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시인

우리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은 많아도 행복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부자가 되기보다 행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일까. 겉으로 경제문제로 출혈이 심한 우리 사회는 실상은 극심한 행복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하리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부자가 되기까지 삶의 시간들은 행복하지 못해도 좋다는 말일까?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부자도 있고 행복한 사람도 있다. 이 둘은 차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부자는 그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 재산의 정도를 알기 어렵지만 행복한 사람은 전 재산이 얼굴에 다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다. 부는 전염되지 않지만 행복의 향기는 전념성이 강하여 그를 만나는 사람까지 행복으로 인도하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죽음은 그 사람의 삶을 현상하여 보여 주는 사진이다. 우리는 동시대인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간 두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2세인 모 그룹 회장이고 한 사람은 같은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시인이다. 한 사람은 자신이 지어올린 사옥의 집무실 창문으로 떨어져 죽었고 한 사람은 그 빌딩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뒷골목을 전전하며 막걸리 한 잔 값으로 하루치의 행복을 살다 죽었다.

사정이야 어떻던 재벌 2세는 죽음을 맞는 순간 너무 바빴던 나머지 유서를 쓸 짧은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것 같고, 가난한 시인은 조그만 찻집에 달린 단칸방에서 죽기 전에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부유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이 다르듯이 가난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도 같을 수는 없나 보다.

뒤집으면 보인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어 말이란 얼마나 불편한 도구인지 왜 말은 대부분 뒤집혀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부자는 적어도 행복한 사람은 많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행복은 삶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정신이 생산해 내는 에너지다. 사람에게는 행복하지 못할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수 없는 생각이 존재한다. 오늘을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니 부를 얻고 난 뒤에 행복하려고 하는 것보다 행복하면서 부를 얻는 편이 훨씬 빠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견디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바른 길이 아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좀 억울한 말이지만 행복은 행복한 사람만 찾아다닌다. 그러므로 행복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한 사람이 돼야 한다. 눈앞의 어떤 현실도 행복으로 요리해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떻게 행복 요리사가 될까? 행복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지극히 사랑할 때 발생되는 염파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재료는 공평하게 무한으로 공급되고 있다. 그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부자가 되는 일에 비해 너무 쉽다. 부자는 힘들여 이룩하는 것이지만 행복은 눈이 밝으면 누구나 발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데는 많게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지만 행복의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는 데는 적게는 3분, 더 빠르게는 3초, 그 이하로 가능할 수도 있다. 행복은 삶이 도달하는 결승점이나 골인점이 아니라 매 순간의 발견이요 태도요 방식이니까.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깝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본다. 애쓰지 않아도 무성하게 자라 숲처럼 머리통을 감싸고 있는 이것들의 부드러움을 손가락 사이로 느껴 본다.

 손가락들의 수고와 발과 다리와 내장과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있는 허파와 허파 속으로 들어와 숨과 숨을 이어 주고 있는 낯선 공기들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오늘도 새로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살 속을 여행하며 나를 이루고 있는 물들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본다.

손바닥에 닿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면. 마음! 이 얼마나 그립고 막역한 친구로 함께해 온 것이던가? 어린 시절부터 나를 격려하고 기다리고 때론 섭섭해 하고 절망하고, 때론 기뻐하던 이것을 들여다보면 눈물 나게 가엾고 사랑스럽다. 나는 마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이 기뻐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우리는 빚이 많다.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흙에 뿌리를 내려 잡풀들 속에서 열심히 잎을 기르고 열매를 맺고 있는 푸성귀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깊은 바닷속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큰 고기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는 어린 멸치 떼를 생각해 보는 일도 좋겠다.

멸치 떼를 건져 올리느라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돋보기를 쓰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늙은 어미를, 그것을 싱싱하게 배달하느라 밤새도록 트럭을 몰고 올라오는 사람을, 새벽 어시장을 생각해도 좋겠다. 모르는 사람들이 신을 구두를 평생 동안 만들고 있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싣고 졸음을 참으며 밤길을 달리는 기사를 생각해도 좋겠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높이 열려 있고 땅은 튼튼하게 받쳐주는 이 땅에 봄이 오고 꽃이 피어 열매 맺는데 나는 이곳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세상은 나를 낳고 먹이고 가르치고 키우니, 그래서 삶이 무겁고 슬프고 기쁘고 설레고 꿈꿀 수 있으니 어쩌면 좋은가? 이 모두를 볼 수 있는 눈과 무한한 몽상의 자유도 함께 가졌으니. 그러니 공짜로 얻은 이 삶을 통째로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어쩔 수 없다. 세상에 와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소멸하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을 보내면서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길과 그 길을 쉼 없이 가고 있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 나보다도 더 깊고 뼈저리게 저 밑도 끝도 없이 척박한 삶을 사랑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 세상에 와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소멸하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을 보내면서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길과 그 길을 쉼 없이 가고 있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 나보다도 더 깊고 뼈저리게 저 밑도 끝도 없이 척박한 삶을 사랑한다.

우리는 한 마리 새를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공간을 정복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여기’뿐이에요. 그리고 시간을 정복하면 남는 것은 ‘지금’뿐이에요. 그러므로 ‘여기’와 ‘지금’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몇 번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리처드 바크(《갈매기의 꿈》 저자)가 조나단이라고 이름 지은 새다. 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친절한 스승이요 사랑스러운 벗이다.

 삶의 실체를 깨닫는 데 있어 시간과 공간은 어쩌면 실존하지 않는 불필요한 설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 어디서고 생각날 때마다 ‘지금’ ‘여기’에 나를 불러오기를 시도한다. 우리가 행복으로부터 멀리 있는 순간들은 대체로 의식이 ‘지금’ ‘여기’에 거주하지 못하고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오지 않은 과거나 미래의 불쾌나 불안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사랑과 평화를 느끼느라 내 입은 미소한다. ‘그윽한 행복’이라고 그 친근하고도 생소한 것을 불러보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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