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2008년 05월 13일자

깨달음, 세월 지날수록 관념적 변질
팔정도 외면한 다른 방법은 헛수고


불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말 중 하나가 깨달음이다. 그런 만큼 깨달음처럼 많은 오해와 시비가 교차하는 용어도 드물다. 묵언수행이나 장좌불와 같은 뭔가 특별한 수행을 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물학적 생사문제나 도덕적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경지이고,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홍사성〈사진〉 「불교평론」 편집위원은 대각사상연구원이 4월 29일 서울 대각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집중 고찰했다.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한 홍 위원은 “언제부턴가 죽음을 예언하거나 좌탈입망, 사리를 남기는 것이 깨달음의 증표로 여겨지기도 한다”며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 마디로 만부당한 오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불교에서 깨달음은 삶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깊은 성찰 끝에 얻어낸 완전하고 합리적 결론”이라며 “그것은 결코 특별한 것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길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홍 위원에 따르면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로 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영원히 소멸된 참다운 마음의 평화를 이룬 상태다. 또 특별히 신기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라는 것. 따라서 수행자가 수행을 해서 진정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했다면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매사에 탐진치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아직 깨달음도 열반도 얻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이와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는 것이다.

홍 위원은 특히 “불교에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세속적 가치가 과연 그럴만한 것이지를 되물음으로써 현실적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실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공, 중도, 제일의공, 승의제, 진제, 법성, 불성, 진여, 여래장, 자성, 아뢰야식 등 같은 맥락에서 나온 확장된 개념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고도의 관념론으로 변질된 느낌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홍 위원은 이어 『아함경』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며 “부처님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추운 곳에 가면 춥다. 병들어 늙고 죽는 일은 물론이고 식욕과 성욕, 수면욕 등의 생물학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며 “다만 중생은 외부 반응에 분노나 원망 등 탐진치를 일으키지만 부처님은 거기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마음상태가 항상 유지되는 게 다른 점”이라고 밝혔다.

홍 위원은 “지금까지 깨달음의 문제를 너무 신비한 무엇, 고답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고 토론을 기피해왔던 게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원인이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수행하고도 헛공부를 한 셈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49호 [2008년 05월 13일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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