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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폭력, 그리고 정치
김호성(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김호성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 인도 오릿사의 폭력(Orissa Violence)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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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3일, 인도 오릿사의 한 아쉬람(ashram, 공동체 또는 사원)에서 세계힌두협회(Visva Hindu Prasad)라는 힌두교 단체의 지도자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Swami Lakshmanananda)를 포함한 5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모택동주의자(Maoists)의 소행이라 한다.

인도에는 합법적인 공산당도 있고, 현재에도 께랄라(Kerala) 주와 웨스트벵갈(West Bengal) 주에서는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비합법 공산당 조직도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번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오릿사 주의 칸다말(Khandamal)이라는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습격을 당하였다. 또 교인들의 집이 방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어제까지 열 명이 죽었는데(내가 인도를 떠나던 날까지 스무 명이 죽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광란의 만행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오릿사 주정부와 경찰은 이러한 광란의 만행을 효과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고 있다. 통제력을 상실한 모습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를 종합해 보면, 상황은 이렇다. 세계힌두협회의 지도자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 등이 살해당하였고, 그 범인은 모택동주의자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힌두교 우익단체인 이 조직과 또 다른 조직에서 총파업(Bandh)을 행하면서, 그 불똥이 가톨릭으로 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발표는 세계힌두협회 지도자 살해 사건에 교회가 관련된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한다. 〈힌두신문(The Hindu)〉의 사설은, 설사 그 범인 중 하나가 교회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교회 전체에 폭력과 방화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힌두 단체의 조직적 움직임으로 힌두들이 그러한 반문명적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CNN-IBN 방송은 8월 26일 저녁, 이 사건을 다루면서 “개종 문제가 힌두들을 크리스천과 싸우게 하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또 패널 세 사람이 나와서 토론하는 장면도 보여 주었다. 세계힌두협회 지도자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 사망 사건으로 교회가 테러와 방화를 당하는 간접적 정황증거로서, 신문은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가 평소 힌두에 대한 교회의 개종 노력에 대해서 그것을 저지하거나, 이미 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을 다시 힌두교로 재개종시키는 일에 종사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니, 힌두들 생각에는 사실(모택동주의자의 범죄) 여부를 떠나서 '세계힌두협회의 지도자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에 대해서 교회 쪽에서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와미 락크쉬마나난다는 교회 때문에 죽었다. 그러므로 교회에 보복, 응징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음 직하다. 얼마나 큰 비논리적 비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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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오릿사의 현지 분위기는 ‘들끓고 있다’고 하거니와, 더 이상의 충돌이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말은 ‘개종’이라는 말이 갖는 역사적 의미이다. 일단 힌두교는 이슬람교나 기독교나 불교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 종교이다. 후자의 종교들에는 창시자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힌두교는 누군가 만든 사람이 없다. 만든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인도라는 역사’일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힌두교도는 힌두교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힌두교도로 태어난다.”라는 것이다.

그러니, 힌두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생활이나 그들 삶의 전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누법전》과 같은 종교적 관습법에 따라서 규율되면서 인도라는 사회를 규정해 왔다는 점에서, 힌두교는 인도에서는 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도라는 체제’인 셈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힌두교도에 대한 개종을 전제로 하는 교회 측의 선교 노력은, 힌두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체제 뒤흔들기’ 내지 ‘반체제 활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교회 측이 어느 만큼 감안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서 갈등의 상황은 예상될 수 있고, 그 역사는 또 길기도 하다. 이에 대한 좋은 연구서가 《대지의 아들(大地の子)》(小谷汪之, 東京大出版會)이다.

이렇게 힌두교의 입장을 헤아려 보게 되면, 힌두교도의 일부 중에서 힌두의 정체성을 더욱 더 강하게 내세우면서 지켜 가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됨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힌두트바(hindutva)’라는 개념 속에는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없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힌두트바는 힌두주의 또는 힌두적 정체성으로 옮길 수 있는 단어인데, 세계힌두협회 역시 이러한 힌두트바를 이념으로 한 단체이다.(그러나 힌두트바는 실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념인데, 이 이념과 그를 내세운 정치세력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O.N. 크리슈난(Krishnan)의 《힌두교냐 불교냐(Hindutva or Dhammatva)》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힌두 측의 힌두트바에 대한 문제 제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설사 ‘인도 사회가 힌두라는 체제 속에 있다(사실, 그렇지 않다. 인도에는 이미 이슬람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이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개인의 일이고,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는 서구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개종이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이제 ‘힌두트바 대(對) 개종’의 갈등은 ‘전체주의 대 개인주의’의 대립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힌두교를 중심으로 해서 인도를 이해하게 되면, 인도가 힌두교의 가르침과 전통에 의해서만 운영되어 가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事實)도 아니고 사실(史實)도 아니라는 점이다. 힌두교의 전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자이나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의 존재는 차치하고서라도, 중세 이후 이슬람이라는 외부 세력의 유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힌두트바를 구현하려고 하는 정치단체나 종교단체는 공히 '인도 = 힌두교'를 꿈꾸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비극의 씨앗이자 폭력의 씨앗이다. 이제 인도에는 힌두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 시크교, 자이나교, 기독교(신교 + 구교), 불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있다. 이러한 다양성의 총합(總合)이 인도인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 불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크교도들이 펀잡(Punjab)의 분리 독립을, 잠무 카슈미르(Jammu & Kashmir)의 이슬람교도들이 카슈미르의 분리를 요구하게 되면 결국 폭력을 낳게 된다. 다양성과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인도’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임을 인정하면서 ‘인도’ 속에서 만나고 공생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편,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힌두에 의해서 암살당한 것도 그가 분리 독립을 반대하면서, ‘힌두만의 인도’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인도를 공부하고 이해함에서 ‘힌두교/힌디어’만을 중심으로 해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인도가 갖는 모든 다양성을 우리 학생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자이나, 인도의 이슬람, 시크교, 그리고 인도의 기독교까지 시야에 넣고서 인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하리라 본다.

(여기서 우리의 경우도 되살펴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특정 종교의 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행정에서 종교적 편향성이 두드러지는 일이나 ‘성시화’․‘성국화’ 구호를 내걸면서 다양한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슬로건이 종교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특정 종교의 유․불리를 떠나서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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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오릿사 사태를 보면서 드는 또 하나의 생각은 인도 종교가 너무나 정치화되어 있고, 종교와 정치가 너무나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종교다.”라는 말은, 사실상 “아힘사(ahiṁsā, 불살생, 비폭력)가 가장 위대한 종교이다(《마하바라타》, 13.116.37).”라는 말에 대한 나의 새로운 번역이다. 종교가 너무나 정치권력에 의지하여, 그들 종교를 펼치려고 한다.

이는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힌두교의 역사가 다 보여 준 바이다. 불교의 경우에는 아주 드물게 일본불교사에서 니치렌(日蓮, 1222~1282)이나 근대의 니치렌주의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니치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종교 안에서 권력 추구든, 종교를 통해서 종교 밖의 정치권력까지를 추구하든, 그 어느 경우이든 나는 참된 종교의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참된 종교인으로 보지 않는다. 아힘사와 출가의 정신은 탈권력(脫權力), 무력화(無力化)의 정신이라 보기 때문이다.(그런 뜻에서 ‘아힘사 = 출가’이기도 하다.)

내가 옮긴 호사카 슌지(保坂俊司) 교수의 책,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한 걸음․더, 2008)에는 “아힘사의 가르침을 어기면서까지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불교교단이 소멸되더라도 아힘사를 지킬 것인가”라는 딜레마 앞에서, 용감하게도 아힘사의 길을 걸어갔던 불교인들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데에 그 같은 태도가 어느 만큼 책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진리에 충실하고 가르침에 따랐던 불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평가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그들은 어떠한 권력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권력보다는 진리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상황은 매우 우려스러운 바가 없지 않다. 이미 음으로 양으로 종교(기독교든 불교든)가 정치화되어서,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터에 17대 총선에서는 통일교의 ‘평화통일가정당’이나 기독교의 ‘기독당’의 존재가 나타났던 것이다.(종교 편향에 대한 불교의 저항이 정치적으로 무시되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또 종교 편향의 극복이 곧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행히 원내 진입에는 실패했으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는 비판의식은 우리 사회의 시민들에게서나 종교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이 점을 〈힌두교와 불교에서 권력과 탈권력의 문제〉라는 논문으로 다루어 보고자 구두 발표를 한 일이 있다(2008. 5. 30. 동아대에서 열린 인도철학회에서 발표). 귀국 후에, 이번 학기에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이 논문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앞으로 종교의 종교 내적 탈권력과 종교 외적 탈권력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아직 이 점에 주의 환기를 촉구하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인도는 인도에 맡겨 두고, 돌아가자. 가서 우리를 돌아보도록 하자.

(2008. 8. 27. 인도 방갈로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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