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동남아 불교의 힘을 말한다

동남아 상좌부 불교와 정치: 승가와 국가권력 관계를 중심으로* 

1. 서론

김홍구
부산외대 교수
대륙부 동남아에 인접해 있는 태국과 라오스 양국은 전근대시대 이래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 Theravada Buddhism)를 신봉했던 국가다.

태국은 13세기 중엽 쑤코타이 왕국(Sukhothai: 1238-1438년)이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도입한 이래 오늘날의 랏따나꼬씬 왕국(Rattanakosini: 1782년-현재)까지 불교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불교는 태국 국민의 95%가 신봉하는 지배적인 종교(dominant religion)다. 라오스에 불교가 도입된 시기는 태국보다 조금 늦은 14세기 중엽 란쌍 왕국(Lan Xang; 1353-1707년)이 건립된 이후였다. 라오스 불교의 뿌리는 태국과 같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된 상좌부불교이며. 란쌍 왕국 이래 다수 종족인 라오족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들 나라에 도입된 불교는 국민들의 도덕적 가치, 사고, 행동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사회질서와 정치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불교교리를 전파하는 승가(僧伽, sangha)는 가장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에 놓이게 되었으며 승가는 정치, 사회, 문화 제 영역에 걸쳐 폭넓게 그 영향력을 미쳤다.

이들 나라에서 승가는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양자관계는 불교세계관에 따른 정치, 종교적 질서에서 기인한 것이다. 왕권은 불교의 주요교리인 공덕(功德, merit)과 업(業, karma)에 의해서 정당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전통적인 왕들은 불교교리의 전파자인 승가의 중요한 후원자가 됨으로써 승가와 국가권력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 이후 이 같은 관계는 태국과 라오스 양국에서 전개되는 상이한 역사적 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태국은 절대군주들의 절대적인 정치적 역할을 통해 서구의 직접적인 식민지 지배를 겪지 않고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또 1932년 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된 후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지만 태국의 입헌군주는 전근대 시대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보호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독특한 위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전근대 시대에 특징 지워진 승가와 국가권력(전통적 왕권과 근대적 정부 권력)간의 전통적인 관계도 다소 변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라오스는 태국과는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된다.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였으며 이 기간 중 군주제의 정치적 효용성이 상실되었다.

해방 후 태국과 같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라오스의 입헌군주는 태국과 같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불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했으나 승가는 분열되었다. 승가의 분열은 좌, 우익 정치세력의 분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된 후 입헌군주제는 붕괴되었으며 승가는 국가권력에 의해서 철저히 탄압 받았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전근대시대 이래 전개되는 상이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양국의 승가와 국가권력간의 전통적인 관계는 변화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동남아의 상좌부 불교 국가인 태국과 라오스에서 승가와 국가권력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근대 이후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이다. 태국과 라오스의 승가와 국가권력관계에 관한 연구는 양자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특정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연구가 될 것이다.

2. 승가와 국가권력의 전통적 관계

승가와 국가권력은 각각 종교와 정치라는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양자관계의 특징은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탐비아(S. J. Tambiah)는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열강의 식민지지배를 경험치 않음으로써 전통적인 불교의 전통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었던 태국의 예를 들어 승가와 국가권력사이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태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불교정치체제(Buddhist Polity)라고 명명하고 불교정치체제를 불교와 승가 그리고 왕권 및 정치체제의 혼합된 결과물로 보았다.

이중 불교는 부처, 법(法, Dhamma), 승가의 삼보(三寶, three jewels)로 구성되었으며 왕권은 삼보를 실현하는 탐마라차(Dhammaraja), 미래불(未來佛),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런 맥락에서 왕권, 부처의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는 법, 그리고 법을 실현하는 종교적 조직인 승가의 상호관계는 동남아의 전통적인 불교정치체제를 설명하는 기본구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남아의 전통적인 불교국가에서는 국가권력의 핵심을 이루었던 왕권은 법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이러한 법을 전수했던 것은 승가였다. 또한 법의 생존은 승가의 순수성에 의해서 보장되었기 때문에 왕권은 승가의 보존과 발전을 위하여 승가를 후원하고 정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불교정치체제는 왕이 승가를 후원하고 승가는 법을 준수하며 법은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삼각관계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도를 왕권과 승가사이의 양자관계로 압축하여 설명하면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왕은 승가를 여러 가지 형태로 후원하였다. 동남아 불교국가에서 승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왕이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상좌부 불교의 발원지인 스리랑카로부터 발생하여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이후 동남아의 불교도 왕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불교를 후원했다. 사원을 건축하거나 기부하였을 뿐 아니라 토지를 하사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고 우기(rainy season)가 끝난 후에는 승려들에게 법복을 하사하는 가사(袈娑, Kathina)전달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왕의 승가후원은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국민들 역시 적극적으로 승가를 후원하게 됨으로써 승가 지지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결과적으로 왕의 승가후원은 법을 실현하는 탐마라차로서의 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왕은 승가를 후원했을 뿐 아니라 승가를 통제하기도 했으며 그 방법 역시 다양했다. 쑤코타이 왕조 이래 태국의 왕들은 승가의 최고 지도자인 승왕(僧王)을 직접 임명했다. 국가시험을 통해 승려들에게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 했으며 신분증을 발급하고 중앙, 지방단위의 정부 관료체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승가를 통제했다.

이런 승가 통제의 정치적 이유에 관해서 쏨분(Suksamran Somboon)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①사회통합과 효과적인 국가보호의 수단으로서 정부는 강력하고 타락하지 않은 승가를 원했으며 ② 승가조직은 가장 규모가 큰 국가조직이기 때문에 정치지도자에게 위협이 됨으로써 승가에 대한 통제는 정당화되었으며 ③ 정부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 승가를 용이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국가는 승가를 통제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가 통제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은 기본적으로 승가의 정신적인 우위를 인정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위배될 때 불법으로 간주되어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한편 국가권력은 승가를 후원함으로써 반대급부로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우주, 사회, 왕권의 생성신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불교경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최초의 왕은 인간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회계약에 따라 인간들에 의해서 선출된 존재였다.

 따라서 왕은 위대하게 선출된 자(maha sammata), 법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통치자(raja)였으며 밭의 주인(khattiya)이 되었다. 이러한 왕은 왕으로서 기본적으로 준수해야할 시법(十法, 왕으로서 준수해야 할 10가지 의무, Thosapitrajadhama) 을 준수해야 했다. 또한 이러한 법에 따라 통치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여기고 그를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탐마라차라고 불렀으며 왕이 정의로우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정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탐마라차는 법을 준수함으로써 그의 통치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으며 법을 거스르고 불법을 자행하는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 당하고 그에 대한 통치권의 거부는 정당화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전통적인 동남아국가에서의 승가와 국가권력과의 상호보완적 관계-승가는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왕은 승가를 후원하는 관계-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태국과 라오스의 전근대 사회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나 이후 양국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따라 변화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변화의 양상을 승가의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성 부여 기능과 국가권력의 승가에 대한 후원과 통제 양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가의 두 가지 관점에서 추적해 보고자 한다.

3. 전통적 정치, 종교적 질서의 변화

1) 근대화와 불교개혁운동: 태국

① 몽꿋왕의 불교개혁운동


전근대 태국에서 불교(승가)와 왕권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바같이 불교적 교리에 의해서 정당성을 갖는 탐마라차는 승가후원을 중요한 정치적 임무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아유타야 왕조(Ayuthaya: 1350-1767년)이래 태국에 브라마니즘(Brahmanism)이 도입되자 불교는 브라마니즘과 병존하면서 발전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교의 탐마라차 왕권도 브라마니즘에서 유래하는 테와라차(신왕, Devaraja) 왕권과 병존 발전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왕권의 관계는 브라마니즘에서 유래하는 신왕의 자의적인 권력을 탐마라차의 왕권이 견제하는 관계로 발전되었다. 신성을 부여받게 되는 테와라차는 불교의 기본적인 도덕률인 시법을 준수하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태국에서 브라마니즘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났던 아유타야 시대 이래에도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여전히 불교였다.

따라서 테와라차이면서 탐마라차가 되어야하는 절대군주들은 불교도 왕으로서 기본적이 임무에 충실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폐위가 정당화되기도 했다. 이 같이 브라마니즘이 도입된 후에도 왕권과 불교 또는 승가와의 전통적인 관계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브라마니즘의 발전에 따라 태국의 전통 불교는 브라만교의 미신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그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는 라마 4세(Rama Ⅳ: 1851-1868년) 몽꿋 왕(Mongkut)때부터 불교개혁운동이 단행되었다. 몽꿋은 태국불교의 기존 종파인 마하니까이(Mahanikai)와 다른 새로운 종파인 탐마윳니까이(Thammayutnikai)를 만들어 불교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을 탐마윳운동이라고 불렀다. 몽꿋이 주도한 탐마윳 운동의 주요내용은 경전주의(scripturalism), 주지주의(intellectualism), 합리주의(rationalism)를 특징으로 삼는다.

우선 몽꿋은 올바른 불교교리의 이해를 위하여 원래의 불교경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여 순수 빨리어(pali) 경전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태국의 역대 왕들은 불경 개정사업을 해 왔다. 그 주요한 이유는 사회적 질서의 악화현상은 법의 퇴보와 관련이 있으며 이를 멈추게 하거나 역전시키는 유효한 방법으로 불경 개정사업을 추진해 오곤 했다.

불경의 개정이나 승가의 개혁은 불교 역사상 불심이 돈독한 왕들의 주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몽꿋은 경전복원 사업을 통해 과거의 신앙심 깊었던 역대 왕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키고 부처의 말씀인 법의 복원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시함으로써 법에 따라 통치하는 탐마라차로서의 면모를 보여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편 몽꿋은 순수 불교경전에 충실하게 됨으로써 소위 청교도적인 주지주의(purinical intellectualism)를 강조하게 되었으며 사실 무근의 신화, 환상적 우주론, 미신적 믿음 등에 적대적이었으며 불교에 삽입된 전통적인 믿음과 관습들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은 몽꿋은 불교의 합리주의를 강조해 법과 근대과학을 조화시킬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몽꿋은 불교의 주지주의와 합리주의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우주론적 개념들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으며 불교 왕권의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도 급진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는 여전히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업, 공덕, 윤회-은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불교개혁운동을 통해 강화된 불교적 전통과 왕권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쭐라롱껀 대왕의 근대화와 불교개혁운동

몽꿋왕 때부터 시작된 태국의 근대화와 종교개혁은 그의 아들인 라마 5세 쭐라롱껀대왕(Chulalongkorn: 1868-1910년)에 의해서 계속 추진되었다. 라마 5세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작업은 서구열강의 식민주의 침투에 맞서 불교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는 서구열강의 침투가 국가안정과 왕권에 큰 저해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닿고 대외적으로는 독립국가의 유지를 제 1의 정책목표로 삼고 대내적으로 소위 짝끄리 대개혁(Chakri Reformation)을 통해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짝끄리 대개혁이라고 부르는 행정대개혁을 추진하여 중앙행정조직을 12개의 부서로 개편했으며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여 내무부 관할 하에 두어 중앙통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권력의 중앙집중화 현상이 뚜렷해 졌으며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라마 5세의 근대화와 개혁작업 역시 전통적 불교 왕권의 강화를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불교로부터 유래한 전통적 정치원리를 근거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한편 서구 외래의 정치원리를 거부했다. 이런 사실은 1885년 입헌군주제로 이행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제출되었을 때 헌법제정, 의회의 설치에 의한 입헌제도의 도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1902년 승가조직을 정비하여 태국 최초의 승가법(the Sangha Act of 1902) 을 제정하여 종교의 옹호자로서의 국왕의 권위를 전국에 확산시키고 모든 사원과 승려를 왕권의 지배하에 두는 체제를 구축했다. 아유타야시대 이래 태국의 승가는 캄마와씨(Gamavasi, Town Order)와 아란야와씨 (Arannavasi, Forest Order)로 나뉘어지고 각각 종단의 대표자는 국왕이 임명하는 느슨한 체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중앙집권식 행정체제 도입과 함께 종단 대표자는 한 명 만을 임명하고 승가체제는 더욱 강력하게 정부 행정체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승가법의 제정은 승가와 정치권력을 더욱 밀착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 결과 라마 5세의 통치 정당성은 더욱 확고해 지고 그의 정부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정부로서 지위를 얻게 되었다.

③ 와치라웃왕과 내셔널리즘

라마 6세 와치라웃왕(Wachirawut: 1910-1925년)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위협을 벗어나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국가통합을 이루기 위하여 내셔널리즘을 주창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종교와 왕이라는 태국의 전통적인 주요한 양대 가치와 연결시켰다. 라마 6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태국의 국기를 만들었다. 이 국기는 백색, 적색, 청색으로 만들어졌는데 백색은 불교, 적색은 민족과 국가, 청색은 국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일체화시켜 내셔날리즘운동의 기초를 이루게 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후일 형성되는 락타이(Lak Thai, 태국적 원리) 이데올로기의 맹아가 되었다.

라마 6세는 왕이 원수로 군림하고 불교가 번영하며 국민이 왕을 존경하며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이상적인 통치형태로 삼았다. 그가 내셔날리즘을 주창했을 때 내부적으로 라마 5세 때 시작된 해외유학제도의 확충과 서구문명의 전파를 배경으로 태국 사회에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새로운 지식인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와치라웃왕은 불교와 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와치라웃왕 이후의 전통적 왕권은 전임 왕 때와 비교해서 크게 약화되었다. 사실상 라마 4, 5세의 근대화와 개혁작업의 결과 초래된 전통적 왕권의 권위 약화현상은 라마 6세와 7세의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점차 절대군주제의 정통성의 상실로 이어져 라마 7세 때인 1932년 쿠데타가 발생해 태국의 절대군주제는 붕괴되었으며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2)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 라오스

태국에서 근대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 일 때 동남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급속히 증대되었다.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1864년 코친차이나(Cochin-China)합병 후 1882년과 1884년에 각각 안남과 통킹(Tongking)을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1893년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하여 태국이 라오스의 메콩강(Mekong) 이동지역을 포기함으로써 이후 프랑스의 라오스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라오스의 전통적 불교세계관에 따른 정치, 종교적 질서는 크게 약화되었다. 식민총독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던 3왕국 중 사실상 루엉프라방(Luang Prabang)만을 자비로운 허락을 통해 전통적인 왕이 통치토록 했으나 실제 권력은 식민당국이 행사했다. 또한 불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 당함으로써 왕권과 승가사이의 전통적 관계는 크게 약화되었다.

전근대 시기 라오스 란쌍 왕국의 불교와 왕권의 관계는 태국과 같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라오스에서 상좌부 불교는 1353년 화 훔(Fa Ngum)왕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화훔 왕은 크메르로부터 상좌부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으며 이후 상좌부불교는 전근대 라오스의 정치, 사회생활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근대 라오스 사회는 불교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라오스의 계서적 사회구조와 왕권은 공덕과 업에 의해서 정당화되었다. 또한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왕들은 불교와 승가를 후원함으로써 탐마라차로서의 역할에 충실코자했다. 라오스의 불교는 절정기를 이루었던 쑤링가웡싸왕(Souligna Vongsa: 1637-94년) 때 크게 번성하여 수도인 비엔티엔은 태국, 캄보디아, 심지어 버마의 승려들까지도 방문하여 불교를 연구하는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라오스는 17세기말 쑤링가웡싸왕 때 영토와 세력 면에서 절정기를 맞았으나 그가 죽고 나자 왕국은 그의 왕자들에 의해서 비엔티엔(Vientiane), 루엉프라방(Luang Prabang), 짬빠싹(Champasak)의 3 국으로 나뉘어졌으며 3 국은 태국, 버마, 베트남의 위협에 직면하여 18세기 내내 왕위쟁탈을 벌이다 프랑스가 개입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에는 태국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프랑스 식민통치 후 라오스의 전통적인 불교와 승가의 전통적인 영향력은 특히 도시에서 약화되었다. 도시에서는 승가가 전통적으로 수행해온 교육의 독점적인 기능마저도 상실되었다. 도시의 라오스 전통 엘리트층에게는 프랑스식 세속적 교육이 보편화되었고 그들은 쉽게 식민지 권력구조에 편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 불교세계관에 따른 정치, 종교적인 질서는 라오스 전통 엘리트층들에 의해서 스스로 파괴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프랑스 식민당국은 전통불교와 승가의 권위에 대해서 비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불상과 가치 있는 불교유물들을 밀반출해 갔고 사미승들이 불문에 출가하기 전 대금을 지불토록 강요했으며 애국적인 내용을 담은 종교적 문학작품을 암송치 못하도록 했다. 불교와 승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프랑스의 의도는 근대국가의 정교한 관료체제의 규칙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1927년에 라오스 승가의 행동규약을 만든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는 1930년과 1931년에 각각 프놈펜(Phnom Penh)과 비엔티엔에 불교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 설립목적은 전통 불교의 이론적 변화를 시도하면서 탐마윳운동(Thammayut)을 통하여 전통불교의 한 차원 높은 이론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태국불교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불교연구기관의 설립과 더불어 라오스 남부의 바싹(Bassac)에 빨리어 학교를 설립하여 라오스 승려들이 태국에 유학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연구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진 라오스와 프랑스 양국학자들의 의견교환은 어떤 식으로든 라오스 불교학연구의 방향설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은 라오스의 전통적인 불교와 승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라오스는 태국에서 라마 4, 5세에 의한 불교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을 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음으로써 전통적인 왕권이 약화되고 승가는 자주적인 불교개혁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분열되었던 3 왕국 중 루엉프라방의 왕은 존속했으나 실제로 프랑스 식민당국에 종속된 신세로 전락하여 정치적 실권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의전적인 위상에 놓인 왕은 더 이상 승가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4. 전통의 계승과 변용

1) 전통의 성공적 계승과 변용: 태국

① 입헌군주제의 도입과 그 위상


태국에는 1932년 입헌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되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국의 입헌군주와 불교, 승가와의 관계는 전통적인 양자관계를 계승하는 것이었으며 불교와 승가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에 놓여 있었다. 32년 이래 태국의 모든 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나 불교의 진흥과 보호는 역대 정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태국헌법 조항에서는 “태국의 국왕은 종교의 수호자이며, 국왕은 불교도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2년 혁명 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래 태국에는 모두 3명의 입헌군주가 즉위했다. 혁명 직전까지 절대군주로 재임했으며 태국 최초의 입헌군주가 되는 라마 7세(1925-1935년)는 혁명 주체와의 알력을 빚던 중 1935년 스스로 퇴위했다. 두 번째로 즉위한 라마 8세(1935-1946년)는 즉위 당시에 성년의 나이에 이르지 못하여 섭정이 그 직을 대신하던 중 1946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현재의 태국 국왕인 라마 9세 푸미폰 국왕(Bhumibol Adulyadej: 1946년-현재)이 즉위했다.

그는 즉위 당시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었으며 1950년 귀국했다. 그 시기는 피분(Phibun Songkhram: 1938-1944년, 1948-1957년)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국왕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피분정권 하에서 국왕의 역할은 미미했다. 그러나 이후 싸릿(Sarit Thanarat: 1958-1963년) 쿠데타 후 싸릿은 국왕을 이용한 정권의 정당성 확보 노력을 기울이면서 32년 혁명 후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입헌군주 푸미폰 국왕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푸미폰 국왕으로서는 그때까지 취약했던 입헌군주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싸릿의 화해 제스추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싸릿의 국왕을 이용한 다양한 정당성 확보 노력 중 중요한 것은 불교도로서의 국왕의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싸릿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국왕의 역할을 확대시키면서 32년 혁명 후 중요성이 감소되었던 불교가치의 부활을 통해서 국왕과 불교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복원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통적인 가사전달의식(Kathin Ceremony)의 복원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국왕은 불교의 수호자로서 전통적인 탐마라차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푸미폰국왕은 다양한 불교행사 에 참여하여 행사를 주재하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법을 실행하는 탐마라차로서의 정당성을 확인 받게 된다.

② 불교도 왕과 정치적 정당성

1932년 입헌혁명이후 오랜 기간 동안 태국은 군부가 민간관료체제를 지배하고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집정주의적 정치체제(praetorian political system)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으며 정권교체의 수단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선거방식이 아닌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다. 1932년부터 1991년까지 태국에는 총 17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역대 정권이 정통성의 원리로 채택한 합법적 지배의 취약성이 노정 되었으며 정권담당자들은 합법적 지배의 취약성을 보강할 수단을 전통적 가치에서 구하고자 했다.

왕과 불교라는 전통적인 가치가 정치체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싸릿 정권 때부터였다. 이후 국왕과 불교와의 밀접한 전통적 관계는 싸릿정권 이래 강조되었다. 싸릿은 1957년 쿠데타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른바 락타이(Lak Thai)이데올로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락타이는 싸릿 이후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이상적인 국가질서가 되고 있다. 락타이의 개념은 태국의 삼색기를 통하여 상징화되고 있다. 삼색중 적색은 국가, 백색은 종교(불교), 청색은 왕을 상징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왕과 불교와의 관계가 락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 한 바 같이 태국의 이상적인 왕권개념인 탐마라차는 불교의 법을 실행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리에 착안하여 싸릿은 왕이 불교의 수호자가 되는 락타이의 국가질서를 지지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국왕과 불교의 양대 가치는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한 싸릿 군부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싸릿은 국가개발(national development)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개발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국가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통적 가치들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통합(national integration)은 국가개발(national development)을 실현하기 위하여 강화되어야 하며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왕과 불교가 대표하는 전통적 가치의 고양을 통해 국가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승가는 개발계획의 국민의 참여동기를 유발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태국사회에서는 과거부터 승가와 불교는 정치체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과거의 승가의 정치체제로의 통합현상은 국가개발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국가개발전략에의 기여 역할로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의 국가통합과 개발정책에 부응하여 1965년 이후 승가는 중요한 두 가지 계획-탐마툿 계획(Phra Dhammatuta)과 탐마짜릭 계획(Phra Dhammajarik)-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싸릿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한 이래 왕은 군사 쿠데타 성공의 주요한 변수가 되었다. 즉 왕이 승인할 경우에 그 쿠데타는 정당성을 얻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실패에 그쳤다. 또 태국의 왕은 태국이 군부주도의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다원적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점진적인 정치발전 모델을 추구해 가는 의회 민주주의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1973년 10월 14일 사태와 1992년에 발생한 5월 민주화 항쟁이었다. 10월 14일 사태는 싸릿과 그의 후계자인 타넘-쁘라팟 독재체제가 븡괴된 후 민주헌법개정 요구로 발생한 사태였다. 푸미폰 국왕은 이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타넘(Thanom Kittikhachorn: 1963-1973년) 수상을 퇴진시킴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왕은 1992년 5월 군 출신인 쑤찐다(Suchinda Kraprayoon) 수상의 퇴진을 요구하는 중산층 주도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을 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부응해 쑤찐다 수상을 퇴진케 함으로써 사태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에 획을 긋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③ 승가의 후원과 통제

1932년 입헌혁명 후 태국의 승가체제는 정치체제의 변화-입헌군주제의 도입-에 발맞추어 재조직되었으며 국가권력의 승가 후원과 통제방식도 더욱 구체화되었다. 32년 혁명 후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1941년 승가법이 만들어졌다. 태국 최초의 1902년 승가법에 따르면 쌍카랏(승왕, sangharat)이 이끄는 마하테라싸마콤(원로회의, mahathrasamakhom)에게 모든 승가의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승가조직은 세속적인 관료체제를 모방하여 조직되었다. 즉 절대권력을 갖게 되는 쌍카랏은 절대군주와 동일한 위상을 확보했었다. 그러나 혁명 후 입헌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이에 부응하여 만들어진 1941년 승가법은 입헌군주제 정부와 유사한 조직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즉 쌍카랏은 입헌군주와 같은 위상에 있었으며 승가의 실권은 쌍카몬뜨리(상가내각, sanghamontri)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싸릿이 정권을 장악한 군사독재통치기에 만들어진 1962년 승가법에 따르면 1941년 승가법에 따라 유명무실화 되었던 마하테라싸마콤을 이끄는 쌍카랏에게 모든 행정권이 다시 집중되었다.

62년 승가법에 보장된 승가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은 73년 학생혁명 후 또 다시 발생했다. 타넘 군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73년 사태 후 자유로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 생겨난 “태국 불교 연맹”(Sahaaphan Phutthasaasanik Haeng Pratheet Thai)은 민주적인 세속적 선출정부와 같은 입법, 행정, 사법체제에 입각한 승가체제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1976년 쿠데타가 발생해 이러한 시도는 실패에 그치게 되었다. 그 후 승가내부에서 공식적인 행정체제개편 요구는 1984년 다시 제기되어 태국 소장파 승려 단체(Khana Yuwasong Haeng Pratheet Thai)가 1941년의 승가법 도입을 요구했으나 이러한 요구는 의회에 상정되기 앞서 마하테라싸마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상과 같은 승가체제의 변화는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정부의 승가 후원과 통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승가를 관할하는 3개의 정부 부서가 생겨났다. 교육부 종교국(Department of Religious Affairs), 내무부 지방행정국(Department of Local Government Administration), 공공보건부 위생국(Department of Medical Services)등이 만들어 졌다. 또 여전히 쌍카랏은 왕이 임명했으며 국가시험을 통해 승려들에게 공식적인 지위를 하사하기도 했으며 승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고 중앙, 지방단위에서 정부 관료체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승가를 통제했다. 정부는 지방단위에서 승가를 통제하기 위해 모든 승려들을 일정한 지역 안에 도지사의 관할 하에 감독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부서에 의한 승가의 후원, 통제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부는 행정권을 발동하여 승가를 후원, 통제하고 있다. 종교국은 승가에 대해서 행정적 서비스를 담당하며 종교국 국장은 마하테라싸마콤의 사무총장을 겸직한다. 종교국은 전국 승려와 사원들의 활동에 대하여 지방관리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또 사원의 교육자재 공급, 종교행사 준비, 홍보활동, 불교학교와 대학의 관할, 사원보조금을 제공하고 행정직을 수행하는 승려들에 대한 봉급을 지불한다. 지방행정국은 사원 등록 등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거나 승려의 복지를 담당하고 위생국은 승려들에게 건강 서비스를 제공한다.

2) 이념적 대립과 전통계승의 실패: 라오스

① 입헌군주제의 도입과 그 위상


1940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한 후 친 독(親獨) 비시(Vichy)정권이 탄생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라오스를 지배하게 되지만 명목적으로는 일본이 프랑스의 주권을 유지시킨다는 체제, 즉 일-불 공동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하자 전쟁 중 결성된 반식민지 저항단체 라오 이싸라(Lao Issara)가 반대하는 가운데 라오스에 재진주한 프랑스는 루엉프라방의 씨싸왕(Sisavang)왕을 내세워 라오스를 새로운 보호령으로 삼았다.

1947년 5월 11일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새 헌법에 따라 라오스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불교를 공식적인 국교로 인정했으며 왕은 불교의 최고 후원자가 되었다. 1947년 5월 17일 제정된 라오스 헌법은 “불교는 국교(state religion, satsana khong pathet)이며 국왕은 그것의 최고 보호자이다(akkhasasanuphatham)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종교문화부가 만들어져 종교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왕은 승가의 최고 지도자인 승왕을 임명하고 각급 학교와 국영 라디오방송국은 불교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국민들에 대한 불교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47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후 라오스에서도 태국과 같이 국가, 왕, 불교는 국가의 주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러나 라오스의 입헌군주는 태국과 같이 불교의 수호자 역할을 했으나 의전적인 인물일 뿐이었다. 태국의 입헌군주가 불교도 왕으로서 의전적인 역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던 데 비해 라오스의 입헌군주는 아무런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했으며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갖는 존재도 아니었다.

라오스에는 해방 후 두 명의 입헌군주가 재위했다. 첫 번째 입헌군주는 씨싸왕웡(Sisavang Vong: 1885-1959년)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재위했던 씨싸왕웡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인 1904년 루엉프라방에서 즉위했으나 1945년 말에 라오이싸라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폐위됐다가 1947년 최초의 입헌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그에게 갖는 이미지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탐마윳파 고위승려의 한 사람은 “라오스 국민들은 사실상 그들의 왕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과의 친근감이 없다. 그리고 태국인들이 그들의 왕에 대해서 갖는 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라오스 입헌군주제가 태국과 달리 그 위상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라오스의 왕은 카리스마가 부재했다. 라오스의 왕실은 태국의 왕실과 비교해 국민들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태국은 라마 4, 5세의 근대화 작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통해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식민지배의 경험을 겪지 않았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존경심은 유별나다. 그러나 라오스는 18세기 3 국으로 분열되었으며 루엉프라방 왕실은 프랑스 식민지배에 협조적이었다. 또 민족주의 운동은 다른 왕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독립 후 좌, 우익, 중도 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을 때도 왕은 사실상 국왕정부 편에 있었기 때문에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카리스마를 갖는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라오스의 왕은 전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씨싸왕웡 왕은 프랑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원래 루엉프라방만을 통치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같이 프랑스 식민지 이전 라오스는 3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3국은 각각 다른 국왕들이 통치했다. 1893년 프랑스와 싸얌간의 조약으로 메콩강 동쪽지역은 프랑스 통제 하에 들어갔다.

왕통을 보존할 수 있었던 루엉프라방은 사실상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왕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비엔티엔에서는 1827-1828년 싸얌에 대한 짜오 아누(Chao Anou: 1805-1828년)의 반란이 발생해 귀족층이 전멸 당했으며, 짬빠싹은 1828년에 싸얌에 의해 정복되어 힘이 크게 약화 되던 중 프랑스가 이곳을 직접 통치하고 왕가의 명맥만을 유지시켰다.

셋째 라오스는 근대식 교육체제의 미비로 인한 입헌군주제에 대한 이념화(idealization) 내지는 세속화(sacralization)에 실패했다.

한편 1959년 씨싸왕웡 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싸왕왓타나 왕(Savang Vatthana: 1959-1975년)이 즉위했다. 그에 대한 유효한 평가자료는 아주 미미하다. 왜냐하면 그는 1975년 12월 1일 인민혁명당 정부에 의해서 강제 폐위 당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언급은 라오스에서 금기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 후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되었다가 1977년 3월 혁명 정부에 의해 투옥된 후 병사한 것으로 알려 졌는데 아직까지도 그의 투옥과 병사는 미스터리에 쌓여 있다. 혁명정부의 왕에 대한 평판은 극히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하여튼 그는 좌우익의 정권투쟁 속에서 조정자의 역할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② 이념적 대립과 승가의 분열

해방 후 라오스 국왕정부(Royal Lao Government)와 파테트라오(Pathet Lao)는 이념적 대립을 통한 정치투쟁과정에서 그들의 정치적 대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불교와 승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정치문화의 세속화(secularization)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통적인 정치, 종교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던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승가의 지지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라오스 국왕정부는 승가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하여 승가를 국가권력에 종속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왕정부는 승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1959년 승가법을 제정했다. 1959년 승가법은 승가의 조직구조와 승가업무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통제의 범위를 규정했다. 이 법에는 고위 승려직에 출마키 위해서는 내각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각급 승가의 행정단위에서 발송되는 모든 통신문은 반드시 공식적으로 정부의 채널을 통해야 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승가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을 포함하고 있는 승가법 제정의 결과 정부와 승가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파테트라오는 이러한 불화관계를 부추키면서 승가조직과 국교로서 그리고 라오스 문화전달의 도구로서 불교의 자율성을 지지하고 나섰다.

승가법 제정 후 승가의 정치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라오스 국왕정부는 비엔티엔의 빨리어 학교에서 승려들에게 이념교육을 시켰으며 승려들을 반공캠페인에 동원했고 승가의 승왕이 공개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념적으로 무장이 된 라오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태국의 승려들을 초청하여 공산주의의 위험을 경고토록 지시했다. 이러한 국왕정부의 정책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미국은 국왕정부와 협력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싸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친정부 승려들을 고무시켰다.

라오스 국왕정부는 반공정책이외에도 농촌개발계획(community development project)에 승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승가의 개발계획 참여는 승가내부의 격렬한 찬반논쟁을 야기 시켜 분열을 초래했다. 특히 파테트라오는 개발계획에 참여한 승려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국왕정부와 미국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이용당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파테트라오 역시 일찍이 승가가 라오스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공산주의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승가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1954년 라오스 불교협회(the Laotian Buddhist Association)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 이 조직은 1963년에는 다른 유사한 성격을 갖는 불교조직을 통합하여 전국 라오스 불교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Lao Buddhists)로 발전했으며 이 협회는 파테트라오의 입장 선전, 미국 개입반대 캠페인, 라오스 문화와 국가적 유산에 대한 자긍심 고취, 라오스 인민의 단결, 법과 도덕성의 준수, 불교의 보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수호 등의 내용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1957년 라오스의 첫번째 좌, 우익연립정부가 구성된 후 좌파인 통일 라오스 애국전선(Neo Lao Hak Sat)소속이었던 품웡위찟(Phonmi Vongvichit)은 승가 통제임무를 담당한 종교문화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라오스 애국전선인사의 종교문화부 장악은 수도인 비엔티엔으로부터 먼 오지까지의 좌파세력의 정치적 연결망을 강화시켜 주었다.

파테트라오의 승가 장악기도는 국왕정부를 자극하게 되었으며 더구나 1957년 제 1차 연립정부 구성 후 1957년 11월 보궐선거가 치러져 좌파가 승리하자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승가의 정치적 이용을 두려워한 싸나니껀(Sannanikone)우익정권은 승가를 정치권력에 철저하게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1959년 왕령에 따른 승가법을 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파테트라오는 빈번하게 승가와 불교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표명하고 국왕정부와 미국에 대한 승가의 불만을 조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64년 제 2차 라오스 애국전선 국민회의에서 채택된 종교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종교를 사보타지하고 분열시키려는 모든 기도를 반대하며 파고다(pagoda)를 보호하고 승려들을 존경한다는 내용이었다.

1968년 제3차 라오스 애국전선 국민회의에서 채택된 강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불교를 존경하고 보호하며 모든 종교를 단결시킴으로써 국가통일의 실현에 기여하고 미국침략에 대항하여 국력을 강화한다. 불교교리문답의 왜곡, 승려의 통제, 승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일, 파고다의 파괴 또는 퇴폐적인 미국문화를 설교토록 하고 다양한 불교파벌을 조장하는 등 반 불교적인 일을 자행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의 일체의 행동을 반대한다. 불교에 대한 존경과 보호, 승려의 순수성과 종교적 믿음의 권리보존, 파고다보호, 승려와 다양한 불교종파 신자들 사이의 단합과 상호협조, 승려와 타종교 신자들간의 연대성을 강화시킨다"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될 때까지 승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국왕정부와 파테트라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에서 파테트라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승가에 침투하여 승가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③ 불교의 사회주의화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된 이후에 라오스는 입헌군주제를 폐지했으며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지 않았다. 라오스에는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설립되었으며 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라오스 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에 의해서 운용되었다. 또한 인민혁명당정부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찾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초기 국가권력 정당성의 이행과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당성은 취약했기 때문에 인민혁명당 정부는 전통적 불교교리를 사회주의에 부합되도록 재해석하여 불교와 사회주의의 양립가능성을 주장하는 한편 승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추구한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는 이른바 불교의 사회주의화 정책이었다.

인민혁명당정부는 불교와 사회주의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양자는 모든 인간들을 평등하고 같은 형제들로 인식하며 사유재산권을 인정치 않고 재산의 공동 소유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불교와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dukka)을 근절하는 것이다.

 불교교리에서 고통의 근절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행복(sukha)을 얻는 것이며 사회주의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을 야기 시키는 자본주의의 착취로부터 국가와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해방된다면 라오스인들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민혁명당정부는 (후일 부처가 되는) 싯달타(Siddhartha)를 가족과 왕국을 포기하고 사회적 진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인민혁명당정부는 승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전통적인 불교우주론과 미신적인 정령숭배를 비난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불교와 승가를 통제하게 되었다. 인민혁명당 정부는 우선 기존의 승가조직을 당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국가권력의 핵심인 인민혁명당을 국가정체성과 사회통합의 유일한 대안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정부의 승가에 대한 강경한 통제정책은 1979년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정부의 급진적인 경제정책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민혁명당정부는 1979년부터 급진적인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집단농장화(Agricultural Cooperativization)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초래하자 1979년 12월 26일 개최된 제 7차 최고 인민회의 결의안에 따라 집단농장화계획을 폐지하고 전통적 영농방식에 개인적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새로운 정책강령을 채택했다. 그리고 라오스는 19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초기의 경직된 사회주의경제정책이 변화됨에 따라 사회 각 부분에 대한 통제도 전반적으로 완화되었다. 정부의 불교와 승가에 대한 기존 태도의 변화의 예는 라오스의 대표적인 친정부 승려인 캄탄(Khamtan Thepbuali)의 1980년 초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불교는 표면상으로만 다르며 사회주의 60년의 역사를 갖는 소련에 종교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불교는 라오스에서 항상 존재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래의 불교도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에 적응된 불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라오스에서 불교가 사라진 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언급은 승가 내에서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할 때 향후 정부의 종교정책의 방향을 가늠케 하는 것이었다.

1981년과 1986년에 걸쳐서 1,2차 경제사회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공덕쌓기로 인식된 사원의 수리와 불교유적들의 건축이 활발해 졌다. 또한 1980년 대초 들어서 정부의 승가통제가 완화되기 시작하자 당 간부들조차 병들거나 사망한 부모들을 위한 공덕을 쌓을 목적으로 단기간 출가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공산화초기에 규제되었던 탁발의식도 완화되었으며 일정 세대단위로 사원을 방문하여 보시행위를 하도록 허용했다.
1991년 8월 제정된 라오스 헌법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헌법 조항에 구체적인 종교 명칭을 적시해 놓았다.

 “국가는 불교도와 다른 종교 신도들의 합법적인 활동들을 존경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불교 비구, 사미승들과 다른 종교의 사제들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활동들에 참여하도록 격려한다.”1995년 7월 개최된 불교와 라오스 문화에 관련된 주요한 회의에서 캄탄은 “불교는 라오스 국가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승려들은 라오스 국민들과 불가분의 관계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④ 승가의 후원과 통제

1975년 사회주의 혁명 후 인민혁명당 정부는 기존의 승가조직을 통일 라오스 불교협회(the Lao United Buddhist Association, Phutthasasana Samphan haeng Pathet Lao)로 재편성하여 당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했으며 승왕의 직을 폐지시키고 통일 라오스 불교협회의 행정위원회에서 그 임무를 대신케 했다. 또한 마하니까이(Mahanikai)와 탐마윳니까이(Thammayutninai)도 통합되었으며 승가내의 모든 행정직은 당에서 임명하는 인사로 충원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고위승려들에게 당의 이념교육을 받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당의 통제를 받는)현대 라오스 승가의 역할은 사회주의 건설과 국가변화에 기여하는 것" 이었다.

현재 라오스 승가는 정부의 완전통제 하에 있다. 1989년 2월 비엔티엔에서 개최된 전국 승가대표자회의 결과 통일 라오스 불교협회는 4명의 명예중앙위원, 42명의 중앙위원, 9명의 중앙상임위원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최고 의결기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는 통일 라오스 불교협회규칙 개정안을 채택하여 새 시대에 들어선 라오스의 승가정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규정은 통일 라오스불교협회를 전 라오스의 불교도를 총괄하는 최고기구로 규정함과 동시에 불교계와 당, 정부, 전 인민을 결합하는 기관인 내우라오쌍쌋(국가건설전선, Neo Lao Sang Sat)의 직접적인 보호 하에 둔다고 규정했다(2조).

동 규정은 또 각 사원에 설치된 왓(wat)관리위원회가 재적하는 출가자(재가 수련자도 포함) 전원의 명부를 작성하고 각 출가자는 왓 관리위원회가 발행하는 신분증명서를 소지토록 한다(4조). 또 규정은 통일라오스불교협회의 성원의 의무로서 불교의 경과 율을 학습하고 인민을 교육해 국가발전에 공헌할 것(6조)을 명시함으로써 75년 이래 인민혁명 정부의 기본입장은 모든 승가의 성원은 출가자로서 세속에 초연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5. 종합비교

태국과 라오스 양국에 있어서의 국가권력과 승가의 관계를 비교 고찰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근대 시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태국과 라오스에서의 국가권력(왕권)과 승가의 관계는 근대화와 서구 식민지 지배세력의 침투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태국은 비록 서구 식민지 지배세력(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을 받기는 했으나 국내적으로 근대화작업 추진의 성공과 대외적으로 외교정책의 성공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꿋왕과 쭐라롱껀대왕이 주도한 근대화와 불교개혁운동은 전통적인 불교 왕권(탐마라차)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서 왕권의 승가통제가 강화되었으며 양자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태국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태국과는 상이한 경험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 지배 하에서 라오스의 국왕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로서의 위상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실질적 국가권력의 주체는 프랑스 식민지 당국으로 바뀌었다. 또 불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 당함으로써 불교세계관에 따른 전통적 정치, 종교적 질서는 크게 약화되었다. 더욱이 프랑스 식민지 지배당국은 전통적인 불교와 승가의 전통적인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둘째, 근대화와 서구 식민지 세력 침투라는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겪게 되는 양국은 그 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도 상이한 경험을 했다. 태국과 라오스 양국은 절대군주제가 붕괴된 후 똑같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으며 불교는 국교의 위상에 놓여 있었다.

태국의 입헌군주는 전통적인 불교도 왕으로서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실질적인 정치적 역할까지 했다. 이러한 왕의 역할이 본격화된 시기는 싸릿 쿠데타 후였다. 싸릿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왕과 불교라는 전통적인 양대 가치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락타이 이데올로기를 주창하게 되었다. 따라서 태국에서는 1932년 입헌 혁명 후에도 국가권력(왕과 정부)과 승가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가 정치적으로 유효성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32년 입헌혁명 후 태국의 승가체제는 정치체제의 변화-입헌군주제의 도입-에 발맞추어 재조직되었으며 국가권력의 승가 후원과 통제방식도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태국의 경우 국가, 종교(불교), 왕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 락타이 이데올로기에 볼 수 있는 것같이 국가와 불교는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와 승가의 관계는 종속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

라오스에서 해방 후 불교는 국교로 다시 채택되었으며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으나 입헌군주는 의전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다. 라오스의 입헌군주 역시 태국과 같이 불교도 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좌우익 정치세력의 정치투쟁과정에서 그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라오스 국왕정부는 불교를 국교화 시킨 후 국가권력과 승가의 전통적인 관계를 복원시킴으로써 파테트라오와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정치적 대의의 정당성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왕정부의 강력한 승가통제정책으로 승가의 자율성은 손상되었으며 승가는 분열되고 정치화되었다. 파테트라오 역시 승가를 통해서 정치적 대의의 정당성을 구하고자 함으로써 승가를 정치화시켰다. 그리고 국왕정부의 승가정책에 대한 승가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승가로부터 지지를 받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라오스 정부의 승가 후원과 통제정책의 성격은 태국과는 상이했다. 즉 라오스의 승가정책은 한 정파(국왕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해 파테트 라오는 국왕정부의 승가정책을 비난하게 되었으며 국왕정부와 승가 사이의 불만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셋째, 태국은 오늘날까지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락타이 이데올로기가 국가질서를 확립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존속되어 옴으로써 승가와 왕권과의 전통적인 상호보완관계를 정부가 옹호하고 있다. 따라서 승가와 왕권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는 다소간의 변용을 통해서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오스는 1975년 공산화로 정치체제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인민혁명당 정부는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지 않았다. 따라서 승가와 왕권 또는 국가권력(정부)과의 전통적인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불교교리를 사회주의에 부합하도록 재해석하여 이른바 불교의 사회주의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기존의 승가조직을 통일 라오스 불교협회(the Lao United Buddhist Association, Phutthasasana Samphan haeng Pathet Lao)로 재편성하여 승가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의 역할을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승가는 자율성을 잃고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상실했다.

앞으로 태국에 있어서 국가권력과 승가사이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는 락타이 이데올로기가 지속되는 한 유지될 것이다. 승가로부터 유래하는 불교도 국왕과 국가권력(정부)의 정당성이나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권력의 승가 후원이라는 전통적 도식은 지속적으로 정치적 유용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승가조직은 정치적 변화에 부응하여 지속적으로 개편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오늘날 라오스의 사회주의는 정당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사실상 1986년 이래 추진되어 오고 있는 신사고(chintanakan mai)라고 불리는 개혁정책의 역설적인 의미는 라오스의 사회주의가 겪고 있는 정당성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정치적 모델을 개발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와 관련해 라오스 사회주의는 전통적인 불교적 가치의 복원을 통하여 약화된 정당성을 보완하는 이른바 라오스 고유의 민족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정당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1990년대 이래 국가 종교로서 불교를 강조하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정부의 승가통제정책도 점진적으로 완화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관계연구학과 정치학 박사. 불교관련 주요저서와 논문으로는 다음이 있다. “태국불교와 정치적 정통성”(1996), “라오스의 승가와 국가권력”(1998), “상좌부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 (2001), Some Buddhist Lessons in The Asian Debate(2002), ?태국불교의 이해? (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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