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대 논쟁을 중심으로

1. 머리말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단위는 찰나, 겁, 그리고 성주괴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의 가장 최소의 시간 단위로서 눈 깜짝할 순간을 찰나(刹那, ksana)1)라고 한다. 불교철학에서 찰나는 물질적·정신적, 특히 정신적 현상의 순간적 생멸(生滅)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겁(劫, kappa)은 보통 시간 개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하며 개자 또는 불석의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2)

성주괴공(成住壞空, arising, stay, destruction and emptiness)은 114겁(劫)을 가리킨다. 성, 주, 괴, 공은 각각 우주가 생성되고, 존속되고, 무너지고, 공무(空無)로 되돌아가는 역사의 사이클을 설명한다. 각각 성겁, 주겁, 괴겁, 공겁 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시간은 비시원적(非始原的)이고 무궁한 시간을 설명한다.

역사가 불과 70년 정도의 근대불교를 성찰한다는 것이 한편 모순되고, 다른 한편 역사를 무시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역사의 드라마는 시간이라는 무대에서 연출된다. 시간은 역사의 소재의 일부를 형성한다. 시간은 역사 구성의 날줄이며 인간의 자유는 씨줄이다.3) 근대라는 7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드러난 불교의 자유로운 몸짓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불교계에서 근대불교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불과 20여 년 정도이다.

 비록 짧은 기간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교계가 근대불교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 논의로 좁혀진다. 첫째,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대적 근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만일 근대불교를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한다면 근대불교가 갖고 있는 근대성은 무엇인가?

즉 근대불교의 특징 또는 특질은 무엇인가 하는 불교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근대화의 문제일 것이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어떻게 근대화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근대불교에 대한 담론을 이번에 모두 논하기란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기회엔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대 논쟁으로 제한하여 다루고자 한다. 근대불교의 시점의 문제와 근대불교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담론에 대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2. 한국 근대사와 근대불교

서구 중심의 역사적 시대구분은 주로 전근대(pre-modern)와 근대(modern), 그리고 후기근대(post-modern)로 나눌 수 있다. 근대란 종교적으로는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성서의 계시 중심으로 하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이성 중심의 합리적 사회로, 정치적으로 수직적이고 계급적 봉건사회로부터 수평적인 민주사회로, 경제적으로 장원 중심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산업적으로 농업과 가내수공업에서 공장 중심의 산업사회로 전환된 시기를 지칭한다. 이 시기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인 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시대를 근대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정작 이를 가능케 한 이념·사상·종교적 기반은 이미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진행된 르네상스(Renaissance)와 교회개혁(Reformation)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내용적 특징인 근대성, 종교의 세속화(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와 사회화, 정치적 민주화, 시장경제적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산업화를 기준으로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인 근대란 아직도 지역에 따라 진행 중인 개념이다.

반면에,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주의(modernism)와 근대성(modernity)에 근본적인 회의로 시작된 후기근대성(post-modernity) 또는 탈근대적 움직임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시대구분적인 근대란 이미 종결되었고 보편적 의미에서 근대와 후기근대가 중첩되어 진행되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근대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인 담론일 수 있다. 따라서 근대란 복합적이고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개념으로서 시점의 문제이지 더 이상 종점의 문제는 아니다.

1) 근대불교의 시점

우리 역사에서 ‘근대’라는 시기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곤혹스럽고 불편부당한 상처이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서구 열강에 의한 강제적 개항과 문호개방 이후 일제의 강점으로 이어진 치욕스러운 과거이다. 한편, 일제 청산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기에 더욱이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난제이며 다른 한편, 근대를 토대로 성립된 오늘이 있어 부끄러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평가가 불가피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제는 불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인 동시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해방 후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로 최초로 교단 분열이라는 쓴맛을 보아야 했다. 이 시기에 대한 민족적, 사회적 과오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는 죄책 고백마저 통일된 실천이 없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자 딜레마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서 공통된 시기적인 근대의 문제는 과거 청산(친일 문제)과 근대에 관한 정직한 평가라는 이중의 과제가 있다. 전자는 민족적인 입장에서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후자는 이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으로서 양자 모두 가벼운 과제는 결코 아니다. 불교 역시 우리 근대사의 불편부당한 상처를 공유하기 때문에 언제나 근대불교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또한 이것은 근대불교 연구의 어려움인 동시에 근대불교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지 못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 이후 활발해진 근대불교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근대불교의 시점에 관한 연구가 매우 미흡함을 알 수 있다. 김경집의 《한국근대불교사》(서울: 경서원, 1998), 불교신문사의 《한국불교사의 재조명》(서울: 불교시대사, 1994), 그리고 김영태의 《한국불교사개론》(서울: 경서원, 1993) 등의 불교사 연구가 있다. 그리고 필자가 조사한 근대불교에 관한 연구 논문은 80여 편 이상이었지만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기에 관한 연구는 김광식의 〈근대 불교사 연구의 성찰·회고와 전망〉(《민족문화연구》 제45호), 조성택의 〈근대불교학과 한국 근대불교〉(《민족문화연구》 제45호), 송현주의 〈근대한국불교 개혁운동에서 의례의 문제〉(《종교와 문화》 제6권), 김경집의 〈근대불교의 연구현황과 과제〉(《한국종교사연구》 제7집), 서재영의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불교학보》 제45집), 한상길의 〈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불교학보》 제45집) 등과 같이 5, 6편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양적으로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현주에 의하면 그럼에도, 근대라는 시점은 현대 한국불교의 내용과 성격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시기이다.4) 구체적으로 이 시기는 불교 중흥과 발전의 기회를 맞은 시기이고 한국불교 전통의 수호와 발전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기로이며, 일제 식민지 정책 아래서 주권을 회복하려는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한 시기였으며 불교의 자주적 발전과 교단 및 불교계 운영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다양한 이견이 대립된 시기였다.5) 근대불교에 관한 담론 중 가장 먼저 논란이 되는 것은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기에 에 관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조선조의 고종 재위 시기(1864~1906)로부터 일제강점기(1910~1945)까지를 말한다.6) 근대불교의 시점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대체로 ①1876년 개항, ②1895년 승려의 도성입성금지 해제, ③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광무 원년, ④1899년 원흥사 설립 등 네 가지로 집약된다.7) 김광식은 〈근대 불교사 연구의 성찰―회고와 전망〉에서 한국 근대불교사의 범위를 1876년 개항이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1895) 및 국권상실(1910)로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로 한정한다.8)

이는 포괄적인 의미의 정의이고, 좁은 의미로는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로부터 1945년 해방까지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불교의 삼보(三寶) 중 하나인 승니(僧尼)를 중심한 것으로서 불교가 명종 이후 산중(山中)불교 시대를 마감한 시기를 기점으로 정한 것이다. 그 다음, 1897년 국호를 광무로 고친 해를 기점으로 삼는 견해는 왕조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1899년 원흥사 창립을 기점으로 하는 해석은 과거와는 차별된 근대적 종단의 성립이라는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근대와 근대불교의 시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리고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근대불교를 구분하는 것에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필자가 근대불교의 시기 구분을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한국근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나 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몫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아직 한국 불교계에 근대불교의 시점에 관한 통일된 입장이 없다는 것이다.

2) 불교의 주체적 역사 기술

한국 역사에서 근대는 흔히 1862년부터로 보며, 이는 고종의 즉위년도와 일치한다. 이 시기부터 흥선대원군의 사회 개혁이 시작되어 소위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는 등,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섰다 하여 흔히 이 시기부터 근대로 구분한다. 이는 김경집에 의하면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왕조사의 시대구분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한다.9) 이 역시 근대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근대불교는 한편 왕조사에 종속되어 기술되어 왔고, 다른 한편 시대구분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김영태(金渶泰)의 《한국불교사개론》과 《한국불교사개설》, 그리고 《한국불교사》 등으로 개정되면서 시대구분에 있어서 점차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에서 벗어나고는 있지만 내용적으로 불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주체적인 사관에 따른 시대구분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주체적인 불교사(종교사)를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근대불교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권상노와 이기영과 같이 한국불교사를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순환의 일부로 보는 방식10)이 더 구체화·체계화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 고유의 철학적 이념을 토대로 해석한 역사 연구가 부족하다. 필자는 시기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인 만큼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시기의 문제보다 불교에 있어서 ‘근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근대불교사에 대한 해석학적 작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교계가 근대라는 시대적, 사회적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응했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근대불교는 서구 중심의 역사관으로부터 주체적인 역사관을 확립해야 한다. 불교보다 먼저 한국사에 있어서도 근대의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트라우마이다. 결정적으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의한 강제적 개항 및 문호개방,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점 이후 일제 청산이라는 난제를 여전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독교는 씨 사상으로 대표되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혹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라는 기독교의 독특한 고난에 기초한 사관을 비롯하여 백낙준의 선교사관, 민경배로 대표되는 민족교회사관, 이만열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주의사관, 주재용의 민중사관 등과 같은 해석학적인 작업이 있으나 이 역시 부분적인 노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근대사의 문제는 더 이상 불교계만의 고민은 아니다. 요컨대, 근대불교의 정확한 규명을 위해서는 주체적인 역사 기술과 불교 이념을 토대로 하는 역사 해석에 집중해야 한다.

3) 근대 시기의 불교와 근대불교의 구분

근대불교의 시점과 시기에 관한 마지막 담론으로 근대 시기의 불교와 근대불교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성택은 근대 시기의 불교와 근대불교를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11)

필자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구 사회 역시 근대라는 시기 혹은 시대의 구분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근대라는 시기와 보편적인 근대를 의미하는 근대성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있어 근대 시기의 불교와 근대불교를 구분해서 이해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 형태 및 현상에 관한 연구와 근대성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연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편으로 근대 시기의 불교는 시대적으로 불교의 중국으로부터의 전파 및 정착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 신라에서 불교는 국교로 성장하였고, 고려로 이어져 그 찬란한 문화와 포교를 꽃피웠다. 그러나 억불숭유를 국시로 삼은 조선왕조의 정책으로 인하여 점차 승려 중심의 불교로서 산사에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암울한 과거를 지나 19세기 개항과 문호개방으로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는 지난 500년의 흑암의 시기에서 광명의 역사로의 전환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자유로운 포교가 가능해졌고 산사에 갇혔던 불교가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근대적 종단 설립과 교육이 가능해졌으며 3·1운동과 같은 사회참여도 가능해졌다. 근대불교에 관한 연구들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교와 이웃 종교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사의 시작과 더불어 1886년 4월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적인 기독교 선교가 본격화 되었다. 개항 초기에는 아직 각 종교의 포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종교는 포교 활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와 유교, 신흥 종교로 이루어지는 오늘날과 같은 다종교 상황의 기본 구도가 형성되었다.12)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웃 종교와의 상호 인식의 부족으로 인한 오해와 갈등을 풀고 미래의 성숙한 관계를 위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근대불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혁신적인 변화는 권상론, 한용운, 박한영, 이영재, 백용성, 백학명, 박중빈 등과 같은 지도자들의 개혁 및 혁신, 그리고 변혁적 사상의 출현이다. 이와 같은 불교개혁에 관한 공론화는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을 시작으로 1912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13)

 이에 송현주는 근대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근대불교를 ‘개혁불교’로 정의한다.14) 또한 사회 변화에 불교가 어떻게 대응하였는가에 대한 공과를 엄격히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 불교의 영향 및 관계 역시 근대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가 일본 일련종의 승려 사노의 건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정부의 주체적인 결단이었는가를 명료하게 밝혀야 하며 대처, 육식의 문제 역시 보다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다.

3. 근대를 넘어서

최근 발표된 문화체육관광부 2008년도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한국에는 불교신자가 가장 많아, 국민 5명에 1명꼴인 1,072만 6,463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5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 집계로서 1995년 조사와 비교해 40만여 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개신교는 861만 6,438명으로 그 뒤를 이었고, 천주교가 514만 6,147명으로 세 번째이다. 개신교는 1995년 조사 때보다 10만여 명이 줄었으며 천주교는 10년 전보다 220만 명이 늘어 높은 신장세를 보였다.15) 이와 같은 결과는 불교계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것일 수 있다.

단순히 양적 성장만으로 불교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근대 이후 불교가 산중불교에서 시장과 거리의 종교로 민중들의 삶에 다가가 대중적 종교로서 변화했다는 것과 불교의 가르침이 근대적 가치보다는 탈근대적 가치와 이념에 오히려 부합된 결과는 아닌가 조심스럽게 평가해 본다.

이 글은 한국 근대불교라는 한정된 주제에 집중했지만, 사실 근대불교를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 유럽 지성들에 의한 불교의 수용 및 해석에 주목해야 한다.

서구 사회는 일찍이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구축해 놓았던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동양 제일의 종교인 불교에 대해 새롭게 집중했다. 대표적으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1922년 발표한 《싯다르타(Siddhartha)》와 같은 작품이 나올 정도로 근대 유럽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만큼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설계된 자신들의 삶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근대의 특성인 근대성에 비하여 불교의 진리는 그들의 황폐한 지성에 한 모금 샘물과 같이 청량하고 신선한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탈근대를 위한 대안으로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의 불교가 근대불교를 넘어 탈근대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근대불교의 시점 및 시기를 포함한 역사의 문제를 불교적 이념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1) 연기법: 필연, 관계, 그리고 책임의 역사

서구 중심의 역사는 이원론적인 분리와 대립을 통해 자아와 타자, 적과 동지, 문명과 야만,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 서양과 동양을 구분하여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인류의 염원인 평화를 항구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화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여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붕괴를 가속화하여 전 인류를 공멸의 공포로 내몰고 있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적 역사 이해는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또한 근대사회의 산물인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국민국가(nation state) 역시 인종차별과 국가 간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아 세계화 시대를 맞아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 건설을 방해한다. 따라서 근대불교사의 재구성은 더 이상 서구적 근대성에 함몰돼서는 안 되고 근대성을 철저히 비판하여 불교의 대안적 역사 해석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불교의 무아(無我, anathan)와 연기(緣起, paticcasamuppa죚da)에 대한 이해는 근대불교를 극복할 수 있는 탈근대적 역사 이념으로 손색이 없다. 이는 세계와 인간의 실상을 해석하는 붓다의 핵심 교설이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이라는 종의 속성과 존재 모습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의 속성과 존재 모습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오온무아(五蘊無我)와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인을 설명한 것이다.

무아가 미시적 관점에서 자아에 대한 해체적 설명이라면 연기는 거시적 관점에서 자아에 대한 구성적 설명이다.16) 연기법은 필연적인 역사를 의미한다. 세상 모든 변화는 인(因)과 연(緣)이 일으키는 것이고 그 인연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다. 인은 어떤 일이 생기게 된 직접 원인이고, 연은 간접 원인이다. 인이 열매까지 맺게 되는 근본 원인으로서 씨앗과 같다면, 연은 햇빛, 바람, 물, 흙 같은 간접 원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일이나 생각은 그 앞의 어떤 일이나 생각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본다.17)

따라서 연기는 창조론적 사고나 환원론적 사고와 같은 유한적 사고와 차별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개념이다. 또한 업보(業報)는 인간은 자기 삶의 완벽한 주인임을 천명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업보의 개념을 통해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책임적인 존재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인 아함경(阿含經)의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유고피기(此有故彼起)의 가르침은 시공간에서 펼쳐진 역사의 드라마를 우연의 모호성과 불합리성, 그리고 무책임성을 시정할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아함경의 가르침은 관계 중심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네가 없으므로 나도 없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고 일체적 관계로 인정하는 분열과 갈등, 대립과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상호 존중의 이념이다.18)

둘째, 역사란 ‘변화’를 의미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공(一切皆空),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가르침은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 심지어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모습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체개공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서구의 보편적인 항구불변의 근대를 기획하는 작위적인 노력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찰나의 연속인 역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신경질적 역사의식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19세기 서구 열강과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사대주의, 혹은 열등감 그로 인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역사적 기술 및 대응을 초월할 수 있다. 또한 편협한 민족주의로부터 보다 대승적 차원에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정직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2) 통불교의 전통: 조화와 통합의 역사

근대불교는 항일과 친일, 즉 일제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있다. 이는 과거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일제 강점과 같은 한계상황 속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건이다. 이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다양한 견해로 인한 갈등과 분열된 양상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불교계 내부는 물론 국가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티베트와 일본의 불교는 종파적 성격이 강한 반면 한국불교는 통합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 한다. 흔히 불교를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교종(敎宗)과 붓다의 마음을 중심으로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禪宗)으로 구별하지만 한국불교는 선이 주가 되고 교가 뒤따르는 선주교종적(禪主敎從的)인 선교융합의 전통을 발전시켰다.19)

이는 화엄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한 원효의 화쟁(和諍),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로 대표되는 합침의 불교, 원융불교(圓融佛敎)를 말함이다. 합침의 불교는 한 가지라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통불교는 막힘없이 모든 것에 통한다는 의미이고 원융불교란 모나지 않아서 모든 것과 두루 어울린다는 뜻이다.

원효 철학의 근본 논리는 화쟁의 논리이다. 이는 모든 논쟁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화쟁의 철학은 화엄불교의 철학, 하나가 전부요 전부가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인식을 기초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중심으로 온갖 잡다한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조화롭게 통일시킬 수 있었다. 원효에 의한 화쟁의 통불교의 전통은 지눌로 이어졌다.

지눌에 와서 불교는 좀 더 정치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종교가 된다. 지눌의 정혜쌍수의 철학은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시대적 사명에서 비롯되었다. 교종과 선종, 문신과 무신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선을 기반으로 교를 통합하는 정혜쌍수의 깨달음으로 분열된 고려사회를 통합할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느 때보다 사회적 통합을 요청하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와 IMF 구제금융의 굴레로부터 겨우 벗어날 즈음,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인해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통불교의 전통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통합할 수 있는 지혜이다. 동서의 영호남 지역 갈등, 경제적 양극화, 종교 차별 및 편향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통불교의 철학은 남북 간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통일의 이념으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4. 꼬리말 :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요즘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근거 없이 막연히 위기가 지나면 기회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위기를 맞아 그 위기의 요인을 분석하고 반성해서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고 부실한 것을 확충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하라는 역설이다. 자기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근본적인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의 난제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불교계가 붓다의 종지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원시불교 또는 초기불교의 붓다(Sakya Muni Buddha)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면 한국 근대사회와 근대불교의 난마와 같이 얽힌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붓다에 의해 창도된 불교는 인도의 브라마니즘(Brahmanism)이라는 계급적 사회에서 평등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 당시 인도는 철저히 운명적인 계급주의에 근거한 신분제 사회였다. 카스트제도하에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샤(vais、ya), 수드라(shudra), 그리고 카스트제도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하리잔(harijan)이라는 불가촉천민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급 차별 사회에서 불교의 인간존재와 열반(구원)에 대한 주체적 평등은 혁명적 가치였다. 정치적으로 근대는 자유와 평등을 두 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럼에도 서구 사회는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여 그들의 역사로부터 철저히 소외시켰다. 문명과 야만, 선과 악, 서양과 동양, 제3세계를 구분한다. 이는 차별적 세계관의 반영이다. 그러나 붓다의 평등한 가르침은 이율배반적인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이며 이상적인 평등을 완성할 수 있는 민주사회의 이념적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불교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을 완성할 수 있다. 붓다 당시 브라마니즘은 범신론적 신중심적 사유 체계였다. 마땅히 신에 의존하는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사고와 생활이 지배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인간 중심으로 옮겨 놓았다.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력에 의한 깨달음으로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무아의 개념은 이성 중심의 근대성에 함몰된 자아를 구출해 낼 수 있는 개념이다.

서구의 근대화는 이성을 절대화, 우상화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붓다의 가르침, 무아의 경지는 서구화된 이성의 허구적 우상숭배를 비판하여 진정한 인간애를 구현할 수 있는 평화적 사상의 단초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을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통해 더욱더 창조적인 변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인본주의적 가치이다.

셋째, 붓다는 그 당시 내세적 해탈에 대한 현세적 해탈을 주장했다. 이는 타계적이고 현실도피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브라마니즘은 해탈이 내세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붓다는 현세에서의 해탈을 주장하였다. 붓다가 깨달은 해탈은 죽은 뒤에 얻는 세계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확장한다면 개인 구원을 넘어서는 사회 구원 즉, 사회참여를 통해 이룩되는 사회 현실 속에서 불국정토(佛國淨土)를 건설하는 사회화 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불교는 우상숭배의 종교, 현실도피적 산중불교, 개인의 해탈에만 집중하는 개인주의적 종교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진정한 민중불교, 사회참여적 불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남태욱 / 서울 서초동 열린교회 담임목사. 성결대학교 신학과(Th.B.) 및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M.A.),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Th.M.) 졸업.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를 전공하여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저서로 《라인홀드 니버와 사회정의》(2006)와, 연구 논문으로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사회윤리적 함의: 라인홀드 니버의 사회정의론을 중심으로〉 〈라인홀드 니버와 21세기〉 〈동학의 시천주의 인간론과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 이해: 인간 본성과 윤리·정치적 의미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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