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일본에서의 성과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전파, 발전된 보편적인 세계종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근대의 불교연구, 즉 ‘근대불교학’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 체계의 태생적 배경을 달리하는 서양에서 성립되었다. 동양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영역에서 새롭게 탄생한 서양 근대불교학은 ‘근대’와 함께 동양에 역수입되었고 일본은 그 수입 도매상이었다.

먼저 서양에서의 불교 이해와 불교학의 성립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1)

대양으로 눈을 돌려 지중해 권역을 벗어난 유럽 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조우를 통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자기와 타자(他者)의 충돌과 인식의 확대를 경험하였다. 17세기에 들어 유럽과 인도 세계가 본격적으로 대면하면서 고전 문헌을 통해 인도의 신과 세계관에 대한 정보가 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는 불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18세기 말에 가서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인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이때까지 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각각의 단편적 불교 조각이 합성되면서 서양에서 불교라는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불교의 실체가 그 윤곽을 드러내면서 불교가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다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초기의 어설픈 불교 이해는 간단히 일소되고 만다.

그렇지만 ‘과연 불교의 신인 붓다는 누구인가?’, 또 ‘기독교의 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역사적 붓다’의 발견은 이러한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종교적 의문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 역사적 붓다의 복원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신화의 세계’에서 탈피하여 시간성을 되찾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무시간(無時間), 자타(세계)의 동일시’라는 신화의 영역에서 해방된 불교는 시간의 역사 속에서 공간을 얻게 되었고 근대 학문의 세계에서 당당히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알 수 없었던 조각난 퍼즐을 맞추어 본 결과 각 지역의 불교가 동일한 근원에서 파생된 단편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 브라만이나 힌두 등 타자와의 대비를 통해 이 불교라는 조합체가 다른 세계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불교가 근대세계에서 본연의 역사성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19세기 초에 들어 ‘붓다가 신이 아닌 인간’이었음을 확고히 인지하게 되면서 불교는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의 무대로 자리를 옮겼고 이는 기존의 서양에서의 불교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동안 신격화되었던 인간 붓다와 인간으로 화현한 신적 존재인 예수를 혼동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은 아시아적 특성을 가진 인간 붓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붓다라는 역사적 인물은 더 이상 신도 예언자도 아닌 철학자로 규정되었고, 그 철학적 내용은 무아(無我)와 경험적 심리학, 또는 니힐리즘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었다.

1820년대에 근대적 개념의 ‘Buddhism’ 용어가 탄생하면서 불교는 근대세계에서 명실상부하게 ‘존재화’되었다. 타자에 대한 오해와 발견, 인식의 전환, 개념화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불교’는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첫째 학문으로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방식의 존재화, 둘째 근대 패러다임 속에서 불교라는 본질적 세계가 인정된 것(buddhology)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서양에서 불교학이 불교를 만들었음을 뜻하는데, 서양에서의 불교는 전통적 불교 세계의 밖에 위치한 것이므로 불교학을 벗어난 불교의 존립 기반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후자는 불교학이 서양의 근대 패러다임에 편입되면서 대학과 같은 근대 교육기관과 제도 속에서 근대 학문의 연구 방식을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학 연구는 점차 유럽 각국으로 퍼져서 특화되었는데 영국, 독일, 프랑스는 주로 팔리어, 산스크리트를 매개로 한 고전문헌학, 프랑스와 벨기에는 고전 한문을 통한 중국학이 중심이 되었고 러시아는 몽골 및 티베트학, 그리고 불교 논리학에서 성과를 냈다.2)

문헌학과 성경 해석학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서양에서 문헌을 통한 비교 연구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고 더욱이 불교라는 타자의 전통을 밖으로부터 관찰할 수 있었던 점은 객관성의 담보 차원에서 분명 장점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텍스트 밖의 현실 세계의 불교가 부재했던 유럽의 불교학은 제국(帝國)의 약화 이후 동기 부여를 받지 못한 채 현재에는 퇴조 기미를 보이고 있다.

대신 근대불교학은 일찍이 일본에 전해져서 100여 년의 전통이 축적되었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유럽의 바통을 이어받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일찍이 19세기 후반부터 일련의 서구유학을 통해 시작되었다.3) 먼저 1877년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파(大谷派)의 본산인 교토 동본원사(東本願寺)에서 파견한 난죠 분유(南條文雄), 가사와라 켄쥬(笠原硏壽)가 막스 뮐러(Max Mu ¨ller)에게 유학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들의 귀국에 앞서 1880년 근대적 교육기관에서는 처음으로 동경제대(東京帝大)에 하라 탄잔(原坦山)의 《대승기신론》 강의가 시작되었고 이는 곧 ‘인도철학’이라는 과목으로 개설되었다.

이는 인도에서 생성된 여러 철학의 한 분야로 불교가 범주화된 것으로 불교 대신 인도철학이 강좌명뿐 아니라 학과의 명칭으로 채택되게 된다. 난죠 분유 이후 같은 막스 뮐러에게 배운 다카쿠스 쥰지로(高楠順次郞)가 도쿄대학에 처음으로 범어학(梵語學)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근대불교학(인도학)적 방법론의 본격적인 도입과 확립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불교 세계의 ‘안’에 위치한 일본에서는 텍스트 연구를 통해 역사화된 인간 붓다의 정체를 밝히려는 서양 근대불교학의 접근법과는 시각을 달리하여 인도의 원전을 통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을 밝히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와츠지 테츠로(和컉哲郞),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와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일본의 인도학 불교학자 계보에서는 무상(無常)의 철학자로서 붓다의 깨달음과 교설에 대한 해명이 연구의 기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불교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에 도달한 전래의 역사, 그리고 경전의 순차적 성립 과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는 인도철학의 범주를 탈피하여 불교라는 보편 세계의 전개 과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로서, 근대 학문의 방법론을 통해 전통으로서의 불교를 재해석하고 보편적·객관적 조망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일본에서 수용한 근대불교학의 ‘불교’는 기존의 불교와는 개념적 의미와 역사적 함의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즉 근대적인 ‘Buddhism(불교)’이란 용어는 불교 전통이 없던 유럽에서 1820년대에 만들어진 조어로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협의의 전통적 의미를 뛰어넘는, 포괄적인 광의의 역사적 개념이었다.

여기서 수용 주체인 일본의 특수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일본불교는 흔히 종파(宗派) 불교로 불릴 정도로 종파성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일본불교의 전통에서 종파의 교리인 ‘종교(宗敎)’, 종파의 조사인 ‘종조(宗祖)’가 경전과 교학, 붓다 이상의 비중을 가졌음을 의미하며, 극단적으로 말해 불교는 없고 종파만 존재하였다고 가정한다면, 근대적인 불교 개념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종파보다 한 단계 상위 범주인 불교라는 개념에 보다 친숙했던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일본에서 근대불교학의 수용 욕구와 변화의 폭이 컸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일본적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근대불교란 메이지 이후의 불교연구를 총칭하는 것이라기보다 에도시대까지의 불교학과는 자료나 방법론, 그 의미에서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유형의 불교 연구를 지칭한다. 자료 면에서는 한역 경율론 및 일본의 저작을 성교(聖敎)로 대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산스크리트·팔리어 원전 및 티베트·한역의 일반 문헌, 그 위에 역사고고학적 자료를 폭넓게 구사하는 방식이다.

방법론에서는 종의(宗義)를 밝히는 것에 비판적 태도를 가지면서 역사학과 문헌학 또는 교리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도입하는 것이다. 또한 의미상으로도 종교적인 내면적 욕구에 의해 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지적 욕구에서 나오는 학문적 연구를 뜻한다.4)

이처럼 근대불교학적 지향과 방법론의 수용은 기존 종파적 전통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근대불교학은 좁은 의미에서는 불교 교리와 교단의 전개사를 대상으로 하는 문헌학 연구를 뜻하며 방법론에서는 철학, 종교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미술사 등 제반 분야를 망라한다.

이에 비해 일본의 전통적 교리 연구는 나라 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까지 오랜 기간 형성된 종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에도 시대에 전통 불교학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근대불교학의 도입은 산스크리트어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 고전문헌학, 네팔에 주로 남아 있던 산스크리트 불전,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팔리어 경전,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서 등 자료 면에서의 폭발적 확대와 함께 다분야 연구, 밖으로부터의 객관적 고찰 등 이전과는 다른 방법론상의 일대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엄밀한 텍스트 검증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한역 경전에 기반한 불교와 종파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종교 차원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주석학 전통과는 시각이나 방법론상의 큰 간극이 있다. 1927년 와츠지 테츠로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양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에 있는 사상을 이해하려 할 때, 자료 자체에 新·古層이 있고 그 안에 사상적 발전이 보인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산재하고 있는 여러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끌어 모으는 것은 잘못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교조인 붓다에 귀속시키는 전통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적 붓다 혹은 교조 붓다의 사상을 진실로 확정하려고 한다면 신·고층의 발견과 그 사상적 발전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원전비평이 엄밀히 행해진 후에야 역사적 붓다를 말할 수 있다. 큰 사상조류의 원천으로서 하나의 위대한 종교인이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그 인물의 삶이나 사상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 안에 어떠한 사상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뿐이다. 그에 의해 대승불교 사상의 원류나 그 전개 과정의 필연성이 이해되면 충분하다. 그 사상 중 어떤 것이 붓다에 귀속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점에서 자료가 학문적 취급을 받은 것은 유럽에서 팔리어 경전 연구가 성행하게 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5)

여기서 모든 것을 붓다에 귀속시키는 경향은 종파의 종조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인데 근대불교학적 방법론은 그러한 절대적 권위에의 귀속을 타파하고 신화의 영역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나카무라 하지메도 인간으로서의 역사적 붓다를 다룬 책의 서문 두 편에서 다음과 같이 동일한 입장을 피력하였다.

①후대의 요소를 배제하여 역사적 인물로서 석가의 생애를 가능한 사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불전을 참고하였지만 그것만을 준거로 하지 않고 원시불전에 나오는 연속적 사건의 기술까지 그 대상으로 하였으며, 팔리어, 한역뿐아니라 산스크리트, 티베트어의 원전도 비판적 검토를 가하였다. 그 위에 고고학이나 민속, 역사학적 검토를 한 후 인도사상사에 있어서 그 의의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지향한다.

②전통적 공상적 요소가 많은 여러 불전류(佛傳流)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면서 오래된 경전으로부터 단편적인 기술을 모아 위대한 역사적 인물상을 가능한 현실의 역사성에 의거해서 구성하려 한다. 검토를 거쳐 선별된 문헌, 고고학적 발굴, 불교미술품 등을 자료로 하여 역사성이나 역사적 사실을 진실에 가깝게 서술하려 한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고려하여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타마 붓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기를 바란다.6)

여기서도 엄밀한 텍스트 분석과 역사성을 최대한 고려하는 근대불교학의 원칙이 변함없이 적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근대불교학은 이러한 문헌학과 실증 역사학의 결합 형태로 일본에 수용되어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100여 년 이상 축적된 일본 근대불교학의 성과는 주제와 대상별로 크게 다섯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7)

첫째 팔리어 경전과 그에 대응하는 한역 불전을 자료로 하는 원시불교 연구, 둘째 일본의 종파불교와 관련된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불전 연구, 셋째 인도의 조사 용수(龍樹), 무착(無著), 세친(世親)의 주석서를 위주로 한 대승불전 및 《구사론(俱舍論)》 등의 아비달마불교 연구, 넷째 한역 불전 및 중국·한국불교 연구, 다섯째 일본불교 자체의 연구로서 ‘종학(宗學)의 근대화’와 일본불교사의 구축이다.

이와 함께 대장경의 간행, 사전 편찬 등 학문적 축적을 가능케 하는 기본 토대가 구축되었는데 그 가시적 성과로 다카쿠스 쥰지로가 계획하고 와타나베 카이교쿠(渡?海旭)와 함께 감수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100권의 간행(1922~1934)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표점상의 오류나 오타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당시 수집 가능한 주요 경율과 논소를 망라한 역작으로, 한역불전의 기본 전거라는 기득권을 누리며 현재까지 세계 불교 연구자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또 팔리어 경전의 번역 집성인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65권도 뛰어난 성과로 꼽힌다.

그밖에 난죠 분유의 《대명삼장성교목록(大明三藏聖敎目錄)》과 같은 불전 목록류, 모치즈키 싱코(望月信亨)의 《불교대사전》, 하기와라 운라이(萩原雲來)의 《범화대사전(梵和大辭典)》 등 방대한 양의 사전류, 그리고 《법화경》, 《유가론보살지》와 같은 범본(梵本) 문헌의 교정본 출간도 일본 근대불교학의 대표적 성과이다.

1945년 이후에는 유럽, 인도와 동남아시아로의 유학이 다시 가능해졌고 문헌학뿐 아니라 고고학, 역사학, 미술사, 철학, 종교학과 같은 여러 분야의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한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문헌학 분야에서는 범본(梵本) 불전 자료의 정리와 연구가 계속되었고 특히 티베트어 자료에 의거한 티베트불교와 중·후기 대승불교 연구가 늘어났으며 티베트대장경 150권도 공간되었다.

 최근에는 대정신수대장경의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완료되어 한역 불전의 세계 표준이라는 독점적 지위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연구자와 연구의 국제화, 연구 자료의 공개, 정보 미디어의 발전 등에서 그간 획기적 진전이 있었다.

일본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불교학 연구의 성과가 계속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제도적 기반 구축을 통한 인적 자원의 재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제국대학을 전신으로 한 주요 국립대와 여러 종립대학을 중심으로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양산, 수급되었고 교육과 학문 전통의 계승이 이루어졌다.

또한 여러 학술 단체의 학회 활동도 연구의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전국적 규모의 대표적 불교학회로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이 주창하여 1952년에 설립된 일본인도학불교학회를 들 수 있다.

일본불교 학자 대다수는 일본불교학회와 일본종교학회에도 소속되어 있고 국제적으로는 1978년에 설립된 국제불교학회(IABS)에서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1972년에 설립된 국제산스크리트학회를 비롯한 분과별 학회들도 있다.

2. 일본불교의 특수성: 공간성과 시대성

일본에서 근대불교학이 갖는 위상과 성격을 파악하려면 그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일본불교의 특수성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통시(通時)’적 대상으로서의 일본이라는 공간성과 근대라고 하는 ‘공시(共時)’적 시점에서의 시대성을 기준으로 살펴본다.

먼저 일본불교의 통시적 특성을 말할 때 제일 처음 떠오르는 용어는 ‘종파성(宗派性)’이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에 학파적 성격의 남도 6종(南都六宗)이 성립한 이래 헤이안 시대에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구카이(空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세우면서 남도 6종에 대한 자종(自宗)의 우위를 선언하고 종파의식과 독자적 인식을 적극 표명하였다.8)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국가불교, 민중불교, 재가불교 등 다양한 층위를 가진 신불교가 대두하면서 이후 종파별로 자신만의 수행 방식에 전념하는 ‘전수(專修)’적 경향이 한층 심해졌다. 일본불교사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종파불교의 ‘전수’적 방식을 매우 높이 평가한 반면 종합적, 포괄적 입장에 대해서는 불순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9)

이처럼 종파를 단위로 한 종파성의 강조는 일본적 전통으로 확고히 뿌리내리게 되는데, 이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매우 특수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명(明)이나 조선 이후 교단의 종파적 색채는 현저히 약화되고 선종, 화엄, 염불 등 불교 내의 여러 이질적 전통들이 혼재, 융합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종조의 설과 종파의 교리를 절대시하고 자파의 수행 방식만 철저히 고수하는 종파성은 분명 일본적 특수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불교의 종파적 특수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와 대비되는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해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보통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통합적이고 원융적이라는 의미의 ‘통불교’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불교의 종파성과 명시적으로 대비되는 포괄적, 종합적 성격의 불교상을 그린 것이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을 필두로 하여 식민지 때에 등장한 이 통불교 인식은10)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 고려 의천과 지눌의 교관겸수와 선교융합, 조선시대의 선·교·염불의 3문수업, 나아가 유불도 삼교의 회통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사상과 수행 기풍, 종파의 융합은 분파적 종파성에 비해 상대적 우월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 역사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는 현실 수렴적인 관념적 인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선교일치나 삼교회통과 같은 통합적 논리는 중국 사상사의 주요한 경향이었고 선과 교, 염불의 병행도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또 종파성이 강한 일본의 경우에도 각 종파의 특정 교리와 수행 방식이 그 자체로 확대재생산된 면도 있지만, 서로 간에 역할을 분담하고 영향을 주면서 큰 틀에서는 상생과 공존의 협업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통을 현재의 시점에서 환원적으로 인식할 때 ‘역사적 실상’을 간과하거나 특수론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통불교 인식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 주체와 대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실증적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그에 앞서 현재 단계에서는 주체가 상실된 포괄적 회통이나 무조건적 일치보다 ‘전수(專修)’와 ‘겸수(兼修)’의 기준으로 역사 전통을 해석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전수란 종파성을 포함한 특화된 전문성을 의미하며 겸수는 몰가치적 회통을 뜻하는 ‘전수(全修)’가 아니라 주체가 상정된 전수(專修)의 결합과 상호작용, 그것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복합적 지향을 의미한다.

사상사는 각기 다른 특수한 상황, 조건과 시대적 요청 속에서 발현되는 보편적 지향과 모색을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추수적인 통시적 일원화의 유혹을 이겨내고 시대성과 역사성에 착목해야 한다.

일본이라는 공간성을 언급할 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개념은 ‘습합(習合)’의 문제이다. 습합은 불교와 다른 전통 사상, 신앙이 서로 접목하여 융합하는, 이질적 타자 사이의 접점을 의미한다. 이는 통불교 인식과 마찬가지로 좋게 보면 다양성을 전제로 한 상생과 공존이지만, ‘근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자타(自他)의 구분을 애매모호하게 흐리면서 동일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반근대의 혐의를 씌울 수 있다.

이 근대성의 입장에서 일본사상사를 구축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원형적 발상’이라고 하는 일본적 특수성을 들어 ‘자기책임이 부재하는 굴절과 타협’이라고 규정하면서 특히 주술적, 밀교적인 경향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11) 이러한 입장에서 신(神)과 불(佛)의 습합은 당연히 주술적이고 비합리적인 원형적 발상의 전형으로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습합이라는 전근대적 유산이 근대성의 기치하에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단죄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일본사상사의 일반 특성으로 승격시켜 근세사상사 자체를 습합의 시험장으로, 다양한 사조의 종합선물세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일본 근세사상사는 체제학의 성격을 가지는 주자학 및 유학의 존재 방식을 비(非)중심화하는 방향에서, 유학과 불교 등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복합 형태로, 종합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12) 각론으로 들어가면 일본에서 유학은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약했고 따라서 근세사회의 형성에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근세사회의 공간에서 습합된 신불(神佛)이 수행했던 역할을 구분하여 신은 생식과 번영과 같은 현세적인 문제에서 경사(慶事)의 축복과 보증, 불은 죽음과 흉악에 대한 양재진호(禳災鎭護), 즉 사후와 영혼의 문제를 관장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습합은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해석을 낳기는 하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존재하였고 특히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습합을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다음은 근대불교학이 도입되고 발전했던 시기의 조건과 시대적 요청, 즉 근대의 시대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불교학자 마에다 에가쿠(前田惠學)는 근대에 일본불교가 대응해야 했던 문제로 크게 국수주의, 서양 사상과 종교, 신종교를 들었다.13)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는 이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켰다.14) 먼저 제1기는 메이지 시기 초부터 청일전쟁까지의 계몽기로서 국가신도와의 마찰과 대응, 반기독교와 반서구화로 압축되는 국수주의적 동향이 나타났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체제 지향의 틀 속에서 근대화에 매진하는 시기였는데 그 사상적 기반으로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 등의 총합적 철학과 계몽주의적 경향을 들 수 있다.

제2기는 다이쇼(大正) 중기까지의 사상 심화기로서 각 종파의 실천적 노력과 아울러 교토학파를 중심으로 한 니체와 독일 관념론의 도입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교토학파의 원조격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는 ‘현상즉실재(現像卽實在)’의 사유 방식을 표명하였는데 이후 화엄을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파악하는 시도도 니시다 철학에서 배태되었다.

제3기는 1945년 종전(終戰)까지의 국가주의 운동 전개기로서 체제 지향과 반서구적 지향의 연장선에서 결국 국가주의로 귀착된 시기이다. 국가주의적 종교 혁신운동과 초국가주의의 양축 사이에서 전시교학으로 불리는 국가주의적 교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근대 일본의 공시적(共時的) 시대성은 자기체면의 국수주의 경향과 자기부정의 근대화라는 두 축 간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생성된 것이었다. 불교학 연구도 전통적 종학(宗學)으로의 무비판적 몰두, 일본적 시·공간의 틀을 넘어선 객관적 근대학문으로의 몰가치적 매진이라는 두 개의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연구 주체와 대상 사이의 동일시와 괴리라는 상이한 결과로 나타났다.

먼저 종학 연구는 문헌학과 객관성이라는 근대적 방법론에 의해 세련되고 학문적 성과도 이루었지만 일본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 체계로의 전망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반면 인도학 불교학 분야는 일본의 전통이나 사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학문 영역에서 근대성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근대적 방식의 연구라고 해서 근대성의 획득을 반드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근대불교학이 표방해 온 객관주의와 몰가치판단, 전통불교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지양되어야 하며 불교에 대해 주체적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최근의 지적은 눈여겨볼 만하다.15)

3. 일본 불교학계의 논쟁과 전망

근대 일본 불교학계에서 제기되었던 논쟁 중 일본 불교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승불교 성립론과 비판불교의 문제를 검토해 본다. 대승불교는 서양의 초기 근대불교학에서는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양에서 초기에 입수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 고전문헌에 대승경전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대승불교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에서 문제가 된 것은 난죠 분유가 막스 뮐러에게 유학을 간 이후라고 한다.

이후 대승불교가 불교사 전체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펼쳐졌다. 대승불교의 기원과 성립에 대해서는 대승 전통의 안에 있던 일본에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1902년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대승이 붓다의 가르침인 원래 의미의 불교(원시불교)와는 다르다는 ‘대승비불교설’을 제기하면서 대승의 기원은 부파불교의 대중부에서 유래한다는 대승불교 성립사론을 발표하였다.16)

1920년대에는 유럽에서도 한역 불전을 통해 대승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가 일어났는데 마에다의 설을 받아들여 대승의 교리, 붓다론과 가장 친연성이 있는 대중부 계통에서 대승불교가 발원했다는 주장이 정설이 되었다.

이후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는 재가불교 기원론, 즉 불탑을 숭배하는 재가 신도들에 의한 새로운 종교 운동이 대승불교의 기원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이는 율장 등 여러 자료를 통해 당시 교단의 실태와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여 대승불교의 성립 과정을 추적한 것으로, 대승경전에서 부파불교를 강하게 비판한 점을 들어 부파보다는 재가신도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17)

그런데 일본에서는 히라가와의 이 설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유럽이나 미국 학계에서는 전통적인 대중부 기원설을 견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차이는 양자의 상이한 전통과 현실적 조건에서 기인하는데, ‘재가 기원설은 대승 권역인 일본불교의 재가적 입장에 부합하는 것이며 서양에서는 소승불교(남방 상좌부)의 출가주의 전통을 이은 티베트불교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18)

이러한 기원에 대한 의문과 관련하여 대승불교 성립론에는 몇 가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우선 문헌 자료에서 팔리어의 상좌부 문헌자료에는 대승이라는 단어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대승이라는 용어는 2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하고 문헌 외의 자료에서는 5세기의 비문에 처음 대승이 등장한다. 보통 대승불교는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성립되었다고 보는데 문헌상 그 실체가 입증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승이라는 용어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북전(北傳, 대승) 불교의 문헌에서, 그것도 율장을 제외한 경전과 논서 같은 사상적이고 교학적인 성격의 문헌에서 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대승불교는 북전의 경전에 토대를 둔, 제도와는 무관한 개념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19)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율장과 같은 제도를 먼저 받아들인 후 사상을 수용한 남전(南傳, 소승) 불교가 큰 변화 없이 원형을 유지한 것에 비해, 사상과 교의만을 받아들인 북전 불교는 경전의 지속적인 생성, 도입과 함께 새로운 이해 방식의 창안과 수용이 가능하였다고 주장한다.

또 계통이 다른 팔리어와 한역 경전에서 다루는 소재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대승이나 소승의 구분이 없었지만 전통적인 부파교단에서 발생, 발전한 지속적인 경전 제작 운동을 통해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대승은 불교에 부과되었던 과제의 지속적인 계승 활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직 대승불교 성립 논쟁은 진행 중이지만 서양이 아닌 일본에서 주로 이 문제가 논의되어 온 점은 같은 대승불교의 전통 안에 있는 한국 불교학계에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다음으로 비판불교의 문제를 살펴본다. 비판불교는 1986년 일본 인도학불교학대회에서 조동종 종립대학인 고마자와대(驅澤大)의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본각(本覺)사상, 특히 일본 천태종의 본각법문(本覺法門)이었다. 본각이란 중생의 마음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부처의 깨달음의 지혜를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불성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동아시아 불교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현실 긍정적 낙관론의 전형이다. 일본에서의 본각사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상한 세상 그 자체가 상주하는 것이고 각각의 인간이 모두 그대로 진여의 현현이라는 인식에까지 이르렀다.20)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떠한 작위적인 노력도 필요 없는, 즉 불교의 수행이나 의례마저도 불필요하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마츠모토에 이어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도 조동종 종조 도겐(道元)의 사상에 입각하여 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에 합류하였다.21) 비록 마츠모토가 도겐 또한 본각사상적인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재비판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비판불교를 제창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배를 탄 셈이다.

비판불교가 제기될 수 있었던 인식론적 근저에는 이들이 이론적 토대로 삼은 중관(中觀)사상이 개재되어 있다. 중관이야말로 대승의 공성(空性) 이해의 정통적 해석이라고 보는 티베트불교의 입장에 선 서양의 불교학자들도 비판불교에 대해 상당수 공감하고 있다.22)

하지만 다양한 불교 전통이 뒤섞여 있는 일본 불교학계에서는 비판불교의 도그마적 성격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으며 내심 비판불교의 칼끝이 종파불교의 전면 부정에까지 이를 것인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한편 비판불교가 가진 계몽주의적 성격이나 교단의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전통이나 민중불교를 경시하는 엘리트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23)

그렇지만 비판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예상 외로 많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든 논쟁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비판불교를 주창한 마츠모토는 1998년에 다시 비판종학(批判宗學)을 제기하였다. 이는 비판의 과녁이 종학으로 바뀐 것인데, 애초 비판불교의 구도가 조동종 계통의 마츠모토가 천태사상을 불교가 아니라고 공박하면서 시작된 것임을 고려할 때, 종학으로의 귀결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비판과 종학이라는 일견 모순된 개념이 결합된 비판종학에서 내건 슬로건은 ‘전통종학에서 비판종학으로의 이행’이었다.24)

이는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것으로 조동종 입장에서는 종조 도겐의 성역까지도 침범할 수 있는 매우 불경스러운 문제 제기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본각사상을 비판한 희유의 사상가로서 도겐을 이상화, 절대시하는 것에 대해 이는 일종의 ‘종조 무(無)오류설’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5) 이러한 비판종학의 무모한 도전에 대응하여 ‘신(新)종학, 쉬운 종학, 신(信)종학’ 등 새로운 종학을 건립하자는 주장과 움직임도 일어났다.

하지만 종학 주류 측의 반격은 아쉽게도 전통적 ‘룰’을 고수하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조동종의 종학은 도겐 무오류설의 원칙하에서 종조의 저작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취사선택하지 않으며, 도겐의 사상적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사상이나 이즘으로도 그것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교조적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문헌에 기반하여 가급적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제기되었지만,26) ‘종조의 설에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주장이 힘을 얻었다.27)

결국 종파성이 강한 일본의 현실에서 비록 비판종학이 대두되었다고 해도 종학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타자화시키는 것은 아직 요원한 듯하다. 마츠모토가 “종조를 포함한 어떠한 대상도 절대시, 신비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도겐의 사상적 변화를 인정하고 도겐이 지향하려고 한 것을 지향하여 종문의 바른 교의를 탐구하는 것이 비판종학”이라고 주장하였지만,28) 그 안에 잠재된 이중적 뉘앙스의 결론을 보면 종파불교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부동의 권위에 기대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00년 이상의 근대적 학문 전통을 쌓아 올린 일본불교학의 토대는 매우 견실하며 또한 향후의 전망도 어둡지만은 않다. 다만 일본 불교학은 인도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불교학과 전통적인 종파불교라는 두 축의 상반된 이해관계와 정체성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종학 또한 근대불교학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연구가 진척되었지만 문제는 주류 종파에 속하지 못한 불교 전통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일례로 유식이나 화엄 교학을 비롯한 에도 시대 주석서의 상당수가 아직 활자화되지 못한 채 연구 대상에서 소외되고 있다. 따라서 종파의 외연에 있는 문헌 자료와 분야를 발굴하고 개척해야 한다.

나아가 보편성을 담보한 사상사의 구축을 도모해야 한다. 일본불교학에서 보편적 담론을 펼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종파불교의 집중과 배제의 룰, 숭앙과 폄훼의 도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인데, 특수의 환영에서 벗어나 보편의 관점에서 역사상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 방향은 일본사상사의 일환으로서 불교의 전개, 시야를 확대하면 동아시아 불교에서 일본불교의 위상을 모색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자국사(自國史)의 틀을 벗어난 지역학으로서의 동아시학 불교학은 일본학계에서 이미 제기되고 있다.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불교 연구자인 기무라 기요타카(木村淸孝)는 ‘다이내믹한 불교 세계가 펼쳐져 있는 동아시아 전체의 유기적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라고 하면서 그 기반 위에 각 지역의 특수성을 조망할 때 생동감 있는 동아시아 불교의 전체상을 그릴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29)

그는 동아시아 불교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로서 한역 불전, 중국 전통 사상에 기반을 둔 불교 이해, 불전 목록 및 대장경, 전산화 등을 꼽았다. 한편 각각의 전통이 갖는 특수성으로 중국은 선종과 정토종의 우세, 한국은 교의적으로 화엄을 기반으로 한 선, 일본은 한 가지 수행법이나 입장에 귀일하는 종파불교를 들었다. 그가 제기한 동아시아론의 요지는 전체적 특징(보편, 일반)과 각각의 차이(특수, 구체)를 중층적으로 파악하면서 불교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각 전통에서 근거할 만한 불교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조망이 구체적 지점을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고 또 자료의 유통이나 사상적 교류 면에서 동아시아 세계가 하나의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보편적 시야에서 일본불교나 한국불교의 특수성을 전망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현재 불교학은 유럽, 일본에 이어 미국에서도 많은 성과가 나오고 있는데 동아시아 불교, 불교학과의 비교 차원에서 그 경향성을 살펴보자.19세기 무렵 동양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미국의 불교학은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한 축으로, 유럽에서 들어온 인도학적 문헌 연구를 또 하나의 축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아시아가 미국의 정치, 경제적인 주된 관심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제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에 진출한 군인들이 불교문화를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고 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지역 연구가 추진되면서 대학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언어와 문화 연구를 담당하는 학과가 다수 개설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종교학 방면에서 불교 연구의 비중이 높아졌고 성전 해석학을 포함한 종교학이 불교학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또 선과 티베트불교에 대한 연구자들의 실천적인 관심이 점차 제고되었다.30)

최근에는 중국, 일본 불교 중심에서 벗어나 티베트 학승의 적극적인 유치를 통해 티베트불교 및 티베트어 자료에 의한 후기 인도불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한국불교에 대한 연구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의 불교 연구는 현지 실사를 통해 의례나 교단을 해명하는 종교사회학, 철학과 종교철학, 비교사상 분야의 연구가 특히 활발하며 방법론적으로는 역사학과 문헌해석학을 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에는 많은 아시아 출신들이 있고 이들의 살아 있는 종교로서 불교가 존재하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인도학 문헌 연구 중심에서 벗어나 종교학, 문화인류학을 비롯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했다는 분석도 있다.31)

일본 불교학은 근대에 쌓아 올린 혁혁한 학문적 유산에 힘입어 여전히 세계 불교학의 중심 권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오랜 불교 전통과는 단절된 측면도 보이며 주체와 대상, 전통과 근대 사이의 이질감으로 인해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불교 사상이 새롭게 대두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동아시아와의 격리는 사실 ‘일본의 근대’에서 배태된 문제로서 그 근원에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32)

 동양의 일부였던 일본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하였고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아시아를 열등한 타자로 인식하였다.즉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을 도용하여 아시아를 정체되고 낙후된 이질적 상대로 인지하였고 일본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보편과 특수의 공유지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정했다. 일본 불교학 또한 서양 근대불교학의 인도학 문헌학적 방법론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한편 자국의 불교 전통을 특수화하고 종파불교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해 왔다.

그 결과 동아시아를 배제한 채 인도와 일본불교를 잇는 상상의 가교가 만들어졌고 또 불교의 전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사상사적 이해보다 고전 텍스트 연구에 무게가 실렸다. 이는 현재의 문제를 가급적 배제하고 고전문헌을 통해 상대를 독해하는 오리엔탈리즘적 발상과 맥을 같이한다.

일본 불교학의 향후 전망은 기존의 문헌학적, 객관적 연구방법론을 토대로 일본불교→동아시아 불교→불교와 같은 층차적 시야를 확보하여 일본적 특수성을 보편사의 관점에서 조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불교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계승과 ‘자기화(自己化)’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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