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효 언론인, 시인

근세 선종(禪宗)을 개척한 경허(鏡虛) 스님에게 세 달이 있었으니, 해월(海月), 수월(水月), 만공(滿空)의 세 제자가 그들이다. 이 세 제자는 한반도를 종(從)으로 관통하며 스승의 선풍을 진작했다. 수월은 북간도에서, 만공은 중부에서, 해월은 남부에서 주로 활동했다.

해월 스님이 주석한 곳은 부산 금정산의 선암사였다. 나의 할아버님은 선암사의 시주였다. 내가 어렸을 때 선암사의 범종각에서 ‘할아버님이 범종을 시주하셨다’는 말씀을 숙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해월 스님과 할아버님은 같은 시대를 사신 분들이다. 그러나 할아버님이 해월 스님을 만났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지 할아버님이 선암사의 시주였고, 생전에 선암사를 자주 찾았었다는 점에서 두 어른의 교분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할아버님의 셋째 아드님이셨으며 할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던 나의 아버님은 선암사 바로 주변에 넓은 면적의 산야를 샀다. 당시 아버님은 토건업으로 크게 성공하셨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셨던 할아버님을 위해 그 산야를 구입하셨던 것이다. 아버님은 그것을 할아버님의 이름으로 등기하는 효성을 발휘하셨다. 아버님은 그곳을 선산으로 조성하려는 꿈을 갖고 계셨다 한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아버님은 할아버님을 그곳에 모셨다. 조석으로 선암사 범종 소리를 들으며 왕생극락하시라는 소망일 터였다.

어린 시절, 추석 차례를 모시면 나는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성묘길에 나섰다. 아버님의 성묘 행차에는 아버님의 유일한 남동생인 숙부님과 일찍 세상을 뜨신 큰 백부님의 외아들인 장손이 동행하곤 했다.

산소로 가는 길은 까마득히 멀었다. 차에서 내려 들녘과 산길을 오래 걸었다. 철길을 건너야 했는데 침목 아래로는 개천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그럴 때면 아버님은 무서워하는 나를 업고 철길을 건넜다. 아버님의 등에 업혀 가다가 눈을 떠 보면 현기증이 나서 얼른 다시 눈을 감곤 했었다.

성묘를 하고 나면 반드시 선암사에 들렀다. 선암사에는 아버님을 반기는 노스님이 계셨다. 아버님과 노스님은 한참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동안 숙부와 사촌 형님과 나는 절에서 시원한 석간수를 마시고 절 아래 폭포에서 멱을 감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았다. 하산길에는 산지기 집에 들러 준비해 온 음식과 약간의 돈도 건네주었다.

이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갔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님은 50대 중반부터 병석에 계셨고 선산으로 조성하고자 했던 산야는 장손과 이혼한 며느리가 팔아 치우고 도주해 버렸다. 병중의 아버님이 산을 찾겠다고 나서셨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몇 년 전에 할아버님의 산소를 찾았을 때 개발의 물결은 산소 바로 아래까지 밀어닥쳐 아파트촌이 조성되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 크고 우람했던 선암사가 너무나 작은 절이라는 데 놀랐다. 그 뒤 할아버님의 유해는 백부님이 사셨던 삼천포의 사촌이 이장해갔다. 이렇게 선암사와 할아버님의 내력은 끝났다.

나의 할머님은 불심이 돈독한 분이셨다. 설이나 추석 또는 제사 때가 되면 할머님의 긴 기도와 염불이 시작됐다. 할머님의 기도는 자정께 끝났고 우리는 그때부터 제사를 모셨다.

나의 어머님은 병약했다. 어머님께서는 ‘처녀 때는 무척 건강했다’고 말씀하셨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늘 앓으시던 어머님의 모습만이 남아 있다. 아마 거듭되는 아버님의 실패가 어머님에게 병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울수록 어머님은 더욱 절에 매달렸다. 나를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님을 따라 절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갔던 곳은 작은 절이었다.

여승이 계셨고 그분에게 온갖 고민거리들을 털어놓고 얘기하시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어머님은 산신각 같은 곳에 오래 계셨다. 그곳에 엎드려 무슨 말씀을 홀로 하고 계시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께서는 근엄한 대웅전의 부처님은 너무 어렵고 이웃 할아버지 같은 산신각의 수염 긴 노인네가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일까?

어머님은 심장병으로 고생하셨다. 내가 대학 4학년의 여름방학을 서울에서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님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절에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죽음은 대속(代贖) 같은 측면이 있다. 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자 병문안을 온 친척들이 아버님을 둘러싸고 있는 동안에 어머님은 2층 방에서 홀로 운명하신 것이다. 친척들은 아버님을 급히 입원시키고 어머님의 장례를 치렀다. 병원의 얘기로는 아버님은 뇌일혈이었고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집과 불교의 내력이다. 나의 6남매 가운데 나만 빼고는 모두 기독교도들이 되었다. 제사나 차례를 모실 때 절을 하는 사람은 나와 내 아들뿐이다. 동생과 조카들은 무릎 꿇고 기도를 한다. 절과 기도가 그렇게 다른 것인지,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절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 동생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간혹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불교신자 같지가 않다. 나는 반야심경도 외우지 못한다. 발목이 약해 결가부좌도 하지 못한다. 절도 완전한 자세로는 하지 못한다. 단지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정신적 분위기가 불교에 가깝다고 여겨질 뿐이다.

나는 예술가가 절대자에 귀의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예술가의 생애는 절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아니었던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내면과의 싸움이 아니었던가? 긍정과 부정 사이의 찢어짐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불교의 구도 정신이 예술가의 혼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조선에 천주교 신부들을 파송한 곳은 파리의 외방 선교회였다. 그 외방 선교회가 조선에 대한 선교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후회했다. 미지의 땅에 선교를 할 때는 현지의 사정이 가장 중시돼야 하는데 워낙 먼 곳에서의 활동이라 조선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를 부정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도록 한 것이 유례없이 끔찍한 박해를 자초했다는 반성이었다. 기독교 선교에서의 이런 실수는 요즘에도 가끔 저질러진다.

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그들은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을 불교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우리 한국인들은 그 해답을 안다. 현재의 세계, 미래의 세계의 문제를 푸는 키워드가 불교에 있다는 것을……. 2천5백 년 전 석가가 이미 그 해답을 들려주었다는 것을…….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는 치유(Healing)의 구체적인 방법이 된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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