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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왜 불살생을 권하는가
특집: 불살생 선택인가 당위인가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정덕스님 avadana@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쌓은 업에 따라 여섯 가지 존재 양식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 여섯 가지 존재 양식이란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다. 이 중에서 우리 인간의 눈으로 확인 가능한 세계는 축생, 즉 동물계와 인간계뿐이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최적의 존재 양식인 반면에 동물은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이와는 별도로 붓다 재세(在世) 시부터 지금까지 동물은 아주 친근한 존재로 경전이나 어록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조주 선사의 일화를 보자.

어떤 학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학승이 다시 물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곤충,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분별하기 때문에 없다.”

조주 선사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제외하고라도 이 짧은 일화에서 개가 불성 유무의 선문답의 대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에서 느끼는 친밀감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조주 선사의 또 다른 일화를 보자.

조주 선사가 그의 시자(侍子) 문원과 못나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먼저 조주 선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마리 나귀와 같다.”
 “저는 그 당나귀의 다리와 같습니다.” 
 선사가 화답했다.
 “나는 나귀 똥이다.”
 “저는 그 똥 속의 벌레와 같습니다.”
 선사가 물었다.
 “너는 똥 속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여름 안거(安居)를 지내겠습니다.”

문답에 등장하는 당나귀와 벌레가 비유로 선택된 이유는 우리 인간들이 전생에 받았거나 내생에 혹시라도 몸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서는 불교에서 보는 동물에 대한 인식, 특히 초기불교 경전 중에서, 동물이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타 경전보다 동물 비유가 풍부한 《자따까》를 중심으로, 불교의 불살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분야에서는 특히 크리스토퍼 채플(Christopher Key Chapple)의 연구가 돋보이는데, 그의 두 논문 “Nonviolence, Buddhism, and Animal Protection,” Nonviolence to Animals, Earth, and Self in Asian tradition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3, pp.21-47)과 “Animals and Environment in the Buddhist Birth Stories,” Buddhism and Ecology: The Interconnection of Dharma and Deeds (ed. May Evelyn Tucker and Duncan Ryūken William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p.131-148)를 참고로 본 이야기를 풀어 가고자 한다.

2. 초기불교에서 보이는 동물에 대한 배려

동물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서는 불교 계율 첫 번째에 포함되어 있다. 즉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마하박가》에서 붓다는 계를 받은 비구는 한 마리의 벌레나 개미 등 살아 있는 어떤 생명체에게도 고의적으로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동식물의 복지에 관한 관심은 승가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불교 교단 초창기에 비구들은 겨울과 여름 그리고 우기 중에도 유행(遊行)을 했다. 그러자 일반 대중이 항의했다. 특히 우기에 비구들이 유행하면서 풀을 밟아 식물을 해하고, 많은 작은 생명체들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붓다는 모든 비구들이 우기에는 유행을 멈추고 안거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일반 대중의 항의는 당시에 비폭력 또는 불살생을 의미하는 아힘사(ahiṃsā)의 실천이 널리 시행되어 일반 대중이 종교단체의 구성원에게 이 불살생의 윤리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기에 충분했다.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윤리에 대한 실천은 《자따까》의 교훈적인 이야기들 속에 많이 보인다. 『자따까말라(Jātakamālā)』의 교훈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붓다는 자신이 전생에 토끼, 백조, 물고기, 메추라기, 원숭이, 딱따구리, 코끼리 그리고 사슴이었다고 한다. 동물들은 붓다가 깨우침으로 나아가는 길에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즉 동물과 인간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붓다는 깨우침을 구하게 된다.

불교에서 윤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면 동물로 태어날 수 있고, 동물도 선행을 쌓는다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니그로다미가 자따까(Nigrodhamiga-Jātaka)〉를 보자. 이 《자따까》에는 불살생에 대한 붓다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붓다는 어느 전생에서 사슴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왕은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하였고, 식사 때마다 고기를 먹었다. 그는 백성들이 생업을 영위해 나갈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사냥에 내몰았다. 참다못한 백성들이 한 무리의 사슴을 공원에 몰아다 놓고 왕더러 마음대로 잡아먹게 했다.

사슴들은 매번 모든 사슴들이 공포에 떠는 대신 순번을 정해 해당되는 사슴이 죽기로 했다. 어느 날 임신한 암사슴 차례가 되었다. 암사슴은 자신의 순서를 바꾸어 줄 것을 사정했으나 우두머리 사슴과 그 무리는 암사슴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암사슴이 붓다의 전신(前身)인 사슴을 찾아가 호소하니, 그 사슴은 대신해서 왕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사슴의 보시는 왕의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왕은 공원의 모든 사슴은 물론, 그 지역의 모든 동물, 새, 물고기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 후 왕은 불법을 배워 오계를 수지하고 남은 생을 선업을 쌓다가 다음 생으로 갔다.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붓다는 당시의 매몰찼던 사슴들의 우두머리가 데바다따였고, 사슴 무리는 그의 추종자들이었으며, 당시의 왕은 아난다였고, 그 자신은 암사슴을 구한 그 사슴이었다고 했다.

이 설화 속에서 불살생이란 대명제 앞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꿨던 왕과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려는 우두머리 사슴 그리고 독화살의 비유처럼 일단 암사슴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신을 던지는 보살사슴은, 불제자가 된 아난과 원칙론자인 데바다따 그리고 상황에 맞게 방편을 구사했던 붓다의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다.

결국 붓다는 불살생은 어떤 무엇보다도 앞서는 절대적인 원칙임을 강조하고 있고, 그의 전생인 보살사슴은 그를 대변하는 다르마의 구현자이다.

동물은 또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데 이해가 빠르다. 한 예로, 붓다가 작은 마을 외곽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는 물소에게 다가갔다. 붓다는 물소에게 무상, 평화로운 열반을 가르침과 더불어 전생을 기억하게 했다. 깊은 참회 속에서 물소는 죽어서 신들의 영역인 천상계에 다시 태어났다. 또 다른 이야기 속에서 붓다는 욕심 많은 코브라를 달래면서 그가 저지른 행동으로 지옥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 코브라는 붓다를 생각하면서 죽었고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동물과 인간의 상호 희생 관계에서, 동물이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이 동물의 연명을 위해서 살점을 떼어 주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바다나 깔빨라따(Avadāna-kalpalatā)』에서 한 코끼리가 사막에서 배고픈 여행자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바위 너머로 던지고, 사자와 코끼리는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하여 용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다.

「샤샤 자따까(Śaśa Jātaka)」는 좋은 예이다.

붓다가 전생에 토끼로 살았을 때이다. 그는 원숭이, 자칼 그리고 수달과 친하게 지냈다. 금식일을 다른 동물들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나 토끼는 남들처럼 몰래 마련해 둔 음식이 없어서 누군가 먹을 것을 구하면 자신을 주리라 생각했다. 인드라가 바라문으로 변장하여 음식을 청하니 다른 동물들은 모두 숨겨 둔 음식을 내놓는데 숨겨 둔 음식이 없었던 토끼는 자신의 몸을 묶어 불 속으로 뛰어들어 그의 몸을 음식으로 바라문에게 바친다. 그는 불에 뛰어들기 직전까지도 혹시나 그의 몸에 벌레가 있어서 뜻하지 않게 죽을까 봐 온몸을 세 번이나 흔들어 털어 낸 후에 불로 뛰어든다. 바라문은 변장한 인드라 신이었고 그 뒤 토끼의 모습을 달에 남겼다.

붓다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비록 올바로 얻은 게 아니라 몰래 숨겨 놓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바라문에게 보시하려 한 세 동물은 그의 세 제자인 아난, 목련 그리고 사리불이고 자신은 토끼였다고 한다. 바라문에게 보시하려고 불살생의 원칙도 깨고 자신을 희생한 토끼, 그리고 그 토끼가 붓다의 전신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동물에게 살생을 저지르기란 몹시 어렵다.

한편으로는 많은 우화와 탄생설화들이 자신들의 몸을 희생해 동물들을 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자따까말라(Jātakamālā)』,『수바르나뿌라바샤(Suvarṇaprabhāṣa)』 그리고 『아바다나 깔빨라따(Avadāna-kalpalatā)』에서 한 비구가 배고픈 어미 호랑이가 새끼들에게 먹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의 《자따까》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불살생의 중요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어느 때, 한 염소가 사원에 끌려와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에 의해 죽임을 당할 찰나였다. 갑자기 그 염소는 웃음을 터뜨리고 그리고 괴로운 소리를 냈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놀란 바라문은 무슨 일인가 염소에게 물었다. 염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막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제가 웃은 이유는 제가 염소로서 고생했던 지난 오백 생을 깨달은 까닭입니다.

 다음 생에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운 이유는 당신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오백 생 전에 나는 염소를 희생시키는 바라문이었습니다. 염소를 죽인 후에 나는 오백 생 동안 염소로 태어나도록 벌을 받았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운명으로 고통받을 겁니다.” 놀란 바라문은 염소를 즉시 풀어주었다. 몇 분 후에 번개가 염소를 쳤고, 염소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바라문은 염소의 자비로움으로 인하여 악업에서 벗어났다.

이 이야기는 업, 윤회, 불살생과 자비 등 불교의 중요한 기본사상을 기초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자따까》에 등장하는 동물의 분류

수평적인 윤회의 세계관은 불교가 동물을 윤리적인 범주에 넣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초기 경전의 가르침 속에 수많은 동물이 등장하고, 특히 붓다의 전생 이야기와 관련된 《자따까》에 등장하는 동물은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 주체로 그려져 있다. 많은 경우에 동물은 부처님 재세 당시 사람들의 전생을 나타낸다.

이런 동물들의 전생 행위가 현생의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어떤 경우에는 이 동물들의 상서로운 행동이 미래의 상서로운 인간의 행동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반면, 그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은 붓다와 동시대인들의 악업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따까》에 등장하는 동물 이야기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 자비롭고 현명한 동물 이야기

먼저 붓다가 전생에 딱따구리로 살던 때의 이야기인 「자와사꾸나 자따까 Javasakuṇa-Jātaka)」가 있다. 붓다는 현생뿐 아니라 전생에도 데바다따는 배은망덕했다며 전생을 이야기한다.

북인도 숲 속에 딱따구리가 살았다. 대부분의 딱따구리가 벌레와 곤충을 먹는 데 반해 한 딱따구리는 살생을 할 수가 없어서 풀이나 과일 그리고 꽃을 먹었다. 그는 남을 잘 돕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그 딱따구리는 한 사자가 목에 뼈가 걸려서 큰 곤경에 처한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는 사자의 턱을 막대기로 벌려 놓고 사자의 입안으로 들어가서, 사자가 다시금 숨 쉬고 쉽게 먹을 수 있도록 뼈다귀를 쪼아서 꺼내 주었다. 그 후에 가뭄 때문에 먹을 풀이나 과일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던 딱따구리가 그 사자 근처에 왔을 때, 사자는 영양을 잡아먹고 있었다.

사자를 시험해 보려고 딱따구리는 사자에게 전날에 자기가 베푼 호의를 상기시키며 약간의 먹을거리를 요청했다. 사자는 오만하게 대답하기를 그의 입속에 들어왔다가 살아나간 것은 그 딱따구리가 유일하니 그는 이미 딱따구리의 생명을 한 번 구해 준 셈이고, 그것으로 호의는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자 딱따구리는 배은망덕한 사자에 대해 아무런 섭섭함 없이 서둘러 자기 길을 갔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붓다는 그 거만한 사자가 데바다따의 전생이었고, 붓다는 도움을 줬던 딱따구리라고 했다. 이 《자따까》는 붓다의 전생인 딱따구리를 통해 불살생을 강조한 것으로 불살생이 차지하는 의미를 보이고 있다. 즉 어리석고 욕심 많아서 살생을 일삼던 전생의 사자였던 데바다따와 살생을 피하려 채식하던 딱따구리였던 붓다의 차이점은 불살생이다.

「수와나미가 자따까(Suvaṇṇamiga-Jātaka)」에서 붓다는 사바띠에 사는 한 여인에 대해 설할 때, 이 여인은 현생에서 남편을 애욕의 멍에에서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전생에서는 나이 든 현자를 죽음의 멍에에서 풀어주었다고 하면서 전생을 소개한다.

한 황금 수사슴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의 노력과 부인인 암사슴의 격려에도 그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때 암사슴이 사냥물을 수확하러 온 사냥꾼과 마주쳤다. 암사슴은 남편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놀란 사냥꾼은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사람들도 왕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이 무슨 일인가? 이 동물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는구나.”라며 그들 둘 모두를 풀어주었다. 사냥꾼이 마음을 바꾼 것에 감사해서 후에 수사슴은 먹이 터에서 발견한 보석을 사냥꾼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사냥꾼이 모든 살생을 떠나서 가정을 이루고 선한 일을 할 것을 간청했다.

이야기 말미에 붓다는 당시의 사냥꾼은 붓다 재세 시에 외도들과 어울린 찬나 비구였고, 당시의 암사슴은 현생의 현명한 여인네였으며 자신은 수사슴이었다고 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에서 동물들은 선행을 하고 인간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인다. 첫 번째 경우에, 붓다는 보시와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에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힘을 가르친다. 특히 두 이야기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불살생을 상기시키고 살생을 금할 것을 권하고 있다.

2) 어리석은 동물 이야기

자따까에는 현명한 동물만큼이나 어리석은 동물도 등장한다. 「고깔리까 자따까(Kokālika Jātaka)」를 보자.

여러 해 전에 바라나시에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나쁜 습관을 가진 왕이 있었다. 한 현명한 대신이 왕의 습관을 고쳐 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차였다. 어느 날 왕이 정원에서 뻐꾸기 둥지가 있는 망고나무 밑에 앉았다. 원래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를 만들지 않고 까마귀 둥지에 알을 낳는 새였다.

어미 까마귀는 뻐꾸기의 알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알이 부화할 때까지 보살피고 부화한 뒤에도 먹이를 먹여 주며 길렀다. 둥지 밑에 왕이 앉아 있던 그때,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새끼가 불행하게도 어미 까마귀와는 전혀 다른 뻐꾸기 소리를 냈다. 어미 까마귀는 놀라서 부리로 어린 뻐꾸기를 쪼았다. 그러고는 둥지 밖으로 던졌다. 어린 새끼는 왕의 발밑에 떨어졌다. 왕이 무슨 일인지 묻자 현명한 대신이 잘못 튀어나온 말보다 더 위험한 독이나 칼은 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왕이 그 교훈을 알아듣고 자신의 말수를 줄였다.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붓다는 당시의 현명한 대신이 자신이며, 말 많은 왕은 출가자들 중 수다쟁이인 고깔리까라 했다.

「라뚜끼까 자따까(Laṭukika Jātaka)」에서 붓다는 두 마리 코끼리의 이야기를 한다.

두 코끼리 중 한 마리는 무리의 지도자였고, 다른 한 마리는 불량배였다. 어느 날 우두머리 코끼리가 갓 부화한 새끼들이 딸린 어미 메추라기를 만났다. 메추라기는 우두머리 코끼리에게 자신의 새끼들을 보호해 줄 것을 간청했고, 우두머리 코끼리는 휘하의 팔만 마리 코끼리들에게 그 새들 주위를 지날 때는 조심스럽게 지나가도록 명령했다.

우두머리 코끼리는 어미 메추라기에게 혹시 지나갈지도 모르는 불량배 코끼리에 대해서 주의를 주면서, 자신에게 간청한 것처럼 불량배에게도 새끼들을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도록 충고했다. 불량배 코끼리를 만난 어미 메추라기는 조심스럽게 지나가 달라고 간절하게 청했으나, 심술궂은 불량배 코끼리는 어미의 부탁을 무시한 채, 왼쪽 발로 어린 메추라기를 짓밟았다. 자신의 새끼를 잔악하게 죽인 데에 분노한 어미 메추라기는 복수할 방법을 찾아서 까마귀, 파리, 개구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메추라기를 돕기로 했다. 먼저 까마귀가 불량배 코끼리의 눈을 쪼아서 빼내자, 파리가 빈 눈구멍에 알을 깠다. 파리알들이 구더기로 변해 코끼리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일으켰다. 코끼리는 고통을 줄이려고 미친 듯이 물을 찾았다. 메추라기의 인도하에 개구리가 산꼭대기에서 그 코끼리를 절벽으로 유인하려고 개골개골 울었다. 그러고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서 다시금 개골개골 울었다. 물을 찾아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쫓던 코끼리는 갈라진 틈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산 밑으로 굴러떨어져 죽었다.

당시의 호의적인 우두머리 코끼리가 붓다였고 불량배 코끼리가 데바다따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후에 붓다는 “비구들이여, 누구에게도 적의를 품게 하지 마라.”라고 설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뻐꾸기와 관련하여 과도한 수다라는 나쁜 버릇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조건적인 파괴 행위, 즉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자신의 목숨이라는 교훈을 보이고 있다.

4. 육식의 문제와 동물 보호

불교에서 불살생을 논의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육식의 문제이다. 붓다는 교단 초기부터 바라문교가 제식을 위해 행하는 동물 희생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마하바가숫다』에 “출가한 승려는 의도적으로 작은 곤충을 포함해 살아 있는 어떠한 생명도 살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불살생 계율을 제정한다. 이때부터 불살생 계율은 불교도의 행동 강령의 기본원리가 된다. 하지만 붓다는 채식주의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불살생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직접적인 살생으로 간주되는 세 가지의 금지 조항을 붙여 육식을 허용하였다.

「떼로와다 자따까(Telovāda Jātaka)」에서 붓다는 나다뿌따(Nāthaputta)라는 이름의 자이나교 사문을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그는 붓다가 고기 음식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붓다는 그가 바라문으로 바라나시에서 살던 때를 얘기했다.

나이가 든 바라문이 종교 생활을 하려고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소금과 향신료를 얻으려고 주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하던 중 어느 부자가 계획적으로 그를 식사에 초대해 고기를 대접하고는 그가 고기를 먹었다고 조롱했다. 바라문은 대답하기를, “만약에 성인이 고기를 먹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하며 율장을 인용했다. 즉 그의 제자들은 악의적이거나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음식이든 관습적인 것이라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무리에서 붓다는 당시의 바라문이 자신이었고 나타뿟따는 그 부자였다고 설했다. 바라나시가 배경인 또 다른 이야기 「띠띠라 자따까(Tittira Jātaka)」에서 붓다는 한때 높은 정신적 경지를 터득한 바라문 사문으로 살았다.

한 들새 사냥꾼이 자고새들을 꾀여서 덫으로 유인하려고 한 마리의 자고새를 붙잡아 유인하는 새로 훈련시켰다. 유인하는 역할로 붙잡힌 새는 자신의 임무를 거부했다. 그러자 사냥꾼은 그 새가 말을 들을 때까지 대나무로 머리를 때렸다. 자고새는 자신이 사냥꾼과 공모하여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 하고 크게 괴로워했다.

어느 날 들새 사냥꾼이 자고새를 강가에 있는 위대한 사문의 움막으로 데리고 갔다. 사냥꾼이 자는 동안, 자고새는 자신이 다른 자고새를 유인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사문에게 물었다. 바라문은 그 새의 마음에 악의가 없다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였다. 자책하는 마음에서 풀려난 자고새는 사냥꾼에게 다시 끌려갔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붓다는 자신은 당시의 사문이었고, 아들 라훌라가 자고새였다고 말했다. 붓다도 때때로 환경이 타협을 강제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말해 주는 예화이다.

위의 두 이야기는 불살생이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붓다의 생각을 보여 준다. 붓다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의도(intention)이다. 붓다는 불살생이라는 문제에 교조적으로 비타협적으로 매달리는 자이나교와는 달리 주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다. 한편 김수아는 초기 불교의 육식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붓다의 육식 허용은 당시의 사회 환경에 맞추어 불살생의 근본정신을 적절히 실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붓다의 불살생 계율은 모든 생명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모든 중생에게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본다면 생명을 살생하거나 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동물이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편견 자체는 불살생 정신에 어긋난다. 초기부터 교단이 부정하게 취급되는 낮은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도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초기교단의 육식 허용은 동물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거부이다. 그러므로 동물에 대한 불교의 태도와 더불어 초기불교에서 육식의 허용은 단순한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편견에 대항하는 불살생 정신의 선양임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의 생명과 관련하여 「둠메다 자따까(Dummedha Jātaka)」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한때 바라나시의 왕자였던 붓다는 제를 지내느라 양, 염소, 가금류, 돼지와 다른 동물들이 대규모로 희생되는 것에 놀랐다. 왕인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는 해마다 동물을 죽이지 않고 특별한 반얀 나무의 신성에 자신의 제사를 드렸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왕위에 올라 나무를 섬기는 그의 신앙의 모습을 백성에게 드러냈다. 그는 나무에게 불살생의 계를 범한 사람들 천 명의 생명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고 선언했다. 일단 이를 공표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동물 희생을 영원히 포기했다. 따라서 단 한 명의 백성도 다치는 일 없이 계를 지켰다.

이것은 무고한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나쁜 희생제를 포기하게 하는 불교의 자비 실행을 말한다. 신을 달래고자 동물의 피를 보아야 하는 바라문식의 희생 의례에 반대하는 주제는 「로하꾼비 자따까(Lohakumbi Jātaka)」에서 계속된다. 붓다가 제타 숲에 머무를 때, 코살라 왕에 관해 설했다.

어느 저녁에 왕은 네 번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는 일단의 바라문들에게 문의했고, 그들은 왕에게 고하기를 어둠 속의 소리는 조만간에 파괴가 일어난다는 징조이니 신들을 달래려면 왕은 네 번의 희생 제의를 올리고 사람, 소, 말, 코끼리, 메추라기와 다른 새들을 네 마리를 한 묶음으로 해서 죽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라문들은 즐거이 불구덩이를 만들고 제례에 바칠 희생물들을 모으고 그들이 맛볼 진미와 그들이 얻을 재물에 들떠 있었다.

이런 일에 회의적인 말리까 왕비는 왕에게 붓다에게 조언을 받을 것을 권했다. 왕은 제타 숲으로 와서 밤중의 네 가지 소리에 관한 그의 걱정을 붓다에게 말했다. 붓다는 이는 오래전에 일어난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계속해서 붓다는 바라문 중에 그렇게나 많은 중생을 죽여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한 바라문에 대해 얘기했다. 그 바라문은 한 사문과 정원에서 마주쳤다.

사문은 왕이 밤중의 소음들의 진짜 원인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바라문은 사문을 왕에게 인도했고, 사문은 왕에게 설명하기를 네 가지 소리는 오래전에 부정을 저지른 네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들의 죄의 결과로 그들은 네 개의 철가마솥에 태어나도록 벌 받았고, 거기서 삼만 년 동안 머무르면서 주기적으로 가마솥 꼭대기까지 끓어올라서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과거 바라나시의 왕이 들은 것은 이 신음소리이고 코살라의 왕도 같은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과거세에 제타 숲에서 사문이었던 붓다는 존경받는 왕들에게 그들이 네 가지 소리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결과적으로 두 왕은 희생제를 취소시켰고 많은 희생물을 풀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바라문의 희생 제례를 비웃으면서 잘못된 개념과 탐욕이 그러한 행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이야기는 또한 잘못된 행위에 대한 업의 불가피한 심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바라문의 희생 제례가 그만 없어져야 한다는 개념을 강조한다. 두 이야기 모두 동물들의 생명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불교 계율을 상기시킨다.

5. 불살생과 생태학

「루까담마 자따까(Rukkhadhamma Jātaka)」에서는 물에 대한 권리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 붓다는 히말라야에서 사라나무의 정령이었던 그의 과거 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사바 왕 재세 시에 나무들과 관목들과 식물들이 모두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되었다. 미래의 붓다인 나무는 그의 일족들에게 야외에 홀로 있는 나무들을 피해서 숲 속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하라고 충고했다. 현명한 식물 정령들은 그의 충고를 따랐으나 멍청한 식물들은 나무를 섬기는 마을 사람들이 올리는 공양을 받으려고 숲을 떠나 마을과 도시 외곽에 제각각 따로따로 자라는 커다란 나무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강한 바람이 마을을 휩쓸었다.

홀로 선 나무들은 풍요로운 농장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았지만 큰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가지는 잘라지고 몸통이 넘어가고 뿌리가 뽑혔다. 모조리 바람에 의해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거처가 파괴되어 희망이 없는 정령들은 자녀들을 가슴에 앉고 히말라야로 떠나갔다. 그러나 폭풍우가 미래의 붓다가 사는, 서로 어울려 울타리를 친 사라나무 숲을 덮쳤을 때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이는 후에 붓다가 물을 두고 싸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합심할 것을 권할 때 다시 설해진다. 이 이야기는 숲의 교훈을 통해서 상호연결된 생명의 힘을 강조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꾸산잘리 자따까(Kusanjāli Jātaka)」은, 미래불이 쿠사풀 덤불이 되어 튼튼한 몸통을 가진 아름다운 소망나무 근처에서 가지를 뻗치면서 머물고 있던 때의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소망나무의 정령은 한때 강력한 여왕이었다. 풀은 이 고상한 나무의 가까운 친구였다. 근처에 바라나시의 브라흐마다따 왕의 궁전에 중요한 나무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불안정하여 매우 위태로웠다. 왕은 자신의 목수들을 보내서 기둥을 대신할 나무를 찾도록 했고, 그들은 소망나무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 나무를 자르기 주저했으나 대체할 만한 다른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왕에게 자르지 말기를 호소했지만, 왕은 그의 지붕을 견고히 하려고 그 나무를 자르라고 명했다. 목수들은 용서를 구하면서 나무에 희생 제례를 올렸고, 그다음 날 자르러 올 것이라 말했다. 나무가 눈물을 터뜨리자 숲 속의 여러 정령들이 그 나무를 위로하러 왔다. 그러나 아무도 목수들을 저지할 방도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마침내 쿠사풀이 자신에게 계획이 있다면서 그 나무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쿠사풀은 카멜레온처럼 자기 모습을 바꿔 그 나무의 가지들부터 나무뿌리까지 온통 구멍이 난 것처럼 만들었다. 나무를 자르러 온 목수들이 보더니, 썩은 나무를 전날 제대로 검사하지 않은 것이라고 소리쳤다. 살아나게 된 고상한 나무는 기쁨에 겨워 목숨을 살린 쿠사풀 덤불에게 감사했다. 그 나무는 숲의 정령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무엇이든 살아 있는 현명한 것들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붓다는 아난다가 그 나무 정령이었고 자신은 쿠사풀 정령이었다고 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남을 돕고 사회 지위와 관계없이 서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도덕적인 이야기로 사용되었지만, 또한 한 나무를 구하는 것이 숲의 보존은 물론 더 큰 생태계의 번창에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생태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또 다른 이야기는 「위아다 자따까(Vyaddha Jātaka)」이다.

붓다는 나무 정령으로 숲 속에 살고 있었다. 이 특별한 숲 속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을 잡아먹고 썩은 찌꺼기만 남기는 사자와 호랑이가 살고 있었다. 이 야수들의 잔인함 때문에 사람들은 숲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나무 한 그루 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무 정령들 중 멍청한 정령 하나는 사자와 호랑이가 죽인 희생물들에서 나는 악취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붓다 나무의 충고를 무시한 채, 정령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야수들을 놀라게 해서 내쫓았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사자나 호랑이의 흔적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자, 숲 일부분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멍청한 나무 정령은 후회하며 동물들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동물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숲의 정령들을 몰아낸 사람들은 나무를 다 베어 내고, 밭을 일구어 경작을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은 자신의 평화를 위해 주변 상태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적인 시각에서 보면 야수들의 존재는 생태 체계 안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균형이다. 생태 균형은 야수들이 쫓겨난 후에는 회복될 수 없으며 대지는 남벌을 피하지 못하고 농사에 사용되고 만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불교 우주론에서 통합적인 자연의 생명 형식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 인간의 의식은 동물과 나무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관찰에 의해 알려지고 형성된다. 붓다에 따르면 우리는 동물과 식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한때는 동물이었고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붓다 재세 시에 농업과 도시 건설이 자연을 위협할 때 나무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다. 멍청한 숲의 파괴 같은 세 번째 경우에 붓다는 그러한 행위의 단견을 인정하면서 미래의 생명 체계 파괴 같은 것을 피할 수 있도록 현대인에게도 유용한 교훈을 준다.

6. 맺는 말

《자따까》에 등장하는 동물 이야기는 선악의 두 가지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사나운 동물들의 난폭성을 강조하여 신체적 폭력이나 모욕 등으로 사람들을 상해하고 피해를 주는 것을 피하라는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자비행을 포함한 동물들의 선업을 칭송한 내용이다.

또 붓다는 동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희생제에 동물들이 쓰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 다른 이들을 구하려는 동물들을 높이 평가한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교훈적인 설화들을 통해, 불교의 윤리를 가르치고 특히 불살생에 관해 거듭해서 강조한 것이다.

불교에서 동물의 이야기는 생명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전환, 그리고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 원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를 지지하는데, 첫째는 윤회 이론은 생명이 어떤 미래의 형태로 계속된다는 것을 보이고, 둘째로는 다겁생의 윤회는 무수한 가족 관계를 형성시킨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생은 불살생 계율에 따르면 존중되어야 하는 생명의 상호 연결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대개는 동물들을 칭송하거나 이상화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의 나쁜 점을 종종 드러내고, 다른 동물들에게 잔인한 것으로 묘사한다. 게다가 동물을 다루는 인간은 항상 친절하지 않게 표현된다. 미래에 붓다가 될 자가 거북이를 죽이거나(「까짜빠 자따까(Kacchapa-Jātaka)」) 혹은 동물들의 거처에 대한 인간의 파괴도 나타난다.

《자따까》 이야기에서 동물은 동물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인간성(의인화된 동물)이나 인간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동물로 보인다. 붓다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현생과 내생을 결정하는 선택을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붓다가 생각한 이유는 그는 동물에 대해 매우 친숙했다는 점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현대 사회보다 훨씬 유동적이었던 시기와 장소에서 살았다.

원숭이, 코끼리, 메추라기, 뻐꾸기 등의 동물에 대한 그의 묘사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다. 자연세계에 대한 직접 관찰을 통하여 지혜가 생기고 자연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동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도 인간의 의식은 깊이를 더하고 더욱 풍요로워진다. 따라서 자연세계의 다양한 생명은 붓다와 초기불교도들에게 상상력을 제공했고, 그리하여 수많은 동물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동물과 인간 행동에 대한 붓다의 통찰이 《자따까》 이야기들을 매우 효과적인 교육의 도구가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존중은 붓다 사후 아쇼까 왕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다. 그는 생명 존중을 매우 강조해서 처음에는 요리용으로 짐승을 죽이는 것을 제한하다가 끝내는 그마저도 완전히 금지했다. 아쇼까는 동물이 비구들의 음식물로 사용되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거나, 그렇다는 말을 듣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되지 않는 고기와 생선이라야 했던 남방불교보다 더 엄격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엄격한 불살생 강조는 《자따까》 등을 통해 보이는 동물로 상징되는 주변 환경에 대한 불교의 존중이 그 바탕임을 알 수 있다. ♦

정덕스님 /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 석사, 옥스퍼드대 철학박사. 현재 중앙승가대 역경학과 전임강사. 대표 논문으로는 <아바다나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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