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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상임이사)
[37호] 2009년 01월 04일 (일)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상임이사

오계(五戒)는 성과 속, 고대와 현대를 불문하고 지켜야 할 계율로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커다란 예외를 만들어 놓고 있다. 계율에도 개차(開遮)가 있는 법이라며 예외나 방편을 말하기도 하고, 신라의 원광법사처럼 세속오계를 내세우기도 한다. 다른 종교 집단에서도 마찬가지, 아니 거기선 더 하다. 이른바 정통과 이단을 갈라 놓고 종교재판을 공공연히 행하여 살생과 망어 따위를 수도 없이 자행하였으며 성지 회복이랍시고 전쟁을 일으켜 대대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선 그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계율은 힘없는 개인들만 지킬 법일 뿐, 힘이 세거나 큰 집단을 이끄는 이들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과적 성과가 대중의 기분에 들기만 하면 영웅 대접까지 해 준 것이 역사적 사례다.

그렇다면 이것은 좀 심하게 말하면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이나 나약한 부류에게나 적용되는 니체적 의미의 ‘노예의 도덕률’일 뿐 ‘주인의 도덕률’은 아니라고 표현해도 될 것인가? 세계와 사회의 구조가 지역적 한계나 국가적 범위로 나뉘어 각각의 중심부의 영향력과 통치에 따라 권력, 재산, 사회적 지위와 명예, 문화적 향유의 질과 내용 등이 정해지는 시대에는 사실 그러했다고 해도 틀렸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사태가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다. 개개인마다 주인의식을 갖고 나서고 있으며, 돈만 있으면 초지역적 초국가적 검투사들을 얼마든지 고용하여 주권자 행세를 하려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규범이나 도덕률의 입법과 심판은 많은 경우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담합(談合) 차원에 머물러 있다. 사태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과거와 같은 계율관(戒律觀)이나 전근대적 잣대로 소위 세상에서 행세하는 자들의 언행을 평가할 수는 없다.

살인죄나 폭행․상해죄를 저질렀는가? 성직자가 파계를 하여 배우자와 자식을 숨겨 놓고 있는가? 술을 마시고 육식을 하였는가? 단순히 이런 규범들의 준수 여부만을 놓고 시비를 벌이거나 씨름할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규범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개별적 사건 차원의 시비 논란에 몰두할 때가 아니라 구조 관계적 입체적 차원, 다차원 상관적, 장기(長期) 지속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제반 세력들을 평가할 때라는 의미이다.

원래 붓다도 하나의 획일적 통합적 계율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다. 판례법처럼 구체적 사례를 맞아 그때그때의 필요성에 응하여 지키고 지닐 규범을 설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거나 의식(意識)에 잡히는 상(相)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다. 금강경 전편이 강조하는 뜻도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율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보배로 장엄하는 공덕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 하나 제대로 깨닫고 행하고 일러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 보시 보시하며 아무리 많은 보시를 해도 상 없이 하는 무주상 보시,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해도 사상(四相) 없이 하는 실행보다 더 높은 공덕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 그 의미도 여기에 있다.

최근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성직과 비성직의 구별을 과거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혼을 했느냐의 여부(與否)보다 생태계의 중요성을 얼마나 깨닫고 있고 실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더 중요시한다고 한다.

오랜 지구 생명체들의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살아온 나와 너 낱낱의 생명 그리고 모든 온 생명, 나의 의식 같은 아상(我相)보다 너와 우리 모두를, 인상(人相)이나 중생상에 무생물까지 넘어서 그리고 지구 너머 우주 만물까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역설한 붓다의 마음 씀씀이를 상상이라도 하여 보자. 그러면서도 그런 마음 씀씀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수자상(壽者相)까지도 잊어버리라고 한 그 의미도 한 번쯤 새겨 보자. 얼마나 이런 의미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가?

 그렇게 성찰하다 보면 현대에 계율을 보는 눈이 생길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과 눈으로 현대사회의 아노미(anomie), 특히 종교적 무규범 상태를 본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건지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적인 관점도 일부 채용할 필요성이 생긴다.

단순히 겉으로 결혼을 안 하고 처자를 거느리지 않고 있다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단순히 어떤 성직자 개인이 직접 살인이나 폭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게 아니다. 피상적 관찰이나 사건 위주의 파악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 돈과 권력과 마피아적 배후의 조종 관계에서 계략과 위력과 영향력을 쓰고 있다면 그건 아무리 계율을 지키는 척해도 대죄를 저지른 것이다.

권력은 정치권력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사회․문화 할 것 없이 권력 형성의 배후에는 반드시 재력과 담론 체계의 형성이 선행하고 있다. 그런 것이 권력을 양성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권력은 서로 도와 가며 집단적 억압과 중상모략의 풍토와 구조를 만들어 산 생명을 옥죄고 질식시켜 생명력을 잃게 만든다.

그것이 현대의 큰 죄 중의 제일 큰 죄다. 현대적 계율관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가 제일 멀리해야 할 곳은 돈 나오는 곳이고 가장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이 돈에 관한 결재권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돈이나 돈을 둘러싼 일에 얼마나 관계하고 있느냐? 오늘날의 계율관에서는 이 문제가 첫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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