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유교, 유교 속의 불교

1. 서론

주렴계(周濂溪, 名 敦헊, A.D. 1017~1073), 소강절(邵康節, 名 雍, A.D. 1011~1077), 장횡거(張橫渠, 名 載, A.D. 1020~1077) 등은 도학(道學)의 문을 연 유력한 학자들이지만, 그러나 송·명 도학을 체계적으로 확립게 한 것은 낙학(洛學)이라 불리우는 정명도(程明道, 名 顥, A.D.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A.D. 1033~1107) 형제의 학문과 사상이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신유학, 즉 송·명 도학은 두 개의 주요 학파로 분류되어 왔다. 이른바 정주(程·朱)와 육왕(陸·王)의 두 학파가 그것이다.

이학(理學)은 두 정(程) 형제 중 아우인 이천의 사상을 계승하여 주자(名 熹, A.D. 1130~1200)가 집대성했고, 심학(心學)은 육상산(陸象山, 名 九淵, A.D. 1139~1192)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이 형인 명도의 일본설(一本說)과 계합한다는 점에서 명도를 선구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심학이 학(學)으로서 학문 체계를 갖추어 집대성된 것은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 名 守仁, A.D. 1472~1528)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양명학(陽明學)이라 통칭한다.

정주의 이학에서는 이기태극론을 가지고 우주론을 정립하고, 성즉리설을 통하여 인성의 문제를 규명한다. 반면 왕양명의 심학에서는 심이 존재의 근원, 도덕실천의 원리로서 정주 이학에서 이와 태극이 갖는 위치를 대신하고 있다.

이학의 경우 우주만물은 심(心)이 없이도 존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왕양명의 심학에 있어서는 심을 떠나서 어떠한 것도 그 존재의 근거가 인정되지 않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전자는 존재의 근거를 태극(이)에 두고, 후자는 그것을 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정주의 이학과 왕양명의 심학의 구별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왕양명의 심학은 중국불학(中國佛學), 특히 성종(性宗)으로 일컬어지는 화엄종 철학이나 선종의 심설과도 근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식화되었듯이 불학은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의 바탕에서 세계와 인생의 본질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심은 만물의 근원자로서 진실재이고 우주의 주재자이기도 하다. ‘심즉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양명의 심학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왕양명은 37세(1509)에 심즉리설을, 38세(1510)에 지행합일설을, 50세(1522)에 치양지설(致良知設)을 제창하여 이른바 양명사상의 삼위일체 철학을 확립한다.

심즉리는 이미 언급한 대로 송의 육상산에 의해서 논해진 것이지만, 왕양명에 와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 지행일체, 치양지론의 기저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철학을 유심일원론으로 이끌어 친민사상과 만물일체관을 성립시키는 열쇠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즉리는 주자학적 세계관이 심과 이, 주체와 객체, 아(我)와 물(物) 등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던 그것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거점이면서 그를 극복하는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양명학을 이해하자면 우선 심즉리설의 이론 구조를 알아야 하고, 그 이론 구조를 파악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중국 철학사상 가운데 일찍이 이가 심과 결합되면서 형이상학적 실재(reality)로 그 개념이 고양되었던 불교, 특히 화엄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중국 철학사상 심과 이가 ‘즉(卽)’자로 연결될 수 있는 이론적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은 수·당의 화엄학밖에 없었던 때문이고, 또 그의 영향이 송대의 이학이나 명대의 양명학에까지도 지대하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본고에서는 양명학과 불교를 비교함에 있어 양명의 심즉리와 화엄의 이법계를 비교 고찰, 그 영향 관계를 살피고, 맹자에서 선천적인 직관적 인식능력으로 말해졌던 양지가 양명에서는 심의 본체로서 ‘조조의 정령’으로 높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적 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요약한다면 심즉리의 연원과, 양지와 반야지의 고찰을 통하여 불교와 양명학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양명(陽明)의 심즉리(心卽理)

1) 이(理)의 성격

왕양명의 학문 성장 과정을 흔히 전반생의 ‘오익(五溺)’과 35세 이후 유학에의 재복귀를 통하여 확립되는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설을 ‘교의 삼변(三變)’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 종지(宗旨)인 치양지설의 기초가 된 것은 심즉리설을 내놓게 되는 용장(龍場)의 오도(悟道)였다.

왕양명은 1506년(35세)에 당시 조정의 권신 유근의 참소를 받아 오늘날 황주 수문현경인 용장의 역승으로 유배된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무리들과 더욱이 독충이 들끓는 이곳에서 그는 석관을 만들어 놓고 생사일념 오직 단거증묵으로 정일(靜一)로서 도를 구하던바, 그러던 중 1508년(37세) 봄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도를 깨닫고 ‘일체성인의 도가 오성(吾性) 속에 자족하니 밖을 향하여 사물에서 이를 구함은 잘못’이라고 알게 된다. 이것이 그가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깨우침으로 이른바 ‘용장의 오도’로서 왕양명은 이를 통하여 마음이 곧 이(理)라고 하는 심즉리설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정주에 있어서 이일분수, 만물각구일태극의 논리에 따라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내재하던 이는 이제 왕양명에 의해 심으로 되고 이 심은 곧 양지를 본체로 함으로써 자아의 주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주자에서 ‘성즉리’의 개념으로 그 권위와 안정성이 확고하게 보장되었던 이는 왕양명에 이르러 더욱 심, 자체로 된다.

마음이 곧 이(理)다. 천하에 또 마음 밖에 사(事)있고, 마음 밖에 이가 있을손가.(《傳習錄》, 권 상)

이렇게 말하는 왕양명에 있어서 심즉리의 본의는 이의 심에 의한 예속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왕양명의 심즉리는 객관적으로 이를 추구하는 주자학도의 학문 태도에 대한 향내적이고 내외일치적인 관찰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며, 아울러 일체 사물의 존재의 근거를 심으로 끌어들이는 대역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에서의 이는 그것이 본래 사유적이고 이론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태극이란 점에서 세계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서는 외재적으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객관 존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주자학의 이를 곧 마음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다. 만일 주자학의 논법대로 이가 태극이라면, 곧 심이 태극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왕양명은 이를 심으로 일치시켰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이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주관적인 존재이며 심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격물은 주자학에서처럼 향외적인 궁리(窮理)가 아니라 오성 속에서 찾아야 하는 마음의 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왕양명에 있어서 이는 주에서처럼 정리(定理)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심이 발생하는 곳에 투사되는 그러한 논리적 구조를 갖는 리이다.

2) 심의지물(心意知物)의 통일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골간으로 하여 형이상학을 수립하고, 이천의 성즉리설을 직접 계승하여 인생론을 발전시켰던 주자학에 있어서 이는 최고의 실재성을 갖는다. 그것은 형이상의 도요, 형이하의 기(器)에 있어서는 그것의 법칙을 이룬다.

형이상자는 도라 이르고, 형이하자는 기라 한다. 사사물물은 모두 도리를 갖는다. 기는 형적(形迹)이다. 사사물물은 모두 형적을 갖는다. 도가 있으면 꼭 기가 있고, 기가 있으면 꼭 도가 있다. 물은 반드시 법칙을 갖는다. (《朱子語類》, 권 75, <易>)

역 계사구의 ‘도’, ‘기’를 이에 대비시켜 풀이한 주자의 이론이다. 여기서 보면 이는 형이상의 도로서 형적이 있는 사물(기)에 반드시 내재하게 되는데, 이때 내재하는 이는 그 사물의 법칙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이상의 이는 정의(情意)도 없고, 헤아림도 없으며 조작도 없으나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는 성이라 부르고, 사물에 있어서는 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도로서의 이는 사물을 생성케 하는 원인자로서 존재(Sein)의 이라 할 수 있고, 사물에 내재하는 이는 사물에 있어서의 그 본성 내지 도덕적 당위의 법칙을 의미하는 당위(Sollen)의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는 통체(統體)로서는 일태극이나 이것이 사물에 각각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수(分殊)다.

또한 인간에 있어서는 성(性)으로서 심의 체(體)가 된다. 즉 성은 태극으로서 순수한 이이고 심은 음양과 같은 것으로 선악의 기질을 함께하는 기(氣)와 같은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주자학에서는 이를 우주론에서는 태극으로 보아 형이상적 실재로 보고 인간이나 낱낱의 사물, 즉 현상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이루는 체성, 즉 본질이나 당위법칙으로 보고 있다 하겠다. 곧 이=태극, 이=성이다.

그러나 왕양명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심·이·성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각자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주자학에 있어서 심 속의 성이 가지고 있던 일체의 도덕적 본질들을 왕양명은 활동하는 심 속으로 융회시켜 이를 형식화하고 고정화된 이나 지식으로서 가지기보다는 심으로서 실천하려는 양지의 철학을 세우게 된다. 성과 심을 둘로 나누어 볼 때 주자의 성즉리에서처럼 사사물물에 이가 심을 떠나 하나의 체성으로서 반드시 내재하여야 한다는 정리론(定理論)이 설 수 있기 때문에 왕양명은 심과 성과 이를 하나로 하여 통일하고 있다.

이는 하나일 뿐이다. 그 이의 응취(凝聚)를 말하면 성이라 이르고, 그 응취의 주재로 말하면 심이라 이르고, 그 주재의 발동을 말하면 의(意)라 이르고, 그 발동의 명각(明覺)으로 말하면 지라 이르고, 그 명각의 감응으로 말하면 물(物)이라 이른다.(《傳習錄》, 권 중)

성은 이가 응취된 것이고, 심은 그 응취의 주재이며 의는 심의 발동이고, 지는 의의 명각이며, 물은 명각의 감응이다. 따라서 이·심·의·지·물이 모두 개별의 것이 아닌 하나로 합일되고 있다. 그러므로 왕양명에 있어서는 나의 마음이 곧 물리(物理)이다.

3) 만사출(萬事出)의 심(心)

이러한 입장에서 취해지는 것이 그의 만사출(萬事出)의 심론(心論)이다.
왕양명의 어록인 《전습록》 가운데서 왕양명이 심에 대한 정의를 가장 간결하고도 함축성 짙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을 들라면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텅 비어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아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음으로 만 가지 일이 이로부터 나온다.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없고 마음 밖에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 心外無理 心外無事. (《傳習錄》, 권 중)

여기서 왕양명의 ‘허령불매 중리구이만사출(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은 원래 《대학》의 ‘명덕(明德)’을 해의(解義)한 주자의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바다. 텅 비어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아 중리를 갖추었으므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양명은 ‘허령불매’는 주자의 그것을 그대로 쓰면서 그것에 대한 작용적 측면을 풀이한 그다음 구절, 즉 ‘구중리이응만사(具衆理而應萬事)’에서는 ‘구(具)’자를 도치시키고 ‘응(應)’자를 ‘출(出)’로 바꾸어 역시 이것도 만사의 뒤에 놓음으로써 주자의 심과는 상이한 개념을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구중리’를 ‘중리구’로, ‘응만사’를 ‘만사출’로 바꾸어 자신의 신설(新說)을 세웠지만 여기에는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요(要)가 있으므로 깊이 음미할 구절이라 하겠으며, 또한 심즉리설의 본지가 이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자가 말한 ‘구중리’는 인간이 인간됨의 이와, 사리와 물리를 내 마음에 갖춘다는 의미에서 이 이의 구현은 학문의 힘에 의지하여 성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주자의 심은 사물의 존재 원리가 될 수 없음도 당연히 지적된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의 ‘중리구’는 이가 심인 까닭에 인간에게 본구(本具)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주자의 ‘응만사’는 내 마음과 사물이 각각 그 소근(所根)을 달리하는 입장으로 마음은 이것들에 응할 수 있는 능력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비하여 왕양명의 ‘만사출’은 일체의 사사물물이 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여기서 심과 물은 상호 대립되는 이원적 존재가 아니라 일원적으로 확립되는 존재임을 파악할 수가 있다.

그의 말대로 곧 마음을 떠나서는 어떠한 이나 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니 왕양명에서 심은 일단 일체 존재자들의 근원으로서의 성격을 띈 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발하니 즉재심중(卽在心中)이기 때문에 심외무리(心外無理)이고 심은 만사출의 근원이니, 심외무사(心外無事), 심외무물(心外無物)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왕양명의 심은 확실히 형이상학적 실재의 의(義)를 갖는 것으로서 유학에서 심이 이러한 위치로까지 개념이 고양된 것은 왕양명부터의 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중국 철학사상 불학(佛學)의 지대한 영향하에서 이루어진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다음은 화엄에서의 심과 이를 고찰함으로써 왕양명의 주제인 심즉리의 연원점을 밝혀 볼까 한다.

3. 화엄(華嚴)의 심(心)과 이(理)

1) 일심(一心)의 본질(本質)

법계(法界)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설하는 화엄의 사상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철저한 유심주의(唯心主義)이라 할 것이다.

우주사물, 일체제법의 근원을 일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법이 유심이란 점에서 우주는 일진법계(一眞法界)로 표현되고, 이 법계의 체(體)인 진심의 연변이 곧 형형색색한 종류의 세계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화엄에서 말하는 일심의 일은 1, 2, 3, 4 등의 수량적인 일이 아니라 유일무대(唯一無對),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의(義)를 갖는 것으로서 이는 진망미분(眞妄未分), 절대평등의 일심을 뜻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화엄경》에서는 이 일심의 의(義)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치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린다. 모든 법성(法性)도 이와 같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는데, 오온(五蘊)이 다 마음 따라 생기어 모든 법을 만들지 않음이 없다. 심(心)과 불(佛)이 이와 같고 불과 중생이 또한 그러하다.

마땅히 불과 심이 이러한 줄을 알면 체(體)와 성(性)이 모두 무진함을 알 수 있다. 만일 심행(心行)이 모든 세간을 두루 짓는 줄 아는 이 있다면, 이 사람 불을 보아 그(佛)의 참다운 성을 알게 된다.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 역시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작(能作)하여 그 자재(自在)함이 미증유(未曾有)할 것이다. 만일 누가 삼세의 일체불을 요지(了知)코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이 일체유심조임을 보아야 할 것이다. (《八十華嚴經》, 권 19, 〈昇夜摩天宮品〉)

이상 경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체만유는 일심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며 생사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 일심이 곧 법계이고 법계가 곧 일심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심과 불, 중생은 무차별의 평등여일(平等如一)한 존재’임을 인식할 수가 있다.

그리고 화엄에서 설하는 이 심은 무자성(無自性)으로 본시진공(本是眞空)이며, 또 진공인 까닭에 속제의 시공과 삼성일제(三性一際)를 초월하고 진망(眞妄)을 호융(互融)하여 무장무애(無障無碍)하므로 법계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연기를 성립시킨다.

《八十화엄경》, 권 13,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은 이와 같은 심무자성(心無自性)의 도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법은 작용이 없고, 또한 체성(體性)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저러한 일체의 것이 각각 서로 알지를 못한다. 비유컨대 강 가운데 흐르는 물들이 빠르게 흐르면서 경주하지만, 제각기 서로서로 알지 못하니 제법(諸法) 또한 이와 같다.

또 말하지만 크나큰 불구덩이에 맹렬한 불길들이 함께 일어나지만 제각기 서로서로 알지 못하니 제법(諸法)도 또한 그러하다. (……)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과 심의(心意)의 제정근(諸情根)이 일체 공(空)하여 무성(無性)이지만 망심(妄心)으로 분별하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관찰해 보면, 일체가 모두 무성이라 법안(法眼)은 불사의(不思議)하고 또한 이렇게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실(實)인 것이나 실이 아닌 것이나, 망(妄)이나 망이 아닌 것이나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모두가 단지 가언(假言)으로 설해진 것뿐이다.

곧 제법의 본신은 자체의 성을 갖지 않고 또 스스로의 작용도 없는 까닭에 각기 서로 모르는 것이다. 다만 일진법계의 심은 만법의 원천으로 제법의 법성이나, 법성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어서 연(緣)을 따라 시현(示現)될 뿐이니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고 무능무소(無能無所)하니 수연(隨緣)이지만, 불변일진(不變一眞)한 것, 이것이 법계의 구경실상(究竟實相)인 것이며 일심의 진의(眞義)인 것이다.

징관(澄觀, 청량국사, A.D. 738~839)은 이와 같은 일심을 ‘본각령원(本覺靈源)’이라 정의하고 일진법계를 통(統)하여 만유를 총해(總該)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만법은 유심의 나타남이니 이것이 또한 일진법계이며, 이 법계는 일체중생의 진심본체라는 것이다.
또 규봉(圭峰, 宗密, A.D. 780~84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중생은 모두 공적진심(空寂眞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본래성이 스스로 청정하고 불매(不昧)하며 요요상지(了了常知)하여 미래제(未來際)를 다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므로 이름 하여 불성(佛性)이라 한다. (……) 그러나 망상이 이것을 가려 스스로 증득하지 못하고 생사에 탐착(耽着)할 뿐이다.(《禪源諸詮集都序》, 권 2)

규봉에 의하면 일심은 ‘공적진심(空寂眞心)’으로서 자성청정하고 ‘명명불매(明明不昧)’한 상주불변의 불성(佛性)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만유의 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진심은 내 마음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체중생 속에 무시이래로 본구한 것이나, 다만 망심(망상)이 이를 가리니 차별상을 이룬다는 것이다.

곧 일심은 청정한 불성 그 자체이지만 망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만 그것을 볼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심은 공적진심(空寂眞心), 본각령원(本覺靈源)일 때, 법계에 충만하고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닌 자재자(自在者)라 할 수 있다.

법계무진연기의 의의는 일심의 이(理)와, 그리고 만사가 다 같이 서로의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 스스로 만상을 현전(現前)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징관이 “마음 밖에 경(境)이 없고, 경을 떠나 마음 없다(無心外之境 無境外之心).”라고 한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의취(義趣)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때문에 화엄철학에서의 심은 곧 사(事)이고 물(物)이며 이들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무애원융하는 본신(本身)적 존재가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구체적인 만상의 본신은 곧 심의 본질이니 삼라만상은 곧 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화엄세계관의 근본 원리는 이 일심, 곧 한마음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이(理)의 공성(空性) 및 항존성(恒存性)
징관은 《화엄법계현경(華嚴法界玄鏡)》 권 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공제일의(眞空第一義)로 (……) 진공은 곧 이법계이니 이들의 본명은 같다. 진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斷)과 멸(滅)이 아닌 공(空), 색(色)을 여의지 않은 공이니 이는 명공(明空)으로 역시 공상(空相)은 없다. 그러므로 진공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심(一心)을 설명하는 가운데 《화엄경》에서 설하는 ‘심무자성’을 살펴본 바가 있다. 이 말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일심법계가 만유의 신심본체라는 점에서 일체 현상계 사물의 개공(皆空)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공에 대하여 그것이 단순한 허무적인 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적인 실상을 갖는 공이란 사실에 유의하면서 화엄종사들이 말하는 이법계의 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징관의 이와 같은 진공리법계론도 이러한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비단멸(非斷滅), 비리색(非離色), 유명공(有明空), 무공상(無空相)이란 정의가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화엄리사법계관 내에서의 이는 첫째, 단멸이 없는 까닭에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하는 항존성(恒存性)을 가지며, 둘째, 색을 떠나 있지 않는 것이기에 일체사물에 내재하고, 셋째, 밝고 상이 없는 것이어서 무형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징관은 “이는 형상이 없으나 전체로 상 가운데 있으니 호탈존망(互奪存亡)하기 때문에 걸림이 없고 (……) 본래 포변(包遍)하니 공이 무애함과 같다(《華嚴法界玄鏡》, 권 상)”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넷째로 원융성(圓融性)과 보편성을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의 이와 같은 네 가지 성격적 개념들은 철저하게 진공관에 의해 정립되고, 또한 그러므로 이것은 중도적인 실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중도의 이(理)론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비비(非非)로 나아가는 부정의 논리라는 점에서, 설사 그것이 철저한 긍정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의 이는 적어도 인간 심성의 문제에 관한 한 송명유(宋明儒)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인의예지(仁義禮智) 등과 같이 구체적 윤리성을 갖는 실리(實理)는 아니다.

화엄에서의 이는 인간의 자의적인 지혜로서만 정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정주·육왕에서 다 같이 우주와 세계 문제의 중요한 개념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화엄철학에서 갖는 이는 결국 중도실상의 진여, 무애의 원융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당군의(唐君毅)의 말과 같이 공리(空理)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진공관적 맥락에서 관찰할 때 ‘공리’라기보다 ‘이공(理空)’이라고 표현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무적(無的)인 공으로서의 이가 아니라 이의 공성(空性)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이(理)의 실체성(實體性)과 동일본심(同一本心)

규봉은 이법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공제일의가 이법계다. 원래 그것은 실체이나 단 본심이다. (《註華嚴法界觀門》)

진공관에 의해서 이법계를 설명하기는 징관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공을 실체라고 한다. 그리고 실체는 또한 본심이다.

즉 이=실체=본심이란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엄철학에서의 이는 본심과 여일한 존재임을 파악할 수가 있다.

때문에 이는 즉심(卽心)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영역의 중심 개념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통찰(洞察)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명철학의 중심 사상인 ‘심즉리’는 이와 같은 이론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리고 이와 심이 떨어질 수 없는 즉(卽)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중심 개념, 즉 실체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화엄철학상의 논거들은 적지 않을 것이나 그 대표적인 예증을 든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명기해야 할 것이다.

만법(萬法)은 오직 일리(一理)로 통괄되고 만고(萬古)는 오직 일심으로 관통된다. 심은 만법의 근원이고 중묘(衆妙)의 체이며 영명불매(靈明不昧)하고 청정공적(淸淨空寂)한 것이다.(《御制大方廣佛華嚴經序》)

이와 같이 심은 시간·공간상의 만법의 원천이며, 심에 원천을 둔 만법은 일리(一理)로 통괄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리와 일심은 별물(別物)일 수 없다. 이 별물 아닌 일심과 일리는 곧 만유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그를 관(貫)하고 통(統)하는 존재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법장이 《화엄경발보리심장(華嚴經發菩提心章)》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 十玄門)에서 말하고 있는 이여사문(理如事門), 사여리문(事如理門)에서의 이사(理事) 관계를 들 수 있다.

그는 이여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성진실체(理性眞實體)는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즉 사(事)는 무별사(無別事)이나 곧 전리(全理)가 사(事)이다.

또 여사리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事法)과 이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까닭에 사를 따라 이는 두루 편재하는 것이다.

법장의 이러한 이여사, 사여리에 대한 논술들은 근본적으로 이사는 비일(非一), 비이(非異)하다는 상즉불리(相卽不離)의 묘리(妙理)를 이론화하려는 시도이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성진실체(理性眞實體)’라는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용어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4) 이(理)의 전동(全同), 능편(能遍), 은현성(隱顯性)
법장은 또한 이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사상(事相)이 모두 다하더라도 유일진리(唯一眞理)는 평등으로 현현한다. 진리를 여윈 밖에서 일편(一片)의 사(事)도 가득(可得)될 수 없기 때문이다.(法藏, 《華嚴經發菩提心章》)

화엄철학의 근본 종지는 이사의 평등무애한 일체성을 강조하고 나아가서는 사사무애를 설하는 데 있다 할 것이지만, 그러나 위의 법장이나 징관 등 화엄종사들의 이론을 볼 것 같으면, 이와 사의 관계에 관한 한 이는 사에 대하여 우위성을 갖는 존재라 할 것이다. 이론상 사상(事象)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이는 존재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대 송의 정주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이와 기는 결시이물(決是二物)이면서 부잡불리(不雜不離)의 원리를 가지고 사물을 형성하지만, 그렇더라도 이가 확보하고 있는 그 위치는 기에 앞서고, 이존무대(理尊無對)로 표현될 만큼 이론상의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필시 화엄 이법계론의 영향일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가 현현하여 사를 이루고, 사는 이는 현출(現出)한다고 할 때에 이는 낱낱의 사물 속에 어떠한 형태로 현현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이는 각기 사물 속에 분변(分遍)하는가 또는 전변(全遍)하는가 하는 점이다. 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각각 사물 속의 이는 이의 일부분인가, 그렇지 않으면 전이(全理) 그 자체인가 하는 것이다.

능변(能遍)의 이는 그 성에 분한(分限)이 없다. (그러나) 소변(所遍)의 사는 분위차별하다. 일일사중(一一事中)에 이는 모두 전변하지 분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그들 사물이 입는) 진리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일일섬진(一一纖塵)도 무변(無邊)의 진리를 모두 섭(攝)하여 원족(圓足)하지 않음이 없다.

능변의 사는 분한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소변되는 바의 이는 분한이 없다. 이 분한의 사는 분한이 없는 이를 전동(全同)하지 분동(分同)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는 체(體)가 없어 여리(如理)한 때문이다. 이러므로 한 티끌도 무너짐이 없이 법계에 두루한다. (法藏, 《華嚴發菩提心章》)

이상을 정리해 보면 첫째, 이는 분한이 없으나 사는 분한이 있다. 둘째, 이는 분한이 없기 때문에 한 티끌의 사물 속에도 전동(全同)으로 전변(全遍)하지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셋째, 이는 전리(全理/全同) 그 자체로서 낱낱의 사물에 현현하는 까닭에 일체만물은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 평등관을 도출할 수 있다. 넷째, 이는 주자에서처럼, 무조작(無造作)하는 무위(無爲)가 아니라 능변으로 표현되듯이 능동성을 갖는 활동적 존재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화엄 이법계설에서의 이와 심의 관계, 그리고 이들이 어떠한 이론을 통하여 이와 심을 종교적 차원만이 아닌 철학적 명제로 발전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화엄의 이러한 사상과 왕양명의 사상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이를 요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양명(陽明)과 화엄(華嚴)의 비교

1)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만사출(萬事出)

우리는 앞서 왕양명에 있어서의 심즉리의 각오(覺悟)적 경위와 그 내용의 대의를 밝혀 보고 화엄철학을 논의하였다. 그러므로 양명학과 화엄철학 사이의 많은 부분들이 상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화엄의 ‘일체유심조’와 왕양명의 ‘만사출의 심’을 들 수 있다.

일찍이 유학이나 도가에 있어서 이는 문리(文理), 명리(名理)로 쓰인 데 불과하고 더욱 ‘심’이 뚜렷하게 형이상학적 존재의 원리로 말해졌던 적은 육·왕 이전에는 없었다.

그러나 화엄에서는 화공(畵工)에 비유했듯이 일체존재의 근원을 일심에 두었다. 심은 공을 제일의로 하지만 만유를 포섭하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하는 것이지만 이론적인 선후, 인과관계를 따지면 일체의 것에 대해 선재하는 성격의 것이고 원인자이다. 왕양명의 심은 유학의 전통적인 태극론에도 불구하고 오심즉물리(吾心卽物理), 심외무사(心外無事), 심외무리(心外無理)란 말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역시 일체존재의 근원으로서 만사출하는 것이었다.

주자철학의 이기론에서 심은 기와 같은 것으로 이를 성으로서 그 안에 포섭하는 존재일 뿐 만물 생성의 근원은 아니었던 것이나 왕양명에서의 심은 만물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즉 왕양명에 있어서의 심은 주자에서처럼 이를 그 안에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심이 아니라 이처럼 온갖 것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의 심이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심, 그것이 도이고, 또한 이 심인 도가 천(天)일 따름이므로 심을 알면 도를 알고, 천을 알며 사서오경 등 모든 경적(經籍) 또한 이 심체(心體)를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다음과 같은 간화(看花)의 예문은 양명철학의 유심도리(唯心道理)를 잘 설명해 주는 본보기이다.

선생이 남진(南鎭)에 노닐 때에 한 벗이 바위에 핀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하에 마음 밖에 물(物)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꽃나무는 산중에서 스스로 피었다 떨어지고 하니 이에 나의 마음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선생이 가로되 그대가 이 꽃을 아직 보지 못했을 때에는 이 꽃과 그대의 마음은 함께 고요함(寂)으로 돌아갔다. 그대가 이 꽃을 볼 때에 이 꽃은 그 안색이 명백하여졌으니 곧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傳習錄》, 권 하)

마음이 있어 꽃이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없다면 그 산중의 꽃은 생명력을 잃을 뿐 아니라 적(寂)으로 돌아간다. 즉 마음의 감응이 있을 때에만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만사출의 심은 확실히 화엄의 일체유심조와 궤를 같이 한다.

선종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종의 육조 혜능(638~713)은 “세상 사람들이 본래 성품이 청정해서 모든 것이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안팎을 밝게 사무치면 자성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니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으니라(《六朝壇經》).”라고 말하고, 황벽희운(?~850)은 “이 법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다, 이 마음이 곧 법이니 법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傳心法要》)”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벽희운은

일체 모든 것은 오직 한마음뿐이다. (《傳心法要》)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宛陵錄》)
도는 내 마음에 있다.(《傳心法要》)

라고도 한다. 그리고 보조지눌(1158~1210)은 “안팎이 모두 전체인 것이니 (……) 산과 강, 땅덩어리와 해와 달과 별, 안의 몸과 바깥세상 등 모든 법이 다 진심의 본체이므로 비고밝아(湛然虛明)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 덩어리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법사(僧肇法師)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 하였다(普照國師, 《眞心直說》).”라고 진심설을 말하고 있다.

왕양명이 말하는 ‘허령불매 만사출의 심’은 혜능의 ‘세인성본자청정(世人性本自淸淨)’의 심과 보조지눌의 ‘담연허명한 진심’, 황벽희운의 ‘유시일심(唯是一心)’과도 통하는 심이다. 대승불학에서는 위와 같은 심들이 근본적으로 중도실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공관에 의하여 설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줄리아 칭(Julia Ching)의 말대로 “이 심은 진실재(reality), 실유(being),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The Way of Wang Yang-Ming)”라고 하는 서양철학적 존재 개념으로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논의에서 밝혀 보았듯이 왕양명의 심 또한 이와 같은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reality, being, ultimate reality와 같은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심은 자기 이외의 어떠한 도움을 요구함이 없이 그 스스로 능동성을 발휘하고 또한 그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심은 바로 화엄철학의 일진법계를 이루는 ‘일심’, 즉 능동성, 능변성의 이로서 표현되었던 ‘한마음’ 그것과 개념상 동열의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양명의 ‘만사출의 심’은 화엄·선 등 성종(性宗)의 일심사상의 영향을 받고서 형성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학 전통에는 없던 유심사상(唯心思想)이기 때문이다.

2) 영지지심(靈知之心)과 허령불매(虛靈不昧)

둘째는 ‘허령불매’를 들 수 있다.
필자는 앞서 이 말은 주·왕이 심의 신명성(神明性)을 설명하는 특출한 용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연원을 찾아 들어가면 역시 이 ‘허령불매’ 일사(一詞)는 화엄종사들의 심설에서 유래함을 볼 수 있다.
일본학자 동경치(東敬治)에 따르면 이 허령불매는 불교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나온 것으로 유가의 고서중에는 심덕(心德)을 해설하는 말로 이와 같은 것이 없다고 하는바, 주자가 이를 빌어 명덕(明德)을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영첩(陳榮捷)에 의하면 일본학자들의 이와 같은 대지도론 출처설은 근거가 없고 청량징관이나 규봉종밀의 심설에서 연원을 찾고 있다. (《傳習錄詳註集評》)

우리는 이미 화엄철학의 이와 심을 논하는 자리에서 징관이 심을 ‘본각영원(本覺靈源)’ 또는 ‘영명불매(靈明不昧), 청정공적(淸淨空寂)’ 이라 하고 또한 규봉이 ‘공적진심(空寂眞心) (……) 명명불매(明明不昧)’라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규봉은 진성(眞性)을 ‘영지지심(靈知之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이 영명불매, 공적진심, 명명불매, 영지지심 등의 심에 대한 화엄철학의 용어들은 ‘허령불매(虛靈不昧)’ 그것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진영첩(陳榮捷)의 말대로 징관, 규봉 등 화엄종사들의 말을 빌어 성구(成句)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왕양명은 ‘심지허령명각(心之虛靈明覺)’이란 말로 양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허령명각 역시 징관의 본각영원, 영명불매 등의 말을 그대로 담아 쓴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는바, 그의 심설에는 화엄심설의 영향이 적지 아니함을 입증할 수 있다.

한편 주자는 허령불매라는 심설을 이처럼 화엄종사들의 말을 통해 얻고도 불학에 대한 불만을 떨어 버리기 위해 ‘구중리이응만사(具衆理而應萬事)’라는 한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화엄철학에서 갖던 심의 공성(空性)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3) 이(理)의 동일본심(同一本心)과 심즉리(心卽理)

화엄철학에서 이는 단멸이 없는 까닭에 불생불멸의 항존성을 갖고, 색을 떠나 있지 않기에 일체사물에 내재하고, 밝고 상이 없는 것이어서 무형의 존재며, 공이 무애함과 같이 원융성과 보편성을 가졌다.

이와 같은 이의 성격은 주자철학의 이기론에서 이가 갖는 성격과 동일하다. 틀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화엄의 이는 철저하게 진공관 위에서 설정되고 있는 것이나 주자철학에서는 태극에 결부시키고, 도덕적으로는 인의예지 사단을 포섭하여 실리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양명이 심즉리라 할 때, 그는 주자철학에서 이가 갖는 개념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주자의 입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이를 성이라고만 함으로써, 이가 심을 떠나 객관적으로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주자의 입장은 이와 심을 이분하기 때문에 유내무외(遺內務外)의 향외적 학문탐구만이 중시되어 인간의 자각적 주체성이 확립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마음과 둘로 쪼개 보는 것은 학문이 진정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니라 위인지학(爲人之學)에 흐를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제외한다면 왕양명에 있어서의 이도 주자철학에서처럼 중요시된다. 주자철학의 이가 그 이론적 구조와 성격에 있어서 화엄철학의 이를 그대로 섭수(攝受)한 것이라고 한다면, 왕양명에 있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 없다. 곧 그 역시 화엄 이법계설의 이를 수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특히 심즉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규봉은 이를 실체라 하면서 또 이것을 본심이라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청정한 심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일체유심조의 심은 이사(理事) 세계로 나눌 때 이이고 이 이는 사를 이루는 것이다.

규봉의 논의에서 이는 본심이라 할 때, 이것은 곧 심즉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자가 성즉리를 고집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불학적 영향을 고려한 것이라 생각해 본다면, 육·왕에 있어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할 것이다. 양명학이 흔히 사선(似禪)이란 평을 들어 온 데에는 그의 학문 방법과 학설에 불학과 통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어서이지만, 특히 이 심즉리설은 철저한 영향 속에 있다 할 것이다.

4) 일진법계(一眞法界)와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

“한마음은 만유를 포함하고 만법은 오직 마음의 나타남(징관, 《화엄경소》)”이란 말로 표현되는 화엄의 일진법계설은 후대 정주에 있어서 통체일태극설(統體一太極說)의 선하(先河)이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심물불이(心物不二)의 만물일체관을 확립하고 있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은 이와 같은 화엄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이와 사, 사와 사는 모두가 무진으로서 원융무애한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궁극적으로 일심의 연변(演變)이라는 점에서, 일심에서 일체를 이루는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왕양명의 심즉리 역시 궁극적으로 만물일체관을 확립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만물일체는 오심(吾心)의 영명(靈明), 즉 양지(良知)를 통해서 이룩된다.

(문) 사람의 마음은 물과 동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몸이라면 혈기가 유통되어서 동체라 할 수 있지만 타인에 있어서는 이체(異體)일 것이며, 더구나 금수나 초목에 있어서는 더욱 멀 것인데, 어찌 동체라 할 수 있습니까?
(선생) 그대는 심과 물이 서로 감응하는 기상(機上)에서 생각하여 보아라. 어찌 금수초목뿐이랴. 비록 천지라도 나와 동체이고, 귀신도 나와 동체인 것이다.
(문) 왜 그렇습니까?
(선생) 그대는 이 천지간에서 천지의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라.
(답) 일찍이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생) 그럼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마음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답) 단지 하나의 영명(靈明)이라고 합니다.
(선생) 알았다. 일체가 충만하여 있는 이 천지간에는 단지 영명 하나뿐이다. 사람은 단지 형체를 이루어 스스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영명은 곧 천지와 귀신의 주재인 것이다. 천지 귀신 만물이란 나의 영명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영명도 천지 귀신 만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傳習錄》, 권 하)

이상에서 볼 것 같으면 천지의 심은 인심(人心)이고, 인심의 본체는 영명 그것이다. 결국 영명은 천지의 마음, 즉 우주적 정신이다. 이 영명을 통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는 이루어진다. 화엄에서 만법이 일심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나, 왕양명에서 천지귀신만물이 나의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나 틀리는 논법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왕양명에 있어서 이 영명은 마음의 양지(良知)로 하늘이 심은 영근(靈根)이며, 양지는 스스로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것이다.

朱本思(문) : 사람은 허령한 양지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풀이나 나무, 기와나 돌 같은 유들도 양지를 갖는 것입니까?

선생(답) : 사람의 양지는 풀과 나무, 기와 돌 같은 유의 양지다. 만일 이와 같은 초목와석(草木瓦石) 등이 사람의 양지를 갖지 않을 때 그것은 초목와석이라 할 수 없다. 어찌 초목와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낳는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말은 불가에 나오는 말이지만 결코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결국 명경이 만물에 응할 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추한 것은 추하게 비춤으로써 모든 진실한 모습이 비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낳게 하는 자리고, 또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추한 것은 추하게 비추되 일단 지나가 버리면 곧 집착이 없는 것이다.(《傳習錄》, 권 중)

위의 두 인용문은 불학의 ‘심인’과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원용하여 양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 대목은 《전습록》 중에서도 그의 양지가 불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지혜, 즉 반야지(praju~n~a- pa-ramita)와도 상동(相同)하는 지(知)임을 알 수 있는 구절에 해당된다.

유가의 이학에서나 심학에 있어서 ‘지선’은 다 같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임과 동시에 이것은 결국 인간 마음의 덕인 명덕으로 표현되어 오던 것인데, 왕양명에 와서 이 명덕과 지선은 양지로 되어 인간의 가장 원천적이고 밝은 지혜란 뜻으로 가치의 표준, 실천의 주체로서 자리를 확고히 한다고 볼 수 있다.

양지의 본체는 ‘밝은 거울’과 같아 한 터럭의 가림도 없이 사물을 따라 모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실제대로 비추지만(隨物見形 (……) 照而皆眞), 그 거울 자체 즉 양지에는 조금의 물듦도 없음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과 다르지 않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있어서 ‘무소주’란 시각, 청각, 취각, 미각, 촉각, 그리고 마음의 대상들에 의지하거나 거기에 주착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 ‘생기심’이란 마음이 이러할 때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때의 마음이 참마음 곧 진심 또는 본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불학에서는 반야지라 한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에 의하면 ‘기생심(氣生心)’의 심은 보살(Bodhisattva, the great being)이 내야 할 마음이라 하고 그것은 대상(object)이나 동기(motive)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마음(a completely free thought)’이다(The Diamond Sutra and Heart Sutra). 이 ‘자유의 마음’을 또한 공의 빛나는 투명성에 집중된 지혜의 백열 (the white heat of wisdom intent under luminous transparency of the void)이라는 수사법을 구사하여 설명하고 서양의 의미로서는 이것이 ‘praju~n~a- pa-ramita’, 즉 우리가 쓰는 반야지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은 《육백부반야경》의 핵심적 종지를 담은 경으로서 《중론》으로 유명한 용수(Na-ga-rjuna, B.C. 2~3세기) 교학의 요강인 동시에 대승불학의 골수와 같은 것으로서 이 경은 공, 무주상, 무소주를 특히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생기심’의 심을 ‘완전한 자유의 마음’이라 하고 또 그것을 공의 투명성에 집중된 지혜의 백열이라 한 콘즈의 지적 또한 탁월하다. 콘즈의 이러한 해석에 비추어 본다면 왕양명이 ‘명경’에 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양지는 ‘수물현형 이명경무증유염(隨物見形 而明鏡無曾留染)’이란 점에서 틀림없는 자유의 마음이고, 또한 무소주 이생기심(無所住 而生其心)으로 말할 때의 양지는 공의 투명성에 집중된 지혜의 백열, 곧 반야지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왕양명의 양지는 불학의 심인과 무소주 이생기심을 ‘내섭(內攝)’함으로써 콘즈가 말하듯이 자유로운 마음, 즉 ‘완전한 자유’, 그 자체와 ‘투명한 지혜’가 된다.

그가 양지를 ‘영명’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지를 뜻할 수도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성문(聖門)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고 말하는 치양지(致良知)는 내적인 완전한 자유, 그 자체로서의 마음(良知)과 투명한 지혜를 확충하고 보존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6. 결론

우리는 이상에서 양명학의 핵심 명제인 심즉리와 양지설을 중심으로 이를 화엄사상과 비교 고찰하여 보았다.

심즉리(心卽理)설은 이(理)를 태극으로 하여 우주만물의 실재로 하고, 성(性)을 이(理)라고 하여 심체로 보았던 주자철학의 성즉리(性卽理)설과는 전혀 내용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심이 만물의 근원적 실재로 개념화 되는 차원이었다. 그러므로 양명학에서의 이는 심 그 자체이지 개념상 심과 분리된 성으로서의 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성으로서의 이가 아니란 점은 주자류의 정리(定理)가 성립될 소지를 부정함으로써 심물일여(心物一如), 만물일체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양명학의 우주관은 전통 유학보다는 불교의 화엄사상에  더 연접하고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고 하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화엄의 유심일원적 세계관과 이사론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차원에서 양명심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일체유심조의 심론으로서 이는 왕양명에 있어서 주자의 ‘응만사(應萬事)’가 아닌 ‘만사출(萬事出)’의 심론을 성립시키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심이 만물의 근원적 실재로 그 개념이 정립되고 있는 것은 불학(佛學)이지 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심즉리이다. 화엄 이사법계설에서의 이는 다름 아닌 본심 그 자체라는 점에서 육·왕의 심즉리는 여기에 선하(先河)를 두고 있다. 화엄의 이사법계설은 정·주 이기론에 이론적 틀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주에서는 인성의 문제에 있어서 성즉리(性卽理)지 심즉리(心卽理)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왕의 심즉리는 화엄에서 그 연원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엄학을 제외하고 이와 같은 이론을 정연하게 제시한 사상은 중국철학사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물일체관적 사유이다.
화엄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은 일심을 위주로 하여 일진법계를 설한다. 현상의 세계는 형형색색으로 다양하지만 일심의 현현이라는 차원에서는 하나로 융화된 세계이다. 그 원용의 원리는 일심의 공성(空性)에 있다.

왕양명에서는 심의 영명을 통하여 물아(物我), 만물을 일체로 통일시켰다. 주자의 통체일태극은 성즉리의 이를 통하여 만물일체관적 사유를 엿보게 하는 것이지만 왕양명은 막바로 심을 통해서 일체관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도 화엄이나 선종의 심론에서 입은 바 영향이 지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왕양명은 심(心)·의(意)·지(知)·물(物)은 물론 지행(知行) 등 일체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있는바, 그의 치양지 묘제(妙諦)는 분석적 해명에 의존하여서는 도저히 체인(體認)할 수 없는 것이고, 일자불설적 선기(一字不說的 禪機)와 같은 것으로서 자증(自證)될 수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왕양명이 이를 밖에서 구함을 그토록 배척하고 내심의 자증을 중시한 것은 명심견성(明心見性)과 같은 불교의 간이직절(簡易直截)한 학문 방법을 중시했던 까닭으로 이는 ‘심외무물(心外無物), 심외무사(心外無事), 심외무리(心外無理)’의 원리에서 ‘정심(正心)’이래야 ‘정물(正物)’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왕양명은 《맹자》에서 선천적이고 직각적인 인식 능력이었던 양지(良知)를 조화의 정령으로 차원을 고양시켜 마음의 본체로 삼으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는 《금강경》의 반야지와도 비유하였다. 양지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그의 치양지(致良知)는 사변적인 논의나 탐구에서가 아니라 견성성불과 같은 불교적인 각오(覺悟)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학문이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전래로 사선(似禪)이란 평을 들어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본고를 통해서 얼마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송재운 / 철학박사. 동국대 교수, <불교신문> 주필, 동 신문 논설위원, 《월간불교사상》 주간, 불교방송 해설위원, 한국국민윤리학회장, 한국공자학회장, 한국동양철학회장 등 역임.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양명철학의 연구》, 《공자사상과 현대》(공저), 《국민윤리》 외 다수가 있고, 논문으로 〈양명심학에 미친 선학의 영향에 관한 고찰〉, 〈육조선과 왕양명의 치양지〉, 〈화엄의 리와 심에 관한 연구〉, 〈왕양명 심학의 연구〉, 〈한국적 다종교 상황과 유교〉, 〈종말론의 유가철학적 이해〉, 〈불교의 생명윤리관〉 〈명대 심학의 완성〉, 〈삼봉 정도전과 함허당의 유불대론〉, 〈유학사상연구와 근-현대 개념〉, 〈일상언어 속의 철학적 사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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