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불교 체험] 티벳불교

1. 신비의 나라, 티베트

‘티베트(Tibet)’ 하면 개인에 따라 차이가 좀 나겠지만, 대개 설산 히말라야 너머에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신비로운 불교왕국으로서의 인상이 떠오를 것이다. 마치 잉크를 뿌려 놓은 것 같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는 눈부신 황금사원의 장엄함과 달라이 라마의 포타라 궁전의 호화스러움, 만년설에 덮인 높은 산봉우리 아래의 신비스런 사원과 그 속에서 명상에 잠겨 수행하는 라마승, 그리고 히말라야 산속 어딘가에 있다는 이상향 ‘샴발라’,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아낌 없이 독수리들에게 보시(布施)하는 괴기스런 천장(天葬)의 풍습,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과학적 상식을 무시하는 초능력자들, 그리고 한 영혼을 가지고 육체만 열댓 번씩 바꿔 태어나는 사람들의 설화 등등이…….

티베트가 이런 이미지로 고정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지형적인 문제를 먼저 꼽을 수 있다. 티베트 고원은 히말라야 너머에 있는 오지 중의 오지여서 바깥 세상의 인간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지의 땅을 동경하는 모험적인 인간들은 죽음을 담보로 하여 그 신비의 땅을 밟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대부분은 그 설역(雪域)고원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간혹 몇몇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탐험가나 순례자라는 이름의 이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사실을 주위에 자랑삼아 전하기도 하고 기행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의 흥미진진한 기행담에서부터 티베트의 신비화는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도의 문명을 가진 황금빛 왕국, 이상향 ‘샹그릴라의 실제 무대’라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티베트 고원은 한반도의 6배나 되는 광활한 곳이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식물 한계선인 해발 4천m을 넘는 곳에 있기에 공기 중의 산소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실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세계의 지붕’이니 남·북극에 이은 지구의 ‘제3의 극지(極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지형적 요인 말고도 티베트가 우리의 발길 너머 아주 먼 곳에 있게 했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사정이었을 것이다.

이는 이 나라가 수세기 동안 스스로 문을 닫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세기에는 종교왕국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위정자들의 왜곡된 조치 때문에, 금세기에는 중국에 합병된 이후 중국의 ‘죽(竹)의 장막’이란 정책에 의해서였다. 어느 요인을 꼽더라도 설역고원에 위치한 이 신비스런 나라는 ‘금단의 성역’이었다.

이렇게 외부세상과 고립된 이러한 불모지에서, 스스로를 ‘원숭이의 후예’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초과학적 신화를 갖고 있었던 한 민족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베(Bo?’족, 즉 티베트 민족이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공경하고 일체의 유정물을 사랑하면서 척박한 환경에 순응하기도, 때로는 개척하기도 하면서 자생적인 문화를 이룩해 왔다.

동양문화의 양대산맥인 인도와 중국이라는 문화적 선진국 사이에 위치한 관계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두 문화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런 이질적인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8세기에는 그들의 문자를 창안하여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신화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국력 또한 강대하여 토번(吐蕃)왕조는 남으로는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까지, 서북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동남으로는 사천성(四川省)과 운남성(雲南省)의 일부까지, 동북으로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까지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갖춘 당당한 국가로서 한때는 중앙아시아의 패자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세계가 그들을 일러 ‘베’족 대신에 ‘티베트’라고 부르는 것도 당시의 토번제국이 강대국이었을 때의 영향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토번이 중국어 발음인 투환(Tufan)에서 알타이어로, 다시 영어로 음사되는 과정에서 현재의 국명이 된 것이다. 마치 고려가 코리아로 변한 것처럼…….

그렇지만 9세기에 들어와서 토번왕국은 전통 종교인 ‘뵌포교(Bo촱 po)’와 전래 종교인 불교와의 오랜 갈등 속에서 분열되기 시작하여 4백 년이란 긴 세월의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이르러 ‘게룩파(黃帽派)’에 의해 법왕(法王)제도가 확립되면서 다시 국토는 불교왕국으로 통일되지만, 여러 여건으로 인하여 역대 ‘달라이 라마’ 정권은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대문에 빗장을 잠근 채 스스로 세계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가끔은 목숨을 담보로 한 외국탐험가나 순례자의 잠입기행기에 의해 비밀의 불교왕국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대개 안개 속에 가려진 채였다. 그리하여 티베트는 신비의 베일에 쌓인 불가사의한 나라의 이미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는 ‘죽의 장막’이 걷히자마자 1993년 3월,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땅을 딛게 되고 포타라 궁전의 황금지붕을 올려다 보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지만 짧은 체류 기간으로는 도저히 양이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로 만반의 준비를 하여 그해 여름 다시 보따리를 싸서 늦깎이 유학이지만 먼저 북경으로 가서 중앙미술대학(中央美術大學)에 적을 두고 티베트행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침 인연이 닿아서인지 모르지만 학교에 티베트족 화가, ‘꺼두어(格多)’ 교수가 연수차 와 있었기에 그에게서 틈틈이 티베트어 공부를 하면서 그곳의 유일한 대학인 티베트 대학으로 옮길 기회를 엿보았다. 그 뒤 방학을 이용하여 몇 번 그리움의 땅으로 달려가곤 하였지만 영혼에의 갈증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아서 다시 보따리를 싸 당구라 고개를 넘어 라싸로 들어갔다. 그곳 대학에서 1년간 ‘만다라(蔓茶羅)’를 연구할 시간을 갖게 되었으며 더불어 라싸에서 ‘수미산설(須彌山說)’의 모델이 되었던 우주적인 산, 카일라스(Kailash)산을 주제로 한 ‘목판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그런 시간들은 다시는 내 인생에서 돌아올 수 없는 축복받은 행복한 나날이었다.

2. 만다라의 도시, 라싸 산책

‘신의 땅’이란 뜻의 이 토번(吐蕃)왕국의 천년 도읍지는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티베트의 고원 치고는 비교적 낮은 해발 3,650m에 자리잡은 라싸는 북쪽으로는 단라 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고 남쪽은 온골리 산맥이 동서로 굽이친 가운데 남북 8km, 동서 60km의 장방형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를 기츄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강의 북쪽 기슭에는 ‘붉은 언덕’이라는 뜻의 말보리 언덕이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웅장한 포타라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사대문 안에는 귀족과 평민들의 집이, 밖에는 유목민의 천막이 처져 있고 동쪽에는 죠캉과 라모체 사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를 팔각형의 거리가 있고 광장과 상가가 늘어서 있다. 서쪽 교외로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별장인 노브링카가, 동북에는 세라 사원이, 서북쪽에는 드레풍 사원이, 그 옆에는 신탁(神託) 사원인 네충이 자리잡고 있다고 고지도와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구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중국화 이후에는 서쪽 거리만이 중국식으로 발전되어 시의 중심이 서쪽으로 쏠린 느낌을 주고 있을 뿐이다.

필자가 처음 라싸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는 아직 택시가 없었다. 탈것이라곤 꽃상여처럼 꾸민 아름답고, 달리면 종소리가 울리는 자전거 릭샤 뿐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택시와 높은 현대빌딩을 가진 인구 10만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그 중 60∼80%는 중국인이 점령하고 있는데 이 비율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들 중국인들은 주로 이웃 사천성에서 집단적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주로 상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다행히 동쪽 거리의 죠캉 사원 부근의 상가만은 옛 모습 그대로여서 어렵게 찾은 나그네의 섭섭함을 달래주고 있다.

대부분의 외지 순례객들은 새벽부터 수시로 오지만 라싸 주민들은 대개 저녁나절에 광장에 나가 죠캉 사원의 정문에서부터 왼쪽 즉 시계방향으로 ‘꼬라(廓, Kora)’ 즉 ‘성지-돌이’를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하루를 회향하는 것이다. 물론 뵌교도는 반대편으로 돈다. 안쪽의 원(圓)인 ‘낭꼴’은 사원 안의 석가모니상이 안치된 법당 주위로 한 바퀴 도는 것을 말하고 중간의 원인 ‘바꼴’은 사원 바깥 담 즉 팔각가를, 큰 원인 ‘링꼴’은 포타라까지를 포함하여 도는 행위를 말한다. 라싸는 이렇게 만다라의 배치도에 따라 순례를 위하여 설계된 계획도시로, 바로 만다라를 땅위에 실현한 도시인 것이다. ‘꼬라’는 힌두교의 ‘정화론’에서 기인하였다.

한 바퀴 돌면 사소한 카르마(Karma)가, 세 바퀴 돌면 중한 업장이 소멸된다고 인식되고 있다. 필자도 라싸에 있을 때 매일 출근하다시피 이 꼬라 대열에 들어 한 바퀴 죠캉 사원을 돌곤 하였는데 러쉬아워에는 가만히 있어도 인파에 밀려 저절로 한 바퀴 돌게 마련이다.

무릇 한 나라의 수도는 그 나라의 국운과 흥망성쇠를 같이 하게 마련이어서 라싸도 천혜의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외세의 침입 없이 잘 보존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시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처음은 몽고의 침입이었는데, 한때 정치적 지배는 받았지만 도리어 ‘샤캬파’의 파스파 국사의 영향력으로 원(元)나라 황실을 감화시켜 티베트 불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어부지리를 얻었다.

근대에 와서는 영국·인도 연합군에 의해 잠시 무릎을 꿇은 적도 있었고, 1951년 인민해방군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물론 이 상태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특히 라싸가 막대한 상처를 입은 것은, 1966년부터 시작된 사구(四舊)―즉 오래된 사상·풍속·문화·습관―를 타파하자는 ‘문화혁명’의 여파 때문인데 라싸 아니 전 티베트의 고대 유적이 초토화되었다. 홍위병이라는 붉은 완장을 찬 광기 어린 소년들 손에 전국토의 문화유적 특히 사원의 90%는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서장 자치구(西藏自治區)’라는 이름 하에 행정적 자치가 보장되고 출가도 허용되고 있고 무너진 사찰도 관광용으로나마 계속 복원중에 있지만 이미 천년 불교왕국의 수도 라싸는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3. 백악의 성, 포타라 궁전

기츄 평야 어디에서도 말보리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포타라는 당당하다. 사진기가 없었던 옛적에 금단의 불교성지 라싸에 잠입하였던 나그네에 의해 묘사된 포타라성의 모습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라싸로의 여행이 자유스러워진 요즘에는 그 느낌이 좀 희석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뇌리 속에 박혀 있는 포타라의 모습은 아직도 신비함 그대로이다. 포타라는 범어로 ‘포타’는 배, ‘라’는 항구를 뜻한다.

원래 인디스 강 어귀의 거리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기츄 강과 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관음성지 ‘보타낙가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포타라는 전체 모형이 범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미래의 어느 날, 천지가 다시 개벽할 때 피안의 니르바나로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 신비의 성 포타라는 토번왕조 당시 송첸감포에 의하여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그 후 왕국의 분열로 미완성의 답보상태로 내려오다, 개혁종단 게룩파의 달라이 제도가 확립되어 다시 강력한 통일국가가 되면서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다시 증축되기 시작, 지금의 모습과 같은 웅장한 모습으로 평원 위에 솟아오르게 되었다.

포타라는 외관상 정부청사로 쓰였던 아랫부분의 백궁(白宮)과 사원으로 쓰이는 위의 홍궁(紅宮)으로 나눠지는데 총 13층에, 높이 110m, 동서 360m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미로 같은 통로에 연결된 크고 작은 방이 1,000개가 넘는다. 그리고 지하에는 전쟁시 사용하는 우물·식량창고·무기고 등이 있다고 한다.

자, 그럼 우리 모두 함께 신비의 궁전으로 들어가보자. 수많은 영혼들이 몸에 착 달라붙을 것 같은 분위기의 크고 작은 방들과 금방이라도 죽음의 야마대왕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컴컴한 미로 같은 회랑을 따라가면 수많은 방마다 불보살의 황금상들과 파드마삼바바·미라래파·역대 달라이 라마·총카파·송첸감포왕의 소상이 칠보로 치장되어, 어느 것이나 ‘하다’라는 비단 예포(禮布) 속에 묻혀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옥상 근처의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영묘탑(靈廟塔)은 괴기스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데, 영묘탑 안에는 미이라로 변한 그들 자신이 금칠을 한 채 앉아 있다. 가장 최근에 안장된, 1934년에 만들었다는 13대 달라이의 영묘탑은 황금 590kg나 들었다고 한다.

옥상에 가장 인상 깊은 곳이 한 곳 있었다. 바로 달라이 14세의 거실이었는데 그가 쓰던 집기가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 제니스 라디오와 쌍안경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영화화되었던 하러(H. Harrer)의 여행기 《티베트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에서 어린 달라이가 옥상에서 수시로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던 것이었는데, 빈방에 덩그러이 놓여 있어 ‘주인 없음’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4.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 죠캉 사원(大昭寺)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티베트 불교도의 마음의 고향은 장엄한 포타라 궁전이 아니고 오히려 죠캉 사원이라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심 깊은 티베트인들은 이생에서의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성지 중의 성지인 수미산 즉 캉린포체(카일라스 산)를 순례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은 너무나도 멀고 험난한 고행길이기에 대신 죠캉 사원의 참배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들의 목적은 우선 죠캉을 둘러싸고 있는 팔각가의 환상로(環狀路)를 ‘꼬라’ 하는 것으로 이생에서의 죄업을 정화한 다음에 깨끗해진 몸과 마음으로 죠캉으로 들어가 영험하다는 설화가 가득한 석가상 앞에 오체투지로 엎드리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불국토였던 티베트에는 본존인 석가불상이 그리 흔치 않다. 물론 불상은 수없이 많지만 거의가 미륵·아미타·약사여래·대일여래 등과 불교를 전래시킨 파드마삼바바, 황교파의 창시자 총카파, 밀교성자인 밀라래파, 그리고 역대 달라이·판첸 라마 등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티베트인들은 특별히 죠캉 사원의 ‘초보석가불상’을 사랑한다.

죠캉의 건립은 토번왕조의 중흥조인 송첸감포왕 때인 639∼649년 사이였다. 통일왕국을 이룩한 송첸왕은 이웃 네팔에서 브리쿠티(赤尊)공주를 맞아들여 그녀의 원찰(願刹)로서 지금의 죠캉 자리에 있던 호수를 메워 네팔이 있는 서쪽을 향해 사원을 세우고 그녀가 가지고 온 등신대의 금동 약쇼바불(禪定佛)을 안치하였다.

또한 그는 당과의 화친조건으로 당태종의 왕녀 문성(文成)공주를 맞아들여 죠캉에서 북쪽으로 길 하나 건너에 라모체(小昭寺) 사원을 건립하여 그녀가 가지고 온 석가상을 안치하였는데, 이 불상은 인도에서 당으로 건너왔다는 설화가 얽혀 있는 영험 있다고 전해지는, 흔히 12세 때의 세존의 모습을 불상화한 ‘초보’라고 부르는 불상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위의 두 사원의 건립과 석가상에 대하여 국내 일부 여행기에 오류가 있는데, 이는 후일 중국의 외적 침입시의 약탈을 두려워한 티베트인들이 두 불상을 바꿔 놓은 것에서 기인한다는 설과 문성의 뒤를 이은 금성(金城)공주에 의해 바꿔졌다는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죠캉은 문성공주가 아니라 네팔 공주에 의해 건립되었고 초보불상은 당의 문성공주가 가져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1966년, 문화혁명 당시 라모체는 홍위병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죠캉과 초보상은 화를 면하여 지금까지 티베트인의 귀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죠캉은 밖에서 보면 서쪽으로 난 정문을 중심으로 환상로를 따라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성벽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팔각형의 문 앞 넓은 자연석이 깔려 있는 광장이다.

1천여 년의 신심이 살아 숨쉬는 이 광장은 그 긴 세월 속에서 수많은 순례객의 오체투지에 의해 닳고 닳아서 윤기가 돌아 거울같이 반짝인다. 그것은 마치 중생의 카르마가 내비치는 ‘돌거울’ 즉 ‘업경(業鏡)’같이 보인다. 그 업경 바위 위에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일단의 참배객들이 간격을 유지한 채, 자벌레 같은 굴신운동을 계속하고 있고, 몇몇 외국관광객은 예의란 눈꼽만치도 없는 태도로 그들의 코앞에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한편 일단의 걸인들은 그들에게 달라붙어 “구찌구찌”를 외쳐대며 구걸을 하고 있는 판을 벌이고 있다.

정문 양옆으로 늘어선 노점상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바깥으로는 광장의 순례로를 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니통’을 빙글빙글 돌리며 입으로 “옴 마니 파드메 훔”을 외우며 광장을 돌고 있다. 넋이 나갈 정도로 혼잡스런 이런 광경은 늘 이 광장을 살아 있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하여 한 폭의 살아 움직이는 ‘야단법석도(野壇法席圖)’를 연출한다.

죠캉 사원에서 열리는 유명한 법회는 티베트 달력으로 정초에 열리는 ‘묀람’ 축제와 4월달에 열리는 ‘샤카다와’ 축제를 꼽을 수 있다. ‘묀람’은 기원이란 뜻으로 국태민안·법왕의 장수·불교의 융성·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법회로서 정초부터 21일간 계속되는데 황교파의 시조 ‘총카파’에 의해 시작되었다. 법왕 달라이 라마가 포타라에 주석할 때만 해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법왕 자신이 직접 죠캉을 한 바퀴 도는 꼬라를 한 다음 죠캉의 대법당에서 시작하는 법회는 라싸의 삼대 불교사원, 간덴·세라·드레풍의 전 승려와 전국의 중요 승려들이 참가하는 최대규모의 축제였다고 하는데 중국의 점령 후 한동안 이 행사는 금지되었다가 요즘은 다시 부활되고 있다. 티베트의 불탄일은 4월 15일이다. 4월은 이외에도 성도·열반일이 모두 모여 있어 ‘샤카다와’인 4월 한 달은 ‘불살생의 달’로 지정되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들뜬다.

5. 티베트 불교의 특성

근래에 물질문명의 자성론으로 ‘뉴 에이지’ 운동이 서구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지나친 물질화에 따른 부작용인 인간성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그들은 동양적인 가치기준이었던 사상과 종교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 그 대안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라는 바람, 일종의 신드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무시 못할 속도로 서구문명의 진원지에서 불고 있다. 속칭 라마교(Ramanism)라고 잘못 불리우는 티베트 불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소승’이나 ‘남·북방’의 분류법에 속하는 기존의 불교와는 다른, 신비적이며 원초적인 특색을 갖고 있어서 서구인들이 열광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나라 잃은 망명객인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과 동정심도 한 몫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된 요인은 라마승의 독특한 수행법과 다각적인 포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근래 구미의 여러 도시에는 수많은 티베트식 사원들이 새로 건립되고 그들의 수행법이 퍼져나가고 있으며 티베트를 소재로 한 문화 인푸라들이 서구인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면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불교를 대·소승으로 가르는 대승권의 전통적인, 어쩌면 아전인수격에 가까운 방법은 이제는 서구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큰 수레’라는 글자에 빠져 마치 우월한 위치에 있는 양 아만심만 키우며 종단적으로 돈·명예·감투싸움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대승권 불교는 유구한 전통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선(禪)불교라는 훌륭한 유산을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하고 세계불교사의 조류에서 뒤쳐질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만큼 ‘티베트 붐’은 거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서구인들은 불교를 셋으로 나눈다. 범어로 ‘바즈라야나(Vajrayana) 즉 탄트릭 부디즘(Tantric Buddhism) 한역하면 ‘금강승(金剛乘)’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전문 학자들 이외에는 조금은 생소하지만 바로 이 단어가 티베트 불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불경의 번역에서도 구별되어 소·대승의 그것을 경전(經典), 수트라(Su?ra)로 번역하는 것에 대비하여 밀교는 경궤(經軌), 탄트라(Tantra)라고 칭하고 있다. 바즈라야나는 한역권에서는 대승의 한 줄기로 인식하여 밀교(密敎)로 인식되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완전히 대·소승과 어깨를 같이 하고 있다.

이제 서구인들은 ‘부디즘’ 하면, 바로 달라이 라마와 칼마파로 연상되는 티베트 불교, 즉 ‘바즈라야나’가 우선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방면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식 선불교의 발음인 ‘젠(禪, Zen)’을 떠올릴 것이다. 벌써 한 세기 전에 일본의 불교학자가 구미에 선을 보급시킨 결과로 얻은 성과이다. 그러므로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인도 후기 불교의 계승자인 티베트 불교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향인 인도에서 불교는 중세기 이슬람의 인도대륙 침입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대승과 후기밀교가 그 전성기를 교대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불교교단은 생존을 위해 히말라야를 넘는 비상탈출구를 찾아내어 티베트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의 최대 수입처인 중국으로 가는 전통적인 기존의 불교 전파로―파미르 고원을 넘는 실크로드―가 이미 이슬람에 의해 차단되었기에 중국 대륙으로의 왕래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불교학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이나 비크라마실라 대학의 학자들은 이 ‘비상구’를 통하여 설역고원으로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탄트라 불교(Tantrism)을 신봉하는 밀교학승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자연스레 이 신사조였던 탄트리즘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書)》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파드마삼바바와 산타라크시타 등과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를 연 아티샤 같은 밀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티베트인이 직접 인도로 내려가 직수입해 온 경우도 있었는데, 토미삼보다·린첸창포·마르파 등도 그들 중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받아들인 불교는 우리 대승권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후기 밀교적인 색채가 강한 불교였던 것이다. 물론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대승불교의 꽃을 만개한 중국에 의한 티베트로의 역수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은 미미하였다.

반대로 중국은 인도의 후기불교를 실크로드를 경유하는 루트로 직접 수입하지는 못하였지만 8세기, 인도의 밀교승들인 금강지(金剛智)나 불공(不空)이 직접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대륙에 밀교의 씨앗을 심은 후에 다시 티베트를 점령한 원·청나라에 의해 다시 간접적인 티베트의 밀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목민이었던 원제국은 당시 원시적인 샤마니즘 정도만 있었고 그럴 듯한 종교가 없었기에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 밀교의 고승들에 의해 오히려 감화되어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전폭적인 장려에 의해 만개되면서 국교화(國敎化)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이민족인 원·청나라 황실이 본토민을 다스리려는 정책적인 이용가치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여간 결과적으로 티베트 불교는 원·청제국이라는 광대한 땅 구석구석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지금 중국 대륙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속칭 황교(黃敎) 또는 장전불교(藏轉佛敎)가 바로 티베트 불교적인 종파이다.

그리고 당·송을 거치며 만개되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불교는 모두 한데 묶여져서 이 황교에 대비되는 이름인 청교(靑敎)로 지칭되며 겨우 명맥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원·청의 무력을 등에 업은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서 우리의 불교도 티베트 밀교적 요소를 많이 함유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말을 바꿔보면, 고향인 인도에도 없고 대·소승권 어디에도 없는 인도 후기 불교의 진수가 바로 티베트 불교의 본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세계가 히말라야 뒤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설역고원의 불교에 관심을 갖는 첫째 이유이다.

둘째로 티베트 불교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불교 전래 이전의 토착신앙인 뵌포교(Bo촱po)와의 융합에 있다. 불교는 법륜이 굴러가면서 부딪혔던 모든 민족들의 토착신앙을 불교 안으로 끌어들인 종교사적으로 유일한 종교라고 일컬어진다. 상극하지 않고 상생한 포용력 있는 종교였다. 해동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설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족, 즉 티베트 민족은 우리 한민족과 여러 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 ‘몽고반점’을 갖고 태어난 같은 ‘몽고로이드’ 혈통이며 주어·동사의 어순이 같은 알타이어계에 해당되고 그리고 같은 민속·무속신앙을 갖고 있다. 어떤 샤마니즘적 행위는 우리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여 사전지식 없었던 필자를 놀라게 할 때도 많았다. 뵌포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다 보니 무속적인 냄새가 너무 진하게 배어 버린 점 또한 티베트 불교의 특색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셋째로는 대승불교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대승의 진정한 구경처는 자기 해탈에 있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에 있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아가 해탈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이 진정한 대승불교도가 걸어야 할 보살의 길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대승불교가 탄생지 인도와 개화지 중국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한 현재 시점에서 유일한 ‘대승’의 종주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우리 불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이 문제에 대하여 먼저 ‘티베트 불교사’를 연구한 일본의 한 불교학자가 지적한 대승불교의 문제점을 곱씹어보자.

티베트 불교가 중국·한국·일본의 불교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다. 동양 3국의 불교가 ‘성불’이라는 말로 자기 완성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비하여 티베트 불교는 무한히 이타(利他)를 바라며 일체지자(一切知者)로의 길로 나아갈 뿐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이타행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완성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자기 완성을 위해서도 이타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어, 마침내 ‘타인을 구원하는 불교로서의 보살도가 아닌 스스로가 구원받는 불교’로 무의식중에 변질되어서 대승이 어느 새 소승적인 자세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위의 지적대로 대승의 순수성에 대하여 티베트 불교는 그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출가나 수행의 목적이 혼자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원력은 한 영혼을 가지고 수없이 윤회하면서 전생에서 못 다한 원력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칼마파 린포체는 벌써 17번이나, 달라이 라마는 14번이나, 판첸 라마는 11번이나 계속 한 영혼으로, 그 의식을 유전자 속에 간직한 채 몸만 바꾸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5. 티베트 불교의 종파들

설역고원에 뿌리를 내린 불교는 크게는 ‘4대종파’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출현한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닝마파·카규파·샤카파·게룩파’가 된다. 여기서 먼저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파’라는 단어의 뜻은 한자의 ‘파(派)’의 의미가 아니고 티베트어로 ‘사람 또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정식으로 하면 ‘닝마파 종파’라고 해야 되지만 이미 통상적으로 그렇게 혼용되어 왔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그냥 ‘닝마파’라는 표현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첫번째로 ‘닝마파’가 등장한다. 8세기 히말라야를 넘어 설역고원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 일명 연화생(蓮花生)에 의해 시작된 종파이다. 바로 《티베트사자의 서(書)》의 저자로 알려진 유명한 초능력자로서 생몰연대를 비롯한 모든 인적사항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가장 오래된 종파이기에 고파(古派)라고도, 또는 붉은 옷과 모자를 쓰기에 홍교(紅敎) 또는 홍모파(紅帽派)라고도 한다. 탄트리즘적 성향이 강한 종파로 현란한 의식과 매장경전(埋藏經典)에 의한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종파의 승려들은 대개 대처(帶妻)를 하고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현재까지도 히말라야권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라싸 근교의 몇 개 사원이 이 종파에 속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11세기에는 ‘카규파’가 등장한다. 인도로 직접 내려가 밀교수행과 경전 번역을 한 역경사 마르파에 의해 창립되어 미라래파에 의해 널리 퍼진 밀교 종파이다. ‘하얀 옷의 거사’라는 이름의 이 2대조사 미라래파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십만송(十萬頌)》이란 유명한 시집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로 역시 신통력이 뛰어난 초능력자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전기에 의하면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점철된 고행자로서 그려지고 있다. 카일라스 산, 즉 캉린포체 산의 연고권을 놓고 뵌포교 사제와 겨룬 카일라스 산에서의 한판 진검승부는 민간에 회자되는 유명한 설화이다. 이 종파는 초기에는 고행 위주의 두타행에 중점을 두었고 장발에 흰옷을 입었기에 백교(白敎)라고도 한다. 현재는 이 종파도 역시 게룩파와 비슷한 색깔의 가사를 걸치고 삭발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시 부인과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며 밀교의 전통대로 철저한 사도상승(師徒相承)을 전통으로 삼는다.

이 종파는 밀라래파의 제자 감보파에 의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춘 후에 ‘샹파와 다포’로 갈라졌는데, 후에 ‘다포파’는 다시 ‘4줄기 8갈래’로 분파되었다. 그 중에 ‘칼마파’와 ‘파주파’가 출현하였다. 후에 14세기에 이르러 ‘파주파’는 원나라의 괴뢰정권이었던 샤카 왕조를 무력으로 뒤집고는 파주 왕조를 세워 제정일치의 법왕제도를 만들어 전 티베트 고원을 2백 년 동안 다스렸다. 이는 근대의 달라이 라마 제도와 같은 법왕제도의 효시였다.

12세기에 ‘칼마파’는 칼마두숨켄파에 의해 ‘다포파’에서 분파되어 나왔다. 그가 바로 제1대 칼마파 린포체로 추존된 인물이다. 그는 라싸 근교에 추푸 사원을 건립하여 수행하다가 열반에 즈음하여 환생을 명확히 예언하였는데 정말 그의 말대로 그의 영혼을 가진 전생자(轉生者)가 발견되어 제2대 추푸 사원의 법주로 모셔졌다. 바로 ‘튤쿠(Trulku)’, 즉 활불(活佛)제도의 시작이었다. 리빙 붓다(Living Budddha)의 효시였다. 이 제2대 칼마파는 원 세조 쿠비라이 칸에게 초빙되어 검은 모자를 하사받았기에 그 후로 ‘흑모파(黑帽派)’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다.

이 신비스러운 활불제도는 후에 ‘게룩파’에 의해 모방되어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그리고 레팅 린포체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칼마 카규파’는 법왕제와 활불제를 처음 확립한 종파이다. 현재 국내외에서 칼마파는 많은 분파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게룩파 다음으로 중요한 종파이다. 특히 유럽에 많은 지부를 갖고 있어서 게룩파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비중 때문에 얼마 전 추푸 사원을 탈출하여 중국의 감시망을 뚫고 한겨울에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한 제17대 칼마파 린포체는 비록 그가 15세에 지나지 않는 소년이지만 그의 행동거지 하나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망명이 받아들여지면 그는 인도 내의 또 다른 해외포교의 거점인 인도 동북부 시킴(Sikim)의 룸텍 사원에서 망명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로 11세기에는 ‘샤카파’가 등장한다. 내륙 깊숙한 샤카라는 지방에서 ‘곤’ 씨족에 의해 창건된 종파인데 문수·관음·금강을 의미하는 홍·백·흑색을 주된 문양색(紋樣色)으로 사용하기에 일명 화교(花敎)라고도 부른다. 13세기 원나라를 등에 업고 샤카 정권을 세워 설역고원을 통치하였다. 이 종파는 원나라의 황실을 움직여 ‘샤카파’가 원나라의 국교가 되게 하였으며 전 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마치 중세의 요새같이 생긴 샤카 사원을 중심으로 남부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데 역시 대처를 하고 있다. 특히 이 사원은 고색창연한 불교문화재를 많이 보존하고 있어서 순례길에 꼭 들려보아야 할 의미 깊은 곳이다.
네번째, 마지막으로 14세기에 ‘게룩파’가 부상한다. 토번제국의 마지막 왕인 랑다르마 암살사건 이후 티베트는 긴 암흑기에 들어갔는데 그 말기에 방글라데쉬 출신의 유명한 밀교승인 아티샤(Atisha)가 설역고원으로 넘어와 전법륜의 기치를 들어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시대를 열었다.

이 아티샤의 법을 이은 제자에 의해 ‘카담파’가 라싸 근교에서 세워졌는데, 이를 토대로 총카파가 기존의 종파들의 폐단을 개혁하고 계율을 정비하여 승려들의 독신을 의무화하여 비구승단을 만들며 티베트 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를 처음에는 ‘신(新)카담파’라고 하다가 후에 ‘게룩파’로 이름을 바꿨다. 곧 티베트 불교사에서 밀교가 아닌 대승불교적인 현교(顯敎)가 출현한 것이었다.

청해성 시닝(西寧)의 타르 사원 근처에서 태어난 총카파는 현재 이 종파의 교조로 추앙되어 법당에 석가상과 나란히 앉아 있을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다. 황색의 옷과 마치 로마병사의 투구 같은 노란 모자를 쓰기에 황교(黃敎) 또는 황모파(黃帽派)라고도 부른다. 이 게룩파는 후에 칼마파를 모방하여 달라이 라마 제도를 확립하여 정교를 양손에 쥐고 토번제국 멸망 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국토를 통일하여 라싸의 포타라궁을 중심으로 5백 년 간 설역고원을 다스렸으며 밀교 일변도의 역대 티베트 불교를 현밀양교(顯密兩敎)의 형평성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중국에 의해 1950년 국토를 점령당한 뒤에 게룩파는 강력했던 통치권을 잃어버리고 법왕인 14대 달라이 라마는 1959년 무력항쟁의 실패 후에 인도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1966년부터의 ‘문화혁명’으로 모든 사원들은 거의 파괴되고 승려들은 환속당하였으나 1984년부터의 ‘햇빛정책’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사원들도 복구되기 시작하여 게룩파는 다시 어느 정도 소생하였다. 현재 티베트 제2의 도시인 타시룬포 사원의 법주인 제11대 판첸 라마를 중심으로 게룩파는 아직도 최대 종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마 전 칼마파의 망명으로 동요된 티베트 사회의 새 바람을 넣고자 새로 옹립되었다고 전하는 제7대 ‘레팅 린포체(현재 4세)도 이 파에 속한다.

6. ‘게룩파’의 6대사원

이렇듯 5백 년 간이나 설역고원의 주인노릇을 하였던, 최대 종파인 ‘게룩파’가 전국의 중요 사찰을 휘하에 두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 대표되는 사원으로는 속칭 ‘6대사원’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법왕 달라이 라마의 집무실인 포타라와 왕실의 직영 원찰(願刹)인 죠캉이나 라모체 사원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들은 청해성에 타르 사원·라브랑스 사원, 제2의 도시 시가체에 타시룬포 사원 그리고 나머지 셋은 모두 라싸에 모여 있다. 교조 총카파 자신의 의해 창건된 간덴 사원과 그의 제자에 의해 세워진 드레풍, 세라가 바로 그 사원들이다. 위의 3사원은 게룩파의 종합수도장, 즉 총림(叢林)이다. 수행과 종교와 문화활동 그리고 승려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집단이든지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잘 무장된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종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티베트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유서 깊은 대학이 있는 이들 사원을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다. 이들 ‘6대사원’은 그 성격이 대동소이하기에 그 중 하나만 골라 참배하여도 될 것이기에, ‘해동의 나그네’의 발길을 때마침 열리는 ‘쉐툰제’의 전통가면놀이 축제의 시작마당인 드레풍 사원으로 옮겨 보도록 한다.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km지점, 풀 한 포기 없는 험준한 바위산에 둘러싸인 완만한 원추형의 경사면에 티베트 최대의 사원이자 전통교육기관이 있는 드레풍 사원이 자리잡고 있다. 언덕을 따라 위로 단계적으로 흰벽의 건축물이 가득 들어차 있어 마치 멀리서 보면 ‘쌀을 쌓아 놓은 것(積米)’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416년 총카파의 제자 잠양초제에 의해 창건된 이 사원은 붉은 벽의 거대한 중앙법당과 흰 벽의 수많은 건물군으로 나누어 산재돼 있는데 대개의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찰처럼, 일주문이나 산 이름, 절 이름이 적힌 현판이 없다. 먼저 ‘간덴 궁전’이 나타난다.

1530년 제2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세워진 이 궁전은 제5대 달라이가 포타라궁을 중건하여 국내를 통일하기까지 2대에서 5대까지의 달라이 라마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문화혁명 당시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아직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채 상당부분 폐허로 남아 있어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사원의 제일 높은 곳에 이르면 또 하나의 건물군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아파(Ngapa, 學堂)이다. 티베트 불교의 양대 종풍의 하나인 밀교(密敎) 즉 탄트라를 닦는 대학이다. 이 학당은 늘 시끄러운 탄트라 의식을 거행하고 있어서 온갖 악기가 동원된 교성곡 같은 웅장한 염불 소리가 사원 전체를 울리곤 한다. 우리말의 ‘딴따라’란 말의 어원이 탄트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어떤 이의 가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분위기다.

하여간, 그 소리에 화답하듯 문 앞에서 늘어져 잠자던, 무려 100여 마리 넘는 온갖 종류의 개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서 공포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건물의 주신은 ‘죽음의 신’인 황소 모양의 검은 야만타카(Yamantaka)여서 더욱 그러한지 모르겠다. 후일 다른 여행자들이 말하는 드레풍의 인상이 ‘아, 그 개 많은, 무서운 곳!’이란 표현이 이해가 갈 만한 분위기다. 사람에게서 “이 개새끼”라는 욕도, 구박도, 더구나 잡아먹힐 염려도 없는 행복한 개떼들의 안내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다 왼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면 넓은 광장이 나타나고 검은 돌로 잘 포장된 광장을 통과하면 3층의 거대한 중앙법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건물이 백색인 데 반해 유독 법당만은 붉은 색과 황금지붕으로 구별된다.

법당으로 들어가면 180개나 되는 붉고, 굵은 기둥이 솟아 있고, 많은 불보살의 소상이 모셔져 있고, 수많은 ‘탕카’가 걸려 있다. 미로 같은 길을 따라 2층, 3층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미륵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눈으로 나그네를 내려다 본다. 대법당을 나와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내려오다 보면 세 학당의 중심 건물과 요사채가 나타난다. 이곳은 밀교 이외의 현교(顯敎) 도량이다. 승려들은 출신지 별로 3개의 학당에 배치되어 수행한다.

가장 큰 로셀링 학당을 비롯하여 고망·더양 학당에는 예전에는 7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기초 과정인 교학부 공부를 했을 때도 있었다 한다. 이른바 우리 사찰의 전통교육인 불교전문강원에 해당되는 곳이다. 과목으로는 인명(因明)·반야(般若)·중관(中觀)·계율(戒律)·구사론(俱舍論) 등의 경·율·론 삼장(三藏)과 의례(儀禮)를 13년간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선택적으로 시륜학(時輪學)·의학·밀교학·제전학(祭典學) 등을 공부하여 최종학위인 박사학위에 해당하는‘게셰학위(Geshe)’를 취득한다.

문화혁명 당시 이 유서 깊은 사원은 많은 박해를 받아 전당은 파괴되고 승려는 강제로 환속을 강요받았으나 근래에는 다시 출가가 허용되어 지금은 4개 학당에 500명의 승려가 전통방식대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이 학당의 학습방법 중에서 우리와 다른 것이 있어 이채로웠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논강법(論講法) 또는 선문답(禪門答)과의 또 다른 차이였다. 우리가 책상머리에서 얌전하게 토론하는 것에 반해 이곳의 논강은 마치 싸움을 연상케 하는 격렬한 기세로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이를 간략히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장소는 야외에 마련된 정원 같은 법원(法院)이라 부르는 곳, 나무 밑에 앉고, 서고,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진리에 대해 토론한다. 상좌에 앉은 승려에게 상대방은 가사를 허리에 두른 채 염주를 팔에 두르고 왼발을 들었다 놓고 손바닥을 치면서 벽력 같은 큰 소리로 질문을 퍼부으면 상대방은 이에 즉시 답변을 해야 한다. 만약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불합격이 되고 재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세가 격렬하고 소리 또한 커 마치 싸움을 하는 듯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이 한꺼번에 하는 것이니 마치 떼거리 싸움판 같은 분위기다. 때마침 오늘은 전국민이 ‘숄’, 즉 일종의 야구르트를 먹는 거국적인 축제인 ‘쉐툰제(雪頓祭)’의 개막일이어서 가람 안은 인산인해였다. 제2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의 전통으로 노브링카 공원에서의 전통놀이 마당 이전에 개막식은 이곳에서 하게 된다. 거의 모든 라싸의 시민이 운집하여 그 동안 말아 놓았던 탕카를 꺼내 거는 ‘괘불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50m나 되는 커다란 탱화를 하늘 높이 달아놓고 질탕하게 마시고 노는 행복한 날이다. 온 천하에 관음보살의 자비가 가득한 날이다.

7. 티베트의 현재 그리고 미래

14대 달라이 라마의 부재중에 국내 민중의 구심점은 판첸 라마가 대신하고 있는데, 현 판첸은 11대로서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이지만 현지민들의 그에 대한 지지도는 높은 편이다. 판첸과 달라이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지만 다 같은 게룩파의 ‘전생론(轉生論)’에 의한 활불(活佛), ‘린포체’라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달라이가 관음보살의, 판첸이 아미타불의 화신이라는 점과, 또한 전자는 라싸의, 후자는 제2의 도시 시가체의 주인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미묘한 상황 아래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어린 판첸 라마는 어용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티베트 국내의 실정은 이렇다. 현 달라이 라마의 사진과 이전의 국기(國旗)―눈사자(雪獅子)가 법륜을 받들고 서 있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다―는 공공장소에서는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국경에서도 그의 사진은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밀반입된 그의 사진은 시골에서는 아직도 불보살과 동격으로 대접받아 불단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도시에서는 판첸 10, 11대의 사진과 다른 종파의 린포체의 사진을 대신 걸어놓고 있다.

무신론의 사회주의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뒤 일관되게 추진한 정책은 티베트 불교의 와해작전이었는데, 특히 역대 달라이 라마와 그 정부의 온갖 부정적인 면을 확대시켜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세뇌정책이 수십 년 동안 실시된 결과 공산화 이후 세대인 일부 젊은이들은 실제로 공산당의 선전을 그대로 믿기 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어 뜻있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들에게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는 그저 혼자만 살자고 도망간 민족의 배반자라는 것이다. 외국인이라도 이런 젊은이들에게 달라이 라마를 우호적으로 말하면 당장 고발되어 추방조치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지식계급 속에서 그런 민족의 배신자가 더 많다는 사실은 마치 일제 하의 우리 실정을 방불하게 하는 대목이어서 티베트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경찰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게 달라이 라마 추종자를 색출해 내는 사람이 바로 그들 동족이란 사실이다. 그들은 한때 그들의 생명과도 같았던 불교유산보다도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혜택과 입신양명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보기에는 아직은 대다수의 국민들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고 있지만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 가리란 보장은 없다. 아무튼 외국인이라도 정치적인 발언은 사석에서라도,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라도,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필자도 친한 친구라고 믿어서 흉금을 터놓았다가 낭패를 본 일이 몇 번 있다.

티베트 민족의 자유를 돕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인도 다람살라에 티베트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본토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국내에도 티베트를 사랑하는 친(親) 다람살라 편의 학자나 스님들 그리고 피끓는 투사들은 많지만 정작 본토의 문제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가끔 친 다람살라 편이 아니란 이유 하나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람마다 해야 할 각기의 몫이 있다. 누군가는 본토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문화·종교·유적·민속·무속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연구를 해야 할 분야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그들을 생각한다.

설역고원에 핀 오색 설연화(雪蓮花), 티베트여. 그대 가슴에 연꽃 같은 진리의 보석꽃이 피어나기를! “옴 마니 파드메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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