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한국불교의 중심 교육기관인 승가대학(강원)이나 선원, 대학에서 사용하는 경전과 논서, 그리고 선어록 등은 주로 옛날 고대 중국에서 번역한 경전과 주석서, 그리고 선승들의 어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즉 한자로 기록된 자료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해석상의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1,500년 내지 7~800년 전, 중국에서 사용한 한자 언어를 지금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漢字語)인 한글로 이해하면서 발생하는 시대적인 언어 개념을 무시한 오역(誤譯)의 문제이다. 언어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사용한 언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이해하면 오역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당송(唐宋) 시대에 제작된 선어록의 언어는 일상생활의 언어와 행동을 기록했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언어 개념이 다르다.

둘째는 아무리 한자나 한문을 독해하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법의 정신과 사상, 실천 수행의 구조나 선문답의 대화 체계를 잘 알지 못하면 경전과 어록은 오역이 발생한다.

초기 중국에서 한자로 경전을 번역하면서 불교의 전문용어를 자연스럽게 ‘보리(菩提)’를 ‘각(覺)’으로, ‘열반(涅槃)’을 ‘무위(無爲)’로, ‘공(空)’을 ‘무법(無法)’ 혹은 ‘무생(無生)’으로, ‘윤회(輪廻)’를 ‘생사(生死)’로, ‘중도(中道)의 실천’을 ‘무심(無心)’ 또는 ‘선악을 모두 함께 사량하지 말라(善惡都莫思量)’라고 하고, ‘공의 실천’을 ‘무념(無念)’혹은 ‘무심(無心)’ 등으로 번역하였다.

특히 ‘여래(如來)’ ‘불(佛)’ ‘선(禪)’이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을 표현한 언어지만 그 내용은 불법 사상을 함축한 말이기에 이해가 어렵고, 오해는 많다.

셋째는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삼계소유 유시일심(三界所有 唯是一心)’ ‘삼계허망 단유심작(三界虛妄 但唯心作)’이라는 설법처럼, 불법은 심법의 진실을 설하고 있는데, 방편(方便)법문으로 표현하는 말에 끄달려 불법을 파악하지 못하는 오역을 범하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을 중생의 번뇌 망념과 심병(心病)을 불법의 지혜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良醫]로 비유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은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중생의 심병을 치료하는 지혜의 종교이다. 경전과 어록에서 표현하는 여래나 부처, 법신이나 문수·보현·관음보살 등 이상적인 인격과 사바세계나 극락, 정토, 연화장 세계가 현상적으로나 이상적으로 실재하는 곳으로 이해하고 경전과 어록을 번역하면 오역이 된다.

특히 《금강경》 등에서 설하는 여래 법신에 대한 이해와 《아미타경》 등 정토 경전에서 설하는 극락, 혹은 정토의 문제는 불법사상의 이해와 깊이를 가늠하는 측도(測度)로 볼 수 있는데, 많은 불교인들이 이 점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불교를 비불교로 만들고, 정법인 불도(佛道)를 사법(邪法)인 외도(外道)로 만들고 있다.

《유마경》에서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사해(四海)의 바닷물이 한 터럭과 같은 구멍에 들어간다는 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법문이나, 《화엄경》에서 설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법문,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불법의 지혜와 사상으로 번역해야 오역을 모면할 수가 있다. 자칫 글자대로 번역하면 불교는 현상경계의 모든 존재를 부처의 신통묘용(神通妙用)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경전과 어록에서 자주 언급하는 신통묘용이나, 신비한 주력(呪力)이나 주문(呪文), 여래의 법신광명 등을 불법사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적인 신통으로 이해하여 불교를 신비의 종교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는 예도 있다.

또한 선어록에서 생사해탈과 생사자유를 강조하고 있는데, 생사해탈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여 선승들이 임종 시에 앉아서 죽고, 서서도 죽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 생사해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불교는 잘 살다가 잘 죽는 종교, 혹은 죽은 뒤에 실재하는 극락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왕생(往生)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불교인들도 많다.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극락정토에 시간적인 흐름으로 가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인가, 불성인가, 중생심의 업장인가? 인도의 고대 종교에서 주장한 영혼(아트만)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며 출발한 불교인데, 아공 법공(我空 法空)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에서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어록에서도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以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부모의 몸을 받아 태어나기 이전의 영혼으로 착각하여 오역하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생사에 윤회하는 중생의 식심(識心)을 생사심(生死心) 혹은 생멸심이라고 하며, 진여 법성(여래법신)을 불생불멸로, 영혼(아트만)을 불멸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말은 불법의 사상을 근거로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선(禪) 교육에서는 먼저 불교의 언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불법의 대의를 파악해야 경전과 어록의 내용을 여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불법으로 읽고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는 간경(看經), 간화(看話)를 주장하는 것이다. 참선 공부는 언어를 사유하고 언어라는 방편을 통해서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24권에 부처님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혹은 ‘자주 법주(自洲 法洲)’를 강조하고, 《법화경》에서는 경전에서 설한 불법과 같이 수행하면 한량없는 복을 이룬다고 한다. 《대지도론》이나 《열반경》 제6권에서도 법에 의거하고 지혜에 의거하고, 불법의 대의(大義)에 의거하고 요의경(了義經)에 의거하라는 네 가지 기준[四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여법하게 불법을 배우고 여실한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1)  1) 《잡아함경》 24권(대정장 2권 176쪽 中). 《장아함경》 제2권 〈유행경〉(대정장 1권 15쪽 中). 《열반경》 제6권 여래성품에 “依法不依人, 依義不依語, 依智不依識, 依了義經 不依不了義經(대정장 12권 401쪽 中)”. 《대지도론》 제9권(대정장 25권 125쪽 上)에도 똑같은 내용을 전한다.

여기서는 먼저 《금강경》의 번역에서 오역과 오해를 초래하는 몇 가지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2. 《금강경》에서 설하는 여래와 부처[佛]는 보는 대상인가?

60권본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에 “일체의 모든 존재[法]는 자성이 없는 줄 깨닫고 이와 같이 법성을 이해하면 곧바로 노사나(여래)를 친견하리(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라고 읊고 있다.

《금강경》을 비롯하여 대승경전에서 부처나 여래, 혹은 노사나를 본다[見]라고 번역하거나, 《화엄경》에서 설하는 “신심은 불도를 이루는 근본이며, 일체 공덕을 낳는 모체(信爲道元功德母)”라는 일절에서 신(信)을 ‘믿는다’라고 번역하거나, 득법(得法), 득도(得道)를 ‘법을 얻고, 도를 얻는다’라고 번역하면 오역이 된다. 어떤 선승이 누구의 선법을 전해 받았다고 하는 전법(傳法)도 마찬가지이다.

경전과 어록을 번역하면서 가장 쉽게 많은 오역을 만드는 언어가 見(보다), 信(믿다), 得(얻다), 傳受(받다), 傳法(법을 전했다)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볼 대상의 부처나 여래, 믿음의 대상으로 부처나 법이나 어떤 존재, 얻어야 할 법, 전해야 할 법, 전해 받아야 할 법이라는 어떤 목적과 대상 경계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나 법, 부처라는 의식까지 텅 비우도록 하는 불법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법문이 되고 만다.

1) 여래 혹은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불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 《금강경》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교육을 하고 있는데,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여래에 대하여 조계종교육원에서 발간한 조계종 표준 한문 한글본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금강경》 26단에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대정장 8권 752쪽 上)”가 있는데, 조계종교육원에서 간행한 책에는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삿된 길을 걸을 뿐,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나와 여래,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경전의 말씀을 여법하게 이해하고 깨닫도록 설한 법문을 오해하고 왜곡시키는 말이 된다. 여래를 보는 대상이나 목적으로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란 여래와 동격으로 봐야 한다. 구법자 자신의 참된 진아(眞我)인 여래 법신을 자신이 보는 객관적인 대상 경계로 삼는다면 영원히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구절을 “육체적인 형체로 참된 자아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참된 진아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구도자)은 삿된 불도를 실행하게 되므로 여래 법신을 친견할 수 없다.”라고 번역한다. 왜냐하면 마음 밖에서 부처나 불도나 여래 법신을 구하는 자는 외도이며 사도를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는 “32상호를 구족한 색신의 모습으로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으며(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대정장 8권 750쪽 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대정장 8권 751쪽 下), 신체적인 모습[身相]으로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다(不可以身相 得見如來. 대정장 8권 749 上)”라고 설한다.

《금강경》 5단에 “신체적인 모습[身相]으로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라고 설한 뒤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대정장 8권 752쪽 中)”라고 게송으로 읊고 있는데, 이 게송을 조계종교육원에서 발행한 책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신체적인 특징은 아마도 여래가 구족한 32상을 염두에 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상(身相)은 그대로 신체적인 모양, 혹은 육체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여기서도 ‘여래를 볼 수 없다, 여래를 보리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보는 주체는 누구이며, 보는 대상은 누구인가? 필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본다.

모든 존재의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다. 모든 존재의 모습을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여래를 친견할 수가 있다.

여래를 보려고 한다거나 볼 수 없다고 하는 표현은 여래 법신을 객관적인 대상 경계로 목적시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적당하지 않다. ‘본다’는 말은 ‘자신이 직접 깨달아 체득하는 친견(親見)’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선에서도 진여 법신을 깨달아 체득하는 것을 친(親) 혹은 친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여 자성이 불법의 지혜 작용으로 진여 자성인 여래 법신과 일체가 되는[親見] 지혜 작용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서는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 하는데, 삼매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성의 진여가 주(主)가 되고 또 자성의 진여가 객(客)이 되어 진여와 진여 법신과 지혜 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계지성(境界之性)이라고 한다.

삼매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똑같이 진여가 진여를 경계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생의 심의식[主]으로 의식이나 대상 경계의 사물[客]을 인식하는 주객과 상대적인 차별 경계나 대립적인 분별 의식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신론》과 《육조단경》에서 진여 자성을 깨닫는 무념의 실천으로 ‘진여를 염(念)한다’라고 하며, 정토종의 실천 수행으로 ‘염불’ 또는 ‘염불삼매’를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인 부처님이라는 어떤 존재를 대상으로 염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념을 텅 비운 자신의 참된 진여가 진여 법성(부처)의 자각적인 지혜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나 여래는 진여 자성의 지혜 작용 그 당체(當體)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29단에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수보리여, 어떤 사람은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설한 불법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에서 온 것도 없고, 어디로 가는 곳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須菩提, 若有人言, 如來若來, 若去, 若坐, 若臥, 是人不解, 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대정장 8권 752쪽 中).”

《금강경》 32단에 일체의 대상 경계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한 경지(不取於相 如如不動)에서 사람들에게 불법을 연설하도록 하는 것처럼, 여래는 사상(四相)은 물론 일체의 차별 대상 경계를 초월한 경지에서 동요됨이 없는 진여 법신을 말한다. 14단에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제불이라고 한다(離一切諸相 則名爲佛).”라고 설한다.

또 17단에는 “여래란 곧 일체의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다(如來者 卽諸法如義. 대정장 8권 751쪽 中).”라고 설한다. 이 일단도 상당히 어려운 번역인데, 조계종교육원에서는 “여래는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이다.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종밀(圭峰宗密)은 “무착보살이 말하길, ‘진여가 청정하기에 여래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진금(眞金)과 같다.”라고 하고 있다.

《유마경》 〈제자품〉에 “여법하게 잘 알아라. 아난이여! 모든 여래신은 곧 법신이다(當知阿難, 諸如來身 卽是法身. 대정장 14권 542쪽 上).” 라고 하며,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 자체의 모습을 설한 곳에 진여를 여래장, 혹은 여래 법신(대정장 32권 579쪽 上)이라고 하며, 진여 법신이 구족한 본성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대지혜의 광명과, 지혜 광명이 온 법계에 두루 하고 있으며, 진실로 일체 모든 것을 잘 알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덕을 구족하고, 일체의 모든 곳에 무애자재하다고 설한다.

《금강경》에서 설한 ‘여래자 즉제법여의(如來者 卽諸法如義)’라는 말은 여래는 일체의 모든 존재(諸法)와 같은 뜻이라는 의미이다. 진여인 여래 법신은 일체 만법과 하나(一如)이며, 같고(如如), 둘이 아닌 것(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이기 때문에 《신심명》에서는 일체 만법과 하나(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의상의 《법성게》에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 적멸한 모습이다(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라고 하며, “본래부터 동요함이 없는 법성(법신)을 부처(舊來不動名爲佛)라고 한다.”라고 읊고 있다.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사상을 텅 비운 자아의 참된 모습(眞如法身)인 여래는 일체의 모든 존재의 본성(法性)이며, 제불 법신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서 진여를 여래 법신이라고 한 것처럼, 불법을 깨달아 체득한 진여 자성의 지혜작 용을 법신(唯眞如智 名爲法身. 대정장 32권 581쪽 上)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여지인 여래 법신의 지혜 작용은 독자적인 자체의 본성이나 모양 형체도 없는 무상(無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차별 대상경계를 의식하거나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이기에 조작(造作)과 작의(作意), 작의성(作爲性), 취향(趣向), 목적의식도 없이 시절인연에 따라서 자기 본분사의 생명활동인 본래면목이 자연 그대로 여법[法爾]하게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출세하는 의미를 중생들을 위해 불법을 개시(開示)하여 깨달아 증득[悟入]하게 하는 일대사 인연이라고 설하고 있다. 중생을 위한 어떤 목적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원력행이며, 자기 본분사의 생명 활동인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여하시달마서래의(如何是達磨西來意)”라는 말로 공안을 제시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하고 있다.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부처님의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면 달마는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중생이며 사자(使者)이지 독자적인 불법을 설하는 불보살도 아니며 조사도 아니다.

부처나 보살, 달마나 조사도 모두 불법의 지혜로 자신이 세운 원력행을 자기 본분사의 생명 활동으로 여법하고 여실하게 실행할 뿐이다. 여래나 부처는 중생의 심병(心病)에 대한 불법의 지혜로 치료하고,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창조적인 생명 활동을 하는 그 자체를 여래법신, 진여지(眞如智), 혹은 부처(佛)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불심의 지혜 작용이 없으면 중생이 되기 때문에 부처나 여래, 여래법신은 존재할 수가 없다. 여래나 법신은 여법하게 불법을 깨달은 불심의 지혜가 시절인연에 따라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서 여법하게 작용하는 생명 활동 그 자체를 말한다.

《금강경》 10단에 여래의 법신을 큰몸(大身)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설한다.

즉 부처님이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보다도 크다면 그 몸은 크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자, 수보리는 “참으로 큰 몸(大身)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모양이 없는 그 몸이라야 큰 몸(大身)이라고 여래께서 설했기 때문입니다(佛說非身 是名大身).”

또 17단에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크다는 것은 큰 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如來說 人身長大 則爲非大身, 是名大身).”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큰 몸(大身)은 신체적인 몸이 아니라 법계와 하나가(萬法一如)된 위대한 여래의 법신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에 “불법을 증득한 보살은 공덕을 원만히 이루고 색구경처(色究竟處, 색계의 최고 위치)에서 일체 세간의 최고로 큰 몸(最高大身)으로 나투며, 한순간의 일념에 지혜와 상응하고 무명을 단번에 다 없애니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와 자비행으로 능히 시방세계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대정장 32권 581쪽 中).”라고 논하고 있다.

보살이 불법을 깨달아 증득하여 수행을 완성하게 된 증명은 일체 세간에 두루 편만하는 진여 법신과 수순(隨順, 일체)하여 진여와 일체가 되었기에 그 법신은 일체 세간에 편만하는 것이다. 그래서 색신(色身)은 최고 최대신이 되는 것이다.

《화엄경》 〈여래현상품〉에 “부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여, 널리 일체중생들 앞에 나툰다. 인연에 따라 감응하여 두루 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항상 깨달음의 근본 자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대정장 10권 30쪽 上).”라고 읊고 있는 일단과 같은 관점이다.

《마조어록》에 방거사가 마조도일선사를 참문하고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마조는 ‘그대가 서강수(西江水)의 물을 한입에 다 마시면 그때 대답해 주겠노라(一口吸盡西江水)’라고 대답하고 있다.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와 하나 된 몸이 되면 만법과 주객의 대상 경계(짝)를 이루지 않고, 엄청나게 큰 호수 서강수뿐만 아니라 일체 삼라만상도 모두 들이마시어 만법이 자기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조당집》 17권에 잠(岑)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百尺竿頭不動人 백자의 높은 장대 끝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須然得入未爲眞 비록 깨달아 체득한 것이 있으나 참된 경지는 아니다.
百尺竿頭須進步 백척의 높은 장대 끝에서 허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 가야
十方世界是全身 시방세계가 바로 온몸이 되리라.

《무문관》 제20칙에 대력량인(大力量人)에 대한 게송에 “법계와 하나 된 몸 둘 곳이 없다( 一箇渾身無處着)”라고 하고, 또 23칙의 게송에 “본래면목(법신의 지혜 작용)은 감출 곳이 없으니, 세계가 붕괴될 때라도 본래면목은 소멸되지 않는다(本來面目沒處藏, 世界壞時渠不朽)”라고 읊고 있다.

선에서는 여래법신(如來法身)을 시방세계와 하나가 된 몸(全身), 혼신(渾身) 혹은 온몸(通身), 본래면목,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즉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 활동인 자기 본분사(本分事)인 일대사 인연을 불심의 지혜로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진여 자체의 지혜 작용으로 일체의 번뇌 망념[四相] 등을 텅 비운 경지를 여실공(如實空, 眞空)이라고 하고 부처의 불가사의한 지혜 작용[妙用]은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여래의 진여 법신은 진공 묘유(眞空 妙有)의 지혜 작용 그 자체를 말한다.

《금강경》과 대승경전에서 주장한 여래나 부처는 어떤 육체적인 형체나 신체의 모양이 없고, 또한 어떤 존재로서 가고 오는 일도 없고, 영혼과 같은 불멸의 신비한 존재도 아니다. 이러한 여래나 부처를 어떻게 볼 수가 있으며 본다, 볼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는가?

이렇게 번역하면 여래나 부처를 절대 전지전능한 존재, 혹은 수행하여 깨달아 취득해야 할 불교의 목적으로, 혹은 불교의 이상적인 신상과 숭배의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불교는 인간 누구나 본래 구족한 불성, 진여 자성, 법성을 불법의 가르침을 통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개발하여 각자가 부처가 되고, 여래 법신을 구족하여 반야의 지혜로 중생의 심병을 불법의 지혜로 치료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실행하도록 제시하는 종교이다.

《금강경》에서 일체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인 개체나 자아의 고정된 자성이 없으니 어떤 대상 경계에도 마음으로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말라고 하며, 자아의식뿐만 아니라 부처나 보살, 깨달음[菩提], 법이라는 방편법문의 언어나 명칭, 제도자(滅度者) 등 어떠한 것도 고정된 법이나 실체가 없다고 ‘무유정법(無有定法)’, 혹은 ‘실무유법(實無有法)’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부처의 삼신(三身)은 한몸(一體)인데,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각기 다른 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기신론》의 논리를 빌려서 달의 진실한 그 당체[體]를 법신으로, 둥글고 원만하며 밝은 달의 모습[相]을 보신으로, 그리고 일체의 모든 강물에 나타난 달의 모습[用]을 화신으로 설명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처럼, 《금광명경》에 부처의 참된 법신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佛眞法身 如水中月)고 읊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법의 지혜를 구족한 법신은 의학에,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으로 부처의 자격을 구족한 모습인 보신을 의사에,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으로 시절인연에 따라 중생을 구제하는 화신을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비유한다.

한 사람의 의사가 의학을 모두 통달하여 의사의 자격을 구족하고 병원을 개원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원력과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은 일체의 불법을 모두 통달하여 반야의 지혜와 부처의 덕성을 구족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지금 여기 자신의 본분사의 일로 회향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한다는 대상 경계를 갖는 목적의식이나 자기 존재에 대한 자아의식과 상대적이고 과시적인 사고를 모두 텅 비우고 진여 자성인 여래의 법신이 되어 부처의 지혜와 자비심으로 보살행을 하도록 설하고 있다.

2)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如來悉知悉見)
《금강경》에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悉知悉見)’라는 표현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조계종교육원에서 간행한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6단)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이와같이 한량없는 복덕 얻음을 다 알고 다 본다.”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 無量福德. 대정장 8권 749쪽 中)

(14단) “수보리여! 미래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들이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임을 다 알고 다 본다.”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受持讀誦 則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대정장 8권 750쪽 下)

(15단) “수보리여! 간단하게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한없는 공덕이 있다. 여래는 대승에 나아가는 이를 위해 설하며 최상승에 나아가는 이를 위해 설한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여래는 이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한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다 알고 다 본다.”(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如來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若有人能受持讀誦 廣爲人說。如來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不可量 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 대정장 8권 750쪽 下)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은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 모든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과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을 다 알고 다 본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번역하면 여래는 전지전능하고 불가사의한 지혜의 소유자인 어떤 절대 존재자로 등장시키는 것이 된다. 즉 여래는 모든 중생들이 불법을 배우고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서 설법한 그 한량없는 공덕과 복덕을 받게 될 것을 다 알고 다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서 설한 여래의 정확한 개념과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이러한 오역이 된다. 조계종교육원에서는 산스끄리뜨어 원본을 많이 참조하여 번역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산스끄리뜨어본, 티베트어본, 현장의 번역본보다도 구마라집의 번역이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본다.(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6단) “수보리여! 여래는 (중생심의 작용을) 다 알고 다 본다. 이렇게 하여 모든 중생은 이와 같은 무량한 복덕을 체득할 수가 있다.”
(의역: 진여 법신(여래)의 지혜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 망념의 마음 작용을 모두 다 알고 모두 다 자각하여 볼 수 있기 때문에 일체의 업장을 짓지 않고 불심의 지혜 작용으로 무량한 복덕을 구족할 수 있다.)

(14단) “수보리여! 미래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의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곧 여래가 되어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아서, 모두가 한량없고 다함이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의역: 수보리여! 미래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법문을 깨달아 체득하고 경전을 독송하여 여래법신을 구족하면, 불심의 지혜 작용(부처)으로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모두 다 알고 모두 자각하여 볼 수 있어서 일체의 업장을 짓지 않게 되므로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

(15단)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설법하면 여래는 이 사람을 모두 다 알고, 이 사람을 모두 다 본다.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다함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들은 곧 여래의 최상 정각을 갖추게 된다.”

《법화경》 〈약초비유품〉에도 “나는 일체를 아는 자이며 일체를 볼 수 있는 자이니, 도를 아는 자이며 도를 열어 보이는 자이며, 도를 설하는 자이니 너희 천인 아수라 대중은 모두 다 여기에 모여 법을 들을 지니라(我是一切知者, 一切見者, 知道者, 開道者, 說道者, 汝等 天人 阿修羅衆 皆應到此, 爲聽法故. 대정장 9권 19쪽 中).”라고 설하며, 《승만경》에도 “오직 불 세존은 실안(實眼) 실지(實智)가 불법의 근본이 되고, 법을 통달하며 정법에 의거하기에 여실한 지견이다(대정장 12권 222쪽 中).”라고 설한다.

여래는 진여 법성으로 경전의 가르침과 설법으로 불법을 깨달아 체득[受持]한 진여지(眞如智)로서 불심으로 지혜 작용을 실행하는 당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 각자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이 사람의 마음 작용을 다 알고 다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란 원력을 세워 불법을 공부하는 선남자, 선여인을 말하며, 여래란 이 사람이 불법을 깨달은 진여 법신의 지혜 작용이며, 부처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미세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아는 자각적인 지혜 작용이다. 부처는 중생심의 작용을 자각하여 분명하게 알고, 여실하게 보는 지혜 작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천친(天親)보살이 지은 《십지경론(十地經論)》 제11권(9지의 선혜지)에 “경전에 말씀하시길, 이 보살(善慧地)은 이와 같은 지혜에 수순하여 여실하게 중생심의 번뇌를 안다(經曰 是菩薩 隨順如是智慧 如實知衆生心行稠林).” 또 “이 보살은 여실하게 중생의 여러 가지 마음의 가지가지 모양과 마음의 잡다한 모양을 다 안다(대정장 26권 186쪽 下).”라고 논하고 있는 것처럼, 제9지 선혜지 보살의 지혜는 중생심의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미세한 번뇌까지 여실하게 안다고 설한다.

《보성론(寶性論)》에도 “부처가 중생심에 수순하여 많은 중생심을 찰지(察知)하고 중생심의 활동에 따라서 심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며 제도한다(대정장 31권 821쪽 中).”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나 여래는 시절인연에 따라서 중생의 번뇌 망념을 치료하는 지혜 작용을 말한다. 번뇌 망념의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고, 병이 없으면 약도 필요 없는 것처럼, 부처와 중생은 상대(相待) 관계, 의존 관계, 연기하는 관계인 것이다.

모든 중생이라고 복수로 표현하는 것은 〈사홍서원〉에서 ‘중생무변서원도’ 혹은 ‘자성중생서원도’와 마찬가지로, 팔만사천의 번뇌 망념인 자기 마음속의 중생심을 진여지인 여래 법신이 불심의 지혜로 제도한다는 말이다.

탐진치 삼독심으로 수많은 업장을 만들고 생사에 윤회하는 중생심을 여래가 불법의 지혜로 제도하고 치료함으로써 삼업청정의 지혜와 자비행으로 공덕과 복덕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18단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의 여러 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다 안다. 왜냐하면 여래는 여러 가지 마음이 모두 고정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皆爲非心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대정장 8권 751쪽 中)”라고 읊고 있다.

불법을 깨달은 진여 법신[眞如智]인 여래는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중생의 마음 작용을 불법의 지혜로 다 알고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금강경》 31단에는 “수보리여! 최상의 깨달음을 향해 발심한 자는 일체 모든 존재(法)에 대하여 이와 같이 여법하게 알고, 이와 같이 여법하게 보며, 이와 같이 여법한 신심과 이해를 해야 하며 법에 대한 고정관념(法相)을 갖지 말아야 한다(須菩提發阿횽多羅三?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대정장 8권 752쪽 中)”라고 설하고 있다.

6단에도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으로 어떤 고정된 상(相)을 취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고, 법에 대한 고정관념(法相)을 갖게 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된다.(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卽著 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대정장 8권 749쪽 中)”라고 나온다.

법상(法相)은 어떤 존재나 가르침, 법이라는 개념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불견(佛見), 법견(法見), 보살견(菩薩見) 등 일체의 명상(名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조계종교육원에서 번역한 책에는 “발대승자(發大乘者), 발최상승자(發最上乘者)”를 “대승에 나아가는 이, 최상승에 나아가는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원력을 일으킨 보살의 발심을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표현은 적당하다고 할 수 없다. 밖으로 향하는 번뇌 망념의 생각을 마음 안으로 향하여 진여 자성을 깨닫도록 하는 내향성의 종교인 불법을 어떤 대상과 목적을 향하게 하는 외향성의 종교로 만든다면 문제가 된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라는 표현도 바르지 않다. 모든 경전에 한결같이 ‘부처는 중생을 위해서 설법한다’ ‘달마는 혜가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서 중국에 왔다’라고 한다면 부처나 달마는 목적의식과 차별 대상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 되고 만다.

《금강경》에 “여래는 제도한 중생이 없다(滅度者).”라고 설했고, 《능가경》에도 “부처님은 평생 설법했지만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一字不說).”라고 하신 말씀은 제도한 중생이라는 존재와 설법의 대상은 물론, 어떤 목적의식이나 자아의식,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이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이 시절인연에 따른 원력의 본분사를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력행은 불법의 지혜로 자기 자신의 생명 활동을 시절인연에 맞추어 여법하게 사는 것이다. 매화꽃이 철 따라 피는 것처럼, 시절인연에 자신의 본분사인 생명 활동을 잘 알고, 잘 보고 여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대승불교는 불보살의 원력을 세우고, 자기 스스로 서원을 실행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중생이나 어떤 목적을 설정하면 자신이 중생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다. 중생심은 불법의 지혜를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부처나 보살의 원력행을 실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무실(無實) 무허(無虛)
《금강경》에 무실 무허를 14단과 17단에 다음과 같이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교육원에서 간행한 책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14단) “수보리여 여래는 바른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걸맞은 말을 하는 이고, 속임 없이 말하는 이며, 사실대로 말하는 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須菩提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팂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無實無虛. 대정장 8권 750쪽 下)

(17단) “수보리여 ! 여래가 얻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설한다.” (須菩提, 如來所得阿횽多羅三?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대정장 8권 751쪽 中)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은 이 구절을 “여래가 체득한 최상의 깨달음은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교육원에서 간행한 번역본은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無實 無虛).”라고 번역하고 있다. 불법의 정신과 사상에 맞는 올바른 번역일까?

필자는 이 일단의 문장을 각묵 스님이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을 분석, 주해한 《금강경 역해》와 가죠우시 고우운(梶芳光運)의 《금강반야경》(일본 大藏출판사. 1981년),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반야심경, 금강경》(일본 岩波文庫本)의 산스끄리트 번역문과 양승규가 번역한 《티베트 금강경》(까말라실라의 금강경 광석, 도피안사 출판, 2003년) 등을 참조하여 보았다. 산스끄리뜨본과 티베트본에는 모두 한결같이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각원 법사인 각성 스님에게 산스끄리뜨본의 문장을 구마라집과 같이 번역할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일반적으로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했다.

교육원에서 간행한 교재에서 구마라집이 “무실 무허”라고 번역한 문장을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라고 한 것은 산스끄리뜨 번역본을 참조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산스끄리뜨 번역 문장은 그렇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금강경》의 “무실 무허”를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라고 번역한 산스끄리뜨본의 해설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상대적인 차별을 모두 초월했다는 의미로 설명하는데, 왜 구마라집은 “무진 무위(無眞 無僞)”라고 번역하지 않고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無實 無虛).”라고 번역하였을까?

‘허허실실(虛虛實實)’이란, 허는 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허망함, 실은 안이 꽉 찬 내실 있는 실속을 말하는데, 무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무허는 허망하지 않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깨달아 체득한 법은 진실과 거짓, 선악, 범성(凡聖) 등 일체 상대적인 차별 경계를 모두 함께 초월한 중도이며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공의 경지인데, 또다시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는 말을 뜬금없이 여기서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다(眞實不虛).”라는 일절과 “여래는 진실을 설하는 자”라고 설한 앞부분의 내용과도 상반되는 말이다.

필자는 이 일단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본다.

(14단) “수보리여!, 여래는 진실을 설하는 사람이며, 사실 그대로를 설하는 사람이며, 여법하고 여실한 법문을 설하는 사람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고,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체득한 이 법은 고정된 실체도 없고(無實), 허망하지도 않다(無虛).”

(17단) “수보리여, 여래가 체득한 최상의 깨달음(正覺)은 고정된 실체도 없고(無實), 허망하지도 않다(無虛). 이런 까닭에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설한다.”

《금강경》의 근본 사상은 일체 의식의 대상 경계나 모양(相)에 머무르지 않고(無住),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초월해야 진정한 깨달음과 불보살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경전 곳곳에서 이러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초월하도록 그토록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나 부처, 여래, 보살의 이름이나 모양 등 어떠한 존재에 대한 의식을 텅 비우도록 누누이 주장하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에서는 어떤 수승한 깨달음이나 최상의 법문이라도 독자적인 개체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고정된 법이란 있을 수가 없다(無有定法).’ 혹은 ‘고정된 실체의 법이 없다(實無有法).’라는 말로 일체의 모든 의식의 대상, 집착의 대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텅 비우도록 강조하고 있다.
구마라집은 무유정법이나, 실무유법으로 전개하는 일체의 모든 법문을 요약해서 무실이라는 한마디로 번역한 것이라고 본다.2)  2) 《금강경》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횽多羅三?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대정장 8권 749쪽 中).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대정장 8권 749쪽 上). 汝等勿謂 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대정장8권 752쪽 上 ).

왜냐하면 불법은 인연법이기에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一切皆空)이며, 독자적인 개체의 자성이 없다(無自性)는 반야사상을 토대로 잘못된 전도몽상과 착각, 아상 인상, 중생상과 수자상 등의 고정관념과 집착심과 분별심을 떨쳐 버리고 올바른 정법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 불심의 지혜로 살 수 있는 방향과 방법을 설하는 시절인연으로 이루어진 방편법문이기 때문이다.

《반야경》 제8권에 “만약 어떤 가르침(法)이 있어 열반의 경지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역시 환화와 같고, 꿈과 같다.”라고 설했다.3) 3) 《반야경》 제8권 〈幻聽品〉 說復有法, 過於涅槃, 我亦說如幻如夢(대정장 8권 540쪽 下).

일체의 모든 존재(법)는 독자적인 개체의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금강경》 등 반야경전에는 꿈, 환화(幻化), 허공의 꽃, 물거품, 그림자, 이슬, 아지랑이, 물속의 달, 거울 속의 영상, 거북의 털, 토끼의 뿔 등으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구마라집이 무실(無實)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중생은 불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무명의 눈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촉감으로 느끼는 모든 사물을 실제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번뇌 망념과 사물에 집착하여 업장을 만들고 한없이 많은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여래가 깨달음을 체득한 경지를 무실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무허(無虛)란 여래의 진여 법신은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사물 경계를 여여하고 여실하게 보고 듣고 작용할 수 있는 부처의 지혜 작용이 허망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다. 《반야심경》에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는다[眞實不虛].”와 같은 뜻이다.

여래가 체득한 최상의 깨달음은 중생심의 번뇌 망념과 차별심,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의 무실 무허는 《대승기신론》에 《승만경》의 주장을 토대로 진여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능히 구경이어서 진실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진여 그 자체는 청정하여 여래의 본성 공덕(德相)이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4)  4) 《대승기신론》(대정장 32권 576쪽 中). 《승만경》 空義隱覆眞實章에 “두 종류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다. 세존. 공여래장은 중생의 모든 번뇌를 여의고, 번뇌 망념에서 해탈하여, 번뇌와 다른 것이다. 不空 여래장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부처의 지혜를 여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이다. (世尊 有二種如來藏空智, 世尊, 空如來藏, 若離 若脫 若異 一切煩惱障. 世尊 不空如來藏, 過於恒沙, 不離 不脫 不異 不思議佛法. 대정장 12권 221쪽 下)”라고 설한다.

말하자면, 《금강경》에서 설한 무실은 진여 자성이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경지(如實空)이고, 무허는 진여 자성이 여실하고 진실된 구경의 깨달음의 경지임과 동시에 부처가 구족하는 일체의 모든 반야의 지혜 작용과 공덕이 여실하게 작용하여 허망하지 않다(如實不空)는 논리로 설하고 있다.

공은 진여 자성에 번뇌 망념이 텅 비워졌기에 불성을 깨달은 견성의 입장이며, 불공은 진여 자성의 덕성(자비심)과 부처의 지혜 작용은 허망하지 않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힌 것으로, 요약하자면 무실은 진공(眞空)이며, 무허는 묘유의 입장을 밝힌 반야 사상을 설한 것이다.5)  5) 《대승기신론》 對治邪執에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두 번째 수다라에서 설하고 있다.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자체가 공했고, 열반, 진여의 법까지 필경 공한 것이며, 본래부터 스스로 공한 것이기에 일체의 상을 떠났다.’라는 그 말을 듣고 집착을 쳐부수기 위한 말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진여 열반의 성품이 오직 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대치하여 진여 법신 그 자체가 공하지 아니함을 밝힐 것인가? 한량없는 진여 자성의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대정장 32권 580쪽 上).”

《금강경오가해》 육조의 해설도 《기신론》의 논리 체계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4단) 무실(無實)이란 법의 체가 공적하여 상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항하사와 같은 성덕을 갖추고 있어서 그것을 써도 더 하지 못하는 까닭에 무허(無虛)라고 했다. 그 실을 말하자면 고정된 어떤 모양(相)은 가히 얻지 못하고, 그 허를 말하자면 지혜는 아무리 사용해도 단절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라고도 무라고도 말할 수가 없으며,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언사로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 참다운 지혜인 것이다. 만약 상을 떠나서 수행하지 않으면 여기에 이를 수가 없다.

(17단)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실로 얻은 것이 없는 마음으로 깨달음[菩提]을 얻음이니, 얻은 바의 마음이 나지 않으므로 깨달음(보리)을 얻음이다. 이 마음을 떠난 이외에는 다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무실이라고 설한 것이고, 소득심 이 적멸하면 모든 지혜가 본래 있으며, 만행이 다 원만히 구족하고 있어서 항하사의 덕성을 사용하지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으로 무허라고 한 것이다. 

《임제록》에 “산승이 설하는 법문도 모두 한때의 병을 치료하는 약을 쓰는 것이기에 결코 실다운 법이란 없다(無實法). 만약 이와 같은 견해를 체득한다면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할 수 있고 하루에 황금 만 냥을 사용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다(대정장 47권 498쪽 中).”라고 하며, 또 다른 설법에서도 똑같이 “모두 실다운 법이란 없다(幷無實法).”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진견제법공상(盡見諸法空相), 개무실법(皆無實法)”(대정장 47권 498쪽 下)라고 설한다.

《조당집》 제15권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心如境亦如 마음이 청정(여여)하면 경계도 여여하리.
無實亦無虛 실체도 없지만, 또한 허망하지도 않네.
有亦不管,   있음(有)에도 관계치 않고,
無亦不居    없음(無)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니,
不是賢聖,   이는 바로 성현도 아니요,
了事凡夫    일대사를 끝마친 평범한 사람이다. (4-104)

부처나 조사, 선과 악이라는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심과 차별 경계를 모두 초월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마친 평상 무사인(無事人)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경지를 노래했다.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도 여여하다(心如境亦如).”라는 말은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본래심의 지혜로 살고 있는 입장을 읊고 있다. 여여(如如)란 여래(如來), 여실(如實), 여시(如是)와 같은 뜻으로, 《금강경》에 “여래란 모든 법이 본래 그대로 여여한 뜻이다(如來者 卽諸法如義).”라고 한 것처럼,6) 진여 본성과 하나가 된 여래 법신의 경지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 경계를 초월한 무심도인이 시절인연에 따라 여실하게 살고 있는 살림살이를 읊은 것이다.  6) 《금강경》(대정장 8권 751쪽 中)

방거사 역시 무실역무허(無實亦無虛)라는 일절은 《금강경》에서 체득하고 있다. 무실(無實)이란 일체의 모든 번뇌 망념은 물론 존재나 사물의 실체도, 최상의 불법이나 깨달음도 독자적으로 어떤 자성이나 실체가 없다(無自性)는 공(空)사상이다.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워 여래의 법신이 된 방거사는 반야의 지혜로 불법을 건립하는 창조적인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살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7) 7) 방거사의 게송에 대해서는 정성본 〈선불교의 실천수행〉(2008년도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불교학술대회 논문집 《승가의 실천수행》 143쪽 이하》 참조 바람.

3. 맺는 말

《금강경》 번역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서 적다 보니 원고량이 많이 초과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경전의 여러 언어에 대한 오해와 오역의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 일단 끝맺음하고자 한다.

특히 《금강경》의 무실 무허에 대한 구마라집의 번역은 여래 법신과 반야 지혜의 작용을 불법 사상에 맞게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학자들은 산스끄리트본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지만, 구마라집의 번역은 《대승기신론》에서 논리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불법 정신에서 볼 때 불성사상과 반야사상을 여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중국불교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토대로 불법의 지혜를 체득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에 산스끄리뜨 원본에는 없는 십여시(十如是)를 강조하여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세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참조해야 할 점이다.

참고로 한마디 더 첨가하고 싶은 말은 조계종교육원에서 번역본으로 제시한 《금강경》은 구마라집을 저본으로 한 번역인지, 산스끄리뜨본을 저본으로 한 것인지, 애매하고 혼용된 번역이 많다. 혼용 번역은 무의미한 번역이다.

일본의 학자들이 구마라집본과 산스끄리뜨본을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하면서도 따로따로 달리 정확하게 주석을 하면서 번역하고 있는 것은 저본의 특성을 순수한 그대로 번역하고 원문의 언어와 비교하며 불법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원본은 원본 그대로의 특성을 살리고, 한역본(漢譯本)은 한역본 그대로의 특성을 살려야 그 경전이 유통되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성된 다양한 불교 사상과 정신, 문화의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불교나 한국불교는 산스끄리뜨본에 의해 《금강경》을 이해하고 불법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의거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성본/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일본 愛知學院대학 석사, 駒澤대학 석·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선학과 교수·한국선문화연구원 원장. 저서로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신라선종의 연구》 《선의 역사와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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