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1. 머리말

식민지 시기 일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낸 불교정책은 보호·육성책이었다. 일제는 조선시대 이래로 빈사상태에 빠진 조선불교를 회생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감시와 회유를 통한 탄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통제책은 시기별로 양상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었다. 일제의 불교정책은 일본의 국내 사정, 그리고 식민지 지배정책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식민지 시기를 일관되게 불교계를 통제한 법령은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이었다. 일제는 사찰령을 통하여 종래 조선불교의 전통적인 의사 결정 방법이었던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를 무시하고 불교계를 30본사 체제로 재편하였다.

일제는 불교계를 30본사 체제로 개편하고 30본사 주지의 임면은 조선총독의 승인을 받게 하고, 사찰재산 처분에 있어도 사전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게 함으로써 인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일제는 조선불교계를 관리하던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사찰 신설 조항을 두지 않음으로써 식민지 시기를 통하여 새롭게 건축된 사찰은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라는 엄청난 조선 민중의 항일운동을 경험하고 나서 1920년대에 들어서는 친일파 양성책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24년에 비교적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총무원이 와해되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탄생하였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재단법인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단체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전시체제에 돌입하였다. 일제는 조선불교계도 전쟁 수행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였다. 조선불교계는 일제의 이러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불구(佛具)와 범종마저 전쟁 수행을 위해 헌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30본사 주지들은 친일세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계의 친일양상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 변화에 따라서 변모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출발선상에서부터 친일파 문제를 선명하게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가치관의 혼란이 초래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 문제는 이승만과 친일세력에 의해 반민특위가 1949년 8월에 와해됨으로써 정권차원에서 분명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서 민간차원에서 친일파의 행적이 조명되고, 현재는 친일파 인명사전이 기획되고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조명하는 데는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민간단체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불교계의 친일문제 역시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베일에 싸여진 채 지내 왔다. 1993년 임혜봉 스님이 《친일불교론》이라는 책을 내면서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행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불교계의 친일파 문제는 1954년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정화불사’운동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현실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친일파 문제는 해방 이후 50년 세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직접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였던 당사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조차도 논의가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2. 일제 종교정책의 시기별 특성

1) 1910년대 사찰령의 공포와 30본사 체제의 성립

조선왕조 성립 이후부터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승려들은 무리한 공물의 상납에 시달렸으며, 축성과 산성수비 그리고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등 온갖 잡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양반과 이속배(吏屬輩)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수모를 당하여야만 하였다.2)

1876년 외세의 강압에 의하여 문호가 개방되자 조선왕조 정부가 외세와 함께 들어온 개신교의 포교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의 탄압책도 완화되었다. 1895년 일본 일련종의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는 조선에서 일련종을 포교할 목적3)으로 조선승려들의 ‘도성해금’을 김홍집 내각에 건의하여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허가되게 되었다.4)

그러나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승려들의 도성해금이 해제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1880년대 천주교의 선교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해 왔고, 1885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1887년에 새문안교회를 창립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5)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들의 요구사항이었던 폐정개혁안 12개조 가운데 신분제 철폐에 관한 조항6)이 들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영향으로 성립한 군국기무처에서 입안한 개혁의안 가운데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조항을 폐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7)

대한제국 정부는 ‘도성해금’을 단행한 이후 전국에 있는 사찰들을 총괄할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우고, 1902년에는 원흥사 내에 궁내부 소속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여 육군 참령 권중석을 관리자로 임명하여, 국내사찰현행세칙 36조를 공포하여 원흥사를 대법산인 수사찰 즉 한국불교의 총종무소로 삼고, 각 도에 중법산 16개소를 두어 사찰 사무를 통괄하게 하였다.8)

대한제국 정부는 500여 년 동안 방치해 왔던 불교계에 사사관리서를 설치하고 관리자를 임명하여 각 도의 사찰을 조사·정리하여 총괄해서 관리하게 함으로써 더 이상 사찰이 황폐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대한제국이 반포한 국내사찰현행세칙에는 좌교정으로 하여금 불교계를 총괄적으로 지휘·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사소한 승려들의 범죄행위는 국법에 의존하기보다는 승단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자율권도 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워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교육을 시켜 불교발전을 도모할 것을 권장하는 조문도 명시되어 있다.9)

대한제국의 불교정책은 탄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왕조 정부의 불교정책과는 달리 승단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내재적인 발전을 지향하도록 장려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제국의 불교정책은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이 이루어지면서 좌절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서 1911년 6월 3일 제령 제 7호로 ‘사찰령’을 공포하여 전국의 사찰을 30본사 체제로 재편성하였다. 30본사 체제는 1924년 11월 20일자로 사찰령시행규칙 2조를 개정하여 전남 구례 화엄사를 본사로 승격시킴으로써 이후는 31본사 체제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통하여 조선불교의 괴멸을 구할 수 있었으며,10) 사찰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사찰 창립에 따른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사찰의 신규 창립은 이들 법령이 개정되지 아니하는 이상에는 불가능할 일이었다.

필자는 사찰령과 일본 문부성에서 1898년 제14회 제국의회에 제출한 종교법안11)을 비교검토한 결과 사찰령이 종교법안을 참조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종교법안은 명치유신 이후에 천황제와 국가신도의 위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를 규제하기 위하여 입안되어 제14회 제국의회에 상정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하였다.

종교법안은 이후에도 1927년 52회, 그리고 1929년 56회에는 종교단체법이라는 이름으로 상정되었으나 번번히 헌법정신에 위배되고, 국가의 종교간섭은 시대착오라는 반론에 부딪혀 통과를 보지 못하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국가총동원 체제가 가동될 무렵인 1939년 제74회 제국의회를 통과함으로써 본격적인 국가의 종교간섭이 본격화되었다.12)

종교법안은 5장 53개조로 구성되어 있다.13) 제1장 총칙, 제2장 교회 및 사찰, 제3장 교회 및 종파, 제4장 교사, 제5장 벌칙 그리고 부칙 7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종교단체는 가능한 법인으로 등록케 한다는 것과 종교단체는 주무관청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것었다.

구체적인 감독사항은 지면 관계상 세세하게 언급할 수가 없지만 주무관청은 사무의 보고를 요구할 수 있고, 그 상황을 검사하고 기타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발하고 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요컨데 주무관청은 종교단체의 신앙행위가 신민된 자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거나 공공의 안녕에 위배된다고 판단될 때는 종교단체를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찰령시행규칙에는 30본사의 주지를 선출하는 방법과 임기 그리고 30본사 주지의 취임은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을 것을 명시하는 등 사찰령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세칙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찰령시행규칙은 종래 대한제국 조선불교계에서 수사찰로 지정하였던 원흥사를 부정하였고, 경성에는 하나의 본사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총독부에서 지정한 30본사는 조선의 전통 사격(寺格)을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총독부가 30본사를 지정하여 발표하자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서는 쌍계사가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된 데 불복하여 1911년부터 총독부에 본사 승인 요청을 하였다.

쌍계사가 해인사의 말사에 편입된 데 불복한 사유는 지리산 일대의 사찰 즉 쌍계사·화엄사·대원사 등의 사찰에는 조선후기 벽암 문손들이 서산 문도보다 많은데 법류가 다른 해인사의 말사에 편제시킨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14) 사찰령은 조선의 전통 사격을 정밀하게 검토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30본사 제도가 조선의 전통 사격을 엄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진 예는 1924년 11월에 선암사 말사에서 본사로 승격된 화엄사에서 찾을 수 있다. 화엄사의 본사인 선암사에서는 1921년 광주 무등산 약사암 주지 김학산을 화엄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김학산이 2월 2일 화엄사로 부임하려 하자 화엄사 승려들은 선암사에서 임명한 주지는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로 거부하였다. 김학산은 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화엄사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선암사의 승려 20여 명이 김학산을 구타하여 동월 9일에 절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15)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총독부 측에서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사찰령시행규칙 제2조 본말사 주지 임면 조항을 수정하여 1924년 11월 20일자로 화엄사를 본사로 승격시켰다.16)

이 밖에도 김제의 금산사는1902년 사사관리서에서 사찰을 통괄하던 시기 원흥사를 수사찰로 하고, 전국에 16개의 중법산으로 편입되었던 금산사가 중법산에 들지 못했던 전주의 위봉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본말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도 사격이 맞지 않아서 본산 승격을 신청한 사찰이 많이 있지만 이들의 요구는 모두 묵살되어졌다.17)

요컨대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의 주요한 내용은 30본사의 주지 임면권을 조선총독이 장악한다는 것과 재산을 매각할 때 역시 조선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불교계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조선총독이 장악한다는 것이다. 조선총독은 불교계의 주지들을 장악함과 동시에 그 주지들에게 큰 권한을 줌으로써 조선불교계 전체를 장악하였다.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의 시행으로 30본산 체제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30본사에서는 각기 사법을 제정하여야만 하였다. 사법 역시 총독부 내무국 지방과의 촉탁으로 있던 와타나베가 일본 승정(僧政)의 예를 참작하여 식민통치에 편리하도록 초안을 만들어 놓고 각 본산으로 하여금 작성케 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30개의 사법이 있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0본사 체제는 전국에 30개의 거찰을 본사로 지정하고 본사가 되지 못한 나머지 사찰들을 본사에 배속시켜 말사로 삼았다. 말사는 주지의 임면에서부터 제반 모든 행정사항을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상명하달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30본사 체제는 중앙에서 30본사들을 통괄할 수 있는 중앙기관의 부재로 말미암아 30조각으로 분할되어 오직 총독부만이 본사들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선총독부측은 조선불교계를 잘 통제하자면 30본사 주지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총독부측은 본사 주지들의 위상을 높여 줄 필요가 있었다. 본사 주지들은 조선불교계를 대표하는 지위로서 주임관의 대우를 하였으며, 매년 정월에 총독 관저에서 열리는 신년하례회에 초청을 받았고, 공식연회에 종교계의 요인으로 초대하여 우대를 받았다.

총독부에서는 30본사 주지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사법 제11의 징계조항을 살펴보면, 세속의 법으로 치면 사형에 해당하는 체탈도첩에 해당하는 7가지 조문 가운데 제2항은 본사 주지를 모욕하고 승풍을 문란한 자, 제3항은 종의에 패한 이설을 주장하고 본사 주지의 교유에 부종한 자, 제5항에는 정치에 관한 담론을 하거나 또는 정사에 가입하여 승려의 본분을 실추한 자는 체탈도첩을 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즉 승려의 신분을 박탈하는 중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체탈도첩은 세속법으로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단 징계가 확정되면 감형이나 복권은 있을 수 없는 극형이다.

2) 1920년대 친일파 양성책

강동진은 1920년대에 일제가 실시한 문화정치의 특징을 분할통치라고 규정한 바 있다.18) 분할통치란 식민지 내부의 종족적·계층적·종교적 대립을 이용하여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국민적 통일과 민족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한 분열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열강들이 모두 식민지에 의회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해서 식민지 민족자본가를 분열시켜 그 상층부에 대한 회유와 포섭을 꾀했던 것이 그 단적인 현상이라고 하였다.19)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래 무단통치를 통해서 지배해 왔지만 1919년 3·1운동의 발발로 조선인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였다. 3·1운동이 종교계 지도자들에 의해서 발단이 되었음에 주목한 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를 분석한 결과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분석하였다.20)

이상과 같은 분석에서 종교의 정치 관여가 조선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단정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은 학무국에 종교과를 신설하고, 외국인 선교사와 양해친화를 도모하고, 포교규칙의 개정·사립학교규칙 개정·종교단체의 법인화 허가 등 잇따른 종교에 관한 종무방침을 시달하였다.21)

조선총독부는 3·1운동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단체가 대중 결집의 큰 매체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3·1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들 종교단체를 갈라놓고 재편성을 통해서 어용화를 꾀하면서 민족주의자를 몰아내는 방법을 썼다.22)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조선불교에 취한 정책은 천도교나 기독교 등 여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1920년에 만들어진 사이토 총독의 문서 가운데 〈조선의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가운데 ‘종교적 사회운동’을 살펴보면, 조선불교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제휴로 불교적 사회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30본사를 총괄하는 총본사를 설립하고, 그 총본사의 관장에는 친일파를 세우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23)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1922년에 조선불교계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띠는 조선불교총무원이 일제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와해되고, 뒤늦게 출발하여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친일적 성향의 조선불교교무원이 총무원 세력을 흡수·통합하여 1924년 4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성립하게 되었다.24)

불교계 일각에서는 청년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관권과 결탁된 일부 주지계층의 권위적인 행태를 시정하고, 불교계가 당면한 현실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민족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의 조직으로 나타났다. 불교청년회의 탄생은 당시 불교계 교육의 중추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던 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5월 12일에 각 지방으로 발기인대회 개최에 관한 통지서를 띄우고, 동년 6월 6일 중앙학림에서 전국불교청년회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여, 청년조직에 대하여 협의한 후 임시실행위원을 선정한 데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25)

불교유신회가 창립되게 된 배경은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시정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던 불교청년회의 활동에서 실제로 전면에 나서서 실천적인 행동대원들을 필요로 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불교청년회는 전불교계의 중심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개혁을 단행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객관적인 형세가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별개의 단체로 유신회가 성립되었던 것이다.26)

불교유신회에서는 당시 불교계의 최대 장애였던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4월 19일자로 불교유신회원 유석규 외 2,284명의 연서로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사찰령 폐지에 관한 건백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교분리를 주장하였으며, 서문에는 “자체적 사원제도는 총림청규의 특색이며 1,600여 년의 역사이다.”로 시작하여 “하루라도 조속히 사찰령을 폐지하여 불교 자체의 통제에 일임하라.”로 끝을 맺고 있다.27)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사찰령을 하루 속히 폐지하고 불교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유신회에서는 총독부로부터 사찰령 폐지에 관해서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자 1923년 1월 6일에 또 다시 사찰령 폐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고 박한영·김경홍 외에 7명, 도합 9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1주일 안으로 당국에 다시 질문하기로 하였다.28) 이후 1926년 5월 26일 불교유신회에서는 또 한 차례 총독부에 또 다시 사찰령 폐지를 건의하였다.29)

조선불교총무원의 탄생은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원의 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2년 1월초에 수송동 각황사에서 열린 30본산 주지총회에서 30본산연합회의 성과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불교유신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30본산연합제규는 몇몇 주지들이 전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지 아니하니 폐지하여야겠다는 안이 나오자 만장일치로 폐지가 가결되었고,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한 조선불교도 총회에서는 조선불교계 통일기관으로 총무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30)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본사 주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불교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종교 및 교육사업을 시행하고, 조선 사찰 각 본말사의 연합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출범하였다. 당시 본사 주지들은 총독부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는 존립이 불가능한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이사에는 해인사 주지 이회광·용주사 주지 강대련·위봉사 주지 곽법경·유점사 주지 김일운·대흥사 주지 신경허 등 5명이었다. 설립자본금은 모두 621,795원 51전이었으며 실제불입금은 156,384원 80전이었다.31)

총독부 학무국의 개입으로 성립한 교무원에 경남의 세 본산 즉, 해인사·통도사·범어사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몇몇 본산이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도사의 경우 1922년 연말에 마산 포교당에서 개최된 본말사 주지 총회에는 본말사 청년 45명이 참석하였는데, 경남도청에서는 학무과장이 출석하여 재단법인 교무원에 가입하기를 권유하였다.

출석한 청년들은 몇몇 승려의 야심으로 성립한 재단법인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교무원의 재단법인 성립을 부인할 것을 결의하고 즉석에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비슷한 사례는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와 함남 안변 석왕사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조선불교계 전체의 여망을 수렴하여 성립한 것이 아니고 불교계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구도대로 이루어진 결과에 따른 현상이라고 하겠다.

총무원은 총독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과 천도교측으로부터 인수한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운영난 등 중첩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24년 4월 3일에 교무원과 대타협을 이루어 30본산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이 이루어진 직후에 총무원측의 통도사 주지 김구하와 범어사 주지 오성월이 새로운 이사로 영입되어 모두 7명의 이사로 증원되었다.32)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을 목적으로 출범했던 총무원은 2년 3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3)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의 불교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만주국을 건설하였고,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국제사회에서 물의를 빚었는가 하면, 1933년에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고, 1936년은 워싱턴·런던의 해군조약이 만료되는 해로써 영국과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대하여 일본 국민들에게 경계심을 고취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치 못하였다.33) 때마침 제기된 천황기관설은 일본 사회를 큰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식민지 조선이 모국 일본을 배반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지상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의 농업공황의 여파로 인하여 피폐된 조선의 농촌을 부흥시키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인식한 우가키는 이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조치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조선인들의 사상 안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으로서 심전(心田)개발이라는 정신운동을 농촌진흥운동과 병행하여 시행하고자 하였다.34)

‘심전’35)이라는 말은 종래에는 불경 가운데 《잡아함경》에 나오는 것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예기》의 〈예운〉편36)에도 심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심전이란 말은 양나라 간문제(簡文帝)의 〈상대법송표(上大法頌表)〉에도 ‘심전’이라는 말이 있고,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시에도 ‘심전’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3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심전개발운동은 불교·유교뿐만 아니라 기독교까지도 포함해서 당시 조선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계에 역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종교를 주요한 매체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조선인들의 종교 가운데 사상선도와 정치적 교화를 목적으로 특히 불교를 중흥시켜 활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38)

조선총독부가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불교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불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국가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서 피폐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부녀자층을 비롯해서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큰 종교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둘째로는 조선총독부는 조선 승려들의 자질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려들의 지위를 상승시켜 주고, 정책적으로 불교의 부흥운동을 지원해 준다면 심전개발운동에서 지향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무난한 종교로 인식하였다.

셋째로 불교는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전에 가장 유력한 종교였으며, 조선에서 궁극적으로 전파하고자 하는 국가신도의 조상숭배 정신과 거리감 없이 수용될 수 있는 종교라는 점, 넷째, 일본이 장차 점령하고자 하는 중국을 비롯해서 동양이라는 견지에서 보더라도 불교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39)

1935년 7월 28일에 재경 주지들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모여서 우가키 총독이 성명하고 주창한 심전개발사업에 대하여 전조선불교도를 총동원시켜서 이 사업에 진력하도록 촉진운동발기회를 열고 심전개발사업에 대한 대강의 윤곽을 토의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조선불교계를 총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총본산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바람은 조선불교계 내부의 여망과도 합치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러한 관제운동을 민간차원의 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하였으며, 조선불교계는 자발적인 형태로 심전개발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조선불교계에서는 이 두 운동이 균형을 이루어 물심일여의 경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면모를 보였다.

조선불교계는 일본이 중국대륙 진출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조선인들을 천황에게 순종하는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심전개발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당시 유일한 불교계의 신문이었던 《불교시보》는 심전개발운동의 선전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재무이사였던 황금봉은 〈유일무이한 조선불교의 보도기관인 ‘불교시보’를 원조하라〉는 글에서 “불교시보 자신이 언명하는 만치 조선불교의 보도탑이요, 심전개발의 선전지라는 것을 목적하는 까닭이다.”40)라고 하여 불교시보가 심전개발의 선전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36년 1월 8일자 《조선일보》에서 〈불교 중심의 심전개발은 낙제〉라는 기사를 살펴보면, 심전개발운동 촉진 시점에 있어서 조선총독부의 최초 의향으로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고자 불교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려고 불교 당국자와 회합은 물론 불교 통제책까지 획책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조선불교를 가지고는 심전개발운동을 신통하게 얻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 이유인 즉 조선불교계에는 위대한 승려가 없고, 또 장차 청년 불교가를 양성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수양이 필요한 그들이 가두에 진출하여 민중층에 깊이 들어가서 심전개발을 지도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불교 부흥은 필요하되 심전운동의 중심으로 잡기는 어렵다는 것이다.41)

일본은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침략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이 전쟁이 예상과는 달리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서 물자부족과 인력부족을 절감하였다. 일본은 모든 국민들을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이른바 총력전체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후방에 있는 모든 국민들에게 근검절약과 저축을 장려하였으며, 정신적인 면에서도 천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일사불란한 체제구축을 필요로 하였다.
조선 불교계에서 총본사 설립안이 논의가 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심전개발운동이 입안되어 실행단계에 들어갔던 1935년 7월이었다. 당시 불교계의 대표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교무원에서는 재경 본산 주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총독부에서 시달한 심전개발사업 추진의 윤곽을 토의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다.42)

총본사의 성립이 조선총독부의 개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보다 분명한 전말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1941년 10월에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산 태고사의 종무총장으로 취임한 이종욱의 취임사에서 볼 수 있다.
이종욱은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라고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발표한 취임사에서 태고사의 탄생은 1937년 2월 26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로부터 31본사 주지들에게 조선불교진흥책의 자문안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31본사 주지회의에서 전원일치하여 통제기관인 총본사를 중앙에 설치하여야 한다는 답신을 하였는데, 그 결과로 1941년 4월 23일자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태고사가 인가되고 태고사법이 공인되게 되었다고 하였다.43)

총본사가 인가될 즈음에 ‘조선불교총본사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위원회의 설립목적은 조선불교총본사설립에 관한 사무처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위원회의 사무소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두어졌다. 그리고 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토키자부로(鹽原時三郞), 2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1명은 총독부 사회교육과장이었던 계광순이 그리고 나머지 1명의 부위원장에는 월정사 주지였던 이종욱,44) 그리고 고문에는 각도 내무부장과 기타 학교 경험이 있는 자 중에서 회장이 위촉한다고 되어 있다.45)

총독부 학무국장은 총본사설립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총본사 설립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받았을 것이고, 총독부 지침에 따라서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총본사 태고사는 31본사를 통괄하는 최고 기관임에도 사찰령을 개정하여 총본사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사찰령 시행규칙만을 개정하여 총본사로서 인가한 것은, 총독부가 태고사에 조선불교계를 독자적으로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식민지 통치정책에 활용하겠다는 야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총본사가 인가됨에 따라서 교무원은 명칭을 조계학원으로 변경하여 총본사 태고사에서 관리하게 하였다.46) 총본사가 성립되기는 하였지만 그 운영에 있어 운영자금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자금문제를 총독부에서 해결해 주었다. 정무총감은 태고사가 설립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각도에 통첩을 보내서 지가 1,500원 이상의 부동산 소유사찰로 하여금 지가 1할의 토지를 총본사에 무상 양여하도록 지시하였다.47)

중일전쟁 이후 1938년 3월 4일에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칙령 제103호로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된 이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였던 모든 정책에 황민화라는 말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각종 단체에 시달한 모든 지시사항은 전쟁지원사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진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물자부족과 인력부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42년 5월에 1944년부터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48)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선총독부 당국의 발표가 있자 조선불교계에서는 환영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당시 불교계 학승이었던 권상로는 지원병제 실시에 대해 《임전의 조선불교》라는 책에서 설봉산 귀주사, 오대산 월정사, 내금강 장안사의 청년승려 40∼50여 명이 지원병에 참여한 사실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49)

3. 불교계의 친일문제와 남겨진 과제

불교계의 친일양상은 식민지 시기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1910년 10월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직후 당시 원종의 대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조선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불교의 포교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회광의 이러한 망동은 박한영·진진응·한용운과 같은 민족주의 계열의 승려들이 임제종 설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이회광은 1920년에도 또 한 차례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 조선불교를 연합시키려는 책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 심전개발운동이 전개되자 권상로·김태흡·이능화를 비롯한 불교계의 거두들이 전국을 돌면서 심전개발운동을 찬양하는 강연에 종사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그 직후인 1937년 7월 25일과 8월 1일에 황군의 국위선양과 무운장구를 비는 법요식을 전국 31본산본말사에서 일제히 개최하고 국방헌금과 출정장병의 위문금을 각각 지방군사연맹을 통하여 헌납하였는데, 1937년 9월 1일자로 발행된 《불교시보》에 실린 금액의 전국에서 걷힌 국방헌금 합계는 2,570원 30전이었다.50) 그리고 승려들은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시주를 받는 탁발을 통해서도 국방헌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51)

조선불교계에서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두 차례에 걸쳐 승려와 모든 불교도들에게 비행기 헌납을 위한 헌금을 강요하였다. 1941년 11월 17일 총본사 태고사 대웅전에서 개최된 중앙종회에서는 군용기 헌납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승려 1인당 최저 1원 이상 10원까지, 사찰의 사무직원과 부속기관 직원들은 월봉의 1할 이상, 신도들에게는 10전 이상씩을 헌납하도록 하고, 이들로부터 징수하지 못한 부족분에 대해서는 사찰경비에서 보조하도록 하였는데, 각기 본사 사법에 명시된 법정지가에 비례해서 분담금을 배정하여 비행기 헌납을 강행하였다.

총본사 태고사는 이렇게 모금된 5만 3천원을 1942년 1월 31일자로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하였다.52) 1944년에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태고사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사찰에서 모금한 8만원을 7월 20일 총본사 종무총장 이하 4명의 부장들이 경성부 주재 해군 무관부를 방문하여 헌납하였다.53) 이 밖에 해인사, 통도사, 보현사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1대씩 군용기를 헌납함으로써 조선불교계에서는 도합 5대의 전투기를 헌납하였다.54)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으로 비화되자 일본은 물자부족 현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근검절약과 저축을 강요하였다. 군수품 헌납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총독부는 조선불교계에 위문단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국방헌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명목의 헌금을 강요하였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노력은 반민특위가 와해됨으로써 좌절되었다. 친일세력의 득세는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 종무총장을 지냈던 이종욱이 제2대 국회의원 의원을 지냈다.

수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하였던 권상로는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언급할 수 없지만 많은 친일승들이 해방 이후에도 권세와 영광을 누렸다.
친일승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주로 개별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친일행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이제 시작 단계에 있는 만큼 사실 천착에도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친일승 연구는 이제 보다 질적으로 승화되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친일승에 관한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친일의 논리를 규명하여야 하고 그 한계성도 밝혀져야 한다. 이러한 연구는 친일승들이 친일을 주장하였던 시대적 배경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관련성을 가지면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 친일승들이 살아 생전에 엄정한 자기반성이 없이 애국자로 둔갑하기도 하고, 친일행적이 미화되기도 하여 후세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으로부터 5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항일과 친일의 면모가 함께 있는 사람의 경우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분명히 밝혀야 한다. 평가는 독자들의 재량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 부분이 사장된 채로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조명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4. 맺음말

조선총독부는 개항기부터 종단 수립을 통하여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불교계를 1911년 사찰령이란 악법을 공포함으로써 강한 억불정책 아래서 겨우 잔명을 유지하던 조선시대의 선교양종 체제로 되돌려 놓았다.
총독부는 조선불교계를 30본사 체제로 개편하고 본사 주지의 임면은 조선총독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사찰의 재산을 매각할 때 사전에 당국에 신고하여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인사권과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30본사 주지들은 총독부 당국과 결탁하지 않고서는 사찰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일본불교 종단과 연합을 시도하는 책동마저 일어났으나 이러한 책동은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들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한민족의 저항을 경험하고 나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통치정책을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고 감시와 감독을 강화하면서 민족주의 세력들로 구성된 단체에 친일파를 침투시키거나 아니면 친일파들로 하여금 새로운 어용단체를 만들어 분열을 조장시켜 민족주의 세력을 와해시키는 정책을 입안하였다.

1920년대 조선불교계는 비교적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가 구성되어 자주적으로 조선불교 총무원이라는 단일기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사찰령 철폐운동이 일어나서 불교계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세력은 총독부와 밀접하게 결탁된 주지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교무원 측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총독부의 구도대로 교무원을 중심으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었다.

1920년대 총독부가 종교단체에 재단법인을 인정한 것은 종교의 사회적 신용도를 높이는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총독부의 감독하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독부는 법인의 재산 소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피감독권도 인정함으로써 매년 활동상황 및 자산변동 상황을 총독부에 보고하고 감독을 받아야만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농업공황을 맞은 일본 사회는 극심한 경제적인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카기 총독은 농업을 기간으로 한 조선의 농어촌진흥운동을 입안하였다. 농어촌진흥운동이 경제적 방면에서 갱생운동이었다면 농어촌진흥운동을 정신적인 방면에서 지원하고,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안정을 구하는 물심일여 운동으로 시행되게 된 것이 심전개발운동이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에 있어서 종교계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종교가 민중들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의 종교 가운데서 불교에 주목하였다. 불교는 조선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이고, 조선시대를 통하여 심한 억압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부녀자를 비롯하여 많은 잠재적인 신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승려들의 지위가 형편 없이 저하되어 있는 실정이므로 승려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고 정책적으로 불교의 부흥운동을 지원해 준다면 심전개발에서 지향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무난한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전쟁이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자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총력전 체제를 확립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서 조선의 사상계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종래 31본산을 개별적으로 통제·관리하던 체제에서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서 총독부의 명령체계를 강력하고,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총본사의 설립을 조선불교계에 지시하였다. 총독부는 총본산 태고사의 성립과정에서부터 개입하였다. 총독부는 총본사로 하여금 전시체제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였다.

총본사는 조선불교계의 전교도들을 총동원하여 5대에 이르는 전투기를 헌납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전쟁에서 무기류를 재생산할 수 있는 금속의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금속류 헌납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대해서 불교계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범종·징·바라 등과 불단에 놓여 있는 향로·촛대 등까지도 헌납하게 되었다.
친일문제는 불교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친일승들의 친일행각은 해방 이후 불교계에 수많은 분열과 대립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친일파 연구는 식민지 시기를 살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목숨을 바친 선각자들의 행적이 연구되는 것 못지 않게 친일파들의 행적이 조명되는 것도 중요하다.

친일승들은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던 것이 아니고 일신의 안락을 위하여 불교도를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가중시켰다. 친일승들의 행각은 더 이상 감춘다고 영원히 숨겨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시점에서 불교계에 남겨진 과제는 그들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겸허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김순석
고려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현재 고려대 강사. 논문으로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심전(心田)개발운동'의 전개와 조선불교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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