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스리랑카 ‘파아나두라’ 논쟁의 시말

편집자
이 논고는 일본 국비 지급【과학 연구비 보조금“(기반연구(A) 과제번호19202003)” <인도 종교 사상의 다원적 공존과 관용사상 해명>】(2007-2010년, 연구 대표자 釋悧震)의 연구 성과의 일부로, 원래는 《종교연구》(일본종교학회) 357호(2008년 9월)에 발표한 것을 한국 발표용으로 재정리한 것임을 밝혀 둔다.

1. 머리말

이 글에서 소개하는 ‘파아나두라 논쟁(Pa죚naadura죚 Va죚daya)’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 통치하의 스리랑카에서 불교와 기독교 간에 전개되었던 일련의 교리 논쟁이다. 이 논쟁이 벌어진 시대는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과 호혜적(互惠)인 공생(共生)을 위하여 적극적인 상호 이해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오늘날의 상황과는 달랐다. 세계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종교 간의 대결과 대립이 끊임없이 행해지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와 기독교라는 세계적 두 종교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각자가 신앙하는 종교의 위신을 걸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승패를 걸고 행했던 종교 대론(對論)이 ‘파아나두라 논쟁’이었다.1)  1) 이 글에서 언급되는 스리랑카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도 이 같은 시대의 추세 속에서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현지 종교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최종적으로는 기독교 선교와 식민 지배 정책에 대한 공헌에 있었던 것이 오늘날 종교 대화의 방향성과는 크게 다르다.

이 논쟁이 행해졌던 19세기 후반은 과학으로서 종교학은 아직 완성을 보지 못했으며, 종교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종교 간의 상호 이해를 위한 학술적 기반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을 때다. 이 대론은 불교와 기독교 교리의 우열을 다투는 대결이었으며, 논쟁이 된 내용도 대론자가 신앙하는 자신들 종교의 입장에서 타 종교에 대해 벌인 논란(論難)이었다. 또 종교적인 시점에서는 학문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점도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논쟁은 매우 치열한 논쟁이었음에도, 공정한 규칙을 정해 놓고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 불교와 기독교가 동등한 입장에서 날카롭게 교리 논쟁을 주고받았다는 의미에서 후대의 종교 간 대화의 선구(先驅)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것만으로도 이 논쟁을 다시 검토할 만한 충분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사회는 기독교인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 신앙의 우월성만을 주장하고 타 종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이해도 없이 비하를 일삼는 실정에 비추어 보면 일종의 타산지석이 되고도 남는다고 하겠다.

이 논쟁의 중요성은 이런 것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논쟁은 당시 침체 일로에 있던 스리랑카 불교계에 부흥 운동을 불러왔다. 그런가 하면 미국 뉴욕에 기독교 신지협회(神智協會, The Theosophy Society)를 창설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e Olcotte, 1832~1907) 대령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을 높인 계기가 되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또 인도에서 불교 부흥 운동을 대표하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죚 Boddhi Society 大菩提會)’의 창설자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죚garika Dharmapa죚la, 1864~1933)에게도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폐불(廢佛) 정책 탓에 침체되었던 일본 불교계를 부흥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생각할 때 이 논쟁이 아시아 여러 나라, 더 나아가 세계 각국의 근대 불교의 새로운 전개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파아나두라 논쟁’은 필자가 아는 한, 충분한 연구와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2) 2) ‘파아나두라 논쟁’에 관한 연구는 마에다 에가쿠 《현대 스리랑카 상좌불교》(마에다 에가쿠 전집 별권 2), 산키보우 불서림, 2006년, 모리 소도우 〈파아나두라 논쟁에 대해서〉(일본 《인도학 불교학 연구》 제18권 제1호, 361-366쪽); 석오진 〈스리랑카의 불교와 기독교의 대론〉(《東方》제3호―8호, 일본 동경 재단법인 동방연구회, 1987-1992년), 석오진 〈목사와 승려의 교리 논쟁〉(《禪急惻》1987년 6월, 7월호, 선사상사, 1987년, 등이 있음. 서양의 인도학 연구 학자 간의 연구는 약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2008년 1월17일~18일 양일간에 걸쳐 오스트리아 메르본 대학 하기 강좌의 팸플릿의 P. Friedlander, “Rediscovering the Dharma: Western Encounters with Buddhism in 19th Century South Asia,” 46~49쪽. 또, Wilhelm Halbfass, India and Europe, State University ofNew York press, 1988, 36-53쪽에서는 기독교의 전도사와 인도를 중심으로 남아시아에서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를 거론하는 중에 약간의 언급을 볼 수 있다. 그리고 R. F. Young, “The Carpenter-Preta: An Eighteenth-Century Sinhala-Buddhist Folktale about Jesus,” Asian Folklore Studies, vol. 54, 1995, 53쪽에 다소 거론하고 있다. 불교인과 기독교인들의 대론 전반적인 거론에 관해서는 Kitsiri Malalgoda, Buddhism in Sinhalese Society 1750~1900, University of California, 1976, 226~231쪽 등을 들 수가 있다. 또 Richard F. Gombrich: Theravada Buddhism :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Londonand New York: Routledge and Kegan Paul. 1988. 중 제7장 〈개혁 불교(Protestant Buddhism)〉라는 제목에서 이 논쟁에 관해 논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논쟁의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한국 또는 일본은 물론이고 본고장인 스리랑카에서도 잊힌 것이 현실이다.3) 3) 이 논쟁에 관해서 2002년 12월16일부터 2003년 1월11일까지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스리랑카에서 불교 활동의 중심을 이룬 출가 승려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사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회적 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승려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심 밖이었다. 출가 승려로서는 어느 의미에서 지당한 일일 수도 있으나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적 대논쟁인 ‘파아나두라 논쟁’의 역사적 의의는 잊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재가 신자 특히 엘리트층은 본 논쟁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 역사적 의의와 함께 보편적으로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가 보여야 할 모습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음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 현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 엘리트인 출가 승려들은 현실 세계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가 적극적 선교로 이교도가 교세를 확장하고 있음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시대는 다르나 구나아난다 스님에 의한 ‘파아나두라 논쟁’ 직전의 스리랑카 불교 상황과 비슷함을 느낀다. 이 같은 생각은 필자만이 아니라 스리랑카 엘리트 출가승과 재가 신자들도 함께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만약 구나아난다 스님과 같은 종교적 엘리트인 출가 승려가 솔선해 현실 세계로 눈을 돌려 깊은 관심 속에서 타 종교와 공존을 모색한다면, 종교 간 상호 이해의 기회가 크게 열려, 공생(共生) 관계를 심도 있게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이 논고에서는 현대 불교 세계에서 거의 망각된 ‘파아나두라 논쟁’을 재평가하고, 또 그 역사적 의의를 검증함으로써 종교 간의 대화를 창출할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2. ‘파아나두라 논쟁’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 불교의 상황

스리랑카는 총인구의 거의 70%가 불교를 신봉하는 불교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는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대항해(大航海) 시대’ 이후 서양 제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하에서 스리랑카 불교 상황은 대체로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4) 4) K. M. de Silva, A History of Sri Lanka, Vijitha Yapa Pub., 2004년, 414-446쪽. 그 밖에 스리랑카 불교 쇠퇴에 관해서는 인도 타밀인 세력의 침입 등 복잡하게 관계되고 있다. 스리랑카는 19세기 중엽부터 혼란기에 들어 이 혼란기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서양인에 의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고 말았다. 이 같은 혼란기는 1948년 스리랑카가 독립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나라 야스아키 《불교사》, 야마카와 출판사, 1979년, 424-435쪽 참조.

일반적으로 스리랑카와 서양의 관계는 포르투갈 시대(1505~1658), 네덜란드 시대(1658~1796)와 영국 시대(1796~1948) 등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포르투갈 시대는 가톨릭이, 네덜란드 시대 및 영국 시대에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강력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예컨대 포르투갈인들은 스리랑카인을 구제불능의 미개인으로 생각했다. 원주민들의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를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스리랑카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改宗)시키는 것”만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5) 5) 마에다 에가쿠, 《현대 스리랑카 상좌불교》 앞의 글, 469쪽

그들은 유럽 문명의 압도적인 힘을 배경으로, 스리랑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시대에는 “불교와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살해 및 부상을 입히면서”6) 포교 활동 기반을 약탈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원에서 재산까지 빼앗아”7) 그 재산을 교회에 인도했다. 6) 위의 글, 470쪽. 7) 위의 글, 470쪽.

물론 불교 사원 파괴에 관해서는 포르투갈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스리랑카인들도 앞장섰다. 예컨대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다르마팔라 왕(Dharmapa죚la, 재위 1551~1597)은 많은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 교회를 세웠다.8)  8) Silva, A History of Sri Lanka, 158-160쪽. 물론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교를 적대시했다는 것은 아니다. 상세한 것은 앞의 글 야마시다 히로시 박사의 논문을 참조 바람.

네덜란드 통합 시대에는 가톨릭을 포함한 불교, 힌두교 등의 이교도들에 대하여 개신교로 개종을 강요하는 운동이 “홀랜드 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조직화된 학교를 통해서 대규모적으로 행해졌다.”9) 9)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72쪽.

이 같은 정책으로 말미암아, 종래부터 스리랑카 인들의 자녀 교육을 담당해 왔던 불교 사상에 의한 민중 교육은 파괴되고, 대신 “네덜란드 종교 개혁파의 기독교 교리 문답과 기도문을 주요 교재”10)로 사용하는 학교 교육이 강제화되었다. 10) 위의 글, 472쪽.

네덜란드의 이 같은 정책에 따라 스리랑카 불교는 급속한 쇠퇴를 막을 길이 없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리랑카 불교는 이 시기에 이르러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한 것은 이 시기에도 침체하기 시작한 불교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국왕이 몇 명 나온 사실이다.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최고의 왕국인 캔디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캔디 왕조의 비말라 담마 수리야 2세(Vimala Dhamma Su 죚riya 재위 1687~1707)는 현재의 미얀마, 즉 버마에서 33명의 고승(高僧)을 초빙했으며, 또한 시리 비자야 라자시하 왕(Sirivijaya Ra죚jasiha 재위 1739~1747)은 계율을 전계할 수 있는 버마와 타이 출신의 비구 스님들을 영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다음 왕인 킷티시리 라자시하 왕(Kittisiri Ra죚jasiha 재위 1747~1781) 시대인 1753년에는 타이 왕 담미카(Dhammika)가 파견한 13명의 비구와 7명의 사미승을 받아들였다. 또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없었던 황금 불상을 증정받기도 했다. 이 같은 타이의 배려로 소멸하였던 스리랑카인 비구승에 의한 교단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금 탄생해,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 3대 종파의 하나인 시암 니카야(Siyam Nika죚ya)가 그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11)  11) G. C. Mendis, Ceylon Today and Yesterday, Associated Newspapers of Ceylon, 1957, 60-61쪽. 하야시마 교우쇼우, 《초기 불교와 사회생활》, 이와나미 서점, 1964년, 121쪽. 기츠도우 마사히로 《현대 스리랑카 상좌불교 교단》, 산키보우 불서림, 2002년 참조.

이로부터 55년 뒤인 1808년에는 버마에서 비구계를 받은 스리랑카인이 스리랑카에 귀국해 아마라푸라 니카야(Amarapura Nika죚ya)파를 창설했다. 이보다 56년 뒤인 1864년에는 역시 버마에서 전래한 또 하나의 새로운 종파인 라만냐 니카야(Ra죚man죚n죚ya Nika죚ya)파가 세워졌다. 이들 세 파는 지금까지 스리랑카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첫 번째 성립된 시암 니카야가 태국 불교의 명맥을 계승하고 있음에 비해 그 뒤 창립된 두 파는 모두 버마 불교를 그 명맥으로 삼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식민지 억압의 시대에도 얼마간 불교 부흥 운동은 있었으나, 그것이 서구 열강의 기독교 포교 활동의 촉진과 토착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탄압의 흐름을 변환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3. 영국 개신교 제파의 포교 강화

스리랑카 불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지배 시기에도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험난한 시기는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던 때였다. 영국인들의 불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기독교 선교 활동은 스리랑카 불교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심각한 위기 상황을 몰고 왔다.

원래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왕실의 보호 아래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도 쇠퇴했다고는 하나 국교(國敎)로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리랑카가 왕국의 영토를 영국 왕실에 넘겨준 1815년의 캔디 조약 제5조에도 ‘불교 불가침(不可侵)과 보호’가 성문화되어 있었다.12)  12) Colvin R. de Silva, Ceylon under the British Occupation, Colombo, 1953, vol. 1, 162-164쪽 

다시 말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와 주민들이 신앙하고 있는 붓다의 종교는 불가침이기 때문에 그 의식, 승려, 신앙 장소는 그대로 유지되고 또한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된다.”13)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13) Richard F.Gombrich, Theravada Buddhism :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8. 175쪽.

식민지 지배의 실권을 얻은 영국도 “처음에는 영국도 역대 왕들과 같이 불교의 제반 행사에 참가하고, 대표 큰 스님(장로) 임명식을 행하기도 했으며, 제반 사항에서 친불교적이었으며, 정치권력으로 불교 교단(상가)를 보호했다.”14)  14) 나라 야스아키, 앞의 글, 433쪽.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78쪽.

그러나 이 같은 정책에 대해 개신교의 여러 교파로 구성된 영국 기독교 교단은 영국 본토와 스리랑카에서도 기독교국인 영국이 다른 종교인 불교의 전통을 인정함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자 정치적 압력이 심해졌다.

기독교 측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식민지 총독부 스튜어트 매켄지(Stewart Mackenzie, 재임 1837~1841) 총독은 캔디 조약 체결 이후 스리랑카 왕을 대신해 권한을 행사해 왔던 마하 나야케 테로(Maha죚 Nayake Thero) 임명 승인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15)  15) Richard F.Gombrich: 위의 글, 176쪽.

마하 나야케 테로란 스리랑카 불교 교단의 최고위직으로 종정(宗正)에 해당하는 큰스님을 의미한다. 이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리랑카의 불교 지위를 공적으로 인정치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영국 식민지 정부가 스리랑카 불교가 역사적으로 누려 온 전통적 지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정부 차원의 불교 보호 정책 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마하 나야케 테로 승직 임명 승인 거부는 “불교와 비구 스님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을 야기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을”16)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민중들의 결속 능력을 약체화시키는 것과 연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16) 위의 글, 175쪽.

이 같은 정치적 의도 속에서 불교에 대한 압력이 가일층 높아지는 반면, 기독교 포교는 더욱 장려되고 있었다.17)  17)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78쪽.

이로써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녀 온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 침투를 획책하고자 예컨대 “어린아이들은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않으면 정식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으며, 또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결혼도 할 수 없는”18) 정책이 강행되었다. 18) 나라 야스아키, 앞의 글, 433쪽.

이로 말미암아 승려들과 일반 스리랑카 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크나큰 제약이 가해졌으며 스리랑카인들의 문화적, 정치적 자율성은 현저히 줄어들고 말았다. 이것은 스리랑카인들의 정체성까지도 흔들리게 했던 크나큰 문제였다.

원래 영국 정부는 “불교와 비구와 바라문 승려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위험한 존재”19)라고 그들의 위치를 규정해 놓고 있었다. 19)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76쪽.

또한 기독교 포교도 식민지 정책의 안정화 일환이었다.20) 20) 위의 글, 476쪽.

그러한 사정은 당시 영국 국교회 비버 주교가 작사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문〈세일론 찬가〉에도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가니 / 향기로운 향내음을 날라 주어 / 세일론(스리랑카)의 섬을 덮어 주네 // 행복이 충만한 가운데 / 낮고 천박한 것은 오직 인간들뿐 / 사랑의 마음이 흘러넘쳐서 / 하나님만이 은혜의 말씀을 설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 눈먼 사교도(邪敎徒)들은 / 나무와 돌에다 엎드려 머리를 숙이며 절을 하네.21)  21) Bhiksu Sangharakshita, Anagarika DharmapAla, A Biographical Sketch, Maha Bodhi Society of India, Calcutta, 1959. 1쪽. 후지요시 지카이 《  인도와 타이 불교》다이토우 출판사, 1991년, 85쪽.

이 노래는 최근까지 영국 국교회에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개신교 측의 공격적 선교는 한발 더 나아가 “불교 승려들의 설법을 방해하고 불교 신자들과 교리 대결을 서슴지 않고 청했다.”22)  22) Richard F.Gombrich, 앞의 글, 178쪽.

그렇지만 애초에는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과의 논쟁을 거부했다고 한다.23)  23) 위의 글, 178쪽.

4. 19세기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

이 같은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자 불교 신자들 측에서도 위기감을 느끼고 이에 대처하여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드디어 스리랑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 불교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기에 이를 만큼 고조되었다.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종교 논쟁인 ‘파아나두라 논쟁’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다만, 이 논쟁이 개최되기까지는 반세기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1850년대까지 불교 승려들은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승려들은 기독교에 적개심을 품지 않고 협조적으로 자신들의 도서관에서 불교 경전 사본 등을 빌려 주기도 하고, 또한 그 내용을 설명”24)할 정도로 외래 이교도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흔적이 있다.  24) 위의 글, 180쪽..

그러나 1860년대가 되면서 불교 측도 기독교 측에 반론과 대결 의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25)  25) Silva, A History of Sri Lanka, 428쪽

불교 측이 기독교 측에 대한 대응 방향을 전환한 동기의 하나로 인쇄 기술의 대중화에 힘입어 불교 교리와 불교의 주장을 담은 책자를 간행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불교 교리를 대대적으로 홍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1840년대 이후, 기독교 측에서 자주 대론을 청해 오는 등 도전 행위들이 거듭되어 점차 기독교와 대결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26) 26) 위의 글, 429쪽.

다시 말해서 불교 측이 기독교 측(실질적으로는 영국의 개신교 교파)의 요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종교 대론이 행해지게 되었다. “불교 측은 책자 인쇄 개시와 거의 동시에 마침내 기독교의 도전을 공개 토론의 장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27)   27) Richard F.Gombrich, 앞의 글, 181쪽.

이 같은 불교 측의 응답을 받아들인 개신교 측은 “놀람과 동시에 상당히 기뻐했다.”라고 전해진다.28)   28) 위의 글, 182쪽.

어찌 됐던 개신교 측은 이 대론의 승리를 전제로 기독교 포교 흐름을 한층 더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것은 “나는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지금 행하고 있는 논쟁의 결과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길고 험한 길이 되겠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역행하는 자들이 완전히 패배하여 현재 행복을 파괴하는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의 신조를 버릴 것이며, 스리랑카의 대단히 많은 주민이 불교에 대한 신앙을 포기할 것이 틀림없다.”29)라는 그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29) 위의 글, 180쪽.

이 대론은 1865년 2월부터 시작했는데, 애초에는 수속 관계에서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문서를 통한 상호 질의응답 형식이 채택되었다.”30)  30) 위의 글, 182쪽. 이 논쟁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Malalgoda, Buddhism in Sinhalese Society 1750~1900, 213-231쪽을 참조. 필자가 아직 그 내용을 보지 못했으나 스리랑카의 불교와 기독교의 공개 토론에 관한 역사는 Kindlers Literatur Lexikon(8 vols., Zrich, 1965~974)의 Supplementary Volume에 관련 사항이 실려 있음.

그리고 마침내 1873년에 ‘파아나두라’라는 마을에서 문서상 토론이 아니라, 청중을 앞에 두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론이 벌어졌다.

5. ‘파아나두라 논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해졌나?

이 논쟁의 내용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먼저 이 대론의 전체적인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와 기독교의 공정하고 또한 본격적인 대론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첫 번째는 1865년 2월 스리랑카 남부 밧데가마(Baddegama)에서 벌어진 논쟁, 두 번째는 같은 해 8월, 스리랑카의 옛 수도였던 콜롬보 근교인 와라고오다(Waragoda) 논쟁, 세 번째는 1866년 2월 중부 지방인 우단비타(Udanvita) 논쟁, 네 번째는 1871년 6월 같은 중부 지방인 감폴라(Gampola) 논쟁이다. 이 같은 네 번에 걸친 논쟁을 총결산하는 형태로서 다섯 번째의 대론은 콜롬보에서 가까운 해안의 어촌 파아나두라(Pana죚dura죚)에서 열렸다. 이들 일련의 논쟁을 판차 마하 와다야(Pan죚n죚ca Maha죚va죚daya 5대 논쟁)라고 부른다.31)  31) T. S. Dharmabandhu, PaJca MahA VAdayA(Anula press, Maradana, Sri Lanka, 1956)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

5회에 걸친 일련의 논쟁 중에서 다섯 번째 대론, 즉 1873년 8월26일과 8월28일 양일간에 걸쳐 파아나두라에서 행해진 ‘파아나두라 논쟁’은 논쟁의 중핵을 이루고 있으며, 관계 자료도 출판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2)  32) 상세한 설명은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운주사, 2001년, 24-25쪽과 이 논문 주석 2) 참조 바람.

이 역사적인 ‘파아나두라 논쟁’에는 불교 측에서 모호티와테 구나아난다(Mohot.t.iwatte Gun.a죚nanda) 비구가 참가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첫째 날에는 데이비드 데 실바(David De Silva) 목사, 둘째 날에는 시리만나(Sirimanna) 전도사가 토론자로서 참가했다. 청중은 첫날 5천 명, 두 번째 날은 1만 명을 넘었다고 추정한다.33)  33) Richard F. Gombrich, 앞의 글, 182쪽.

이처럼 많은 사람 앞에서 행해진 종교적 논쟁은 타 종교와 융화(融和)와 공생(共生)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인 대화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우위와 정당성을 주장하며, 승부를 가리려고 치열하게 다툰 논쟁이었다. 그러므로 양 진영에서는 대론자 외에도 양측 종교를 대표하는 장로와 유력자들이 배석했다. 불교 측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대지도자인 스망갈라(Sumangala) 장로를 비롯해서 구나라타나(Gun.aratana) 장로 등 4명이 임석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런던(London) 목사를 비롯한 세 명의 목사와 의사, 변호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인사들이 임석했다. 그들은 이 토론에서 감시위원인 동시에 목격자 역할을 했다.34)  34)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앞의 글 43쪽. 다만, Halbfass 박사가 앞의 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 논쟁에서 기독교 측의 대론자나 대회장의 임석 저명인사가 정말 어울리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대론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전체 진행 규정을 엄밀하게 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엄숙하게 양 종교 교리의 우열을 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 간 대화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또 오늘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모두 10개 항목으로 된 규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논쟁은 구두(口頭)로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대론이 어디까지나 평화롭게 진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론자들의 역량에 따라 승패를 판가름하자는 것이며, 그야말로 승부를 걸고 진지하게 격돌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쌍방의 논설을 기록하고 대론자들이 각기 이 기록문을 증명하는 서명을 할 것”을 규정했다. 이는 이 토론의 의의와 내용을 이 논쟁 장소에 국한하지 말고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남기며, 또한 스리랑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널리 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대론자들은 그 역사적 중요성을 알고 자신들의 발언에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였다.

세 번째 항목은 “대론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명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불교 기독교 쌍방이 자신들의 종교 및 상대 종교의 성전, 교리, 전통을 정확하게 이해한 후 객관적, 논리적으로 응수해야 하며, 확고한 문헌적 증거 없이 제멋대로 하는 이야기나 근거 없는 비판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항목은 “한 사람의 대담 시간은 한 시간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불필요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또 일곱 번째 항목에서는 대론 날짜를 1873년 8월 26일과 28일 양일간으로 정하고, 시간은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행한다.”라고 한정했다.

이 같은 형식상의 제반 규정에다 다섯 번째에서는 토론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토론은 먼저 기독교 측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정하고, 그 주제는 “불교의 허위성(噓僞性) 제시”로 하며, 이어서 불교 측에서는 “불교의 허위성에 대한 기독교 측의 발언에 대해 반드시 대답하고 나서,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하여 대론을 한다.”라고 정해 놓았다.

또 많은 청중이 모일 이 토론 대회에서 일어날 예기치 않은 사태를 예상해 제8항과 9항에서는 청중을 조용히 시켜야 할 의무까지 양측 대표자들에게 부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제10항에서는 이 논쟁을 위해 특별한 장소를 마련할 것을 명시했다.35)  35)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위의 글, 45-46쪽.

이상과 같은 10가지 항목에 달하는 협정서를 쌍방의 종교 대표자가 각각 3명씩 서명한 뒤 1873년 7월 24일에 승인했다. 이와 같은 합의로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인 종교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 대론이 많은 청중이 주시하는 가운데 마침내 이루어졌다.

6. 대론에서 토론된 내용은 무엇인가

첫 번째 대론에 나선 실바 목사는 이 토론의 규정에 따라 먼저 불교의 허위성을 폭로하고자 “불교 교리에서는 영혼이 존재치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 도덕이 성립될 수 없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불교 측의 구나아난다 스님은 “만약 기독교가 설하는 것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살인을 범했다 해도 별문제가 없다는 데에 귀결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해도 영혼은 불멸하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불멸의 생명 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거꾸로 윤리 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36)이라고 되받아쳤다. 36) 위의 글, 67-69쪽.

영혼 불멸론이 도덕 성립을 위해서 절대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실바 목사의 잘못된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또한 구나아난다 스님은 개신교 계통의 성서(聖書)에서 “성서 본래의 가르침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있다.”37) 또는 “저희 멋대로 변형시켰든가 혹은 삭제해 버렸다.”38)라고 지적하며 구약성서 《레위기》 17장의 기술이 삭제된 부분을 지적했다.  37) 위의 글, 74쪽 38) 위의 글, 74-75쪽.

기독교인들이 이같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멋대로 고친 태도를 비난했다. 그러고 나서 기독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서 역시 구약성서 《출애급기》 제20장 5절의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 God)이므로”를 인용해, 기독교의 하나님은 질투심이라는 중대한 결점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고, 구제의 하나님도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절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각 지역에서 신앙하고 있는 신들의 이름을 빌려 임기응변식으로 번역되어 하나님의 유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틀간의 논쟁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이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상이 1873년 8월 26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에 걸쳐 실바 목사가 지적한 불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 논쟁의 골자이다.

이어서 같은 날 오후 3시부터는 오전의 토론 마지막에 구나아난다 스님이 던진 비판에 대해 실바 목사가 응답하는 형식으로 토론이 다시 시작되었다. 실바 목사는 먼저, 기독교의 입장에서 구나아난다 스님이 질문한 성경에서 삭제된 기록에 관해서는 “위험성을 방지하고자 다른 곳으로 옮겼다.”라고 대답했다. 구나아난다 스님은 다시 그 다른 곳이 어디인지 밝히라고 다그쳤다.39)  39) 위의 글, 88쪽.

하나님의 명칭에 대해서도 실바 목사는 각 지역에서 현지의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40)   40) 위의 글, 86-87쪽.

그러고 나서 그는 불교의 오온설(五蘊說, 불멸의 영혼을 세우지 않고 인간 존재의 제상(諸相)을 설명하는 개념) 과 연기설(緣起說, 불멸의 영혼을 세우지 않고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윤리 도덕의 기초를 정립하고 있는 불교 교리)에 관해서 “이 가르침을 심원(深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곧바로 알 수 없는 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뿐이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이 심원한 것이라는 소문만으로 이를 믿고 신봉하는 불교도들만 이 가르침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41)라고 지적하고 불교의 난해한 교리를 찬양하는 데 대해 비판을 가했다.   41) 위의 글, 91-92쪽.

또 실바 목사는 “불교는 식(識)에 의해서 물질(物質, na죚ma-ru 죚pa, 名色)이 생긴다고 하며, 식에는 마음과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식은 또 마음과 물질 중에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같은 교리는 마치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나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태어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훌륭한 불타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42)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42) 위의 글, 89-90쪽.

이에 대해 구나아난다 스님은, 논쟁하는 상대방을 존중해 ‘목사님(Padili unnanse)’이라는 경칭으로 실바 목사를 호칭했음에도 실바 목사는 자신을 ‘적대자(viruddhakaraya, opponent)’라 호칭한 것을 비난한 뒤, 자신의 질문인 “하나님의 불완전성에 대해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라고 목사의 불비를 질타했다.

또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께 올리는 번제(燔祭) 와 할례 등의 의례 의식에 대하여 쟁론을 이어 갔다. 이와 관련된 성경 문장 등을 열거하고, 그 모순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추궁하는 구나아난다 스님의 엄중한 비판으로 첫 번째 날의 대론을 마쳤다.

두 번째 날에 해당하는 8월 28일 오전 8시부터 9시까지는 기독교 측에서 발언했다. 여기에서 등장한 기독교 측의 대론자는 실바 목사가 아닌 시리만나 전도사였다. 그는 스리랑카 출신인 것 같았으며,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실바 목사보다도 확실히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불교 교리를 둘러싼 시리만나 전도사와 구나아난다 스님의 논쟁은 전문적인 사상 내용까지 접근하여 상당히 수준이 높은 대론이 되었다.

먼저 시리만나 전도사가 논쟁의 불씨를 지핀 화제는, 앞서 26일의 대론에서 결론을 보지 못했던 하나님에 관한 문제였다. 즉, 26일의 쟁론에서 구나아난다 스님이 기독교를 비판해, 절대 유일신 하나님이라 하면서 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하고 제기한 데 대해, 시리만나 전도사가 그 회답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다시금 응수했다.

하지만 시리만나 전도사는 “하나님은 혐오심과 미워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43)라고만 회답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과 같은 성질과 그것도 질투와 성냄과 같은 인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에도 충분히 응답하지 못했다. 43) 위의 글, 115쪽.

 불교와 기독교 양측 주장이 서로 엇갈리기만 했기 때문에 이날 첫 대론은 순조롭지 못했다.

한편 불교의 우주관에 등장하는 수미산(須彌山)의 존재에 관해서도 화제가 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당시의 최신 과학 성과까지 동원하여 격심한 공격과 응수가 오갔다. 첫 번째 날부터 시작해 두 번째 날까지 계속된 이 주제의 논쟁에서 구나아난다 스님은 자연과학의 사고방식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전문 과학 지식으로 반증하고 불교 사상과 과학의 정합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자세를 보여 청중의 큰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 날 마지막 토론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행해졌는데, 다시금 기독교의 실바 목사와 구나아난다 스님의 대론이 계속되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여기서 생략하지만, 양측이 각각 정당성이 있다고 내세우는 교리와 신앙의 간격은 대론을 하면 할수록 가까워지지 않고 서로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은 채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독교 측의 발언자가 불교 경전의 원전을 인용해 불교와 논전(論戰)에 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 이래 남아시아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포교를 해 온 기독교의 역사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44)   44)  야마시다 히로시, 앞의 글 참조.

한편 불교 측은 기독교 성경을 인용할 때, 라틴어나 히브리 어로 된 원전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기독교 측은 공개 토론 대회 석상에서 난해한 불교 성전어(聖典語)인 팔리어로 기록된 원전을 인용하면서 대론을 전개한 데 반해 불교 측은 민중들에게 대화하는 것처럼 친밀감 있게 스리랑카 민족어인 싱할라어로 대론을 마무리 지었다.

이상과 같이 파아나두라 논쟁에서는 불교와 기독교 양 종교의 공통된 문제점인 영혼관과 세계관이 거론됐다. 또 두 종교의 고유한 사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 또는 절대성과 성경 기록의 모순점과,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의 난해함과 그 모순점 등이 대론의 주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논쟁의 모습은 당시 스리랑카의 대표적 신문 <실론 타임스>의 존 카퍼(John Capper)가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여기에 뒷날 같은 신문사 편집인들이 더욱 세밀한 내용을 첨가하여 싱할라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싱할라어 원본을 영어로도 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 늘어나자 카투콜리히(Katukolihe)가 영문 번역본을 출판하여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당시에 마침 스리랑카에 체재 중이던 미국인 학자 피블스(J. M. Peebles) 박사가 이 논쟁의 승패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출판물이 공개되었다. 이 덕분에 더욱 많은 지식인이 이 논쟁의 객관적인 진가를 이해하게 되었다.45)  45) The Great Debate, Buddhism and Christianity, Face to Face(Colombo, 1955)로 출판되었다.

7. ‘파아나두라 논쟁’의 세계적 파급

이 논쟁에 관한 평가에는 “전도사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잘못이 있었음을 깨닫고, 더는 도전을 하지 않았다.”46)  46) Richard F. Gombrich, 앞의 글, 182쪽.

는 “이 대론은 기독교 측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불교가 기독교보다 뛰어나다는 인상을 대론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47) 등에서 볼 수 있듯, 대체로 기독교 측의 열세로 끝났다는 평이 많았다.  47)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80쪽.

다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 측은 시종 싱할라어를 사용하여 대화체로 민중에게 이야기했으나, 기독교 측은 팔리어로 된 전문용어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론의 우열에 대한 판단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또 기독교 측 대론자의 수준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48)  48) P. Friedlander, “Rediscovering the Dharma: Western Encounters With Buddhism in 19th Century South Asia,” 46쪽.

여하튼 이 토론 대회의 보고서를 읽은 사람, 또는 이 논쟁 모습을 전해 들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이 대론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하에서 열세였던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불교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또한 이 논쟁을 기점으로 불교 근대화 운동을 새롭게 확장해 나갔다.49) 49) F. Katukolihe, PAnadurA VAdaya(The Panadura Controversy), Lankaputhra Press, Colombo, 1948. Re-edited by Pranith Abhayasundara, Controversy at PAnadurA or PAnadurA VAdaya, Published by The State Printing Corporation, Colombo, Sri Lanka, 1990.

‘파나아두라 논쟁’은 당시 어떤 사람들(특히 구미의 지식인 중에서)이 받아들여, 어떻게 평가했는가, 또 논쟁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 어떠한 형태로 파급 되었는가. 본 논문의 결론을 대신해서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당시의 구미 지식인들의 평가 중 대표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피블스 박사의 저서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와 기독교) 양측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어, 언제나 양측이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공평하고 객관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들은 바로는, 불교 측 승려는 인성과 태도가 훌륭한 대론자였으며, 일반 민중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하고 군중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논쟁의 결과에 불만족이었던 것은 확실하다.50)  50) 상세한 것은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앞의 글, 25쪽을 참조 바람.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논쟁의 승패에 대한 판정은 제쳐 놓는다 해도, 이 논쟁이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불교도로서 자부와 긍지 그리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감명을 받게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뒤에 인도 불교 성지 찾기와 불교 부흥운동을 지도한 ‘대보리회(大菩提會)’ 즉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를 창설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도 이 토론의 결과에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다.

이런저런 상황을 살펴보면 이 논쟁은 스리랑카를 불교국의 명맥을 명실공히 유지하게 해 주고, 현대 스리랑카 상좌불교의 회생에 공헌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 같은 논쟁을 알게 된 미국의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기독교 신지학회(神智學會) 창설자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e Olcotte) 대령이 훌륭한 논쟁을 한 구나아난다 스님을 찾아 스리랑카에 입국해서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기독교인에서 불교 신앙인으로 개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1875년 미국 뉴욕에 기독교 신지협회를 러시아인 마담 브라바스키(M. H. P. Blavatsky, 1831~1891)와 함께 설립해 활동하다 1880년 2월 17일 스리랑카 남부의 골이라는 항구 도시에 입국해 그 지방 불교 사원에서 불교 신자가 되는 5계를 받고 불교도로 개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불교 신지협회(佛敎 神智協會: The Buddhist Theosophical Society)51)를 설립했다.  51) 불교신지협회에서는 심령(心靈)주의자의 영매(靈媒)이며, 기적을 행하는 브라바스키 부인이 신지학(神智學)의 이데올로기를 담당하고, 군대와 사법(司法) 경험이 있는 올코트 대령이 신지학 제도화에 힘을 기울였다. 신지학은 기존의 모든 종교를 대신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기존 종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지학은 동시에 당시의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진리는 동양 정신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들은 당시 힌두교나 불교를 잘 알지도 못했음에도 힌두교나 불교가 기독교보다 뛰어나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Richrd Gombrich, Gananath Obeyesekere, “Buddhism Transformed Religious Change in Sri Lanka”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204쪽.).

이 협회는 “불교 신자들의 자제들이 불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불교 학교 설립을 목표로 했다.”52)   52) 마에다 에가쿠, 앞의 글, 480쪽.

또 불교 신지협회는 “실제로는 개혁불교 그 자체였다.”53)라고 하는데, 이것은 올코트 자신이 나름대로 불교 이해를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53) Richard F. Gombrich, 앞의 글, 186쪽.

그는 기독교적인 발상으로 불교의 근대화에 매진하고 많은 교육기관과 불교 교단을 조직화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등, 스리랑카 불교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이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불교 부흥운동 지도자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옛 이름이 돈 데 헤와비타네(D. D. Hewavitane)였던 그는 콜롬보의 부유층 가정에서 태어나 기초 교육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받았다.

그러나 ‘파아나두라 논쟁’ 당시 이 논쟁을 현지에서 청취해 감동을 받고 구나아난다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또 올코트가 스리랑카에 처음 입국할 때부터 통역 등을 도와 상당히 가까운 관계였다. 다르마팔라는 뒤에 불교 신지협회를 떠났지만, 나중에 불교 근대화에는 매우 큰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인도에서 불교 성지 붓다가야를 불교도들 품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불교 근대화의 상징적 운동이 되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보면 동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마한 섬나라에서 19세기에 행해진 이 논쟁은 특히 일본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상황은 일본이 낳은 인도철학 불교학 및 비교종교 사상의 세계적인 석학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박사가 인상 깊게 논술하고 있다. 조금 긴 내용이긴 하나 이 논쟁의 영향력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의 구나아난다 스님이 미국의 올코트 대령을 정신적으로 각성(覺醒)시킨 사실은 일본 불교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시절(1868~1912)에 불상을 파괴하고 불교를 경시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1878년 하라 탄잔(原坦山, 1819~1892)54)이 동경 제국대학에서 《대승기신론》을 강의한 것이 불교 부흥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진다.  54) 일본 불교 선종의 하나인 조동종 승려로 동경대학 인도철학과에서 최초로 불교 강의를 시작해 10년간 교수 생활과 조동종 관장(정종)직을 역임하는 등 걸출한 학승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하라 탄잔이 동경제국대학에서 불교를 강의하겠다고 확실하게 결심한 것은 올코트 대령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라 탄잔은 불교를 인도철학이라고 부를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는데, 그는 1887년 2월 동경 제국대학 문리대 문학부에서 ‘인도철학 요령(要領)’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올코트 씨가 말하기를 ‘종교(Religion)’란 말은 불교에 사용함이 타당치 않으며, 불교는 오히려 도의(道義) 철학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즉시 심성(心怯)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동경제국대학에서도 인도철학이라고 그 명칭을 바꾸는 것이 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라 탄잔이 1875년 뉴욕에 설립해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 불교 부흥의 원동력이 된 불교 신지협회 창시자 헨리 스틸 올코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인도철학 강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크나큰 세계적인 움직임의 파동(派)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를 파괴하고 또한 경시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일본에서 불교의 부흥은, 풀뿌리에서 싹이 혼자 생성해 나오듯 홀로 된 것이 아니다. 스리랑카에서 구나아난다 스님이 시작한 활동이 드디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의 하라 탄잔으로 하여금 행동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55)  55)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앞의 글, 17-19쪽.
 
다시 말해 이 논쟁을 기화로 올코트와 함께 세계적인 불교 부흥 운동 단체인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창시자 다르마팔라가 일본을 수차 방문했던 인연을 계기로 일본 불교학 발전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남아시아의 한 조그마한 어촌에서 야기된 이 논쟁은 스리랑카의 불교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또한 구미 서양인들에게까지 불교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것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 간 대화에도 큰 희망을 주는 사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교 간의 대결이나 비판도 잘만 활용한다면 다른 종교와 접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서로 가치관을 달리하는 종교 간의 상호 이해를 깊게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공생(共生)과 공존 관계 그리고 관용 정신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1860년대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파아나두라 논쟁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입증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논쟁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의 중요성이라고 생각된다. ■

 

석오진 / 서울 출생. 조계종 승려. 일본 동경 고마자와(駒澤)대학 대학원 인도불교학석사 및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동경대학 강사 , 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 협력 연구원. Sri Lanka국립 Peradeniya대학 및 Ruhun 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재단법인 동방연구회 연구원, 동경 동방학원 강사, 일본 스루가다이대학 강사. 동국대학 불교문화 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평의원, 일본 팔리학 불교학 문화학회 이사 등으로 재직 중. 저술 및 번역서로 《기독교인가 불교인가-역사의 증언》 《파아나두라 대논쟁》 《붓다 안의 예수, 예수 안의 붓다》 《비교 종교 사상론》 《원전으로 읽는 원시불교의 세계》 《中村元》 《종교와 사회윤리》 《불교와 인간》 《불교 요설》 《붓다가 남기고 싶었던 말》 《석존과의 대화》 등과 학술 논문 100여 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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