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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멸과 차이의 철학 / 김영진
-타니 타다시(谷貞志), 《무상의 철학》 (권서용 옮김, 산지니, 2008)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김영진 1722dew@hanmail.net

   

타니 타다시(谷貞志),
《무상의 철학》
(권서용 옮김, 산지니, 2008)

1. 무상과 죽음 극복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제도권 학문 분류를 따르면 중국불교 전공자이다. 책 보는 것도 훈련이나 관성이 필요한지라 일삼아 하지 않으면 멀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때부턴가 필자는 인도불교 관련 논문 읽기가 무척 힘들다. 전공이라는 벽에 갇혔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때론 이런 벽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놀라운 책이 있다. 타니 타다시의 《무상의 철학》이 그렇다. 이 책의 부제는 ‘다르마키르티와 찰나멸’이다. 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하다. 주인공 다르마키르티(Dharmaki죚rti, 法稱)는 7세기 인도에서 활동한 불교논리학자이다. 그는 찰나멸의 논증으로 유명하다. 바로 찰나멸이라는 주제로 저자 타니 타다시는 철학을 시도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결코 불교학의 무엇이 아니다. 그 울타리를 저만치 뛰어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단순히 인도철학이나 불교논리학을 소개하려는 게 아니라 ‘순간적 존재’를 둘러싼 철학적 모험을 시도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는 다르마키르티를 불러와서 이 모험을 감행한다. 모험의 방식은 다르마키르티의 찰나멸 논증에서 보편적 철학 함의를 발굴하는 것이다.

그가 발굴한 것은 석관 속의 미이라가 아니다. 타니 타다시는 찰나멸을 순간적 존재성으로 고쳐 놓았다. 이것을 현대 철학의 용어로 고치면 ‘자기동일성’에 반하는 ‘자기 차이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천 수 백 년 전 존재한 철학 논의의 재현이 아니라 현대 철학의 최전선일 수 있는 까닭은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독창성 때문이다. 이 독창성은 찰나멸을 무상의 철학으로, 시간의 철학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렇다. ‘무상의 철학’은 시간의 문제를 다룬다. 돌려 말하면 단절과 연속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상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상으로부터 도피해서도 안 된다. 무상에 투철함으로써 비로소 실체화한 죽음의 공포가 무상해진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소설집 《외침》 서문에서 “절망이 허망하기는 희망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 세상에 희망 있다 노래하는 자도 거짓이고 절망뿐이라고 울부짖는 자도 거짓이다. 삶이 무상하다면 죽음도 무상하다.

타니 타다시가 알려 준 무상의 두 가지 의미는 이렇다. 첫째 “삶이 죽음에 의해서 단절된다.”라는 의미에서 무상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존재의 덧없음을 한탄할 때 쓰는 표현이다. 둘째 “무상은 무상을 통찰하여 청정한 적정에 도달했다.”라고 할 때 무상이다. 여기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경계선은 불탄다.

붓다는 ‘무상=고’를 ‘무상=적정’으로 전환함으로써 종교적 승리를 맛본다.
이렇게 무상을 투철하게 체험하는 것은 죽음 극복의 한 방법이다. 타니 타다시는 이것을 ‘안으로 초월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 극복은 영생을 향한 부질없는 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동하는 ‘죽음 공포’의 극복을 가리킨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비탄하고 걱정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다. 타니 타다시는 이어 말한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너무나 직접적이게 되면 죽음이 거기에는 없다. 붓다는 죽음의 비탄과 고통의 원인은 무상한 존재를 무상한 것으로 정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통찰했다.” 죽음에서 죽음만 보는 것. 이렇게 해서 죽음을 타고 육박하는 온갖 거짓을 내동댕이칠 수 있다.

2. 사물의 생동과 순간적 존재성

고개를 들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을 보라. 하지만 저것은 불변하는 주어가 행한 변신이 아니다. 매 순간 진행되는 자기 상실일 뿐이다. 바로 이 상실에서 새로운 존재가 출현한다. 타니 타다시는 말한다. “존재는 불가역적으로 상실되는 것을 보상으로 하여 비로소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의 의미를 생생하게 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존재의 의미는 매 순간 발생하는 존재의 몰락에 있다.

 다르마키르티에 따르면 이 낙차는 수렁이 아니라 존재의 율동이 된다. 나가르주나(Na죚ga죚rjuna, 龍樹)는 《중론》에서 존재자가 모두 공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한다고 말했다. 공하기 때문에 사물이 생동한다는 말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순간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는 생동한다고 말한다. 시간적 단절을 통해서 존재의 활동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다.

저자 타니 타다시에 따르면 다르마키르티는 실체를 철저하게 해체한다는 입장에서 중관학과 닮았지만 무아를 무시간적 이미지인 공이 아니라 순간적 소멸이라는 시간성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타니 타다시는 다르마키르티의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공이라는 표현보다는 ‘순간적 존재’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찰나멸 이론을 일종의 ‘단절의 사유’로 전유하고 있다. ‘단절’에 대한 사유는 철학사에서 꽤나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과학사를 기술할 때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은 연속이 아니라 불연속이라고 파악한다. 이것은 시간적 단절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하겠다. 단절은 단순히 종말이나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인 백무산은 《인간의 시간》에서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 간다.”라고 했다. 위대한 시대는 한 시대를 절단하면서 당도한다. 이렇게 단절과 연속이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인도철학사 내에서 다르마키르티의 찰나멸 이론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상키아 철학에서 말하는 프라크리티나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자아 그리고 보편적 성질, 언어의 영원성, 외계 실재론, 유물론 등과 싸우고 있다. 진리의 항상성을 주장하는 인도철학 전체와 맞붙고 있는 셈이다. 불교논리학자로서 다르마키르티의 더욱 놀라운 주장은 “‘인식 근거’(prama죚n.a)가 무상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프라마나는 일종의 진리 기준이다. 그것은 당연히 부동의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다르마키르티는 존재의 생동성을 이 진리 기준에까지 관철시킨다. 저자 타니 타다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리가 전제하고 있는 대상의 자기동일성은 시간성이라는 자기 차이성에 의해서 파괴된다. 다른 한편, 시간성의 자기 차이성을 증명하는 것은 논리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이 이율배반을 낳는 논리와 시간성 사이의 심연은 순간적 존재성 논증의 문제에서 주제화된다.” 이것이 다르마키르티의 가장 빛나는 지점일 것이다.

3. 비재(非在)와 부재(不在)의 갈림길

후라우왈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다르마키르티는 순간적 존재성을 세 가지 유형으로 논증한다. 첫째 ‘소멸로부터 추론’이다. 존재의 순간성은 외적인 여러 원인에 의하지 않고 존재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 근거해서 자발적으로 소멸한다는 것에서 추론된다. 둘째 ‘존재성으로부터 추론’이다. 존재의 순간성은 그 존재성으로부터 추론된다. 세 번째 ‘지각에 의한 증명’이다. 존재의 순간성은 지각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논증 과정에서 다르마키르티의 독특함이 드러난다. 타니 타다시는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논증으로 이 책을 끌고 간다.

세 가지 논증 가운데 첫 번째는 자발적 소멸이다. 이 말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서 소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멸은 비존재이다. 비존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것의 원인을 추적할 수 없다. 또한 원인의 결과로서 소멸이라면 소멸을 의도해서야 비로소 소멸이라는 결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소멸, 즉 비재는 의도와 무관하게 닥친다. 이 점이 중요하다.

타니 타다시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순간에 자발적으로 소멸한다. 존재는 비존재를 본질로 하여 그 자신 속에 비존재를 이미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멸이 자발적인 한 그 존재하고 있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한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은 다름 아니라 필연적 소멸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기 차이성이라는 현대 용어로 설명한다.

자기차이성은 ‘단절하는 순간’이며 단절하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가 발현할 수 있는 ‘연속’을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저자는 비재와 부재를 개념적으로 분리한다.

물론 이 두 개념이 전통적인 불교 술어는 아니다. 저자가 개념적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비재는 사체가 없는 죽음이고 부재는 사체가 있는 죽음이다. 부재는 ‘죽음의 있음’이다. 일본 교토학파의 창시자이자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는 ‘절대무의 장소’를 말한다. 니시다 연구자 허우성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참된 생명은 유의 기미가 전혀 없는 텅 빈 무의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힘차게 약동한다.

유의 기미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공간에서는 하나의 생명 사건은 방해받거나 손상당하고 만다.” 순백색의 캔버스일까. 타니 타다시는 니시다의 절대무는 비재가 아니라 부재에 속한다고 말한다. 절대무는 부재로서 공간적 장소이다. 주관과 객관을 부정하지만 그 부정이 일어나는 장(場)을 인정해 버린다. 그런데 비재는 바로 장(場)―부정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존재는 비존재를 본질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와 관련하면 순간적 존재성을 말할 수 있다. 존재는 선형적인 시간 위에 놓인 것이 아니다. 타니 타다시는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자발적으로 소멸하는 존재가 시간을 발생시킨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하나의 사건 위에 놓일 뿐이다. 여기서 사건은 결코 공간적 동일점이 아니라 스스로 차이화하는 시간성으로서 순간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타니 타다시는 다르마키르티의 논리학을 ‘존재의 논리학’이 아니라 ‘시간의 논리학’으로 명명한다. 그것의 목표는 분명하다. 존재의 논리학이 보인 “초시간적 주어의 존재를 해체함으로써 시간성을 탈회하는 것”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자발적 소멸을 언어 문제와 관련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포하(apoha)이다. ‘아포하’는 차이·배제를 의미한다. 언어는 대상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을 배제하는 차이’를 지시한다. ‘인간’이라고 하면 인간 아닌 것을 배제하는 형식이다. 아포하 이론은 불교논리학자 디그나가에서 시작한다. 그는 언어가 있다면 반드시 그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실재론이나 베다 등에서 언어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지시 대상은 허구일 뿐이다.

그런데 다르마키르티는 아포하 이론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룬다. 아포하 이론에서 말하는 배제로서 언어의 지시 대상, 이 “존재는 그 자신 자기동일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이외의 존재인 비존재를 배제하는 차이선이며, 그 차이화하는 작용선은 역의 시점에서 본다면 비존재가 존재를 배제하는 차이선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차이화라는 작용일 뿐이다. “일체의 언어 대상은 차이선 ‘/’이다.”

4. 순간의 존재, 차이의 존재

깨달음의 순간에 시간은 어떻게 될까. 타니 타다시는 깨달음의 순간은 이전 모든 인식 근거에 기초한 ‘시간’의 소진점이며 이 점에서 불연속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이라는 ‘지금, 여기’에 인식의 단절이 있고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 있다. ‘지금의 순간’은 분명 단절을 예견한다. 아니 예견이 아니라 단절은 현재다. 그래서 시간은 매 순간 이질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변증법은 질적 순간의 단절을 망각했다고 비판한다. 타니 타다시는 키에르케고르와 관련해서 “신앙은 연속 아니라 불연속을 비약하는 것이고 신앙은 나 자신이 끊임없이 비약하는 자기차이화를 의미한다. 실존은 자기차이화하는 시간성 그것이”라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반복을 사유한 철학자다. 저자에 따르면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은 동일한 존재를 향한 회귀가 아니라 차이를 향한 귀환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반복 자체를 새로운 사태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서 어떤 자유로 만들고 자유의 임무로 만드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차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유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무상이나 반복은 결코 한없이 되돌아오는 제자리 뛰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향해 날리는 끊임없는 배신의 칼날이다. 자신으로 회귀하고 수렴되는 중심화 혹은 주체화에 대한 맹렬한 거부이기도 하다. 탈중심화 탈주체화의 철학이다. 들뢰즈 같으면 리좀적 사유 혹은 유목적 사유라고 했을 것이다. 타니 타다시는 ‘부정적 차이선의 발산’이라고 했다.

다르마키르티의 ‘무상의 철학’은 분명 존재의 실상을 알린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객관 사실에 대한 확인 절차가 아니다. 앞서 ‘죽음 극복’이라고 했듯이 그것은 우리 실존의 문제다. 매 순간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이다. “죽음이라는 타자와 결정적 만남의 순간은 필연임과 동시에 우연이다.

 그것은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단념하는 비재의 순간에 생의 한복판에 가로놓여 깊게 각인된다.” 생의 한복판에 일어나는 죽음. 이 비재의 순간에 다시 새로운 순간이 섬광처럼 일어난다. 저자는 ‘회광반조(廻光反照)’라는 선가의 용어를 빌려서 이 순간을 설명한다. 죽음의 한복판에서 다시 생을 비춘다. 만약 우리가 순간적 존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비재의 순간을 되비추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자 서문에서도 밝혔듯 타니 타다시는 《찰나멸의 연구》라는 대저가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문적인 책 말고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찰나멸의 철학성을 설파하고자 했다. 《무상의 철학》은 바로 이런 의도로 쓰인 책이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지적한다. 맺는 글에서 그는 이 책이 “일반 서적으로는 너무 이론적이고 학술 서적으로는 너무나 주관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돌려주고 싶다. “일반 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심오하고 학술 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감동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 일 것이다. 첫째, 저자는 삶에서 붙잡은 절실한 문제를 자신의 학문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바로 성찰이다. 두 번째, 저자는 다르마키르티의 찰나멸 이론을 문헌학적인 사실 규명 차원에서 철학의 수준으로 한껏 끌어올렸다. 이것은 불교 공부하는 사람의 꿈이다.

타니 타다시의 감동적인 언설을 고스란히 옮긴 역자의 노고를 치하해야 할 것 같다. 고마울 뿐이다. ■

 

김영진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章太炎불학에서 개체와 윤리 문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근대사상과 불교》를 썼고, 《대당내전록(大唐內典綠)》을 공역했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연구공간 ‘수유+너머’회원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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