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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유불(儒佛)의 교류 / 김용환
특집 | 불교 속의 유교, 유교 속의 불교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김용환 sunyanan@chungbuk.ac.kr

들어가는 말

한국사회의 유불의 교류는 유교와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교류하여 역사적으로 소통(疏通; communication)하거나 통변(通辯; interpretation)하거나, 통달(通達; conversance)하는 심연의 과정을 보여 준다. 한국 유교의 소통 주체는 유학자나 선비를 포함한 유교인이며 한국 불교의 소통 주체는 선지식이나 보살을 포함한 불교인이다. 결국 그들의 소통은 한국인의 소통이며 한국 문화의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한국 유교는 교류를 통하여 한국 역사에서 국가 발전과 문화 향상에 이바지한 공헌이 크다. 삼국시대에는 부족연맹국가가 봉건군주로 체제 전환을 하는 데에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의 군주국가 관료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또 인재 등용의 기준이 되면서 전형적인 유교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한국 유교는 교류를 통하여 도덕의식을 함양하고 계발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유교의 오륜(五倫)은 생활의 기본규범이 되었고, ‘충(忠), 효(孝), 절(節), 의(義)’ 사상은 가정과 국가를 유지해 가는 정신 지주(支柱)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으로서 예의와 염치를 존중하고, 군자 되기를 힘쓰게 되어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 유교는 교류 과정에서 많은 폐단을 드러냈다. 예의(禮義)에 집착하여 관혼상제의 예절 절차가 번거로웠으며 소통 과정에서 본심을 숨기는 등 표리부동의 폐단도 생겨났다. 직업에서도 ‘선비’의 신분을 강조한 결과, 양반계급이 특권의식으로 배타적이 되면서 농공상민을 천시하고 그 노력을 착취하여 적대적 이분 사고를 낳아서 노동을 천시하거나 학문을 행세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더욱이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德者本也 財者末也)’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공공이익을 도모하는 상공업을 천시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한국 근대화에 걸림돌로 전락하였다. 한국사회의 근대화 이후에는 유교의 생명력이 차츰 약화되면서 서구화로 바뀌어 갔다.

한국불교는 복덕구족, 생사해탈, 광도중생의 세 가지 이념을 근간으로 자성중생으로부터 인연중생을 섭수방편으로 제도하고 보살실천을 강조하였다. 신라의 원효는 소통의 핵이 되면서 화쟁국사(和諍國師)로 불리게 되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통하여 불교 쟁론을 회통시켰다. 그 화쟁의 원리는 화엄의 일심사상에 기반을 두었다. 불교사상에는 불교 종파뿐만 아니라 유교와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여 화엄통변에서 마음통달로 발전시켰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서 해탈의 문을 증득하는 구법 여정의 소통 과정이다. 선재라는 한 구도자가 타 종교인과 교류와 소통하면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복덕지혜의 양족을 구족하기 위해서 선지식을 찾아가서 보살도를 통달하고자 하였다. 이 순례의 마지막 여정에서 보현보살을 상봉하고 보현행원에 통달함으로써 구법 여정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불교 이외의 종교 지도자와 교류하면서 소통하였다.

여기서는 유불 교류와 소통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을 믿지 않는 사견을 지닌 중생들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있으며, 언젠가는 부처님을 믿고 불교로 입문하리라고 보며, 그들을 ‘생맹중생(生盲衆生)’이라고 한다. 이는 곧 유교인도 불교와의 교류를 통한 교화의 대상이 되며 불성을 구족한 생명이기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것으로 소통하니 ‘여래성기’의 소통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不二) 다름이 없다(不異)’는 상즉상입(相卽 相入)의 원융 소통은 모든 존재가 여래 출현이라는 ‘여래성기’로 통변되니 유불은 동등하게 교류하고 상호 변화되어 마침내 통달의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의 특징의 하나로 전의법으로 환골탈태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경이 《육방예경(六方禮經)》이다. 한 바라문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육방으로 절하는 것을 보신 부처님께서 절을 계속하기는 하되 여섯 가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절하라는 말씀이었다. 동쪽으로 절할 때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를 생각하고, 서쪽으로 절할 때에는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생각하는 방편 소통이다. 다른 종교와 소통하되 그 수행법을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통변의 방편으로써 소통하라는 가르침이다.

한국사회의 유불 교류의 가장 큰 의미는 상호 간에 지혜의 힘을 증강시키는 데 있다. 이는 유교인과 불교인이 상통하여 ‘무자성(無自性)’의 존재로서 교류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한’ 마음에 통달하여 서로를 함께 살리는 ‘상생’의 통달에 다가서게 된다. 이러한 상생의 통달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상호의 말씀을 경청하고, 상호를 이해하고, 상호를 반성하고, 나아가 상호가 함께 성숙함으로써 ‘한’ 마음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거나 공복(共福)을 실천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정치적으로 유교를 따랐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정치, 문화, 사상에도 유교가 절대적 우위의 위상을 차지하면서 조선조 500년의 역사는 유교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유교인은 사람을 집단의 일원으로 파악하거나 그가 속한 사회 맥락이나 관계망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데 반해, 불교인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해탈 과정에 무게를 두면서 이 세상에서 ‘중도실상’을 통변하게 된다.

유교인은 그 본향이 민족이나 국가, 문화에 있기에‘세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불교인은‘출세간’의 해탈에 본향을 두면서도 유교와의 소통을 통하여 ‘세간이 부처의 나라’라는 통변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상에서 유교인은 삶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불교인은 나그네요 구도자요 순례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털어 내면서 이 세상이 부처님의 나라와 연계된다는 통변의 논리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공자님과 부처님은 우리나라에서 소통의 귀감이 되었다. 두 분 모두 천하에 두려울 것 없이 자유롭게 사신 분들이지만, 공자님은 차별적 사랑의 ‘인(仁)’의 질서를 내세우기에 이 세상의 질서, 가정의 소중함, 내면의 도덕규범으로 그분의 가르침이 통변되었다. 반면에 부처님은 ‘가족’이라는 근본적으로 세속의 질서를 떠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기를 바라지 않는 철저한 무소유와 무아의 삶을 인격의 중핵으로 보여 주셨다.

한국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두 인격과 소통하는 가운데, 유불 교류의 가치는 한국사회에서 세간의 살림과 탈세간의 지향이 함께 아우름이 가능한 원융통변으로 나아가면서 역사적으로 통달, 통변, 소통의 멋진 모습을 보여 준 최치원, 이제현, 함허득통, 초의선사를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불의 통달 이치를 몸으로 살린 최치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은 유불선의 교류에 관심을 두고 신라의 한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한문학의 개조로 일컬어진다.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한 신라인이 60여 명이나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이다.

그가 높은 명성을 얻은 데는 뛰어난 재능에다가 남다른 각오와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부할 때 머리털을 천장에 잡아매고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가면서 이른바 종교적 구도심으로 정진하였다. 우리는 당대 사회의 최고 지식인이라 할 최치원이 겪었던 종교 간의 갈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으며 유불도의 근원에 대한 그의 통찰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도라고 지칭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의 핵심이 풍류도에 포함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유불 통달의 정신에서 그는 유교 요체가 ‘집으로 들어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으로 집약하고 불교 요체를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오로지 착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諸惡莫作 諸善奉行)’으로 압축함으로써, 결국 유불 교류의 뿌리에는 ‘한’의 민족정신이 담겨 있고 이 방향으로 승화되는 길을 몸으로 살려 개신한 셈이다.

또한 신라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의 적조탑비에는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최치원이 ‘비명(碑銘)과 서’를 기록하였는데, 적조탑비를 보면 우리는 당시의 유불 교류를 짐작하거나 유불 통달에 대한 최치원의 마음가짐을 파악할 수 있다. 최치원은 유교의 인심(仁心)이 불교의 불심(佛心)과 횡단 매개하여 ‘한’의 풍류가 될 수 있다는 통쾌한 지견을 드러내 주고 있다.

여기서 최치원은 “오상(五常)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 동방(東方)으로 짝지어진 것을 ‘인(仁)’이라”고 정의하고 “깨끗한 곳(淨域)에 나타난 것을 ‘불(佛)’이라”고 규정하면서 유교인의 마음, 인심(仁心)이 곧 불교인의 마음과 상통하여 유불통심의 ‘능인(能仁)’인 바로 부처님임을 명시하기도 한다.

최치원은 결국 유불이 교류하여 해 돋는 신라, ‘욱이(郁夷)’가 유순한 성품의 물줄기를 인도하게 되었고, 유교의 정신에 의해 동방제후가 외방(外方)을 다스리듯 위대한 ‘한’이 나타나서 질서를 잡아 가게 되었으니, 금수강산의 산천은 영수(靈秀)하고 살기가 좋아서 호양(互讓)의 통달심이 근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정신적 깊이가 샘이 되고 화락한 태평성대와 은은한 상고(上古)의 가르침이 융합하여 이 한반도를 융성하게 할 것으로 진단하였다.

최치원은 삼국이 신라로 통일된 근저에는 불교의 힘이 바탕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불교 종파뿐만 아니라 유불도가 결국 일승으로 승화되고 발전함에 따라 몸으로 살리고 느끼는 가운데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불도의 풍류가 도도히 흐르기에 그 물결이 바다의 한 모퉁이, ‘해동(海東)’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며, 각각의 취향에 따라 따라야 할 길이 열리게 되니, 신심(信心)은 샘물같이 솟아나고, 혜력(慧力)은 바람처럼 드날린다고 비유하였다.

이처럼 삼교가 일승(一乘)의 ‘한’ 거울에 빛나기 때문에 의룡(義龍)은 구름처럼 뛰게 되고, 율호(律虎)는 바람같이 솟아 오르며, 학해(學海)는 파도처럼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은 가엽(柯葉)처럼 무성하게 된다고 ‘한’의 풍요로움을 찬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유불 교류를 유불 통변으로 회통시킨 이제현

고려의 이제현은 성리학(性理學)이 고려에 수입되던 시기에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대표적 문인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그것을 고려의 새로운 신지식으로 소화 흡수하게 한 장본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유불 교류의 관점에서 그는 유불 교류를 유불 통변으로 회통(會通)시킨 유학자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제현의 학문 관심은 성리학에 치우친 일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본원적이며 대체적인 것을 불교와 회통시켜 양자를 소통하고 폭넓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공자, 맹자의 개방적인 정신 자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정주학을 배웠지만 그것이 유학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현의 기본적인 학문적, 신앙적 태도라고 할 것이다. 회통이라는 용어는 ‘모든 이치를 모아 들여서 막힘없이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제현의 유불 교류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로 타당할 것이다. 그는 불교의 사유를 유교의 언어로 번역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제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학자였으나 불교인과 교류를 통하여 학문이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에만 얽매이지 않고 유불 회통(會通)의 통변 성격을 지녔으며 불교 신앙에 대해서는 포용적 태도를 나타냈다. 불교에 심취한 당시의 충선왕을 충절을 다해 시종하면서,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조맹부와 가까이 교제하였다. 선대에서부터 불교와 친분을 유지해 오면서 친인척이 바로 승려가 되기도 하는 여건 속에서, 이제현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대하여 호감을 나타냈고 언어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승려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제현은 유불이 현상적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그 근본정신에서는 통변의 교감이 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제현의 ‘금서밀교대장서(金書密敎大藏序)’ 중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처의 길은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근본으로 삼으니, 자비는 인(仁)이 되는 일이고 희사는 의(義)가 되는 일로 통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글의 대지(大旨)는 상통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처럼 불교의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유교의 인의(仁義)에 견주어 번역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불교의 출세간의 길을 인정하면서 그것 또한 현실 사회와 연결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현이 살던 고려 말 시대는 일반적으로 유학자의 생활에 불교가 깊이 침투하던 시기였다. 이제현은 선대로부터 친불(親佛) 가풍을 물려받았고, 그가 시종을 들던 충선왕의 호불(好佛)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불 교류의 기풍에 젖어 있었다. 그의 학문은 회통을 위한 통변의 성격을 띠며 불교를 유학 바탕 위에서 긍정적으로 포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현이 생각하는 불교 신앙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유학의 이치 언어와 통변이 되어야 소통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제현은 불교가 근본적으로 출세간의 성격을 지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치도와 민생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였다. 당연하게도 유학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치도와 민생을 저해하면서 장애가 되는 불사(佛事)의 폐단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이고 부정적 관점을 취하게 되었다. 유불 교류에서 이제현의 불교 언어에 대한 이해는 유학 사상에 기조를 두고 있으며 유학의 언어로써 번역하여 소통하는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현이 불교의 중도사상 이해의 대목에서는 유교의 중용(中庸)사상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나고, 중도실상의 문제를 파악함에서도 유교의 성(誠)을 파악하는 이치로 유불 소통을 고찰했다고 할 것이다. 이제현은 열반, 전륜성왕을 파악함에서 현실교화, 왕도정치의 인식 지평을 유지하였고 현세홍익의 시각을 전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유불 교류의 근저에는 ‘무실(務實)’이라는 통변 언어가 나타난다. 이 ‘무실’은 유교의 특징에 해당하는 성경(誠敬)의 신앙을 전제로 삼은 것으로 성경(誠敬)의 기제를 떠나서 이제현의 불교사상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것이다.

유교의 비판을 현증통변으로 응수한 함허득통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불교계는 형식적인 교리와 기복적인 불사에 치우친 나머지 일반 승려들은 권력과 지위 다툼에 눈이 어두워 승단 화합과 질서는 파괴되었고 공공가치는 붕괴되는 형편이었다. 파계한 승려들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승가의 위신은 추락되었다. 고려 성종 때, 최승노(崔承老)의 상소문에 따르면, 세속인들은 현세구복을 위하고 승려들은 자기네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많은 사찰을 다투어 지었다고 한다. 당연히 승려의 수가 무리하게 증가하는 추세가 됨으로써 이를 제재하려는 노력이 사필귀정이 되었다.

인종 8년(1130)의 《고려사》를 참조하면, 절을 지어 놓고 안일하게 포식하는 무리가 부지기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성종 때 좌부승지 이극감(李克堪)은 고려 불교의 사원 경제를, 단적으로 말해 여염집의 반수를 사원이 차지하고 사원의 전장(田壯)이 관부보다 더 많았다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불량한 승려들의 재색에 대한 행패가 극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를 세금이나 노비 고용에 그치지 않고 투자를 위한 고리대금업에 활용하는 폐단이 자행되었다.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반역자들이 승려로 위장하여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修行)에는 뜻이 없고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불교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이 예속된 사원에는 주지들 사이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심지어 선교(禪敎) 양종 사이에 사찰 쟁탈전이라는 추한 모습까지 연출되었다. 세도가에게는 뇌물로 입을 봉해 버려 지방 관리들은 감히 이를 바로잡을 엄두마저 못 내었다.

역사적으로 억불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목은이색(牧隱李穡1328~1396)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민왕 원년 4월에(佛敎通史上編 공민왕 원년 4월 조) 상서하기를 고려 중기 이후로 불교의 오교양종이 모두 ‘이익의 집단[利窟]’이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천방산곡 무처비사(川傍山曲 無處非寺)’라 하여 사찰의 지나친 건립을 경계하면서 도첩제를 실시하도록 주장하였다. 물론 새로이 건축된 사찰에 대해서는 철거를 당부하고 있었다.

유신들의 반론을 의식하면서 그는 공공연하게 불사 공사가 너무 비대해지면서 경전 공부는 뒷전이 되고 불사를 위해 들이는 경비가 경제 파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좌사의(左思議) 오사충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지나치게 유교 중심으로 불교를 비방하여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공민왕 원년 12월에 상소까지 하였고, 후세 유생들은 ‘그의 학문이 불순한 동기를 반영하여 부처를 믿는 탈속신앙이 세속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라고 혹평까지 하였다.

이렇게 고려 말의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고려 왕조는 멸망을 당하고 조선 왕조가 개국하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사원 전답이 몰수되고 승려 지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당시 유학의 거두(巨頭)였던 삼봉 정도전은 공양왕 3년에 상소를 올려 불사(佛事) 때문에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민생고가 늘어나며, 신불(神佛)을 섬기는 것은 전혀 이익이 없고 해로움만 더해 간다고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양무제(梁武帝)를 제시하였다.

삼봉이 불교를 비난하는 데에는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승려가 놀고먹어 비생산적이라는 점이고, 둘째, 승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며, 셋째, 지나친 불사(佛事) 때문에 나라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점, 넷째, 장례 절차가 무례하고 엄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삼봉의 《불씨잡변(佛氏雜辨)》과 《심기리편(心氣理篇)》과 《심문천답(心問天答)》은 체계화된 비판 이론의 척불론으로 후대 유생들의 배불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삼봉의 불교 비판에는 불교 체계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이의 사회적 폐단과 인습에 대한 비판이 중심 논지였다.

거세게 몰아닥친 유교 비판에 대응하여 현증 통변으로 반론을 제기한 분이 함허득통(涵虛得通) 스님이다. 그의 통변이 바로 <현정론(顯正論)>이다. 여기서 함허득통 스님은 유불 교류의 관점에서 불교 통변의 논리를 구축하였다. 그는 유교의 오상(五常)을 불교의 오계(五戒)로 번역하였다. 유교 오상의 인(仁)은 불교 언어의 불살생(不殺生)이며, 유교의 예의지신(禮義智信)은 불교의 불음(不淫)·불도(不盜)·불음주(不飮酒)·불망어(不忘語)에 대응시켜 번역하였다.

당시 불자를 보고 세인들이 불효불충(不孝不忠)이라고 비판한 데 대하여, 함허득통 스님은 출가 자체는 오히려 도(道)에 합하는 이치요, 부모의 명을 위함이니 큰 효행이 되며, 나라를 위하여 복을 구하고 인과로써 백성을 선도하니 오히려 큰 충성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유교의 오상을 잘 실천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당시 비판에 맞대응하고자 내세운 ‘현증통변’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 세력이 몰락한 그 당시의 시대 배경으로 보아 함허득통 스님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조선 초기에 척불론자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유불의 교류는 단절되고 불교인은 산중으로 밀려가고 그 많은 재산과 노비는 공탁되었으며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 당하였다. 무학 대사의 뒤를 이은 함허득통 스님은 무너지는 불교를 받쳐 들고 호법 등불로 불교의 명맥을 유지시켰다. 함허득통 스님은 척불강풍(斥佛强風)을 온몸으로 막아 낸 조선불교의 거목이다. 물론 그 이후의 성종시대에서 배불정책이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보면, 그의 절충 통변은 성공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허득통 스님은 지공·나옹·무학 삼대 화상의 후예로서 조선 초기의 정치적 혼란기와 유교가 불교를 밀어내는 전환기에 이 민족의 정신문화에 큰 기둥으로 우뚝 솟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불교를 지켜 내려고 힘썼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함허득통 스님이 활동한 시기가 고려 말 우왕(禑王) 2년(1376)에서 조선조 세종 15년(1433)사이이기 때문에, 유불교류라기보다 불교의 퇴락을 온몸으로 막아 내는 시기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때의 유생들은 고려불교 병폐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 배격은 고조에 달하였다.

세찬 비바람에 온몸을 드러내시다가 유불 교류를 하게 된 함허득통 스님은 불교사상에 진보의 옷을 입혔다고 할 것이다. 유불을 향하여 그는 “문자에 집착하면 분별만 보고 근원은 어둡게 되고, 문자를 버리면 근원만 보고 분별에 어둡게 된다. 그러므로 근원과 분별에 다 같이 어둡지 않아야 진리의 바다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하여 유불 통변의 지향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삼신불은 주역의 무극·태극·음양오행 사상과 상통한다고 보기에 유불 융합 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 할 것이다.

요즈음 입적한 스님들의 영결식 만장에는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라는 함허득통 스님의 글귀가 눈에 뜨인다.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생멸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불멸이 멋이 있음을 노래한 함허득통 스님의 시구로서 죽음 앞에서 유불은 계합함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죽음은 뜬 구름이 멸하는 것인가!
태어남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짐일세.
뜬구름은 본디 자취가 없는 것.
덧없는 몸의 생멸도 본시 이와 같아라.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 상존하는 영물(中一箇長靈物)’은
많은 겁을 지나도 변함이 없다네.

이처럼 뜬구름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과 인간의 육신 역시 그 바탕에는 실체가 없는 환영임을 말하면서 영성 존재로 불생불멸의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무상과 유상의 존재 양면성을 중도실상 통변으로 풀이한 시구이다.

그의 또 다른 시구는 인연 따라 사는 생명에 깃든 천진무구한 성품을 찬한다.

마음은 물과 달 같지만 그 자취는 티끌이니
칭찬해도 기쁘지 않고 비난해도 성내지 않네.
인연(因緣) 따라 생긴 대로 살아가나니
더벅머리 흙투성이 얼굴 천진무구(天眞無垢)로세.

이와 같이 함허득통 스님은 유정무정, 유불 모두를 잊어버리고 인연 따라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라도 걸림 없는 경계와 만나게 된다. 때가 되면 밥 먹고 다리 아프면 쉬어 가고.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하늘의 참된 진리 속에 사는 어린애가 된다는 주장이다. 참으로 편안해진 마음을 함허득통 스님의 시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무애의 정신세계가 바로 몸과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난 유불 구경의 경지에 해당될 것이다.

다선일미로 유불을 상통시킨 초의의순

초의 선사는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서, 스승이 그에게 겸손하라고 지어 준 이름이 ‘풀 옷’에 해당하는 초의의순(草衣意恂)이었다. 초의 선사는 시와 그림에도 능하고, 꽃 기르고 장 담그는 데도 능하여 어느 것에든 능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전한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맛의 깊이를 온전히 깨치면 어느 요리든 맛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꽃이라도 그 성질을 깨쳐 온전히 키워 낸다면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능히 다룰 수 있다. 시서화가 일체라는 남종화의 가르침이 그러하며, 차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에 대한 초의 선사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초의가 길을 열어 주어 소치가 추사에게 배웠던 남종화라는 장르도 원래는 중국의 남종선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실제로 19세기 유불 교류를 실천한 석학은 초의 선사였다. 동다(東茶)의 훌륭함을 예찬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다신전(茶神傳)을 지어 다성(茶聖)으로 불리게 된 초의 선사가 정약용을 처음 만난 것도, 정약용이 거소를 다산 초당으로 옮긴 이듬해였다. 다산이 해남 대둔사에 들렀을 때 당시 24세였던 초의선사는 장문의 시를 지어 정약용에게 바치면서 가르침 받기를 청하였고 이를 계기를 초의 선사는 정약용에게서 시와 경서를 배우게 된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진보적 유학자, 정약용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실학적 불교 연구 태도는 진묵의 발자취를 추적한 《진묵조사유적고》나 《대둔사지》를 편찬한 것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정약용은 그의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하여 감정을 맡았으니 두 분의 교류는 학문적 교감으로 승화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초의 선사가, 유교의 가르침으로써 주자 성리학을 실학으로 전환시켜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완성시킨 위대한 유학자, 다산 정약용을 찾아 만나 인격적 교류를 하게 된 것은 유불의 상통(相通)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횡단 매개로 이어 준 것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차였다. 초의 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실제로 교류한 기간은 약 9년이 되며 초의 선사가 다산에게서 경서와 시문을 배웠다는 흔적은 기록으로 전해진다. 초의 선사는 다산의 장자 유산보다는 두 살 아래였고 둘째, 운포와 동갑이었으니 초의 선사는 다산에게 아들처럼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초의 선사가 훗날 추사 김정희나 해거도인을 만나게 된 인연 역시 이들 형제가 매개의 다리를 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말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린 국제적이며 천재적인 문인 추사 김정희와의 교분은 당대 석학의 만남이 되었다. 금담에게서 선을 배우고 윤우의 법을 이은 초의 선사는 삼학에 뛰어난 바 있으며 선교에 능통하였으니, 당대의 유불 교류는 쌍방 모두 자신의 경계를 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머문 대둔사로 불리는 대흥사는 깊고도 아름다운 사찰로서 초의 선사의 자태가 스쳤다고 할 것이다. 그 절 깊은 곳에 초의 선사의 일지암이 있다. 이 작은 초가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흔치 않은 다실의 전통을 보여 준다. 홀로 고요히 차를 마시다 보면, 유불의 경계가 사라지고 차의 맛만이 입안에 향기를 남길 뿐이다. 특히 초의 선사는 앉거나 서거나, 집에서나 뜰에서나, 아무 데서라도 차 한 잔으로 마음이 맑아진다면 따로 깨달음의 자리가 필요치 않다고 했으니, 차 한 잔의 깊이에 유불은 다 함께 녹아든다고 할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맺음말

역사적으로 유교는 인간의 사는 길 위에 펼쳐져 있고, 불교도 사람 사는 길 위에 전개되었다. 길을 가다가 보면 모퉁이도 만나고 교차로도 만난다. 유불 교류는 교차로에서 만나는 소통에 해당한다. 이 소통에는 상호 이해를 위한 일차적 만남이 있고, 한쪽 길에서 다른 쪽 길을 저울질 하고 평가하려고 드는 통변의 만남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제현은 유교의 길에서 불교를, 함허득통은 불교의 길에서 유교를 바라보면서 번역해 내고 그 교차로를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 사유 체계를 보면서 자신이 믿는 신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통변의 만남은 회통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어디까지나 번역에 머물고 있는 한계를 노정시켰다.

이제 두 길이 만나서 하나의 통 큰 ‘한’ 길로 접어들게 되면, 통달의 교감으로 느껴지거나 횡단 매개의 매개체가 되어 두 길의 차이는 마음의 경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앞의 경우를 우리는 ‘한’의 풍류도를 주장한 최치원의 길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뒤의 경우는 다선일미의 매개체를 발견한 초의 선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어느 경우에서나 하나에 대한 고집, 자기 길에 대한 고집은 놓아지게 되었다. 길에 사무쳐 삶 자체가 길이 되면서 경계는 용해되었다.

오늘날, 지구 위에는 이념 갈등이나 종교 갈등으로 생명의 살상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최치원에게서 ‘한’을, 이제현에게서 ‘회통’을, 함허득통에게서 ‘현증’을, 그리고 초의 선사에게서 횡단 ‘매개’의 새 길을 배울 필요가 있다. 유불 교류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며 오늘의 삶을 새롭게 하고 개신(開新)하는 내용을 담아주고 보여 준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에서도 통달의 새 길이나 횡단 매개의 가교 길을 마련하고 뚫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 요인 중에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그 피해 또한 엄청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종교가 종교 간의 갈등으로 말마암아 인간을 불행으로 빠뜨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한 불행한 사태를 줄일 수 있으려면 모든 종교에서 소통하는 노력을 하고 통달하는 심연의 깊이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둘째, 오늘날 우리 주변의 종교 성향은 기존 종교 집단에 무관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음이다. 젊은 청년 사이에서 기존 종교 교단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첨단 과학기술의 디지털 영상 매개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의 전도는 개신해야 하며,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이 그 교류를 넓혀 이 문제를 함께 심사숙고해야 한다.

셋째, 종교 교리를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인은 이해할 수 있다. 종교 간의 마찰을 줄이고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리보다 서로 다른 종교인 간의 교류와 소통이 증진되어야 한다. 이 지구 위에는 종교 다원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관심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할 때 개벽의 상생이 가능해지며 더욱 화평한 세계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생태 위기, 사회정의, 인권유린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 간의 협력이 더욱 원활해져야 한다. 이 사회의 정의구현이나 환경보호 등과 같은 제 문제에 직면하여 종교가 선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종교 전통마다 상대방을 향한 창구를 개설하고 문을 개방하면서 항구적인 대화와 교류를 유지하고 그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다섯째, 종교는 상호 교류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성숙해지며, 통변의 논리를 개발하거나 통달의 희망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교단의 성숙과 올바른 전파를 위해서 다른 종교들이 하고 있는 일의 방식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각 종교에서 하고 있는 좋은 방식의 공유와 공동 반성이 요구된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일을 바라보면서 더욱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교류를 하다 보면, 종교 행위의 나쁨과 잘잘못에 대한 성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자기 신앙을 철저하게 비추어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면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 계기를 통하여 자기 종교 안에서만 구원을 외치며 다른 종교인을 개종하려는 입장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지며, 그 눈을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지향하게 된다. 이제 타인 또는 타자는 존재의 인식 비평으로 다가오게 된다.

타자와의 만남과 교감의 심연은 ‘한’의 위대한 통로를 열어 갈 것이며, 온 마음이 쉴 수 있는 터전을 일구고 가꾸어 더 나은 종교 형태로 개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교류와 소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요한 삶의 화두가 되고 있다. ■

 

김용환 / 1955년 출생. 서울대 철학박사. 현재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저서로 《만다라-깨달음의 영성세계》(열화당), 《탈현대사회의 가치와 명상》 (도서출판 개신), 《현대사회와 윤리담론》(충북대 출판부)와 그 밖에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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