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8회 - 2009년 6월 12일

-어느 비폭력 운동가의 고뇌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서 분쟁(quarrel)의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발견한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이며, 둘째는 불신(diffidence)이며, 셋째는 공명심(glory)이다.

첫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익을 위하여 침입하게 하고, 둘째는 안전을 위하여 침입하게 하고, 셋째는 평판(reputation)을 위하여 침입하게 한다. 첫째는 자기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인격, 처자, 가축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셋째는 한마디 말, 혹은 단 한 번의 웃음, 혹은 의견의 차이 등, 자신의 신상이나 자신의 친척, 친구, 민족(nation), 직업, 가문에 대해 얕잡아보는 사소한 것들 때문에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제정치국가(諸政治國家, civil states) 밖에서는 각인의 각인에 대한 전쟁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에 의해 분명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없이 살아가는 때에는 그들은 전쟁으로 불리는 상태에 있고, 그러한 전쟁은 각인의 각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1) 1 홉스(T. Hobbes), 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l and Civil ( A Touchstone Book, 1997 [1651]), pp. 99-100. 토마스 홉스, 진석용 옮김『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나남, 2008), 171쪽 참조. 『リヴァイアサン』1 ホッブズ著 ; 水田洋訳 ; 東京 : 岩波書店 , 1954, 210쪽 참조.

1. ‘정당한’ 살인?

불교도들이 전통적으로 불살생(ahimsa) 곧 비폭력을 가르쳐 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불살생의 가르침은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가?

죽이지 말아야 할 생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람인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면 안 되는가?

불살생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우리 민족이 멸종해도 좋은가?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적군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의무가 아닌가?

정당한 살인과 정당한 폭력은 존재하는가? 소위 의전론(義戰論)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을 깊이 생각하기 위하여 세 가지 정치적인 살인 사건을 논의하고자 한다. 처음 둘은 개인을 죽인 사례이고, 마지막은 고대 인도에서 발생했던 석가족의 멸종에 관한 얘기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민족의 원수를 죽인 자는 종종 영웅이 된다. 그 민족은 독립 국가를 수립하게 되면 그를 중심으로 민족사를 다시 쓴다. 이것이 이른바 국민 국가의 역사이다. 애국애족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아군)와 ‘너’(적군)를 분별한 사랑이고 정체성(正體性)을 주장(我慢, asmimāna)하는 사랑이어서 배타적이다.

비폭력 운동가는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라와 민족이 소멸하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가? 더 크게 물어보자. 인간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 아니면 사회구조가 인간을 선하게도 하고 악하게도 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인가 사랑의 역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개인의 확신에서가 아니라 역사와 과학이 제시하는 증거를 보여주며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실존적인 것이 되면 비폭력 운동가는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2. 간디의 비폭력 사상

『이샤 우파니샤드』의 첫 구절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신(이샤 Isa)’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간디는 이 구절에서 신에 대한 비전과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영감을 얻었다. 신에 대한 간디의 이런 관념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모든 다른 요소들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

1) 진리가 신이다

간디는 먼저 진리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말로서 ‘신이 진리이시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마저도 적당하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면서, ‘진리가 신이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말은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이고, 봉사해야 할 곳은 진리이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만유의 중심에 거하고 있는 진리의 실현을 통해서만 인간 생명이 완성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진리를 실현하는 것은 신을 실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내적 법칙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에게 진리파지(眞理把持)와 자아실현은 같은 말이었다. 간디에게 신에 대한 비전, 진리추구, 모든 생명의 평등성에 대한 깨달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고, 간디는 이 셋이 정치에서도 함께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고 행동했다.

2) 진리파지와 사랑(아힘사)

간디는 시민불복종 운동, 비폭력 저항, 단식 투쟁을 통해서 악에 대항하는 강력하고 새로운 사랑의 무기를 인도와 세계 앞에 보여주었다. 그의 갖가지 투쟁술의 기초는 진리와 사랑이라는 두 원리였으며, 이 두 원리가 그의 행동을 위한 영감과 에너지를 제공했다. 우주와 인간 세계에 신이 두루 계시지만, 인간 세계에 악과 폭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간디는 악과 폭력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그것을 전부 알 수는 없다고 하면서,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악과 폭력의 존재를 허락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목숨 걸고 악과 씨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 이것만큼은 간디에게 분명한 사실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허위와 폭력에 의해 가려진 진리를 드러내어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행과 정력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것이 바로 진리파지, 곧 진리고수 운동인 것이다.

진리를 고수하는 길은 무엇인가? 진리는 모든 존재 안에 계시는 신이고,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정결하게 닦고 사랑의 길을 가야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위하여 간디가 사용했던 단어는 아힘사(ahimsa)였다.

이는 불살생이나 불해(不害), 불상해(不傷害), 비폭력으로도 번역된다. 간디는 아힘사라는 말을 확장하여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을 가리켰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며, 친절, 자비, 타인에 대한 지치지 않는 봉사로 그 자체를 표현한다. 한마디로 비폭력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자각에서 자라나는 사랑의 표현이다.

간디는 폭력을 아주 싫어했다. 그것이 내면적 약함에서 자라나온 공포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진리가 확인되고 사랑이 실천되는 세계에서는 증오와 폭력이 들어갈 여지가 조금도 없다. 폭력은 오직 다른 폭력을 부를 따름이고 개인과 사회를 더욱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 안에서 사랑을 불러내고 자신과 다른 이를 더욱 강하게 한다.

3) 사랑의 포괄성

간디는 사랑의 원리를, 인간은 물론이고 송아지와 원숭이 심지어 뱀에게도 적용했다. 그는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죽이거나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보았으므로 인간중심주의자도 아니었고, 인도인과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으므로 보통 말하는 애국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병든 송아지에게 독극물을 주입해서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었고, 소 우리에 침입한 뱀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인간의 삶에 내재해 있는 피할 수 없는 폭력성을 가슴 깊이 새겼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더더욱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간디는 깨달았다.

간디는 스스로 힌두교도라고 했다. 하지만 힌두교 신앙과 힌두교도라는 정체성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생명의 통일성과 사랑의 포괄성을 믿고서 힌두교도라는 정체성을 ‘생명’과 사랑보다는 하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3. 인도청년의 영국 관리 암살: 딩그라(와 안중근)는 내셔널리스트인가 테러리스트인가?

간디가 활동하고 있을 당시 인도에서 폭력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항거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국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모든 생명의 평등성과 사랑의 포괄성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중에 조국 인도에 대한 충성심과 영국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마단랄 딩그라(Madanlal Dhingra, 1887-1909)가 있었다. 그는 1909년 7월 1일, 안중근(1879-1910)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를 암살하기 2개월 여 전, 런던에서 인도담당 국무장관 몰리(Moreley) 경의 정치 보좌관 커전 와일리(Curzon Wyllie, 1848-1909)를 저격하여 암살했다. 저격 당시 그는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던 공학도였다.

체포되어 같은 해 8월 17일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나이 22살에 불과했다. 단 하루만의 재판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딩그라는 그 판결을 듣는 순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제 생명을 내 놓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장차 우리의 때가 올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2) 그리고 그는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2)  딩그라(Madanlal Dhingra), 『Wikipedia』. 2008.1.13.

저는 외국의 총검에 의해 속박당한 나라는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다고 믿습니다. 무장되어 있지 않은 종족에게는 공개 전투가 불가능하므로 급습했습니다. 대포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권총을 꺼내 발사했습니다. 건강도 지성도 부족한 저는 모국에 제 자신의 피를 제외하고는 바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국의 제단에 피를 바칩니다. 현대 인도가 배워야 할 유일한 교훈은 죽는 방법이고, 그것을 가르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죽는 길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제 유일한 기도는 모국에 다시 태어나서, 거룩한 명분을 위하여 또다시 죽는 것입니다. 그 명분이 이뤄질 때까지 영원히. 인도 만세.  3) 딩그라(Madanlal Dhingra), 『Wikipedia』. 2008.1.13.

인도에서는 오늘날까지 딩그라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간디는 저 유명한 『힌드 스와라즈』에서 딩그라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딩그라의 행동 및 인도에서 행해진 그와 유사한 행동에 의해 인도가 이득을 얻었다고 믿는 자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딩그라는 애국자였지만 그의 애국은 눈 먼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릇된 방식으로 몸을 바쳤습니다. 궁극적인 결과는 해로울 뿐입니다.  4) 간디, 허우성 역 「힌드 스와라즈」『문명·정치·종교』(상) (소명출판사, 2004), 321-322면. 간디는 딩그라의 행위가 ‘마취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고, 그는 겁장이며 무죄라고도 하고, 딩그라보다 그 배후에 그를 세뇌시킨 집단에 더 책임이 무겁다고 했다. 만일 그 암살행위의 결과로 영국이 인도를 떠났다고 해도 대신 누가 인도를 통치할 것인가, 영국인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악하고 인도인은 인도인의 거죽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선한가 반문하고, 인도는 살인자들의 통치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통치 아래에서는 인도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탕진되고 말 것이라고도 했다. Mahatama Gandhi E-book (Mumbai, Gandhi Book Centre. 1999), 9, 428-429, 436면 참조.

딩그라에게 암살 지령을 내렸던 인물은 당시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사바르까르(V. D. Savarkar, 1883-1966)였는데, 후에 힌두 우익당인 힌두 마하사바의 당수를 맡았다. 이 당은 제국주의 영국을 증오하면서 폭력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등 호전적 민족주의를 내걸었다.

사바르까르는 딩그라의 테러 행위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10년 3월 런던에서 체포되어 뭄바이(당시는 봄베이)로 송환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고 안다만 열도에 종신 추방형에 처해졌다. 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높아져 인도 본토 내의 감옥으로 이감되고, 결국 1924년 조건적으로 석방되고, 1937년에는 무조건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고 힌두 마하사바의 당수가 되었다.  5) Neufeldt R. 2003, “The Hindu Mahasabha and Gandhi,” Indian Critique of Gandhi ed. H. Coward. SUNY. 135쪽.

국내 사학자들은 대체로 안중근의 암살 행위를 의로운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일본과의 관계에서 찾는 한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딩그라의 행위를 비판했듯이 안중근의 행위를 비판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혹자는 영국 제국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보다 훨씬 온정주의적이어서 비폭력이 통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간디는 이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 내부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안중근의 암살 행위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없는 것 같다.  6) 한국 가톨릭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런 살인에도 적용한다면 이 ‘의로운’ 행위에 대한 논의는 훨씬 복잡해 질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성공한’ 비폭력 운동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함석헌이 지적한대로 우리 역사나 문화 전통에 종교심(깨달음)이나 비폭력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간디는 진리 앞에 민족과 국가는 우상일 뿐이라고 믿고, 개인 도덕과 국가 도덕을 가르는 모순의 경계선을 깨버렸다. 함석헌은 바로 여기에 간디의 새 길이 있다고 보았다. 비폭력이라는 진리 앞에서 안중근의 ‘애국적인 살인 행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4. 나투람 고드세의 간디 암살

간디는 비폭력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지만 이에 대해 그의 동지들조차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네루는 비폭력에 가치가 있긴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간디를 죽인 자들은 계산되고 의도된 폭력을 믿었던 자들이었다.

그 배후 세력은 앞서 언급했던 힌두 마하사바라는 호전적인 민족주의 단체였다. 1949년 간디 암살과 관련된 재판에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 1910-1949)를 포함한 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 고드세의 최후 진술

암살 이후 9개월쯤 흐른 다음 1948년 11월 고드세는 92쪽에 달하는 글을 썼고 그것을 영어로 최후 진술을 했다. 아래 긴 인용은 암살의 동기를 잘 보여주므로 우리의 논의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독실한 브라만 가족에 태어난 저는 본능적으로 힌두교, 힌두의 역사, 힌두 문화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무엇보다도 저는 용자(勇者) 사바르까르와 간디 선생이 쓰고 말한 것을 상세하게 공부했습니다.……저는 인물과 사물을 연구한 다음에 애국자로서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 힌두정신(Hindudom)과 힌두교도에 헌신하는 것을 제일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힌두정신을 전체의 일부로 여겼으며 저의 비힌두교도 시민들에게 아무런 반감도 없었습니다.……그런데 로카만야 틸락이 서거한 1920년 이후, 국민의회 내부에서 간디의 영향력은 증대했고 최고조에 달했습니다.……상식과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 슬로건(진리와 비폭력)에 반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대적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부당하여 그 대적과 싸워야 할 경우, 공격에 대한 무력 저항이 나쁘다거나 부도덕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적에 저항하고 가능하다면 무력으로 그 적을 제압하는 것을 저는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의무로 간주할 것입니다.……간디가 없어진다면 인도의 정치는 분명히 실용적인 것이 될 것이고, 보복할 수 있을 것이고, 군사력으로써 강력하게 될 것임을 느끼고 있습니다.……마하뜨마에 대한 저의 존경심은 깊고도 불멸의 것이었습니다.……저를 도발시킨 것은 무슬림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영합한 간디의 행위였습니다. ……20년에 걸친 그의 도발 행위, 그것이 마침내 제 인내심의 한계까지 몰아갔고, 제 내면의 목소리는 그를 죽이라고 충동했고,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 행동에 대해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람과 신 앞에서 선언하노니, 저는 간디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인도의 저주와 사악한 힘을 제거했다는 것을. 간디는 30년에 걸친 무모한 정책을 이기적으로 수행해서 자신들이 당한 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힌두교도에게 고통과 불행밖에 준 것이 없었습니다.……저는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단자도 아니고 악당도 아닙니다.……저는 모국에 봉사하기 위하여 제 목을 내 놓으며, 제 행위에 대한 판단을 받기 위하여 제 창조주에게로 기꺼이 갈 것입니다.……금생과 내생의 경계선에 서 있으면서 저는 간디주의라는 독충에 대해 조국에 경고하는 바입니다. 간디주의는 전국을 무슬림 지배로 만드는 것이고 동시에 힌두교 자체의 절멸을 의미합니다.……저는 비속한 사적인 동기에서 간디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 모국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명하는 거룩한 의무로서 그랬습니다.……저의 민중들이 저의 동기를 인정할 수 있다면, 저는 행복하고도 유쾌한 죽음을 맞이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간절한 심정으로 말입니다.  7) 패인(R. Payne). 1969. 『The Life and Death of Mahatma Gandhi』. E. P. Dotton. 637-641쪽.

당시 고드세의 최후 진술에 깊은 감동을 느꼈을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에 고드세와 같은 힌두 극우파는 수천 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들 극우파는 무엇보다도 힌두와 이슬람 간의 생명의 평등성, 사랑의 포괄성, 그리고 비폭력의 원리를 믿을 수 없었다.

딩그라는 인도인을 위하여 영국인을 죽였지만, 고드세는 인도인을 다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 나누었다. 그는 간디가 이슬람교도에 편듦으로써 힌두교도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그 이익과 안전을 현저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암살했다.

간디 암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인물은 앞서 딩그라에게 암살 지령을 내렸던 사바르까르였다. 그는 자신의 주저 『힌두정기』(Hindutva, 1923)에서 진정한 힌두교도의 의미 등을 추구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힌두교, 토착성, 민족주의, 소수, 비폭력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바르까르는 ‘힌두정기’란 인도의 정신적․종교적인 역사보다 넓은 개념으로 인도 전체 역사를 의미하고, ‘우리 힌두족의 전존재가 보여준 모든 부문의 사유와 활동’을 포괄한다고 했다. 8) Savarkar V.D. 2005[1923]. Hindutva. Hindi Sahitya Sadan. 4쪽.

그것은 힌두라는 말 또는 힌두 정신의 관념에 본질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식에 기초해서 인도인들은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한 것이 바로 불교였다고 사바르까르는 보았다. 국가를 건설할 뻔 했지만 불교의 흥기 때문에 좌절되었다고 하고, 특히 불교가 가르치는 아힘사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비폭력의 가르침은 정치적 야망의 세계에, 그리고 이민족과 이종족이 격돌하는 세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아힘사가 보편적 정의에 근거하고 있을 미래의 보편적 인간 상황에서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입으로 떠드는 아힘사 원리는 힌두 문명의 미세한 점을 인정할 줄 모르는 무리들의 침략을 초래할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오직 강력한 무장봉기만이 인도를 독립시켜 줄 것으로 믿었다. 사바르까르는 군사력의 신봉자였다. 그는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힘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기 때문에 힘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나의 인간 집단이 공동의 목표, 공동의 과거와 미래, 공유하는 문화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도 힘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그는 간디 암살에 관련해서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가 입증되어서 석방되었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도덕의 절대명령으로 인류의 법칙이고, 폭력은 금수의 법칙이다. 고드세와 사바르까르는 정반대를 주장했다. 그는 다른 것에서 동일한 경우, 우월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들이 살아남고 번영하고 지배할 수밖에 없고, 군사적으로 약한 국가는 정치적으로 굴종하거나 아니면 멸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폭력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여준 역사상 가장 최근의 교훈은 바로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배하고 통치한 방식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힘을 이용하여 위협하고 그 다음에는 그 힘을 직접 휘둘렀던 것이다.

간디는 역사에 나타난 폭력 행위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바르까르의 입장에서는 간디의 절대적인 비폭력 원리는 비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인 것이고, 성스러움은 없고 도리어 편집적인 무분별에 불과한 것이었다.

2) 슬픈 아이러니

1948년 1월 31일, 간디의 장례 행렬은 인도 수도 델리 시가를 지나갔다. 그의 장례 행렬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가장 위대했던 비폭력 신봉자 간디가 총독이나 수상이 되었다면 당연히 해산하고 말았을 군대가 국장(國葬)을 책임졌다. 간디는 일흔 아홉 발의 군(軍) 예포를 받았으며, 무기수송 차량이 운구를 맡았고, 영국인 장군이 장례식 전체를 지휘했다.

같은 해 2월 12일, 네루는 간디의 유골함을 지닌 채 그의 각료와 간디의 아들 람다스와 함께 알라하바드에 가서, 다음 날 아침 유골을 강가와 야무나 강의 합류지점에 뿌렸다. 네루는 세차게 흐르는 누런 강물 위에 재를 뿌리면서 말했다. “그의 마지막 여행은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슬퍼해야 하는가?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약함을 위하여, 우리 마음속의 악의와 타인과의 갈등 때문에 우리는 슬퍼하는가? 마하뜨마 간디가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은 이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9) Stanley, S. A. Nehru: A Tryst with Destin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4쪽. Wolpert,, S. A. Gandhi's Passion: The Life and Legacy of Mahatma Gandhi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259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런 말을 했던 네루는 인도의 원자력청을 키우고 통제하고 자원을 조달했다. 1974년 인도가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던 바로 그날, 인도의 첫 플루토늄 폭탄을 은밀하게 명령했던 사람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수상이었다.

5. 고대 인도 석가족의 멸망

간디를 낳은 인도에는 뿌리 깊은 비폭력 전통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 전 5세기경 일어났던 고대 인도의 석가족의 멸망에 관한 얘기가 그런 전통을 잘 보여준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배출한 석가족(釋迦族)은 불살생계(不殺生戒) 곧 비폭력을 지키려고 하다가 2천 수백여 년 전 인도에서 이웃 나라 신흥국가 코살라 왕국의 비유리왕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 종족 학살의 이야기는 초기 불경의 하나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도 종족 간에 치명적인 갈등과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 석가족은 거의 멸족했다. 제노사이드가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런 사례 중에 하나이다.  10)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본성 중에서도 동물의 선조에게서 가장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제노사이드 본성이다.” 김정흠 역. 2007. 『제3의 침팬지』. 문학사상사. 389쪽.

너무 황당한 이야기여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좀 익숙한 사람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렵다. 부당한 침략을 당해서 멸종당하는 것보다 힘껏 싸워서 살아남는 것이 오히려 지당한 일이 아닌가.

이야기의 시작은 석가족을 멸망시킨 비유리왕의 부왕(父王), 코살라족의 왕인 프라세나짓(Prasenajit, 波斯匿王)이다. 그는 석가족을 방문하여 석가족의 딸을 취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석씨들은 스스로 지체가 높다[大姓]고 여기면서 코살라족을 멸시하고 이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분개했다. 하지만 석가족은 코살라왕의 힘과 포악함을 두려워했다. 한 대신이 꾀를 내어 외모 단정한, 여종의 딸을 자신의 딸이라고 속여 왕에게 주었다. 왕은 속은 줄도 모르고 기뻐하며 그 처녀를 맞이하여 제일 부인으로 삼았다.

곧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비루다카(Virudhaka, 毘盧擇伽) 즉 비유리(毘流離)다. 나이 여덟이 되자 왕은 사술(射術)을 배우도록 왕자를 석가족이 사는 카필라바스투 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당시 신축 강당에서 그만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왕자가 석가족이 신축한 강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여러 석씨들은 그것을 보고 분노하며 ‘종년의 자식’이라고 욕하고 그를 붙잡아 강당 밖으로 내쫓고 말았다. 왕자는 옆에 있는 호고범지(好苦梵志)라는 신하에게 당부했다.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이 일을 나에게 고하라(汝當告我此事)”고.  11)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阿含部』下. 690 하.

부처님과 상당한 친분을 쌓았던 프라세나짓 왕은 아들인 비유리 왕자의 손에 의해 목숨을 거두었다. 어느 날 호고는 비유리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은 옛날 석씨들에게서 모욕당한 것을 기억하소서.(王當憶本釋所毁辱)”  12)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阿含部』下. 691 상.

이 말로 비유리왕은 분노하고[瞋恚진에], 카필라바스투를 공격하기 위하여 대군을 일으켰다.

부처님은 이 소식을 듣자 군대가 진군하는 길가에 가지도 없고 잎도 없는 죽은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고 있었다. 비유리왕은 좌선하고 있는 부처님에 다가서자 군대의 행진을 멈추고 물었다. “당신은 왜 살아있는 나무 아래가 아니라 죽은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고 있습니까?” 부처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친족의 그늘이 남보다 낫다네.(親族之廕故勝外人)”  13) 『大正新修大藏經』, 제 2권, 691 상.

멸망이 임박한 석가족에 대해 부처님은 자신의 심경을 그런 말로 밝히셨다. 이 말을 듣고 비유리왕은 옛 풍습에 따라 군대를 코살라국으로 회군시켰다.

신하 호고는 비유리왕에게 다시 그 모욕적인 사건을 상기시켰고, 왕은 분노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좌선하는 부처님을 도중에 만나자 두 번째로 회군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부처님은 석가족이 공격을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라고 보고, “그 인연은 썩지 않는다(此緣不腐敗)”라는 말과 함께 체념하고 말았다. 비유리왕은 이제 카필라바스투로 진군했다. 석가족은 뛰어난 궁술로 비유리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사람은 물론이고 벌레 한 마리조차 죽이지 않는 선법(善法)의 전통을 고수했다.

1) 축출된 사마 동자

이 때 석씨의 사마 동자(奢摩 童子)가 등장한다. 나이 열다섯 소년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신출귀몰의 무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석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비유리왕 군사와 싸워 적군을 많이 죽였다. 비유리왕은 너무 무서워서 땅굴 속으로 피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석씨들은 사마 동자를 영웅으로 기록하는 대신 그를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너는 왜 어린애로서 우리 집안을 욕되게 하느냐. 너는 우리 석씨가 착한 법을 수행하는 줄은 모르느냐. 우리는 벌레도 해치지 않는다. 더구나 사람의 목숨이겠느냐. 우리는 저 군사들을 다 쳐부술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만 사람들을 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무수한 중생을 죽이는 것을 계획해서는 안 된다’라고. 세존 역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면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간다. 만일 인간으로 태어나면 수명이 매우 짧다.’ 너는 빨리 떠나라. 여기 있지 마라. 14) 汝年幼小何故辱我等門戶. 豈不知諸釋修行善法乎. 我等尙不能害虫. 況復人命乎. 我等能壞此軍衆一人敵萬人.然我等復作是念. 然殺害衆生不可稱計. 世尊亦作是說. 夫人殺人命死入地獄. 若生人中壽命極短. 汝速去不復住此.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阿含部』下. 691 하.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훈계로 들린다. 석가족에 대한 사마 동자의 사랑과 용기를 높이 치하해도 모자랄 텐데 추방이라니! 이 훈계에 대한 동자의 반응은 기록에 없다. 보통 집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불살생을 선법으로 지켜온 석가족은 종족애에서 나온 사마 동자의 살인 행위를 종족에 대한 모욕으로 규정하고 소년을 꾸짖은 다음 성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제 비유리왕의 무력에 대항할 자가 없어졌다. 더욱이 석가족은 성문을 포기하다시피 열어주었다. 왕은 석가족을 생포하여 거의 다 죽였다. 경전은 비유리왕의 포악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 석씨 종족 백성들은 너무 많다. 칼로써는 다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모두 다 잡아다 땅 속에 다리를 묻은 뒤에 사나운 코끼리로 하여금 모두 밟아 죽이게 하라.” 15) 『한글대장경 增一阿含經』2. 1995. 동국역경원. 14쪽.

살해당한 석가족은 9천9백90만에 달하고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었다(流血成河)고 적혀 있다.

살아남은 석씨족 여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비유리왕은 통정(通情)하자고 회유하고 희롱하고 협박했지만, 여인들은 종년에게서 난 종자와 어찌 정을 통할 수 있겠느냐(何故與婢生種情通)고 반문했다. 16) 『大正新修大藏經』 제2권 『阿含部』下. 692 상.

이에 비유리왕은 화를 내고 여인들의 손발을 자르고 모두 깊은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 그런데 부왕을 죽이고 종족 학살을 자행했던 비유리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전은 그 왕과 군사들은 홍수가 나서 모두 죽었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이 경전에 기록된 것만을 중심으로 해서 얘기를 정리해보자. 여기에는 우월감, 차별의식, 기만, 모욕, 기억, 분노, 전쟁, 종족애, 폭력, 비폭력, 인종청소라는 이슈가 다 들어있다. 적어도 경전에 따르면 석가족은 뛰어난 궁술로 비유리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불교 재가신도로서 불살생계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우다가 멸종당하고 말았다. 17)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석가족이 멸망한 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 였을 것이고, 석가족이 멸망에 임박했다면 부처님이 그렇게 반응했을 것이라고 경전 저자들이 상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中村元. 1969.『ゴ―タマ ブッダ―釋尊の生涯,』(春秋社), 412쪽. 나카무라와 에띠엔 라모뜨(Ėtienne Lamotte)는 모두 석가족의 멸망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다. 라모뜨 저 호진 역, 2006. 『인도불교사 1』, (Ėtienne Lamotte저), 시공사, 45쪽.

이 경의 핵심은 인과응보의 가르침에 있는 듯하다. 사마 동자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석가족이 불살생계의 선법을 지켜오고 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명의 경전 작가들이 창조한 인물일 수도 있다. 사마 동자는 성이 무너지면 종족은 살해당하고 여인들은 능욕당하고 마침내 석가족은 멸망할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불살생계를 무시하고 단신으로 나가 싸우고 적을 죽였다. 임전무퇴(臨戰無退)를 몸소 실천한 용감한 소년으로서 저항 폭력이나 방어 전쟁에 가장 잘 어울리는 행위를 한 셈이다. 그런데도 석가족도, 불교 경전을 지은 인도인들도 사마 동자를 전쟁 영웅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6. 신라의 전쟁 영웅 관창(官昌, 645-660)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전쟁 영웅이 많다. 고구려의 광개토왕, 신라의 김유신, 백제의 계백, 고려의 강감찬, 조선의 이순신, 근대의 안중근 의사까지 모두 전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화랑(花郞) 관창도 전쟁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는 사마 동자보다 1천 년쯤 뒤에 태어났지만 사마 동자가 싸우다 추방당한 바로 그 나이, 즉 열다섯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관창은 품일(品日) 장군을 아버지로 두고 어려서 화랑이 되었으며 말 타고 활 쏘는 데 뛰어났다. 660년 왕에게 천거되어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좌장군 품일 밑에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대치했으나, 계백이 이끄는 백제 결사대에 밀려 처음 4차례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사기만 떨어졌다. 전세가 불리하자 품일은 아들을 불러 이 싸움에서 공과 명예를 세울 것을 독려했다.

이에 관창은 백제 진영에 뛰어들어 싸우다 사로잡혔으나, 계백은 소년의 용맹에 탄복하여 살려 보냈다. 그러나 다시 적진에 돌입했다가 또 사로잡혔다. 계백이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내자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에 자극되어 분전함으로써 백제군을 대파했다. 무열왕은 그 전공을 높이 기려 급찬(級飡)이라는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이렇게 화랑 관창은 삼국사기에 전쟁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관창보다는 한 세기 정도 앞서 살다간,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 542/554경-640/637경)와 그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속오계란 그가 화랑에게 실생활의 윤리로서 제시한 것이다. 오계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다. 화랑 관창은 세속오계를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의 계율에 따른다면, 관창이 왕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살인한 것은 결코 파계가 아니다. ‘살생유택’은 ‘무분별하게 살인을 하지마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필요하면 죽여도 된다’는 식으로 살인을 허용하고 전쟁 영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명령이기도 했다. 그 계율을 만든 자는 바로 불교 승려 원광법사가 아니었던가?

한국사에 전쟁 영웅은 많다고 했다. 침략이 많았던 한반도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전쟁 영웅이 필요했으리라. 우리 민족은 간디와는 달리, 인간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가 아니라 전쟁의 역사로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비폭력을 문화적·종교적 이상으로 만들지 않았다. 우리의 공식 역사는 비폭력 원리보다는 원광법사의 살생유택을 행동 규범으로 삼았고, 진화생물학자나 사회심리학자들, 그리고 홉스처럼 “자신이나 가족 또는 무고한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폭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저・김한영 역. 2004.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555쪽.

7. 간디의 비폭력의 길

간디가 가르친 비폭력의 복음과 사바르까르의 폭력의 원리 중, 우리는 보통 개인과 국가의 삶에서 주로 폭력(힘)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병역 의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는 군사력과 경제력, 외교력 등의 힘을 배양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고, 국민에게 경쟁력의 향상을 부단히 설파하고, 힘의 원리를 깊이 각인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간디는 만일 폭력이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는 힘이었다면, 인류는 예전에 다 멸종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9․11테러와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폭력의 끝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목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간디는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인도를 해방시키려고 하면서도 사랑의 원리를 고수하고자 했다. 정치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에게서 탐욕과 분노, 무지를 제거하여 참 자아를 실현하려고 했다. 자신의 생명을 진리와 사랑의 제단에 던졌다는 의미에서, 그가 간 길은 부처와 예수의 길과 비슷해 보인다. 민족과 국가의 생존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폭력옹호론자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은 집단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다. 비폭력의 제단에 자기를 희생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점에서는 사바르까르와 네루, 우리는 서로 비슷해 보인다.

간디는 어떤 적수라도 대면하여 화를 가시게 하는 미소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간디는 “하고 죽어라”라는 자신의 주문(呪文)대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고대 인도가 가르쳐 준 고행(苦行)의 힘에 대해, 아힘사가 원자탄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에 대해 대부분의 인도인들을 감화시킬 수 없었다. 간디는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암살자의 손에 의해 죽었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죽어갈 사람으로 간디가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8. 저항적 폭력

우리가 제기하고 답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인간의 본능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사마 동자의 항전에 대한 석가족의 태도이다.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은 홉스가 말하는 분쟁의 요인 중 세 번째, 곧 코살라국의 명예나 영광을 무시한 것이었을 것이다. 사마 동자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종족의 몰살을 막기 위하여 임전무퇴(臨戰無退)를 몸소 실천한 용감한 청년으로서 저항적 폭력에 가장 어울리는 행위를 했다. 2천여 년 이후, 힌두교도 고드세가 이런 얘기를 알았다면 사마 동자를 영웅이라고 칭송했을 것이다. 물론 힌두교의 영웅이 아니라, 석가족의 영웅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마 동자는 그만 석가족으로부터 추방되었고, 딩그라는 당시 자신의 가족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했고, 고드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간디는 국가 권력에 의한 사법 살인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었지만, 고드세의 처형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 항의한 사람 중에 영국의 젊은 퀘이커 레지날드 레이놀즈(Reginald Reynolds, 1905-1958)가 있었다. 처형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거 인도에 들어와서 소위 간디의 추종자라고 알려진 모든 관리들을 만나 간디라면 교수형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설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용히 경청한 다음 그 사안은 이제 자기들 손을 떠나 이미 법정이 판결을 내려버렸다고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얄궂게도, 인도 법정의 판결은 영국에서 진행되었듯이 정확히 동일하게 진행되었다.”고. Payne, 1969. The Life and Death of Mahatma Gandhi, E.P.Dotton, 646쪽 참조. 레이놀즈는 영국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자이고, 간디에 대해서도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네루와 간디의 두 아들은 피고인들의 감형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1963년 인도에 고드세의 관점에서 본 간디 암살을 다룬 영화가 있었고, 2000년 인도 텔루구 대학에서 ‘나 나투람 고세가 말하네’라는 제목의 연극이 상연되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고드세의 관점에서 암살 사건을 다룬 것이다.

석가족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믿었더라도,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이 유전적 설계의 일부라고 믿었더라도 폭력 저항을 포기했을까? 진화생물학자나 사회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신체와 뇌를 공격을 위한 설계의 직접적인 증거로 보고 있다.20) 스티븐 핑커, 위의 책. 553쪽.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나 가족 또는 무고한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폭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고 한다. 21) 같은 책. 555쪽.

우리 대다수는 석가족의 사마 동자나 신라의 관창이 이상적인 영웅이고, 석가족은 지독히 비정상이어서 “망해 싸다”라며 비웃을 것이다.

9. 결론: 전쟁 영웅 vs. 비폭력운동가

우리는 두 건(또는 세 건)의 정치적인 살인 사건을 목격했고, 석가 종족의 학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22살의 딩그라는 인도인의 이익과 안전 그리고 명예를 위하여 대영 제국의 관리를 죽여야 한다고 믿고 실천했다. 고드세는 힌두교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슬람교도에게 영합하는 간디를 죽였다.

강력했던 코살라족은 무시와 기만, 모욕당한 것을 기억해서 잔혹한 보복 공격을 가하여, 상당한 궁술과 비폭력 정신이 있었던 석가족을 거의 멸종시켰다.

딩그라(그리고 안중근), 고드세 및 비유리왕은 ‘정당한’ 폭력과 살인, 전쟁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항 폭력이나 저항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영국과 일본 그리고 신생 인도 정부는 딩그라, 안중근, 고드세를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테러 행위자’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을 행사하여, 이들 범법자를 체포하고 재판하여 처형했다.

이런 국가의 행위에 대해 다른 국가는 관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딩그라와 고드세의 살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한편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고 다른 편에서 보면 독립투사인데, 누가 누구를 보고 역사를 왜곡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인도는 민족자결(民族自決)과 국가 주권의 입장에서 처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가? 그리고 테러 행위가 정당화된다면 대테러 전쟁(war against terrorism) 역시 정당화되는가?

위에서 사례로 제기한 모든 ‘살인자’는 나름대로 애국하고 애족하는 사람이었다. 민족의 자기 정체성을 믿고, 그것을 훼손하려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면서 ‘살신성인’을 이룬 인물이다. 애국애족의 행위는 배타적이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그것을 정당화해왔다. 하지만 애국애족의 태도는 생명의 통일성과 사랑의 포괄성을 정면에서 부인하기 쉽다.

‘나는 나’와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의 주장은 인간의 삶에서 거의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현실 역사를 두고 보면 정체성—곧 인간, 국민, 민족의 일원, 종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의 유지와 보존 없이 사람의 생존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에게 애국애족의 마음이나 구국의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체성 유지가 분노와 폭력을 나아간다면 그런 정체성은 허구인가? 정체성 유지와 비폭력 실천이 공존할 수 없을 때 정체성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서 윤리적으로 최상급의 정체성을 ‘인간’이나 ‘생명’에 둘 수 있을까?

이익과 안전, 명예를 위하여 만인은 만인을 공격한다는 홉스의 인간 본성론이 옳다면,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우파니샤드의 말과 이에 대한 간디의 믿음은 거짓이 되고 만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사바르까르가 주장했듯이, ‘이민족과 이종족이 격돌하는 세계’에서 비폭력 원리는 시기상조라고 해야 할 것이고, 살인 금지를 명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정당화하는 조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제노사이드와 같은 반인류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를 방지하고 처벌할 세계시민적 규범을 법제화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우리 역사에는 전쟁 영웅이 많다. 전쟁 영웅 없이 역사가 지속되지도 않았겠지만 이들이 즐비한 역사도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쉽게 분노하고 사납게 행동하는 사람이 흔한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비폭력 영웅 하나 없이 전쟁 영웅만을 쳐다보며 살아온 우리 역사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역사의 추동력이 전쟁과 폭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부처님의 삶,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세상을 구한다는 예수님의 삶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한낱 전설로 치부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내부에 생명과 평화의 정신을 확산시키고 쉽게 화내고 공격하는 성향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역사에 비폭력 영웅 몇 사람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화랑 관창이나 안중근같이 목숨을 바친 영웅을 어찌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전쟁 영웅밖에 없는 역사는 분명 ‘일그러진’ 역사가 아닐까?

비폭력 운동가는 서 너 가지 정치적인 살인 사건을 보면서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그녀는 살인과 전쟁을 용인하는 조건을 인정하여 전쟁 영웅을 내세우는 기존의 주류 역사관을 수용하기도 어렵고, 부처와 예수, 그리고 간디가 가르친 사랑의 원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이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는 힘이었다면 인류는 예전에 다 멸종했을 것이라는 간디의 확신은 진실일까? 개인의 신조를 묻는 것이 아니다. 정치학, 역사학, 생물학과 같은 과학이 제시하는 증거도 검토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도덕적 천재들의 신념과 행위는 인간 과학을 전부 합한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인가?

허우성
철학과 교수, 비폭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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