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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순례자의 죽음
김영진(인하대 연구교수, 본지 편집위원)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김영진 인하대 연구교수

2년 전인가 여름 방학을 맞아 중국 강남 지역의 불교 유적을 참관할 요량으로 상하이에 들렀다.

여름에 남부 중국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상하이 시내로 들어왔을 때 크게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실수였다는 걸. 더위에 꽤 잘 견디는 나지만 상하이의 공기는 도저히 들이켤 수가 없었다. 내가 마시는 공기 중에 산소가 과연 몇 퍼센트나 될지 의심스러웠다.

말로만 듣던 강남의 엄청난 습도, 대기는 뜨겁고 무겁고 두터웠다. 항저우나 쑤저우 거리를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결국 강남 여행을 포기했다. 너무 이른 포기 때문에 숨겨 둔 꿈을 꺼내 들었다. 그래 라싸로 가자.

부랴부랴 쓰촨성 청두에 도착했다. 분명히 몇 년 전 와 본 곳이지만 이 도시의 발전 속도에 또 놀랐다. 청두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새벽녘 공항을 향했다. 청두 공항은 티베트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티베트로 가려면 입경료(入境料)를 내야 하는데, 경계를 넘는 자들이 치르는 몸값 같은 것이다.

청두에서 떠오른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라싸 공항에 도착했다. 보통 비행기는 올라간 만큼 내려가기 마련이지만 라싸행 비행기는 내려가다 말고 중간에 멈춰 버린다. 그러고는 도착했으니 내리란다. 이곳은 진정 천공(天空)의 섬이런가.

티베트 어로 라싸 공항이라 쓰여 있다. 반갑다. 둔황에 갔을 때처럼 이곳도 처음이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강의실에서 아니면 책 속에서 오랫동안 보았고, 들었고, 대화했던 그곳. 이런 것이 어쭙잖은 감상인 줄 알지만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솟구친다. 그리 해가 될 것은 없으리. 공항에서 라싸 시내로 가는 길은 참으로 황량하다. 산은 마치 녹슨 거대한 고철처럼 붉은 눈물을 흘린다.

 붉은 산. 그것이 이고 있는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다. 오래전 티베트를 다녀온 친구의 첫마디는 이랬다. “티베트는 죽기에 좋은 곳 같더라.” 그래 맞다. 어찌 살기 좋은 곳만 좋은 곳이겠는가, 죽기 좋은 곳도 좋은 곳이 아니겠나. 죽음이 슬픔이 아닌 곳. 그냥 죽음인 곳.

라싸로 들어올 때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에는 집집이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내걸렸다. 말없이 나부끼는 저 붉은 깃발이 내게는 하얗게 보인다. 라싸 도착의 감격을 누릴 새도 없이 해 질 녘부터 두통이 시작되었다. 티베트는 해발 4천 미터의 고원이다.

내가 수십 년간 이룩한 중력에 대한 기억에 교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을 고산증이라고 하는가. 시체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도 별무소용이다. 도대체 나를 숨길 수가 없다. 녀석은 닫힌 방문도 부수고, 두꺼운 벽도 뚫고 들어와 나를 제압한다.

라싸의 오래된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다니지 않아도 나의 몸은 티베트를 절실하게 감각했다. 오관을 생략하고 두개골 속 신경세포가 먼저 알아차렸다. 도대체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할 때 느꼈다. 티베트의 실감은 저 포탈라궁도 아니고, 고원의 무심한 야크 떼도 아니고 바로 내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무지막지한 기억의 전복이라는 것을. 바로 그 고통이 티베트 여행의 일부임을. 그제야 두통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포탈라궁 앞에 커다랗게 조성된 인민광장에 섰다. 나는 이 거대함을 기억한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또 있다. 언젠가 들른 중국의 서쪽 끝 카슈카르. 그곳에도 인민광장이 있다. 그곳은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위구르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개혁 개방과 함께 사망한 줄 알았던 마오쩌둥은 거대한 석상으로 저 색목인들을 굽어보면서 우뚝 섰다. 티베트도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아니나다를까 광장 중심에 오성홍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포탈라궁 앞에서 티베트 인들이 궁을 향해서 오체투지를 한다. 수십 년 전 달라이 라마가 생활한 곳이 아닌가. 문성공주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모셨다는 라싸의 종교 중심지, 조캉 사원 앞 작은 광장에 섰다.

굳게 닫힌 사원의 정문을 향해 많은 사람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조캉 사원을 중심으로 오체투지를 하며 시계 방향으로 도는 이가 있다. 먼 고향에서 몇 달 걸려 라싸에 도착했겠지.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건넨다. 저들이 서로 주고받는 눈빛은 맑다. 비구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 알겠다.

8세기 말 티베트 불교의 성격을 결정짓는 논쟁이 있었던 쌈예 사원. 그곳을 가는 도중에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라는 사실. 조캉 사원 앞에서 새벽에 떠나는 시외버스는 모두 사원을 향해 달린다. 아마도 티베트 인 전체가 순례자일 것이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도 좀 먼 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도 어두운 티베트 사원의 저 깊은 곳에서 순례자들은 혼자서 중얼댄다. 아니 그들은 그곳에 있는 부처와 보살에게 말을 걸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순례자는 길 위에 있다. 붓다는 성도 후 일주일을 외롭게 걸어서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초전법륜을 했다. 또한 입멸을 앞둔 붓다는 낡은 수레 같은 몸으로 몇 달을 걸어서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여 열반에 들었다. 45년간 설법이 바로 이런 순례의 길이었음을 말한다.

작년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티베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저 순례자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들이 라싸에 들어오기 전에 지나던 거리에서는 차들이 그들을 만나면 거북이걸음으로 옆을 지난다. 하지만 라싸에선 달랐다. 포탈라궁 앞 대로를 오체투지로 건너려다 찻길에 갇혀 버린 순례자. 코앞을 달리는 차량 사이에서 엉거주춤 오체투지를 하면서 한 걸음씩 뗀다.

몇 년 전 베이징에서 라싸까지 통하는 기찻길이 개통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가 세상에 열렸다고 했다. 하지만 번화한 라싸가 저 순례자들의 발을 묶듯 티베트 인들의 길은 점점 막히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개최에 앞서 발생한 티베트의 소요. 저 화려함 넘어 흐르는 강요된 침묵을 우리는 본다.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봉기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떠오른다. 치아파스 원주민들은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고 싸운다고 했다. 불교를 신앙하는 티베트 인들은 어쩌면 빼앗긴 순례의 길을 찾고자 봉기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 처지가 참으로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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