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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기획-종교갈등, 해결의 길은 없는가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이거룡 leeashram@hanmail.net

1. 서언

가르침이란 대개 '누가' '누구에게'라는 전제를 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본 글의 주제는 다소 도발적이다.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라고 격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他)'도 아니고 '이웃'에게 훈계조의 가르침이란 애당초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하긴 아직 '이웃 종교'라는 말은 우리에게 다소 서먹서먹하다. '타 종교'라는 말에 워낙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웃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난무하는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아직은 이웃 종교라는 말이 지금 여기의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장차 그래야 할 원(願)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이웃 종교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종교계에 큰 발전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등을 기대고 사는 이웃은 흔히 먼 친척보다 나은 법인데, 우리나라에서 불교와 가톨릭은 2백 년, 개신교와는 백 년 넘도록 함께 살아왔는데, 지금도 살가운 이웃사촌 관계는 요원하다. 이웃사촌까지는 아니라도 그저 눈 흘기지 않고 서로 편안한 얼굴로 바라볼 수 있는 관계만이라도 된다면 좋겠다.

아예 멀찌감치 뚝 떨어져 사는 남이라면 그냥 모른 체하고 살 수도 있겠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네 집 내 집을 가르는 울타리조차 없이 이웃이 된 지 오래니 그럴 수도 없다. 아무튼 이 불편한 이웃 관계는 어서 빨리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의 목적은 고대 인도의 다종교 상황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붓다의 견해와 역사적으로 불교가 이웃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보고, 현대 한국의 다원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 특히 이웃 종교와 화해와 갈등 해소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역할을 고찰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일 가능성을 인정해 왔으며, 불교 또한 이 전통에서 예외가 아니다.

진리는 누가 홀로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 독점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에 붓다는 법(法, Dharma)에 대한 집착을 법집(法執)이라고 하여 나에 대한 집착(我執)과 함께 버려야 할 근본 번뇌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법집은 곧 이웃 종교에 대한 미움과 갈등으로 이끌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경계한 것이다.

우선 온갖 자유사상가들과 종파들이 난립하던 기원전 6세기경 갠지스 강 동북부에서 발생한 불교의 의의 및 이웃 종교와 관계를 살펴본 후에, 인도불교사를 통하여 가장 원융무애한 불법을 인도 전역과 아시아 각지로 전파시켰던 아쇼까 왕의 법의 정복(dharmavijaya)을 살펴본다. 그런 후에 불교 자체가 지니는 다양성에 대한 배려와 이웃 종교와 관계, 나아가서 21세기 한국 종교 상황에서 불교의 역할과 전망을 논의하고자 한다.

2. 불교, 신(神)과 제의(祭儀)에서 인간 해방

불교가 흥기하던 기원전 6세기의 인도는 이미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1500년경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들어온 아리안들의 종교 베다교뿐만 아니라 드라비다족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 선주민들의 다양한 종교가 있었다. 아리안들의 베다교는 한마디로 신과 제사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주요 종교 문헌이자 인도 사상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리그베다(Rig-veda)》는 신(deva)들에 대한 찬가(sūkta)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들의 가장 특징적인 표상은 '힘'이었다. 신들은 선하기보다는 강력한 존재로, 도덕적이라기보다는 권능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초기 베다 시대는 강력한 힘을 지닌 여러 신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기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지극히 현세 지향적이었다. 신들을 물질적 번영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세속에서 소용되는 것들을 구하는 기도들이 아주 흔했다. 아들이 필요하면 신에게 매달렸으며, 소를 많이 갖게 해 달라고 신들에게 기원했다.

그러다가 브라흐마나(Brāhmaṇa) 시대에 들어서면 인간의 삶은 제사로 규정된다. 신은 오히려 뒷전이다. 신은 제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며, 제사 그 자체 또는 제사를 드리는 제관이 더욱 중요해진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제사다. 제관이 정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신은 당연히 기원의 대상을 줄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신은 마치 커피 자판기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구든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정확히 누르기만 하면 자판기는 커피를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인도 사상사에서 이 시기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사지상주의 시대라 할 만하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이 말보다 더 시대적 사조의 흐름을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신이나 제사와 같은 외적 요인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고가 극에 달하면서, 《우빠니샤드(Upaniṣad)》의 시대가 온다. 끝없이 바깥으로만 향하던 관심사가 안으로 전환한다. 베다에서는 광대한 자연의 질서와 운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빠니샤드》의 현자들은 심원한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로 돌아간다. "자존하는 진아(眞我)가 감각의 문들을 뚫자 감관들은 밖으로 향하게 된다. 이에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을 내다본다. 그러나 불멸을 희구하는 어떤 지혜로운 사람은 감긴 눈으로 배후에 있는 자아를 본다." 말하자면, 관심이 외계의 물질적인 사실에서 마음의 배후에 놓인 불멸의 내적 자아로 옮겨 간다는 것이다. 숭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신(deva)들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신, 즉 아뜨만(Ātman)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신을 타자(他者)로 여기고, 그와는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신을 섬기는 자는 무지하다고 말한다.

《우빠니샤드》는 베다 문헌의 끝 부분이며 베다 종교 사상의 연속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반(反)베다적인 성격도 다분하다. 특히 궁극적 실제를 인간의 바깥에서 조우하는 타자로 규정하는 베다의 교의를 비판하며, 궁극적 실재는 내 안에 있다는 내적 통찰을 강조한다. 또한 베다나 브라흐마나의 제사지상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며, 이 점에서 불교와 상통한다.

한편 《우파니샤드》와 동시대이거나 다소 후기에 갠지스 강 동북부에서는 다양한 자유사상학파들이 일어났으며, 그 중심에 불교와 자이나교가 있었다. 인류 정신사의 축의 시대(axial age)에 흥기한 불교는 《우빠니샤드》와 거의 동시대라 할 수 있지만, 그 전제는 《우빠니샤드》의 아설(我說)과 대척점에 있으며, 무아설(無我說)을 종지로 한다.

이처럼 갠지스 강 이북에서 여러 자유사상가가 다수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인 특성을 규정짓는 물질적인 풍요가 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철제 농기구의 도움으로 농업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농업의 번창은 상업이나 수공업에도 큰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실 원래부터 갠지스 강 이북 지역에서는 《우빠니샤드》를 중심으로 하는 바라문교 사상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바라문교는 주로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도압(Doab) 지역에서 흥기하여 그 아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놀랍게도 불교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일어나는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을 전제로 출발하는 종교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힌두교와 맥을 같이하는 동시에 또한 서구 그리스도교의 종교 체험과는 대비된다.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종교적 삶의 공통적인 출발점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도 예외일 수 없으며, 이른바 고등 종교라면 그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이 일어나는 방향은 서로 다르다. 흔히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물질적인 빈곤에서 일어나기 쉽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그와 같은 자각이 일어날 수 있으며, 대체로 보아 불교적 신행의 시작은 후자에 가깝다.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전자를 토대로 한 종교 체험이 중심에 있다.

이 두 종교 전통의 비교는 각각의 창시자의 삶을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알다시피 붓다는 왕자로 태어났다. 왕자로서 그는 물질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 가운데서 절망했다.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불교가 일어나고 사람들에게 어필하게 되는 시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기원전 6세기경 갠지스 강 동북부는 어느 때보다 물산이 풍부한 시대였다.

당시 붓다의 제자 중에는 귀족 출신의 부유한 장자들이 많았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절망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한 고통의 자각이 강했다. 나사렛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온갖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절망은 어려운 물질적인 환경과 관련을 지니는 게 분명하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의 박해를 통하여 성장한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박해를 받을수록 불같이 일어난 종교가 그리스도교였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그랬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외적인 고난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고통에 대한 자각을 밑거름으로 성장했다.

당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무파(無派, nāstika)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불교와 자이나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문 전통(Sramanism)이며 다른 하나는 짜르와까(Cārvakas) 등의 유물론자 또는 쾌락주의자들이다. 수행을 통한 고도의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문 전통과 쾌락주의가 동시대 동일 지역에서 흥기하였다는 것은 일견하여 모순이라 할 수도 있으나, 실은 그렇지도 않다. 사문 전통이든 쾌락주의든 현실에 대한 절망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이 절망한 현실은 무엇인가? 인도 사람들에게 삶은 곧 종교라고 할 때, 당시의 종교는 다름 아닌 신의 이름으로 또는 제사의 이름으로 다수 대중을 착취하는 바라문들과 그들이 주관하는 제사였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해야 하는 성례가 2백 가지가 넘었으며, 공공연하게 "바라문은 곧 신"이라는 주장이 아무 거리낌 없이 통하던 시대였다.

바라문교는 지상에서 신의 존엄을 지닌다고 스스로 선언하였던 제관들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제사를 통하여 불멸을 얻었던 신들과 동일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의 간절한 열망이었다. 이 점에서 기원전 6세기 갠지스 강 동북부에서 흥기한 불교의 무아설이 지니는 의미는 신에게서 인간 해방 또는 제사에서 인간 해방이라 할 만하며, 불교의 정체성은 철저한 무신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

훗날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하게 되는 과정은 곧 본래 무신론이던 불교 안에 점차 유신론적인 요소가 유입되는 과정이며, 이러한 경향은 곧 불교의 힌두교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도의 불교학자들이 "불교는 인도에서 자연사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3. 이웃 종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붓다 당시의 갠지스 강 동북부에는 수많은 자유사상가가 있었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에서는 붓다 당시의 여러 종교 사상가의 진리 주장을 62가지 주제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흔히 이들 중 대표적인 6가지 견해를 육사외도(六師外道)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불교와 같은 시대에 성립한 자이나교의 문헌에는 363종의 견해가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유신론을 비롯하여 유물론, 숙명론, 고행주의, 도덕부정론, 자유의지 부정론, 쾌락주의, 회의주의 등 수많은 종교 사상이 있었다. 이 시대는 가히 인도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라 할 만하며,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가르침이야말로 최고라고 주장했다.

여러 견해가 공존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가 최고라는 주장은 곧 여타의 견해들에 대한 비방 또는 폄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당시 세간에서 "누가 최고라더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대한 붓다의 견해를 청하는 일도 있었으며, 또한 붓다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며 승가를 비방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외도들의 비방에 대한 붓다의 기본 입장은 "비방에 분노하거나 싫어하지 마라."라는 것이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남들이 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하더라도 거기서 적대감을 가져서는 안 되고 기분 나빠해서도 안 되고 마음으로 싫어해서도 안 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한다고 해서 만일 그대들이 거기에 자극받아서 분노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장애가 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한다고 해서 그대들이 거기에 자극받아서 분노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대들은 남들이 말을 잘했는지 말을 잘못했는지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심지어 붓다는 남들의 칭송에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도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이와 같이 남들의 비방에 분노하지 않고 남들의 칭찬에 즐거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만일 비방과 칭찬에 반응하게 되면 그것이 비구 자신들의 수행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비방에 분노하게 되면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고 그 결과로 상대방이 비방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비방에 분노하거나 싫어하지 말라는 것은 외도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묵인하라는 것도 아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비방에 분노하지 말고 차근차근 그 내용을 들은 후에 비방의 내용이 옳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승가를 비방한다면, 거기서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비방에 분노하지 말아야 하며, 칭찬에도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의 진위 또는 우열에 대한 기준을 바깥에 두지 말라는 권고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다시 말하여 상대방이 비방한다고 하여 법이 비법(非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칭찬한다고 해서 비법이 법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법은 그 자체로 법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것은 붓다의 유언이었다.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길에서 비방이든 칭찬이든 외적인 요인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비방이나 칭찬을 듣고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실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따르는 법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와 다른 외도들의 견해가 지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범망경》에서 붓다가 당시 외도들의 견해를 62가지로 나누어 소상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62견(見)에 대한 붓다의 비판과 관련하여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그것이 결코 외도들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대내용이며 대외용이 아니다. 여기서 붓다의 의도는 외도들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외도 사상들이 지니는 문제점의 실상을 소상하게 파악함으로써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이 붓다와 법과 승가를 비방할 때, 그와 같은 비방의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에 그는 연기법에 비추어 다른 견해들을 논리정연하게 해석하고 비판했다. 붓다는 외도들에 대하여 절대 배타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범망경》에서 그는 외도들의 견해 역시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며, 따라서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외도들이 비판받는 것은 그들이 '견해의 그물(見網)'에 갇혀서 남아 있는 수행의 단계를 알지 못한 채 현재 자신의 견해야말로 궁극의 경지로 여기며 안주했기 때문이다.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도 더 훌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적멸(寂滅)과 해탈을 얻었다.
또한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말이므로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권고하지 않는다. 62견에 대한 붓다 자신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나의 말이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수용 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어떤 종교가 주장하는 가르침의 정당성을 스스로의 냉철한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검증해 볼 것을 가르쳤다. 《깔라마경(Kālāma-sutta)》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 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좋은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이미 붓다 자신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수용한 제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여러 견해에 대하여 정법에 입각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의 뜻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입장이 달랐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비판을 앞세우지 않았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라리 침묵했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설하고자 할 때에도 결코 무조건 설득하려 들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편을 사용했다. 이 점은 또한 이웃종교에 대하여 무조건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오늘날 여러 종교의 포교 방법과 큰 차이가 있다.

붓다는 겸허하고 포용력 있는 스승으로서,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고자 진정으로 도와주었다. 경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의 성장배경, 성향, 정신적 성숙 정도, 특수한 질문을 이해하는 능력 등을 살펴보아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붓다의 이와 같은 설법의 방식을 흔히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도 하는데, 병에 따라 적절히 약을 주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고귀한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이해가 따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웃 종교를 대할 때, 무조건 설득하여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도와 경우에 맞추어서 거기에 가장 적절한 가르침을 내림으로써 상대방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붓다의 대기설법은 이상적인 교화 방법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4.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붓다의 후반 생애는 교화, 전도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유행(遊行)했다. 교화의 대상은 다양했다. 국왕이나 대상인 같은 상류층 계급 인물도 있지만, 공인, 불가촉민 등의 하층 계급 사람들도 있었다. 농부, 어부 심지어는 도둑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전법을 권고했다. 전법의 초기에 바라나시에서 야샤스를 비롯한 청년들을 교화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겼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도……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여러 사람의 이익을 위해, 여러 사람의 안락을 위해, 세상 사람들과의 공감을 위해, 그리고 (천계의) 신들과 인간의 안락을 위해 가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이로(理路)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 홀로 안전하고 순결하며 청정한 행을 보이도록 하라.

이 구절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전법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붓다는 전법에 임하는 제자들에게 그것이 "여러 사람의 이익을 위해, 여러 사람의 안락을 위해, 세상 사람들과의 공감을 위해, 그리고 (천계의) 신들과 인간의 안락을 위해"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법과 포교는 불교 교단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안락과 이익, 심지어는 천계에 있는 신들의 안락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고 한 것도 특징적이다. 일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숫따니빠따》의 구절을 연상하게 하지만, 세간에 대한 모든 집착과 애욕을 끊어 버리고 꿋꿋하게 진리의 길을 가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원만한 대사회적 관계를 시사하는 언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가르침이 '출세간(出世間)'을 위한 지침이라면,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라는 가르침은 '출출세간(出出世間)'과 관련된 지침이기 때문이다.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에 따르면, 이 구절은 "예수가 제자들을 '두 사람씩 파견'하였던 것에 비하여 석존 및 불교의 전도 성격이 다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여, 초기 그리스도교는 워낙 주변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혼자서 전도를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어서 예수는 제자들이 전도를 나갈 때 반드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가게 했지만, 불교는 주변에서 아무런 박해가 없었기 때문에 둘이 한 길을 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어떤 '주의(主義)'를 강요하지 않는 종교였다. 각기 자신에게 엄격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고 가꾸며, 이웃과 협조하여 살아갈 것을 가르치므로 특정한 주의 주장에 저촉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전도는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물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 후대의 일이지만, 뿌라나라는 데칸 서부 출신의 비구가 전법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붓다는 그에게 사람들이 박해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뿌라나는 "욕을 하여도 때리지 않으므로 이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리면 방망이로 치지 않으므로 그들은 훌륭하며, 방망이로 치면 죽이지 않으므로 이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붓다는 그의 인내심을 칭찬하고 떠나게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박해는 국가권력이나 특정한 사회집단 차원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전할 때, 개인적인 차원에서 겪는 고난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같이 불교가 다른 지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큰 박해가 없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법을 중시하는 불교 자체의 특징과 관련된다. 불교는 어떤 교주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존하기보다는 법을 섬으로 삼고 자기를 섬으로 삼으며, 법에 의거하고 자신에 의거한다.

따라서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어떠한 언어 표현, 사상, 주의라도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는 사상적인 것이든 사회제도적인 것이든 모든 주의 주장을 포용할 수 있다. 법을 나타내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불교는 인도 안에서 또는 중앙아시아나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전파되어 갈 때, 불교 본래의 근본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각지의 다양한 민간신앙적 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다. 법과 각 지역의 민간신앙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둘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불교 자체가 지니는 다양성에 대한 배려와 이를 토대로 하는 포용성 덕분이다. 불교 전통 안의 다양성은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근한 예로 각 지역 불교의 비구들이 입는 가사의 모양이나 색깔이 각양각색이다. 우리나라처럼 회색이 있는가 하면, 이외에도 오렌지색, 자주색, 검은색 등 다양하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그 본래의 뜻을 잃지 않고 각지의 민간신앙적 요소를 자유로이 섭취하고 상호 변용되면서 세계 곳곳에 뿌리내렸다.

물론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역사적으로 민간신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주술적인 의례가 불교문화에 유입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불교의 타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특히 현대의 다종교 상황에서 불교의 다양성 또는 포용성은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종교나 사상이 건전하게 발달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다양성에 대한 배려가 우선하여 고려될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풍부한 내용을 담고도 여유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하나의 종교 전통 안에 다양한 요소를 포용한다는 것은 이에 걸맞은 역량이 요청된다.

5. 아쇼까(Asoka) 왕의 법의 정복(dharmavijaya)

기원전 6세기 갠지스 강 동북부에서 다수의 신흥종교 세력 중 하나로 출발한 불교가 현재의 세계종교로 성장한 기점은 어디인가? 이 물음을 대할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쇼까 왕이다. 남으로는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의 여러 나라에 전파되고, 북으로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으로, 또는 히말라야라는 대해(大海)를 넘어 티베트로 전해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아쇼까 왕의 전법 노력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불교가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붓다의 가르침 자체가 지니는 보편성이다. 시대와 장소,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성이 없었다면, 불교는 다만 한 시대를 풍미하던 한 지역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쇼까가 불교도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아쇼까의 명문 기록만으로는 불교가 마우리야 제국의 국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마우리야 제국에서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특별한 관심과 외호(外護)를 받으며 인도 전역에 그 세력을 확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불교 승단이 포교사 다수를 국내외에 파견할 수 있었던 것도 아쇼까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바브루의 칙령은 왕의 윤리강령의 토대로서 세존 붓다의 권위를 명백하게 주장한다. 이 칙령에는 왕이 불경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로 나타난다. 제국의 군주로서 아쇼까는 나라 안의 모든 백성과 종교를 포용하는 다르마비자야를 실천했지만, 그럼에도 그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1년 이상 불교 승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전력을 기울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치 후반부 10여 년 동안 그는 승가의 분열을 막고자 칙령을 내리고 이와 관련하여 책임 있는 자들을 벌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의 왕으로서 그리고 승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불교적인 국가 개념에서 왕권은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윤리적 정치사회 질서를 창조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왕은 불교가 중심 역할을 하는 사회질서의 창조 과정에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참여자였다. 아쇼까는 그 같은 왕의 전형이었다. 다르마 정책을 통하여 사회와 경제를 개조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대한 제국의 형성으로 귀결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는 제국 전체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붓다의 윤리적 가르침은 단지 명목상의 도그마로 또는 하나의 신조로 아쇼까에게 수용된 것이 아니다. 아쇼까 왕 비문들에 나타난 아쇼까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종교 상호 간의 친목, 관용, 공존이다. "모든 종교적 추구는 모든 곳에서 공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자기제어와 마음의 청정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쇼까 자신의 종교, 즉 불교에 대한 편애나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도 보이지 않는다.

천애희견왕(天愛喜見王)은 출가와 재가의 모든 종파를 보시와 여러 가지 공양을 통해 존경한다. 그러나 천애는 여러 종파의 본질을 증진시키는 것만큼 '좋은' 보시나 공양은 없다고 생각한다. 본질을 증진시키는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하지만, 그 근본은 말의 억제로서, 그것은 부당한 기회에 자신의 종파를 칭찬하고, 다른 종파들을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설사 적당한 기회라 해도 모든 경우에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다른 종파들은 '모든 경우에' 모든 표현을 통해 존경되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종파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다른 종파에도 이익을 주게 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종파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다른 종파들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종파에 대한 신앙심 때문에, '그리고' 자기 종파를 빛내고자, 자기 종파를 칭찬하고 다른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은,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종파를 더욱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법을 듣고 '그것을' 존중하려면 화합만이 선(善)이다.

아쇼까왕의 비문에서는 오히려 왕의 다종교적 접근이 돋보이며, 인도의 모든 종교적 전통들에서 강조되는 가르침이다. 다르마를 따르는 것이 '이생과 내생에서의 복지와 행복'을 공고히 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모든 종파들을 아우르는 최상의 공통분모이다. 또한 아쇼까는 결국 모든 종교가 감각의 제어와 마음의 청정을 원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천애희견왕은 모든 종파의 수행자들이 그의 영토의 어디에서나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감각의 자제(自制)와 마음의 청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쇼까는 모든 종교가 최소한 자기 수련과 마음의 청정을 추구하는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우리의 너그러움이 크다 할지라도 만일 자기 수련, 생각의 청정, 감사, 확고한 헌신이 없다면 우리는 쓸모없다."라는 것이다. 자기 수련과 마음의 청정이라는 두 가지 보편적인 덕목을 강조한다.

이러한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움을 보장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아쇼까는 결코 자신이 여러 종파에 보시하고 상을 내리는 공덕이 종교적인 추구 자체에서 오는 내적인 증진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다르마의 추구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통하여 상을 받거나 하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칙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극히 따뜻한 휴머니즘이 있으며, 모든 중생의 행복에 초점이 있다. 지극히 실천적인 특징을 지닌다. 추론으로 어떤 명제를 증명하려는 시도도 없고, 순수 지적인 인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공경과 자비의 실천만이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나 신학적인 이론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자명한 실천적 안내를 위하여 필요한 규범들을 제시한다. 그는 불교도였지만, 불교는 결코 불교도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 심지어는 외도들에게도 보여 준 관용은 그가 불교도였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물음 너머에 있다. 그는 불교도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불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6. 우리나라 다원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과 전망

우리 사회가 다원종교 사회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는 종교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양상의 다원종교 사회를 이루고 있다.

한 종교가 다수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고 나머지 종교는 소수 종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요 종교들이 비슷한 교세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종교도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특별하다. 예를 들어 인도나 중동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다수의 종교가 공존하지만, 힌두교나 이슬람교가 절대다수 종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고, 다른 종교들은 신자가 극소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불교, 기독교, 유교 등 주요 세 종교가 엇비슷한 수와 교세로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종교는 절대 신념체계이며 궁극적 종합 가치체계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에 비추어 볼 때 다종교 국가인 우리나라는 엇비슷한 교세의 절대 신념체계가 여럿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신념체계가 여럿 공존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언제나 갈등과 마찰의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와 유교, 불교와 전통 종교의 갈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기독교와 이웃 종교 간의 갈등이 많았으며, 종교 간 갈등은 흔히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1994년에 있었던 '청와대 불상 해프닝'이나 현 정부의 종교편향 문제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다원주의적 종교 이해는 단순한 문화적·사회적 필요에서뿐만 아니라 성숙한 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행을 닦는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이웃 종교 간 상호 이해와 소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단지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종교일치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사실 종교학자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종교의 의미와 목적(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이라는 저서에서 종교 간 갈등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하나의 종교'라는 개념이며, 이 개념은 오늘날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웃 종교 간의 종교적 진리 주장이나 논쟁을 화회(和會)할 수 있을까? 특히 '모든 다툼에서 벗어난 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이웃 종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선은 가는 길이 각각 다르다는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다원종교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를 인정하는 한은 '다양성 속의 통일'을 하나의 대안으로 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종교의 영역은 삶의 여타 영역과 다르다. 그것은 '절대' 신념체계이며, 따라서 한 사회 안에 두 개의 상이(相異)한 문화가 공존하는 것과 두 개의 종교 전통이 공존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다원종교사회 안에서는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내가 절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웃 종교도 절대 진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웃 종교와 갈등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절대 진리를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종교가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종교든 각 개인에게 종교적 진리는 '이미 완성된 절대'가 아니라 지금도 형성 도상에 있는 '미완의 절대'라고 해야 한다. 깨달은 자 붓다에게 연기법은 절대 진리임이 분명하지만, 깨닫지 못한 나에게는 여전히 미완의 절대일 수밖에 없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명제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출생과 역사가 다를 뿐 아니라, 강을 건너는 뗏목으로서 역할과 기능에도 차이가 있다. 이 점은 62견에 대한 붓다의 견해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뗏목은 나루에서 출발과 동시에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릴 수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뗏목은 강 건너편까지 안전하게 나를 데려다 놓을 수 있다. 어떤 뗏목을 탈 것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돕자는 것이 곧 전법이며 포교다. 붓다는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이로(理路)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라고 했다. 포교는 결코 강요일 수 없다. 그야말로 돕자는 마음의 발로여야 한다. "믿어라, 안 믿으면……" 식의 협박은 더더욱 아니다.

인류 정신사를 통하여 불교라는 뗏목은 특별하다. 대부분의 종교 전통에서는 교조의 가르침을 절대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는 일점일획도 가감해서는 안 될 절대 진리로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여래가 설한 법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수보리여! 여래가 스스로 “나는 설해야 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진리를 설한다고 해도 설할 진리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비로소 진리를 설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제21 非說所說分)

종교적 진리를 절대 진리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열린 진리관이라 할 만하다. 여래가 설한 법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법이든 도(道)든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결국 그것은 '자기부정적 상징체계'의 범주 바깥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종류의 뗏목에 불과하며, 언표불가(言表不可)의 피안은 아니다. 마침내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스스로 해체되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다만 '미완의 절대'에 불과하다.

불교는 스스로 해체되어 무화(無化)되는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며, 이 점은 여러 이웃 종교에서도 눈여겨볼 대목이 아닌가 한다. 만일 나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을 꿈꾸는 종교라면 더욱 그렇다. 알다시피 수학적 좌표로 본다 해도 중심은 제로(0) 포인트이다.

 x 좌표 또는 y 좌표 어디에도 값을 가지지 않는 것이 중심이다. 좌표 위의 어디에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좌표상의 모든 점과 이어져 있는 것이 중심이다. 불교의 무아 또는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바로 이 자리를 의미한다. 보시나 희생 봉사는 무화의 실천이며 무아에 이르자는 방편이다. 물론 여기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그 자리는 제로 포인트, 즉 희생의 자리, 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

이거룡 /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과정, 인도 마드라스대학교 라다크리슈난 연구소 (석사), 델리 대학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Ph.D.) 졸업. 동국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저서로 《아름다운 파괴》,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구도자의 나라》, 《이거룡의 인도사원 순례》 등과 역서로 《인도 철학사 1-4》, 《달라이 라마의 관용》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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