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불교평론 편집인)

홍사성
(불교평론 편집인)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함께 절차탁마하며 수행하는 친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를 '선지식(善知識 또는 善友)' 또는 ‘도반(道伴)’이라고 부른다. 선지식은 ‘좋은 벗’이라는 뜻이고 도반은 '함께 구도의 길을 가는 동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이렇게 친구를 멋진 표현으로 부르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뿌리가 자못 깊다. 한 경전(중아함 36권 148경 <하고경(何苦經)>)에서 부처님은 좋은 벗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선지식은 마치 보름으로 향하는 달과 같은 사람이다. 보름으로 향하는 달은 처음 생길 때 산뜻하고 밝고 깨끗하며 날로 그 모양을 키워간다. 그리하여 보름이 되면 그 모습이 둥글고 풍만해지며 밝은 빛을 발한다. 그러나 악지식은 그믐으로 향하는 달과 같은 사람이다. 그를 가까이 하면 마치 허공의 달이 간탐의 그늘에 가리어 세간의 모든 별들을 광명을 잃는 것처럼 될 것이다."

또 잡아함 27권 726경 <선지식경(善知識經)>에서는 이런 당부도 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 좋은 벗이 있고, 그 벗과 함께 있으면 수행의 절반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전부를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왜냐하면 좋은 벗에게는 언제나 순수하고 원만하고 깨끗하고 바른 행동이 따라다니지만 나쁜 벗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좋은 벗과 사귀고 좋은 벗과 함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말씀대로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은 수행의 전부’라고 한다면 수행자들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모임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권장할만한 일이다. '승가(僧伽)'란 바로 이 좋은 벗들이 모인 화합의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출가수행자들 사이에서 ‘좋은 벗들의 모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역사적으로도 교단이 타락하고 어려운 지경에 있었을 때 수행자들은 좋은 벗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수행에 전념한 예가 많다. 보조지눌에 의해 주도된 정혜결사나 진각혜심에 의한 백련결사, 경허성우가 주도한 참선결사, 퇴옹성철 등이 이끌어간 봉암사결사 등은 좋은 모임들이 그 시대 불교계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기억할만한 쇄신운동이었다. 이 결사운동의 이념적 근원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한 ‘좋은 친구를 가까이 한 공덕’에 있었다. 불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그 아름답고 향기로운 전통을 이어왔다.

오늘에도 이런 선의의 목적을 가진 모임은 많이 결성되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승속을 막론하고 좋은 모임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절차탁마하고 수행을 격려해나간다면 불교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실제로도 우리 주변에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불교적 열정을 가지고 모임을 만들어서 공부하거나 봉사하는 불자들이 참 많다. 이들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흡족한 미소로 큰 상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불교계에 만들어진 모든 모임들이 다 이런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도 없지 않다. 순수한 의도보다는 세속적 이해관계에 의해 파당을 결성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얘기다. 그 안타까운 예가 조계종 종회의원들이 결성한 이른바 ‘종책모임’들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 모임들을 ‘좋은 벗들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좋은 모임’으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데가 많다.

빙빙 돌려서 말할 것도 없다. 옛날 선사들의 화법대로 간명직절하게 들이댄다면 중앙종회의 이 모임들은 사사건건 이해관계로 대립하며 교단의 화합을 해치는 일이 더 많았다. 종단내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단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다수 종도들의 솔직한 평가다.

이런 비판에 대해 당사자들은 억울할지 모른다. 말인즉 들어보면 번지르르한 데가 많다. 한결같이 ‘종단발전을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모였다’는 것이며, ‘잘못된 것을 방관하느니 서로 힘을 합쳐 바로 잡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뭉쳐야 한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뒷방에서 나눠먹기로 하던 방법을 제도적으로 공개화시킴으로써 도리어 부패를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변론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속내를 들여다보면 당사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밥그릇과 이권싸움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직설적으로 말해 이른바 ○○회니 XX회니 하는 단체는 세속사회의 정당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집행부에 우호적인 모임은 여당, 반대하는 단체들은 야당이라고 하는데서 이미 그 파당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종단정치’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의 승가사회가 얼마나 세속화 정치화돼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지구상에서 어떤 종교도 정당정치 구조를 가지고 교단을 운영하는 예는 없다. 그런 현상이 유독 우리 한국불교에만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부끄러울 뿐이다. 도대체 이렇게 해도 좋다는 말이 어느 율장 몇째 줄에 들어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오늘의 한국불교가 새겨둘 교훈적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잡보장경(雜寶藏經)>3권에 나오는 머리는 두 개지만 몸뚱이는 하나인 양두조(兩頭鳥) 이야기다.

“옛날 설산에 공명(共命)이라는 새가 살았다. 머리는 두 개이나 몸뚱이는 하나로 붙은 양두조(兩頭鳥)였다. 흰 머리를 가진 쪽은 항상 몸을 생각해서 맛있고 좋은 과일을 골라먹었다. 그러나 검은 머리 쪽은 흰머리가 항상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못마땅했다.

‘어찌하여 자기만 항상 맛난 과일과 음식을 먹고 나는 먹지 못하는가!’

질투가 난 검은 머리는 독한 열매를 따먹었다. 그랬더니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았다.

이때 좋은 과일을 골라먹은 머리는 전생의 부처님이요, 독이든 열매를 골라먹은 머리는 전생의 데바닷타였다….”
이 경전에서 양두조의 비유를 든 것은 데바닷타의 교단분열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그는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했으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다. 많은 사람은 그가 전생부터 나쁜 업을 지은 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보면 그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총명하고 리더십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출가한지 12년 만에 부처님의 교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똑똑한 제자’가 되었던 것은 그의 자질과 능력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너무 똑똑한 그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세속적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에 항상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관철돼야 한다는 독선의식이 강했다.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가 모든 출가자들이 보다 엄격한 수행생활을 하도록 요구한 것이라든가, 심지어 부처님의 연로함을 이유로 들어 승단의 지도권을 양도하라고 요구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그는 자기를 따르는 5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웠다.(破和合衆) 교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시해할 수밖에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바위를 굴려 부처님 몸에 상처를 입혔다.(出佛身血) 그가 이런 무도한 일을 하자 연화색 비구니는 데바닷타를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는 환상에 빠진 그는 분노해서 그녀를 때려죽이고 말았다.(殺阿羅漢) 그는 이 같은 악행의 과보로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데바닷타의 비극적 종말은 세속적 욕심에 사로잡혀, 남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운 똑똑한 사내의 말로가 어떻게 됐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율장(律藏)은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많은 부분을 교단화합과 관련된 금제(禁制)에 할애하고 있다. 누구라도 분열을 책동해서는 안 되며, 그러자면 수행자 개개인이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교단의 화합을 해치면 파문의 중벌을 내리도록 한 것도 그만큼 이 문제를 중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모르지 않을 오늘의 ‘똑똑한 수행자’들은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앞에서 비유한 양두조(兩頭鳥)처럼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그르다며 서로 양보할 줄 모른다. 그 같은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는 무대가 종회다. 종회의원 선거 때가 되면 서로 파당을 지어서 어느 계파가 몇 명이나 종회에 진출했느냐에 따라 성패를 논한다. 선거에는 상당액의 선거자금이 투입됐다는 소문도 있다. 종회의원으로 뽑힌 뒤에는 특정계파모임에 가입해서 다른 계파 사람들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는다.

자기 계파의 이해관계에 합치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견도 부결시킨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식이다. 이런 계파모임이 존재하는 한 교단의 장래는 뻔하다. 공명(共命)이라는 이름의 양두조가 검은 머리의 몽니로 죽어가는 것처럼 공멸하는 것뿐이다. 지금 교단이 걷고 있는 길이 이 길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감히 드리는 말씀이다. 겉으로 양머리를 내걸고 속으로는 개고기를 파는 가게는 문을 닫는 것이 옳다. 종단을 분열로 치닫게 할 수밖에 없는 무슨 무슨 계파활동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이미 몇 차례 시험을 해봤듯이 계파정치와 같은 세속적 방식은 종단불화만 심화시키는 암세포가 될 뿐이다. 계파모임을 결성할 때 내세운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당파싸움'의 원인이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반복돼온 여러 가지 우울한 사태를 보는 불자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헤아린다면 특단의 자기전환을 보여줘야 한다.

술지게미나 먹고 취하는 당주조한(?酒糟漢) 주제에 외람된 말을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제발 아무나 버르장머리 없이, 승가사회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해줬으면 하는 충심에서다. 다시는 이따위 건방진 말을 못하도록 임제나 덕산마저 무색할 진정한 기봉(機鋒)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 기봉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불조(佛祖)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정직하고 청정한 마음, 분열이 아닌 화합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사 입이 막히고 혀가 잘린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이 될 것이다.

2007년 가을

홍사성(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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