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승가를 기다리는 세상 속을 걷다

1. 글을 시작하며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오랜 세월 ‘은둔의 종교’로 여겨져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여 년 전만 해도 그랬다.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기독교계가 활발한 사회구제사업을 펼치던 것에 비해 불교의 사회참여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이런 평가는 당연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난 지금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큰 폭으로 약진했다. 물론 양적으로 아직 기독교계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사회복지나 환경운동 같은 시민사회 영역에 있어 불교계의 참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은 또 하나의 고민을 불교계에 던지고 있다. 닫힌 빗장을 열고 사회로 나서자마자 예전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내재한 많은 모순들이 숨김 없이 세간에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 운영에 있어 전근대적 기제들, 이를테면 사회일반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비공개적이고 은밀한 운영방식, 비구니에 대한 성차별과 비구 중심의 독단적 교단운영, 문중을 가장한 패거리주의와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은 최근에만도 여러 사건으로 외화됐다.

여기에 소비, 경쟁, 개발과 같은 세속적 요소들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무소유와 공동생활이라는 불교 전통 역시 상실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참여의 손길을 거두고 세상을 향해 다시 빗장을 잠그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아직도 열악한 사회참여를 더 확대하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또 시민사회 일반의 상식에 준거한 교단운영의 체계와 전통을 세워, 전근대성과 세속화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교단의 처지에서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삶으로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러한 실천을 통해 교단이 나아갈 바를 몸으로 개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도법(道法), 그리고 법륜(法輪) 스님은 21세기가 시작된 불교계에서 이런 삶을 사는 대표적인 인사들로 꼽을 만한 이들이다. 이들은 세간이 개발과 소비의 물신숭배에 흠뻑 젖고, 교단마저 그 뒤를 좇아가고 있는 현실을 불교적 가치와 사유로 해석하고, 개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 사회참여론자들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들을 비평하는 글을 쓰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두 사람의 세계를 보는 탄탄한 안목도 그렇거니와 10년이 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왔고, 현재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제 갓 활동 초년병인 필자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도법과 법륜이라는 두 인물의 삶과 실천이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회참여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기에 충분한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단과의 관계에서 이들의 운동 궤적을 살펴보는 데는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존재한다. 교단 안팎에서 이미 공인하고 있듯이 두 사람의 왕성한 활동은 불교사회참여의 사상과 방법의 개발에 있어 그 해법을 풍부히 제공해 왔다. 이를 둘러봄은 한국불교 사회참여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회참여를 둘러싼 당대 교단의 현주소를 이들의 삶을 통해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교단은 오히려 이들의 활동에 질곡이 되고 멍에가 된 적이 많았고, 이들의 삶에 대한 교단 밖의 절대적 호의와 달리 교단 내 질시와 비난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 역시 짚어져야 할 것이다. 이들의 삶을 통해 교단의 현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가고자 하는 지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2. 붓다의 삶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여기는 사람들

우연이었을까. 두 사람의 행적을 좇다 보니 제일 먼저 오버랩되는 것이 법명(法名)이었다. 이름 뜻대로만 본다면 도법(道法)은 ‘이 시대 부처님의 정법이 나아갈 길’이며, 법륜(法輪)은 ‘정법을 위해 굴려가야 할 법의 수레바퀴’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이름대로 살고, 또 이름대로 살면 잘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격언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 사람에게도 꼭 들어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법 스님은 주로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해법, 즉 길을 제시하는 데 골몰해 온 이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나 귀농운동처럼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시각과 대안 제시 같은 사상적인 영역이 두드러진다. 이에 비해 법륜 스님은 북한난민돕기, 환경운동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분야에 매진해 왔다. 그가 굴리는 법륜은 아주 견고하고 충실하여, 치밀하게 세상을 훑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이들은 수행자로서 삶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의 동기 역시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으로부터 찾는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회를 해석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의 안락 위에 가능하다는 대승불교의 전통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한다. 또 부처님 당시의 교단이 결사공동체에서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과 회향을 함께하는 공동체 운동, 결사운동에서 출발하여 그 공과를 회향하고자 해왔다.

교단 내에서 점하는 위치와 처지는 다르지만 작금의 교단을 보는 시각 역시 비슷했다. 소비주의와 물량주의와 같은 교단의 병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물론, 오랫동안 한국불교의 전통인 양 행세해 온 호국불교, 중생의 삶에서 멀어진 채 유유자적하는 선(禪)전통에 대해서까지 이들은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물론 역으로 두 사람에 대한 교단 내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도법 스님은 그가 주도적으로 수습한 98년 종단사태를 두고, 감정적 비판을 서슴지 않는 그룹이 존재하며, 법륜 스님 역시 비구계 수지 문제 등을 들어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보다는 질곡으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수록 질시와 비난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의 일차적 원인이 교단 내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철저히 본인들의 몫일 뿐이다. 주관적 판단의 개입이 불가피하지만, 이 문제도 짚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3. 도법―소비주의문명에 정법의 칼을 들어라!

몇 년 전부터 도법 스님이 사는 남원 실상사는 한국사회 대안운동의 근원지로 주목을 받아 왔다. 최근에만도 지리산 살리기 시민연대가 주관해 온 지리산 댐 백지화 반대운동,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좌·우익 영령을 위한 지리산위령제가 열려 뉴스의 초점이 됐고, 또한 IMF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개설한 귀농학교, 올 봄 개설한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까지 큰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올해에만도 주요 일간지·월간지들이 모두 도법 스님과의 인터뷰기사를 크게 할애해 게재할 정도로 불교를 향한 세간의 이목은 실상사와 주지 도법 스님에게 향해 있다.

도법 스님은 1949년 제주생이고, 열여덟 살 때 김제 금산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월주 스님이다. 69년 해인사 강원을 나와 87년 금산사 주지를 맡을 때까지 15년간 주로 선원에서 정진했다. 초발심 시절, 그에게 화두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도 산문을 나서지 않고 내친 뒤 이에 대한 도반의 비판을 들으며 생겨난 좌절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고 한다.1) 그 뒤 그는 ‘인연의 철학’ 연기(緣起)에 깊이 매달렸다.

그처럼 연기를 강조하는 사람은 절집 안에서도 찾기 드물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큰 그물로 보는 인드라망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돕는 생명의 길을 걷자고 주창한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화엄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화엄경》에 대한 그의 애정과 천착은 각별하다.2) 그는 《화엄경》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화엄학림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을 금산사에서 시작한 이래 근 20여 년 동안 이를 위해 노력해 왔다.

금산사에서 시도한 화엄학림은 별 무위로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95년 실상사에 세운 화엄학림은 지금까지도 화엄학을 연찬하는 학승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그의 화두는 늘 화엄의 철학을 교단과 사회에 투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화엄 근본주의자’ ‘화엄 지상주의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출가사문을 인드라망 그물코의 중심으로, 또 이 시대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가 펼친 90년대 활동은 궁극적으로 출가승단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비구결사체 선우도량 만들고 이끌어
도법 스님의 활동이 교단 안팎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승가개혁운동 결사체인 선우도량(善友道場)이 창립되면서부터다. 교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행풍토의 회복을 제1과제로 내걸었던 선우도량은 91년 창립부터 98년까지 매년 두 차례씩 총 14차례의 ‘수련결사’를 열어 승풍진작을 통한 교단개혁의 이론과 방법을 모색했다.3) 그는 승가대중의 결사체가 근본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결사를 통해서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불교의 혜명을 계승하며 교단의 승풍을 진작시키고 사회역사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면 그 방향은 분명해지리라. ……그러므로 지금의 결사 방향은 개인의 출가정신을 확고히 하고, 교단의 승풍을 신선하게 하며, 사회 역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91년 8월 〈선우도량 창립선언문〉 중에서)

도법 스님의 지론은 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실험 계기를 맞게 된다. 94년 당시 그는 개혁회의 상임부위원장직을 맡아 개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와 선우도량은 이 과정에서 종헌·종법 개정, 교육원 별원, 교육개혁안 성안 등 주로 승가개혁 쪽에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승가교육개혁안’이 통과되고 교육원이 별원이 됐고, 기본교육 재교육 등 승려교육에 필요한 여러 제도들이 그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마련됐다.

94년 개혁회의의 활동은 ‘종단 현대화 민주화의 전환점’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권력상층부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여전히 엇갈린다. 그에게는 개혁작업의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종단의 관리나 운영 부문을 위한 제도의 틀을 좀더 낫게 만들었지만, 종교의 바탕인 사상과 정신의 차원에서 한치도 진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4) 95년 선우도량 수련결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94년 종단개혁활동은 개혁주체의 불교사상과 정신의 신념, 불교적인 개혁내용, 현실적인 방법 등에 대하여 조직적이고 체계 있게 챙기고 준비하지 못했음을 느꼈다. 종단개혁운동의 미흡 원인으로는 △제한된 시간 △개혁주체 역량의 미흡 △불교대중의 자주화 의식과 역량 부족 △종단역학 관계에서 힘의 부족 △개혁추제 역량의 한계 △타성에 젖은 종단풍토 등이었다. (〈종단개혁의 반성적 점검과 한국불교의 창조적인 미래〉《선우도량》 95년 7호)

그는 개혁회의가 해산한 직후 자신의 은사인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을 뒤로 하고, 실상사로 내려갔다. 그리고 4년 만인 98년 폭력으로 점철된 종단사태가 발생했다. 종단사태는 그의 종단 내 위치와 역할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또 한편으로 수행자 도법에게는 큰 아픔을 준 사건이었다. 그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3선공방과 총무원 청사 점거 등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 때, 분란의 와중에서 98년 조계종 총무원장 권한대행에 임명됐고,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되어 종권을 인계할 때까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다. 후일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종단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일을 수습하려고 했을 때,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 수행자의 이상과 신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싸움에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하는 한낱 싸움꾼의 모습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을 잘못한 것인지, 수행력이 부족한 탓인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인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우왕좌왕하며 떠밀려 가고 있는 남루하고 초라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피눈물이 났지만 현장의 큰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5)

월주 스님의 임기 마지막 날 전격적으로 권한대행에 임명된 그는 결국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종단을 정상화시킨 주역이 되어야 했다. ‘폭력을 잠재우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했다’는 비법적 현실은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6) 최근 해인사 대불을 둘러싼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도법 스님이 갖는 교단 안팎의 높은 신망에 반하여 반대자들의 음해성 공격 역시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도 사실은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가 일부 반대자들의 악성비난처럼 적어도 시류와 상황에 따라 처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오래 전부터 교단활동에 있어 지극히 원칙적 입장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90년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에서 “교단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있어 원칙도 없이 법·비법을 가리지 않는 적당한 타협주의가 교단의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 바 있고, 94년 종단개혁 당시부터 종헌·종법이 오늘날의 청규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종헌 종법에 의한 교단운영을 중시했다.7)

실상사 근거지로 대안운동 이끌어

98년 종단사태 이후 도법 스님은 실상사를 근거지로 한 대안운동과, 공동체 운동의 전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실상사에는 귀농자들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하는 귀농전문학교를 비롯하여 농장공동체, 작은학교 등 대안운동의 실험적 영역들이 하나둘 개척하고 있으며, 99년 9월에는 불교대안운동 단체인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창립되어 활동중이다. 98년 개설된 불교귀농학교에 이어 실상사에 개설된 국내유일의 ‘귀농전문학교’는 99년 3월 실상사가 소유 농지 3만 평을 공동체 토지로 기증한 후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현재 6기까지 1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졸업생 가운데 7명이 실상사에 남아 공동경작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공동체는 사찰토지와 농사공동체의 첫 시도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 봄에 만들어진 ‘작은학교’도 관심거리다. 현재 1학년생 15명이 8명의 교사와 함께 임시 콘테이너 박스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체험과 살아 있는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분야별 활동들은 모두 도법 스님이 상임대표로 있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사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실상사 공동체 운동은 지역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과 생활협동조합을 매개로 한 도농공동체 운동, 나아가 지리산 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넓혀가고 있다.8) 올 여름 지리산에서 산화한 좌우익 영령들을 위한 위령제를 연 것도 이의 일환에서였다고 한다. 실상사를 통해 그는 사찰이 소비주의문명에 찌든 사회를 바꾸는 생명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화엄과 연기의 불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바꾸는 최첨병에 서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일을 하면서 기존의 비구 중심에서 사부대중에 의한 공동체 운동으로의 전환을 실험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98년 이후 그가 사부대중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실상사에서 이를 실험하면서 구체화하고 있다. 실상사에는 지난해부터 사부대중 공동체 기획위원회가 설치되어 출·재가 대중이 모두 참여하는 산중좌담회와 산중법회를 운영중이다. 물론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어쨌든 선우도량을 중심으로 비구 중심9)의 종단개혁운동을 펼쳐 왔던 그가 사부대중에 의한 사찰운영을 적극 실험하고 있는 것은 큰 변화의 하나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98년 종단사태 이후 그의 종단 내 소임은 실상사 주지 외엔 따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단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거둔 것은 아니다.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문제제기와 우담바라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다. 얼마 전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토론회에서 그는 “깨달음이 현실과는 다른 영역에서 신비의 존재처럼 인식되어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깨달음의 문제를 현재의 삶과 통일될 수 있도록 정립해 내지 않는 한 불교수행 집단의 모순과 혼란과 무능력과 방황은 해결되지 않는다.”고 꼬집으면서 실천 없는 수행풍토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불교계의 이슈가 된 바 있는 ‘우담바라’에 대해서도 불법의 대의에서 벗어난 혹세무민에 불과하다고 공개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얼마 전 한 교계신문의 조사 결과 가장 존경받는 스님으로 꼽힐 정도로 교단 안팎에서 지대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4. 법륜 스님― “좌든 우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질”

울산 출신으로 경주에서 자란 법륜 스님은 일찍부터 포교활동에 원을 세워 불교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간 후 불교학생회 일에 뛰어들 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심취한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겠지만, 교육과 포교에 대한 열정은 그때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77년 경주에 영남불교 교육원을 설립하였고, 82년 조계종 포교사가 된 이래 포교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 L.A. 등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그는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후 82년부터 불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국사 포교당에서 인권문제 같은 것을 이야기하다 사찰로 모종의 압력이 들어와 못하게 됐고, 경주시내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던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사시예불을 모시고 있는데 불우한 상이군인 한 사람이 법당으로 들어왔다. 절에 중이 되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자여!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하신 좋은 안식처가 있으니 여기로 오십시오.”라고 써놓았던 홍보전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보낼 수 있을까, 다른 절을 소개해 줄까 궁리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는 헌신적으로 일하는 법사다’라는 아상이 깨어짐을 느꼈다고 한다.10)

그 일이 있은 후 83년부터 대불련 상임법사로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는 출가 전이었고, 최석호 법사로 알려져 있던 때다. 그 해 10.27 법난 명예회복운동을 벌이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84년 봉천동 소림선원에서 5명의 도반과 함께 결사정진을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초심자들이 읽는 《실천적 불교사상》이 이 해에 발간되었고, 보다 체계적인 불교교육을 위하여 중앙불교교육원(85년)을 설립한 이후 88년 홍제동에 정토포교원 개원을 시작으로 한국불교사회교육원(불교환경교육원의 전신), 민족불교학당, 한국불교사회연구소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아직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행적을 알아 가면서 대단히 경이로웠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다. 연구소 설립이나 월간지의 창간, 결사의 진행 등은 불교는 물론 당시 일반인들보다 몇 발 앞선 선구적인 일이었다. 개척자적 자세는 91년 그가 도문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출가승려의 길로 접어든 이후 더욱 활기를 더했다. 아직까지도 정식 비구계 수지 여부로 그에게 마땅찮은 시각을 보내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에 굴함 없이 승려 법륜으로서 더욱더 많은 일을 해냈다.

일찍이 93년 만일 결사를 시작하면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했고, 이즈음 이미 불교환경운동론을 정립하고 단체를 만들어 불교와 환경운동의 접목을 시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94년부터 인도 둥게스리에 불가촉 천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이래, 외국인 노동자 돕기·조선족 돕기, 스리랑카·태국 등 국제참여불교 단체·실천가들과의 교류, 북한 난민 돕기·몽골 빈민 돕기까지 국제활동은 해마다 그 폭이 넓어지고 있다. 많은 국제불교단체, 지도자들과 그는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미국과 독일 등 서구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 정도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높다.

‘정토회’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활동 펼쳐

법륜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토회다. 정토회는 환경교육원, JTS, 좋은 벗들과 같은 사회참여기구를 움직이는 모집단이자 공동체이다. 서울 서초동 정토회관에 가면 1백여 명의 상근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접할 수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속한 기구의 활동업무 외에 정토회관에서 생활과 수행을 함께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정토회 구성원들은 △일과 수행의 통일 △대중 주체의 공동체 실현 △전인류적, 전지구적 운동의 전개 △정보의 공유 △무보수 자원활동 등을 약속하고 공동체 생활의 청규를 지키며, 수행과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정토회는 농촌에 있는 생산공동체는 아니지만 사적 소유를 줄이고 사회적 회향을 중심에 두면서, 그 내적 동기와 룰을 불교신앙과 전통에 의지하고 있는 순수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 지향은 중생에 대한 헌신을 제일명제로 하는 이상적 인간형 ‘보살’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란 그의 시에 그의 생각하는 보살의 상이 그려져 있다.

…(전략)
다만 현재에 집중하라
깨어 있으라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
보살이라네

잘못한 줄 알아서 뉘우치고
틀린 줄 알아서 고치며
모르면 물어서 알아보는 사람
천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

날이면 날마다
언제 어디서나
이대로 좋은 사람
바라는 바 없는 사람

배고픈 이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이에게는 양약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감로수가 되고
길잃은 이에게는 길잡이가 되리니
괴로운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을 만든다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이
깨달은 사람, 보살
그가 사는 세상
정토(淨土)11)

정토회 같은 작은 공동체가 많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인류라는 최대의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법륜 스님의 공동체론이다. 그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든, 생산협동조합이든, 몬드라곤 형태의 공동체이든, 아니면 수행공동체이든, 유기농법 공동체든 일단은 공동체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그 안을 완전한 민주주의로, 그리고 정보가 완전히 열려 있는 사회로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이 모든 작은 공동체는 인류공동체라는 큰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공동체처럼 닫혀버리면 절대 근본적인 모순을 풀 수 없다. 공동체 안에서는 자기를 버리는데, 공동체 밖에서는 자기들의 이익을 보려고 하는 생각이 닫힌 생각을 낳는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인류 대안으로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12)

그는 국내에서 불교와 환경운동의 구체적 접목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철저히 연기적 시각에 기초해 주로 교육사업을 펼쳐 온 불교환경교육원은 국내 최고의 환경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10년 동안 이미 1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생태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국내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젊은 활동가들 가운데 이곳을 안 거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불교적 환경교육의 산파역을 담당해 왔다.

10년전부터 기아-질병-문명 퇴치 국제운동 펼쳐
국제활동도 활발하다. 91년 설립된 국제민간구호단체 (사)제이티에스는 부처님의 나라 인도를 향해 뛰어들어13) 93년 인도현지에 법인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천대받는 불가촉천민이 모여사는 비하르주 둥게스리 마을에 학교를 설립한 이후, 주변 15개 마을에 무료진료와 지역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중이다. 제이티에스는 미국과 중국에도 설립되어 있는데, 97년에 설립한 중국지부의 경우는 나진·선봉 탁아소 및 유치원 어린이 결연사업 등 북한주민과 난민을 위한 구호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연변지방에서 난민구호활동을 벌이던 이 단체 활동가 4인이 중국정부로부터 간첩혐의로 추방을 받는 등의 사건도 있었을 정도로 주목받으며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국제구제사업에 참여하는 그의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그는 “사는 게 기적인 사람들, 기아·질병·문맹 상태에 처한 12억의 최극빈층에겐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업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도 그들의 인연이라고 불자들이 지나치는 현실은 연기에 대한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아와 질병, 문맹 상태에 있는 극빈층 20%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법륜 스님의 경우 교단문제에 대해 일체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오랫동안 고수해 왔다. 98년 종단사태가 터졌을 때처럼 특정 사안에 대해 정토회 소속 일부 단체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특히 교단 내 분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해 왔다. 여기에는 비구계 수지 여부를 둘러싼 조계종단의 배타성이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오히려 이것보다는 법륜 스님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14) 결과적으로 교단문제에 거리를 둠으로써 대사회활동에 보다 충실할 수 있었고, 이것이 결국 정토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5. 두 사람의 공통적인 세계관은 ‘연기의 철저한 적용’

약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지만, 활동 스타일 역시 두 사람의 법명대로 독특하다. 실무자만 100여 명에 달하는 정토회를 이끌고 있는 법륜 스님은 굉장히 꼼꼼하고 치밀한 일처리, 왕성한 활동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도법 스님은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엔 적극성이 덜하고, 또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실무자들에게 맡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활동영역과 스타일 등 전반적인 평가에 있어 길을 제시하는 역이 도법 스님이었다면, 활동영역을 개척해 온 철두철미한 실천은 법륜 스님 몫이었던 것 같다.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사회참여를 이끌고 있는 두 사람이 한국불교에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두 사람은 모두 첫째, 연기(緣起)를 강조하여 ‘만 생명은 하나’임을 현실에서 줄기차게 적용하려 한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고통과 맞물려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둘째, 보살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 전통을 계승하여 보현행으로 보리를 이루려 하는 ‘이보현행오보리(以普賢行悟菩提)’에 철저하다. 이들에 있어 보현행은 깨달음 그 자체이자, 자신의 깨달음을 현실에 드러내는 징표이다.

셋째, 붓다의 정신에서 멀어진 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 도법 스님은 일찍이 90년 9월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을 통해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던 원로 스님이 이 정도는 내가 타고 다녀야 안 되겠나.” 하는 모습을 보며 교단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음을 통감했다고 밝힌 바 있고, 나아가 법륜 스님은 오늘의 교단은 불교도의 이상을 담보하는 그릇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요소인 면이 많다고 주장한다.

넷째, 잘못된 교단 전통에 대해서 극복하려 한다. 교단의 세속화와 물량주의에 대한 배격과 신랄한 비판은 물론이고 ‘호국불교’와 ‘선이’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적 상징도 예외 없이 비판의 시각을 거두지 않는다.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생존을 위한 일탈의 마취제였고, 선이 이를 치유하는 신비스런 영약으로서 부정적 측면이 있다 했을 때 두 사람의 활동은 공히 이 두 가지 전통의 부정적 측면에도 결별을 시도해 왔다.

6. 교단 현실 직시하고 개혁운동 포기 말아야

불교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대표적 인사에 대해 경험이 일천한 필자가 언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교단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을 전하는 차원에서라도 언급할 필요성이 있을 듯싶다. 처지의 차이 때문에 법륜 스님보다는 도법 스님에 더 많이 해당하는 주문사항이겠지만 설혹 근거 없고 악의적일지라도 그조차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도법 스님은 첫째, 교단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우담바라’ 소동이나, 간화선의 현재 풍토에 대한 도법 스님의 비판은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진 용기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잘못은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가이고,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이 대중공사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건강한 풍토 속에 풀려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근래 들어서 교단 내에서는 무엇이든지 비판을 해도 정치적 배경과 색채로 제단하는 경향이 심각해졌다. 누구는 아무개 상좌, 누구는 어떤 배경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만연하다. 도법 스님은 이러한 교단의 악폐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겠지만, 역으로 이제는 이러한 왜곡이 가능한 구조를 스스로부터 남김없이 던지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례로 날로 심해 가는 문중이기주의와 같은 구조적 병폐에서 도법 스님 스스로 더 자유로워져야 교단 내 공감은 배가될 것이다.

둘째, 교단개혁의 열망을 놓지 말아야 하며, 개혁에 대한 원론적인 언급을 넘어 이제는 현실적인 개선점을 찾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도법 스님은 ‘부처님다운 승가상’을 확립하는 데 매진하였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승가교육개혁에 집중하였던 것을 대중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승가의 정체성 확보가 쉽지 않았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교단이 사회와 밀접해지면서 사회의 지배적 가치―소비주의와 무한경쟁 같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는 교단에 더 깊이 투영되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주장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많은 이들이 따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단문제의 핵심을 ‘승가 개혁’이라고 봤다면 이에 걸맞는 현실적 대안들을 내어놓는 데 적극 나서는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타당한 접근법일 것이다. 승가개혁이 잘되지 않았다면, 여기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다. 은사와 문중이 보잘 것 없어서 당장의 생계와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스님들이 종단에는 그렇지 않은 스님들보다 많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이왕이면 큰 절의 주지직을 맡기 원하고, 주지로 재임하는 기간에 가급적이면 노후대비까지 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면 불사 위주의 사찰운영에 치우치는 등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개선할 것인가.

어떤 이는 “중노릇만 잘하면 걱정없다. 무능한 이들의 변명이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정도로 풀릴 문제가 아님은 자명하다. 사상과 정신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점차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의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는 정신과 사상의 강조가 공허해지는 것을, 그래서 결국 많은 대중들이 가치를 포기하고 생존의 문제에 얽매임을 역사와 현실은 이미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단의 현실을 점차적으로 개선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98년 99년 폭력사태에 대해서는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좀더 과감하게 자기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당시의 폭력사태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불교정보센터와의 최근 인터뷰인데, 이 인터뷰에서 도법 스님은 “98년과 99년 폭력사태는 종헌종법과 종단의 정체성 수호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본질이 다른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98년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을 정상화시킨 것과, 99년 사법부 판결에 대한 저항 역시 다른 차원이라고 말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98년과 99년은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해 그것이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이다. 최근의 해인사 선방 수좌들의 실상사 폭력에 대해서 21일 동안의 단식참회 기도는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필자에게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구조화된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은 비폭력을 견지할 수 있는 정신이다. 특히 상대방이 폭력을 가해 올 때 그때를 제대로 견뎌야만 비폭력의 정신과 기운은 확산된다. 도법 스님 역시 지난해 한 교계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며 이를 언급한 바 있다. 폭력의 순간에 비폭력의 정신을 견지하지 못했다면 이조차 자신의 문제로 여겨 털어놓고 ‘내 탓’임을 주장하는 것이 진정으로 폭력을 이기는 길일 것이다.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을 한층 성숙시켜 혹시 아직도 스님을 원망하고 있는 대중들이 있다면, 이들조차 진심으로 포용하기를 바란다.

넷째, 일부중이든 이부중이든 승가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 실상사에서 사부대중공의로 사찰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또 가장 모범적인 사찰로 일궈가기를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 운동과 더불어 승가운동의 늦춰졌던 고삐도 다시 당기는 게 필요하다. 현 교단의 상황에서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당분간 높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는 사부대중운동과 별도로 건강한 스님들이 결사와 공동체의 정신으로 교단을 바꿔가려는 노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참여불교재가연대는 교단자정센터라는 일을 하면서 마치 승려 전체에 대한 감시기구로 비치는 것을 적이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니 왜 우리 출가승려들이 재가자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라며, 새로운 승가운동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교단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은 누가 뭐래도 출가승단이다. 도법 스님은 승가운동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하여 근 10여 년 동안 교단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와 실천력을 보인 바 있지만 98년 이후부터 선우도량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필자는 도법 스님이 ‘이 시대의 부처님’인 출가사문의 공동체와 결사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과거 운동의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는 새 승가운동을 하루빨리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 건강한 재가운동과 건강한 출가운동은 수레의 양 바뀌와 같아야 하고, 두 바뀌가 제대로 굴러갈 때 교단은 진보한다.

7. 대중의 삶에 한 발 다가서는 공동체 운동을 기대하며

법륜 스님은 도법 스님과 교단 내 처지가 현격히 다르다. 83년 비상종단에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94년 종단개혁운동은 물론이고, 98년 종단사태 등 종단문제에 대해서는 소속단체 일부가 이름을 내건 것을 제외하곤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비구계 미수지 문제이지만, 이면에는 교단의 배타성이 깔려 있다.

얼마 전 법륜 스님을 모 사찰로 초청하여 수련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했는데, 사중 소임자 일부가 반대하여 장소를 바꾼 적이 있다. 특히 비구승 중심의 배타성이 강한 이들은 지나치게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솔직히 필자는 비구계를 단일계단에서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조계종 승적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승적을 만들고, 계첩을 나눠준 것이 교단 통제의 일환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활동에 호감을 가졌던 일부 스님들이 94년 개혁회의 출범 이후, 또 96년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던 때,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하여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극단적인 교단 내 비토세력의 존재로 결국 무산됐다.

물론 법륜 스님 본인도 이 문제를 풀려는 적극성이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종단이나 법륜 스님 본인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열쇠를 쥐고 있는 종단의 지도부는 이 문제를 대승적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법륜 스님의 활동성과를 종단 내로 수렴코자 나서야 할 것이다.

법륜 스님에게는 정토회라는 공동체를 한 단계 더 열린 문명운동, 문화운동, 대중운동의 공동체로 성숙시켜야 할 과제도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정토회가 대외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위상과 활동력은 구성원들의 높은 헌신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활동 초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천막에서 거주하는 것도 마다 않았고, 지금도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위해 개인 생활을 기꺼이 희생하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그룹이다. 그러나 일정하게 제 위상을 확보한 지금은 역으로 구성원들의 헌신성이 보다 폭 넓은 대중성 확보에 장애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소신처럼 하루 24시간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가정과 직장, 여가와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고, 또 ‘보살’의 길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 터에서 일상적인 생활불교운동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삶을 서원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평범한 소시민과 공동체는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냈을 때 정토회의 공동체 운동은 대중의 삶을 바꿔가는 문명 운동으로 승화될 터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많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머무르고 만다.

8. 끝맺으며―이젠 교단이 그들의 삶에 화답해야

두 사람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참여론자이면서 동시에 교단개혁가들이다. 이들의 활동에 열렬히 반응하는 것은 교단 밖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일등포교사라 해도 손색 없다. 이제 뒤늦게나마 그 반응은 교단 내로, 불자 대중에게로 메아리쳐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하고, 함께 나서는 사람들은 불자이거나 불교적 삶의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교단에서 출발했고, 한 사람은 아예 바깥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차이가 있지만 종착역은 같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고 있다.

이제 10여 년 이상 자신의 영역에서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그들의 삶에서 교단은 중생구제의 이론과 방법을 배워야 하고, 이를 교단 전체로 확산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단은 그들의 삶에 불교적 가치와 교단 내 지위를 부여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이해를 갖고, 근거 없이 비방하거나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비판하되 육성하고 장려하는 자세로 그들의 활동의 장점이 교단 내로 온전히 수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깨달음과 중생 구제가 둘이 아님을 실천해 온 두 사람의 삶과 실천에 이젠 교단이 화답해야 할 차례다.■

정웅기
동국대학교 농경제학과 졸업. 불교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참여불교 재가연대' 시민사회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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