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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논문 유감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논문에는 쓰고 싶어 쓰는 것도 있고 써야만 하여 쓰는 것도 있다.

전자는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쓰는 논문일 것이며, 후자는 대개 타의에 의해 쓰는 논문일 것이다. 전자라도 이미 다른 이가 쓴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미 다른 이가 쓴 것일지라도 그와는 견해가 다르든지, 그가 쓴 글에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면 이 또한 의미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불교 관계 논문에는 불교의 학(종)파나 인물들의 사상을 조명하거나 오늘의 제 문제를 불교의 비전을 통해 해석해 보려는 것도 있고, 이와 관련된 역사를 밝혀내려는 것도 있다. 대개 전자가 주관적인 해석의 문제라면, 후자는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이다.

주관적이라 하였지만,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합당한 논리적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물론 이에 앞서 경전상의 근거 이른바 경증(經證)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상반된 입장의 경증이 제시될 수 있고, 동일한 경증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옛날에는 요의(了義) 불요의(不了義)라 하여 경설의 가치를 달리 판단하기도 하였고, 오늘날에는 성립의 선후를 따지기도 한다. 이른바 문헌비평이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논문일 경우 진위가 전제된 것이기에 문헌을 통한 객관적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요컨대 논문이라 함은 새로운 사실, 진실을 밝힌 글이어야 하며, 그래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불교 관련 논문은 조심스럽다. 학문 활동 자체가 비판이지만, 현실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논문의 대상이 권위를 갖는 현실의 종교이고 문중의 조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호교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사상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 끝내 미사여구로 순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관은 유부를 비판하면서 비롯되지만, 유부 또한 중관을 비판하고 유식을 비판하며, 유식은 유부를 비판하고 중관을 방편설로 격하시킨다. 2세기 무렵 작성된 《대비바사론》에서는 수천의 토픽을 항상 “다른 종의(宗義)를 비판하고 정리(正理)를 밝히고자 이에 대해 논의한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래저래 불교 관계 논문은 쓰기 어렵다. 그러나 학문에 뜻을 둔 모든 이가 그러하듯이, 불교학에 뜻을 둔 이들도 뭔가를 써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업적’이라는 객관적 수치가 압박하고, 주어진 청탁에 신분과 체면이, 혹은 호구가 걸려 있으며, 무엇보다도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논문과 저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새로운 사실이고 진실을 밝힌 것인가, 그리하여 내일(미래)도 기약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발행되는 불교학술지는 쉽사리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좋은 일이다. 학위논문 또한 수없이 쏟아진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불교 관련 세미나 역시 경향 각지에서 개최된다. 불교 관련 학회나 연구원은 물론이고 문도회 단위 사찰 심지어 군청에서도 주최한다. 이 역시 좋은 일이다.

언제 불교학이 이토록 활발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면면을 따져 보면 이쪽이 그쪽이며 그쪽이 이쪽이다. 쓰인 글 또한 결국은 이 글이 저 글이고 저 글이 이 글이다. 쓰고 싶어 쓴 글이 아니라 써야만 하여 쓴 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미나는 대체로 발표자 이외에 사회자와 논평자가 별도로 지정된다. 쓰고 싶어 쓴 글이라면, 논평자 또한 쓰고 싶었던 분야라면, 질의와 응답, 비판과 반론의 토론이 벌어질 것이며, 당연히 이를 조정할 사회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이는 다만 형식일 따름이다.

수없이 발간되고 개최되는 불교학술지와 세미나를 메우고 빛낼 우리의 역량은 충분한 것인가? 불교학에 뜻을 둔 그 많은 석사 박사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글들을 쓰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얼마 전에 ‘철학 기행’이라는 학과 연례행사에 지도교수로 따라간 일이 있다. 충북 옥천 보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학의 발생지와 법주사를 기행 하였는데, 명색이 불교철학 담당교수인 필자로서는 법주사에서 뭐라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상전의 건축양식이나 석연지 쌍사자석탑 등의 조형미에 대해서는 설명할 능력도 없었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철학 기행인 이상 이 절의 중창자로 유명한 진표율사의 점찰법이나 미륵사상 혹은 법상의 유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였지만, 미륵대불을 제외한다면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답사를 몇 번 다녀 본 학생들은 이 절이나 저 절이나 그곳이 그곳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학생들의 말은 사실이다.

 미륵대불로 상징되는 법주사라면, 당연히 미륵사상으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염원 아래 미륵사상 연구의 본찰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화엄사라면 이름에 걸맞게 화엄사상의 본찰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논문보다는 미륵사상이나 화엄사상 혹은 그 밖의 수많은 불교학(종)파의 경론이 먼저 제공되어야 한다. 조계종이 선종이라 하지만, 선교일치를 표방하고 있을뿐더러 그 연원이 가까이는 조선 초 국가권력에 의한 통합종파에 있지 아니한가? 필자는 수없이 양산되는 논문보다는 불교 경론상의 단락 하나, 토픽 하나를 보다 정밀하게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기왕의 한글대장경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적어도 문헌사적인 해제와 목차, 주석, 인용구의 출처, 관련 문헌과 비교 대조 등이 첨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써야만 하여 쓰는 논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쓰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 쓰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도 써야(해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는 것은 드러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는 곧 쓰고 싶어 쓰는 논문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불교학술지에서는 주제 의식이 명확하고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논제가 제시된 논문을 요구하며, 1차 혹은 2차 문헌에 대한 단순 해석 정리에 그친 논문은 권장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불교학이 교조적인 경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 이상 그럴 수만도 없기 때문이다. 제 경론에 대해 온전하고도 정확한 독해는 그 자체 신앙 활동인 동시에 학술 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불법을 8만 4천의 무량법문이라 하는데, 실제 물리적인 양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회자하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또한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며, 그것 또한 암호와 같다. 암호는 오로지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자의 몫일 뿐이다. 혹 그렇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며, 그래서 선종이 득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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