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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관한 고찰 / 박노자
[특집]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8호] 2001년 09월 10일 (월) 박노자 김순석 옮김

1. 머리말

일제 시기의 한국 독립운동 전개의 한 분수령을 이룬 1919년(기미년)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표현한 것은, 그 끝에 덧붙여 있는 소위 공약 삼장(公約 三章)이다.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다음과 같다.

―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인도(人道)·생존(生存)·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한 의사(意思)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독립선언서 자체가 육당 최남선(1890∼1957)에 의해서 기초됐지만, 이 공약 삼장은 1919년의 독립운동의 발기인이자 주역이었던 만해 한용운(1879∼1944)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은, 대개 학계의 통설로 여겨져 왔다. 공약 삼장이 바로 만해의 저작임을 밝히는 직접적 증거는, 잘 알려진 대로 일차적으로 저명한 불교계 독립운동가인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의 회고록 속에서 발견된다.

선언서의 작성에 관한 것인데,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최린, 최남선 및 나 3인이었는데, 최남선 씨는 선언서에 서명치 않고 초안(草案)만을 집필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최린 씨는 그 기초 책임자로 정했다(《신천지》 제1권 제3호, 1946년 3월).

위의 인용문에서는, “나”는 젊은 제자인 김법린에게 선언서 작성 경위를 이야기해 준 만해를 뜻한다. 이 증언으로 봐서는,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전체적으로 재검토·수정하는 과정에서 최남선의 텍스트에 모자랐던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공약 삼장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민족 대표 중의 마지막 생존자이었던 이갑성(李甲成; 1889∼1981)도 만해가 공약 삼장을 추서(追書)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동아일보》, 1969년 1월 1일 7면).

또한 만해의 문인 중에서 만해의 만년에 대한 가장 많은 일화를 전해 준 김관호(金觀鎬; 1906∼1998)도 만해로부터 “공약 삼장은 내가 추가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직접 전해들은 것으로 회고한 바 있다.1) 이와 함께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등 만해의 많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만해가 공약 삼장을 지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기에, 이 만해 추서설(追書說)이 《한국독립운동사》(제2권, 1966, 162쪽)에 실리는 등 통설로 다루어져 왔다.

이 통설에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69년이었다. 조용만은 최남선의 취조(取調) 문답에 기초를 두어,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와 그 밖의 일제 서류(공약 삼장 포함)를 지어 최린에게 넘겨주었다는 주장, 그리고 최남선이 서류 작성을 전담했던 반면에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도 공약 삼장도 사전에 보지도 못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2) 이와 같은 육당 전담설(全擔說)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신용하에 의해서다.

신용하는, 만해가 초고를 보지 못했으며 수정·보완하지 못했으리라는 조용만의 신설에 입각하여 독립선언서 작성에 대한 일경의 추궁을 받은 사람이 주로 만해가 아닌 육당이었다는 주장과, 만해 추서설(追書說)이 만해의 문도에 의해서 선포됐다는 주장 등 여러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3) 그 후에는 육당의 연구자 홍일식과 독립운동 역사의 전공자 박걸순은, 각각 다른 각도에서 육당 전담설(全擔說)을 지지했다.4) 결과적으로, 이 육당 전담설은, 독립선언서와 공약 삼장을 구분치 않은 채 똑같이 육당의 글로 파악했던 3·1 운동 직후의 일경의 집필자 문제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육당 전담설(全擔說)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 일찍 김상현이 자세히 논파한 일이 있다. 김상현은, 만해가 선언서의 원고를 보관한 적이 없다 해도 1919년 2월 24일 원고 보관의 책임자이었던 최린의 집에서 원고를 분명히 봤다는 점과,5) ‘원고를 단순히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대로 다소 교정하기까지 했다’고 만해 자신이 자인한 점6) 등을 기반으로, 만해가 2월 24일 최린의 집에서 선언서의 원고를 검토하여 공약 삼장을 덧붙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입증했다.

이외에, 김상현이 특히 유의한 점은, ‘최후의 마지막 사람,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공약 삼장의 굳센 정신이 이미 3·1운동에 대한 공판에서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인 만해에 잘 어울리지만, ‘때가 아닐 때 경솔히 행동하지 않겠다’는7) 식으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한 육당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김상현은 “착수가 곧 성공”이라는 선언서의 마지막 부분과 ‘최후의 마지막 사람, 최후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공약 삼장의 정신을 비교하여, 선언서를 쓴 육당이 보다 확신에 차고 굳센 공약 삼장을 과연 썼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더 나아가서, 김상현은 김관호(金觀鎬) 등의 만해 문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삼장이라는 형식·공약 삼장의 내용과 불교의 삼보(三寶)사상의 연관성을 밝히고 ‘최고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철저성이 만해의 사상과 신념에 어느 정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상세히 보여 주었다.8)

이미 김상현에 의해서 공약 삼장 작성의 상황과 경위가 자세히 고찰됐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논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 대신에, 필자가 이 작은 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공약 삼장의 자유·비폭력·국제주의 사상이 만해의 평생의 신념과 어느 정도 가까운 관계에 있었는가라는 측면이다. 필자는, 공약 삼장을 독립선언서의 ‘눈동자’뿐만 아니라 만해의 사상·신념의 일종의 ‘축약판’으로 생각한다.

공약 삼장의 말이 매우 간단·명료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평소 만해의 무수한 번민(煩悶)과 수양, 득도(得道)와 사색들이다. 몇 줄이 안 되는 이 공약 삼장은 한용운의 사상과 인격, 구도(求道)와 모색의 일종의 ‘결과물’을 담고 있다. 공약 삼장과 한용운의 다른 저작물과의 연결이 보다 밝혀지면, 집필자의 규명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진척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 자유·비폭력·국제주의

1) 공약 삼장의 첫장은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자”는 호소부터 시작된다. 이처럼 정의·인도·생존·존영과 함께, 자유는 분명히 공약 삼장의 기본적인 개념에 속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유’는 분명히 한용운의 사상적 발전의 한 큰 흐름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자유(自由)’라는 liberty의 역어(譯語)를, 한용운이 최초로 1900년대 초·중반에 양계초(梁啓超 ; 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서 접해, 양계초의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김상현에 의해서 자세히 설명된 바 있다.9) 한용운의 자유의 이해의 기초를 제공해 준 양계초의 자유 사상의 요점은 무엇이었는가?

잘 알다시피, 양계초의 사상―그 중에서 특히 현실 정치와 관련된 부분들―시기와 현실 상황의 전개에 따라서 상당한 변화를 거쳤다. 중국 사상가 중에서 최초로 아직 잘 익히지도 못한 ‘양학(洋學)’을 체계화하여 본인의 신념과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던 그는, 선구자로서 불가피한 많은 혼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에게 자유에 대한 기초적인 관념을 본격적으로 가르쳐 준 것은, 아마도 엄복(嚴復; 1853∼1921)에 의해서 1899년에 번역된 존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고전적인 《자유론(On Liberty)》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으로 망명한 후(1898년 이후) 서양 언어에 밝지 못한 양계초가 주로 서양 서적의 일어(日語) 번역에 많이 의존하면서 벤담(J. Bentam), 스펜서(H. Spencer) 등의 자유 관계 사상을 열렬히 탐구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한용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양계초 《음빙실문집》(1902년 첫 간행)의 자유 사상은, 밀(Mill)형의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보다는, 스펜서의 강한 영향을 받은 사회 진화론적 자유 이념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양계초는,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대로 전재(轉載)한, “자유의 한계는 각자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범치 않는 것이다.”10)라는 유럽 고전 자유주의의 자유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용운도 매우 강조했던 사상의 자유를, 양계초가 ‘모든 자유의 어머니’라고 하며 교조주의적 종래의 유교로부터의 자유의 의미에서 아주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양계초는 시종일관―특히 1903년에 강대국 미국의 현실을 체험한 뒤에―자유의 개념을 사회 진화론적 문맥 속에서만 파악하였다.

현실 정치인이었던 그에게 있어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단체(국가/민족/인종 등)의 자유’는 더 우선적이었다. 그에 의해서, ‘단체의 자유’는 혹독한 약육강식형의 생존 투쟁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강권(强權)’이었다. 이와 같은 자유는, 긍정적·인본주의적 의미의 자유(진정한 자아의 구현 등)라기보다는, ‘남의 구속/침략으로부터의’ 부정적·쟁취적(爭取的) 자유이었다. 자유를 부여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생존 투쟁에서는, 남을 침략하는 강자보다도 자강(自强)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방기한(즉, 쟁취하지 못한) 약자는 도덕적으로도 변명할 여지 없이 열등했다.

그리고, 양계초에 따르면, 국제적 생존 투쟁의 주체가 국가인 이상, 이 ‘최상의 단체’인 국가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것은, 이차적인 ‘개인의 자유’보다 훨씬 중요한 ‘국민의 의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사상가이었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에 의한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의 국가주의적·제국주의적 해석에 크게 힘입은 양계초의 ‘자유론’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11)

자유에 대한 양계초의 사회 진화론적 이해의 틀을, 한용운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조선불교유신론》 단계의 한용운은 아직까지 현실 이해의 기본 틀로서 사회 진화론을 일단 진실로 여겼다. 《조선불교유신론》의 곳곳에서는 “지금과 같은 경쟁 시대”, “현재와 같은 생존 투쟁 시대”라는 표현들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한용운은, 승려의 교육과 포교를 논할 때 이를 마치 외래 종교(즉, 기독교)와의 “생존 경쟁”을 위한 “무기”와 “전략”으로 보는 바 있었고,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과의 저명한 비유에서 “높은 데”(즉, 승자가 되는 우수한 세력)를 도덕적으로 책망하기가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었다.12) 이외에도, “생존 투쟁”을 위한 “자강(自强)”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던 구(舊)학문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한용운은 양계초의 표현 거의 그대로 “사상의 자유”를 “사람의 생명”이자 “학문의 핵심”으로 매우 중요시했다.13)

그러나, 자유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한용운 초기의 사상의 사회 진화론적 요소를 지적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한용운의 정신 세계에서 사회 진화론의 극복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용운은 양계초의 사회 진화론에 안주(安住)하지 않았고, 그 사회 진화론의 극복·지양(止揚)의 길을 열심히 모색했다.

그리고, 이미 《조선불교유신론》의 단계에서 그가 발견한 방도는, 불교 사상·신앙에 의한 사회 진화론의 상대화(相對化)·지양이었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기본적으로 칸트로 대표되는 유럽 사상과 불교 사상을 비교하여 불교사상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즉 그는, 진정한 자아·개인적 도덕성 등 개체에 치중하는 칸트 사상에 비해서는, 득도(得道)를 통한 개인의 자유(解脫)와 일체 중생의 불성(佛性)·구제를 상즉상리(相卽相離)의 논리로 조화시키는 불교 사상이 월등히 우수하다고 논파하고, 불교의 개체 자유론을 무시해 버린 양계초를 비판하였다.14)

단순한 ‘힘의 논리’인 사회 진화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고등 사상인 칸트의 도덕 철학도 불교와 비교되지도 못한다는 것을 일단 입증한 한용운은, 불교 사상의 궁극적인 우월성을 기반으로 사회 진화론의 ‘제몫’을 잘 찾아 줄 수 있었다. 그는, 요즘 세상(今世)의 절대적 진리(不二法門)가 바로 “공법(公法, 국제법)의 천 마디보다 대포 한 문이 더 낫다.”는 서양인들의 말이라는 점을 일단 기정 사실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상태를 “야만적 문명(野蠻文明)”이라고 이름을 짓고,15) 문명의 진보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속된 세도(世道)’가 결국 극복되어 세계가 장차 평화·평등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보였다. 이 아름다운 평화·평등 시대의 주된 원리는 바로 평등주의·세계주의를 내포하는 불교가 꼭 되리라고 한용운은 내다봤다. 현재의 야만적 세력 위주의 세상에서는 진리보다 힘이 중요시되는 등 진정한 자유가 실천되지 못하지만, 평등주의·세계주의의 미래의 불교시대가 분명히 자유의 시대가 되리라고 한용운은 굳게 믿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야만적인 “투쟁의 시대”에도, 불교 사상·실천에 입각해서 자유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즉, 자유를 강권(强勸)과 동일시하여 “생존 투쟁 속의”, “생존 투쟁에 의한” 자유를 외쳤던 양계초와 정반대로, 한용운은 자유와 진리를 부정하는 현재의 “야만적 문명”과, 진정한 자유를 가능케 만들고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평등주의·세계주의의 불교 사상을 명백히 구분해 놓았다.

양계초와 달리, 한용운은 자유가 가능한 궁극의 진리인 불교 사상과, 야만적인 현세(現世)를 결코 혼동하지 않았다. 서양 사상의 백미(白眉)인 칸트의 도덕주의마저도 불교에 비해서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을 간파한 한용운으로서는, 제국주의 정치의 합리화인 사회 진화론과 자유를 혼동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불교유신론》 단계의 한용운에게는, 자유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유의 근원을 불교적 견지에서 해석된 평등의 원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즉, 현실은 강자와 약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로 뚜렷한 불평등한 구조를 이루지만, 이 것이 불교적 차원에서 무명에 빠져 거짓(‘허공의 꽃’)인 현상에 미혹한 중생들의 망상·착각에 불과하다. 모든 현상이 다 인연에 따라 생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부처님의 눈으로 봐서는, 세상이 강·약, 성·패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그 평등이란 일체 중생들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성불(成佛)할 수 있고 하나의 진여(眞如)를 평등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궁극적이며 일(一)과 다(多)를 초월하는 진여(眞如)의 진리 앞에서는, 일체 생명은 평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평등에서는 일체 생명의 자유가 비롯된다. 양계초의 자유는 쟁취에서 오는 자유라면, 한용운의 자유는 진여(眞如)의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한용운이 설파한 이 깨달음에서의 자유에 당연히 다른 평등한 생명들에게도 자유를 깨치도록 도와주는 ‘구세(救世; 중생의 구제)’의 의무도 수반된다. 한용운이 구상한 자유·평등의 세계에서는, 불교의 자리이타의 이념에 따라서 자유를 이미 얻은 모든 이들이 저절로 남들을 자유로 인도하게 된다.

자유에 대한 한용운의 갈망은 일제 초기 무단 통치의 쓰라린 경험으로 보다 강화되기만 했다. 1917년도에 이르러서는, ‘자유’는 한용운의 주요 화두 중의 하나가 됐다. 1917년도에 출간된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에서, 한용운은 《채근담》의 “化居盆內 終乏生機 鳥入籠中 便滅天趣 不若山間花鳥 錯集成文 ╃翔自若 自是悠然會心(꽃이 화분 속에 있으면 마침내 생생한 기운을 잃고 새가 조롱 속에 들면 곧 본래의 취미를 잃느니, 산속의 꽃과 새가 서로 어울려 찬란한 문채(文彩)를 이루고 자유로이 날아다녀 이로부터 유연히 마음에 느낀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고전적인 문구를, 다음과 같이 자유의 개념에 입각해서 현대적으로 풀이한다.

“〔……〕 꽃과 새도 그 자유를 속박하면 그 기능과 취미를 잃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자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16)

자유에 대한 한용운의 탐구는, 그의 잡지 《유심(唯心)》의 제3호(1918년)에서 발표된 〈자아(自我)를 해탈(解脫)하라〉라는 글에서 잘 표현됐다. 이 글에서, 한용운은 범부의 일생을 “절대적으로 계박적(繫縛的)”인 것으로 평가하고, 그 ‘계박’의 상황을 자유의 정반대 개념으로 본다. 여기에서 ‘계박’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하다.

이는 인간을 핍박하는 물질적 상황(기아와 寒暑 등)도, 인간 사회의 부조리도, 그리고 외물(外物)에 얽매여 있는 인간 자신의 흐려진 의식 상태도 같이 포함한다. 이와 같은 ‘계박’을 한용운은 물질 세계의 필연적인 조건으로 인식하고 은둔 생활과 같은 “계박으로부터의 물질적 도피”를 쓸모 없는 일로 여겼다. 한용운에 의하면, ‘계박’으로부터 자아를 해탈할 인간 고유의 자유와 책임을 행사하려면, 그 방법은 바로 수양(修養)과 실천이다. 한용운의 ‘계박’의 개념도 물·심 양면의 다양한 측면들을 총망라하듯이, 그의 수양·실천론도 매우 광범위하다.

자유로의 길, 자유 행사의 길인 수양·실천은 지식 획득, 각종의 사업도 포함하지만, 그 중심에 역시 불교적인 진리의 득도(得道)라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 세상의 허망함을 체험한 득도자(得道者)야말로 한용운의 이상적인 자유인이다. 〈자아를 해탈하라〉에서 강조되듯이, 이와 같은 자유인은 ‘계박’도 ‘계박’을 가하는 외물(外物)도 절대적으로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계박’을 벗어날 책임과 권리가 자신에게만 있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17) 〈자아를 해탈하라〉라는 글은 표면적으로 개인의 정신적인 발전의 문제만 다루고 있지만, 사실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측면도 있다. 외물의 ‘계박’―즉, 외인들의 식민 통치―을 벗어날 권리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계박’의 현상―즉, 정치적 탄압의 주역―에 대한 원망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은, 한용운의 독립운동 실천의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공약 삼장의 집필자 문제와 관련해서, 같은 《유심》지에서 발표된 한용운과 최남선의 글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한용운은 이처럼 현대적 자유의 개념을 불교 사상의 “해탈”을 통해서 수양적·정신 발전적·비폭력적 방향으로 재해석하는 반면, 최남선은 제1차 세계대전의 대대적인 살육이 갓 끝난 1918년도에도 1900년도의 유행이었던 사회 진화론을 그대로 고수한다.

《유심》 창간호에 게재된 〈동정받을 필요 있는 자―되지 말라〉라는 최남선의 글의 제목은, 이미 그 내용의 대강을 잘 알려 준다. 최남선은 사회 진화론의 주된 명제(命題)대로, “세계는 힘있는 자의 것이오 용기 있는 자의 것이오 〔……〕 강자란 것은 모든 것을 가졌단 말이오 약자란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이라 〔……〕 공의정리(公義正理)와 길운복수(吉運福數)는 독점권이 본래 강자에게 있는바 〔……〕 강자의 말은 속시비(俗是非)를 초월하는 것이며 신도리(新道理)를 창조하는 것이라 〔……〕”라고 강자(强者)와 강권(强權)을 극찬했다. 최남선의 글에 의하면, 강함으로서 이미 도덕성을 갖춘 강자로서는 약자를 동정(同情)할 윤리적 의무마저 전혀 없고, 약자로서도 강자의 동정(同情)을 구할 권리는 없다. 강한 것은 도덕적이며, 약한 것은 패륜적이라는 것은, 최남선의 사회 진화론적 논리의 핵심이었다.

그가 약자에게 “생존 경쟁에 과감히 나서서 자신이 무조건 강자(强者)가 되라.”고 호소한다.18) 역행(力行)을 통해서 “세계의 주인옹(主人翁)”이 되자는 취지는 한용운과 최남선의 글에 비슷하기도 하지만, “주인옹”의 기본 자격으로 정신적인 해탈을 보는 한용운과 물질적인 “강함”만 강조하는 최남선은 각각 세상을 너무 다르게 보고 있었다. 불교적 구도(求道) 정신에 입각한 한용운이 눈앞에 독립의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타협을 거부할 힘을 충분히 가졌음에 반하여, 물질적 강권(强權)에 매료된 최남선이 결국 강자(强者) 일본과 타협을 하고 말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서 해탈·자유를 생명으로 아는 한용운과 현실 위주의 삶을 살았던 최남선,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약 삼장에서 자유적 정신의 발휘를 강조한 집필자가 누구이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한용운의 독특한 종교적 자유주의는 가장 발전된 것은 3·1 운동 직후이었다. 그가 1919년에 감옥에서 쓴 〈조선독립의 서〉는 그야말로 자유의 찬탄이며, 자유주의의 선언이다. 그는 그 개론(槪論)에서 비폭력 운동가답게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일생의 행복이라”고 하여 자유의 비폭력적 본질을 힘써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유의 절대성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고,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이다.” 그가 또한 애써 부각시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터럭처럼 가벼이 여기면서라도 자유를 얻는 것은 진실된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다. 자유 없이 본연의 인간다운 자세를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인 정신적인 발전을 위해서 자유를 꼭 얻어야 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문명’인 제국주의에서 세계주의·우주주의로 발전해 가는 인류도 자유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자유는 소우주·대우주의 양(兩) 차원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쓰는 한용운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꼭 강조해야 할 것은, 조선에 관한 부분에서는 한용운이 조선을 위한 자유, 즉 독립을 요구한 것은 국가주의적·집단주의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인도주의적·개인 중심적 차원이었다. 한용운은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과 소가 되고 열등 교육을 받아 어리석게 되는” 조선인 개개인의 자유 필요성을 강조하고, ‘국민 개개인을 위한’ 독립을 요구했다. 한용운의 이와 같은 개인 중심의 사상은, 일본의 어용 사상의 상당 부분을 닮은 최남선의 국가·민족 중심주의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물론 개인을 사상의 중심에 두었던 한용운은 민족의 차원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는, 자유에 대한 개개인의 본래적 요망과 같은, 각 집단(민족, 인종 등)의 ‘남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자존성(自存性)’을 강조하여 그 ‘자존성’의 개념에서 민족의 자유(독립)의 철학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19)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적 정신’과 그 정신의 발휘(즉, 자유를 얻을 권리의 행사)는 실로 한용운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이 측면에서는, 그와 사회진화론자·국가/민족 중심주의자 최남선은 명백히 다르기도 하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공약 삼장의 첫장의 집필자로 한용운을 생각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다.

2) 일주(逸走)하지 말고 질서를 존중하라는, 즉 뜻 없는 폭력을 삼가라는 공약 삼장의 말은, 숭고한 비폭력 정신을 나타냄에 틀림없다. 비폭력이야말로 한용운의 주요 신념 중의 하나이었고, 한용운의 독립운동의 핵심적 특징이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한용운의 폭력 거부는 탁상공론(卓上空論)이나 추상적인 이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고 그의 개인적인 아픈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불안한 시절의 풍운아이었던 한용운은, 폭력 희생자의 아픔을 직접 누차에 걸쳐서 체험한 바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당했던 폭력은 단순한 폭거(暴擧)도 아닌 오인(誤認)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폭력이었기에, 의로운 목적을 위해서 폭력적 수단을 쓰는 데에 따르는 부작용들을 직접 체험한 셈이 된다. 1899년에, 개화(開化)에 무한한 열성을 가진 젊은 사미승(沙彌僧) 한용운은 세계일주를 단행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불교에 대한 의식이 약했던 거기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두 번이나 일본 밀정의 혐의를 받아 간신히 죽임을 면한 바 있었다.20)

무장독립운동에 필히 이와 같은 무고(無辜)한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한용운이 그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십여 년 후에, 한일합방의 이듬해인 1911년에 국치(國恥)에 분개한 소장 승려 한용운은, 만주에 넘어가 무장독립운동의 여러 지도자를 탐방하여 광복(光復)의 길을 논하는 중에 다시 한번 일제의 밀정(密偵)으로 오인(誤認)되어 젊은 독립운동가로부터 저격을 당해 초인간적인 정신적 노력으로 생(生)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무장독립운동으로 혁혁한 공로를 쌓은 김동삼(金東三; 1878∼1937)과 그때 만주에서 맺었던 인연은 끝까지 끊어지지 않았지만, 뛰어난 종교인이었던 한용운으로서는 ‘의로운 폭력’의 문제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충분한 명분을 갖고 절실히 필요했던 국외의 무장독립운동을, 한용운은 부정하지 않고 지지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보다 많은 정신적 힘을 필요로 했던 국내의 비폭력 저항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폭력의 아픔을 겪어 본 인간 한용운의 선택이었고, 박애(博愛) 정신이 투철했던 종교인 한용운의 선택이었다.

1912년에 대장경을 통독한 한용운이 편찬한 《불교대전》에서, 폭력에 대한 불자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었다. 《불교대전》의 제4장에서 각종의 악업(惡業)을 서술하는 한용운은, 후한(後漢) 때의 지루가참(支婁迦懺)이 한역(漢譯)한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의 제4권의 오악(五惡)에 관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佛言. 其一惡者. 諸天人民下至禽獸홠飛?動之類. 欲爲衆惡. 强者伏弱. 轉相剋賊. 自相殺傷. 更相食┎. 不知爲善. 惡逆不道. 受其殃罰.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첫째 악은 여러 하늘의 신과 사람, 짐승, 꿈틀거리고 날아다니고 기어다니는 종류의 벌레들이 나쁜 무리가 되고자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서로 번갈아 싸우고 서로 죽이고 부상을 입히고, 서로 먹고 씹는 것이다. 착하게 할 줄을 모르고 악행을 저지르고 도를 지키지 않는 그들은,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다. 〔…〕21)

위의 인용문의 핵심적 원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들의 살생·적대 행위가 절대적으로 선(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생명 존중·박애 정신은, 한용운에게는 분명히 핵심적 신념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무량청정평등각경》의 제4권을 인용하면서 일제의 국가적 폭력 행위에 대한 준엄한 불교적 평가를 내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佛言. 其三惡者. 〔…〕 聚會 〔…〕 作惡. 興兵作賊. 攻城格. 劫殺截斷. 强奪不道. 取人財物. 偸竊趣得. 〔…〕 世世累劫. 無有出期. 難得度脫. 痛不可言. 〔…〕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셋째 악은, 무리를 지어 군대를 일으켜 노략질을 하고 성곽을 공격하여 싸움질을 하고, 사람들을 겁탈하고 죽이고 강탈하고, 도를 지키지 않고 남의 재물을 빼앗고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마다 악업이 누적되어 빠져 나올 때가 없을 것이고 해탈을 얻기란 힘들 것이고 그 아픔을 이루 말할 수조차 없다.22)

한용운의 항일 사상은, 폭력·살생을 거부하는 불교의 기본 정신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박애 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살인적·불법적 행위를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희생자의 아픔을 언제나 인식했던 그는,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남의 고통, 특히 무고한 중생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여겼던 한용운의 심정을, 〈평생 못 잊을 상처〉라는 그의 회상기에서 잘 느껴진다. 1919년 3·1 운동 시작의 날에, 일본 경찰차에 실려 갔던 그는, 만세를 불렀다가 일본 경찰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한 어린 학생의 모습을 본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학생의 고통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느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 열두서넛 되어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자동차를 향하여 ××를 부르고 두 손을 들어 또 부르다가 ××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부르다가 마침내 잡히게 되었는데, 한 학생이 잡히는 것을 보고도 옆의 학생은 그래도 또 부르는 것을 차창으로 봤습니다. 〔…〕 그것을 보고 그 소리를 듣던 나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 했습니다. 나는 그때 그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에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조선일보》, 1932년1월8일).23)

질서를 존중하자는, 즉 도발적인 폭력을 삼가자는 한용운의 공약 삼장의 의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와 같은 소년 학생들의 희생들을 줄이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한용운의 투철한 비폭력주의는, 그의 만년의 만화(漫話)에서도 능히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불교》지 제86호에서 여러 주제에 관한 만화(漫話)를 기고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인간의 전쟁의 근원을 육식에서 발견한 한 독일 채식주의 운동가에 대한 것이었다. 한용운은, 이를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의 과학적인 기반으로 여기고, ‘양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양이 된다’는 불가(佛家)의 말이 육식의 해독성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지적한다.24) 마찬가지로, 한용운은 1938년에 똑같은 불살생(不殺生)의 보편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미국의 사형(死刑)폐지운동을 매우 호의적으로 소개했다.25) 외국의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까지 이처럼 관심을 가진 것은, 한용운 비폭력 정신의 깊이와 너비를 잘 보여 준다. 종교적 비폭력주의의 숭고한 정신이 매우 투철했던 한용운이 공약 삼장의 폭력방지사항을 집필했으리라고 보는 편이 역시 자연스러울 것이다.

3) 일본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엄중히 경계시킨 것은, 역시 매우 한용운다운 발언이었다. 원칙적으로 세계 진보의 궁극적인 점을 세계주의·국제주의로 생각했던 한용운은, 〈조선 독립의 서〉(1919년)에서는 조선 독립에 대한 일본측의 승인을 조건으로 한·일 화친(和親)을 당연한 것으로 제기한다. 한용운에 의하면, 일본이 조선독립의 승인으로 침략의 죄를 회개한다면,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원망도 사라질 것이고 일본이 먼저 도입한 선진 서양문물의 조선으로의 수입(輸入)도 계속될 것이다.

한용운이 일본 위정자(爲政者)들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승인을 함으로써 ‘동양 평화의 맹주’가 되기를 제의하고, 침략의 지속이 가져다 줄 각종의 손해를 경고했다.26) 일본의 침략이 이처럼 쉽게 중단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3·1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한 한용운에게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다만, 종교적인 세계주의자·보편주의자이었던 그는, 침략자에게도 적의(敵意)를 가지는 것보다는 일단 회개와 개과천선의 길을 제의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선의(善意)를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아니고 자신의 종교적 박애(博愛) 정신을 끝까지 실현하려고 하였다. 박애·보편적 도덕의 입장에서 배타성과 침략자에 대한 원색적 적의(敵意)를 극복·지양한 위대한 종교인 한용운이야말로, 시위자(示威者)들의 배타적 행위를 경계시키고 도덕적 입장의 고수를 촉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3. 결론

위에서 보여 준 것처럼, 불교의 해탈·불살생(不殺生), 박애, 보편 도덕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 온 한용운이, 자유·비폭력·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공약 삼장’의 필자이었다고 보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국가주의·국수주의·공산주의 등의 집단·폭력 위주의 이론들이 가장 인기를 누렸던, 그리고 폭력적 집단주의를 골자로 하는 일제의 어용 ‘천황제’ 사상이 강압적으로 세뇌되었던 일제 시절에 한국에서 진정한 자유주의자·비폭력주의자들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여러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며 탄압적인 일제의 침략을 당했다는 것은, 이 안타까운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 보편적인 도덕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그 당시에는, 종교·정치 차원의 자유·비폭력 사상을 고취한 거의 유일무이한 사회 지도자는 바로 한용운이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자유·비폭력으로 평생토록 일관했던 그의 사상의 실천적 지침서가 바로 ‘공약 삼장’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각종의 권위주의와 배타성이 아직까지도 사회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현재에도, ‘자유적 정신’과 세계주의를 주장했던 한용운의 정신은 진보의 횃불이 될 수 있다.■

박노자(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레닌그라드 국립대 동양학부 한국사학과 및 모스크바 국립대 아시아 및 아프리카 대학 박사과정 졸업. 역사학 박사.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동유럽 및 동양학과 교수. 역서로 ≪한국고대불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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