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교육에 관심이 없는 사회나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육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까닭에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떤 교육이냐이다. 본능적인 삶을 꾸려 가는 것으로도 충분한 짐승들의 경우에는 그 본능에 새겨진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받기만 하면 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교육과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내 아이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부모들이 안고 있는 본능적인 바람이자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인으로서의 시민의식을 가정이 아닌 공교육 체제를 전제로 하는 학교에서 길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그것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일부까지를 의무교육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화 근거가 되었다. 누구나 학교에 다녀야 하는 시대에 교육의 중심이 학교에서 가정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한때 학교는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일하러 가면서 책 보따리를 들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본 적도 있고, 실업계 고교 졸업장이 곧 좋은 직장을 평생 보장해 주는 자격증으로 받아들여지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학교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학부모 대부분이 사교육 시장에 아이들을 맡기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여건만 된다면 자식들을 국외로 유학을 보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이른바 ‘국제중’으로 상징되는 귀족학교들을 더 세워야만 외국 유학 열풍을 잠재울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도 입시 지옥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을 이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할 작정이냐고 성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 나와서 교육부장관을 한다고 해도 모두를 만족하게 할 만한 정책을 구상하거나 실현하기는 불가능할 듯하다. 절망감의 만성화와 그 절망감이 자살로 이어지는 일이,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있는 11월을 전후하여 일상화된 지 오래다. 올해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보지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몇 겹으로 엉켜 버린 이 교육이라는 실뭉치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풀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우리 아이들을 그토록 불행하게 만들면서 학교를 다녀서 학원으로 가는 일상을 계속할 수는 없고, 교육을 둘러싼 감정의 대립과 골이 계속해서 깊어지도록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어디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가? 과연 우리가 그 실마리를 찾아내서 교육 문제라는 거대한 공룡 같은 대상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이런 절망 섞인 질문들에 자신을 내맡기고 눈앞에 닥치는 일들만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해결해 가는 ‘언 발에 오줌 누기’는 인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다만 그 방법을 모를 뿐이고 일부 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엉킨 상황에 내몰려 있을수록 한 발짝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조금 물러서면 엉킨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갈지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점은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공유하는 일이다. 엉킨 모양새와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무리한 힘을 가하면 더 엉켜버려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실타래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과 교육부가 제시하는 정책 대부분은 엉킨 실타래를 더 엉키게 하는 것들일 뿐이다.

한 발짝 물러서는 첫 번째 자세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이다. 왜 우리는 아이들을 교육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잘 살 수 있게 하려고’이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아이들을 넘어서는 능력도 일부 갖추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능력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즉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야만 오래도록 인간답게 살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잠시의 성공으로 그칠 뿐 결국 험악한 사회에서 낙오하고 말거나 거대한 벽을 쳐 놓고 짐승처럼 웅크리면서 돈을 소비하는 삶이 보장될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정말로 학교를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서 우리의 노력을 모아 가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과 교사들이 함께 모여서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는 행복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교사와 학생들이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조성되어야 하고, 그 길은 바로 학급당 인원수의 적정화이다. 이른바 선진국들과 비교는 물론 아프리카 나라들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많은 학급당 인원수를 별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판단 근거라고 해 봐야 기껏 자신들이 학교 다닐 때의 경험들뿐이다. 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학교가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는 내외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교사들 스스로 지속적인 노력을 해 나갈 수 있는 유인책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사 평가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이 형식화되고 교장과 교감의 눈치를 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오히려 교사가 되는 과정에서부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부의 즐거움을 이어 갈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 간다면 우리 학교의 위기로 상징되는 이 땅의 교육 위기는 어느 순간 해소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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