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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적 전개 / 임채광
임채광 대전신학대 교수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임채광 limchaikuang@hanmail.net

1. 머리말

오늘날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돈’이 아닐까? 돈 벌기 위해 배우고 돈을 위해 일하며 돈을 위해 싸운다. 경제공황, 실업, 교육 문제, 빈부 갈등, 사기, 살인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도 돈과 무관하지 않다. 일간지와 방송의 뉴스를 장식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배후엔 대부분 돈이 연관되어 있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돈을 어떻게 버는 것이 옳은 것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배우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와 같은 때,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의 품위와 질서를 위해서라도 철학과 사회적 규범이 필요한 시대이다. 전통적 가르침 중에도 우리는 서구 문화의 규범과 전통을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의 재물관에 관심을 기울여 보고자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돈은 무엇일까?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면 가난과 소박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를 닮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돈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중립적이므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면서,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청부론’과 예수의 삶이 그러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청빈한 삶 속에서 영적 타락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 ‘청빈론’의 논쟁은 최근 한국 교회의 큰 화두가 되었다.

그러면 성서는 돈과 재물의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재물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본다.

2. 성경에서의 돈

성경에는 재물, 돈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이 산재해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회적 이념이나 윤리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의도로 작성된 책이 아니다. 기독교인에게 성경은 하나님이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고 구현해 가는 과정이자 말씀을 통한 종말론적 현재의 실현 과정을 담은 존재론적 성격의 문헌이다.

이 시대에 돈과 재물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이듯이 성경에서도 돈의 사용은 생존의 필연적 도구로 표현되고 있다. 돈과 재물에 대한 묘사는 구약의 창세기부터 등장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고 나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 식물들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향해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라고 명령한 후 그 관리, 운영권을 일임하였다. 당시 인간은 인간 자신과 개인의 소유물을 의미하는 ‘재물’을 보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인간이 돈과 재물을 모으고 활용하게 된 계기는 선악과 사건 이후부터 이다.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과 풍요를 보장하는 온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이었다. 그런데 선악과의 범죄 행위를 통해 에덴동산에는 특히 인간과 세계는 결핍된 존재로 바뀌어져 버렸다.

범죄 행위의 동기는 의심이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의심이자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의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 대가는 가혹하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희의 생명과 풍요를 위해 준비하였던 바로 그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하고 선포한다. 수고의 소산 즉, 물질을 얻기 위하여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창 3:19)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물질은 이제 인간이 생존하는 데 보유해야만 하는 생존의 절대적 도구이자 전제가 되었다. 수고와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은 삶에 필요한 물질을 얻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수고의 고통을 통해 재물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언약을 허락하게 된다.

돈과 재물은 한편으로 축복으로 그려지며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지위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잊는 위험한 유혹이 되기도 한다. 돈과 재물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언급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에서의 재물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구약
구약성경에는 돈과 물질의 축복을 언급하는 내용이 신약에 비해 빈번히 그리고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재물관은 팔레스타인 유대 문화의 전통과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전승, 기술되어 온 성격이 짙은 만큼 단순히 종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기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시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준행하는 자에게는 그 집안 대대로 부요와 재물이 따를 것이라고 약속한 《시편》 112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시편 112:1-3) 《창세기》 13장 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금, 은이 풍부하였더라.”라고 하였듯이 사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은 모두 부자였다.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잃고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을지어다.”(욥 1:21)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욥도 그의 재산이 갑절이 되는 부를 얻게 된다. 솔로몬 왕 역시 “네가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조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3)라는 약속과 같이 성경 속 그 어느 왕과도 비교되지 않는 부와 명예를 누렸다.

축복이 단지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진 않으나 재물을 얻는 일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대가로 받는 축복이라는 점은 《신명기》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신 28:2~, 11~13) 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신약
신약의 핵심은 예수의 탄생에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와서 선포한 자 일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하나님으로서 이 땅의 왕으로, 통치자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기록들에는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예수 이외의 모든 현세적 가치와 물질들에 대해서 평가 절하하고 있다.

즉, 돈과 물욕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의 존재적 의미를 상대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에서도 현세적 축복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단,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마태 6:24) 말아야 하며, 영적 축복에 더 우위를 두라고 가르치고 있다.(고후 4:8) 이와 같이 신약에서는 의롭지 않은 물질이나 재물의 잘못된 사용에 대하서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나 희년 등과 같이 재물의 소유가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삶에서 드러내는 것을 가르치고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재물관이 드러나는,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9장에 나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태 19:23~26)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언어적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많은 재물을 가진 자 즉, 부자에 대한 예수의 관점이 나타난다.

부자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세속적 가치를 지니는 물질을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양보다 더 많이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생존까지도 책임질 수 있는 재물을 보유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부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으로 인해 언젠가 썩어 없어질 “배설물”(빌 3:7~9)과 같은 돈의 우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 6:24) 하고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재물은 같은 가치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조화되기 어려운 두 요소임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신뢰하고 그 위력에 의지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따라서 돈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대신 돈의 위력을 믿고 굴복하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신약에서 다루고 있는 ‘성육신’ 사건의 실천적 의미는 현세적 인간의 삶 속에 보여 주는 재물과 돈의 문제에 대하여 그 위력이 주는 영적 위험성을 경계하는 데 주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3. 기독교에서의 돈

교회나 기독교계에서 돈과 재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가르쳐왔는지 역사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특히 교회사를 통해서 그 몇가지 유형을 정리해 본다.

1) 초대 교회 : 공동체 사회
초대 교회의 모습은 신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서 5장에 걸쳐 당시 예수를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였던 생활과 이야기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돈과 재물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4~46) 예수 당시의 최초의 교회는 일종의 기독교도들의 믿음의 생활공동체였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모든 물건들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함께 나누는’ 재물을 공유하는 생활을 했음이 드러난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재물을 다루는 관점을 보여 주는 다른 기록들이 나온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2~35)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초대 교회의 재물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신앙적생활 공동체 사회였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모든 소유물을 공동체를 위해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 행위가 제도적 억압이나 강제적 질서에 굴복하여 행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에 넘쳐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다. 다만 이를 어기는 개인에게 도덕적 책임과 징벌이 없진 않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 성경에 레위족이었던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를 비교하고 있다. 바나바는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빈자를 위해 내놓았으나 아나니아는 그의 아내가 재물의 일부를 숨긴 채 전부라고속여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자 베드로는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하고 힐책한다.(행 5:1~3)

초대 교부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가 성도의 공동생활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듯이 자연은 만물을 모든 사람의 공익을 위하여 제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공동의 식물을 취하고 땅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소유가 되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산물을 내놓으시는데 사유재산은 이와 같은 순리의 거역이고 찬탈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재물을 획득하고 사용하지만 숭배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아나니아 부부의 행동이 사도를 분노케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고 다시 태어난 삶을 고백한 이들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재물을 더욱 탐하는 마음이 여전하여 영적 생활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성령이 충만한 믿음의 사람은 부를 공유하는 생활을 하지만 사탄에 매여 있는 자는 부의 이기적 사용을 위해서 위선과 거짓을 행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고 가르친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재물을 섬기는 대신 그들은 모든 소유물들을 가져다가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고 언급한 기록이 나온다.(행 4:35) 이는 세상의 재물을 발로 밟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쉽게 빠져드는 세속적 가치에 유혹되지 않는 것, 특히 배금주의적 세태를 경계하였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이다.

셋째, 재물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였다.

가난하고 핍절한 사람을 위해 재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부의 분배와 개인별, 가족별 불평등의 해소를 가능하게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소유나 재산의 포기를 종용한다거나 가난과 청빈을 종교적 이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물질적 우상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 소유욕과 탐욕의 포기를 통해,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와 공유하는 삶의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이에 대하여 ‘우리가 사유재산을 보유해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 일정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사유재산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인간의 죄된 성품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 불가피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도 동시에 존재하였다.

2) 중세 교회 : 금욕주의적 물질관
중세 가톨릭교회의 재물관은 금욕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당시의 문화나 사상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중세의 물질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첫 번째 주요 경향은 고대 희랍의 세계관이었다. 중세를 대표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사상사적 뿌리를 플라톤(Plato, BC 428~BC 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에서 찾듯이 희랍 사상과 세계관은 중세 기독교와 교회에 문화적 토양의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저서명이기도 했던 ‘Imitatio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 즉, 그리스도를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였던 신앙인의 움직임도 그 배후에 늘 함께하였다. 특히 인간의 내적 생활에 대한 깊은 교훈과 그리스도의 이상을 가르쳤다. 중세 ‘금욕주의적 재물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물질은 영혼보다 천하다고 가르쳤다.

이는 희랍적 세계관의 영향과 무관치 않았다.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이나 그것을 생산하는 행위는 노예나 기계가 하는 것이고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물질과 연관하여 손을 더럽히지 않는 자라고 보았다. 그들은 인간에 대하여 영육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영을 육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단정하였으며 물질이나 재물의 가치보다 도덕적 영적 가치를 더욱 존중하였다. 또한 사색과 정신노동을 하는 이들이 육체적 노동에 매여 있는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노예나 농민의 노동은 타율적, 의존적 존재의 과제로 간주하였다.

토미즘(Thomism)은 희랍철학이 낳은 중세의 대표적인 사상적 유산이었다. 이들은 영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를 분리하고 구분하였는데, 그 관점에 따르면 돈 또는 재물은 영적 속성을 갖지 못한 것이자 타락한 세계의 산물로 보고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의 재물 이외의 것은 취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둘째, 청빈과 자의적 빈곤을 도덕적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의미를 가난에서 찾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중세 교회와 기독교 사상의 큰 흐름을 이끌었다.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라고 가르치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마구간 구유에서 탄생한 사건은 우연으로 볼 수 없는 내재적 의미가 있다는 견해이다. 그 해답은 그의 생전 행적에서 보여 주었다고 보고 그것이 바로 ‘빈곤한 삶’이며, 예수는 ‘빈곤의 삶을 실천한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하였고 집도 그 어떤 소유물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사실을 통해 볼 때 일리가 있는 시각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고전 11:1)가 되는 것이며 “주를 본받는 것이 믿는 자의 본이 된다”(살전 1:6~7)라고 가르친다. 중세의 사색가들은 ‘자의적 빈곤’ 또는 ‘청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았던 것이다.

셋째, 수도 행위와 공동체생활을 권장하였다.

자아를 온전히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자발적 빈곤과 영적 가치에 의해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수도사의 길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수도원 운동을 일으킨 성 프란시스(St. Francesco, 1182~1226)는 중세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하나였는데,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악의 근원이 되는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까지 주장하였다.

‘빈곤은 나의 배우자’라고 여겼던 그는 구걸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구원의 적이라고 보고 극단적 청빈과 걸식으로 예수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재물의 소유권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유재산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권이라고 보고 다만, 개인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동의 가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성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물질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으나 그 권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전제하고 그 영안의 빛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한다.

3) 근대 교회
근대사회의 핵심적 요소로서 인본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인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대한 신뢰이자 시민 개인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었다.

이로서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비합리적인 전통 가치의 비판과 새로운 합리적 세계를 희구하는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교회와 기독교 역시 변화하게 된다. 세속화와 현실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은 근대 이후의 기독교 문화에 주요 특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로마의 사제주의는 ‘만인제사장설’로 대체되고, 교조적 신비주의 대신 신앙인 스스로의 책임과 합리적 결단을 중시하는 금욕주의적 윤리관이 자리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 신학자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은 경제 질서의 내재적 구조의 규명이나 경제이론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진단 또는 해결하려는 의도보다는 기존의 가톨릭신학의 경제관에 대한 비판적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중세 봉건체제를 지탱하는 가톨릭의 이념적, 제도적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촉발되었고, 동시에 중세 수도원 문화에서 보듯 희랍철학의 영향권 아래 형성된 이원론과 신학 사상의 관념적 경향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그 촉매 역할을 하였다.

(1) 루터의 경제관 : 소명과 책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에 세 가지의 영역을 세워 놓았는데 그것은 각각 가정 영역, 국가 영역, 교회 영역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경제란 인간의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인데, 경제활동은 특히 가정 영역의 유지와 보호를 위한 1차적 전제로서 중요하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에게 경제활동을 하고 돈을 번다는 일이 특히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에 부응하고 사용되는 긴요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보았다. 단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창조의 질서에 귀속되고 부름 받음에 대한 은혜의 대가로 이웃을 위해 노동하고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

직업은 독일어 ‘Beruf’의 유래와 연관되듯,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음의 징표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게으를 수 없으며 이웃과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재물을 획득하는 일이 그가 처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바른 자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책무를 다하고 협력하는 일은 당연하고 신성한 가치이다.

인간적 욕구와 영적 가치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심판자는 누구인가? 루터는 이에 대하여 “각 사람이 각자의 양심에 따르도록 맡겨 두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인 관심은 각자가 자신의 신앙을 더욱 강화하는 일”(1520)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이에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하여 강하게 경계하였다. 당시 독일의 영주와 자본가들은 평민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그들은 이자를 떼는 고리대금업자들이며 강도들이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스스로 귀공자 행세를 하고 경건한 시민인 척한다.

그들은 영락없는 강도이며 도적들이다. ……그들은 마을이나 인근에서 뿐만 아니라 전 독일에서 노략질을 한다.”(1520) 그는 돈을 갖고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는 사악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만일 교회가 이자놀이를 한다면 당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한다.

돈을 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될수록 귀한 것인데, 축산업이나 농업과 같이 하늘의 질서에 영향을 많이 받는 방법으로 재물을 획득하는 것이 장사나 중간 유통과 같이 사람 간의 관계에 의존도가 높은 일보다 더욱 귀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의 요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신앙인 개인의 결단과 성실 그리고 책임으로 보답하는 태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종국적으로 세속적 윤리를 경시하지 않고 세속적 의무에 충실할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세상의 가치가 지나쳐 사회가 방종과 퇴락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는 중요하다. 물신주의나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리와 도덕은 쉽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제 엄격한 시민의 규율을 제공해 줄 방안은 교회밖에 없다고 보았다. 교회는 유일하게 신을 두려워하고 세속사회의 규범적 틀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칼뱅의 재물관: 청지기론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금욕주의적 물질관이나 가난을 최고의 모범으로 삼았던 중세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버가 칼뱅을 자본주의의 건축자 중 하나로 단정한 것처럼 그는 재물이나 돈이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도구이고 수단이라고 보고 매우 중시하였다.

돈과 재물은 하나님의 큰 뜻이며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은사 그 자체이다. 돈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과 의도하는 바를 계획하고 달성한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에 의한 구체적 지배 권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돈의 사용가치에만 관심을 갖는데 그치지 않고 돈의 영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돈의 참된 가치를 아는 자에게 돈과 재물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주어진 것의 ‘관리자’이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청지기’이다. 그렇지만 돈은 늘 인간을 유혹하고 그 본질을 잊도록 시험한다. 세속적 가치와 세속적 욕구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대체하고 망각한 채로 살아가도록 조장한다. 그렇다면 청지기로서의 삶은 무엇을 말할까?

재물 문제와 관련하여 비엘러(Andre Bieler)는 캘빈의 사상적 출발점을 ‘Imago Dei(하나님의 모상)’개념과 연관시키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한 의미 속에서 돈과 인간, 빈부의 문제에 천착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인간 자신의 참된 발견에는 물론이며 이웃과 공동체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중요한 전제라고 보았다.

이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부요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열심히 순종한 자에게 재물과 부요가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나 성도들 사이에도 가난한 자와 부자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음의 질서를 거부하고 세속의 가치와 질서에 부응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창조의 목적에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이와 같이 성경은 인간의 평등한 가치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배치되지 않음을 가르친다. 부자는 응당히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의 재화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부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처럼 삶에 고통을 겪는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며 자신의 영혼의 존귀함을 망각하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 하며, 부자에게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줘야 한다.

칼뱅이 주장하였던 ‘청지기’로서의 사명이란 재물을 많이 보유한 자는 동시에 더 많은 하나님의 뜻을 수종 들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만약 부자가 예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은 죄가 된다. 도둑질이란 남의 재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 속에 내밀히 숨겨진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분배의 의무를 거부하는 일이다. 돈의 소유에는 늘 책임이 수반된다.

칼뱅이 볼 때 하나님의 공동체는 늘 물질적 상호 교환을 중시하였는데 이와 같은 균등 분배의 원칙이 부유한 자들의 검소 생활과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베버의 지적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 청지기적인 책임과 근검절약, 절제의 윤리는 현대 자본주의 발달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칼뱅의 재물관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칼뱅은 돈과 재물을 창조의 원리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재물을 통해 세상에 뜻을 관철한다고 보았다. 둘째, 재물을 인간이 죄와 현세적 우상 속에 빠지게 유혹하는 도구일 수 있음을 경계한다. 정직하게 순종하고 감사하는 자들을 위한 축복이고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질서를 망각한다면 죄악의 도구가 된다. 셋째, 재물을 칼뱅은 공동체와 평등의 가치로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평등의 원리에 따른 분배와 기부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적 사랑의 징표라고 보았다.

4. 맺음말 : 우리에게 주는 교훈

지금까지 우리는 재물이 지니는 성경적 의미와 기독교적 관점들을 교회사적 맥락에서 정리해 보았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앞서 언급한 ‘청부론’적 요소와 ‘청빈론’적 요소는 모두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 교회사를 관통하는 기독교의 사상적 핵심이자 성경에 담긴 재물관의 일반적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돈은 하나님의 것이다. 재물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위해 부여한 선물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벌고 사용하는 방법 또한 세속적 가치를 따라서는 안 된다. 사회적 지탄이 되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한다거나 사악한 일에 재물을 사용하는 일은 하나님의 물질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복원하도록 가르친다.

둘째, 돈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위해 우선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빈자를 배려하고 돕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창조된 인간은 헐벗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구별이 없다. 창조된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궁핍한 자를 위해 돈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속에서 공동체적 삶을 꾸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 보듯 개인의 능력과 재능은 경제 공동체의 자산이었다. 동시에 재물이 개인의 부요와 치부를 위해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아무리 유능하다 하더라도 개인보다는 사회적, 공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기독교의 경제관을 보여 준다.

넷째, 참된 구원은 돈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돈을 위해 사는 것은 허망하고 세속적 가치의 노예로 전락하는 삶이다. 돈에는 세속의 논리로 새로이 등장한 가치가 숨겨져 있다. 그 돈의 가치에 편승해 그것을 위해 매진하던지 하나님의 구원과 미래의 약속을 믿고 추종하던지 결단해야 한다.

돈을 벌지 않을 수 없지만 돈 버는 일이 목적일 수 없고, 직업을 위해 배우고 일할 수 있지만 돈 벌기 위해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 대한 배려와 자선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책임과 사명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임채광 / 1968년 충남 공주 출생. 한남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91년 독일 괴팅엔(Go..ttingen)과 캇셀(Kassel)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캇셀의 슈미트-코바르칙(Wolfdietlich Schmied-Kowarzik) 교수의 지도 아래 철학석사(1997)와 철학박사학위(2001)를 취득했다. 전남대학교 학술연구 교수와 한남대학교 철학과의 강의전담 교수를 거쳐 현재는 대전신학대학교 철학 교양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학적인 관심 아래 현대 문화와 기술문명 관련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학위논문이었던 Institution-Befreiung-Kommunikation과 《아놀드 게엘렌의 문화철학》, 《인격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격의 의미》(공저) 등 다수의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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