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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갈등, 그 불행의 세계사
기획-종교갈등, 해결의 길은 없는가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곽병찬 chankb@hani.co.kr

믿음의 조상과 분쟁하는 후손

아브라함의 셈족은 질투와 분노의 신을 창조했다. 유대교의 야훼, 기독교의 여호와 하느님, 이슬람의 알라,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신이었다. 셈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의 신에게서 받은 첫 번째 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은 여든이 되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슬람 경전에선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이삭에 빠져 신을 잊고 있지 않을까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자식이나 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신의 요구는 가혹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순히 철모르는 아들을 제단에 올렸다. 이로써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신에 대한 맹목적 순종은 셈족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 아브라함이기에 이삭이 생기자 첩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를 광야로 내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했을 때 미색의 처 사라를 미혼인 것처럼 속여 파라오에게 바치는 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부자가 되었다.

신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떠나 파라오와 그의 일가에게 전염병을 퍼뜨려 몰살시켰다. 원인 제공자 아브라함은 그가 선택한 자이기에 화를 면했다. 아브라함은 그런 거래를 그랄의 왕 아비멜락과도 했다. 신이건 그의 종이건 인간의 도덕과는 담을 쌓았던 시절이다.

모세에 이르면, 신은 더욱 거칠어진다. 질투를 넘어서 분노하고 복수하며, 학살을 주저하지 않는 신으로 등장한다. 세 종교가 추천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모델인 모세는 세 종교의 근본 교리를 세우고, 계율을 제시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를 경배하고 있었다. 분노한 모세는 신의 이름으로 금송아지를 갈아 부족에게 그 가루를 마시도록 하고, 사제 부족인 레위 인들에게 칼을 들어 칼끝이 닿는 대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칼에 죽은 자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신은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반한 이들에게 전염병까지 내리겠다고 공언했다.

그 신에게 이민족 혹은 이교도는 악마였다. 모세의 군대가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미디안의 남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다만 여자들과 아이를 살려뒀을 때, 모세는 신의 분노를 대신하여 남자 아이들과 처녀가 아닌 여자들은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최초의 대학살이었다.

 신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이런 학살은 구약 시대를 거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아모리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 등은 신의 민족에 의해 제 땅에서 쫓겨나거나 씨가 마르는 학살을 당한 민족이었다. 여호수아는 피비린내나는 학살을 통해 다른 민족을 내쫓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잔혹성은 이른바 여리고 전투에 대한 구약의 기술에서 잘 드러난다. 여호수아는 “남녀노소, 소와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칼로 철저히 몰살시킬” 때까지 쉬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되풀이된 반인륜적 범죄인 인종 청소의 전형이었다.

훗날 이 민족은 폴란드를 침략해 전국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든 히틀러, 그와 함께 유대인의 씨를 말리려 했던 무솔리니에 의해 그와 비슷한 참극을 겪는다. 이런 인종 청소, 학살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성실하며 맹목적인 신의 종들은 빈번하게 그 같은 피의 잔치를 벌이곤 했다.

쿠르드족과 시아파 모슬렘을 학살한 사담 후세인,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로 20세기를 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후예들, 그리고 바미안 석불을 폭파한 탈레반. 그래서 파스칼은 종교적 신앙의 야만성을 이미 오래전에 이렇게 경고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했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근본주의와 파시즘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조지 타마린의 연구는 종교와 민족적 감정이 뒤얽힐 때 인간의 도덕적 감정과 합리적 이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마비되는지 잘 보여 준다. 그는 8~14세 이스라엘 아이들 1,000명에게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 준 뒤 도덕적 판단을 물었다. 그 결과 아이들 가운데 66%는 전적으로 찬성, 8%는 일부 찬성, 26%는 전적으로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찬성한다는 아이들의 의견은 ‘신이 약속했고, 정복하라고 했기 때문’ ‘죽이지 않는다면 이교도에게 동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 ‘다른 종교는 세상에서 없애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대한다는 아이들 역시 ‘전리품을 남기지 않고 동물과 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식이었다.

타마린은 대조적인 설문 집단을 추출해,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대신 리 장군 혹은 중국 왕조라는 이름을 넣고 동일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찬성한 사람은 7%였고, 75%가 반대했다! 야만적인 집단 학살 행위라는 것이었다. 종교나 민족적 감정을 배제하자 비로소 아이들은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판단을 회복했다.

자신의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한다. 타마린의 조사 대상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유대교 근본주의를 반영한다. 아이들은 부모나 종족의 가르침 혹은 관습에 따라 그들의 경전(토라)이 두루마리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믿는다.

일점일획도 수정해선 안 된다. 이런 근본주의는 유대교뿐 아니라 지구 위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현재 아브라함의 자손 즉 셈족의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하려는 각 종족과 그 종족이 공유하는 이념은 근본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시카고대학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전 세계 150명의 학자가 참여한 가운데 지구 위에 있을 법한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에 대해 연구하여 보고서를 쓰고, 그 특징을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팀이 정리한 보고서를 보면, 모든 근본주의는 종교나 문화와 상관없이 동일한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하나의 규칙은 모든 사람,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돼야 한다. 교회와 국가 또는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규칙은 땅의 법이 되어야 한다.

둘째, 남성이 맨 위에 있다. 남성이 규범을 정의하고 시행한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

셋째, 세상에는 올바른 시각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남녀 아이들의 올바른 역할도 하나다. 이런 시각과 믿음 역할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다. 가르칠 내용은 물론 가르치는 방식까지도 통제해야 한다.

넷째, 근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역사를 부정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거부한다. 시대나 환경 그리고 문화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경전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역사적 혹은 문화적 해석은 불가하다.

근본주의의 이런 특징은 각 문화나 종교 간에 아무런 접촉이 없었는데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는 종교에 선행하는 생물학적 문제라고 저명한 유전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간주했다. 동물계에는 세력권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본능이 내장되어 있으며, 이런 경향을 종교화한 것이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오늘날 쟁투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비교하면 그 특징은 더욱 선명해진다. 자유주의 신학자 데이비슨 뢰어 목사는 두 진영의 여러 공통점 가운데 혐오하는 것들만 추려 이렇게 정리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해방된 여성이나, 예컨대 낙태나 출산의 자유로운 결정 등 여성 행방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취향이나 생활방식을 혐오한다. 유일무이한 진리로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싶어 하며, 사람들을 그런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 주장을 증오한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남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낙태를 하는 여성, 여성 해방을 추구하는 여성은 증오의 대상이다. 다양한 성적 취향을 혐오하며, 남편은 일하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원칙을 거부하거나 지키지 않는 여성을 증오한다. 하나님의 단순한 진리로부터 사람을 이탈시키는 개인적인 자유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원칙이 적용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적합한 정부가 아니라고 믿는다.

둘은 놀라우리만큼 서로 동일하다. 이 가운데 가장 무섭고 중요한 특징은 하나의 원칙, 신념만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원칙과 신념 이외에 다른 것들은 거짓이라고 할 때, 차별과 배제 그리고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다른 원칙과 신념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그건 미개하기 때문에 계몽돼야 하고, 사탄과 한편이기에 절멸시켜야 한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과거 역사에서 정복전쟁이나 인종학살의 이념적 근거로 기능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물론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있는 부락이나 종족의 처지에선 그런 하나의 신념과 원칙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과 함께 각 국가와 민족이 나름의 정체성을 정립한 이후에도 이런 원칙과 신념을 강조하는 것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근본주의를 정치적으로 적용한 것이 제국주의이고 또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다양한 의제가 근본주의의 의제와 겹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파시즘 하면 대부분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만을 떠올린다. 물론 이들이 파시즘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하긴 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파시즘 경향은 항상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 스페인의 프랑코, 칠레의 피노체트, 한국의 박정희 체제 등은 파시즘의 또 다른 전형이었다.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그 참모들도 파시즘의 여러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이들 체제의 공통점은 부자와 무력과 정치 세력의 결합체라는 점이다. 다종교사회인 한국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종교적 근본주의와도 결합되어 있다. 이 제도는 주로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노동자가 땀 흘려 일한 결과를 자본가나 권력자에게 넘겨주는 걸 그 정치적 근본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기본권 혹은 인권과 관련한 언급을 혐오하며, 이런 권리를 담고 있는 헌법이나 법률을 철폐한다. 자유나 평등 박애 같은 민주적 진보적 가치들을 멸시한다. 오로지 강자를 위한, 강자의 정치를 추구한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을 때 미국에서도 보수적 정치인과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미래로 찬양했다. 보수적 경제학자 로렌스 데니스는 1936년 《도래하는 미국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고 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개탄했다. “자유주의적인 법률 규범 혹은 개인적 권리들에 대한 헌법 차원의 보장이야말로 경제적 파시즘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사고는 파시즘의 적"이라는 무솔리니의 주장과 꼭 닮았다.

정치학자 로렌트 브리트는 역대 파시즘 정권에 공통된 정치 사회적 의제나 파시즘을 식별할 수 있는 특징을 이렇게 꼽았다. “강력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선동. 군국주의. 인권에 대한 경멸. 사회적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음. 남성의 배타적 지배권.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한 억압. 공포 유발. 대중매체에 대한 철저한 통제. 종교와 결합. 기업 권력 극대화와 노동권 탄압. 예술가 문인 멸시. 경찰국가 등.”

예민한 독자는 이미 느꼈겠지만, 이런 특징이나 의제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표방하는 것과 일치한다. 데이비슨 뢰어가 근본주의를 종교적 파시즘으로, 파시즘을 정치적 근본주의이라고 설명하는 까닭이다. 실제 미국 기독교의 극우파적 경향을 대변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인 팻 로버트슨 목사나 제리 폴웰은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은 도덕적 해이만 초래하며, 이른바 테러리스트는 주님의 이름으로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집권했던 부시 정권은 실제로 부자를 위한 감세, 빈자를 위한 복지 프로그램 축소를 실천에 옮겼다. 학교 교육에선 창조론을 교과서에 포함시키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되살아났고, 낙태를 반대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따돌리는 억압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아울러 9·11사태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부시 정권은 이밖에 애국법 등을 제정해 정보 및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 침해를 상시로 허용했다. 보수적 정치 세력과 종교적 근본주의가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다양한 병적 증상을 골고루 드러낸 것이다.

60여 년 전 미국의 헨리 윌리스 부통령은 미국 내에 존재하는 파시즘 흐름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파시스트는 폭력에 기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공적인 정보의 전달 경로들을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 할 것이다. 파시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뉴스를 잘 활용해서 대중을 속여, 그들의 집단이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져가느냐이다." "그들은 자신이 뛰어난 애국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헌법에 보장된 모든 자유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요구하지만, 실은 독점과 기득권을 대변한다.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이들이 도달하려는 최종 목적은 정권 장악이며, 국가권력과 시장 권력을 이용해 시민을 영구히 자신들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윌리스 부통령 당시 미국의 파시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정권 장악이었을 것이다. 1929년 대공황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들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대공황 극복을 위한 각종 조처를 공산주의 정책이라고 몰아세우며 정권을 되찾는 데 혈안이었지만, 미국민은 외면했다. 하지만 그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일단 정권을 장악하면 파시즘의 공식에 따라 독점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군부와 정치권력의 이해를 충족하고자 침략적 본성을 드러낸다. 제2차대전 이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배후엔 옛 소련과 함께 미국이 있었다.

종교 분쟁과 파시즘

지금 전 세계에 걸쳐 벌어지는 분쟁이나 역사 속의 분쟁 혹은 학살 가운데 종교와 무관한 것은 별로 없다. 특히 셈족에게서 발원한 종교들, 그중에서도 기독교는 분쟁이나 학살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기독교는 민족주의의 광기와 금권정치 그리고 제국주의적 탐욕과 결합하여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남북미 원주민 학살과 정복, 유대인 학살, 보스니아계 모슬렘 학살 등을 자행했다.

지금도 동쪽으로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북아일랜드, 남으로는 나이지리아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거나 이루어졌다. 기독교 안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혹은 정교회 사이에서도 청교도 전쟁, 100년 전쟁, 30년 전쟁,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내전, 북아일랜드 사태 따위의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은 8세기부터 시작된 정복 전쟁을 통해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힘의 우위에서 비롯된 여유 탓인지 아니면 이슬람 특유의 개방성과 평등주의 탓인지 이교도라고 하여 학살하거나 추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의 말씀을 가진 종교라 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의 권리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다만 공직 진출을 제한하고, 인두세를 매기는 등 이슬람 신정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차별 정책은 유지했다. 제1차대전 이후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뒤, 이를 극복하려는 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지금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기독교 세계의 패권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하다.

세속 정치와 종교가 결합해 빚어낸 비극 가운데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이 뒤얽혀 빚어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이다. 내전은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해 분리 독립하려는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계, 이슬람 보스니아계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터졌다. 물론 종교적 차이가 분쟁의 온전한 원인은 아니었다. 발칸반도를 통합하려던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도화선이었지만, 이 문제를 내전 혹은 야만적 인종 청소로까지 이끄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서로 다른 종교적 신앙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에서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모슬렘은 세르비아계의 인종 청소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200만여 명 가운데 20만여 명이 학살 혹은 실종됐고, 100만여 명이 자기 땅에서 추방됐다. 남부 지역에선 가톨릭계에 의해 인종 청소를 당하기도 했다.

보스니아 내(內) 정교회와 가톨릭계의 충돌도 심각했다. 제2 도시인 바냐 루카의 비극은 이를 상징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은 민병대를 조직해 정교회 신도 수만 명을 학살했고, 보스니아 내전 땐 세르비아계 정교회 민병대가 가톨릭 신도 5만여 명을 학살하거나 내쫓았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2차대전 당시 가톨릭계는 히틀러의 파시즘에 열광하고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정교회 신도들은 대(大)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열광하고 있었다. 당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연방 복구를 위해 군사 대국을 지향하며, 민족주의와 종교적 광기를 고취시켰다. 파시즘의 전형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파시즘과 결합할 때 최악의 비극을 초래하곤 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도 정치 초년 시절부터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해자라는 오래된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런 전통 속에서 중세의 가톨릭 국가들은 걸핏하면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재산을 압수하는 등 핍박을 가했다. 히틀러의 전기를 쓴 존 톨런드는 대학살 당시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유대인이 신의 살해자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따라서 단지 신의 복수하는 손 구실을 자처했기에 그는 양심의 가책 없이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대중연설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가 맨 처음 할 일은 우리 조국을 유대인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랬듯이 독일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막고 싶다.” 이 얼마나 종교적 광기를 부채질하는 연설인가. 독일 가톨릭은 이런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히틀러가 1939년 암살을 모면하자, 뮌헨 대주교 미카엘 파울하버 추기경은 "총통이 운 좋게 공격을 피한 것을 대주교의 이름으로 감사하자."라며 신도들에게 찬송을 부르도록 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이렇듯 파시즘과 친화성이 매우 강하다.

전쟁은 경제적 탐욕이나 정치적 야심, 인종적 편견 그리고 종교적 신념 따위에 의해 벌어진다. 특히 종교적 신념은 학살이나 파괴, 약탈과 고문 등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 준다. 자신의 종교가 유일한 종교이며, 이단자들은 악의 무리이므로 죽어야 하고, 신의 병사들이 죽으면 순교자가 되어 신의 나라로 직행한다고 믿도록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시스트에게 이 얼마나 편리한 수단인가.

가톨릭의 경우

역사적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세속적인 권력까지 행사했던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은 4세기 초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권력의 희생자에서 권력의 중심으로 변신했다. 안으로는 종교재판을 통해 이른바 이단자를 고문하고 죽이고 추방했으며, 밖으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주변 국가나 종족을 침략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다.

종교재판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였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800여 년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을 15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아내고 가톨릭 제국을 세웠다. 당시 스페인 인구는 2,000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200년 후에는 6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종교재판에 의해 유대인이나 이슬람 신도들이 학살되거나 추방됐으며, 불신자들이 처형당한 결과였다. 1987년 11월 미국에서 발행된 《재림뉴스》는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운동이 벌어진 이후 가톨릭이 죽인 신교도 숫자는 무려 5,00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다.

전 유럽에 걸쳐 자행됐던 마녀사냥 또한 가톨릭의 대표적인 악행이었다. 일단 마녀로 찍히면, 여인들은 온갖 고문 끝에 마녀로 둔갑되고, 마녀임을 고백하면 화형이나 냄비구이(냄비 속에 넣고 찜 쪄 죽이는 방법) 등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다. 마녀의 재산은 고발인과 고문관에게 주어지므로, 너도나도 마녀 고발에 열을 올렸다.

침략과 정복은 교회 권력에 의해 직접 자행되거나, 아니면 세속 권력과 결탁해 자행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원로 신학자인 조찬선 목사는 저서 《기독교 죄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독교는 타 종교를 무시하고 정복한 대표적인 종교였다.”라고 고백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십자군 전쟁과 중남미 대륙 침략이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회복하는 게 하나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 정교회를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상대는 이단으로 규정된 정교회나 이교도인 이슬람이었다. 1099년 시작된 제1차 원정 이후 200년 동안 8차에 걸쳐 원정이 이뤄졌는데, 마지막엔 어린이 십자군까지 구성되기도 했다.

원정 당시 출정을 독려하던 성 버나드는 이런 설교를 했다.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 바란다. 악인을 처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악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이다." 히틀러의 연설과 비슷하다.
이런 종교적 광기 속에서 십자군은 이교도나 불신자를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은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자랑스럽게 기록한 수기에서 잘 드러난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이런 살육전을 벌였지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장악한 건 1099~1187년 및 1229~1244년 동안뿐이었다. 이후 20세기 초까지는 이슬람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인데도 십자군은 피바다로만 만들고 패퇴했으니, 그들의 신은 이슬람의 알라에게 패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은 열등한 존재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900여 년이 흐른 뒤인 2001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16세기 선교를 빌미로 중남미에서 자행된 가톨릭의 침략과 약탈, 학살은 그 야만성에서 십자군의 만행을 넘어선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상륙한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대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구실로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고 타락한 영혼이기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런 목적에서 원주민들을 합숙시켜 남자들은 금을 채굴시키려고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그들을 짐승 취급한 탓에 그들의 식사로 잡초를 주었다. 영양부족으로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대부분 죽었다. 살아남은 건강한 원주민은 노예로 팔아 돈을 챙겼다.

군대는 원주민의 생명과 문화를 멸절시켰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미개인의 복음화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 믿었던 까닭에 이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세기 중에 중남미의 원주민은 잉카문명의 발상지 페루 일대에서만 전체 인구의 94%에 해당하는 840만~1,450만 명이 사라졌다. 중남미에서 전체적으로는 6,000만~8,000만 명이 학살과 기아 그리고 유럽에서 전파된 전염병에 죽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유럽의 가톨릭 제국은 자신의 땅보다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정복하고, 중남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유럽인 중에는 무식한 야만인에게 복음을 전달하여 구원받게 해 주었고, 서구 문명을 전해 문명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해 줬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 원주민이 처한 현실이 웅변하듯이, 원주민에게 기독교는 고통과 박해와 죽음을 뜻할 뿐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기독교는 세속의 정치권력과 결합해 유럽 안에서도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다. 가톨릭이나 정교회 혹은 개신교 등 형제 종교를 상대로 한 청교도 전쟁, 100년 전쟁,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등이 그것이다.

 30년 전쟁은 종교적 신앙과 세속 권력이 연합해 적대 관계의 국가나 신앙인을 멸절시키려던 대표적인 종교전쟁이었다. 독일을 무대로 보헤미아 지역에서 발발했지만,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주변 국가들이 가담한 국제전이었다.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이 이뤄져 독일은 그야말로 폐허로 변해 버렸다. 결국 승패와 관계없이 가톨릭과 개신교는 공멸을 피하고자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신교의 경우

가톨릭의 적폐를 극복하고자 종교개혁운동이 벌어졌지만, 그 결과 출현한 개혁교회 역시 독선을 버리지 못하고 가톨릭의 잘못을 되풀이했다. 루터는 유대인을 독사의 무리라고 비난하며, “모든 유대인은 독일에서 축출해야 한다.” “유대인을 교수형에 처할 때는 일반인보다 여섯 배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장 칼뱅은 가톨릭의 종교재판과 동일한 형태와 내용의 종교재판소를 운영했다. 특히 정통과 이단에 대한 이분법으로 말미암아 칼뱅주의는 지금도 불화와 충돌의 화약고 구실을 한다.

16세기 중반 제네바에서 이른바 홀리시티(성시, Holy City) 실험을 한 칼뱅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신정정치를 펼쳤다. 그가 통치하던 5년간 칼뱅은 인구가 13,000여 명에 불과하던 제네바에서 종교재판을 통해 58명을 사형했고, 76명을 추방했다. 사형된 사람 가운데 35명은 화형을 당했다. 한때 그와 함께 성시화 운동을 하던 페랑이나 버틀러 등은 쫓겨나거나 아니면 제 발로 제네바를 탈출했고, 그의 신학적 경쟁자인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직접 고발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칼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의 혐의는 그야말로 하찮은 것들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설과 유아세례를 부정했다는 혐의였다. 그의 예정설을 부정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살상을 위선이라고 비난한 사람도 극형을 당했다.

세례받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파와 여섯 아이의 어머니를 처형했으며, 그의 신학 이론을 반대한 사람은 국사범으로 몰았다. 고문 방법도 가톨릭의 마녀재판 이상이어서, 발바닥을 불로 지지거나 사지를 밧줄로 잡아당기는 고문, 온몸을 칼로 난자하는 고문, 해충들에게 뜯어 먹히도록 하는 고문을 가했고, 자살을 막으려고 밤낮으로 손뼉을 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제네바 시민은 모두 가정생활까지 사찰당해야 했고, 싸움을 했다거나 투정을 부렸다거나,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거나 하면 가차없이 투옥됐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감옥이 차고 넘쳐 더 이상 죄수를 가둘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위한 근거가 교회 규정이고, 이 규정을 집행하는 집단이 장로회였다. 장로회는 일 년에 한 번 이상 각 가정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 중 제네바에선 춤과 술은 물론 음악과 연극 따위가 모두 사라졌다.

한때 칼뱅의 동지였던 당대의 인문학자 카스텔리오는 칼뱅에 의해 세르베투스가 살해당한 것을 보고 이렇게 비판했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칼뱅이 집대성한 교리는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계승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 근본주의의 뼈대를 이룬다. 영국 성교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해 혁명을 일으킨 청교도 역시 칼뱅주의의 일파였다. 스코틀랜드는 16세기 중반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고, 북아일랜드로 건너가 정착한 신도들로 말미암아 북아일랜드는 아직도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영국의 청교도는 성공회의 핍박에 밀려 북미대륙으로 이주하는데, 지금까지 칼뱅주의 근본주의적 교리를 유지하는 보루 구실을 해왔다. 이들은 세속의 권력과 법 위에 그리스도의 율법을 두고, 그에 복종하는 것을 최고의 의무이자 덕목으로 삼았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청교도들 역시 처음 북미 대륙에 정착할 당시 원주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주민에게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잠잘 곳을 얻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생명까지 빼앗는 침략자, 학살자로 돌변했다.

당시 교회와 성직자는 이주민 사회의 중심 구실을 했는데, 칼뱅주의의 독선에 젖어 있던 목사들은 원주민을 단지 이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영혼조차 없다고 설교했다. 이런 믿음에 따라 이주민은 아무런 가책 없이 원주민을 내쫓고 죽였다. 중남미에서 가톨릭이 했던 것보다 심했다. 그 결과 최초의 이주민이 북미 대륙에 발을 디딘 후 300여 년 만에 북미 원주민의 대다수 부족은 멸종했다.

원주민만이 아니라, 원주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던 야생 들소도 6,000여만 마리나 죽여, 이젠 멸종 위기 동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살아남은 원주민 역시 황무지와 다름없는 곳에 수용돼 살고 있다. 북미 대륙 침략자들은 이런 지역을 보호구역이라고 부른다. 지금 백인의 평균 수명은 76~78세에 이르지만, 원주민은 40세 중반에 불과하다.

청교도들은 북미 원주민에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을 아프리카 흑인에게도 했다. 그들은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지난 300여 년간 아프리카에서 1,200만~1,500만 명의 흑인을 잡아와 북미 대륙은 물론 중남미에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들이 자랑하는 부(富)는 바로 원주민에게서 착취한 땅 위에 흑인 노예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이슬람의 경우

기독교는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라는 예수의 말에 따라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원칙으로 했다. 일종의 정치 불개입 선언이다. 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교회는 교회와 신앙 그리고 교인에 관한 한 세속 권력의 개입을 일체 배제하고, 교회가 전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 때문에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은 때론 갈등하고 때론 타협하며 지내왔다.

대부분 시기, 정치권력은 통치 수단으로서 종교의 효용성을 이용하고자 일정한 권력을 교회에 할애했다. 교회는 세속 권력에게서 교회 내 배타적 지배권을 인정받아 좋고, 세속 권력은 권력 행사의 정통성을 부여받아 좋았다. 각종 학정(虐政)에 대한 면죄부도 받았다. 이런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영합은 안에서는 종교재판과 마녀재판, 밖으로는 이민족에 대한 침략과 약탈, 학살 등을 자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재자도 두지 않았다. 교회와 같은 기관도 없고, 경전을 해석하고 신의 계시를 전하는 성직자도 없다. 신의 이름을 빌려 세속이든 교회이든 권력을 휘두르는 자나 기관의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종교법과 세속법도 하나고, 모스크와 국가도 하나인 신정일체의 체제였던 것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토대로 국가를 건설한 데서 비롯됐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 아랍의 각 부족을 하나로 묶어 이슬람 국가를 형성했으며,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교리를 통치 이념이자 지배 원리로 삼았다. 이슬람 국가들이 이슬람을 텐트, 통치자를 기둥, 국민은 밧줄과 말뚝으로 비유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알라는 국가와 종교의 유일한 최고 주권자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알라의 계시로 내려진 경전, 샤리아뿐이다.

이렇듯 이슬람은 태생부터 신정일체를 원칙으로 삼은 탓에 다른 종교를 지배하는 것에도 관심이 별로 없지만, 다른 종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이 희망하는 건 대부분 독립적인 이슬람 국가의 건설이다. 지금 이슬람이 당사자가 되어 벌어지는 분쟁이 대개 분리 독립, 이슬람 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키프로스의 분쟁도 터키 이슬람계의 북키프로스 분리 독립에서 비롯됐고, 동남아시아의 동티모르 사태는 가톨릭계의 분리 독립을 이슬람계가 저지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인도 독립 뒤 빚어진 힌두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 역시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의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옛 소련이 해체되자, 이슬람계 밀집 지역이 일제히 분리 독립에 나서 여기저기에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도 이슬람계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분쟁의 이유가 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에서도 기독교계의 지배를 벗어나 신정정치를 꿈꾸는 이슬람계의 저항으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속주의로 탈바꿈하려던 옛 소련이나 지금의 미국과, 신정국가를 유지하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맞서면서 충돌이 벌어진 경우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세속주의로, 아랍 국가들을 세속화하려는 미국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보이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아랍의 이슬람 국가들을 세속화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성은 평화

1965년 성안된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 중에는 이런 선언이 있다.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배격하는 바이다(비그리스도인에 대한 선언).” 1,600여 년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들에 대한 가톨릭의 반성이다.

아울러 앞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정신에 따라 그리스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등 역사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했던 종교들에 공식 사과와 함께 화해와 협력을 청하기도 했다.

제2차 공의회 말미에는 또 이런 선언이 포함되어 있다. “인류 사이에 평화적 관계와 화합이 확립되고, 강화되려면 지구 위 어디서나 종교의 자유가 효과적인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사회생활에서 종교생활을 자유로이 하는 인간 최고의 의무와 권리가 준수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종교의 자유 선언이다. 비록 종교적 다원주의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와는 명백하게 선을 그은 셈이다. 그동안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교도는 멸절시켜도 좋다 따위의 근본주의의 의제로 말미암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완강한 근본주의적 경향이 남아 있지만, 가톨릭은 제2차 공의회를 통해 역사적 대전환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히려 근본주의적 경향으로 퇴행하거나 이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권력과 결합을 더욱더 강력히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보수 정치세력의 후원자가 되어, 이들의 집권과 함께 비우호적 정권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부단히 재촉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은 물론 이란이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전쟁에 버금가는 압박 정책을 펼치도록 했다. 그로 말미암아 부시의 집권 기간인 지난 8년간, 지구촌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세례를 받은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 또한 미국 근본주의자에 못지않다. 미 공화당 정권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가 이미 내려진 상황에서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를 당선시켜 달라는 금식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지진해일로 30여만 명이 희생됐을 때 우상을 숭배하는 집단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유명 목사도 있었다. 게다가 모슬렘이 가장 싫어하는 이슬람 지역 내의 선교를 줄기차게 벌이는 등 전투적 모슬렘을 자극하는 도발을 계속했다.

신학자 김경재 교수는 유일신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등잔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빛은 모두가 같다. 진리를 산정(山頂)이라고 할 때 그곳에 오르는 길, 그것을 체험하는 방식은 다르다. 유일신은 숫자 하나가 아니라 크다는 의미의 '한'이라고 봐야 한다.” 문화나 역사적 차이에 따라 진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종교가 전하는 진리는, 진리의 몸으로서 신은 같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좋고 나쁨을 따지는 건 어리석다. 이 어리석음은 거기에 정치적 의도가 더해지면 프랑켄슈타인으로 돌변한다.

오강남 교수의 설명은 좀 더 친근하다. “누구나 그의 어머니는 하나다. 그리고 누구나 그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그것을 두고 나무랄 수는 없다.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다른 이들의 어머니를 무시하고 박해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존경스러운 법이다. 신도 내 어머니와 같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서 신, 언제나 아낌없이 내어주고 돌아가 쉴 수 없는 어머니로서 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 신의 이름으로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인류 평화를 외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샬롬(당신의 평화, 내 안의 평강)', '앗살라무 알사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성불하세요!'. 같은 염원을 품은 같은 뜻의 인사말이다. ♦

곽병찬 /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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