좌선의>에서 말하는 念起卽覺 覺之卽失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겠다.

혼탁함(濁)과 청정함(淨)은 상대하는 것이지만, 또 서로를 여의고서는 홀로 그 자체의 존재의미는 없다. 지옥과 극락, 선과 악, 범부와 성자도 마찬가지로 빛과 그림자(光影)가 서로 같이 상반된 것은 필연적인 요구인 것이다. 그래서 穢土의 厭離가 곧 그대로 淨土의 欣求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往生觀을 수반하지 않는 淨土門은 있을 수가 없다. 정토교의 他力道가 왜 淨土往生을 願하는가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번뇌 망념에 오염된 더러움(穢汚)과 五濁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自覺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경전에 臨命終時(생명이 끝나려고 할 때)에 卽得往生이란 표현으로 往生이란 말이 육체적인 죽음(死)을 의미하는 말과 같이 사용하고 있는데, 穢土를 떠나 淨土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의미 때문에 죽음과 往生은 똑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주장에서 臨終來迎의 사상을 주장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가 된 것이다. 즉 臨終과 來迎과 往生이란 의미가 서로 결합된 개념인 것이다.

4. 정토왕생의 염불수행.

<楞伽師資記> 도신장에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普賢觀經>에 말했다. ‘일체 業障의 바다는 모두 妄想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참회하려는 사람은 단정히 앉아서 (제법의 )實相을 念하도록 하라.’라고. 이것이 바로 第一의 참회라고 하며, 三毒의 마음, 攀緣하는 마음, 覺觀의 마음을 모두 제거 할 수 있다.부처를 念하여 心心相續한다면 홀연히 맑고 적적하여 또다시 인연에 반연(所緣)하는 念이 없다.

<대품경>에 말했다. ‘念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 바로 부처를 念하는 것이라고 한다.(無所念者,是名念佛)’ 라고. 무엇이 念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즉 부처를 念하는 마음을 念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여의고 달리 부처가 있을 수가 없고, 부처를 여의고 달리 마음이 있을 수가 없다. 부처를 念하는 것은 곧 바로 마음을 念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곧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형상이 없고, 부처도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도리를 안다면 곧 이것이 安心이며 항상 부처를 기억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다시 추구하는 마음도 없다. 잘 보라, 이러한 마음이 여래의 진실 법성의 몸인 것이며, 또한 正法이라고 하며, 또한 불성이라고 하며, 또한 제법의 實性, 實際라고 하며, 또한 淨土라고 하며, 또한 보리, 金剛三昧, 本覺 등이라고 하며, 또한 涅槃界, 般若 등이라고 한다. (<大正藏> 85권 1287쪽 上 )

여기서 인용한 <보현관경>은 <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을 말하며 <無量義經>과 <법화경>과 함께 法華三經으로 불리며 천태종에서 중시하고 있는 경이다. 경전에는 명상하여 보현보살이 여섯 개의 象牙를 가진 白象을 타고 많은 보살과 함께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관찰하고 순수한 귀의의 마음을 가지고 참회할 것을 설하고 있는 참회죄업의 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大品經>은 <마하반야바라밀경> 제23권 三次品의 구절인데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자대비를 부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체의 諸法의 自性은 없기(無)때문이며, 만약 법의 자성이 없는 이것이 非法이다. 念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 바로 念佛이다. ---(略)-----
만약 法에 自性이 없다면 이것이 非法인 것이며 念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 되이기에 이것이 바로 念佛인것이다. (不應以大慈大悲念佛,何以故,是諸法自性無.若法自性無是爲非法,無所念是爲念佛.---(略)--- 若法自性無 是爲非法無所念.是爲念佛. ) (<大正藏>8권 385쪽, 下 )

즉 도신이 주장하는 念佛은 자성의 법신을 자각하여 깨닫는 지혜작용(念佛)이며, 念佛의 구체적인 실천사상을 <반야경>을 토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염불하는 마음과 염불하는 대상까지 완전히 없어진 경지를 도신은 진실된 法性의 法身으로 또한 淨土라고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楞伽師資記> 도신장에 도신의 염불은 정토종에서 주장하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염불이 아닌 것임을 다음의 일단에서도 확인 할 수가 있다.

또 질문했다. ‘시간을 선택하여 수행함에 어떻게 觀行해야 합니까?’ 도신이 대답했다. ‘ 곧바로 반드시 마음에 내맡껴 任運토록 하라.’ 또 질문했다. ‘서방을 향할 필요가 있습니까?’ 도신이 대답했다. ‘만약 마음의 본래가 不生不滅로서 구경에 청정함을 안다면 곧 이것이 청정한 佛國土인 것인데, 또다시 西方을 향할 필요가 있는가? <화엄경>에 “ 무량겁이 一念이며, 一念이 무량겁이다.” 라고 설한다. 一方이 無量方이며 무량방이 一方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부처는 鈍根의 중생을 위하여 西方을 향하도록 (방편으로) 설한 것이지 영리한 사람들을 위해서 설한 것이 아니다. (<大正藏>85권 1287 쪽 下 )

도신은 당시 정토종에서 주장하고 있는 서방정토에 왕생하려고 念佛하는 발상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화엄경>의 원융적인 세계를 대치시켜서 서방정토의 사상은 둔한 근기의 중생을 위해서 설한 방편법문이며, 영리한 사람에 대한 설법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도신은 당시 정토종에서 주장하는 서방 정토의 왕생을 위한 念佛을 상당히 차원이 낮은 鈍根人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一念이 곧 청정한 불국토인데 또다시 서방정토를 구해서 무엇하는가? 라고 힐문하고 있다. 의상의 <법성게>에서 설하고 있는 ‘一念卽是無量劫’ 이나 ‘一微塵中含十方’ 이라는 말은 이러한 경지를 말하고 있다.

<육조단경>과 조사선에서 주장하는 唯心淨土의 사상도 도신의 일행삼매 念佛의 실천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楞伽師資記> 구나발타라전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大法師(구나발타라)가 말했다. <楞伽經>에서 “어떻게 그 念을 청정하게 할 것인가?” 라고 설한 것은 妄想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즉 번뇌 망념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며, 부처를 念하여 지극한 힘을 더하는 것이며, 한 생각 한 생각(念念)에 연결하여 주력하며 끊어짐이 없도록 하여, 寂然히 無念의 경지에서 본래 텅비어 청정함을 깨닫는 것이다.
(大法師云,楞伽經說,云何淨其念,遣勿令妄想,勿令漏念,念佛極着力,念念連注不斷.寂然無念,證本空淨也.) (<大正藏> 85권 1284쪽, 下 )

선종에서 주장하는 念佛은 진여삼매의 자각적인 지혜작용(念)으로 부처를 이루는 깨달음의 수행생활이다. 즉 번뇌 망념이 본래 없고, 청정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실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楞伽師資記> 도신장에는 <무량수경>의 다음과 같은 일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무량수경>에 말하기를 ‘ 제불의 法身이 일체중생의 心想에 드니,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라고 했다. 따라서 부처는 곧 이 마음이며, 마음밖에 또다시 달리 부처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 無量壽經云,諸佛法身入一切衆生心想,是心是佛,是心作佛.當知佛卽是心,心外更無別佛也.) (<大正藏>85권 1288 쪽 上 )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무량수경>은 <관무량수경>을 말하는데, 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음은 마땅히 부처님을 念想해야 한다. 왜냐하면 諸佛, 如來는 바로 法界身으로서 일체중생의 心想中에 들기 때문에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念想할 때에 이 마음은 즉 부처님의 三十二相 八十의 좋은 상호를 따른다면 이 마음은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며, 제불의 正遍知海는 心想에서 생긴다.
(次當想佛,所以者何,諸佛如來,是法界身,遍入一切衆生心想中,是故汝等心想佛時,是心卽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是心作佛,是心是佛.諸佛正遍知海, 從心想生.) (<大正藏>12권 343쪽, 上 )

특히 ‘是心作佛 是心是佛’ 이란 주장은 뒤에 선종에서 신회나 마조가 주장하는 卽心是佛의 근원이 되는 말이다. 중생심은 원래 법신의 불성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觀想이 성취되면 법신이 개현되어 사람들은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是心作佛’인 것이다. 따라서 중생심 밖에 달리 부처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是心是佛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도신도 ‘부처는 곧 이 마음(佛卽是心)’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관무량수경>의 觀法을 自性淸淨 佛性觀으로 해석하여 선정의 수행으로 자성의 부처를 깨닫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수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觀心論(破相論)>에도 염불 수행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질문,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至心으로 念佛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했습니다. 이 염불문의 수행으로 成佛된다고 했는데, 선문에서는 성불하기 위해서는 어째서 觀心의 수행을 빌려서 해탈을 구하도록 합니까?

대답. 念佛하는 사람은 반드시 正念으로 해야 한다. 了義는 바른 것이고, 不了義는 삿된 것이다. 正念으로 염불하면 서방에 왕생하지만, 邪念으로 어찌 피안에 도달하겠는가?

부처(佛)란 깨달음(覺)이니 身心을 깨닫고(覺察) 惡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念이란 기억함이니 계행을 기억해 지녀서 잊지 않고 精進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正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念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통발에 의지하여 고기를 잡지만, 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고, 말에 의지하여 뜻을 얻지만,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

이미 念佛이라고 稱한다면 반드시 念佛 그 자체의 道를 실천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진실되지 않고 입으로 헛되이 名號만 외운다면, 三毒이 안으로 치성하고, 我相과 人相의 차별심이 마음에 가득차니, 無明心으로 밖을 향하여 부처를 구해도 한갖 헛수고가 될 뿐 무슨 공덕이 되리요!

또 외우는 것(誦)과 念하는 것은 이치와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입으로 외우는 것이 誦이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깨달음을 실천(覺行)하는 門이요, 외우는 것은 입에 있는 것이므로 音聲의 모양(相)이니 밖에 집착하여 이치를 구하니 옳치 못한 것이다.
과거의 여러 성인들이 念佛을 수행한 것은 外說이 아니라, 오직 內心으로 실천한 것이다. 마음은 많은 善行의 근원이며, 마음은 많은 德行의 주체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眞心에서 생기고, 삼계의 윤회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마음은 出世의 문턱이요, 마음은 해탈의 나루터이다. 문턱을 아는 사람이 어찌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고, 나루터를 아는 사람이 어찌 도달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大正藏> 48권 369 쪽. 上 )

돈황본 <관심론>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보이지만 내용은 같다.

당시 정토종에서 염불수행으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대하여 신수는 이러한 정토종의 활발한 활동에 주목하면서 선불교의 정신에서 비판하고 있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念佛을 念과 佛로 나누어서 念佛의 참된 의미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신수는 ‘부처(佛)란 깨달음(覺)이니 身心을 깨닫(覺察)고, 惡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念이란 기억함이니 계행을 기억해 지녀서 잊지않고 精進하는 것이다.( 佛者覺也,所爲覺察身心.勿令起惡也.念者憶也,所爲憶持戒行,不忘精進.)’ 라고 念佛을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身心을 깨닫고 惡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이란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몸과 마음을 말한다. 惡이 일어나지 않는 말은 번뇌 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요 이에 따른 身口意 三業이 청정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말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念佛은 부처라는 환상적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명호를 稱하는 자각적인 수행으로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환하며, 불심의 지혜로운 삶으로 身口意 三業을 청정하게 하여 十善行을 이루는 수행이다. 계정혜 삼학으로 요약되는 불법의 대의와 실천정신을 철저히 체득하여 자각적인 지혜작용을 지금 여기 자신의 구체적인 시절인연의 삶 속에서 자각적으로 실천하는 수행 생활이다.
이러한 정토사상과 <대승기신론>의 진여삼매를 이루는 如法수행을 토대로 중국에서 만든 <수능엄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을 주장하게 된 것이며, 耳根圓通의 깨달음을 체득하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反聞聞自性을 제시하고 있다. <수능엄경>의 핵심사상은 진여삼매로서 耳根圓通을 이루는 如法修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정토수행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조사선, 간화선 수행체계의 근본이기도 하다.

5. 맺는 말

이상 淨土와 往生, 아미타불, 염불수행 등에 대하여 몇 가지 자료를 불법사상의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정토관은 ‘唯心淨土 自性彌陀’의 입장에서 염불수행과 정토왕생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道信이 <관무량수경>에서 주장하는 ‘是心是佛’을 一行三昧의 선수행을 제시하여 각자 스스로 부처를 이루는 깨달음을 구현하도록 하고 있으며, 돈황본<육조단경>에서는 <유마경> 불국품의 ‘若菩薩 欲得淨土 當淨其心,隨其心淨 則佛土淨’ 이란 일절을 인용하여 心地法門로 전개하면서 선불교의 사상적인 기반을 확립하고 있다.

또한 <능가경>과 <기신론>에 ‘妄心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妄心이 없어지면 여러 가지 법이 없어진다(心生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 라는 일절에 의거하여 無念의 실천사상을 확립하여 心法의 불법을 정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선문헌에서 ‘自心是佛 心外無佛’ 이나, 혹은 <돈오요문>에서 ‘心外求佛 名爲外道’ 라는 주장은 佛法이 心法인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미혹한 중생심을 전환하여 깨달음의 佛心으로 만드는 頓悟見性說이 수행토대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정토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서방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과연 有相의 국토일까?

범부의 중생심이 此土의 사바세계라면 성스러운 불성을 깨달은 佛心이 다름아닌 열반의 경지인 彼土라는 極樂淨土이다. 따라서 此土와 淨土의 거리는 수치상의 거리가 아니라 중생심의 미혹으로 계산하는 번뇌 망념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阿彌陀佛 去此不遠’ 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조단경>등에서도 ‘自性彌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불교는 <箭喩經>에서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비유로 설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종교이며, 임제의 설법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서 자기를 깨달음으로 지혜롭게 사는 생활종교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막에서 발생한 유태교나 기독교처럼 來世의 종교가 아닌 것이다.

또한 絶對他者인 神에 의해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니라 번뇌의 生死 妄念을 자각하여 무명의 업장을 벗어나 自力의 지혜로 자기 스스로를 제도하는 자각의 종교인 것이다.

또한 불교 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우빠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실체인 靈魂(Atman )의 존재를 부정하는 無我說인 것이다. 육체가 죽은 뒤에 영혼의 윤회나 영혼의 왕생이란 불교 사상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비불교적인 주장인 것이다. 우선 육체와 영혼의 존재를 분리하는 二元的인 사고는 차별 분별심에 떨어진 斷見 常見이다.

따라서 정토종에서 주장하는 염불수행과 阿彌陀佛을 친견하는 주장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주장은 현실적인 종교인 불교의 입장에서, 지금 여기서 자기 본성을 깨닫는 자각종교의 차원에서 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唯心淨土, 自性彌陀’는 불교 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정법의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佛祖의 正法眼藏과 佛慧命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의미는 이러한 정 법의 상승을 자임하는 입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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