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유교, 유교 속의 불교

1. 두 길

보통 선은 당대(唐代)에 황금기를 누렸고 이후에는 세력이 약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오(圓悟, 1160~1125)와 대혜(大慧, 1089~1163), 그리고 굉지(宏智, 1091~1157)의 활동을 보면, 송대에도 선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은 사대부의 시대인 송대에 불교 비판을 자양분으로 하여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한 유학자 대부분은 불교를 비판하기보다는 배우기에 익숙했었다. 틀림없는 사실은 송대의 선과 유학이 서로 만났다는 점이다. 양측이 서로 비판하고 닮아 가면서 본연의 정통을 복구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송대 정신계의 두 축인 임제종이 조사선의 본연을 지키기 위해 어떤 길을 제시했는지, 그리고 정주학파가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어떤 길을 모색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각 측의 주요인물인 대혜와 주희(朱熹, 1130~1200)의 작업을 소재로 하여, 송대에 진리에 접근하는 두 길을 답사하려 한다.

두 인물은 유학의 핵심 공부인 ‘격물(格物)’과 ‘물격(物格)’을 주제로 시간의 격절을 넘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합을 겨뤘다. 대혜의 유학에 대한 견해와 조사선 현창 노력은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살펴볼 수 있고, 주희의 불교에 대한 비판과 유학 부흥 작업은 《주희집(朱熹集)》과 《주자어록(朱子語類)》에서 분석할 수 있다.

두 인물의 만남에 대해서 두 시선이 있다. 우선 연속성을 추출하는 연구다. 아라키 겐고는, 선은 주로 본질(‘本來性’)을 간수하려 했고 유학은 구체 사태의 해결(‘現實性’)을 추구하려 했지만, 송대 유학은 선의 정신을 흡수하여 일상 현실에서의 본래성 구현을 위한 공부와 실천을 요구하는 새로운 유학(新儒學)으로 발전했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새로운 유학의 정점에 주희의 학문 즉 주자학(朱子學)이 있다고 귀결했다.1)  1)  荒木見悟, 《彿敎と儒敎》, 平樂寺書店, 1963, 제3장.

일견 그의 가설은 타당해 보이지만, ‘왜 구체사태에서 본래성을 회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상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희의 모색을 해명하기에는 부족하다.2)  2) 조남호, 〈주희의 대혜·장구성 비판〉, 《철학사상》 28, 철학사상연구소, 2008, p.145.

다음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연구다. 도모에다 류타로는 대혜의 선에서는 존재의 원리(所以然)를 자각할 수 있지만 행위의 원칙(所當然)을 도출할 수 없다고 논평했다. 주희가 이를 간파하고 선에는 없는 반성적 인식(反省知)를 통해 행위의 원칙을 알 수 있게 했다고 하면서, 반성적 인식을 위해서 주희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정립했다고 정리했다.3)  3) 友枝龍太郞, 《朱子の思想形成》, 春秋社, 1979, p.335.

그의 연구는 양측의 관계를 재해석하기보다는 주로 주희의 견해를 정리했다는 인상을 준다.
대혜가 유학을 비판하기만 했을까? 주희는 선을 비판하기만 했을까?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송대 선사 중 유학을 가장 철저하게 비판했던 대혜는, 유학자와 깊이 교류했으며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학 경전의 핵심 개념을 자주 인용했고 유학의 가치를 긍정했다.

또 송대 유학자 중 선을 가장 극렬하게 공격했던 주희는 대혜와 교류했던 건안 삼선생에게서 학습했으며 선어록을 인용했고 선의 가치를 긍정할 만하다고 했다. 그들이 유학을 비판하거나, 선을 비판하는 기저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 있을까? 그들이 제안한 길은 무엇일까? 이제부터 알아보자.

2. 두 길의 어귀; 유불조화론과 그 그늘

대혜와 주희가 활동하기 이전과 그 무렵에 유불의 공존을 꾀하는 노선이 있었다. 유불조화론(儒彿調和論)이 그것이며, 북송대의 계숭(契嵩, 1007~1072)이 대표 인물이다. 그는 불살생(不殺(生))이 인(仁)과, 불투도(不(偸)盜)는 의(義)와, 불사음(不思淫)이 예(禮)와, 불음주(不飮酒)는 지(智)와 그리고 불망어(不妄語)가 신(信)과 같다고 나열하여 불교와 유교는 같다고 주장했다.4)  4) 《輔敎論》, T52: 649a.

전시(戰時)의 황제 효종(孝宗, 1162~1189 재위)도 계숭과 같은 글을 썼다. 그는 한유(韓愈)가 〈원도(原道)〉에서 불교에 인의예지신이 없다고 비판한 것을 지적하고, 불교의 오계(五戒)가 유학의 오상(五常)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불교로 마음을 닦고 유교로 세상을 다스리면 된다고 주장하였다.5)  5) 《雲臥紀談》, 〈原道辯〉, Z148.

송대 유학자 대부분은 선을 공부했다. 이 시절 ‘거사(居士)’라는 호칭이 사대부의 별칭이었고, 선을 말하지 않으면 말을 꺼낼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선사들은 유학계와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동향에도 불구하고 조화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임제종 양기파(楊岐派)는 조사선 정통 노선을 택했으며, 정이(程헊, 1033~1107)와 주희는 유학 독존론을 설파했다. 양측 모두가 생각하기에, 조화론은 조사선과 유학 각기의 본연을 왜곡시키면서 공존을 구하는 비겁한 논리였던 것이다. 유수한 조사와 고명한 유학자들이 서로 대적하면서도 의견을 전했던 동향은 송대 정신 영역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송대에 유학과 불교에 각기 조화론과 정통론이 모색되었던 까닭도 이런 추세 때문이다.

귀양 시절 대혜는 유학자에게 조사선의 본래성불을 일깨웠고 본래성불을 확인하는 방안으로 간화를 제시했다. 그는 북송의 유불조화론자와는 전혀 다르게 유학공부론을 본격 비판했다. 그가 유학자를 각성시킨 대안은 조사선의 기연문답(機緣問答)이며, 그가 제안한 공부는 조사의 기연문답(을 응축한 화두)에 몰입하는 간화선(看話禪)이다.

주희는 30대 초반부터 격물을 내면 수양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정체가 38세 때 쓴 《잡학변(雜學辨)》이다. 여기서 주희는 장구성(張九成)·왕응진(汪應辰)·여본중(呂本中) 세 사람의 학문을 비판했는데, 이들은 대혜에게서 배운 인물이다. 대혜와 주희는 세 유학자를 매개로 하여 격물과 물격에 관한 논전을 펼쳤다.

3. 대혜의 길; 간화(看話)

유학과 친숙하다

흔히 ‘대혜’하면 간화선을 제창한 임제종 양기파의 조사로 일컬어진다. 그는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웠고, 송대의 쟁쟁한 유학자와 도를 문답했다. 대혜는 장상영(張商英), 장준(張浚), 이병(李?), 왕조(汪藻), 장구성(張九成), 중빙즙(中憑?), 왕응진, 여본중, 유자우(劉子羽), 유자휘(劉子?) 등과 교류했는데, 이들은 지금으로 치자면 수상, 장관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료, 참모총장 직위의 장군, 그리고 최고의 학자에 해당한다. 흥미롭게도 대혜의 제자 대부분은 이정(二程)의 직제자이거나 그들의 제자인 양시(楊時)와 이동(李?)의 제자이어서 크게 보아 이정 문하라고 할 수 있다.

유학자와 교류했다는 측면서 보자면, 대혜는 이전 선사들의 전철을 밟았다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을 강조하자면 그의 선을 유불조화론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유학 경전을 자유롭게 인용했고 유학의 중요 개념을 이해했으며 유학의 직분 수행6)과 ‘확이충지(擴而充之)’·‘추기급인(推己及人)’7) 등의 유학의 지향을 인정했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8), 충(忠), 효(孝), 치인(治人),9)와 같은 유학의 실천 덕목을 수용했다.  6) 《大慧語錄》, 〈示徐提刑〉, T47: 899c.     7) 《大慧語錄》, 〈示莫宣敎〉, T47: 913ab.
 8)《大慧語錄》,〈答汪狀元〉, T47: 932c.  9)
《大慧語錄》, 〈示成機宜〉, T47: 913a.

바로 이 점이 대혜와 다른 송대 조사들의 같음과 다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가 확충(擴而充之)과 자기를 미루어 타인에게 나아감(推己及人)등의 유학의 지향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할까? 이제부터 논의해 보자.

“공(空)에 빠져라”

유학의 길에서는 경전 학습과 사색이 공부의 근간이어서, 분석 이성이 없다면 이 길은 텅 비고 만다. 임제종의 조사 대혜에게 진리는 이성적 분석이나 사고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0)  10) 《大慧語錄》, 〈示徐提刑〉, T47: 907c.

이에 대혜는 유학자의 공부를 ‘사량계교(思量計較)’나 ‘견문각지(見聞覺知)’일 뿐 진정한 공부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혜는 “공(空)에 귀착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으며, 더 나아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옳지 못한 길(邪道)로 전락한다.”고 했다.11)  11) 《大慧語錄》, 〈答呂舍人〉, T47: 931c.

그는 유학자 증개(曾開)를 이렇게 혼냈다. “흔히 분별적 사고를 안식처로 삼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곧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비유하건대 배가 뒤집어지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도다. …… 근래에 강서(江西)에 가서 여본중을 만나 보았다. 여본중이 이 인연을 마음에 둔 지 매우 오래였으나, 역시 이러한 병폐를 깊이 지니고 있었다. 그가 어찌 총명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에게 ‘그대가 공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두려움을 아는 능력은 공한가, 아닌가? 한번 말해 보라.’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가 우두커니 생각하더니 이리저리 비교하여 따져 보며 대답하려 하였다.”12)  12) 《大慧語錄》, 〈答曾侍郎〉, T47: 917b-918a.

대혜의 충고는 “공에 빠져라.” 한마디였는데, “백척간두진일보”를 요구한 셈이다. 공에 빠지라는 대혜의 말은 청천벽력 고함(할)이었을 것이다. 그들 유학자에게는.

“물격(物格)을 모른다”
대혜가 유배되기 1년 전인 1140년 경산사(徑山寺)에 있었을 때이다. 장구성은 제자 왕응진을 대동하고 대혜를 찾아가 도를 물으면서, ‘격물’의 종지를 물었다.

대혜는 말했다. “그대는 격물(格物)을 알지만 물격(物格)은 모릅니다.”
장구성은 의아해하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어찌 스승님은 [친절하게] 방편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대혜가 크게 웃었다.

장구성이 말했다. “[물격은] 무엇입니까?”

대혜가 말했다.

 “소설에 실린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까? ‘당나라에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도모한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그는 민 땅의 관리였는데, 초상이 그곳에 걸려 있었다. 현종 황제가 촉 땅으로 피신했다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신하에게 그림 속 인물의 목을 치라고 했다. 그 사람은 섬서에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떨어졌다.’”
장구성은 이 말을 듣고 격물의 의미를 단박에 깨달았다. 그러고는 부동헌(不動軒)의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격물과 대혜의 물격이 ‘일관(一貫)’됨을 알고자 한다면 두 개의 오백문이다.”13)   13)  《大慧年譜》, 佛敎藏 73, p.527.


대혜는 장구성과 격물, 일관, 인의 등을 주제로 문답했다. 이 문답에는 세 가지 탐색해야 할 내용이 있다. 첫째, 왜 대혜는 격물의 종지를 묻는 상대에게 “모른다.”라고 대답할 뿐이었고, 장구성은 “방편을 사용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을까? 둘째, 왜 유학자는 격물의 의미를 하필이면 선사에게 물었으며, 대혜는 격물을 설명하지 않고 물격으로 대답했을까? 셋째, 문답 후 장구성은 어떻게 했을까?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 “모른다”라는 대답은 전형적인 선사의 대답이다. 대혜 역시 스승 원오의 거듭되는 “너는 모른다”, “아니야”라는 대답에 분지일발했다.14)  14) 자세한 내용은, 변희욱, 〈대혜의 전기와 간화선의 사상〉,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 조계종출판사, 2007, pp.26-28.

장구성의 질문은 유학자다운 것이었고, 대혜의 대답은 전형적인 선문답이었다. 유학 교육에서는 경전을 정확히 인용하고 객관적으로 해설하려 하며, 주관적인 판정을 극히 경계한다.

반면 조사선 문답에서는 질문 당사자의 의지를 점검하고 의문을 촉발시킬 뿐, 경전을 자세히 인용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유학자 어록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문맥을 추적하기 쉽고, 조사 어록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문맥을 파악할 수 없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둘째 문제와 관련하여, 후에 왕응진은 다시 대혜에게 서신으로 도를 물었고, 대혜는 답서(〈답왕상원(答汪狀元)〉)로 법문했다. “지난 번 경산(徑山)에서 매번 그대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공의 눈동자가 정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이치를 99% 터득했으나 다만 힘을 한 번 확 씀을 결여했다. 한 번 분지일발한다면, ……범부가 성인이고 성인이 범부며, 내가 그대고 그대가 나이다. ……장구성을 제외하면 그 누가 이 경계를 믿을 수 있겠는가?”15)   15) 《大慧語錄》, 〈答汪狀元〉, T47: 932b.

대혜의 판단대로라면, 약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촉망받던 유학자 왕응진은 경산사에서 벌어졌던 문답에 심취했고 뭔가를 알아냈으나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 채 공부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대혜는 격물의 문제를 감지한 장구성만이 그 한계를 극복했다고 여겼고, 다른 유학자들은 격물을 점검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송대의 유수한 유학자들이 격물에 온 관심을 쏟았을 때, 대혜는 《대학(大學)》에서 공부의 출발로 기재된 물격을 보았다는 것이다. 대혜가 유학의 개념을 활용했다는 사실보다 더 흥미진진한 대목은, 대혜가 유학자로 하여금 조사선의 돈오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 중시되지 않았던 유학 경전의 개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격물 공부는 어떤 한계를 지녔을까? 만일 이 문제에 대해 명쾌히 해명할 수 있다면, 송대의 선과 유학, 그리고 임제종 양기파 대혜의 길과 정주학파의 길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선과 유학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혜의 문헌에는 그가 격물에 관해 더 이상 언급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 남은 길은 유학경전과 당시 유학자의 문집에서 격물과 물격에 관한 내용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셋째 문제가 본격적이다. 선사의 “물격을 모른다.”라는 격발에 대응자는 어떻게 했을까?

㈎ 만일 진정으로 본래성불에 의지를 지닌 학인이라면 바로 그 순간 충격을 받고 존재가 허물어짐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 때 그 자리에서 통의 바닥이 빠졌다면 대혜의 인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순간 깨침이다.

㈏ 그렇지 않더라도 온몸, 온정신이 은산철벽이 갇힌 듯 꼼짝달싹 못하고 언제 어디서든 그저 “물격을 모른다”가 떠올라 자신과 한 덩어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경우 그 말은 화두가 된 것이고, 당사자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인이 된 것이다.

㈐ 이와 달리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 역대 유학 경전과 문집에서 물격의 용례를 검색하여 낱낱이 나열한 후 자신의 주석을 추가한다면, 그는 훈고학에 입문한 것이다.

㈑ 이와도 다르게 유학 경전을 다시 읽어 성인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 노력한다면, 그는 송대 도학(道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장구성은 선의 길㈎㈏을 걸었을까, 유학의 길㈐㈑로 갔을까? 대혜는 어떤 길을 기대했을까?

대혜는 눈앞에 있었던 장구성이 ㈎는 어렵더라도 ㈑는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왕응진에게 준 편지에서 보면, 대혜가 장구성(과 왕응진)에게 기대한 방안은 순전한 유학으로서의 ㈑가 아니라, 간화선의 길㈏를 경유한 도학㈑이었던 것이다.

대혜의 입장에서, 그가 유학자에게 제시한 것은 조사선만의 길이거나 신유학만의 길이 아니었고, 조사선과 유학의 일부를 적당히 절충한 길은 더욱 아니었으며, 지극히 조사선에 충실하면서도 유학의 지향을 철저히 준수하는 방안이었다 할 수 있다.

“개에게 불성이 있나?” “무(無)”
대혜의 길에서 어떻게 해야 길의 끝에 이를 수 있을까? 과연 길이 있기나 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긴요한 것은 의지이다. 대혜는 “그대는 바른 믿음과 바른 의지를 갖추고 있다. 이것이 곧 부처가 되고 조사(祖師)가 되는 기본이다.”16)라고 말한 적이 있다.  16) 《大慧語錄》, 〈答許司理〉, T47: 924c.

 대혜는 진리를 체득하는 관건을 의지와 결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목숨을 거는 결단 즉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내걷는 것과 같은 확고부동한 의지만이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17)  17) 《大慧語錄》, 〈示妙明居士〉, T47: 910c.

흔히 간화의 3요소 중 하나라고 하는 믿음(決定信)도 의지가 없으면 있을 수 없다.

의지를 갖추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의지가 충만하다면 조사의 기연문답을 통해 그 자리에서 길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실상 길은 없는 것이다. 길 없는 길이고 문 없는 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겠다. 이 경우를 위해 대혜는 (쓸데없이 그러나 긴요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것이 간화다.

대혜의 말대로 돈오(頓悟)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겉모습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세상의 겉모습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인식은 당연히 바뀔 것이다. “뛰어오고 뛰어감에 사람과 법을 모두 잊어 심식(心識)의 길을 끊고 단번에 대지를 밟아 뒤집고 허공을 쳐부수면, 본디 산이 곧 자기요 자기가 곧 산이다.”18)   18) 《高峰和尙禪要》, 〈示衆〉 12.

 본래 그 자리에서는 유학의 덕목도 불성의 작용이기에, 조사는 유학의 지향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19)   19) 《大慧語錄》, 〈答汪狀元〉, T47: 932c.

대혜가 왕응진에게 “범부가 성인이고 성인이 범부며, 내가 그대고 그대가 나이며” “유학이 곧 불교이고, 불교가 곧 유학이다(儒卽釋, 釋卽儒)”20)라 한 말은 순진한 통합론이거나 단순한 일원론이 아니라, 위와 같은 의미이다.  20) 《大慧語錄》, 〈答汪狀元〉, T47: 932b.

계숭이나 효종의 자기방어적(혹은 절충적) 일치론은 더욱 아니다. 철저한 조사선만이 유학의 지향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후에 주희는 이런 노선을 척결하기에 분투했다. 그러기 위해 주희는 대혜가 꺼내 던진 물격을 선문답의 소재나 화두로 취급하지 않고 정통 유학의 방법으로 재해석했다.

4. 주희의 길; 격물(格物)

선을 배우다

흔히 주희는 불교를 비판하여 새로운 유학(性命義理之學)을 완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한때 선을 공부했으며 선의 가치를 인정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해 왔다.

주희가 14세 때 부친 주송(朱松)이 사망했다. 죽기 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자휘, 유자우, 호헌(胡憲)에게 배울 것을 명했고, 아들은 선친의 유지에 따라 이들에게서 배웠다. 이들은 모두 이정 문하의 내로라하는 유학자였다.21)  21) 《宋元學案》, 권 43 〈劉胡諸儒學案〉, pp.1394-1400.

이들 중 유자휘, 유자우 형제는 대혜, 도겸(道謙)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간화선을 배웠다.

이들이 간화선을 배우기 전에는 묵조선(默照禪)을 배웠다. 서장의 〈답류보학(答劉寶學)〉과 〈답류통판(答劉通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형제는 묵조선을 공부하고 그 경향을 가미하여 유학을 이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주희의 언급에서도 이들이 묵조선사 진헐청료(眞歇淸了, 1090~1151)로부터 배웠음을 알 수 있다.22)   22) 《朱子語類》, 96:77.

유씨 형제는 진헐에게서 묵조선을 배웠으며, 묵조선에 영향 받은 유학을 주희에게 가르쳤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다른 말로 학습기의 주희는 유학과 함께 묵조선을 배웠던 셈이다.

주희는 간화선도 배웠다. 주희에게 간화선을 알려 준 인물은 대혜가 아니라 제자 도겸이다.23)
23) 《朱子語類》, 126:85, 126: 32.

주희가 대혜를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24), 두 인물이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라 판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24) 友枝龍太郞, 앞의 책, p.328.

왜냐하면 대혜와 주희의 출생년 차이는 41년이고, 주희 34세 때에 대혜가 75세로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도겸이 주희에게 말해 준 내용은 대혜의 간화 법문 그대로이다.25)  25) 《雲臥紀談》, 《선림고경총서》 27, 장경각, 1992, pp.182-183.

주희와 대혜의 만남 여부에 대해서는 가부간 직접적인 증거가 없지만, 주희가 《대혜어록》을 읽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있다. 주희는 과거시험에 몇 차례 낙방하다가 장도에 《대혜어록》을 지참하고서야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19세)26)  26) 《居士分燈錄》, Z147:463b.

또 곽우인(郭友仁)과 주희의 문답(《주자어류(朱子語類)》, 126:80)에 소개된 종밀(宗密)의 주장 “인의지의(仁義之義)……”에 대한 대혜의 비판 내용은 바로 〈답왕상원(答汪狀元)〉(《대혜어록》, T47: 932c)의 내용 그대로라는 점도 증거다. 주희는 대혜가 유학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우려했다.27)  27) 《朱子語類》, 126:118.

대혜의 선으로부터 유학자를 떼어 놓고 선의 위세에 눌려 있던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주희는 대혜를 극복해야 했다.

“번거롭더라도 생략하지 마라”
송대의 대유(大儒)는 군주가 유가의 이념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실천하도록 간언했으며, 이를 통해 그 자신도 자기의 학문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33세 때 주희는 봉사(封事)를 올려, 효종이 학문과 정치를 시정하도록 촉구했다.28) 때는 대혜 입적 1년 전으로 송과 금의 전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이다.  28) 《朱熹集》, 11卷. 〈壬午應詔封事〉, p.440.

주희는 30대 초반에 지방 관료로 입문하여 유학의 도를 실제로 펼칠 기회를 갖고, 효종 대에 봉사문을 세 번 올렸고 세 번 대차했다.29) 29)  黃幹, 《朱子行狀輯註》, p.104.

이때부터 주희는 근본공부(誠意正心)와 현실타개(應天下之務)의 선후본말론을 주창하면서 격물치지설을 완성해 나갔다.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효종은 유불조화를 주장했었고 선사와도 밀접하게 교류했는데, 주희가 보기에 효종의 학문관은 유가의 도를 어그러뜨릴 뿐이었다.

선을 극복하고 유학을 부흥시키려는 주희의 노력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의 논전(論戰)으로 이어진다. 35세 때 주희는 당대 최고의 학자 왕응진에게 편지를 보내, 유학자들이 선에 빠진 폐단을 지적했다.

① 요즈음 도학(道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원함에 빠져 독서와 강의가 대체로 쉽사리 지름길로 뛰어넘으려 하고 단계를 따르지 않고 빨리 가려고 하여서, 그 사이의 곡절 정미 정확하게 완색(玩索)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모두 소홀히 하면서 비근하고 자질구레하다고 여기고 유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다문박식(多聞博識)한 사대부라고 해도 천하의 의리(義理)에 대해서 역시 미진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이치가 미진하기 때문에 흉중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가까운 것에서 돌이켜 보지 못하고, 이단의 학설에 미혹되어서 헤아릴 수 없는 영역에 더욱 아득하게 빠져버리며,

② 우두커니 하루 종일 의미 없는 말을 음미하면서 확연하게 한 번 깨우치기를 기다립니다. 어찌 모르십니까? 사물은 이른 후에야 밝힐 수 있고 윤서(倫序)는 살핀 후에야 다할 수 있다는 것을.

③ 격물은 다만 [내가] 이치를 궁구함이고 물격(物格)은 이치가 드러남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大學)》 공부의 시작이며 잠완(潛玩)함이 쌓임에는 각각의 천심(淺深)이 있으니, 급격하게 단박 깨침[頓悟]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사이 유학자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너무 고원한 것 같습니다. 여사인(呂舍人)의 별지(別紙)에서 드러납니다.

저들이 이미 스스로 확연히 한 번에 깨쳤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렇게 우매한 것입니다. 또한 어찌 깨쳤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30)  30) 《朱熹集》, 〈答汪尙書〉, 30:3.

대혜와 주희의 편지로 보면 왕응진은 선도 안 되고 유학도 안 된 그저 그런 학자였던 것이다. 왜 그럴까? 왕응진은 본래성불 돈오에의 의지도 투철하지 못했고 격물치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대목에서 대혜의 길과 주희의 길이 완연히 갈라진다. 일단 주희의 평가를 인정한다면, 대혜의 길과 주희 길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선은 단계를 거치지 않는 빠른 지름길(경절)이어서 고차원이며, 유학은 세밀하고 정확하게 경학하여 의미를 궁구한다(①). 대혜의 길은 간화를 통해 돈오를 추구하며(②), 주희의 길은 격물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안다. 선의 지향인 한꺼번에 통달함(돈오)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공부는 축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③). 여기까지는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② 우두커니 하루 종일 의미 없는 말을 음미하면서 확연하게 한 번 깨우치기를 기다립니다.”라는 주희의 평가가 흥미롭다. ‘하루 종일’의 간화는 간화선의 기본이며, “의미 없는 말”은 ‘맛이 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화두를 지칭한다. 이로 보면 주희의 간화 이해는 크게 틀리지 않으나, 그는 간화를 “우두커니”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주희가 한꺼번에 이치를 알아내려 하는 유학자에게 전한 메시지는 “번거롭더라도 생략하지 마라.(寧煩毋略)”31)였다. 31) 《朱熹集》, 〈答汪尙書〉, 30:3.

더욱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은 “③ 격물은 다만 [내가] 이치를 궁구함이고 물격은 이치가 드러남이다.”라는 대목이다. 주희는 내가 사물에 다가가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대혜의 길과 주희의 길의 분기점이다. 공부 주체 스스로의 공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두 길은 일단 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 점(나)이 진실로 있나?’‘사물과 나는 둘인가?’라고 물으면, 두 길은 갈라지고 만다.

간화 공부에서 화두는 주희의 평가처럼, 아무런 맛도 의미도 없(어야)다. 예나 지금이나 간화를 한다면서 화두(혹은 공안)에서 어떤 맛을 음미하려 하거나 의미를 탐색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노선을 조사선에서는 ‘ 의리선(義理禪)’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격물에서 ‘물’의 실제 함의는 사물에 내재한 이치이며, 격물의 주요 방법인 강학 공부에서 경전은 성인(聖人)의 뜻을 온전히 보존한다(고 설정되었다). 그때나 요즈음이나 경전을 읽으면서 유학의 정신을 학습하기보다는 문장을 익히는 추세가 있는데, 그런 노선을 주희는 ‘문장학(文章學)’이라고 폄하했다.

격물을 재해석하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이전 시대의 유학의 문제점을 치유하고자 사서(四書)에 관해 활발히 논의했는데, 그중에서도 공부의 출발인 격물에 관해서 의론을 집중했다.32)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격물을 ‘물욕의 제거’로 풀이했다.33) 이런 해석은 외부 사물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정이(程헊) 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자에게 격물은 마음 수양이었던 것이다.

장구성과 여본중도 이런 해석에 따른다. 장구성은 물격을 “이(理)를 궁구함”으로 정의하고, 천하의 이를 빠뜨리지 않고 궁구한다면 어떤 찰나(幾微)에 그 이르는 바가 지극해진다고 해석했다.34)  34) 《朱熹集》, 《雜學辨》, 〈中庸解〉, 20:7.

이런 해석은 돈오설을 연상시킨다. 여본중은 사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보존되어 있으니 홀연히 그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격물이다.(《대학집주(大學集註)》, 0:4)” 또 치지(致知)의 “지(知)는 양지(良知)이며 요순(堯舜)과 같은 것이므로 …… 홀연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니 묵묵히 알 수 있다.(《대학집주》, 0:4)”라 했다고 하는데, 외견상 이들의 해석은 본래성불 돈오와 비슷하다. 주희는 이들의 해석을 간화법(看話法)이지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판했고,35) 앎에는 천심(淺深)이 있으며 격물치지는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36)  35) 《朱熹集》, 《雜學辨》, 〈中庸解〉, 20:7.  36) 《大學集註》, 0:4.

정이는 이와 전혀 다르게 ‘격(格)’을 ‘궁구(窮究)’로, ‘물(物)’을 ‘사물[에 내재한 이치]’로 풀이하여, ‘격물’을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궁구한다’로 해석하였다. 궁리(窮理)는 사물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물에 내재한 이치에 대한 탐구이어서, 일차적으로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고 그를 경유하여 마음에 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며 나아가 만물은 모두 하나의 이(理, 一理)에 연유했음을 체인하는 공부이다.

그러나 정이도 격물에 대해 “물격이후지지(物格而後知至)”인데, “뜻은 얻을 수 있지만 말로 전할 수 없다.”37)라 하여 명확히 주석하지 않았다.  37) 《河南程氏遺書》, 25: 3.

이런 까닭에 이정 문하의 유학자들은 격물을 공부하면서도 격물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접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혜가 “물격을 모른다.”고 하자 왕응진의 눈이 반짝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전의 해석을 모두 비판하면서도 정이가 밝히지 못한 격물과 물격을 명확히 해석한 인물이 주희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주희는 격물이 공부의 관건이라고 하면서 각 사물의 이를 궁구할수록 각기 사물의 이가 밝아진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왜 사물에 나아가야 하나? 주희는 격물을 이렇게 해석했다.

격물이란 궁리(窮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이(理)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형상이 없어서 알기 어렵지만 사물은 자취가 있어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매개로 하여 리를 구합니다. 이 이가 뚜렷하여 마음과 눈 사이에 조금의 차이가 없으므로, 사물을 대함이 자연히 조금의 오류도 없는 것입니다. ……사물에 따라서 이를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의 이를 대부분 관찰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직면하여 사태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사태를 대부분 분명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38)  38) 《朱熹集》, 〈癸未垂拱奏箚〉.


여기서 핵심어는 ‘사물’과 ‘이’이다. 사물이란 인지·판단 대상으로서의 사태, 그리고 독서 대상으로서의 성인(聖人) 체험의 기록물 즉 경전을 의미한다. 주희는 사물에 접촉하여(매개하여) 이치를 알아내라고 주문한다. 왜냐하면 사물이 있으면 이치가 있고, 무형의 이치는 볼 수 없지만 유형의 사물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이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에 집중했음에 비해, 주희는 개별적인 이에 대한 앎과 축적을 강조했다.39)  39) 《河南程氏遺書》, 15: 15. 조남호, 앞의 논문, pp. 151-152. 정이의 격물 해석과 주희의 격물 해석의 차이는 조남호의 견해를 따른다. 

그는 개별적인 이에 대한 앎(격물)이 온전히 축적되면, 그 이가 궁극에 이르게 되어(물격), 나의 앎이 지극해진다(知至)고 해석했다. 만일 사물의 이에 대한 앎이 온전히 축적되지 않는다면 물격과 지지는 이루어지지 못한다.40)  40) 《朱子語類》, 18: 23.

주희에 따르면, 물격은 사물의 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 공부의 결과로 사물의 이가 궁극에 도달함이다. 주목할 내용은 사물의 이가 축적되어 궁극에 이르러야 나의 앎이 지극해진다는 점과, 격물과 물격을 생략하고 나의 앎이 지극하기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유학이 아니라 불교라는 점이다.41)  41) 《朱熹集》, 44: 49.

주희가 해석한 격물이 점진적인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격물과 물격 그리고 지지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물격의 출전인 《대학장구(大學章句)》에는 물격(物格), 지지(知至), 의성(意誠), 심정(心正)이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42), 주희는 그 순서가 시간적 선후라기보다는 논리적 과정이어서 원리상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해석했다.43)  42) 《朱熹章句》, 0: 5.  43) 《大學集註》, 0:5.

즉 공부 과정으로서의 격물은 철저하게 점진적인 반면,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공부의 완성 단계는 동시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격물은 강학(講學, 경전 독서)이다.44) 44) 《大學集註》, 0:4.

주희는 독서를 소홀히 하기에 구체적 상황에서 보편적 도덕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사서(四書)의 주석을 집대성하고 사서를 쉬지 않고 재해석하여,  드디어 52세 때(1181)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편찬했다. 이후에도 그는 사서삼경과 유학의 주요 문집을 재해석하기에 매진했다. 그의 집주와 재해석은 유학자들을 정확한 경전독서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5. 두 길은 만날까

대혜와 주희가 실제로 만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직접 만나지 않았다하더라도 선배 대혜는 후배의 활약을 촉발했으며 후배 주희는 선배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의 길, 간화와 격물은 만날 수 있을까?  

문제의 물격으로 알아보자. 왜 대혜는 물격을 던졌으며, 그가 던진 물격은 무엇일까? 조사선에서 사물을 자신과 분리하여 관찰 대상으로 삼는다면 돈오와 상관없게 된다. 대혜가 공에 빠질까 봐 두려워하는 유학자에게 “공에 빠져라.”라고 주문했던 까닭은 이분법을 극복하고 한꺼번에 체득하라고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물격’이라 소리치지 않았을까. 수행자가 아닌 연구자의 입장으로 관찰한다면, 아마도 대혜는 ‘돈오하여(나의 앎이 완전해져서) 온갖 세상 이치가 나에게서 드러남’으로 물격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물격을 모른다.”란 충격을 선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앙굴마라가 한순간의 대오각성으로 돈오했다는 이야기가 조사선의 길이며 대혜의 길이다. ‘그 순간’의 대오각성이 안 되는 사람을 위해 열어 준 길이 간화이다. 대혜의 길, 간화는 엄밀히 말해 없는 길이다.

주희는 대혜(와 장구성, 여본중)이 생각한 물격은 돈오와 같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는 물격이 돈오일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 지지(앎의 완성)가 형식상 돈오와 유사하다고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주희에게 중요한 것은 격물과 물격이었다. 주희는 격물을 재해석하고 선배 유학자가 해명하지 못한 물격을 정의했다.

그는 사물의 이치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지지) 내가 접한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 이르러야 하며(물격),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에 대해 점진적 이해하여 온전히 축적해야 한다(격물)고 해석했다. 그는 물격과 지지를 각각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 도달함” “나의 앎이 지극해짐”으로 구별하여 해석함으로써, 물격을 돈오와는 조금도 겹치지 않게 해석해 낸 것이다.

주희가 격물을 소홀히 하고 지지와 물격을 구별하지 않았던 유학자에게 “번거롭더라도 생략하지 마라”라고 했던 연유는, 구체 사물에 나아가 차곡차곡 알아 나가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도식에서 공부 당사자는 사물을 자신에서 일단 분리해야 한다. 그가 사물의 분리하고 사물의 이치에 초점을 맞춘 목적은 객관적 지표를 확보하여 객관 세계에서 자신의 앎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주희가 제시한 길, 격물은 구체적이며 단단한 길이다.   

왜 두 길은 갈라졌을까? 공부 주체가 사물에 다가간다(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주희의 길에서 공부 주체는 실제로 존재하며 공부 주체와 대상 사물은 일단 나누어져 있다. 그 길의 지반도 실리(實理)고 목적지도 실리다. 대혜의 길에서 ‘나’는 점일 뿐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공부 주체와 사물은 나누어지지도 않았고 하나이지도 않다(空). 대혜가 “공에 빠져라.”라고 주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길의 지반도 공이고 목적지도 공이다. 주희의 길에도 완연한 이분법은 존재하기 어렵지만, 대혜의 길에서 이분법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대혜의 길에 없는 것이 많다. 계단, 이정표, 안내 책자……. 설혹 선지식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는 교육자가 아니라 내 눈을 깜박이게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기 때문이다. 주희의 길에는 있어야 할 것이 많다. 계단, 이정표, 신호등, 안내 책자, 책 읽어 주는 사람, 그리고 관찰자……. 가는 길에 많은 것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잠정적으로 말해 본다. 두 길은 만나지 않는다. 다른 길을 받아들이기에는 격물은 너무도 견고한 길이기에…. 누군가 두 발을 딛고 살피려 하더라도 간화는 발 디딜 곳 없는 길이기에, 허공에 도장 찍는 것이기에…….■

 

변희욱 /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이수 했다. 〈대혜 간화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 서울대 철학과 강사. 〈공안, 왜? 어떻게?〉와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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