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 중학사상연구회 회장

한국불교는 지금 세계적으로 왕성한 입장에 있다.

 이는 불교인들의 공도 크겠지만 지금 종교적 심성이 가장 활발한 곳이 한국이다. 한국인들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심성으로 살아가는 민족이다. 세계적으로 종교가, 그것도 여러 종교가 함께 성한 곳은 한국뿐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대한 연구를 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연구 과정에서 하나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중국 의존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다. 중국불교가 인도불교를 받아서 주체적으로 토착화하여 선종(禪宗)을 만들어낸 것에 비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아시다시피 중국불교는 인도불교를 받아들여 구마라습 때 역경 사업이 이루어지고, 현장 때 다시 역경 사업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대대적인 역경 사업,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를 거쳐서 토착화의 길을 걷는다. 중국불교가 명실공이 중국화된 것은 바로 달마가 동쪽으로 오고, 달마에서 비롯되는 선종이 자리 잡고부터이다. 선종은 중국 도교를 분모로 해서 토착화한 종파이다.

이는 주자학이 불교(선종)와 도교를 분모로 해서 일어난 신유학이라는 것과 맥락이 같다. 당시 중국에는 북종선, 남종선, 그리고 남종선 내에서 간화선(懇話禪)과 묵조선(默照禪) 계통의 소위 5가7종이 있었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 온다.

그런데 중국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 위에 선종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왜 한국의 독자적인 불교 종파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다시 중국 선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마치 중국불교의 향배에 따라 우리는 저절로 움직이는 시계추와 같다. 9세기 말부터 신라는 선종이 득세한다. 물론 교종의 화엄(華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유행처럼 선종이 번진다. 화엄종 자체도 4조 징관(澄觀)에 따라 화엄선이 되고 화엄선에서 이미 돈오종(頓悟)의 가풍이 일어나고 선종(禪宗)에 이르러 돈오가 완전히 정착된다. 선종은 점수(漸修)의 가풍이 더러 고개를 들지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우세를 유지한다.

신라시대에는 자장의 계율종(戒律宗), 의상의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법상종(法相宗) 등이 있었다. 원효가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로서 원효종(분황종, 해동종으로도 불림)을 제창하지만 토착 한국불교로 성공하지 못한다. 이때가 자생 불교 종파가 들어서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당시의 실패는 문화적으로 보면 뼈아픈 것이다. 원효의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칭호와 통불교의 전통은 남았지만 독자적인 한국불교 종파는 없다. 물론 불교의 깨달음으로 보면 “무슨 상관인가, 깨달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와 같은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불교는 깨달음과 상관없이 문화적 주체화의 일환으로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중국은 왜 선종을 만들어냈던가.”

그 후 중국 선종의 도도한 흐름에 교종은 맥을 추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천태종과 밀교가 선종에 위협을 가하였으나 어려운 시기를 선사들은 산중에서 슬기롭게 넘긴다. 이는 금(金)과 원(元)에 밀려 어려운 시절을 보낸 중국 선종과 같은 입장이다. 최근 중국 사천 지방에서 정중종(淨衆宗)을 세우고 출중한 제자들을 길러 중국 선종사를 장악한, 신라 성덕대왕의 셋째 아들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 스님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다. 지금까지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로 이어지는 법통을 신주 모시듯 하는 한국 조계종으로서는 갑자기 불거진 정중무상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입장이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보조지눌(普照 知訥. 1158∼1210)이냐,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냐, 도의(道義, 생몰 미상)냐를 놓고 종조시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절충 타협으로 내놓은 것이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으로부터 법을 받아 가지산문을 연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중흥조 지눌, 중창조 보우로 입장을 정리해 놓고 있는 셈이다.

신라승 무상 스님에 대해 일본 불교학자들은 이미 많은 연구를 해 왔다. 단지 무상이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큰 인물로 부각되면 일본으로서는 불리해지는 부분이 있어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해명하지는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무상이 중국 오백나한(제455번째)에 든 사실을 비롯하여 그가 세운 절과 재배하고 마신 차나무가 거론되는 등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점할 그의 위치와 비중은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결과로 볼 때 북종선과 남종선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때, 사천 지방의 정중종은 마조, 규봉종밀 등 출중한 선사들을 배출하여 당시 가장 교세가 좋았던 강호(江湖: 江西와 湖南)에 들어가게 되는 형국이다. 사천문중은 그 후 강호에 군림하게 된다. 마조도일은 육조혜능의 문중에 편입되며 그의 제자들인 서당지장, 남전보원(南泉普願), 백장회해(百丈懷海) 등 출중한 제자들은 가문을 번성케 한다. 이 과정에서 정중문하(淨衆門下)의 마조와 종밀은 도리어 서로 헤게모니를 다투기도 했다. 이것은 규봉종밀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에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7문이 바로 마조의 제자에서 비롯되었다. 4조 도신(道信)에서 비롯되는 희양산문과 7조 청원행사(靑原行思)에서 비롯되는 수미산문을 제하면 모두 마조의 문하에 있다. 선종의 법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왜 한국에도 훌륭한 선사들이 많은데 중국에서 법통을 끌어대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왜 거기에 급급하냐 하는 것이다.

또 그동안 고승대덕들이 많았는데 왜 한국에서 출발한 종파 하나가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선종이냐, 교종이냐를 떠나서 한국 불교 저류에 흐르는 중국 사대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분명 우리와는 달랐다. 아무리 외국에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들여온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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