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 포항공과대학교 교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 시절에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서 한국문학집을 탐독하였다. 당시는 인터넷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텔레비전도 정규 채널 몇 개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학생들이 책을 많이 읽었다.

친구가 다니던 경기고등학교 문집에 실린 글 중 시장에서 닭장사를 하는 부모를 둔 아이의 글이 있었다. 시장 닭장사집에서 목이 잘린 채 달려 도망가는 닭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시장을 지나갈 때 유심히 보니 닭집 주인이 살아 있는 닭의 목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큰 칼로 내리쳐 단칼에 목을 잘라내고 닭 몸통을 옆에 있는 물이 팔팔 끓는 솥으로 던져 넣었다. 그 와중에 목을 잃어버리고서도 용케 손아귀를 벗어나 목이 없는 채로 죽어라고 달려 도망가는 놈도 있었다.

세상에 그런 지옥이 없었다. 닭 지옥이 있다면 분명 그중 하나였다. 닭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닭이 다른 생물에 해를 끼친다면 지렁이 살해 정도인데 그런 이유로 닭이 지옥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다른 생물들에 해만 끼치는 인간은 훨씬 큰 지옥고를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어느 고승도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으니 궁금증은 더 커질 뿐이다.

1990년 안식년으로 이태리에 반년을 머물던 중 가톨릭 성인 중의 성인인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아시시를 순례했다. 프란체스코는 동물을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만난 당나귀는 붙임성이 좋았다. 때는 봄이었고 사방에 향기로운 흙내음이 진동하는데 당나귀 한 마리가 다가와 나에게 호기심을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생긴 것이 달랐을 뿐이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품는 호기심과 반가움은 다를 바가 없었다.

한때, 인간과 비슷하지만 아직 털로 뒤덮인 북아메리카의 빅풋(big foot), 티베트의 예티(yeti) 같은 전설의 동물을 찾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며 지금도 가끔 신문에 뉴스로 등장한다. 하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이미 이런 생물들이 발견되어 잘 알려져 있음에도 이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랑우탄, 침팬지, 보노보가 이들이다.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먹는 새끼 오랑우탄이 인간의 젖먹이 어린아이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생긴 것도 거의 같은데 단지 지능이 인간보다 낮아서 사냥하고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인간 중에서도 저능아는 죽여도 좋다는 말인가? 하긴 히틀러가 이미 그런 짓을 하긴 했지만.

이 유인원들은 숲에 사니 우리와 좀 멀리 산다 해도,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소나 개를 보자. 평생을 뼈 빠지게 주인을 위해 봉사해도 결국은 늙어 죽을 때가 되면 주인 밥상의 꼬리곰탕밖에 되지 않는 것이 우공의 운명이다. 또한 평생토록 주인을 지켜주어도 주인 아기 똥이나 받아먹고 그보다 나아야 겨우 된장국에 밥 말은 것이나 얻어먹다 더운 여름날 주인님 뱃속에 장사 지내는 것이 수천 년을 이어온 견공들의 운명이었다.

이 불쌍한 생물들의 눈을 보라. 개들의 눈망물. 소들의 눈망울. 생긴 것이 다르고 지능이 낮을 뿐이지 우리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희로애락 애오욕을 느낄 수 있음은 다르지 않다. 눈 둘, 귀 둘, 코 하나, 머리 하나, 발 넷, 심장, 소장, 대장, 간장, 이자, 콩팥, 다 같이 구비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를 공격하여 뿔로 받아 공중에 던지며 잔인하게 살해하던 물소들의 반란을 보라. 이들도 분노를 느낄 줄 알고 집단으로 힘을 합쳐 불의에 항거할 줄을 안다. 동료가 사자에게 잡히면 도망가다가도 돌아와 구해 줄 줄 안다. 이들도 사단심이 있다. 사단 칠정이 있다.

음식 부족 속에서 언제 사자밥이 될지 모르는 잔혹한 환경 속에서 짝을 이루어 새끼 낳고 보호하고 키우는 처절한 삶. 믿고 따르던 주인에게 언젠가는 잡혀 먹힐 줄도 모르고 순종하고 사는 비참한 삶.
아란 무엇인가?

업은 있지만 업을 짓는 자는 없다는 성찰이 저 동물들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유할 능력이 없는 중생에게 불교적 진리는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 모든 생각들은 중생계의 고통과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자비심의 화신 대보살 샨티데바의 글들이 가슴속에 오랜 빗줄기로 내린다.
얼마나 사람이 커야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가슴이 커야 저런 철학을 가슴에 품고도 가슴이 터지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음식점에 밤마다 펼쳐지는 향연은 어느 가족의 시신 위에서 벌어지는가? 동료 교수인 생물학자는 식물도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부처님이 수행의 길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 것도 농번기에 들에 나가 벌레가 새에 먹히고 새가 매에 먹히는 중생계의 참혹한 현실의 목격이었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철창감옥에 갇혀서 24시간 전깃불 아래서 살면서, 알 낳는 기계로 전락한 수십억 마리의 닭. 종자 수퇘지가 암컷 형상의 모형틀 위에 몸을 얹고 사정한 정액을 주사기로 집단으로 암퇘지에게 주입하여 새끼를 대량 생산하는 돼지공장의 돼지들. 신약 개발을 위해 끔찍한 병원균을 수없이 주사 당하고 온몸을 갈가리 해부당하는 실험용 동물들.

6도 윤회는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지구 위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다른 유정중생들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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