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1. 머리말

만해는 우리 근세의 영웅이다. 그는 선사, 지사, 시인 등의 다면적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세 분야가 상호 긴밀한 연관관계에 놓이게 되는 입체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만해라는 한 인물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즉 우리는 한 인물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문자적 기록물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겠지만, 또 하나의 방법은 지근 거리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혈육이나 당대인의 시각을 빌려서 추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만해의 유일한 혈육인 한영숙 여사는 아버지 만해를 ‘정치인’으로 규정한 바 있다.1)

또 만해가 권상로(權相老)로부터 《불교》지를 인수해 속간하던 무렵 만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시인 조종현이 있다. 그가 쓴 〈만해 한용운〉이란 글의 서두에 있는 〈서시〉에서 그는 만해를 독립 지사, 항일 투사로 그 본질적인 인물성격을 규정한다. 더러 다정다한(多情多恨)한 문인이나 개혁적 선승으로도 보였으나 어디까지나 만해의 진면목은 민족지사였다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卍海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抗日투사다.
강철같은 의지로, 불덩이같은 정열로, 대쪽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聖域을 밟기도 했다.
벅찬 숨을 터뜨릴 때 문학의 향훈을 뿜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眞面目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울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배앝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행동을 규준하는 요소가 많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근본사상, 즉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해는 인류역사가 ‘몽매한 데서부터 문명으로, 쟁탈에서부터 평화로’ 발전한다고 보는 진보사관을 지녔으며, 다수의 민중의 힘에 의해 역사가 진행된다고 보는 민중사관을 믿었다.

그는 세계사의 현단계를 분석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을 파악하였으며 ‘총포만 있으면 스스로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도의를 무시하고 정의를 짓밟는’ 그러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멸망할 것임을 지적했다. 따라서 세계사의 필연적인 진행에 비추어 볼 때, 조선의 독립은 불가피함을 주장한다. 만해가 지칠 줄 모르고 굳세게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확고한 그의 사상과 신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인류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므로 그러한 침략행위가 피의 악순환을 부르게 됨을 경고하고 ‘군국주의, 즉 침략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이라 규정한다. 구라파전쟁과 독일의 혁명을 예로 들어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이 ‘자존성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신념과 세계관을 지닌 그였기에, 3·1운동 후 일제의 심문과정에서도 민족과 역사 앞에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이 법정에서 당당히 자신의 견해와 포부를 밝혔으며 조선 민족의 자존을 지키며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해 나갈 수 있었다.

문: 피고는 왜 말이 없는가.
답: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 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인가. 나는 할 말이 많다. 종이와 펜을 달라.

그리고 만해는 예의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명쾌한 논리의 글을 써서 침묵의 소리로써 독립선언의 이유와 동기와 신념을 피력했다. 흔히 〈조선독립이유서〉 혹은 〈조선독립의 서〉로도 불리는 이 명문장은 무더운 여름, 옥중에서 참고문헌 하나 없이 쓰여졌다. 50여 종의 독립선언서 중에서 만해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심》지를 발간하면서 세계 정세에 이미 정통했던 만해의 정확한 상황인식에 기반하고 있어 논리가 명쾌할 뿐만 아니라, 조선 독립 선언의 근거를 좀더 현실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보편적 공감력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글이다. 조지훈도 역시 이 글을 논리 전개가 돋보이고 기개가 넘치는 명문장이라 평했다.

3·1운동 당시 선생이 기초한 “독립운동이유서”라는 장논문은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비하여 時文으로써 한 걸음 나아간 것이요,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할 뿐만 아니라 정치문제에 몇 가지 예언을 해서 적중한 명문이다.2)

원래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이 글이 만해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김상호에 의해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와 1919년 11월 4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 25호의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전문이 게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상해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도 큰 힘이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옥중 선언문이었다.

먼저 만해의 사상형성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고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나타난 만해의 독립사상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2. 사상 형성의 배경

만해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18세에는 그의 한학이 상당 수준에 이르러 향리의 숙사(塾師)가 되어 아동들을 가르쳤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그는 ‘민감한 사회의식과 애국심을 가진 농촌 지식인’3)이라 할 수 있는 부친으로부터 세상 형편과 국가 사회의 여러 일들은 물론, 역사상의 의인·걸사의 언행을 들으며 자란다. 나이가 들어 시대의식에 눈을 뜨게 되면서 만해는 출가하여 불경에 접하게 된다.

설악의 수려한 자연의 품에 안겨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독경과 선수행으로 여념이 없던 행자 유천(만해의 속명)에게 그의 은사인 연곡 스님이 건봉사에서 구해다 준 두 권의 책은 새로운 세계인식에 눈뜨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건봉사는 조선조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이었던 사명당 유정(惟政)이 700여 명의 승군들을 이끌며 의병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서 깊은 사찰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일대의 많은 사찰을 말사로 두고 많은 승려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건봉사는 백담사의 본사(本寺)로서 비교적 빨리 개화된 곳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김옥균의 브레인(이념제공자) 역할을 한 이동인(李東仁)과 같은 개화승을 배출하기도 했던 사찰이고,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운영하여 불교적 강론과 더불어 일반학교의 수업에 해당하는 외사(外史)를 두루 가르쳤다고 한다.4) 만해도 종종 방문하여 강연을 통해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건봉사의 사지(寺誌)를 작성하기도 했던 곳으로 지속적으로 이 절과 인연을 맺게 되는 곳이다.

이 절에서 연곡 스님이 구해다 준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20세기 초반 한국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유신변법운동의 주역인 중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는 지리서 《영환지략》이었다. 당시 한국의 진보적 지식층에게 양계초는 믿을 만한 서구문화의 전신자(轉信者)였고, 한국이 처한 세계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공식의 제보자였으며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과 같은 한국의 근대지식인들이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만해는 양계초의 저술을 통하여 칸트와 베이컨 등 서양의 근대사상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문명의 진보와 합리주의를 믿는 계몽주의자가 된다.

특히 변화야말로 우주적, 인간적 질서를 꿰뚫는 근본원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양계초의 사상이 준 충격은 이후의 혁신적인 만해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으며, 무변광대한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준 《영환지략》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드넓은 세계에로의 모험을 추동했다. 1907년의 블라디보스톡 여행과 1908년의 일본 여행을 통해 만해는 근대문명과 근대사회를 접하려 했던 것도 결국은 위의 두 책의 영향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직시했기에 낙후한 은둔주의의 조선 불교계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현실불교에 대한 열렬한 실천론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간행하고, 불교경전 대중화의 결실인 《불교대전》(1914)을 편찬하기도 했으나, 민족주체성을 상실한 타락한 친일적 불교의 현실로부터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교계의 모순된 구조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만해는 교단으로부터의 소외와 고독을 창조적으로 보상한 문자적 결실들을 탄생시켰다. 1917년 동양적 선비의 교양서이자 폐쇄된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지식인의 깨끗한 윤리관을 보여주는 《채근담》을 번역·출간한 만해는 다시 한번 자신을 투철하게 직시해 보고자 세간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다. 혁명적 기질의 소유자이자 ‘해방적 관심’의 소유자인 만해에게 산은 언제나 깊이 있는 자기성찰과 깨달음의 도량이었고 도시는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공간으로서 그 두 공간은 변증법적으로 상호 길항하면서 만해의 정신사를 성장시켜 주었다. 설악의 대자연 속에 파묻혀 그는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들기도 한다.5)

그리고 그해 마지막 겨울 밤, 바람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자기를 어둠 속에서 분명히 바라보는 체험’을 한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의 발 닿는 곳, 그곳이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그 몇이나 객수 속에 오래 머무나
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닫거니
雪裏桃花片片紅  눈 속에 복사꽃이 송이마다 붉구나

이 시를 읊조리고 나서 만해는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의심하는 마음이 씻은 듯이 풀렸다고 한다.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한 이래 10년만에 마침내 오도(悟道)한 선사 만해가 자기면목을 눈 속의 복사꽃으로 표현한 것이 이 시다. 1917년의 이 견성의 체험으로 만해는 새롭게 태어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깨달음에서 오는 법열(法悅)에만 잠기지 않고 ‘설리도화(雪裏桃花)’의 실현을 위해 이듬해 산중을 벗어나 서울로 온다.

그리고 《유심(惟心)》지의 창간에 몰두한다. 윤재근의 지적처럼 《유심》을 통하여 일제의 군국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한민족의 독립운동 정신을 현실적으로 심기 시작한 것이다. 선사(禪師) 만해가 지사(志士) 만해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후 한치의 양보도 없었던 일제에 대한 투쟁과 저항은 만해가 깨달은 참된 자성(自性)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간 과정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1917년은 만해 생애의 분수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해 겨울 만해는 오세암에서 정진하고 이듬해 봄(1918. 4) 서울에 온다. 일제의 온갖 검열과 무단정치의 박해 속에서 민족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하는 비원을 품었던 만해는 경성부 계동 43번지에 ‘유심사(惟心社)’를 차리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유심》지를 1918년 9월 1일 창간하였다.

인쇄소는 당시 을지로 2가 21번지 신문관이었다. 《유심》지의 성격을 전보삼은 ① 민족 전통 문화의 계승·발전운동의 일환, ② 3·1운동의 전위지의 수단, ③ 현상문예를 통한 대중불교의 이상 실현 등으로 규정한다.6) 그 논거로서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소멸돼 가는 현장에서 민족의 전통 문화를 일으켜 세움은 새 역사 창조의 원동력이 되며 이 잡지의 언론 활동을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 민족의 나아갈 바 지표를 확인하며 《유심》지의 필자들인 최린,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임규 등과 세계 사정에 대한 상당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따라서 만해는 이 잡지에서 애국적인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불교적인 글뿐만 아니라, ‘청년의 수양 문제’, ‘동정받을 자 되지 말라’. ‘가정 교육이 교육의 근본이다’, ‘자기의 생활력’, ‘수양총화’, ‘항공기 발달소사’, ‘과학의 연원’ 등의 글들을 과감히 채택함으로써 승려가 만든 잡지이면서도 일반 종합 잡지의 성격을 띠는 쪽으로 이끌어 나갔다. 민족적 단위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계몽주의적 입장과 기존의 잡지에 반드시 등장하던 총독부 관리의 글을 배제함으로써 정교분립의 태도를 가시화한 것도 이 잡지의 특별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발상의 형식으로 나온 이 불교 교양잡지는 3·1 독립운동의 준비로 동분서주했던 만해의 상황과 정교분립을 지향한 이 잡지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 등으로 3호로써 종간되고 만다.

1918년 《유심》지를 발행하면서 만해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비교적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던 만해는 최린과 독립에 관해 숙의하다가 마침내 3·1운동을 기획하게 된다. 실제로 만해는 독립운동의 기획과 조직 그리고 그 정신의 계승과 실천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3. 만해의 독립사상

1) 만해의 역사인식과 민족자존론

만해는 그가 활동하고 있던 20세기 전반의 역사적 성격을 누구에 못지 않게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18세기 이후부터 당시까지의 세계정세를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생물학적 이론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 시대로서 국가간, 민족간에 침략전쟁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강대국 즉, 침략국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그 침략의 구실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헛소리일 뿐, 군국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이라고 단정하였다. 특히 20세기 초두부터는 세계평화를 촉진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여 정의·인도적 평화주의가 개막됨에 가히 세계를 상서롭게 하려는 때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와 같이 인식하게 된 것은 침략과 쟁탈의 야만적 사회로부터, 정의와 인도 그리고 평화의 문명적 사회로 역사가 진보해 가리라는 그의 역사인식에 기초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한 결과였다. 그가 당시 국내외로 성숙된 기운을 들어 독립 선언의 동기를 주장할 때, ‘현재로부터 미래세계의 대세는 침략주의의 멸망, 자존적 평화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세계 대세에 반하여 자손(自損)을 초래할 침략주의를 계속하는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가 메마른 땅에 봄비를 전해주는 격이 되어 침략자의 압박에서 신음하던 각 민족은 독립 자결을 위해 분투하게 되었는데, 폴란드, 체코, 아일랜드 그리고 조선의 독립선언이 그것’이라고 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만해의 역사인식에서 특히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적 전통을 단절없이 계승해야 된다고 하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역사적 사명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다. 그가 천명하고 있는 독립선언의 이유 중의 하나인 조국 사상도 그 표현이 약간 다를 뿐,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국으로서의 5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국이라는 근본을 잊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그가 말하는 조국사상이기 때문이다. 5천년 역사의 조국을 잊지 못할 때 그 역사의 단절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이고, 이 때문에 민족의 역사적 사명은 절실해지는 것이다.7)

모든 인류가 자유와 평화를 갈구함에도 불구하고 군국주의가 등장하면서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밀림의 논리와 진화의 법칙이 횡행하여 전쟁이 그칠 날이 없게 되었으니 만해에게 있어 무엇보다 타파해야 할 적은 바로 독일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군국주의 세력임을 밝히고 그 야만성을 통박한다. 그러한 야만적인 세력이 승리할 수 없으며 각 민족의 독립자결은 인간의 본능이며 동시에 세계의 대세이므로 결코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자유와 평화는 전인류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18세기 이후의 국가주의는 실로 전세계를 풍미하여 그 들끓어오르는 꼭대기에서 제국주의와 그 실행의 수단인 군국주의를 산출하기에 이르러 이른바 우승열패·약육강식의 학설은 불변의 진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국가 또는 민족 사이에 살육·정벌·강탈을 일삼는 전쟁은 자못 그칠 날이 없어서 몇천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를 폐허를 만들며, 몇십·몇백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사건이 지구를 둘러보건대 없는 곳이 없다.

전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 국가로는 서양에는 독일이 있고, 동양에 일본이 있다. (…) 군국주의 곧 침략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일 뿐이니 어찌 이와 같은 군국주의가 이 세상에서 무궁한 운명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침략만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최종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는가. 정의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니라. (…)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의 본능이며 세계의 대세며 하늘이 찬동하는 바로서 전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원천이라. 누가 이것을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그는 온 세계가 평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현재로부터 미래의 대세는 침략적 제국주의가 멸망하고 자존적 평화주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단언한다. 이러한 만해의 역사의식은 인류역사가 몽매와 쟁탈을 버리고 문명과 평화를 향해 나아간다고 하는 진보사관과 다수 민중의 힘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민중사관에 기초하는 것으로 종교인다운 이상주의적 측면은 다소 지니고 있으나 일제의 식민주의에 대한 일체의 타협주의적 발상을 단호히 배격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완강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기에 근본적 모순은 총독정치가 가혹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 자체에 있기 때문에 총독정치가 아무리 개선되더라도 근본적 해결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언제라도 합방을 깨뜨리고 독립자존을 꾀하려는 것이 2천만 민족의 머리에 박힌 불멸의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총독정치가 아무리 극악해도 여기에 보복을 가할 이유가 없고, 아무리 완전한 정치를 한다고 해도 감사의 뜻을 나타낼 까닭이 없다.

제국주의와 민족독립의 이러한 근본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에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선의에 기대어 내정(內政)독립이니 자치 따위를 얻어보려 하는 타협주의 노선이나 준비론을 표방했고, 심지어 월남 이상재 같은 이는 ‘독립선언’ 대신에 ‘독립청원’으로 하자는 미지근한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만해는 이런 일체의 타협주의와 투항주의에 반대하여 식민지체제의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철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민중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조선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둥근 돌과 같이 목적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낙관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만해는 하나의 국가가 반드시 모든 물질상의 문명이 완비된 후에라야 비로소 독립되는 것이 아니고 독립할 만한 자존(自存)의 기운과 정신의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함으로써 이른바 개화론에 바탕을 둔 준비론의 허구성과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어 독립을 얻어보려는 외교론의 기만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규탄한다. 간악한 일본인들은 언제나 조선에는 물질문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어떻게든 조선인을 어리석게 하고 야비케 하려는 학정(虐政)과 열등교육(劣等敎育)을 획책하는데 이러한 저열한 술책을 포기하지 않으면 문명의 실현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 단언한다.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국민의 역사와 전통이 있고 현대 문명에 함께 나아갈 만한 실력이 있으므로 독립할 만한 물질적 준비가 갖추어진 다음에 독립하겠다는 준비론자들의 단견은 일제의 고등술책에 말려든 것으로서 아예 독립을 포기하자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준비론의 허구성이 있는 것이다.

만해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이므로 남이 결코 꺾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잘못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기네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려는 것은 인류 공통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감히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이 자기네 민족의 자존심을 억제코자 하여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 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이 있어서 팽창의 극도, 즉 독립 자존의 목적을 달성치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니 우리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근본(본바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천성인 동시에 만물의 미덕으로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다만 국력의 열세로 인하여 남의 나라에 유린당할 수는 없는 것임을 설파한다.

越나라 鳥도 옛 보금자리가 그리워 남쪽 가지에 집을 짖고, 만주의 胡馬도 저의 깃든 곳이 그리워 북녘 바람을 향하여 우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한 것이다. 동물도 그렇거니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저의 근본을 잊겠는가. 근본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위적이 아니요, 천성인 동시에 또한 만물의 미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다만 군함과 대포의 수가 적음으로써 다른 민족의 유린을 당해서 역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누가 이것을 참으며 누가 이것을 잊겠는가. 조선 독립을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만해가 말하고 있는 조국사상이란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강조한 바 있는 민족의 ‘정신’이나 ‘혼’이며 ‘얼’과도 통한다. 그러나 조상의 통곡 소리와 천지 신명의 질책을 들으며 피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정신과 혼이 피눈물로 흐르며 발로된 시대적 사명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 자각에 힘입어 절대독립의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사상이 고조되고 그 결과가 3·1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라는 그의 인식은 “일시 유교문명에 중독되어 극단적 개인주의·가족주의에 은함(隱陷)하였던 조선인은 번연 자각하여, 그 신경은 더욱 과민하였으며 그의 기회를 엿보는 인구는 더욱 광대하였으니, 이것이 금회 운동의 主因兒”라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2) 자유주의와 평등사상

제1장 ‘개론’에 보면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자유와 평화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도도한 장강의 흐름처럼 전개되는 논리는 아주 명쾌하다. 만해에게 있어 ‘자유’는 우주의 행복의 근원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기품에도 구애받지 않고 인욕(人慾)에도 가리워지지 않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러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 것이므로 타인의 자유를 침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주검과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괴로운 자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이상적인 최고의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의 규범은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그 경계로 삼는 것으로서 침략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된다.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으므로 평등은 자유의 대등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위압적인 평화는 굴욕이 될 뿐이니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보장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수반해야 한다.

자유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얻고자 하는 인간생활의 목적이자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그것을 짓밟은 일제를 준엄하게 질타한다. 만해에게 있어 자유란 인간의 본질에 해당하므로, 그것이 침해받을 때 인간은 전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인생으로서 생활하는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는 것이니, 자유가 없는 생활이 무슨 취미가 있으며 무슨 쾌락이 있겠는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슨 대가도 아끼지 않는 것이니, 즉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다. 단 한 사람이 자유를 잃어도 천지의 평화로운 기운이 손상되는 것이데 어찌 2천만인의 자유를 말살함이 이렇게도 극심한가. 조선의 독립을 침해치 못할 것이다.

그는 만인 공유의 자유와 각 개인의 자유가 일치할 때 완전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구성원의 일부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다른 일부가 자유스럽지 못하다면 완전한 자유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완전한 자유는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완전한 평등이 달성될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므로 완전한 자유와 평등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절대적 자유가 곧 절대적 평등’8)인 것이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사물의 현상이 어쩔 수 없는 법칙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이 불평등이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인 바가 없는 자유로운 진리가 평등이라고 정의하고, 불평등한 거짓 현상의 미혹을 벗어나 평등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보았다. 나아가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는 평등의 자손이라고 해명하고 진정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 한계를 삼는 것이며 서로 침탈함이 없이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안 다스리는 것같이 하는 것이 참된 세계주의라고 명명한다.

만해의 이러한 평등 개념은 불교를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독창성을 갖는다. 뒷날 그는 이러한 생각을 ‘불교사회주의’라는 말로 개념화한 적도 있지만, 개개인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되어 조금의 차이도 없게 되는 것이 평등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만해는 나아가 불교의 평등정신이 다만 개인과 개인,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모든 사물에까지 미치는 철저한 성격이라고까지 말한다. 염무웅의 다음의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겠다.

만해는 ‘새로운 불교해석을 통해서 진보적인 계몽주의자가 되었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를 불교적 평등의 개념 속에 흡수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에 결부되기 쉬운 이기적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불교의 보살정신을 사회개혁의 사상적 거점으로 확인하였다. 전통사상의 낡은 형태를 끝내 고집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하고 외래사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버림으로써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근대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시키고자 했던 만해의 경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값있는 교훈으로 제시된다고 하겠다.9)

그러나 안병직의 지적처럼, 자연법사상에 기초한 서구의 자유주의와 우리의 경우는 성격이 좀 다른 것이었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봉건적 계급질서라고 하는 기존 사회질서에 전투적으로 도전하면서, 신체의 자유, 도덕적 자유, 종교적 자유 및 정치적 자유를 주장한 것인데 반해, 우리 나라가 당면한 문제는 오직 민족의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일이었다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만해의 사회적 자유는 민족해방의 자유이며, 그의 사회적 평등은 국가주권의 평등으로 표현되었다.10)

3) 민족자결주의와 평화주의

만해는 독립은 누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국가라 선언함으로써 족하다고 주장하여 종교인다운 이상주의적 측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꿰뚫어보는 형안을 지닌 그는 일제 식민주의에 대한 일체의 타협주의를 거부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존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와 민족독립의 이러한 근본적 모순을 제대로 인식 못한 역사의식의 결핍으로 인하여 다수의 인사들은 일본의 도움에 기대어 내정독립이니 자치 따위를 얻어보려 했다. 만해는 이런 일체의 타협주의와 투항주의의 맹점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일제 식민지체제의 즉각적인 철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고, 독립자존을 열망하는 2천만 민중의을 믿었기에 ‘조선의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확고한 낙관론을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만해는 세계 평화의 근본이 되는 민족 자결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이 동양평화의 관건이 됨을 지적한다.

민족 자결은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민족 자결주의가 성립되지 못하면 아무리 국제 연맹을 체결해서 평화를 보장할지라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의 독립 자결은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요, 또 동양에 대해서는 실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일본 민족을 이식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만주, 몽고를 삼키고 지나 대륙까지 꿈꾸는 것이다. 침략주의 일본의 야심은 길가는 행인도 다 아는 것이다. 지나를 요리하는 데에는 조선을 버리고 딴 길이 없기 때문에 침략 정책상 조선을 유일한 생명선으로 아는 것이나 조선의 독립은 곧 동양의 평화가 될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침해치 못할 것이다.

이어서 만해는 청일전쟁 후의 시모노세키조약과 러일전쟁 후의 포츠머드조약을 이행하지 아니하고 지조와 절개를 바꾸어 국가간의 예의를 배신하였으며, 궤변과 폭력으로 조선의 독립을 유린한 일제의 무분별한 야심과 그 우매함을 꾸짖는다.

4. 맺음말

3·1운동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침략세력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하게 하었으며, 자유주의 사상에 있어서는 평등개념이 강조되었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우리 나라의 전통적 사상의 토대에 입각하여 종합한 사상이 곧 만해의 독립사상11)이다. 또한 염무웅의 지적처럼 만해 사상의 창조적인 점은 불교적 평등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한12)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국가란 물질문명이 구비된 후에라야 꼭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 또한 ‘조선민족은 당당한 독립국민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성과 함께 전통계승론을 바탕으로 한 비타협주의로 일관할 수 있었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문명한 생활을 경영할 만한 실력을’ 갖추는 ‘개조(改造)’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용운은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므로 인류는 누구나 누려 마땅한 ‘자존’을 실현하기 위해서 즉시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조동일 교수의 지적은 새겨서 들어야 할 것 같다.

‘改造’론은 文明을, ‘自存’론은 自由를 특히 소중하게 여기는 데 근거를 둔다. 문명은 노력해서 이룩해야 할 목표이고, 자유는 타고난 조건이다. 사람은 마땅히 노력해서 이룩해야 할 가치를 목표로 설정하고 힘써 실현해야 한다는 데 맞서서,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조건을 왜곡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고 해서 견해 대립이 심각해진다. 개조론은 차등의 세계관이어서 훌륭한 나라, 잘난 사람만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투쟁을 미화한다. 그러나 자존론은 대등의 세계관이고 평화의 논리이다.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사람만 갖추지 않고 모든 생물에게도 다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는 萬有의 생명”이라고 했다. 천지만물이 함께 화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중략) 오늘날 민족 ‘自存’론은 잊혀지고 민족 ‘改造’론이 극성이다. 선진국을 따르고 배워 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입학’을 학문의 기본방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경제성장, 국민소득 등의 지표에 의해 서열화된 단일한 세계질서 속에서 좀더 윗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므로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나타나는 민족 ‘改造’론을 바로 잡으려면 민족 ‘自存’론을 되살려야 한다.13)

만해는 깨달은 자, 즉 각자(覺者)였다. 그는 현상적 불평등을 벗어난 절대평등의 세계, 시공의 구속을 벗어난 참된 존재의 세계를 보았으므로, 진리의 눈으로 사태를 볼 수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1년 가을 만기 감형으로 출옥하게 된다. 출옥 후 만해는 불교 청년회, 기독교 청년회 등으로 불려다니며 많은 강연회를 통하여 민족 계몽과 저항운동을 계속해간다. 만해의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사상은 ‘민족의 자존성을 바탕으로 한 비타협주의’로서 그가 옥고를 치르고서 출옥했을 때는 이미 일제에 대한 타협론이 대두되어 최린 등 3·1운동의 지도급 인사 일부가 이른바 ‘연정회’ 등의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만해는 이러한 타협론에 완강히 반대하였다.14)

이러한 만해였기에 1927년 비타협 노선의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가 발족되자 솔선 이에 가담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의 소임을 자청했던 것이다. 만해의 비타협주의 노선은 단재의 노선에 근접된다 할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이 농민·근로자·학생 등 민중적 차원으로 발전되고 있을 때, 상당수의 3·1운동 지도급 인사들은 이러한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적대시하는 경향조차 있었으나, 만해는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전통적 항일운동과 새로운 단계의 민중적 항일운동은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할 수 있었다. 만해는 이미 좌우합작노선인 신간회에 가담하기 2년 전에 다음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은, 이것이 우리 조선 사상계를 관류하는 2대 주조입니다. 이것이 서로 반발하고 대치하여 모든 혼돈이 생기고 그에 따라 어느 운동이고 다 뜻같이 진행되지 않는가 봅니다. 나는 두 운동이 다 이론을 버리고 실지에 착안하는 날에 이 모든 혼돈이 자연히 없어지리라 믿습니다. …… 우리는 同舟過雨한 격이니 갑이고 을이고 다 지향하는 방향이 있으나 우선 폭풍우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로써 공통되는 점을 해결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물론 일조일석에 해결할 문제도 아니나 근래에 이르러 사회운동가들이 민족운동을 많이 이해하여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매우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특수한 형편으로 보아 이 두 주조가 반드시 합치리라고 믿으며 또 합쳐야 할 것인 줄 믿습니다.15)

결국 만해가 신간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이 운동의 비타협적 성격 때문이며 또한 좌파와 합작함으로써 위의 항일 노선의 분열을 방지하고 민족대통합의 항일저항노선을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다고 본 때문이다. 만해는 1920년대의 새로운 시대 상황에 따라 그의 민족사상도 점차 민중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농민이나 근로자의 생활 또는 그들의 사회운동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16)

한 인간의 행동을 근원적으로 규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사상 혹은 종교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로서 기능한다고 볼 때, 만해의 불교 혁신운동이나 독립운동과 문학행위의 바탕에는 언제나 불교 사상의 깊이 있는 이해와 실제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의 체험이 깊이 스며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17년의 견성(見性) 체험은 그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만해는 철저한 자아탐구와 자기 수행에 의해 자아정립을 이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불교개혁을 부르짖거나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불세출의 문학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행하는 그 어떤 행동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이 곧은 지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불교사상의 체득과 그 육화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해야말로 깨달음을 민족적 차원으로 현실화할 줄 알았던 진정한 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자유자재의 삶을 살았던 관자재보살이었다.■

고명수
동국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동원대학 교수. 저서로 ≪나의 꽃밭에 님의 꽃이 피었습니다-민족의 청년 한용운≫≪시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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