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발의 수행적·사회적 의미

1. 서론

탁발은 붓다 재세 시 인도에서 전통적인 바라문에 대응하여 생겨난 신흥 수행자 사문(Samana)들이 의지하던 생활양식으로서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붓다도 이 행의를 받아들여 일상생활을 탁발에 의지하면서, 불교 사상이 농축된 생활양식으로 정착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탁발하는 승려를 동량승이라고 불렀으며, 숭유억불 정책이 지배하던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서도 탁발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그것을 빙자하여 일어나는 사회적 물의와 불교계의 대외적 이미지 실추 때문에 조계종에서는 1964년부터 공식적으로 탁발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생명평화탁발순례’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자비의 탁발’ 행사 및 세계 고승의 발우 전시회1) 등을 통하여 탁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실제로 탁발하는 스님들이 가끔 목격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탁발은 붓다처럼 매일 하루 한 끼의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금전의 보시에 의존하며, 주로 수행자와 시주의 관점에서 단순한 생활의 방편이나 하심(下心)을 통한 수행, 또는 시주가 복을 짓게 하는 행위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깊이 살펴보면 탁발 그 자체에 대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탁발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즉 탁발은 불법의 진리 구현 그 자체이며, 깨달음의 실천적 생활양식이 승가의 보편적 생활양식으로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승가가 사회적 관계 속에 참여하는 주요 통로이자 중생제도의 일차 관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탁발의 정신이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실천적 행위에서 승가의 생활양식으로 보편화되고, 나아가 중생들과의 관계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논자가 지난해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수타니파타》를 연구할 때 ‘성인은 남이 주는 것으로 생활한다.’는 말이 정언적 명제처럼 가슴에 와 닿으며,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그때 불현듯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 성인은 어찌할 것인가?’란 물음이 떠올랐고,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생긴 사색의 파편들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제 탁발에 대한 그 물음에서 시작하여 탁발 그 자체에 담긴 근본정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반부에서는 붓다 재세 시 불교, 부파불교 및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중국의 선종을 중심으로 탁발 행의의 변화 양상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문제점을 고찰할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불법의 진리인 연기법과 중도사상의 관점에서 탁발의 진리성을 살펴보고, 아울러 탁발의 사회참여성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한국불교계에서 탁발 수행을 그리 쉽게 포기해도 될 것인지, 혹은 현재 진정한 탁발이 사라진 것은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탁발에 대한 문제 제기

1) 문제 제기의 배경

만약 탁발을 해도 끝내 먹을 것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붓다의 선택은 《잡아함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일곱 집을 돌고도 단 한 톨의 공양물을 얻지 못한 날이 있었는데, 그런 날 붓다는 아침 공양을 걸렀다.2) 또한 《대보적경》에서는, 만약 폭풍우 치는 날 걸식을 못하여 몸과 마음이 야위고 지치더라도 기갈을 이겨내고, 부지런히 성도를 닦아서 물러나지 않도록 다짐해야 한다고 말한다.3)

그것은 먹을 것을 얻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수행뿐임을 천명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진 《수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중에서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4)에 따르면, 세속에서 ‘밭갈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바라문이 붓다에게 농사를 짓지 않고 얻어먹는 것을 조롱할 때, 붓다는 유행과 탁발로 연명하면서도 올바른 수행과 참다운 지혜로 마음밭을 갈면서 그 열매인 ‘불사(不死)’의 과보를 획득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형의 밭갈이처럼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집착하여 미혹과 생사윤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라문을 깨우쳐 진리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처럼 탁발의 정신은 무조건 먹을 것을 구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탁발과 수행의 관계는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 중 도제(道諦)에 속하는 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팔정도는 초기불교의 매우 중요한 수행법으로서 수행자가 포괄적으로 지켜야 할 8가지의 항목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수행자의 바른 생활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정명(正命)이다.

이 정명에 따르면, 의복, 음식, 와구, 탕약을 법답게 구하라고 한다.5) 음식에 있어서 법다움이란 탁발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고, 탁발 외의 방법으로 생활하게 된다면 사명(邪命)이 된다. 즉 스스로 직접 먹을 것을 만들어 먹거나 혹은 미리 먹을 것을 저장하는 것, 그리고 손수 농사를 짓거나 생업을 위한 장사를 하는 것 등은 모두 사명으로서 당시 승가에서는 해서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올바른 수행법을 닦는 수행자라면 음식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굶어 죽는 것을 각오하고 탁발행을 한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탁발하는 비구라면 공덕과 허물을 모두 떠나고, 언제나 옳고 바른 행을 닦아서 그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6)

만약 수행자가 굶어 죽는다면 비천하게 볼 수도 있지만, 결코 비천하지 않은 이유는 탁발행의 속에 집착과 갈애를 벗어난 청정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행하면서 탁발하는 수행자가 부귀영화와 절대 권력을 누리는 그 누구보다도 더욱 고귀하고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생의 맹목적 의지

수행자가 굶어 죽는 것을 각오하고 탁발행을 한다면, 생(生)의 맹목적 의지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붓다는 이 세상의 존재 형식을 12지 연기로 나타내었는데, 그 생사윤회의 첫 고리가 무명(無明)이고, 이 무명에 연(緣)하여 전개되는 것이 행(行)이다. 이 행을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업의 형성력이라고도 한다.

무명에서 행을 거쳐 생사로 윤회의 쳇바퀴를 도는 것을 유전문이라 하고 그 반대를 환멸문이라 하는데, 그것은 생사로부터 행을 거쳐 무명에 이르기까지 소멸의 흐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최후로 무명이 소멸되기 전에 바로 이 행이 먼저 소멸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생의 맹목적 의지마저도 끊어져 버려야 무명을 타파할 수 있는 최후의 길이 열린다.

그러므로 탁발행을 할 때, 생에 대한 맹목적 의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미 앞에서 제기한 근본적인 물음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탁발을 통해서 반드시 생명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절대적 믿음은 행의 또 다른 표현이므로, 그 절대적 믿음이 사라질 때 비로소 탁발은 의미 있는 실천이 된다.

붓다는 맹목적인 의지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았다.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붓다가 쿠시나라(Kusinara)에서 마지막 입멸에 들기 전에 악마 마라가 찾아와 열반에 들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붓다는 불법이 융성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기를 원했지만, 마라가 이미 불법이 융성하다고 속삭이자 곧 입멸을 예언하게 된다.7) 붓다의 삶은 오직 중생들을 향한 자비와 진리의 구현에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그것은 걸인의 걸식과 성인(聖人)의 탁발이 다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즉, 걸인의 걸식이 생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근거로 한다면, 성인의 탁발은 삶에 대한 갈애를 떠나서 오로지 중생제도를 그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탁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그 물음이 성립하는 조건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부터는 탁발에 대한 용어를 비교 분석하고, 역사적 변화 양상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3. 탁발 행의의 변화에 대한 고찰

1) 용어 비교 분석

탁발은 수행자가 발우(鉢盂)를 들고 시중에 나아가 음식을 얻어서 먹는 것을 말하며, 걸식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산스크리트어로는 pindapant괶(賓茶波多)라 하고, 걸식(乞食)·행걸(行乞)·단타(團墮)라 번역한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를 뜻하는 ‘비구’라는 말이 팔리어 비쿠(bhikkhu)의 음역으로서 ‘음식을 빌어먹는 걸사(乞士)’라는 뜻을 가지며, 걸식으로 살아감에 있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힘써야 하므로 불교에서 탁발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산스크리트어 pindapant괶(賓茶波多)는 재가신자들이 수행자에게 밥을 줄 때, 뭉쳐서 발우 안에 떨어뜨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와 신자가 발우와 음식을 통하여 만나는 순간적인 상황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는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다’는 연기적 상호관계성을 엿볼 수 있다.

‘단타(團墮)’는 ‘단식(團食)이 발우 가운데로 떨어진다’는 뜻으로서 산스크리트어의 원뜻을 직역하였다. 글자상으로는 원어와 마찬가지로 단지 음식과 발우만을 거론함으로써 음식을 애써 구걸한다거나 공짜로 남의 것을 탐낸다는 등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걸식’은 경전에서 주로 번역되어 쓰이며, 음식을 얻어서 먹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용어는 수행자뿐만 아니라 걸인(乞人)들이 엄격한 법식(法式)도 없이 밥을 빌어먹는 행위와 혼용되고 있어서 불교적 의미가 흐려졌다.

‘탁발’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사용한 말로, 직역하면 ‘발우를 내민다’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목숨을 발우에 맡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미 생사(生死)의 집착을 벗어난 붓다나 혹은 그 길을 가는 제자들이 의지하는 것은 발우가 아니라, 불법의 진리 즉 승가와 신자 간의 연기적 관계이므로 그 뜻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직역하여 ‘발우를 내민다’는 해석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의미로서 탁발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고자 한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지만, 각각에서 느낄 수 있는 인상은 서로 다르고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도 있으므로 붓다가 실천한 탁발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용어를 선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탁발의 정신은 용어뿐만 아니라 탁발할 때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법식에서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2) 탁발의 법식과 의의

탁발은 두타행의 일종인데 ‘두타’란 산스크리트 ‘dhu죚ta’의 음역(音譯)이며, 버리다·씻다·닦다 등을 뜻한다. 두다(杜多/ 杜茶)로도 쓰고, 기제(棄除)·수치(修治)·두수(??) 등으로 번역하며, 번뇌를 마음속으로부터 제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초기불교에서 유명한 두타행자는 마하가섭이다.

그가 행한 12두타행 중에서 탁발 관련 조항을 살펴보면 첫째, 항상 걸식을 행하고(常行乞食) 사람들의 초청 공양을 받지 않을 것, 둘째, 차례차례 순서대로 탁발하되(次第乞食) 부잣집과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을 것, 셋째, 하루 오전 한 끼만 먹을 것(受一食法), 넷째, 마음대로 먹지 않을 것 등을 들 수 있다.

《보적경》에서는 비구가 출가할 때, 걸식에 의지할 것을 맹세하고 그것을 늘 간직하며, 신자들의 식사 초청이나 대중공양을 하지 말고 스스로 걸식하여 먹으라고 한다.8)

《증일아함경》에서는 그 마음가짐에 대하여, 걸식으로써 목숨을 지탱할 뿐, 기뻐하거나 근심할 일이 아니고, 음식에 탐착하지 않아야 하며, 육신을 존재토록 하고 기력을 기를 뿐이라고 한다.9)

탁발을 행할 때 지켜야 할 절차에 대하여 《사분율》에서는, 가사에 대한 위의를 갖추고, 방 안을 정리한 후 몸가짐을 살피고, 마을에 들어가 순서대로 행한 다음, 정사(精舍)로 돌아와 발을 먼저 씻고, 공양 시간을 엄수하며, 공양을 하면서도 자비의 마음을 내어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고, 발우를 정돈한 후에는 자리를 청소해야 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10)

탁발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아집과 아만심을 버리는 수행의 한 방편이고, 둘째,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지향하는 수행자의 소욕지족의 정신이며, 셋째,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되게끔 하고, 넷째, 몸에 괴로움이 있음을 알게 함이다.11)

걸식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로움은 걸식십리(乞食十利)12)라고 말하는데, 《십주비바사론》에서 밝히고 있는 바, 목숨을 살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음과, 중생이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삼보에 머물도록 함이며, 걸식하는 것을 보고 다른 수행자도 본받도록 함이라는 것 등 열 가지를 밝히고 있다.

《보우경》에서는 보살이 탁발을 통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걸식십위(乞食十爲)13)라고도 하며, 모든 유정을 받아들여서 편안케 함과, 만족할 줄 알고 베풀 줄 안다는 것 등 열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여러 경전에서 밝히고 있는 탁발의 법식과 의의를 살펴보면, 탁발이란 수행자다운 위의를 갖추고,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면서, 수행과 자비의 실천을 향해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사상 이 탁발 행의가 항상 일정하게 행해져 온 것은 아니며,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3) 시대별 변화에 대한 고찰

①초기불교의 사의지(四依止)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비구에게 구족계를 내릴 때, 사의법(四依法)을 설(說)하여 그것에 의지한다고 할 때, 비구가 될 수 있었다. 사의법(四依法)이란 네 가지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분소의(糞掃依), 걸식(乞食), 수하지(樹下止), 진기약(陳棄藥)등이다. 사의지(四依止)라고도 하며 《사분율》 《십송율》 《오분율》 등 여러 율전에 전해진다.14) 초기불교에서 두타행이 엄격한 수행적 측면에서 강조되었다면, 사의법은 주로 수행자의 일상적인 의식주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분소의는 남이 버린 헌옷 조각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며, 걸식은 신자들에게 음식을 얻어서 먹으며, 자기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는 것이다. 수하지는 나무 아래서 명상을 하거나 잠을 자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며, 진기약은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사의지는 수행자가 소욕지족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오직 수행과 그 완성을 향해 있음을 보여 준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처음에는 신자들의 공양 초청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차츰 융통성이 생겨 붓다 재세 시에 이미 신도들의 집에 가서 공양할 수 있는 초청 공양과 수행자 여럿이 대중공양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승가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저장하는 것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불교를 제외한 사문들이 대체로 고행주의적 측면에서 걸식을 하였으나, 붓다는 중도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걸식행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초청 공양과 대중공양을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정사 생활이 정착되면서부터 불교 외 사문들의 유행을 따르는 비구와 정사에서 대중이 생활하는 비구로 나뉘게 된다.15)

②부파불교의 정주 생활

초기불교 교단은 불멸 후 100년이 지나지 않아 계율의 완화 문제를 두고 ‘십사(十事)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보수적인 장로 교단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나뉘게 된다. 특히 탁발과 관련해서는 금지되어 있던 금·은·금전 등의 보시를 허용하자는 주장과 한번 걸식하여 식사를 마쳤음에도 다시 마을에서 식사 대접을 받는 것이 정당한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탁발을 비롯한 사의지로 대변되었던 수행자의 무소유 사상이 경제 원리와 생활의 편리성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주방의 등장이다. 주방이 있다는 것은 곧 음식물의 저장과 조리가 가능하다는 뜻으로 탁발 행의가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붓다 재세 시까지만 해도 음식을 창고에 쌓아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승원에서 음식을 조리해 먹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16) AD 2세기경에 구축된 다르마라지카 대탑 유적17)에는 주방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불멸 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18)

부파불교 시대의 정사에 주방이 있었다는 사실로써 곧 탁발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약 1,000년 동안 불교철학의 시대를 꽃피운 부파불교시대의 교리 연구는 안정된 정사 생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욱이 승려들이 연구에 더욱 매진하기 위하여 안정된 정사 속에서 깊이 안주할수록, 그리고 탁발과 같이 신자와 교감하는 자리가 점점 더 적어질수록, 신자들은 승가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옆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성인을 원하였으므로 급기야 대승불교라는 또 다른 하나의 큰 흐름이 탄생되었다. 그 대승불교의 흐름이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로 전파되어 주요한 불교사상으로 형성된다.

③대승불교의 노동 생산적 자급자족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올 때, 서로 다른 이질적인 풍토와 문화 및 생활습관 등의 차이점을 극복하여야 했고, 그중에서도 탁발에 대한 초기불교의 사상적 변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수행자의 삶을 이상적으로 여기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인도인들의 정신세계에 비하여, 중국인은 현실 지향적인 데다가 서로 다른 사상과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때로는 폐불사태19)를 겪기도 하였으므로, 좀 더 안정적으로 불교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국가 통합을 위한 이념적 필요에 따라 국가권력층의 지원과 통제 속에서 귀족적인 불교로 성장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노동 생산적 자급자족에 의하여 자립적인 사원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수행자의 일상적인 탁발을 필요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므로, 두타행을 수행하는 일부 수행자들 외에는 탁발에 의존하는 경향이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선종의 노동 생산적 자급자족은 초기불교의 율의가 아닌, 중국에서 별도로 제정된 청규에 의해 그 이론적 근거를 갖는다.20)

그 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중국불교에서 율장이 완역되지 않았을 때, 당시 현실에 알맞게 승단의 규범과 의례를 별도로 제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에 진(晉)의 도안(道安, 314~385)에 의해 처음으로 승제(僧制)가 제정되었다.21) 이 승제는 구마라집에 의해 《십송율》이 완역된 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22) 선종의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가 제정한 《백장청규》의 기초적 토대가 되었다.23) 백장은 ‘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라는 말로 유명하다.24)

이 백장의 청규는 그 원형이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 선종 청규의 근거가 되었고, 선종이 단일의 독립적인 교단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보청법(普請法)으로 생산적 노동을 규정하여 자급자족의 생활을 표방하였고, 이것은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중국 선종이 처음부터 생산적 노동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보리달마(達磨, ?~528)로부터 제3조 승찬(僧璨, ?~606)에 이르기까지 유행 생활을 하다가, 제4조 도신(道信, 580~651)에 이르러 산중에 총림의 형태를 갖추고, 정주 생활을 시작할 때 노동 생산이 이루어졌다.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慧能, 638년~713년)이 갓 출가하여 방아를 찧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생산적 노동이 체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장청규》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규인 《선원청규》25)에 의하면, 생산적 노동과 탁발을 동시에 행하고 있었다. 그 후 만들어진 《칙수백장청규》26)에서는 기복 불사에 중점을 두고 수행적 측면은 경시하게 되는데, 이 당시는 탁발 행의가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27)

이와 같이 중국 선종이 탁발에만 의존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노동 생산에 의한 자립적인 사원경제로 변화한 것은 불교사적 입장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청규가 제정되어 노동 생산에 의한 사원경제의 이론적 근거가 되면서, 교단 발전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수타니파타》에서 마음밭을 가꿀 뿐이라는 붓다의 뜻과 배치되는 입장임에는 틀림없으며, 이로 말미암아 붓다가 탁발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한 정신이 퇴색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불교도 전통적으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와 비슷한 상황을 거쳤다. 특히 현대 조계종단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봉암사 결사(1947~1950)’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를 내세웠고, 그 결사의 청규인 〈공주규약〉은 중국 선종의 청규로부터 영향을 받아 실천함으로써 조선시대 이후 굴절된 승가의 면모를 쇄신시키고, 수행자의 권위를 높이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 결사의 출발은 승가와 재가 간의 불균형적 관계로부터 상정되었으므로 결국엔 또 다른 불균형을 야기했다.

이 규약에 나타난 결사의 선원 운영은 노동 생산적 자급자족을 표방하였고, 구체적인 조항 18개 중에는 물 긷고, 나무하며, 탁발하는 것 등 여하한 고역(苦役)을 불사(不辭)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28) 여기서 탁발을 고역으로 규정하고 ‘불사(不辭)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일상적인 행의로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선택적인 방편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붓다가 탁발로써 중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오히려 신자들의 소외 현상이 생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나온 불교사에서 부파불교 시대에 정사 안주의 소승불교적 경향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앞으로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태동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불교사적 의미에서 발전적일 수도 있는 미래지만, 좀 더 조화롭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탁발의 근본정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균형 잡힌 중도적 태도를 기반으로 승가와 재가의 연기법적 관계 정립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4. 탁발의 수행적 의미

1) 연기법의 실천

①붓다와 중생의 상호의존적 관계

《대보적경》에 의하면, 공양할 때는 ‘내 몸 안에 있는 팔만여 벌레들이 안락함을 얻도록 함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이들을 법으로써 제도하기 위해서라고 사유하라.’ 하였다.29) 즉 공양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벌레)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공양을 위해서는 다른 중생(신자)들로부터 탁발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붓다와 중생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나타내며, 이 상호의존적 관계는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의 실천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대보적경》을 통하여 붓다와 중생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붓다 스스로의 몸에서 일어나는 상호의존성이고, 둘째는 붓다와 신자 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상호의존성이다. 먼저 붓다는 ‘자기’라는 존재를 벌레와의 상호의존적 관계로 파악한다. 자기 몸은 벌레들이 지탱해 주고, 그 벌레들을 먹이고 살리는 것은 곧 그 벌레들이 이루고 있는 자기이므로, 자기 몸과 벌레들은 사실상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이다. 이로써 법을 성취할 때 가장 먼저 제도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몸의 중생들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붓다와 신자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의존성이란 달리 말하면, 사회적 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관계이다. 붓다가 성도(成道)한 후에 그대로 열반에 들려고 하였으나, 범천왕이 중생제도를 위한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붓다의 삶을 이곳 사바세계에 붙들어 두었다면, 붓다는 탁발을 통하여 중생들이 주는 것으로만 영위하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맡겼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붓다의 전법은 신자들이 주는 ‘먹을 것’에 대한 대가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타니파타》에서 붓다는 밭 가는 바라문에게 시를 읊어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먹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눈뜬 사람의 생활 태도는 오직 법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밝힌다.30) 즉, 전법과 공양은 단순히 조건적으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진리에 따르는 것이다. 붓다의 삶은 오직 진리에 따르는 삶 그 자체이며, 그 진리를 통하여 생사윤회의 고(苦)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중생들은 붓다의 생명을 온전히 살려 나가야 할 의무를 스스로 가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중생을 살리는 것이 곧 붓다를 살리는 것이고, 붓다를 살리는 것은 다시 중생을 살리는 것이 된다. 붓다가 6년간의 고행 끝에 피폐해진 몸으로 쓰러졌을 때, 그에게 수자타라는 마을 처녀가 바친 우유죽 공양은 당시 붓다 한 사람의 육신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 2,500여 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통하여 수많은 중생들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②탁발과 의지처의 관계

승가의 일상생활이 탁발을 비롯한 사의법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일상생활과 수행을 아우르는 보다 근본적인 의지처로 제시된 것은 ‘자기를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탁발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자기와 법에 의지할 것’에 대하여 말한 부분을 살펴보면, 《십주비바사론》에서 ‘걸식십리’를 들어 ‘목숨을 살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걸식해야 함을 표명하고 있다.31)

 탁발을 자신의 힘으로 하도록 규정한 것은 다른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진리를 실천하기 위함이다. 승가에서 화합을 중요시 하는 이유도 ‘하나’로서의 진리를 행하기 위함이라고 본다면, 수행자가 자신의 힘으로 하거나 대중이 화합하여 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의지하기 위함이고, 어긋남 없이 그 진리를 실천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탁발하러 나갈 때, 법으로써 장엄해야 함에 대하여는 《대보적경》에서 보이는바, 대상 세계에 대한 염착심이나 진애심을 내지 않도록 함으로써 법에 의지할 것을 설한다.32)

다음으로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기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할 것’에 대한 주문은 《잡아함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섬에 머물고 자신의 의지처에 머물며, 법의 섬에 머물고 법의 의지처에 머물러라.33)

‘자신의 섬’이란 자신을 섬으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섬은 의지처와 다르지 않으나, 섬과 의지처의 어감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의지처라고 하면 단순히 기대어서 보호받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섬은 그 이상의 것이다. 바닷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서, 성난 바다의 모진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한 의지(意志)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의지처다.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을 상상해 보자.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이 대양의 거친 숨결에 철저히 온몸을 맡기고 있다. 섬은 끊임없이 자신을 할퀴고 지나가는 파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아무런 불평 없이 홀로 버티고 있다. 단지 스스로를 지탱할 뿐, 바다를 거부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섬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밀려오는 파도를 부수어 하얀 순백의 물거품으로 만들며, 성난 물결의 흐름을 막아 다시 대양으로 돌려보낸다. 세찬 파도와 바람으로 깎여지는 자신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형형의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연출하면서, 하늘의 새들에게는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주고, 나무와 꽃들에는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준다.

섬과 같이 수행자도 사바세계의 고해 속에 홀로 놓여 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온갖 번뇌가 생멸을 거듭하는 실존적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고서 진리의 길로 눈을 향하고 있다. 자기라는 섬을 굳건히 딛고, 진리의 흐름을 의지처로 삼아 휘몰아치는 생사고해의 폭풍을 이겨내고, 번뇌의 파도를 부수어 자각의 법열을 일으키며, 거듭되는 생사윤회의 흐름을 진리의 흐름으로 바꾸어 영원한 자유와 청정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매일 탁발로써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기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고, 먹을 것을 떨어뜨려 주는 신자들과 교감하면서 그들과 진리의 여정을 함께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머물고 법에 머물면서 연기법의 이치대로 세상과 하나가 되어 쉼 없이 흘러가는 모습이다.

이처럼 자기에게 머문다는 것은 세속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머문다는 것은 경전 속의 법만 탐구하는 것이 아님을 탁발 행의는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일상생활의 탁발 그 자체가 바로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는 것이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탁발이다.

오로지 남이 주는 것으로만 생활하려던 붓다의 탁발은 세속을 피해 한적한 곳이나 선정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바세계의 격랑 속으로 뛰어들어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뼛속 깊이 새기려고 한, 최후의 선택인지 모른다. 이 현실 속에는 쾌락과 고통, 귀함과 천함, 오해와 진실, 좌절과 희망 등 온갖 상대적 대립의 긴장 관계가 늘 지속되고 있지만, 불법의 진리는 일상 속에 늘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매일의 탁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곧 붓다와 중생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실현하는 중도적 실천의 길이다.

2) 탁발의 중도사상

탁발에서 중도사상은 형식적 측면과 관계적 측면의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형식적 측면이란 탁발을 두타행적 수행법으로만 고집하여 일정한 틀에 얽매이거나 심지어 고행을 위한 고행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데바닷타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붓다는 당시 엄격한 탁발 행의에서 융통성을 가지고 신도들의 초청에 의한 공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데바닷타는 일상생활에서 고행주의적 성향의 오법(五法)34)을 엄격히 지킬 것을 주장하며, 동조하는 수행자들을 모아서 붓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붓다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데바닷타가 주장한 오법행은 당시 다른 사문들의 생활 방식이었지만, 그것을 고집할 경우 극단적인 고행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고행주의를 겪어서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었던 붓다로서는 그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붓다의 목적은 중생들이 오직 중도를 통해서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삶을 이루는 데 있었다.

둘째, 관계적 측면에서는 탁발 수행자와 보시하는 신자의 존엄성이 어느 한쪽으로도 쏠림없이 탁발을 매개로 평등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승가가 사회와 지속적으로 균형 잡힌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5. 탁발의 사회적 의미

1) 탁발의 참여성 :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의 통로

수행에 방해되지 않고 탁발하기에도 좋도록 마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승원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시중으로 나가 차례로 탁발하는 수행자가 이윽고 시주(施主) 앞에 이르러 발우를 내밀 때, 시주는 둥글게 뭉친 밥을 발우 안으로 떨어뜨린다. 이때 기복이나 수행과 같은 모든 명목은 떠나 버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보시하는 신자와 그것을 받는 수행자, 그리고 보시의 재물인 삼륜이 모두 청정해질 수 있다. 이때 수행자와 신자 간에 평등한 연기적 진리의 관계가 현상적으로 드러나며, 양자 간의 불이(不二)적 중도의 삶이 실현된다. 그 길을 따라 붓다는 스스로 중생들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며, 동시에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 중생들의 눈은 끊임없이 붓다에게로 향하고 있지만, 붓다의 눈은 늘 세속의 중생들에게로 향하며 탁발로써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는 자비행을 펼친다.

이와 같이 붓다가 자신의 생명을 중생들에게 맡기고 의지한 것은, 붓다의 생존 이유가 바로 중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다와 중생이 서로 불가분리(不可分離)의 불이(不二)임을 뜻하며, 탁발로써 그 관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수행자의 방식으로 중생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탁발이 중생의 공양을 받아들이며 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공양을 거부함으로써 사회관계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도 있다. 이것을 복발(覆鉢)이라고 한다. 복발은 승가가 발우를 뒤집어엎어 특정 신자의 보시를 거부하는 행위다. 재가신자가 불법승 삼보를 욕하거나 비방하는 경우에 복발을 짓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35) 일반 사회적인 도리로써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경우에도 복발을 짓는다.36)

아직도 탁발 행의가 이어지고 있는, 남방불교의 상좌부 불교권에 속하는 미얀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962년 군부 통치 이래 1988년과 1990년의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수십 년째 민중과 정부 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이 나라에서, 2007년 미얀마 유혈사태 때 승가 전체가 복발갈마(복발)로써 군사정권의 공양을 거부하고 평화시위 행진에 나섰으나, 무력에 의해 진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7)

이때 미얀마 불교계가 무력 독재정권에 복발로써 항거한 것은 승가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정신을 보여 준다.

따라서, 탁발이 일반 사회와 지속적인 관계 형성의 통로라면, 복발은 생명을 내던져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보시하는 신자들의 올바른 자격을 요구함으로써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신을 드러낸다.

2) 탁발의 수용성 : 생사를 초월하는 수용과 평등

붓다는 신자들의 자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서 중생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기에 붓다를 ‘응수공양(應受供養)’, 곧 응공이라고 일컫는다.38)

그렇다면 응공이 가진 자격은 무엇일까? 응공은 무아(無我)이며, 응공은 삶과 죽음의 집착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땅히 받아야 할 공양을 받는 붓다의 모습 저편에는 붓다의 전적인 수용적 태도가 동시에 존재한다. 승려의 밥그릇인 발우를 중생의 뜻에 따라 양을 채운다는 의미로 응량기(應量器)라 하고, 어떤 음식을 주든지 주는 대로 먹겠다는 수용적 태도를 보인 것은 중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래서 걸식십리에서는 ‘모든 유정을 섭수한다.’고 하였다.39)

그것은 붓다가 그의 삶과 죽음을 범천왕이나 마라의 요청에 의해 선택하였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삶은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의 발로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중생들의 해탈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였으므로 전적으로 그들을 수용한 것이다. 이는 붓다의 수용적 태도가 곧 중생들과의 연기법적 관계를 그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에게 음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주어지지 않는 음식을 취하지 않을 것이고, 굶어서 입멸한다면 입멸에 드는 일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굶어서 입멸에 든 것이 아니라, 춘다의 해로운 공양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였다. 결국 붓다에게는 공양을 받는 것이나 공양을 받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이 양자는 붓다의 전적인 수용에 의해서 불이(不二)의 평등이 된다. 그러기에 응공은 곧 전적인 수용이요, 전적인 수용은 곧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결론

탁발과 그 정신의 시대적 변천을 살펴볼 때, 불교의 흥망성쇠가 함께 보인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붓다 재세 시 데바닷타로 인하여 승단이 두 동강으로 분열되는 사태를 겪게 된 것은 명목상 탁발의 엄격한 시행과 관련된 오법(五法)이 원인이었다.

또한 비록 부파불교가 화려한 불교철학의 꽃을 피우기는 하였으나, 교단 중심적인 정주 생활의 안주와 함께 탁발과 같은 자리에서 재가자와의 교감이 부족했던 것이, 신자들의 관계에 벽을 만들어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을 초래하였다. 붓다의 그림자 같은 제자 아난이 불멸 후 사리에 대한 처분을 묻자, 붓다가 남긴 유훈은 여래의 사리 공양에 봉사해서는 안 되며, 모든 외적으로 번거로운 일은 재가자들에게 맡기고 출가승은 오로지 최고선을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했던 것은,40) 제자들이 모두 붓다로서 이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것이었지 결코 세상으로부터 이탈하거나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장장 45년 동안 붓다의 전법 과정이 그것을 웅변한다.

더욱이 중국으로 건너온 불교가 탁발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가권력의 지원이나 생산적 노동을 포함시킨 것은 시대적 요청이라 하더라도, 점차 확대되어 간 사원경제 발전으로 인하여 때때로 부작용을 초래했다. 그리하여 물질적 퇴폐 현상과 세속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됨으로써, 불교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거나 아예 절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불법의 근본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생활양식으로서의 탁발과 그 정신이 수행자 개개인이나 승가의 정체성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말해 준다. 오늘날 붓다의 탁발 정신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탁발 정신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지 못하고, 남이 주는 음식으로만 생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므로 무엇보다 윤회하는 생의 맹목적 의지를 철저히 넘어서 있음을 그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가 생사를 초월한 생활 방식을 통하여 중생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전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을 볼 때, 붓다의 존재 이유는 중생제도이며, 그 실현은 결코 안주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소 낮추어 실천하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이며, 그 정신은 자신의 목숨을 중생들에게 철저히 내맡기면서, 중생제도의 원력을 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탁발은 실천적인 행의 없이 겨우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탁발 그 자체의 진리성에 대하여도 깊이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불교는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며, 모든 중생들과 함께 해탈의 길로 가고자 서원을 세우는 대승불교로 자처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파불교 시대가 밟아 온 과정을 오늘날 다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탁발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탁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붓다 재세 시의 인도사회와 현대의 사회적 환경은 너무나 다르다. 지금의 한국적 상황에서 탁발을 범대중적 행의로 개방하기에는 대내외적 제약들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더라도 그 탁발의 정신만큼은 되살려 새롭게 이어 가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탁발의 정신을 올바로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탁발의 주체적 입장과 객체적 입장에서 흔히 거론되는바, 탁발이 단순한 생활 방편이라거나 수행 방편이라는 측면과 시주의 기복을 도와주는 행위라고 인식되는 한계를 벗어나서, 불법을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진리 구현 그 자체임을 절실히 파악하여 그 정신의 실천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 실천의 중심에는 수행자, 수행법, 수행처, 재가자 등 4가지 요소가 있다. 앞의 3가지 요소들이 재가자들과 매일같이 정기적으로 접하면서 서로 전적인 수용성과 평등성으로 치우침 없는 중도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붓다가 일상적으로 행하던 탁발의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가가 세속에 쉽게 물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아서, 재가자들이 매일같이 정기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수행처와, 자기라는 섬과 법이라는 섬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 수 있게끔 올바른 수행법으로 이끌어 주는 수행자들을 항상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붓다가 매일 탁발로써 사회적 관계 속에 참여하는 통로로 삼았듯이, 승가가 발우를 내미는 자비의 손길로 먼저 재가자들에게 다가감으로써, 여태껏 불교가 소극적이고 산중 은거 중심적인 종교라는 고정관념을 떨쳐 내야 한다. 탁발의 정신과 형식을 어떻게 구현시켜야 할지 지금부터라도 모색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불교의 이정표를 탁발의 정신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이상호 / 서강대학교 철학과 중퇴. 동아대학교 행정학과, 위덕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석사 논문으로 〈중국선종수행법에 나타난 의정에 대한 연구〉(2004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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