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서(문학평론가)

근래 우리 사회에서 불교계가 정부의 종교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크게 벌린 일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특히 불교계를 업신여긴 시책 사례들을 들며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현 이명박 대통령은 그리스도교의 개신교 신자이다. 그가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도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바친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국민 중에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이들이 많이 있는데 고위 공직자가 자신의 신앙에 치우쳐서 독선적이고 편협한 언행을 보인다고 사회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 정부 기관의 여기저기에서 불교계의 불평을 살 일들이 있었다. 국무총리가 나서서 불교계에 대해 사과를 했고, 앞으로 정부가 종교계를 상대로 차별 정책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심중은 이명박 대통령이 속한 개신교 특정 종파의 성향에 미루어 독선적 신앙 태도를 은연중에 우려하고 있다.

개신교 일부 종파의 폐쇄적이고 광신적인 신앙 태도는 실상 미래의 통일 시대를 전망하는 데도 적지 않은 문젯거리로 우려하는 여론이 없지 않다. 남북통일의 경우 말고도 근래 중동의 이슬람교 지역에 대한 개신교 일부 교회의 무리한 전교 의욕이 현지에서 문제를 일으켜 인명의 희생을 초래한 일도 있다.

또 만주 연변 지역에서도 개신교계 일부 전교 활동이 문제를 일으키는 예가 있다고 한다. 하물며 남북의 국민이 함께 뒤섞이며 추진되는 통일의 상황이 온다면 그때에 종교계가 과연 어떻게 질서에 도움을 줄지 또는 갈등과 소란의 요인이 될지 우려하게 된다.

종교계 저변에 잠재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는 계기에 아예 역사 현실 안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에까지 생각을 확대해 보면 어떨까.

원래 종교는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종교는 세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가 관여되지 않은 분야가 없다. 불교도 중생제도를 해야 하고 교회도 인간 구원을 위해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 요는 인간답게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 되도록 이바지하는 진리의 실현 과정에 종교가 있다.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거창하고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이 문제를 피하기만 할 수도 없다. 지금 전개되는 세계 현실의 문제도 다 이 종교에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의 대표적인 전쟁 지역이 중동의 이라크이다.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세계권 사이의 전쟁이다.

전쟁은 인류의 가장 큰 불행이며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쪽이 죄인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개신교의 한 교파 신자인 부시 대통령이 주도해 일으켰다. 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위협의 진행 과정에서 강박에 걸린 이슬람계 청년들이 미국 뉴욕의 9․11 대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현대판 십자군 전쟁인 셈이다.

지난 중세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의 종가인 천주교(가톨릭) 쪽이 이슬람 세계를 공격하느라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은 어차피 대량살육의 참극이 된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역사적 과오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전 세계에 향해 사죄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개신교 쪽에서 다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는데, 과연 전쟁에 의해 이슬람 세계가 소멸하겠는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로서도 자신이 생존한 당시에 획일적이고 독선적인 신앙 태도에 대해 나무란 사실이 있지 않은가.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보다 선행을 실천한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칭찬한 이가 그리스도이다.

성서에서 보면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대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유대인만 하느님을 닮았는가. 이슬람권 사람들도 동양인도 불교신자도 인간은 다 같은 모습으로 생겼다. 다만 사람들이 각 지역세계의 문화전통 안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살면서 삶의 가치를 찾아 진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 과정의 모습이 개성적일 뿐이다.

가톨릭 교회는 1965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들에 대하여〉라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힌두교․불교․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 안에 있는 옳고 성스러운 것에 대해 존중하며, 함께 사랑 속에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1998년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선언을 발표해 부처의 설법, 공자․노자․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속에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의 델피 신전 문설주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가 계속해서 철학 명제가 되어 오는데, 나 자신을 알고 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케 하리라”에 귀착한다. 여기에서 이성적인 철학과 계시의 신앙이 함께 만나며, ‘만남’은 서로를 풍요케 한다는 것도 또 하나의 명제가 된다.

16세기에 서양인 신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와 《천주실의》라는 책을 펴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중국 유학의 ‘상제(上帝)’가 같은 것으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공(空)과 노자의 무(無)는 ‘허무’를 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동양사상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불교와 노자를 이해하는 데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불교의 공은 표현하기가 어려운 절대적 실재(實在)를 가리킨다. ‘색’(色)은 형상적 구체성을 가리키면서 ‘공’과 병존한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다. 작은 겨자씨 안에 큰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겨자씨가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무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진리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크고 깊은 생각들이다.

마테오 리치의 한계를 거치고 나서 이제야 진리는 동서양을 일치시키면서 각기 개성 있는 꽃으로 만나 서로를 풍요케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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