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시로 / 이태승 옮김

편집자
* 이 논문 〈如來藏思想と本覺思想〉(《駒澤大學佛敎學部硏究紀要》第63號 2005年, 3月)은 저자가 1986년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如來藏思想は佛敎にあらず)를 일본 인도학불교학회에 발표한 이후 제기되었던 비판불교를 둘러싼 논의들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비판불교 논쟁을 둘러싼 핵심 쟁점을 소개하기 위해, 저자에게서 수학한 이태승 교수의 번역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1. 여래장 사상과 불교

나는 1986년에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논문1)을 일본 인도학불교학회에서 발표하였다. 먼저 나의 이 생각에 대하여 설명하고, 다음에 본각사상(本覺思想)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나의 주장은, 세 가지를 계기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나는 1986년에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논문1)을 일본 인도학불교학회에서 발표하였다. 먼저 나의 이 생각에 대하여 설명하고, 다음에 본각사상(本覺思想)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나의 주장은, 세 가지를 계기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첫째로, 여래장 사상이란 무엇(a)인가, 무엇(a)을 나는 여래장 사상이라 간주하느냐는 것과 둘째는, 불교란 무엇(b)인가, 무엇(b)을 나는 불교라고 간주하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로, a와 b는 동일하지 않다는 세 가지이다.

이 가운데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불교학이 탐구하는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x를 불교라고 생각한다.’라는 주관적인 판단의 형식으로밖에 그 해답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주관적인 판단은 불교도들이 불전(佛典)으로서 전승해 온 문헌에 설해진 내용에 어느 정도 근거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한 나의 해석을 말하면, 나는 연기설(緣起說)을 불교라고 생각한다. 불교란 연기설이라는 이해는

(1) 나는 연기설이 불타 교설의 근본 취의이며, 그 이론적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며, 근본불교의 근본 사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2)

라는 우이 하쿠주(宇井伯壽)의 말에서도 나타나듯 일본의 불교학계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지만, 연기설에 관한 나의 해석의 특징은 12지연기를 중심으로 하여, 연기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시간적 인과관계라고 이해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나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설하는 화엄사상에 기초하여 제시되었다고 생각되는 우이의 ‘상의성(相依性)’이라는 해석은 석존이 설했다고 추측되는 연기설의 해석으로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이해이다.

또 나의 견해에 의하면, 연기설은 무아설(無我說)을 함의한다. 즉 연기지인 각각의 법(dharma 속성) 즉 초기체(超基體, super-locus)는 그것이 소속되어야 할 기체(基體, dha-tu, locus)인 아(我, a-tman)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명 등의 연기지는 소멸할 수가 있다.

무명 등이 소멸하는 까닭에 고(苦)가 멸하며, 여기에 고의 멸에 이르는 종교적 시간이 성립한다. 즉 연기설은 무아설에 근거하여 종교적 시간을 지시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우이는 연기설 또는 불교에서 시간을 배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종교적 시간을 지시하는 것이야말로 연기설이라고 생각한다.3)

이와 같은 나의 해석은 근년 일본의 불교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해석과 대립하는 것이다. 즉 나카무라는 《수타니파타Suttanipa-ta》 등의 운문 경전을 원시불전의 최고층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원시불교의 사상과 석존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방법에 의거하여,

(2) 첫 번째로, 불교 그 자체는 특정의 교의라는 것이 없다.4)
(3) 초기불교에는 아트만을 부인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트만을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5)

등으로 서술하여, 불교를 연기설이나 무아설로가 아니라 오히려 아설(我說, a-tma-va-da)로 해석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나카무라의 방법과 해석을 상세히 비판했지만6), 그 요점은 나카무라가 원시불전의 최고층으로 중시하는 《수타니파타》 등의 운문 경전은 아설을 설하는 ‘고행자 문학’(苦行者文學, ascetic literature)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7)

또 연기설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 나의 견해에 대해서는, ‘올바른 불교’와 ‘잘못된 불교’를 구별하여 불교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의 말을 빌려 사용하면 ‘본질주의의 잘못(essentialist fallacy)’8)이며, 무자성(無自性)·무본질(無本質)을 설하는 불교와는 모순된다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사실로서 불교라고 설해져 온(또 설해지고 있는) 다양한 교설·사상·실천은 모두 불교라고 인정하는 견해와 연결될 것이지만, 스에키(末木文美士)가 말하듯이9) 이 견해에서는 “자신이 불교라고 말하기 때문에 불교이다.”라는 무원칙주의로 귀결할 것이다.

또 무자성·공을 단순히 무주장(無主張, a-pratijn~a-)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도, 나에게는 올바른 공의 이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확실히 《근본중송》 (13-8)에는 ‘공성(空性)의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치료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에 근거하여 ‘공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실재는 유(有)도 무(공)도 떠나 있다.’라는 공의 이해, 즉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이나 티베트의 ‘이변중관설(離邊中觀說)’에 따른 공의 이해가 성립될 것이지만, 이와 같은 공의 이해를 부정하여, 중관파에게 그리고 불교에는 공과 연기라는 주장(pratijn~a-)이 있다고 역설한 사람이 쫑카파(Tsong kha pa)였던 것이다.10)

그런 까닭에 이 쫑카파의 공 이해를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로부터 보면, 윌리엄스에 의한 ‘본질주의 잘못’이란 지적은 부적절한 공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공이라는 주장도 또 집착이다.’라는 이해는, 반드시 유(有)의 입장에 접근해 간다. 이 점은 이토(伊藤隆壽)의 ‘도(道)·이(理)의 철학’의 가설11)에 의해서도 승인되듯이, 삼론종의 길장(吉藏)에게 여래장 사상이 본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길장의 사상은 여래장 사상의 본질적인 논리인 dha-tu-va-da(기체설)를 구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2)

또 윌리엄스와 유사한 입장에서 마에다(前田惠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4) 최근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학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여래장 사상도 불교이며, 그것이 불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역시 불교를 함께 논하고 있는 것이며, 여래장 사상이 불교가 아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것만이 옳다라고 말해, 상대를 비난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불교가 아니다13).

이 논술은 비논리적인 것이라 생각되지만, 마에다에 의하면, 여래장사상이 불교인 것은 절대로 확실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쪽은 “이것만이 옳다고 말해, 상대를 비난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불교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일본의 소위 ‘가마쿠라(鎌倉) 신불교(新佛敎)’의 조사들 가르침은 거의 모두 불교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2. 여래장 사상과 dha-tu-va-da

여래장 사상이란 무엇인가 하면, 나는 그것을 dha-tu-va-da(기체설)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 불성 사상이 아니라 여래장 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논의하는가 하면, 이것은 ‘불성(佛性, buddha-dha-tu)’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열반경(涅槃經)》보다도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이란 말을 사용한 《여래장경(如來藏經)》 쪽이 더 오래되었다고 하는 이유에서다. 즉 《여래장경》으로부터 《열반경》,《승만경(勝?經)》,《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으로 발전하여, 《보성론(寶性論)》에서 결실을 맺어 가는 사상 조류를 표현하는 말로서, 불성 사상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카사키(高崎直道) 박사는 《여래장 사상의 형성》(1974)에서, 작업가설적으로 《보성론》의 교리 내용을 여래장 사상이라 규정하고, 《보성론》에 인용된 여러 경전을 근거로 하여 여래장 사상의 형성 과정을 밝히고, 그것에 의해 여래장 사상을 인도불교 연구의 한 분야로 확립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여래장 사상이라는 용어의 전거가 된 것이 《능가경(楞伽經)》의 여래장설(tatha-gatagarbha-va-da)과 법장(法藏)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의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이라는 말이었다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14)

이것에 대하여 내가 여래장 사상이 dha-tu-va-da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래장 사상의 본질적인 논리 구조를 dha-tu-va-da라고 간주한다는 의미로, dha-tu-va-da라는 말이 인도불교 문헌에 발견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dha-tu-va-da란 어디까지나 여래장 사상의 논리적 구조를 나타내기 위한 가설이지만, 이 가설을 나는 주로 《승만경》, 《법화경》<약초유품(藥草喩品)>, 그리고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의 내용에 근거하여 구상한 것이다15). 특히 다양한 식물이 대지를 기체로 하여 생긴다고 설하는 <약초유품>의 비유는 이 가설을 구상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 《대승장엄경론》은 유가행파 즉 유식파의 기본적 문헌이지만, 여래장사상도 유식사상도 모두 dha-tu-va-da로서, 중관파 계통의 su-nyata--va-da와는 대립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기본적 이해이다. 이 dha-tu-va-da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 ‘dha-tu’란 ‘놓는 장소’ 곧 기체(locus)[L]를 의미하며, ‘dharma’란, ‘유지되는 것’ 곧 초기체(super-locus)[S]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그림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래에 있는 기체[L]와 위에 있는 초기체[S]의 둘로 구분된다. 이 dha-tu-va-da 구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L은 S의 기체이다.
② 따라서 L은 S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다].
③ L은 단일이지만, S는 다수이다.
④ L은 실재이며, S는 비실재이다.
⑤ L은 S의 본질(atman)이다.
⑥ S는 비실재이지만, L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또 L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재성을 가진다. 또는 실재성의 근거를 갖는다.

따라서 dha-tu-va-da란 “단일한 실재인 기체가 다수의 법을 생기게 한다.”라고 주장하는 설로서, 발생론적(發生論的) 일원론(一元論) 혹은 근원실재론(根源實在論)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dha-tu-va-da가 먼저 아트만(a-tman)론 즉 아설(我說)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여래장 사상이란 기본적으로는 힌두교 아트만론의 불교판(Buddhist version)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힌두교의 아트만론이 특히 대승불교 성립 이래 불교 내부에 침입하여 불교적 표현으로 위장하여 성립한 것이 여래장 사상이라고 본다(따라서 남전불교에는 기본적으로 여래장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반경》과 《승만경》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德)을 긍정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가운데 보다 근본적인 《열반경》의 아트만론에 대하여 논하고 싶다16). 먼저 담무참(曇無讖) 역과 티베트 역을 비교하면, 《열반경》의 옛 형태를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법현(法顯) 역의 <순다품(純陀品)>에는

(5) 如來法身 非穢食身(大正藏 12, 860b11)

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여래는 법신으로 육신(예식신)이 아니다”라는 주장이야말로 《열반경》 독자의 설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경은 ‘여래=법신’을 a-tman(我)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즉 법현 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6) 彼佛者是我義 法身是常義(大正藏 12, 862a13-14)
(7) 當知 我者是實 我者是常住 非變易法 非磨滅法 我者是德 我者自在(同, 862a13-14)
(8) 當知 如來常住 非變易法 非磨滅法(同, 865a9-10)

이상 네 개 경문에서 다음과 같은 등식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여래=법신=아=상주=실=비변이법=비마멸법=자재

즉 “여래는 법신으로, 변이도 마멸도 하지 않는 상주인 아(我)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확한 아트만론이 《열반경》에 설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살리 킹(Sallie King)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9) My first conclusion, then, is that the assertion concerning Buddha-nature thought as a form of dhatu-vada is false, for Buddha-nature is a soteriological device and is ontologically neutral.17)

즉 《열반경》에 설해지는 ‘여래=법신=불성’은 결코 ‘존재론적으로 중성(中性)’인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론적인 실재 즉 영원불변의 아트만인 것이다. 여래장 사상은 “비난의 여지도 없는 불교적인 것이다(impeccably Buddhist).”라고 하는 살리 킹의 성급한 주장이, 중관사상을 기조로 하는 티베트불교와 비교하면, 여래장사상을 주류로 하는 중국·조선·일본의 동아시아 계통의 불교사상을, 불교로서는 정통적인 것이라고 옹호하려는 호교적(護敎的) 의식(일본의 다수 불교학자들도 지니고 있는 호교적 의식)에 의해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트만론이 《열반경》에서 명확히 긍정되고 있는 이상, 불성(佛性)을 ‘구제론적 방편(救濟論的方便, soteriological device)’이라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연구 대상에 대하여 비판적 시점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옹호하거나 찬미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불교학자가 일본불교를 대승불교 발전의 구극(究極)이라고 찬미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잘못이 반복될 것이다.

또 여래장 사상의 하나의 기점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는 《여래장경》도 아트만론을 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곧 이 경의 주제는 “연화(蓮華, padma) 가운데 여래가 있는 것과 동일하게 일체중생 가운데 여래가 있다.”라고 설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되지만, 여기에서 연화란 ‘심연화(心蓮華)’ 즉 심장(心臟, hr.daya)을 의미할 것이다. 곧 “연화의 형태를 한 육단(肉團)인 심장 안에 아트만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우파니샤드(Upanis.ad)》 이래 아트만론의 정설이기 때문에, 《여래장경》에서 연화 속에 있는 여래라고 한 것은 심장 가운데 아트만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된다.18)

따라서 ‘여래=아’라는 《열반경》의 명확한 아트만론은 《여래장경》에서 불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던 아트만론을 명확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심장이 연화의 형태를 한 육단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나는 “적육단상 유일무위진인(赤肉團上 有一無位眞人)”이라는 《임제록(臨濟錄)》의 적육단이 심장, 무위진인이 아트만이라 생각한다. 곧 《임제록》에 나타난 임제의 사상은 아트만론이라 생각한다.19)

이상으로 여래장 사상을 아트만론이라 보는 사견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다음에 여래장 사상을 차별사상(差別思想)으로 간주하는 나의 견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래장 사상은 ‘일체중생여래장’20)이나 ‘일체중생실유불성’으로 설하는 까닭에 일반적으로 평등사상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열반경》의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이 경의 담무참 역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11) 一切衆生皆有佛性 以是性故 斷無量億諸煩惱結 卽得成阿횽多羅三?三菩提 除一闡提(大正藏 12, 404c4-6)
(12)彼一闡提雖有佛性 而爲無量罪垢所纏 不能得出 如蠶處繭 以是業緣 不能生於菩提妙因 流轉生死 無有窮已(同, 419b5-7)

여기에서 ‘제일천제’라는 말이 문제가 된다. 이 말을 ‘일천제는 불성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다. (12)에 ‘피일천제수유불성’이라고 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란, 일천제를 무엇으로부터 제외하는 표현인가 하면, 그것은 ‘성불(成佛)할 수 있다’라는 것, 즉 (11)에서 ‘득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成阿횽多羅三?三菩提)’, (12)에서 ‘능생어보리묘인(能生於菩提妙因)’이라 설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제외하는 표현인 것이다.

즉 일천제는, 불성은 가지고 있지만 영구히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부등식을 설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실유성불 ≠ 일체개성

즉 《열반경》은 ‘일체중생실유불성’은 설하고 있지만, ‘일체개성(一切皆成)’ 즉 ‘일체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설하는 것이 아니라, ‘일분불성(一分不成)’ 즉 ‘일체중생 가운데 일부분(일천제)은 영구히 성불할 수 없다.’라는 견해를 설하는 것으로, 이 견해를 나는 차별사상이라 부른 것이다.

물론 나로서도 도생(道生)이 ‘일천제성불’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과 담무참 역의 40권 《열반경》 가운데 제11권 이후의 30권 부분 즉 법현 역과 티베트 역과의 대응이 없는 부분에, 일천제의 성불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13)以佛性故 一闡提等 捨離本心 悉當得成阿횽多羅三?三菩提(大正藏12, 505c14-16)
(14)一闡提輩 亦得阿횽多羅三?三菩提(同, 519a7-8)

그러나 이 부분은 명확히 증광(增廣)된 부분이며, 그 원전이 인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도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열반경》의 본래의 입장이 “일천제는 영구히 성불할 수가 없다.”라는 ‘일분성불’의 입장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일한 것은 삼승각별설(三乘各別說)을 주장하는 유가행파의 《대승장엄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이 논서는 어느 부분에서는 ‘일체중생여래장’(IX, 37)이라고 설하면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무인(無因)’(III, 11), 즉 영구히 열반할 수 없는 중생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리로서는 평등을 설하면서도 현실로서는 차별을 긍정하는 입장은 바로 dha-tu-va-da의 본질적인 기초를 이룬다. 왜냐하면 dha-tu-va-da에서 기체(L)의 단일성(평등)은 초기체(S)의 다수성(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확고한 것으로서 유지하고 근거 지우는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곧 ‘불성’이라는 기체의 단일성(평등)이 그 위에 놓이는 ‘종성(種姓, gotra)’이라는 초기체의 다수성(차별)을 근거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 “기체의 단일성(평등)이 초기체의 다수성(차별)을 근거 지운다”라는 dha-tu-va-da의 구조는, 실은 힌두교의 일원론(a-tman론)의 근본 구조이며,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도 이 구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먼저 대승불교에서, 어떤 단계부터 특히 유가행파에 의해 아마도 힌두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빈번히 사용하는 ‘sama’(평등)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싶다.

이 말은 ‘평등한’(same, equal)을 의미하지만 ‘평등한’이란 또 ‘하나’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곧 ‘sama’라는 말은 일원론과 밀접하게 사용되어, 일원론을 지시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21) 이 점을 명시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편찬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그 핵심되는 부분이 성립되었다고 생각되는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라는 힌두교의 성전이다.

이 문헌에서는 ‘sama’라는 말이 극히 많이 사용되어, ‘sama(평등)’은 바로 《바가바드기타》의 중심적인 테마가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는 결코 현실의 차별을 부정하는 문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고 옹호하고 있다. 이 문헌은,

(15) 4성제도(ca-turvarn.ya)는 나(Kr.s.n.a=神)에 의해 만들어졌다.(IV, 13)

라고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극히 차별적인 ‘평등’설도 설하고 있다.

(16) 현자는 지혜와 수양을 갖춘 바라문에게서도, 소·코끼리·개·개를 먹는 자(s-vapa-ka)에게서도, 평등한 것(sama)을 본다.(V, 18)

아마도 이 시 이상으로 힌두교에서 ‘평등’의 주장이 차별사상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즉 여기에서 ‘평등한 것’에 대해 S.an.kara는 ‘단일(eka)하고 변화하지 않는 브라흐만(brahman)’22)을 의미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면 이 시는 ‘일체중생에게 단일한 브라흐만이 있다.’라고 설하는 것이 되지만, 이것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라는 《열반경》의 주장과 구조가 일치한다.

그러면 이 시에서 현실의 차별은 부정되는가 하면 완전히 반대이다. 즉 거기에서 ‘s-vapa-ka’란 문자 그대로 ‘개를 요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Radhakrishnan은 이것을 ‘outcaste’라고 번역하고 있다.23) 그들은 카스트제에 있어서 최하층의 사람들로, (16)의 시에 열거되어 있는 순서를 고려하면, 개보다도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는 ‘단일(평등)한 실재가 현실의 차별을 근거 지운다.’라는 dha-tu-va-da의 기본적인 구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래장사상을 단순히 평등사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는 경문뿐만 아니라, 《열반경》 그 자체를 읽어 보길 바란다. 예를 들면 담무참 역 《열반경》에는,

(17) 一切女人 皆是衆惡之所住處(大正藏 12, 422a16-17)

라는 문장이 있지만, 이 문장 뒤에는24) 더욱이 한심스러울 정도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을 읽으면, 《열반경》이 평등사상을 설하고 있다는 등으로 단순히 찬미할 수 있는 논자는 없어질 것이다.

이리하여 여래장 사상은 차별적인 아트만론인 dha-tu-va-da를 구조로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불교의 본질인 연기설은 이 dha-tu-va-da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구상된 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3. 본각사상과 불성 현재론

본각사상에 대하여, 나는 1988년에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18) 더욱이 ‘본각사상’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이 말이 오늘날 일본에서 꽤 넓게 쓰여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 자신은 이 개념에 의해서는 하물며 천태본각법문의 사상적 해명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달리 논한 바와 같이, 천태본각법문의 《삼십사개사서(三十四箇事書)》에는 ‘불성현재론(佛性顯在論)’에 의해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 dha-tu-va-da)’을 비판하는 곳이 있지만, 이 비판은 역시 천태본각법문에 속하는 《진여관(眞如觀)》에 향해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사정이 있다.

그런 까닭에 더 이상 ‘본각사상’이라는 말은 엄밀한 학문적 논의에 있어서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현재 생각이다.

특히 본각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동반되는 폐해는 ‘본각사상’에 관한 논의라는 것이, 인도불교의 여래장 사상과 분리하여 행해지고 동시에 행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연구자나 일반 독자에게 품게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단순히 일본불교와 일본의 자연 찬미로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불교학자는 역시 여래장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해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25)

여기에 제시된 나의 생각은 현재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본각사상’이라는 말은 1920년대에 시마지(島地大等)에 의해 일본 불교학계에 도입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금일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학자들(慈弘, 田村芳朗, 淺井圓道, 末木美文士, 花野充道, 大久保良峻, Jacqueline Stone 등)에 의해 ‘본각사상’을 둘러싼 뛰어난 연구가 축적되어 왔음에도, ‘본각사상’은 일찍이 한 번도 명확히 규정된 적이 없었으며, 또 그것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의 기본적 이해이다.

내가 ‘본각사상’이라는 용어의 타당성을 의심하게 된 것은, 하카마야(袴谷憲昭)의 설에 의문을 품게 된 것에 연유한다. 곧 하카마야는 1989년의 《본각사상비판》에서 “본각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본각사상 비판’을 전개하여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당초 이 주장에 찬동하고 있던 나도, 점차 이 주장의 비논리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즉 문제의 발단은 그가 ‘본각사상 비판’을 개시한 1986년의 〈차별사상을 만들어낸 사상적 배경에 관한 사견〉26)이라는 논문에 있다.

이 논문에서 하카마야는, “도원(道元)은 ‘본각사상’을 비판했다.”라고 논했지만, 그때의 ‘본각사상’에 관한 그의 정의는 극히 불명확한 것이었다. 단지 그는 이 논문에서 내가 말하는 dha-tu-va-da를 ‘본각사상’이라고도 말했던 것이다.27)

하카마야가 “도원은 ‘본각사상’을 비판했다.”라고 논한 것은, 도원이 《변도화(辨道話)》에서 소위 ‘심상상멸(心常相滅)’설을 비판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심상상멸’설이란 정확히는 ‘신멸심상(身滅心常)’설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금부터는 이 호칭을 사용하고 싶다. 이것은 《변도화》에서,

(19) 잘 생멸로 바뀌어지지 않는 심성(心性) 우리 몸에 있는 것28)

이라는 표현에 의해 나타나는 사고방식으로, 여기에서 ‘심성’이란 ‘불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여래장 사상이며, dha-tu-va-da인 것이 된다. 단 이 논문에 있어 하카마야의 논의에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신멸심상’설을 본각사상이라 부른 것, 둘째는 ‘신멸심상’설을 비판하던 당시 도원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대하여 전혀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의 것으로, 하카마야는 ‘본각사상’ 즉 ‘여래장 사상=dha-tu-va-da’을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원의 사상적 입장을 바로 불교 그 자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본각사상’을 비판한 희유한 사상가로서 도원을 찬미하기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카마야설에 대한 나의 최초의 비판은, 1991년 〈심신인과(深信因果)에 대하여〉라는 논문29)에서 이루어졌다. 즉 먼저 나는 도원이 《변도화》에서 ‘신멸심상’설을 비판했을 때의 도원 자신의 입장을 문제로 삼았다. 즉 ‘신심일여(身心一如)’ ‘성상불이(性相不二)’ ‘생사는 즉 열반이다’ ‘심성대총상(心性大總相)의 법문’ ‘일대법계(一大法界)’등의 말30)로 표현되는 도원 자신의 입장도, 역시 ‘본각사상’이 아닌가 라고 논한 것이다. 왜냐하면 ‘심성대총상의 법문’ 이나 ‘일대법계’라는 도원의 말이,

(20)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大正藏 32, 576a8)

라는 《기신론》의 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신론》 그 자체는 ‘본각’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문헌으로서, ‘본각사상’을 만든 부모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변도화》에서 도원이 비판한 대상인 ‘신멸심상’설도, 그것을 비판했을 때의 도원 자신의 입장인 ‘신심일여’설도 모두 ‘본각사상’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 상황에 이르러 나는 ‘본각사상’이라는 말이 정의 불가능한 것을 통감하고, 또 중국에서 찬술되었다고 생각되는 《기신론》의 ‘본각’이라는 말에 근거한 ‘본각사상’이라는 용어에 의해서는, 도원의 ‘신멸심상’설 비판의 사상적 의의를 해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인도불교 이래의 전통을 명시하는 ‘여래장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문제를 고찰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에 의거하여, ‘여래장 사상’에는 ‘불성 내재론’과 ‘불성 현재론’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31)

이 가운데 ‘불성내재론’이란, “불성은 중생(有情), 특히 그 육체 속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설이며, ‘불성 현재론’이란 “불성은 사물(無情도 포함)에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는 “사물 그 자체가 불성의 현현이다.”라고 하는 설이다.

인도의 여래장사상이 ‘불성 내재론’인 것은 《열반경》의 담무참 역(11)에 대응하는 법현 역의 다음 경문에 의해서도 분명할 것이다.

(21)一切衆生皆有佛性 在於身中 無量煩惱悉除滅已 佛便明顯 除一闡提(大正藏 12, 881b24-26)

그런데 이 ‘불성 내재론’으로서 인도의 여래장 사상은, 중국에 들어와 아마도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을 받아 ‘불성 현재론’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여래장 사상이 구조로 삼고 있는 dha-tu-va-da의 일원론적 경향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즉 dha-tu-va-da는 “기체[L]에서 만물(제법)[S]이 생긴다.”라는 발생론적 일원론이며, 거기에서는 기체(能生)[L]와 만물(所生)[S]이 일단 구별되는 점에 이원론적 성격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양자가 중국에서 ‘이(理, 진리)’와 ‘사(事, 개물)’로서 파악되었을 때, 이 이원론적 성격은 불식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와 ‘사’는 동시이며, 양자 사이에 능생과 소생이라는 시간적 인과관계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dha-tu-va-da라는 발생론적 일원론(불성 내재론)은 ‘이’와 ‘사’의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 관계도 구별도 결여된 소위 절대적 일원론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야마노우치(山內舞雄) 박사가 말한 바의 ‘사(事)만이 진리의 나타남’32)으로 보는 견해이며, 이것을 박사의 표현에 따라 나는 ‘불성 현재론’이라 부른 것이다.

나는 《조론(肇論)》의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大正藏 45, 159b28-29), 길장(吉藏) 《대승현론(大乘玄論)》의 “依正不二...草木有佛性”(大正藏 45, 40c13-14), 《마하지관(摩訶止觀)》의 “一色一香 無非中道”(大正藏 46, 1c24-25), 담연(湛然) 《금비론(金?論)》의 “萬法是眞如...眞如是萬法(大正藏 46, 782c19-20)” 등의 표현을 이 ‘불성 현재론’을 설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33)

(22)牆壁瓦礫無情之物 竝是古佛心(《祖堂集》 〈慧忠〉 章)
(23)我之佛性 身心一如... 南方佛性 身是無常 心性是常(同上)
(24)サレバ草木瓦礫山河大地大海虛空 皆是眞如ナレバ、佛ニアラザ物ナン34) (《眞如觀》)
(25)悉有は佛性なり35) (《正法眼藏》 〈佛性〉 卷)

라는 문장등도 ‘불성 현재론’을 설하는 전형적인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발단이 된 《변도화》에서 다음의 두 가지 설을 인정한다.

身滅心常說 = 불성 내재론 = 도원의 비판 대상
身心一如說 = 불성 현재론 = 도원 자신의 견해

나는 특히 중국 선종사에서, 본래의 인도적 여래장 사상인 ‘불성 내재론’을 설하는 신회(神會)·마조(馬祖)·종밀(宗密)·임제(臨濟) 등의 계통과 대립하여,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발전한 중국적인 여래장 사상인 ‘불성 현재론’을 설하는 혜충(慧忠)·장사(長沙)·현사(玄沙)·굉지(宏智) 등의 선사들 계통이 존재했다는 것을 논증했지만36),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불성 내재론’과 ‘불성 현재론’의 구별이 반드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나는 이 여래장 사상의 두 유형이라는 가설을 최초로 제시한 논문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설했다.

(26) 단,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불성 현재론 혹은 절대적 일원론은 불성 내재론 즉 인도적 여래장 사상(dha-tu-va-da)에서 전개한 것으로, 어디까지나 논리적으로는 그것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는 바에 따르면 불성 현재론이란 하나의 논리적인 철저함으로 소위 관념적인 가공(架空)의 것으로, 따라서 불성 내재론과는 완전히 격절(隔絶)된 순수한 불성 현재론은 현실의 문헌에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7)

예를 들면 《진여관》 (24)은, 명확히 ‘불성 현재론’을 설하고 있지만《진여관》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27)法花已前ノ諸經ハ ……一切衆生皆本覺眞如ノ理ヨリ出タリト說カズ……無相不相ノ一法ヨリ萬法流出ス38)

그런데 여기에는 ‘일법’으로부터 ‘만법’의 ‘유출’이 기술되고 있는 까닭에, 여기에는 발생론적 일원론(dha-tu-va-da) 즉 ‘불성 내재론’이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진여관》에는 ‘불성 내재론’도 ‘불성 현재론’도 설하는 것이 되지만, 이미 앞의 (18)에서도 논술했듯이, 《삼십사개사서》는 《진여관》 (27)에서 설한 것과 같은 ‘불성 내재론’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8) 諸敎中 自無相一理出生萬法 自法身一理生諸法 此意 能起所起有 前後因果不俱時 又不同體不二 故不同一家意39)

즉 여기에서는 ‘일리’에서 ‘만법’이 ‘출생’한다고 하는 ‘불성 내재론’이 부정되고, ‘능기’, ‘인’과 ‘소기’, ‘과’와의 ‘동체불이’를 설하는 ‘불성 현재론’이 ‘일가의’로서 긍정되고 있다. 따라서 ‘불성 내재론’과 ‘불성 현재론’의 관계는 단순한 것이 아니지만, ‘천태본각법문’이라 불리는 제 문헌의 사상적 독자성은, 인도적 여래장 사상인 ‘불성 내재론’보다도 발전한 여래장 사상인 ‘불성 현재론’ 쪽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이해일 것이며, 초기의 도원도 중국 선종의 ‘불성 현재론’과 함께 이 ‘천태본각법문’의 ‘불성 현재론’을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이리하여 나는 ‘천태본각법문’이라 불리는 문헌의 사상적 해명에서조차 ‘본각사상’이라는 용어에 의거한 고찰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여래장 사상에는 ‘불성 내재론’과 ‘불성 현재론’이라는 두 유형이 있다는 가설에 의해, 중국·조선·일본의 여래장 사상의 전개를 해명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4. 본각사상과 《대승기신론》

다음에 하나노(花野充道)의 논문 〈본각사상과 본적사상(本迹思想)〉(《駒澤短期大學佛敎論集》9, 2003년, 이후 〈본각〉이라 약칭)에 보이는 몇 가지 중요한 견해에 대하여 사견을 밝히고 싶다.

먼저 이 논문에 나타난 하나노의 불교사상의 이해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동할 수 없다. 곧 그에 의하면, 불교사상은 ‘연기론(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으로 2분되지만, 이 양자는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과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을 가리키고 있으며, 사견에 의하면 그것들은 모두 여래장 사상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즉 전자는 ‘불성 내재론’, 후자는 ‘불성 현재론’에 상당한다. 따라서 이 ‘연기론’과 ‘실상론’이라는 구분에서는, 인도 티베트의 중관파에 의해 대표되는 공사상(空思想)이라는 것이 결락되어 버리고 있다.

하나노는, ‘실상론’의 연원을 ‘공 사상’에서 구해,

(29) 용수(龍樹)의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사상을 이어받아, 당체즉중도(當體卽中道, 當體卽空卽假卽中)의 제법실상론을 설한 사람이 지의(智핗)이다.(〈본각〉 p.35 상)
(30) 지의교학은 공의 사상에 기초한 실상론(相卽論)으로, 연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본각〉 p.42 하)
(31) 지의는 그와 같은 공사상의 흐름 위에 보다 더 현실 실천적인 ‘즉(卽)의 사상’을 수립한 것이다.(〈본각〉 p.49 상)

라고 말하지만, 금일 지의의 사상을 나가르주나(Na-ga-rjuna)의 공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31)에서도 양자를 ‘공 사상’과 ‘즉의 사상’으로 구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가르주나 이후의 중관파는 이제(二諦)를 설한 데 대하여, 지의는 삼제(三諦)를 설하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과 지의의 ‘즉의 사상’ 사이에는 상당과 괴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마하지관》의 ‘一色一香, 無非中道’라든가, ‘一切法卽佛法’(大正藏 46, 9a13)이라는 말을, ‘불성 현재론’을 설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또 이 점과 관련하여, 나는 하나노의 다음과 같은 《유마경》 이해에도 찬동할 수 없다.

(32) 《유마경》은 여래장 사상(기체설)의 계보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 사상으로부터 제법실상의 사상으로 전개하는 계보에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다.(〈본각〉 p.67 상)

왜냐하면 나는 《유마경》을 하카마야와 동일하게, 바로 ‘기체설’ 즉 dhatu-vada를 설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물론

(33) apratis.t.ha-namu-lapratis.t.hita-h. sarvadharma-h..
(34) 從無住本立一切法(大正藏 14, 547c22)

이라는 경문에 있다. 이미 논한 바와 같이40) 이 (33)을 나는 “일체법은 무주(apratis.t.ha-na)라고 하는 근본(기체)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번역하지만, 여기에서 ‘무주’란 ‘기체를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무주’는 ‘기체’가 아닌가 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것 이상으로] 기체를 갖지 않는 것’인 까닭에 ‘만물의 최종적 기체’인 것이다.

따라서 (33)이 dha-tu-va-da를 설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이 점은 길장의 《대승현론(大乘玄論)》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35) 淨名經云 從無住本立一切法 無住卽無本 若能若所 皆以無住爲本 大品云 般若猶如大地 出生萬物 般若正法無住 此三眼目之異名(大正藏 45, 16c28-17a2)

즉 여기에서 ‘반야’=‘무주’는, ‘만물’을 출생시키는 ‘대지’에 비유되지만, 이 ‘대지’가, dha-tu-va-da란 가설을 내가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된 《승만경》과 <약초유품>의 ‘대지’와 동일하게, ‘만물’의 근저에서 ‘만물’을 출생시키는 기체(L)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길장은 (35)에서 《유마경》 (33)의 dha-tu-va-da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 함께, 그 dha-tu-va-da를 자기의 입장으로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의 사상적 입장에 대하여는, 일찍이 ‘본각사상’의 유력한 연구자였던 다무라(田村芳朗)가 하나노와 동일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즉 다무라는

(36) 먼저 천태본각사상의 절대적 일원론에 대하여 그 유래하는 바를 살펴보면,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생사즉열반·번뇌즉보리·범성불이(凡聖不二)·생불일여(生佛一如) 등의 상즉불이론(相卽不二論)이 발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어떠한 관점에서 상즉론이 나왔는가 하면 근본은 공관(空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41)

라고 설하여, 하나노와 동일하게, 공관 즉 공 사상에 기초하여 ‘상즉론’(하나노의 용어에서는 ‘실상론’)이 성립했다고 생각해 그 ‘공관’에 의거하여 ‘상즉론’을 ‘공적상즉론(空的相卽論)’이라 부르고, 《유마경》의 ‘불이법문’을, 그 ‘공적상즉론’의 대표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견에 의하면, 치명적인 잘못이 인정된다. 즉 ‘불이’라든가 ‘즉’이라는 말이 불교의 진의(眞義)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고방식은, 일본불교의 전통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어 온 까닭에, 이들 말이 불교가 본래 부정한 일원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이해가 여기에는 결여되어 있다.

즉 다무라도 하나노도, ‘상즉론’의 근거로서 《근본중송》에 대해 언급하지만, 《유마경》에 사용되고 있는 advaya, ‘불이’ ‘무이’라는 말은 《근본중송》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은 《근본중송》보다도 후에 성립한 유가행파의 문헌, 예를 들면, 《보살지》나 《중변분별론》 등에서는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42)
이 사실은 대승불전에 있어서 advaya라는 말의 사용이 sama라는 말의 사용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즉 advaya도 sama도 힌두교의 일원론에 영향을 받아 대승불전에서 상당수 사용된 말이다. 즉 ‘A와 B(非A)는 같다(sama).’라든가 ‘A와 B는 불이(advaya)이다.’라는 동일성을 설하는 표현은, 기본적으로는 일원론이 아니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즉 동일성은 일원론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점은 힌두교 일원론의 영향이 기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대승불교 성립 이전의 불전에 이런 유형의 표현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이해될 것이다.

하나노는 (32)에서 “《유마경》은 여래장 사상(기체설)의 계보를 잇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37) 《유마경》은 유식경전도 여래장경전도 아니다.(〈본각〉 p.43 하)

라고 말했지만, 《유마경》이 여래장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카사키 박사에 의해 해명되고 있다.43) 즉 <여래종성품(如來種姓品)>(<불도품(佛道品)>)에서는 ‘여래의 종성(tatha-gata-gotra, tatha-gata-vam. s.a)’을 테마로서 설하고 있다.

《유마경》은 한편에서는 ‘불이(advaya)’라는 말로 일원론을 설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근패지사’(根敗之士, 大正藏 14, 549b20)라는 말로서 성문에 대하여 성불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차별적인 종성론(gotra)을 설하고 있다. 일원론과 차별, 이것은 바로 dha-tu-va-da의 구조 그 자체이며, 따라서 《유마경》의 사상을 dha-tu-va-da라고 하는 해석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상 먼저 하나노의 불교사상에 대한 기본적 이해에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지만, 다음에 《기신론》의 ‘본각’에 관한 그의 이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그는,

(38) 《대승기신론》을 읽으면 ……본각은 시각(始覺)과 불각(不覺)에 대한 용어로서, 기체는 어디까지나 진여이다.(〈본각〉 p.12 상)
(39) 《기신론》에 설해진 기체는 진여와 법신으로, 본각은 아니다. 하카마야 선생은 아마도 《진여관》등에 설해진 ‘본각진여’라는 용어를 가지고 본각을 진여와 동일한 기체로 생각하신 것은 아니겠습니까.(〈본각〉 p.20 상)

라는 기술에서, 《기신론》에서 기체라고 하는 것은, ‘진여’나 ‘법신’으로 ‘본각’이 아닌 것을 역설하고, 그것에 근거해 하카마야에 의한 ‘본각사상’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비판하고 있다.

나 자신 하카마야에 의한 ‘본각사상’의 규정을 비논리적인 것으로 반복하여 비판해 왔지만, 《기신론》의 ‘본각’이라는 말에 관한 하나노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본각’이 ‘시각’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말한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거기에서 “‘본각’은 기체가 아니다”라는 귀결을 도출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사(事)’와 ‘이(理)’는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생각지만 ‘사’는 무상이며, ‘이’는 상주로, 양자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시각’과 ‘본각’도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하나노가,

(40) ‘진여’는 ‘무위법’이며, ‘만법’은 ‘유위법’이다. 그러나 ‘본각’은 ‘무위법’이 아니다. (〈본각〉 n. 5p.58 상)

라고 말했을 때, 강한 의문을 느꼈다. 왜냐하면, ‘본각’은 무상한 것 즉 ‘유위법’이 아니라, 상주인 것 즉 ‘무위법’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기신론》의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41)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 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 卽同本覺 始覺義者 以本覺故 而有不覺 依不覺故 說有始覺(大正藏 32, 576b13-16).

먼저 첫 구절의 첫 문장에서 ‘법계’ = ‘법신’이라는 등식이 도출되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문제는 ‘의차법신 설명본각’이라는 표현이, ‘법신’ = ‘본각’이라는 등식을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이 표현이 이 등식을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소박하게 읽어 보면, 이 표현 가운데 ‘의’라는 말은 기체와 초기체의 관계를 나타내어 ‘법신’이라는 기체 위에 ‘본각’이라는 초기체가 놓여진 것처럼 읽을 수도 있지만, ‘의’라는 말에 관한 이와 같은 해석이 부적절한 것은 끝부분의 ‘의불각고 설유시각’이라는 표현에 의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의차법신 설명본각’이라는 표현이 ‘법신’ = ‘본각’이라는 등식을 설하는 가능성은 충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장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를 보면, (41)의 주석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42) 欲明覺義 出纏相顯 故云 「卽是如來平等法身」 旣是法身之覺 理非新成 故云 「依此法身 說名本覺」 無性攝論云 「無垢無?碍智 名爲法身」 金光明經 名大圓鏡智爲法身 等 皆此義也(大正藏 44, 256b25-29)

여기에서 ‘비신성(非新成)’이란 ‘본각’의 ‘본’을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신성’이라는 술어의 주어인 ‘법신지각’이란 ‘본각’인 것이며, 그것을 또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법신지각 = 이 = 비신성 = 본각 = 법신

이 ‘법신’ = ‘본각’이라는 해석이 부당하지 않은 것은 《기신론의기》의 주석인 자선(子璿) 《필삭기(筆削記)》의 해당 부분에, 다음과 같은 주석문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43) 疏「欲明」等者 欲顯在纏之本覺 遂擧出纏之法身 此則約果以顯因也 名雖因果有殊 而眞實之體無二故 論云 「卽是」也 論「依此」等者 依體立名也 ... 今依此體而立覺名者 以顯法身 非是一向凝然寂滅無知無覺也 又顯此覺非是有爲生滅之法 故約法身以立 是則一體之上 寂故名法身 照故名本覺 所言「依」者 但是依約之義 不同草木依根有苗分能所也 亦不同依如來藏有生滅心有眞妄也 此乃一體眞實... 疏「旣是」等者 法身之理 三乘敎中 同許不生不滅 是本有之法 旣目此法爲覺 是可爲本 「無性」下引證 本覺卽法身義也(大正藏 44, 342a13-27)

즉 이 주석의 취지는 끝부분의 ‘본각즉법신의’라는 말로서 명시되듯이 ‘법신’ = ‘본각’이라는 동일성을 설하는 것에 있고, 그 동일성이 ‘진실지체무이’라든가 ‘일체진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보성론》에 있어서 ‘유구진여(有垢眞如)’와 ‘무구진여(無垢眞如)’가 완전히 동일한 ‘진여’인 것과 같이 ‘재전지본각’과 ‘출전지법신’은 동일한 것, 즉 ‘일체’인 것이다. 또 ‘일체지상 적고명법신 조고명본각’이라는 것도 동일한 ‘체’가 ‘법신’이라고도 ‘본각’이라고도 불린다는 의미이며, 이 점이 ‘단시의약지의’라고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41)의 ‘의차법신 설명본각’이라는 표현 중 ‘의’도 “‘법신’을 기체로서 ‘본각’이 있다.”라는 어격적(於格的, locative)인 관계를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을 ‘부동 ……역부동 ……’이라는 설명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 여기에 ‘차각비시유위생멸지법’이라는 것은 “‘본각’은 ‘유위법’이 아니다.”라는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것은 ‘본각’ = ‘법신’으로 간주되는 이상 당연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기신론》에 있어서 ‘진여’ = ‘법계’ = ‘법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이상 당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필삭기》에서 ‘본각’은 명확히 ‘진여’와도 동일시되고 있다. 즉 《기신론의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44) 〈自體相用〉者 體謂 生滅門中本覺之義 是生滅之自體 生滅之因故 在生滅門中 亦辨體也(大正藏 44, 250c27)

이것에 대하여 《필삭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45) 疏〈體謂〉下 …… 〈本覺〉者 卽是前之眞如 至此門中 轉名本覺 ... 卽此本覺 是生滅家之自體也 此顯生滅別無其體 全攬本覺爲自體故 〈生滅因〉者 或問 若此本覺是生滅體者 本覺卽是眞如 何故說爲生滅自體也 故此釋之 謂生滅之相起時 實賴眞如爲因 ... 如是染淨皆由眞如 是故眞如是生滅體 故下文云 〈依如來藏 有生滅心〉 …… 又 〈辨體〉者 謂前眞如門當體是體 此生滅門 以眞如爲體 若無眞如之體 生滅終不能成故 此門中須辨體也 (大正藏 44, 327b26-c12)

여기에서 ‘진여’를 ‘체’라고 말하며, 그것을 ‘생멸’의 ‘체’ 또는 ‘인’이라고도 하지만, 그 의미는 “‘진여’는 ‘생멸’의 기체(L)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점이

(46) 依如來藏故 有生滅心(大正藏 32, 576b8)

이라는 《기신론》의 말을 빌려 나타나고 있다. 즉 이 (46)에는 “‘여래장’은 ‘생멸심’의 기체(L)이다.”라는 dha-tu-va-da가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이 점은 다카사키 박사의 다음의 논술에 의해서도 인정될 것이다.

(47) 마쓰모토는 여래장 사상을 하나의 절대적인 실재를 기체로 하여(법계), 그 위에 비실재인 각종 현상(법)이 발생한다는 구조를 갖는 것으로, 여기에 법계의 계(dha-tu)란 말을 취해 ‘다투바다’(기체설. 바다는 논, 학설의 뜻)라고 이름 하였다. 《기신론》을 예로 들면 “여래장에 의하는 까닭에 생멸심이 있다.”(19항)라든가 “진여법에 의함으로써 무명이 있다.”(39항) 등의 표현이 그 구조에 딱 맞는 표현이다.44)

그런데 《필삭기》(45)에서는, 이 기체(L)인 진여가 ‘본각’과 동일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거기에서는 ‘전지진여 지차문중 전명본각(前之眞如 至此門中 轉名本覺)’이라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 ‘본각’이 ‘자체’, ‘체’라고 나타나는 것도, (45)의 저자 자신이 ‘문’ 가운데 제시한 ‘본각즉시진여’라는 주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기신론》에서는 기체(L)에 대하여

진여 = 법계 = 법신 = 본각45)

이라는 등식이 인정되는 해석이 실제 행해져 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진여관》(27)에는 ‘本覺眞如ノ理’라는 말이 보이고, 또 안연(安然)이 《보리심의초(菩提心義抄)》에서, 《기신론》(41)의 ‘즉동본각’이란 말을 해석하여 ‘본각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 것도 하나노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46)

(48) 貪體卽覺體 名本覺理也(大正藏 75a28-29)

여기에서는 《필삭기》(43)에 있어서 ‘재전지본각’과 ‘출전지본각’이 ‘일체’라고 말하고 있듯이, ‘탐’의 ‘체’와 ‘각’의 ‘체’는 동일하며, 그것은 ‘본각’이며 ‘이’라고 설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여기에서는 ‘체’ = ‘본각’ = ‘이’라는 등식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신론》의 ‘본각’을 ‘진여’나 ‘이’와 동일시하는 해석은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노에 의하면 이 해석은 오해일 뿐이겠지만, 그러나 안연이나 《진여관》이나 《필삭기》의 해석보다도 하나노의 해석 쪽이 옳다고 하는 확실한 근거도 인정되지 않는다. 더욱이 《기신론》의 ‘본각’을 ‘진여’나 ‘법신’이라는 기체(L)라고 간주하는 해석은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도 인정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49) 本覺各十 如何十本 一者根字事本 本有法身 能善住持一切功德 譬如樹根善住持一切枝葉及花果等 不壞失故(大正藏 32, 614a8-10)

여기에는 ‘본각’이 기체(L)인 것이 ‘주지’라는 말로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신론》에서 ‘본각’은 ‘진여’ ‘법계’ ‘법신’과 동일하게 단일한 기체(L)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하나노는 하카마야가 ‘본적사상(本迹思想)’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50) 본적사상은 기본적으로는 불신론(佛身論)이다.(〈본각〉 p.41 하)

라고 하는 그의 기본적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불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본’ ‘적’의 용례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는 승조의 《주유마(注維摩)》 서문의 다음의 기술이 불신론을 다루고 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51) 非本無以垂迹 非迹無以顯本 本迹雖殊 而不思議一也(大正藏 38, 327b3-5)

라고 하는 것도 그 직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
(52) 凡此衆說 皆不思議之本也 至若借座燈王 請飯香土 手接大千 室包患乾象 不思議之迹也(大正藏 38, 327b1-3)

또 길장은 《정명현론(淨名玄論)》의 다음의 기술에서, 《주유마》(51)의 ‘본’과 ‘적’을, ‘무언(無言)’의 ‘이(理)’와 ‘유언(有言)’의 ‘교(敎)’로서 해석하고 있다.47)

(53)夫不二理者 謂不思議本也 應物垂敎 謂不思議迹也 非本無以垂迹 故因理以說敎 非迹無以顯本 故籍敎以通理 若然者 要須體理無言 然後乃得應物有言耳(大正藏 38, 853c9-12)

따라서 하카마야의 ‘본적 사상’이라는 용어 사용은48), 이 길장의 해석에 따르는 것으로서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결론으로 말하면, 하나노의 논문이 ‘본각사상’에 관한 논의를 심화시킨 공헌은 현저한 것이지만, 나로서는 그의 소론에 찬동할 수 없는 점이 적지 않다.

나는 ‘본각사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도 이래의 전통을 명시하는 ‘여래장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불교의 사상적 연구가 일본 천태의 ‘본각사상’을 일본 독자적인 것으로서 찬미하는 일본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다무라는 《일본불교사입문》 가운데서

(54) 천태본각사상은 존재의 극상(極相)인 불이일체(不二一體)인 것을 이론화하여 절대적 일원론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불교사상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철학사에 있어서도 구극·최고의 철리(哲理)라고 말할 수 있다.49)

라는 평가를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55) 이 평가 또는 찬미의 배경에는, 일본불교의 사상과 그 현상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려고 하는 의식과 천태본각사상의 기초를 이루는 여래장 사상의 비불교성(非佛敎性)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은 분명할 것이다.50)

이 같은 나의 견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이 비판적인 평가를 나의 발표의 결어로 삼고 싶다. ■


마쓰모토 시로(松本史朗) / 1950년 도쿄 출생. 고마자와 대학 불교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인도철학)을 만기퇴학(滿期退學) 하였다. 현재 고마자와 대학 불교 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緣起と空-如來藏思想批判》 《禪思想の批判的硏 究》 《佛敎への道》 《チベット佛敎哲學》 등이 있다.

이태승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석사) 및 일본 고마자와(駒澤) 대학 불교학과(박사)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논·저서로 《을유불교산책》《인도철학산책》 《실담범자입문》(공저) 〈즈냐나가르바의 이제설〉 〈무아에 관한 중관파의 해석〉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