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김광식
부천대 교수
1. 서언

일제는 한국의 국권강탈을 기함과 동시에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통치는 단순한 식민통치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의 주권과 생존권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면서 한국 민족을 말살하였던 야만적인 폭거였다. 이에 한민족의 구성원은 그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 극복하는 노력을 전개할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 같은 일제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도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이에 불교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내용과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독립운동과의 동질성과 이질성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측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하였으며, 식민통치 기간 내에 줄기차게 지속되었는가, 혹은 그 독립운동을 방해, 비협조하였던 승려나 사찰은 없었는가, 나아가서 일제 불교정책에 부화뇌동한 승려는 있었는가 하는 등등에 대하여 적지 않은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우리는 불교계 독립운동의 성격을 점검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일제하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해는 매우 단선적인 시각에서 접근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찬양과 비판의 입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입장은 각각 일정한 근거와 입론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 자체를 편향적으로 이해, 수용, 거부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와 불신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그를 비판적, 대승적으로 이해하고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엄정한 학문적 자세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에 본 고찰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갖고 일제하 불교계의 독립운동의 개요와 성격을 정리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사실을 조명하거나, 특정한 내용을 문제시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제껏 독립운동의 개념, 범주, 내용으로 제기되었던 논란들을 재정리하는 것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추후 독립운동의 내용, 개요, 성격 등을 더욱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일익을 제공하고자 한다.

2. 독립운동과 불교

일반적으로 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다. 때문에 한국 민족이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노력은 식민지 해방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권력과 구조를 파괴·추방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최종 목표였다.1)

그런데 독립운동의 이념은 그보다 거시적인 근대 민족운동의 범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운동의 이념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로 지칭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독립운동의 개념은 반제국주의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반봉건주의와 완전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근대 한국민족은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자생적으로 고뇌, 검토, 수립하고 그를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외세의 침투와 침략으로 그 이행에 큰 타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근대 민족운동은 자연 민족 공동체 내부의 발전을 지향하면서 그를 억제시키는 외세를 배격해야 할 당위에 직면하였는바, 이러한 과제가 곧 민족운동의 이념적 과제로 수립되었던 것이다. 곧 반제와 반봉건이라는 민족운동의 이념의 구도가 정립되었다 하겠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일차적으로는 반제국주의에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를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의식, 노력, 행동 등을 총칭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 항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을 식민통치함에 있어서 한민족 자체를 부정, 말살하여 식민통치의 영속을 기도하였다. 때문에 일제의 식민통치는 언론, 국학, 문화, 종교 등의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철저한 동화정책을 강요하였다.2) 동화정책이라 함은 한국인 고유의 의식, 전통을 부정하고 일본인의 정신적인 범주로 흡수하려는 의도, 정책, 방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식민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문화의 측면에서는 반제국주의에 포함되면서도 그 내적인 별개의 또 다른 독립운동의 영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민족성의 회복, 민족문화 전통의 보존, 민족정신의 회복 등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신적인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던 것을 적극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것을 제안하고, 이를 본 고찰인 불교계 독립운동의 서술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하에서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념과 범주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선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 항쟁하는 적극적인 의식과 행동을 전제할 수 있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일제의 동화정책에서 배태된 식민지 불교정책에 저항, 항거,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식과 행동을 말할 수 있다 하겠다. 불교계에서 의병전쟁, 3·1운동, 임시정부, 의열투쟁, 무장투쟁 등에 참가함은 전자를 말하는 것이고, 사찰령 철폐운동, 사법 개정운동, 본말사 제도 부정, 일본불교화의 거부 등은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주로 후자의 문제이다. 전자의 범주에 승려 및 사찰이 관여되었다면 그는 당연히 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지금껏 그 개념 및 범주에 있어서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사찰령 철폐, 일본불교의 거부 등이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접근, 서술은 되었지만 독립운동 차원에서 접근은 미약하였다. 특히 사찰령 체제 내부의 모순을 지적,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민족의식 혹은 독립운동 차원에서는 거의 검토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교계 내부의 일정한 모순과 나약한 현실 인식이 개재되었음에서 그 접근 자체를 어렵게 하였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나아가서 일제의 불교정책에 기생하여 일신의 안일을 추구한 승려들이 있었고, 불교계 내부에서 그에 타협, 굴절, 좌절한 움직임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여기에서 불교계 독립운동 개념과 범주 설정에 어려움과 혼선이 개재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단 위에서 설정한 불교계 독립운동의 이원적인 구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전자의 참가를 직접적인 항일투쟁의 구도로 지칭하고, 후자의 참가를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의 구도로 제시하고자 한다.3) 이 같은 설정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구도와 내용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 점검과 적용에는 보다 냉정한 성찰의 자세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이 같은 구도를 수용할 경우에도 유의할 측면이 적지 않다. 특히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가 자행되었던 그 시기는 조선후기 이래 정치, 사회적으로 낙후되었던 불교가 불교의 대중화,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산간에서 도회지로 나온 시기였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에 침투하였던 일본불교로부터 불교의 대중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 주의할 것은 침략과 통치 기간에 일제는 식민통치에 불교를 적극 활용하려고 다양한 노력을 기하였고, 일정 부분은 관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한국 불교계에서는 일본불교에 영향 받고, 일본불교를 이용한 경우도 분명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일제가 현실 의식이 나약한 불교계를 이용하여 한국인을 일제 식민지 체제에 순응케 하는 전위로서 구사하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구사하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제는 한국 불교계를 단순히 불교를 관리하겠다는 차원보다는 불교의 영향력을 유의하여 보다 적극적인 대민정책에 활용하려는 다양한 정책을 수립, 입안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불교의 대중화, 근대화에 일제의 불교정책이 관철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한국불교 스스로 불교의 대중화를 추구하였지만, 일제의 은근한 후원과 유도를 받으면서 혹은 불교정책의 구도 내부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하 불교계의 제반 동향에서 자주적, 자생적인 동향과 일제의 불교정책이 관철되는 동향을 엄밀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두 측면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음은 물론이었다.

한편 일제의 불교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한 노선도 단순치 않았다. 요컨대 저항과 극복의 구도 내에서도 다양한 행적이 노정되었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같은 다양한 노선을 유형별로 대별하고 그 내용도 정리할 필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당시 일제는 불교계가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영역으로 나오지 못하게 사전 방지에 유의하였다.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즉, 일제는 불교계를 종교적인 영역의 활동에 안주하도록 유도하면서 일제가 주문, 요청하고 있는 대상의 일에만 참여하는 제한 조치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사법에서 사찰의 임무와 성격을 종교적인 역할에 규정시키고, 시사 및 정치 문제를 담론하거나 정치단체에 가입한 승려는 체탈도첩시킬 수 있다 함은 그 단적인 예증이다. 1910∼30년대 불교계 잡지의 기고 원칙이 정치와 시사 득실(得失)은 제외한다는 것도 이와 유관한 내용이다. 즉 일제는 불교계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력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가 완전 분리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다.

종교의 제반 행정, 원칙, 운용의 틀을 정하고 그 이행을 감시 감독하는 자체가 이미 정치의 속성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 불교를 배제하려는 일제의 의도는 민족, 독립운동의 범주 및 대열에 불교계가 참여치 않도록 하기 위한 기본 원칙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나타난 제반 양상은 일제가 정한 정교분리의 구도를 깨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일제하 불교정책에 대응(저항, 극복)한 한국 불교계 구도의 본질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불교계의 간접적인 항쟁인 저항과 극복의 요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요점을 먼저 말하건대 그는 주체성, 자주성, 자생성이라 하겠다. 한국 불교계가 불교계의 제반 문제와 모순을 자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과 결실이라 하겠다. 물론 이에 반하는 행적인 사리사욕 추구, 반민족적 행태, 한국불교 전체의 발전에 저해 등은 제외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일본불교화의 예속을 벗어나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도 개재되어 있었음은 자명한 것이다.

3. 불교계 독립운동의 전개와 유형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의 기본적인 개요와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직접적인 항일투쟁의 노선과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의 노선을 제시하였다. 이에 본장에서는 그 구체적인 노선을 더욱 대별하여 제시하면서 그 관련 내용의 대강을 살펴보겠다.

우선 직접적인 항일투쟁의 노선은 항일투쟁의 노선으로 제안하겠다. 다음으로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의 노선은 그 내용이 다양하기에 저항의 노선, 전통 수호의 노선, 극복의 노선 등으로 대별하고자 한다.

1) 항일투쟁의 노선

항일투쟁의 노선은 일반적인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지칭한다. 일제 식민지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의식, 노력, 항쟁인 것이다. 불교계의 항일투쟁의 동참, 주도 등은 경술국치 이전에서부터 일제가 패망한 8·15해방까지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제반 양상은 시기별로 다양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교단, 종단 차원의 참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주로 개인 및 단체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우선 국권상실 이전의 항일투쟁은 의병전쟁의 승려 개인의 참가로 나타나고 있다. 유인석·노응규·최익현·민종식·김동신·민용호의병진,4) 호좌의병진,5) 전북의 창의동맹, 양주의병 등에 승려가 참여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6)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불교계가 참여하였다. 즉, 불교연구회에서는 1907년 3월에 국내 각 사찰에 공문을 보내 일반승려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유도하자는 결의를 하였다.7) 이 결의에 영향받은 것인지는 단언할 수는 없어도 해인사, 범어사, 화장사, 용주사, 유점사, 신원사 등의 사찰에서 국채보상의연금 수입을 광고하는 내용이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기사에 다수 전하고8) 있다.

국권상실 직후부터 3·1운동 이전까지의 불교계의 독립운동 참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1918년 10월 제주도 법정사 항쟁이 유일한 사례이다. 당시 이 법정사 항쟁은 승려 김연일·방동화를 비롯한 일단의 승려들이 주민 400여 명과 함께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 경찰과 일본인을 응징하는 등 그 항쟁의 파장은 자못 엄청났다.9)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관련자가 66명, 수형자 31명, 옥사자가 5명이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그 항쟁의 개요를 파악할 수 있다.

불교계의 항일투쟁은 3.1운동 참여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를 근거로 본격화되었다. 3·1운동 당시의 불교계 항일투쟁은 지금껏 큰 주목을 받아 왔다.10) 이에는 대략 3·1운동을 기획, 주도한 민족대표에 한용운과 백용성의 포함에서부터 이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게 축적되어 있다.11) 그리고 이들에게 영향받은 중앙학림에 재학중이었던 청년승려들이 주도한 3·1독립선언서 배포도12) 어느 정도 그 과정이 해명되었다. 또한 이들과 연계된 지방 사찰에서의 만세운동도 그 개요도 소개, 요약되었음은 물론이었다.13)

그 결과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김용사, 마곡사, 쌍계사, 화엄사, 선암사, 송광사 등에서 청년승려, 학인들이 그 인근 주민들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중앙과 직접 연결되지 않았지만 자생적인 사찰에서의 만세운동도 적지 않게 전개되었거니와 봉선사, 신륵사, 표충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3·1운동 직후의 독립운동은 주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임시정부의 법통을 제공한 한성임시정부의 기반이 되었던 13도 대표자 모임에 이종욱과 박한영이 참가하였음이 주목된다. 그 후 상해에서는 국내 불교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인사들이 운집하였다. 예컨대 이종욱, 김법린, 김상호, 백성욱, 신상완, 이석윤, 김상헌, 송세호, 백초월, 정남용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청년외교단, 대동단 등에 참여하면서 항일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불교계 인사가 수행한 항일투쟁은 군자금 모집, 국내 불교계 대표의 파견, 항일자료 이송, 특파원 파견 등 그 활동은 다양하였다.

이 같이 상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계의 항일투쟁은 1919년 10∼11월에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임시의용승군 조직과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일명, 승려독립선언서)로 한층 고양되었던 것이다.14) 이 의용승군과 선언서는 상호 밀접한 관련하에 구체화된 것인바, 그 이면에는 일제와 항쟁을 치루기 위한 불교계의 인적·물적 기반을 투입하겠다는 치밀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또한 그 내용 중 상해 임시정부와 의용승군을 연합하고, 국내 주요 사찰을 그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는 우리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중견승려 12명의 가명으로 발표된 선언서에는 불교계가 일제와 혈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고,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절멸에서 구하는 것이 불교의 항일항쟁의 근본 목적임을 명쾌히 개진하였던 것이다.

상해 이외의 독립운동은 만주지역의 군관학교 및 독립군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승려들이 그 군관학교와 독립군에 가입하였고, 그 배경으로 국내에 돌아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음은 그 실례이다. 이에 이들은 국내 각처의 사찰을 순행하면서 모금된 군자금을 만주 독립군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이 상해와 만주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던 불교계의 항일투쟁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 활동 내용이 현격히 감소하였다. 이는 이 분야 연구가 미진하여 그 관련 내용과 자료를 파악치 못한 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현격한 감소에 대한 논리적인 탐구가 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이럴 즈음에 승려 출신인 김성숙과 이운허가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에 투신하여 불교계 항일투쟁의 명맥을 계승하였다.15) 김성숙은 3.1운동시 봉선사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후 조선불교청년회, 무산자동맹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중국의 민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대학 재학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등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며 8·15해방시까지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운허는 승려가 되기 이전부터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대 초반 우연한 계기로 불가로 입문하였는바, 1929년부터는 또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김법린은 1927년 2월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의연히 개진하였다.16) 이 사실도 독립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계의 항일투쟁은 더욱더 위축되었다. 이 당시 불교계 항일은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항쟁의 성격도 저항적인 성격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예컨대 한용운의 신간회 참여와 창씨개명운동 반대, 불교계 학교에서 항일의식 고취 등은 그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계 학교에서 전개한 항쟁, 저항은 불교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사상의 측면에서 그 가치는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통도사에서 경영하였던 통도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승려인 조용명이 1939년 이후에 창씨개명운동 반대, 일본어 및 일본연호 사용 금지, 일본역사 부인, 애국지사 심방 등을 전개한17) 것은 그 내용의 일단이다. 이 성격은 1945년 5월 경북5본산(동화사, 은해사, 기림사, 고운사, 김용사)이 설립한 오산불교학교의 학생들이 일본군 입대 거부, 독립운동가와 연락 도모 등을 결의하였던 사건에서도18) 나온다.

그 밖에 이종욱이 해방 직전인 1944년 3월 경 무장봉기를 준비하며 군자금 모금을 하였다는 것도 일단은 유의할 내용이다.19) 그런데 이종욱의 이 행적과 관련하여, 그에 관련된 항일 및 친일의 노선과 관련하여 시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봉기를 함께 준비한 유석현의 행적을 신뢰한다면 일단 이 사실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2) 저항의 노선

저항의 노선은 일제 식민지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그를 타파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지칭한다. 그러면 우선 일제 불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을 제시할 필요가 나온다. 그는 단언하여 말하건대 1911년에 제정, 반포되어 한국불교를 행정적으로 통제, 관리하였던 사찰령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사찰령에서 파생된 사찰령시행세칙과 사법도 일제의 불교정책의 구도에 포함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찰령, 시행세칙, 사법을 일제 식민지 불교정책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불교계의 저항 노선은 이 같은 사찰령 체제에 저항, 반발하였던 의식과 행동들을 말한다. 그런데 일제 통치기간 내에 사찰령, 시행세칙, 사법은 수많은 수정을 기하면서 불교계 관리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수정, 보완 전체가 저항의 노선 범주로 볼 수는 없다. 그 내용 중 불교정책을 비판, 저항하여 그것이 반영되었다면 그 움직임만을 포함시킬 수 있다 하겠다.

사찰령 체제가 구축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그 이전 한국불교의 고유한 관행이 서서히 파괴되고, 일제의 통치권력에 기생하였던 주지층의 권한이 막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령 체제는 기본적으로 본말사 체제로 운용을 의도하였기에 한국불교 내에서는 본사와 말사 간의 지속적인 갈등과 대립이 노정되었다. 이는 국권상실 이전 한국불교의 통불교 혹은 태고보우국사 계승의식 등에 의거 단일적인 종단의 지향 노력이 자연 붕괴되었음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대신 30본산 체제라는 개별구도와 분열성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 본산 중심의 운영 구도는 사찰령의 요체였으며, 이 구도에서 주지층의 권한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유의할 불교정책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신앙, 포교, 대중화를 모방케 하는 이른바 동화정책이다.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를 동화시킴으로써 한국불교의 독자적인 주체성과 전통을 배제시키면서 은연중 일제 불교정책에 순응케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불교 대중화에 진보적이었던 일본불교에 대한 발전을 우수한 문명으로 인식케 하여 근원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배타성을 축소시키면서 일본에 대한 우호성을 증진시킴을 의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서 조장된 것이 이른바 승려의 대처식육의 허용과 지속적인 일본 유학, 시찰, 견학의 지원으로20)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 저항 노선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찰령 반대, 대처식육 반대, 일본 시찰 및 견학 등의 반대를 말할 수 있다. 사찰령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및 저항은 3·1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3·1운동으로 나타난 민족의식에 계발받으면서 불교 내적으로는 10여 년 간의 사찰령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였던 청년승려들의 자각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 자각은 조선불교청년회 및 조선불교유신회의 출범으로 확연하게 나타났다. 청년승려들은 한국불교의 모순을 사찰령으로 인식하고 그 철폐운동을 전개하였거니와 여기에서 사찰령에 대한 저항이 노정되었다. 이에 불교청년들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그들이 인식한 문제점과 대안을 동의받고 그를 문서화하여 1922년 4월 ‘건백서’라는 이름으로 총독부에 제출하였다.21) 당시 그에 동의한 승려가 2,284명이라는 기록을22) 유의하면 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총독부 당국에서 전혀 수용되지 못하였다. 이에 불교 청년들은 1923년 1월에 접어들면서 재추진을 시도하였다.23) 이 당시에도 일제의 반응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수용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사찰령 철폐 및 개정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1926년 4월 경에 다시 나타났다.24) 이 당시 움직임은 불교청년으로서 1922년 당시 사찰령 철폐를 주도하였던 김상호에 의하여 시도된 것이다. 이때는 사찰재산 관리, 주지 전횡, 사찰 부채의 증가 등으로 나타난 제반 모순을 개혁하려는 차원에서 가시화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사찰령에 대한 비판, 극복을 기하려는 의식이 개재되었음은 분명하였다.

사법에 대한 개정을 시도하면서 은연중 사찰령 체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1930년대 초반에 가시화되었다. 이 움직임은 1929년 1월의 승려대회에서 등장한 종헌 체제를 이행하려는 일단의 승려들에 의하여 구체화된 것이다.25) 이는 종헌에서 규정한 종회, 교무원을 운용하고 그를 통하여 불교의 통일운동을 이행하려고 하였으나 그에 비협조적인 본산과 친일주지층을 견제·흡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요컨대 종헌 체제에서 지향하고 있는 내용은 결과적으로 사찰령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일부 본산에서는 그 이행의 구도에서 이탈하였던 것이다. 이에 종헌 이행을 통하여 사찰령을 비판, 극복하려는 주도세력은 그 대안의 하나로 종헌 체제의 내용을 일제 당국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고 있는 31본산 전체의 사법에 통일적으로 반영시키려는 차선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도 친일주지들의 비협조, 일제의 반대, 불교계의 나약한 현실 인식 등이 중첩되면서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추진에 담겨진 현실 인식에는 사찰령을 비판하면서 일제의 불교정책에 저항하였던 의식이 깔려 있었음은 분명하였다.

한편 일제가 의도한 불교의 동화정책의 핵심 관건인 승려의 대처식육에 저항, 반발한 움직임이 있었으니, 그는 1926년에 나타난 백용성의 대처식육 금지 건백서 제출이었다.26) 개항기부터 한국 불교계에 나타난 승려의 대처, 결혼은 식민지 불교 체제에서 더욱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1925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구체적인 차원으로 논란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대처승려가 본산주지에 취임하려고 그 본산 사법을 개정하려는 문제에서 비화되었다. 그 본산은 뜻을 같이 하는 본산의 협조를 받고, 총독부에 그 개정 신청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일부 본산의 반대로 즉각 이행되지는 못하였으나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당시 이 같은 정황에 대하여 백용성을 비롯한 127명의 승려들은 대처식육의 모순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수호와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그 건백서를 일제 당국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이 같은 건의를 묵살하고 오히려 그 개정을 장려하였던 것이다.27) 일제의 그 개정 수용은 단순히 승려의 대처식육을 묵인한다는 것에 머무른 것은 아니다. 당시 승려의 대처로 인한 사찰재산의 위축·망실을 비롯하여 주지분규, 사찰공동체 파괴 등 다양한 모순이 나타나고 있었음은 일제 당국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용하고 나아가서, 그 개정 작업을 독려하였음은 위에서 제기한 불교의 동화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인 것이다.

일본시찰, 견학, 유학 등에 저항하고 반발한 내용은 그 관련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불교계의 자료 부실, 운수납자라는 행태, 기록을 유의치 않는 의식 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측면의 내용도 적지 않은바, 그 관련 자료의 발굴이 요망된다. 예컨대 오대산 상원사에 있었던 방한암이 그의 제자들에게 왜학을 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은 그 상징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28) 또한 1937년 2월 총독도 참여한 주지총회에서 송만공이 일제의 불교정책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한 내용도 이 노선의 구도에 포함시킬 수 있다.29)

이 같은 저항의 노선은 그 밖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위에서 제시한 내용이 그 중요한 요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노선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사찰령 철폐, 사법 개정, 대처식육의 금지 요청의 건백서 제출 등을 일제 당국에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그 저항 노선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나약성, 혹은 일제 당국을 일단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923년 1월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회의 정기 총회에 참가하여 연설을 하였으나, 유신회원들이 사찰령 철폐를 위한 교섭위원으로 선정하자 그를 수용치 않은 사례에서도 나온다.30) 당시 한용운이 그 교섭위원을 거절한 명분은 그 건백서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치 않은 바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현재 단언키 어렵지만, 다만 이 노선이 기본적으로 간접적인 독립운동의 구도라는 점과 종교계의 속성을 유의해야 한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3) 전통수호의 노선

전통수호의 노선은 일제의 불교정책으로 인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노정된 승려들의 자구책이라고 하겠다. 개항기 이래 한국에 침투한 일본불교는 일제, 일본문명, 선진화된 불교 대중화를 배경으로 하여 그 위세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불교에 영향받으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위기를 투철히 인식한 일단의 승려들의 의식의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었거니와 그 공통의 각성은 선학원 창설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사찰령의 구속을 피하면서도 한국불교의 전통를 수호하겠다는 의식 즉 항일의식이 개재되었다.

선학원은31) 1921년 12월 준공되어, 1922년 3월부터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거니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수좌들의 조직체인 선우공제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선우공제회는 전국 수좌 및 선원의 총괄적인 조직체의 성격을 띠고 출범하였다. 본무 및 사무소는 선학원에 두고 중앙에 서무부, 수도부, 재무부 등을 두었으며, 각 선원을 산하 조직체로 설정하였다.

선학원은 당시 수좌들과 선원을 망라하고, 재정기반을 공고히 강화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1926년 5월 이후에는 범어사포교당으로 용도 변경되는 등 자체 내의 모순을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1931년 1월에 재기한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를 추구하면서 그 운영기반 구축에 유의하였다. 그 결과 1934년 12월에는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그 조직체를 변경시켰다.

그리고 선리참구원으로의 전환을 계기로 당시 수좌들은 자기들이 조선의 정통수도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총독부가 주도한 사찰령 체제와는 별개의 종단을 성립시켰다. 그는 조선불교선종이었는바,32) 그 선언문에는 당시 그를 주도한 수좌들의 현실 인식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선학원 계열 수좌들은 선학원이 교단의 전통을 사수하며, 부패를 정화시키는 근거처로 출발하였음을 인식하고, 다시 전통사수와 교단부흥을 기하는 목적하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은 선종에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선종종헌을 제정하고 그 종헌에서 규정한 종무원을 출범시켰다. 이러한 노선은 곧 전통불교의 수호 및 회복을 내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좌들의 그 의식은 1941년 2월의 고승유교법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같은 선학원, 선리참구원의 노선은 전통불교를 수호, 재건을 위주로 한 활동이었고, 일시적으로는 그 활동에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노선은 일본불교와의 타협을 완전 배제하고 오직 수행의 길로 매진하였기에 그 자체가 항일불교의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

4) 극복의 노선

극복의 노선은 일제 식민지 통치체제의 일환인 불교정책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정책은 사찰령으로 요약되었는바, 그 본질은 한국불교를 행정편의주의로 통제, 관리하는 것이었다. 사찰령으로 나타난 불교정책은 본말사제도를 통하여 본산(본사)을 일제 당국이 직접 통치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따라서 이 같은 일제의 불교정책하에서는 불교 교단 및 종단의 존립 자체가 일제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다. 당초 사찰령 체제하에서는 종단 존재를 전혀 허용치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의 이 정책은 이미 국권강탈 이전부터 가시화되었다. 예컨대 1908년 3월 당시 전국의 승려 대표 65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갖고33) 추진한34) 원종의 인가를 구한국정부 및 통감부가 끝내 인가치 않은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술국치 이후 일제 불교정책을 극복하려는 불교계의 주된 노선은 자연 종단 건설과 운영으로 모아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하겠다. 요컨대 한국불교가 주체적으로 종단 건설을 지향한 제반 노력을 일단은 극복의 노선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이 노선의 최초의 움직임은 1911년 겨울에서 가시화되어 1912년 6월까지 지속된 임제종운동이라 하겠다.35) 당시 임제종을 주도한 승려들은 원종이 일본불교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의 도움을 받아 종단 인가를 득하려는 과정에 대두된 한국불교의 매종을 강력 규탄하였다.36)

그리고 그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한국불교는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의미에서 종단으로서의 임제종 건설을 추진하였다. 여기에서 임제종을 내세운 것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며, 일본불교(조동종)로 흡수되려는 정황을 차단키 위한 방편이었다. 때문에 임제종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제반 움직임도 일단은 극복의 노선이면서 종단 건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3.1운동 이후 본격화된 통일기관 수립운동이었다. 1911년 사찰령 체제하에서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종단은 부재하였다. 1912년의 30본산주지회의소, 1915년의 30본산연합사무소는37) 종단의 기본 조건인 인사권과 재정권을 소유치 못한 일종의 공동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체였다. 그리고 이 조직체의 출범에는 일제의 유도와 후원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3·1운동 이후 불교계에 등장한 개혁의 구도 아래 제기된 다양한 움직임의 최종 결론은 자주적인 종단 건설로 모아지고 있었다. 물론 이 움직임에 반대한 본산 및 승려들도 있었다.
종단 건설은 우선 1915년 연합사무소를 출범케 한 연합제규의 부정으로 시작되어 1921년의 종무원 수립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종무원은 일제가 인정치도 않았고, 본산간의 내분으로 정상적인 운용은 시기상조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노정되는 가운데 사찰령 비판 및 철폐, 본말사제도의 모순 지적, 주지층의 권력 집중 등에 비판이 제기되면서 점차 다수의 승려가 지지하는 통일기관(중앙기관) 건설로 그 대안의 초점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불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이 같은 노선에 동의한 본산이 주도하여 총무원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총무원에 반대한 교무원이 등장하고 일제는 물론 이 교무원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교계 내부의 불화, 상이한 인식과 이해관계 등으로 인하여 완전한 의미의 통일기관 건설 및 운용 즉 종단 건설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총무원은 1924년 초 교무원에 통합되었다.

그 후 종단 건설의 노력은 1929년 1월의 승려대회에서38) 구체화되었다. 그 대회에서는 종헌, 종회, 교무원이 성립되었는데 이를 추동케 한 것은 불교계의 통일을 지향하려는 의식이었다. 불교계가 본산으로 분열되었기에 인사, 재정, 신앙, 의식, 사업 등의 각 분야에서 통일적인 원칙과 규율은 일체 없었던 모순을 극복하려는 바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모순은 사찰령 체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39) 당시 그를 주도한 승려들이 불교의 자주적 확립과 전체적 통일을 기하려 하였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 통일운동으로 인하여 불교의 헌법으로 지칭된 종헌이 성립되었고, 대표·입법기관인 종회와 행정·실행기관인 교무원이 출범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는 이 종헌 체제가 유지되었으나, 그 종헌 체제에 반대한 본산, 주지들이 등장하고 일제의 은근한 비판과 견제에 의해 이 체제는 1934년경에 이르러서는 해소되고 말았다. 항일 비밀결사로 널리 알려진 만당의 등장 배경에는 바로 이 같은 종헌 체제를 지속시키고 그 이행을 통하여 식민지불교를 극복하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인다.40)

그 후 종단 건설을 통한 식민지 불교 체제의 극복의 노력은 1935년경부터 재추진되었다.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의 파급으로41) 나타난 종단 건설은 우선 종무원의 조직화로 시작되었으나, 1937년 2월부터 본격화된 총본산 건설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42) 한편 거기에는 박문사를 거점으로 한국불교를 통제, 장악하려는 일본불교의 음모를 사전 분쇄하려는 승려들의 자주, 자존의식이 개재되었음도 유의해야 한다. 불교계에서는 우선 총본산을 상징하는 대웅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그 건축의 완성을 계기로 한국불교의 역사성을 상장하는 태고사라는 사명을 취득하였다. 그 후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종명을 조계종으로 전환케 하였다. 이 같은 총본산 건설은 1941년 4월 사찰령 시행규칙의 개정을 통한 태고사법에 그 내용이 담겨지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총본산 건설, 종단의 건설과 운용은 출범하였다.

이 총본산 건설운동과 조계종 체제의 출범에는 일면 일제의 개입과 조종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 담겨진 한국불교의 움직임은 ‘저항과 극복’이라는 노선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보고자 한다.43) 이 노선의 구도에 포함시킬 또 하나의 대상은 백용성의 활동이다. 백용성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활동한 이후 일제에 피체, 수감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주로 역경의 대중화, 활구선의 진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대처식육이 만연되고 일본불교 및 일제 불교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불교전통이 상실되어 가자 1926년에는 대처식육 금지 건백서를 일제 당국에 제출하였다.44)

그러나 그 건의도 수용되지 않고, 일제 불교정책에 기생하는 당시 불교계의 사찰 및 승려들의 행동에 강한 비판을 하였다. 이에 백용성은 당시 그 같은 불교계 구도를 자진 이탈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경주하였거니와, 그는 선농불교의 실천과45) 대각교운동의 제창으로 가시화되었다.46) 당시 그는 기존 사찰에 있었던 승적을 자진 반납하고 함양과 만주 등지에서 선농을 주도하면서 불교혁신운동을 실천하였는바 이는 사찰령 체제 및 그에 기생하는 불교계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식의 산물로 보고자 한다.

4. 불교계 독립운동의 성격

본장에서는 지금껏 살펴본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요에 나타난 제반 성격을 대별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이 성격은 불교계 독립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우선 제시하고, 그 연후에는 불교계 독립운동의 미진한 측면과 불교계 독립운동을 검토할 시의 유의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불교계 독립운동은 앞서 직접적인 항일투쟁과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의 이원적인 구도로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에서 나타난 성격을 우선 제시하겠다.

첫째, 불교계 독립운동은 개인 및 개별적인 단체 중심으로 전개되고 교단 및 종단 차원의 전개는 매우 미약하였다. 이는 종단 설립의 지난함과 종단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운신의 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불교 독립운동은 3·1운동 기간과 그 직후에 본격화되었다. 이는 3·1운동의 영향을 지적하는 것인데, 당시 민족의식 계발과 여타 분야의 자생적인 움직임에 일정한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3·1운동 전후에 있었던 불교계 독립운동과 여타 시기의 독립운동과는 큰 차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직접적인 항일투쟁과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을 비교할 경우에는 후자가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불교가 종교이기에 우선 종교조직, 포교, 신앙 및 의식과 보다 유관한 분야에서 활동이 많았음에서 나온 것이다.

넷째, 저항과 극복의 구도로 제시한 간접 투쟁에 있어 그를 촉발시킨 저변의 요체는 사찰령 체제이었다. 즉 사찰령에서 파생된 제반 체제가 결국 일제하 불교의 전체 운신에 큰 장애로 등장하였음이 주목된다.

다섯째, 간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불교계 내부의 비협조, 저해를 주도하는 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이 상당하였다. 즉 친일주지, 사리사욕을 추구한 승려, 불교 발전에 역행하였던 본산 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불교계 독립운동의 미진한 측면과 그에 관련된 제반 정황을 고찰할 경우의 유의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반제국주의에 중심을 두고 그에 상대적인 반봉건주의에 관련된 의식과 활동은 상대적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조선후기 이래의 나약한 사회의식에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를 민족해방운동의 시각, 달리 말하자면 진보 및 좌파적인 시각의 독립운동에서47) 불교계 독립운동을 분석하면 불교계 독립운동은 그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불교 독립운동과 민중성 혹은 대중운동 그리고 사회경제적 토대로부터의 해방과의 연계는 희박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반종교운동과 불교, 사찰의 자주성의 관련성에서 그 정황은 찾아진다.

둘째, 사찰을 거점으로 전개되면서도 승려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불교신도들의 참가는 미약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당시 불교 신도의 통계가 25만을 넘지 않았던 기록들을 유의하면 납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 분야 연구가 미흡한 측면에서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셋째,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도자들은 그 행적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판단의 기준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운수납자의 특성, 수많은 분규, 6·25와 정화운동 등으로 관련 자료의 망실에서 오는 이 분야의 관련자료와 학문의 토대의 취약함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항일 후친일, 직접적인 항일투쟁은 하였지만 대처 즉 일본불교를 수용한 이력의 문제, 개별적인 본산 및 사찰을 위한 것이었지만 중앙종단과 민족불교 차원에서는 저해되었던 사례 등은 그 단면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 불교계 독립운동을 검토함에서는 일제의 불교정책과 그 실상을 명쾌히 분석할 필요성이 더욱 제기된다는 것이다. 필자가 제시한 저항과 극복의 구도를 상정함에서도 그러하고, 일제하 불교계의 성격, 노선 등 전체적인 의미 부여 등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달리 말하자면 친일불교, 왜색불교라는 멍에 혹은 수식어, 관행적인 표현 등을 재검토하는 경우에도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측면은 문화적인 제국주의의 보편성과 일제가 추구한 불교정책의 구도와 본질 등이 선명해져야만 그 정책에 희생된 경우, 타협하거나 좌절한 사례, 일신의 사리사욕과 개별 사찰의 안녕을 위한 경우, 매국승려와 부일승려 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이 분야의 관련 자료수집, 분석, 연구 등의 심화가 더욱 요청된다는 것이다. 금번에 필자는 이 분야의 개요를 정리하고 그 성격을 추출하기 위해 여러 자료와 논문을 활용하였는바, 아직 이 분야 연구의 확대가 더욱 필요함을 이해케 되었다. 동시에 추후에는 이와 관련된 다각적인 이론 모색, 비교 연구, 종교학과 불교사상의 측면에서의 접근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보고자 한다.

5. 결어

이상으로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념과 그 구체적인 내용의 전개와 성격 등을 조명하여 보았다. 이제 그 요지를 정리하면서 그에 나타난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맺는 말에 대하고자 한다.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이념인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는 당시 독립운동의 이념적인 토대였다. 이중 반제국주의가 불교계 독립운동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데 불교계 독립운동을 확대하여 이해하고자 할 경우에는 이 반제국주의 내용을 재검토할 필요가 제기된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단순히 한국의 식민지로 경영함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동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불교를 일본불교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구도에 포함된 불교계의 구성원이 식민통치에 저항, 항거, 극복, 항쟁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교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활용당함에 대한 저항, 반발, 극복한 것도 독립운동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불교계 독립운동은 그 성격에 의거 대별하여 살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다. 그는 항일투쟁의 구도, 그리고 저항과 극복의 구도라 하겠다. 항일투쟁의 구도는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고, 저항과 극복의 구도는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대응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이 저항과 극복의 구도는 그 내용이 다양하여 저항의 노선, 전통수호의 노선, 극복의 노선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일 투쟁의 노선은 불교계 구성원이 일반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내용을 말한다. 승려의 의병 참가, 3·1운동 참여, 한용운과 백용성의 민족대표 활동, 지방 사찰에서의 만세운동 참가, 임시정부 및 만주지방의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한 승려들의 활동, 김법린의 피압박민족대회 참가, 불교계 학교에서의 저항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저항의 노선은 일제 식민지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그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사찰령 철폐운동, 대처식육 반대, 일본시찰 및 유학의 반대 등이 이 구도에 포함된다. 전통수호의 노선은 일제의 불교정책으로 나타난 제반 양상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무너짐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다. 일제의 불교정책을 정면으로 비판치는 않고 그 부산물을 문제시하면서 자주적인 노선을 경주하려는 것이다. 선학원, 선우공제회, 고승 유교법회 등은 이 노선의 산물이다. 극복의 노선은 일제의 불교정책을 직시하면서 그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일제 불교정책의 구도는 본말사 체제, 분열정책을 통한 종단과 교단의 부정이었기에 이를 극복하려는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불교계 통일운동, 통일기관 건설, 종단 수립 운동, 총본산 건설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이 같은 불교계 독립운동은 여타의 독립운동과는 이질적인 행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는 개인, 개별 단체 주도의 측면, 3·1운동 직후의 왕성한 항일투쟁,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의 구도가 두드러진 점, 불교계 내부의 모순과 갈등 해결에 진력한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불교계 독립운동을 고찰할 경우의 유의점에서도 찾아진다. 반봉건주의에 미진한 것, 불교신도의 참가가 희박한 것, 독립운동 참가자의 행적 이해에 난점이 두드러진 것 등은 그 단적인 예증이다.■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대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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