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영 한국관광대학 교수

우리는 어디서 온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현대화, 기계화된 오늘이라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시계는 두 팔을 휘저으며 노예 부리듯 우리를 땀 흘리고 쫓기며 일하게 한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문제와 어려움은 있어 왔다. 또한 그 같은 환경 속에서 많은 철학가들과 종교는 인간의 좀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 왔다.

데모크리토스는 행복과 불행은 영혼의 현상이라 말했다. 명예, 권력, 재산 등 외적인 조건이 행복의 결정 요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 행복의 결정 요인이라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와 소크라테스에서 출발한 내면화, 지성, 도덕적 행복 개념은, 뒤를 잇는 플라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와, 헬레니즘 시대와 플라톤학파 등에서 계속 언급된다.

소크라테스는, 행복을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 행복에 도달하려면 덕성만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후계자인 플라톤은 가장 착한 사람이 가장 행복하며 가장 사악한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외적 조건과 관계없는, 내면적 보상과 관계하는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철학자의 삶 자체가 중심적 자산이며 도덕적 정치적 처세가 부차적 자산이라 했다. 정신의 행위가 행복의 본질적인 것이며 여기서 완전한 행복이 나온다고 했고 정신의 행위만이 실제 행복을 생산한다고 했다.

현대의 행복에 대한 해석에는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특정한 자산이 최종적으로 개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적합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견해다. 자산이란 사적이며 주관적이고 인간 개체들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행복의 효과를 자산에 의해 계획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다고 본다.

둘째는 경제와 기술적 진보가 행복의 전제 조건들을 분명하게 규정, 보장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경제적 의미를 많이 수용하고 그 대신 종교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상당히 잃어버리게 하는 경향이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내면화와 도덕화에 의한 행복 추구에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

 J .J.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은 현대인들의 사상적 특징의 하나는, 이성이나 내면세계의 탐구나 존중에 점차 게을러진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지나친 진지함이나 이성의 깊이에 무게 중심을 놓아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가벼움과 감성과 감각의 세계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행복의 세계는 현대인에게 진부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시카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심리학을 연구한 칙센트미하이(2007년 11월 한국 방문, 《몰입의 즐거움》 저자)는 어떤 행위에 강렬하게 몰입한 느낌을 흐름이라고 한다.(칙센트미하이는 플로우flow라는 용어를 쓴다.) 그림이 잘 그려질 때 화가가 피로와 배고픔과 불편을 까맣게 잊고 몰입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등반가, 서양장기 기사들, 외과 의사, 작가, 장인들 등을 조사했다.

그들이 각자의 일에 몰두할 때 대상에 몰입하여 자아에 대한 감각이 해체된다. 흐름을 경험할 때 대부분 행위와 외부 환경과 생각 사이에 공명 상태가 정립된다. 이러한 경우 황홀경 같은 매우 만족스런 행복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는 자신을 관찰하는 주체의 각성 상태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다림질 같은 매우 일상적인 일에 몰두할 때도 이 같은 흐름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보들레르는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술이든 시든 무엇이든, 숙명적 고독감과 인간의 운명적 한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취의 상태를 권유한다. 그리고 그는 욕망에 시달리는 예술가는 행복하다고 했다.

최근에는 행복연구학(Subject Well-Being, S.W.B)이 생겼는데, 네덜란드의 루트벤호벤 교수는 그 대표적 학자다. 그는 행복 데이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한 어디로 가면 행복해지는지, 어디에 어떤 행복이 있는지 알고 싶어 네덜란드, 스위스, 부탄, 카타르, 태국, 영국, 인도 등을 여행하고 《행복의 지도》라는 책을 낸 에릭와이너는 공간 이동을 통해 행복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며, 필자 또한 수없이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여행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찾아보려 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은 딸기에는 딸기의 맛이 있듯 인생에는 행복의 맛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의욕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행동가로서 행동하면서 사색하라. 사색가로서 사색하면서 행동하라.”는 알랭의 말은 관념적인 행복을 부정하고 실천적, 실질적 행복을 역설한 핵심 전언이다. 행복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간이 가지고 싶어 하는 최상의 어떤 것이다.

이 같은 최상의 것을 가지기 위해 의욕과 의지, 행동, 사색을 가져야 하며 행복하고자 원하면 행복한 사람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알랭은 역설했다. 행복한 사람의 태도를 취하면, 스스로도 행복해질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행복을 옮겨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현상은 행복 바이러스인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 온 많은 종교들은 사실 인간을 위한 행복학이다. 그리고 수많은 철학가들은 인간의 행복을 끝없이 논의해 왔다. 행복학까지 등장하고 있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 각자는 알랭의 주장처럼 행복을 위한 좀 더 적극적 의지와 노력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등장인물, 레날 부인이 줄리앙을 사랑하면서도 (연애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어) 자신이 느끼는 것이 사랑인지도 몰랐듯이, 우리도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이 행복인지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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