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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님의 나라는 여직도 강녕하다 / 석길암
석길암 (본지 편집위원)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석길암 본지 편집위원

   

석길암
(본지 편집위원)

상전벽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동안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 때문에 일어난 촛불 잔치가 인터넷을 달구고,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을 달구었다. 한동안은 특정 종교 장로 출신의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정부에서 막가파식으로 간단없이 터져 나오는 종교 편향 문제가 다시 산사 법당에서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까지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적인 금융 공황이 우리 경제의 금융 거품에까지 파급되면서 ‘악’ 하는 비명이 우리 사회 곳곳을 헤집고 있다. 그 와중에 ‘경제 살리기’ 혹은 ‘내 재산 지키기’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의 종합부동산세 위헌 판결이 다시 한 번 사회 전체를 들쑤셔 놓았다.

냄비근성에 충실하여 이미 잊어버린 사실들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혹시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최근 1년, 우리 사회가 억지로 헤쳐 온 길 곳곳에 놓여 있던 암초(?)들이다. 광우병 쇠고기라고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그 미국산 쇠고기는 엊그저께 신문에 따르면 성난 민심을 헤치고 드디어 국내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7․8월 종교 편향이니 종교 갈등이니 신문 지상을 점유하고 있던 정국의 핫 이슈는 어느새 리먼브라더스발 생존 위기설에 떠밀려 일간지 어디에서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리먼브라더스발 금융 공황은 우리 사회를 경기 침체의 늪에서 건져 내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강박관념으로 내몰면서, 이제는 모두를 ‘경제 우선’이라는 한 목소리에 동참시키면서 훌륭하게 화합을 이끌어 내었다. 종합부동산세 위헌 판결은 그 와중의 황망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해도 좋지 않을까, 경제를 살리고자 한다면.

이처럼 경제부국의 일로를 걸어온 1년 동안, 온갖 이슈가 신문 지면을 채웠다가 사라지면서 냄비처럼 그때그때를 달구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주목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어떤 것이다. 늘 사회의 일각에 존재하는 불평분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굳이 관심까지 표명하고 나서야 할 필요성은 각인되지 않는, 그래서 그저 그런 어떤 것으로 무시하고 말아도 좋을 어떤 것일 뿐이다.

간혹 잘난 체하는 논객들이 다급한 이슈인 양 주문서를 내놓기는 하지만,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는 어떤 것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회 각계각층의 한 자리가 소임인 양 그저 묵묵히 끌려가는 사람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도 괜찮은 것이지만, ‘나라님’은 절대 외면해서 안 되는 어떤 것이다. 공동체의 갈등과 화합이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외면하든 안 하든 우리는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어우러져서 살아가지 못하면 최소한의 삶의 가치에서부터 거창하게는 행복이란 것까지도 전혀 향유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모여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다양한 삶터들이 모여서 우리가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의 최소 단위를 ‘나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런 ‘나라’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나라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훌륭한 나라님’이란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삶터를 절대 배신하지 않고 지켜주시는 어떤 분이 아닌가? 그런데 그 나라님께 묻고 싶다.

“나라님! 나라는 여직도 안녕하신지요?”

사설이 길긴 하지만, 묻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나라님의 진두지휘로 성취하시는 일마다 모두 그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들을 편 가르기 하는 일뿐이기에 하는 소리이다. 촛불 이야기가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을 달굴 때, 나라님은 말씀하셨다. 촛불 들고 나온 백만이 아니라 촛불 들고 나오지 않은 나머지 4천9백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고심하셨다고. 범불교도 대회가 열릴 때도 형편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범불교도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나머지 불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마도 귀 기울이셨던 것일 게다. 그러니, 나라님은 아마 지금도 종합부동산세 위헌 결정에 기뻐하는 1% 부동산 부자보다는 나머지 99%의 침울해하는 소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된다. 설마 부동산 부자들이 그깟 몇 푼 세금 안 내려고 헌법 소원까지 신청하면서 아우성치는 소리보다야, 이제까지의 전례로 보건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나머지 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지 않겠는가?

사실 갈등은 자칫 소모적인 것이 되기 쉽기는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의사를 표시하고는 있다는 것이기에. 하지만 그 갈등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될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조차 강제 소거 당할 때 우리 사회, 우리나라는 이미 죽어 버린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이슈가 상전벽해로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우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경제 살리기 나라님’이 투철하게 기업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그리고 소수의 이익이 끊임없이 관철되는 황망한 사태 역시 두 눈 뜨고서 지켜봐야 했다. 공동체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이들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끊임없이 탐욕을 추구하는 작태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 역시 조용히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들이 ‘경제 살리기’라는 단 한마디 말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도. 그리고 우리는 기다린다. 목매달고서 잘살게 되는 그날을.

우리는 부처님이 마지막 여행길에 나서기 전, 이웃나라 밧지를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를 마친 마가다 국왕 아자타삿투가 보낸 대신에게 부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한다. 부처님은 이날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자주 모임을 개최하고 또 그 모임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 둘째, 모일 때 의기투합하고, 헤어질 때 뜻을 모으며, 공동체의 일을 행함에 뜻을 모아 행하는가. 셋째, 이미 정해지지 않은 것을 새로 정하거나, 반대로 이미 정해진 것은 깨뜨리지 않고, 과거에 정해진 옛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넷째, 공동체 가운데 나이 든 이들을 경애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며, 또한 나이 든 이들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가. 다섯째, 양가의 부인이나 규수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 것이 계속되고 있는가. 여섯째, 성 안팎에 있는 공동체의 성스러운 땅[靈地]을 경애, 존중, 숭배하고 공양하며, 아끼고 봉납드리는 적합한 제식을 폐지하지 않고 잘 유지하고 있는가. 일곱째, 존경받을 만한 이에 대하여 법으로 적합한 대우를 해 드리고자 능히 마음을 기울이고, 또 아직 자기 나라에 오지 않은 존경받을 만한 이가 있다면, 그가 자기 나라를 찾아오도록 노력하며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이들이 찾아오면 마음 편히 머물도록 기원하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는가.

첫째와 둘째는 상하좌우 간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는지의 문제, 셋째는 법률의 신설과 폐지에 신중한지의 여부, 넷째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고 되새겨서 현재를 반성하고 있는지, 다섯째는 사회의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여섯째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유대 의식이 유지되고 있는지, 일곱째는 그런 모든 것의 구비 여부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든 아니든 살고 싶어 하는 나라인지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이든 책임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묻고 싶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우리의 지도자를 뽑았는지. 우리의 지도자에게 우리가 무엇을 원했는지를. 혹여 우리는 안심하고 먹을거리를 사먹지 못하는 나라, 1%가 잘살기 위해서는 나머지 99%가 굶어 죽어도 괜찮은 나라, 내 생각과 다르다면 잘못된 생각이기에 반드시 내 생각과 똑같아지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 자식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으로 유학 보내야만 하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경제만 살려 준다면’ 모든 것을 용인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안전한 먹을거리를 식탁 위에 올려야 한다고 몇 달씩이나 아스팔트를 달군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점유율 50%를 허용하는 것이 우리였다면, 환경의 중요성을 밥 먹듯이 되뇌면서 돈만 된다면 서슴없이 집단이기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우리라면, 다 함께 잘사는 사회를 노래 부르듯 광고하면서 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우리라면, 나머지 99%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1%만 잘살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이들을 지도자로서 두 손 들고 반기는 우리라면, 과연 그러한 우리라면 우리는 나라님께 나라는 여직 안녕하시냐고 비아냥대는 질문을 여전히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나라는 나라님의 나라이지, 우리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는 남의 나라이지 내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나라인데,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인데, 그 ‘나라’가 안녕하신지 왜 아직도 나라님에게 묻고 있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동체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는 1%만의 나라도 99%만의 나라도 아니다. 1%와 99%가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동체이다. 수없이 많은 작은 공동체들이 저마다 함께 모여 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이다.

하지만 그 공동체에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공동체는 이미 정해지지 않은 것을 새로 정하거나, 반대로 이미 정해진 것은 깨뜨리지 않고, 과거에 정해진 옛 법에 따라 행동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이들을 구성원으로 하고 있음을. 곧 지켜져야 할 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최소한의 안녕마저 머릿속의 꿈과 같다는 것을.

나라님의 나라가 여전히 강녕하셨던 지난 1년, 우리의 나라는 강녕하지 못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우리가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2008년 11월

석길암(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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